16강. 수념처-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방법 (20110903)
오늘 초보자들이 이리 있어서 오늘은 좀 어려운 부분인데 알아듣겠나 싶네. 조금 되도록이면 쉽게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이 부분은 굉장히 어려운 부분인 걸 감안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으십시오. 알겠죠? 괴로운 느낌보다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들이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오늘은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모든 현상이 마음에서 일어날 때는 반드시 몸에서 느낌이 일어납니다.
제 말이 아니고 부처님 말씀입니다.
'웨다나 사모사라나 삽바 담마(vedana samosaraṇā sabba dhamma)'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현상들이 마음에서 일어날 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는 마음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모든 것들을 인식하는 것은 마음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 몸으로 인식하는 건 아니죠. 마음으로 인식할 때는 그 인식하는 것에는 느낌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고,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죽은 자와 삼매에 든 자를 제외하고는.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느낌으로써 살아가게 된다 하는 얘기가 됩니다.
그마만큼 몸에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고,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면 번뇌에 휩싸여서 살아가는 그런 것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얘기할 거는 그중에서도 더 어려운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들입니다. 통상적으로 즐거운 느낌을 얘기하면 여러분들은 그냥 몸으로 맛있는 거 먹으면 즐겁고, 뭐 어디 놀러 가서 춤추고 그러면 즐겁고 그런 것들만 즐거운 거라고 얘기하는데 그것뿐만 아니라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즐거운 현상들이 있습니다.
기쁨이라든지 고요함이라든지 즐거움이라든지, 부처님이 나를 확 휘감는다든지 이런 것들도 다 즐거움의 느낌에 포함이 됩니다. 그런 것들을 다 통틀어서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 즐거운 느낌을 완전하게 극복하려면 '아나함, 불환자'가 됐을 때 가능하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불환자는 어떤 분입니까? 수한이, 불환자가 어떤 분이라?
성인의 네 단계는 알지? 뭐 뭐야? (수행자 대답) 세 번째가 불환자이지? 아나함 이니까.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어? 네가 알고 있는 것만 얘기해봐. (수행자 대답) 음. 집착은 남아있다, 그럼 아나함도 남아있고, 사다함도 남아있고 다 집착은 남아있겠지,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그런데 어떤 집착이 남아있고 어떤 집착이 떨어졌느냐 경전상에서 얘기하는 그런 것 말고.
간단하게 표현을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듣고 있는 이 법에 대해서 확실하게 마음이 요동하지 않게 됐을 때, 그래서 다른 어떤 것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길이라든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구하지 않게 됐을 때는 그걸 보통 '수다원'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지나면 모든 것들이 다 즐겁습니다. 아무리 누가 뭐라 해도 자기는 즐거워. 그리고 싫은 것, 좋은 것, 모든 것들을 보더라도 그런 모든 것들이 즐거운 것으로서 느껴지게 됩니다. 즐거운 것으로 느껴진다는 건 세속적인 즐거움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그마만큼 요동치지 않는 상태가 돼 있어서, 항상 고요한 상태에서 그것이 행복감으로써 다가와지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남이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할 것 같으면 그 소리를 '아, 이걸 내가 알아차릴 대상으로 있어 얼마나 좋으냐', 그것을 대상으로 해서 계속적으로 그 소리를 알아차림으로 해서 자기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그런 행복감이나 즐거움이 계속 남아있게 되는 것들입니다.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어떤 것이든 대상에 대해서 항상 행복한 것들이 가득 차 있는 것들을 두 번째 '일래과'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지금 행복한 느낌조차도 완전히 끊어버려야 되거든. 수행에서 행복한 느낌이나 고요한 느낌들, 이런 여러 가지 느낌들도 다 버려버려야 되는 것들인데, 그런 것까지도 완전히 버려버린 상태들을 '불환과'라고 보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세속적인 욕망은 전혀 없는 상태. 그렇다 해가지고 세속에 안 사는 건 아니죠! 세속에 살고 있든 아니면 출가를 했든 세속적인 욕망은 전혀 없는 상태를 '불환과'라고 보면 됩니다.
