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념처경 법문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13강. 신념처- 마라나눗사띠(죽음에 대한 명상)

담마마-마까 2019. 5. 28. 23:46

https://youtu.be/Z3ZmEjVLmoY

13강. 신념처- 마라나눗사띠_죽음에 대한 명상 (20110723)

 

오늘은 대념처경 중에서 몸에 대한 관찰, 그중에서도 죽고 나서 몸이 변해가는 성질에 대한 것들을 관찰하는 법에 대한 겁니다. 보통 그걸 불교에서 줄여가지고 '마라나눗사띠(maraṇānussati)' 그럽니다.

 

가정을 한번 해봅시다. '영혼이 있다' 가정을 해봅시다.

그래서 영혼이 죽지 않고 불멸한다, 인간이 죽고 나서 그 영혼이 살아서 존재했다가 새로운 존재에게 옮겨가는 것을 가정을 해보면, 언제 그러면 영혼이 옮겨갈까? 인간으로 옮겨간다고 예를 칩시다. 사람이 임신하는 순간에 영혼이 옮겨가는 건가? 아니면 난자와 정자가 결합했을 때 옮겨가는 건가? 아니면 부모들이 아이를 갖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때 옮겨가는 건가? 아니면 의학적으로 얘기하면 인간으로서 인정을 받는 게 보통 임신하고 나서 4개월 지났을 때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럼 그 4개월 때 영혼이 옮겨가는 건가? 아니면 인간이 태어날 때 영혼이 옮겨가는 건가? 어떤 게 맞는 거라?

 

또 예를 들면 인간이 죽고 나서 언제 영혼은 빠져나가는 건가?

죽자마자 빠져나가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하곤 관계없이 심장이 탁 정지했을 때 빠져나가는 거라? 아니면 심장이 정지하고 나서 한참 뒤에 뇌 활동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 빠져나가는 건가? 아니면 죽고 나서 한참 지나고 나서 세포들이 더 이상 생성이 안 되고 세포들이 다 죽게 되었을 때 영혼이 빠져나가는 건가? 어느 시점에서 빠져나가는 거라? 영혼이 두 번 빠져나갈 순 없는 거 아니라. 참 말하기 힘들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죠!

 

그걸 영혼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반대 논리를 펼 때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과연 존재하는 것일 것 같으면 증명이 가능해야 되는데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언제 영혼이 간다고, 다음 몸을 받아 간다고 얘기할 수 있을 때 그걸 확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런 것들을 부처님은 '시비의 거리가 되는 것들이다' 해서 '무기(無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알고 있기로는 '영혼이라는 특정한 개체가 존재를 한다' 고는 보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어쨌든 사람이 죽고 나면 보통 일반적으로 죽음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호흡이 끊어졌을 때, 그다음에 인식하는 기능이 완전히 없어져버렸을 때, 또 느끼지 못하게 됐을 때, 이런 것들을 가지고 죽음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쉽게 예를 들면 감정이 없어져버리는 상태가 되는 걸 죽음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죽죠! 언제가 될진 몰라도 언젠가는 죽습니다. 모든 존재들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존재들은, 모든 것들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고, 살아있는 생명은 누구든지 어느 것이든지 무상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것뿐 아니라 "나도 확실히 죽을 것이다" 하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나의 생명이든 다른 사람의 생명이든 죽음으로써 끝이 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죽고 나서 다음 생을 받는 것은 다른 존재인 것이지 내 하고는 별개의 것이기 때문에 이 생명은 죽으면 끝이 난다. 그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그런 것들을 회상하면서 '죽음' '죽음' '죽음'하고 되뇌어서 그것을 사유를 하게 됩니다.

보통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방법이 그런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막연하게 하다 보니까 문제점이 뭐냐면,

보통 세 가지 문제가 생겨납니다.

첫 번째는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잘 일으키지 못한다는 거라.

여러분들 죽는다는 생각 일으킵니까? 잘 못 일으키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겁니다. 죽는다는 상상을 하긴 하는데 실제 내가 죽음이라고 하는 것들을 잘 일으키지는 못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문제점이 뭐냐면 '죽음' '죽음' 하면서 그것을 사유를 하면서 생기는 문제점이 죽음을 관찰하면서 일어나는 생각입니다. 틀림없이 죽음에 대해서 관찰하다 보면 일어나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정적인 것들이 