아라한과는 그것을 뛰어넘어 버리죠. 어떠한 번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환과는 세속적인 번뇌는 없어도, 비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은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스님한테 공양을 보시를 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공양 보시를 할 때 '아! 내가 이 공양 보시함으로 해서 내 일이 좀 잘되기를' 하는 그런 마음들을 가진다고.
그런데 불환자는 그런 염을 가집니다. 어떤 염을 가집니까? '내가 아라한이 되기를. 아라한에 이르기를' 물질적인 것에 대해 집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거보다 더 내 불환과보다도 더 뛰어난 것에 대해서 욕망은 가지고 있죠.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비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은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세속적인 욕망들은 이미 떠나고 없습니다.
'아라한'은 그것조차도 없는 상태. 그러니까 보시를 하더라도 그냥 보시하는 그 상태를 그대로 알아차림만 있게 되는 그런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게 인제 여러분들이 구분하기 쉬운 「성인의 네 가지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초보자들을 생각하면 쉽게 해야 되는데, '우까 장자'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우까 장자라고 하는 분이 부처님을 찾아뵈었을 때, 부처님이 "저분은 불환과에 이르렀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부처님, 뭘 보고 우까 장자가 불환과에 이르렀다고 얘기를 합니까?" 하고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한 얘기가 있습니다. 우까 장자에게는 여덟 가지 특징이 있다.
쉽게 말하면 불환과에 이른 사람은 여덟 가지 특징이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부처님을 부처님이라고 알아보는 거라. 처음 봤는데도.
여러분들은 그런 능력이 됩니까? 아마 이 세상에 부처님이 나타나도 저분이 부처님인지를 아마 못 알아볼 거라. 스님들이 가끔 시험을 치루는 게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경지에까지 도달했나 하는 걸 도달했는가를 보려고 할 것 같으면 그 경지에 이르른 스님들을 갖다가 주변에 있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답이나 같이 수행을 해보고 이러고 나서 저분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나 하고 얘기해 봐라 그럽니다. 그럼 그걸 정확하게 예측해 놓으면 적어도 너는 그 사람의 경지에는 이르렀다 하고 얘기를 하기도 하고 그러죠.
부처님뿐 아니라 저분이 예류과에 이르렀는지 불환과에 이르렀는지 아니면 아예 그런 것에 이르지 못했는지조차도 구분하지 못할 것 같으면 안 되고, 불환과는 적어도 그것들을 낱낱이 구분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가 불환과다' 하고 얘기 하지는 않겠죠. 세속적인 욕망이 없으니까. 또한 '네가 불환과다' 하고 얘기하는 부분은 아닙니다.
그리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하게 안다는 거라. 부처님을 부처님으로써 알게 되는 것. 그게 인제 첫 번째 특징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두 번째 특징이 뭐냐면 오계를 완전하게 지킵니다.
지켜야지 해서 지키는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지켜가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되고, 어떤 경우에도 나쁜 행위들을 하지 않게 되고, 어떤 경우에도 마음을 나쁜 곳으로 향하도록 기울이지를 않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감각적인 욕망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성적인 것들도 이미 떠나버립니다. 아무리 부인이 있고 뭐 어쩌고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이미 떠나버리게 됩니다. 그게 두 번째 특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세 번째는 뭐냐면 집착하는 것이 없으니까 대부분의 것을 줘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것이라고 가지고 있는 게 변변찮은 게 없어. 모든 것들을 다 버려버립니다. 그게 설혹 재산뿐 아니라 자기의 부인이라 하더라도 그 부인이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인이 행복한 조건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부인조차도 줘버리는 상태가 되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특징이 뭐냐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을 쉽게 말하면 선원을 짓는데 전부 다 기부를 한다든지, 아니면 부처님의 말씀이 잘 전해지고 바른 부처님 법이 널리 퍼지는데 이롭게하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다 보시해 버리는, 그래서 실제적으로 불환과에 이르른 사람은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쉽게 말하면 내가 도인이다 하면서 가진 거 잔뜩 가지고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전부 가짜라고 보면 됩니다.
그다음이 뭐냐면 다섯 번째, 출가한 스님은 어떤 경우에도 존경을 하게 됩니다.
내가 설혹 불환과에 이른 재가자라고 하더라도 막 출가한 스님은 진짜 마음을 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출가했다는 그것만으로도. 여러분들 그렇게 되겠어요?
태국 같은 경우에는 부모가 출가할 때 같이 옵니다. 우리 하고는 다릅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반드시 부모님의 동의를 반드시 구해야만 출가가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동의를 구했으니까 부모님들이 출가하는 자리에 참석을 합니다. 그래서 가사, 이걸 부모님들이 출가하려고 하는 아들에게 줍니다. 그럼 아들이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삼배를 이렇게 하죠.
그러고 나서 가사를 아들이 탁 받고 나면, 아직 출가를 한 상태도 아닌데도 가사를 받았다는 이름만으로도 부모님들이 그 출가할려고 하는 자식에게 삼배를 합니다.
승복을 입었다는, 가사를 입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존경의 대상으로써 삼아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승속을 여러분들이 엄격하게 구분하라는 얘기가 아니고, 그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내 것이라고 내세우질 않게 되는, 그 정도로 겸손한 마음들을 가지고 있게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뭐냐면 여섯 번째, 법문을 부처님이 하든지 아니면 스님들이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아주 귀담아 듣습니다.
그 법문 내용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아. 그런데 여러분들은 아마 법문 내용 놓치는 것은 둘째치고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해서 그것만 딱 취합니다. 그러죠? 그래서 어떨 때는 나도 가끔씩 우리 홈페이지 법문 올라온 걸 보고 어, 내가 저렇게 얘길 안 했는데 왜 저렇게 올라갔지 이러는 경우가 있어요. 그걸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어떻게 돼요? 자기의 방식으로 이해를 해버리는 거라.
자기의 방식이라는 것들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온전하게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 전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이해하고 그다음에 기억하고 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예를 들어서 그 앞 주에 토요일 날 스님이 법문이 없었죠? 그럼 스님이 법문이 없는 때는 자기가 그 스님의 법문을 대신하는 거라. '언제 때 스님이 한 법문입니다' 하면서 자기가 잘잘잘잘 외우는데 그거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잘 해내게 되는 거라.
법문을 들을 때도 여러분들 그렇게 들어야 됩니다.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듣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꾸 들으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일곱 번째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면 누가, 자기가 따르는 부처님이든 아니면 스님이라 하더라도 그분을 칭찬한다고 하더라도 우쭐대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냥 누가 "참 부처님 훌륭하십니다." "그 스님 훌륭하십니다." 해도 "예, 그렇지요." 그렇게는 할지언정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올라가는 일들은 하지를 않는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대부분 그렇지는 않을 거라. 남편이 상사면 자기는 중사 정도는 되지? 우쭐해지지 않는 특징을 가졌다는 거라.
그다음에 여덟 번째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다섯 가지 족쇄', '오하 분결'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보통 이 여덟 번째를 불환과의 특징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데, 「우까 경」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부처님이 자세하게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좀 수월하죠!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렇게 되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어쨌든 이런 불환과에 이르러야만이 즐거운 느낌을 완전하게 극복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마만큼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러면 불환과에 이르지 않으면 즐거운 느낌은 즐거운 느낌으로 그냥 받아들이고 살 수밖에 없나? 그래요? 그렇지 않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적어도 수행을 해나가면서 현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하는 능력만 길러지면 즐거운 느낌을 극복해 나갑니다.
호흡을 하다가 보면 호흡은 물질적인 현상이고 호흡을 알아차리는 건 정신적인 현상이다, 쭈욱 그렇게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일어나는 현상들은 즉각 즉각 자꾸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즐거운 느낌을 알기만 하지 즐거운 느낌을 느끼지는 않게되는, 그렇게 진행이 되다 보면, 그러다 보면 즐거운 느낌을 극복해 나가게 됩니다.
물론 완전하게 극복한 건 아닙니다. 잠재적인 성향은 남아있습니다. 그리하더라도 즐거운 느낌으로 인해서 내가 즐거움에 빠지지는 않게끔 됩니다.
자! 그게 이 즐거운 느낌에 대한 대체적인 설명입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려고 할 것 같으면 기본적으로 해야 되는 것이 일어나는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 현상들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고,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진다는 사실을 자꾸 알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항상하지 않고 머무르지도 않고 사라지게 돼있다, 또 다른 조건으로 인해서 또 다른 것들이 일어난다 하는 것들을.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에 분명하게 멈추는 것들이 분명하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끔 되게 됩니다.
그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들입니다.
어떤 것이든, 즐거운 것들이 있어도 어떻게 됩니까? 맛있다 해도 맛있는 것이 한없이 맛있지를 않습니다. 꼭 같이 맛있는 걸 씹었는데도 맛있다가도 점점 맛이 변합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돼요? 그 맛은 탁 사라져버립니다. 멈춰버린다는 겁니다.
새로운 맛있는 것이 들어오기 전에는 멈춰버리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또 새로운 맛있는 것이 먹어진다는 사실을 이렇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꾸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지게 될 때 그래서 그 사라지는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참 빠르게 변하는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끔 됐을 때,
그래서 그 즐거운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결코 즐거운 느낌만이 아니다, 변하니까 그것은 참 괴로운 것이구나 하는 사실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럴 때 이 즐거운 느낌을 극복해 나가게 됩니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돼 있다는 지혜의 단계에 이르게 됐을 때 즐거운 느낌은 극복해 나가게 됩니다.
자! 그러면 교재들을 한번 천천히 봅시다.
즐거운 느낌은 보통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첫 번째가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들이죠.
그다음 두 번째가 수행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들입니다.
그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되고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은 즐거운 느낌의 축에도 들지 않는다고 자꾸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을 거 같으면 세속적인 즐거움을 안 찾게 됩니다.
가끔씩 그런 것들을 봅니다. 여기 계속적으로 수행을 오는 사람들을 보면 누가 “술 먹으러 가자” 이래도 잘 안 가. 누가 “어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해도 거기 가더라도 크게 뭐 맛있는지를 그리 잘 모릅니다.
왜 그럴까? 이미 수행에서의 즐거움을 알기 때문에! 그것이 더 세속적인 즐거움보다 크다는 걸 알거든. 그래서 여러분들은 우선 떨쳐내야 되는 것은 세속적인 즐거운 것들, 그것들을 먼저 자꾸 떨쳐내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사회생활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것에 대해서 '즐거운 느낌으로 받아들이지 마라. 즐겁다고만 알아라.'
그리고 수행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 기쁨의 현상이든 이런 것들도 무상하다고 자꾸 알아야 됩니다. 무상하지 않는 건 없죠! 그런데도 우리는 수행에서 즐거운 느낌들을 가지면 그것을 계속 가지려고 합니다. “스님! 스님! 내가 너무 기뻐갖고, 막 수행이 잘되니까 참 기뻐갖고 한참 동안 그 기쁨이 몸을 휩쌌습니다.” “부처님이 앞에 광명을 환하게 나투시고 있는 게 반나절이나 그렇게 그모습 그대로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지가 그걸 잡고 있었으면서.
초가 여기 타고 있으면 초의 기름하고 초 심지하고 불꽃이 있습니다. 저거는 당연히 초 심지나 초 기름이 서서히 사라지고 나면 불꽃도 꺼져버립니다. 그런데 불꽃만 영원하기를 바라는 거라. 이미 저거는 사라지고 점점 더 없어지는데.
그럼 내 눈에는 불꽃만 영원한 것 같이 잡고 있는 것밖에 안 되는 거라. 이미 저거는 사라져버렸으니까.
정신적인 기쁨, 정신적인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그것도 조건 따라서, 심지하고 기름이라고 하는 조건 따라서 생겨난 것뿐이고, 그 조건이 사라지니까 사라진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정신적인 즐거움은 즐거움으로써 아는 것이 아니고, 즐거운 느낌으로써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속적인 것들과 꼭 마찬가지의 현상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그걸 반드시 명심을 해야 됩니다.
"수카 웨다나가 생겨날 때는 '수카 웨다나'의 참 성품을 알아라" 하는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 성품은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돼있다는 것, 변하게 돼있다는 것,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게 원래의 참 성품입니다. 그것을 알아라는 거라. 행복한 느낌이 일어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게 되고 '나'라고 하는 아만심이 생겨나가게끔 됩니다. 그럴 때는 그 즐거운 느낌에 빠져버려서 알아차리는 걸 놓쳐버리게 되는 거라. 맛있는 거 먹을 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맛있다고 허겁지겁 먹을 때는 사띠가 없습니다. 꼭 그와 같습니다.
사띠를 놓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도 모르게 혼침·망상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혼침·망상에 빠지면은 당연히 사띠가 점점 더 약해져 버립니다. 그럼 알아차리는 것이 약해져서 대상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게 됩니다.
수행에서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날 때는 그와 같이 됩니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났다, 아니면 기쁨의 현상들이 일어났다, 그것에 대해서 그 현상도 분명하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로써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지 그 기쁨을 붙잡고 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조금 전에 얘기했던 그와 같이 되는 거라.
'나'라고 하는 아만심이 생겨나게 되고, '내가 알았다'는 거라. '내가 기쁘다'는 거라, 그럼 변하고 있는 걸 붙잡고 있으니까 어떻게 돼요? 사띠는 분명하게 이루어지질 않습니다. 자기는 사띠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은 실제적으로는 사띠하고 있는 게 아니고 붙잡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수카 웨다나에 빠져버리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으로 빠지게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스님이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리는 방법, 즐거운 느낌을 알아차리는 방법 두 가지로 설명을 하는 겁니다.
무덤덤한 느낌은 즐거움의 느낌에 속하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에 붙잡혀 있을 경우에는 무덤덤한 느낌으로 빠져버리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게 이해를 하고 한번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에 대한 부분은 빼고 수행상의 즐거운 느낌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수행자가 열심히 노력하여서 고통의 느낌을 잘 극복하여 더욱 정진해 나아가면 수행자의 삼매가 성장되어 고통스러운 느낌들의 현상들은 사라지고 기쁨이나, 즐거움, 고요함 등의 현상들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몸과 마음이 쾌적해지고 유연해지며, 몸과 마음을 움직이고 작용시키기에 적절해질 것이다.]
그래서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앉아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고통스러운 느낌을 받질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즐거운 것들을 누리게끔 됩니다.
「마하 삿짜까 숫따」라고 하는 경전이 있는데 ,그 경전은 어떤 경전이냐면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의 과정을 설명해 놓은 경전입니다.
부처님이 처음에 수행을 하다가 선정에 듭니다. 제1선정에 들고, 두 번째 선정에 들고, 그렇게 계속적으로 나아가서 4선정까지 자유자재로 들게 되고, 그러고 나서 삼명, 천안통·숙명통·누진통 이라고 하는 것까지도 다 인제 꿰뚫어 알게끔 돼서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른 과정을 설명해 놓은 경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의 구절에다가 반드시 설명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제 1선정에 들었는데 부처님은 "그 안에서 생겨난 기쁨이나 즐거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1선정에 들면 아주 대상이 뚜렷해집니다.
그래서 생겨나는 걸 즉각 즉각적으로 알아차립니다.
2선정으로 넘어가면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기쁨의 현상들이 있습니다.
또 3선정으로 가면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즐거움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 선정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일어나는 현상들이 있는데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았다" 고,
1선정에서도 나의 마음은 그 즐거운 느낌들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2선정에서도 똑같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3선정, 4선정 그뿐 아니라 삼명 쉽게 말하면 숙명통, 나의 과거 전생부터 해서 여러 가지 태어나고 죽고 하는 모습들을 확연하게 알게 되는 그 신통이 열렸을 때도 더더욱 그 즐거운 느낌에 나의 마음은 사로잡히지 않았다. 천안통이 생겼을 때도 모든 것들을 다 볼 수 있는 능력이 돼도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았다. 누진통이 됐을 때도 그러고.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그 대상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됩니다.
대상에 사로잡혀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은 계발은 돼나갑니다. 기쁨의 현상이 있을 거 같으면 기쁨의 현상이 더욱더 커져 버립니다. 아주 강하게 그 현상들이 다가와집니다. 즐거움이 있을 거 같으면 그런 정신적인 즐거움이 아주 강하게 아주 크게 일어나 집니다. 그거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는 거라.
신통이 있어가지고 멀리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 그 소리를 점점 더 크고 맑고 깨끗하게 아주 정확하게 들려. 점점 더 크게. 그런데 그게 사라지지를 않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귀가 먹어 버리는 거라.
그거는 마음이 그 대상에 사로잡혀서 그러는 거라.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사로잡혀 버리면 즐거운 느낌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더더구나 잠재적인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려면 절대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어떤 것이든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지게 돼 있다는 거라.
그래서 즐거운 느낌은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되느냐면 괴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왜? 아주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괴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수행에서 즐거운 느낌은 어떤 경우도 집착할 대상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얽매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라한이 될 때까지.
불환과에 있어서도 그게 일어나진 것들을 붙잡으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 이전의 상태는 더더구나 더 많이 생겨납니다. 그리하더라도 빨리 마음을 여기에 붙잡히지 말아야 된다 하고, 사로잡히지 말아야 된다 하고 마음을 굳게 먹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수행이 잘 돼나갑니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면 '일어남' '사라짐' 하는 것이 분명하게 알아집니다. 그것도 그냥 움직임이 분명한 것이 아니고 불러올 때 여러 가지 느낌들 또 꺼질 때 여러 가지 느낌들 그대로 그냥 알아차려 나가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게 멍해져 버려.
분명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건 아는데도 느낌들이 봐졌던 게 좀 있다가 보니까 그냥 움직임만 알고 있는 거라. '일어남' 일어나면은 어떤 느낌들이 변하는 것들이 없어. 사라질 때도 꼭 마찬가지라.
왜 그렇게 바뀌어버렸을까? 마음이 붙잡혀버리니까. 자기는 인식을 못했지만은 그 느낌들이 좋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딱 붙잡히는 아주 짧은 순간에 그 현상들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면은 마음은 깨어있으니까 움직임만 알아가는 거라. 배가 불러오는 것만 알고 꺼지는 것만 알게 되고, 한 시간 동안 내내 그러면서 자기는 수행 잘했다 하고 털고 일어나는 거라.
그렇게 붙잡히면 안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현상에서 변하는 특성들을 알 수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붙잡혔다고 보면 됩니다.
그것이 변하고 빨리 사라지고 일어나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아, 내가 붙잡히지 않고 바르게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을 하면 됩니다.
그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는 달콤함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기쁨이나 즐거움이 일어나니까. 절대 그 달콤함에 매여버리면 안 됩니다. 경전에도 그런 게 있죠? 달콤함에 매여버리면 지가 언제 죽는지도 모릅니다. 꼭 개미가 꿀 속에 달콤함을 취하다가 지는 달콤함을 알지만 지가 죽는 줄은 모르는 거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자와 같다.
자! 그랬는데 그럼 수행에서만 즐거운 느낌들이, 그런 것들이 있을까?
일상적으로 여러분들이 하는 것은 즐거운 느낌이 없어요? 남에게 베푸는 보시, 그다음에 자애의 마음들을 넓게 펼쳐나가는 것들, 그다음에 자기 딴에는 지혜롭게 하는 여러 가지 행동들, 이런 것들엔 즐거운 느낌들이 없어요?
그런데 그런 느낌들도 수행과 마찬가지로 참 알아차리기 힘듭니다.
왜? 내가 보시할 것 같으면 내 스스로 기분 좋고 만족하니까, 내가 자애의 마음을 한량없이 펼칠 것 같으면 행복하고 괴로움 없는 상태가 되니까 스스로 좋거든. 그러니까 그 즐거운 느낌에 매여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라.
위험성이 그런 것들입니다.
즐거움이나 기쁨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변해야 됩니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상태로 있다 할 것 같으면 '아! 내가 붙잡혀 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이 내가 하는 여러 가지 행위라고 하더라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선한 공덕을 쌓기 위한 행위에도 그렇다는 거라. 반드시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그리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거기에 붙잡히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안 붙잡힐까? 수행이 아니라도 여러분들은 일반적으로 선한 일들을 하고 있다. 계율 잘 지키고, 남에게 베풀려는 마음들을 가지고, 또 항상 마음속에서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안 붙잡힐까?
감정! 감정을 가지고 하면 안 됩니다.
두 번째 '나'라고 하는 것들을 개입시키지 말 것.
이 두 가지를 결합시키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선한 공덕을 하는 것이 여러 가지들이 있는데 보시를 하든, 자애의 행위를 하든, 아니면 여러 가지 바른 행위들을 하든 그런 것들은 오롯이 여러분들 것이 돼버립니다. '내가 마음을 내서 당신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 '내가 마음을 내서 당신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겠다.' 그런 생각조차도 아예 하지 말아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얼마나 뛰어나다고 내가 뭘 이끌어 주겠다고 지옥중생에 있는 사람들을 빼주듯이 빼준다고 생각을 해? 그건 말도 안 되는, 나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들이 할 일은 지금 내가 나의 견해를 가지지 않고 그 상황에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뿐입니다.
남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낸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할 일은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가져야 될 때는 '내가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 사람이 행복해지든 안 해지든 내가 할 일은 오직 그 마음을 내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리고 감정! 감정은 어떤 경우든지 집착하고 밀쳐내게끔 됩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뭘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쉽게 말하면 오늘 불현듯이 퍼뜩 생각나서 뭘 한다든지, 아니면 오늘 바람이 많이 부니까 ‘아! 저기 나가서 금정산 가서 바람 좀 확 쐬었으면 좋겠다’ 물론 금정산 가서 바람을 쐬면 아주 기분 좋고 즐겁습니다. 감정을 일으키는 것들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마라.
이 두 가지만 안 하면 적어도 즐거운 느낌에 일상적으로 하는 데서 빠지지는 않게끔 됩니다.
자! 그 뒤에 한번 봅시다.
[육체적인 편안한 느낌이 뚜렷하면 꿰뚫어 보듯이 주의 깊게 육체적인 편안함과 정신적인 편안함을 각각 알아차림하며 관찰해야 한다.]
육체적인 편안함이 뚜렷하면 육체적인 편안함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정신적인 편안함이 뚜렷하면 정신적인 편안함을 분명하게 뚜렷하게 알아차려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명심을 해야 될 것은 그 편안함과 편안함 사이에는 반드시 멈추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의 편안한 느낌이 일어났으면 반드시 사라진 후에 새로운 편안한 느낌이 일어난다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편안함이 계속 지속된다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일어났으면 사라지게 되어있고, 또 다른 편안함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들 마음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들 육체적인 것도 마찬가집니다. 즐거운 느낌 육체적인 느낌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가 일어나서 사라지고 나서 또 다른 것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정신적인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와 같이 자꾸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해야 만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지혜의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을 때 그 편안함도 영원하지 않고 일어나서 사라지는 현상의 연속임을 보아 알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수행을 해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오늘은 어렵게 하지를 못했는데 이해는 다 하겠죠? 다시 한번 간추려 보겠습니다.
즐거운 느낌을 극복하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것.
먼저 내가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게 세속적인 즐거움이든 아니면 수행 상에서 즐거움이든, 아니면 바른 행위를 하면서 오는 즐거움이든 그 즐거움을 내가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뭐 알아야 그걸 극복하든지 뭘 하든지 할 거 아니라. 그래서 분명하게 '어! 내가 즐거움을 느끼고 있네' 하고 분명하게 알아라.
그러고 나서 그걸 알고 나서는 반드시 마음에서는, 그걸 알고 나서 내 마음이 어떤가를 분명하게 알아차려 보십시오. 내가 내 욕심으로 인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건지, 아니면 뭔가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 때문에 그 즐거움을 느끼는 건지, 그 즐거움을 경험할 때 내 마음이 어떻는가 하는 걸 알아차려보라는 거라.
그렇게 알아차리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 알아차리는 것들이 반드시 변화된다고 알도록 해야 됩니다. 일어났으면 사라지고 일어났으면 사라졌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무상한 것으로, 그 즐거운 느낌들은 항상 하지 않고, 지속되지 않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서 반드시 알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점점 더 강해지면 그것이 굉장히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은 그 즐거운 느낌들은 그것이 어떤 즐거운 느낌이든 '아! 이것은 참 괴로운 것이구나' 괴로운 느낌으로써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얘기했듯이 즐거운 느낌은 괴로운 것으로 알아라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은 적어도 즐거운 느낌은 극복을 해나가게 됩니다. 잠재적인 것까지는 극복을 못하더라도 지금 현재 일어난 즐거운 느낌은 극복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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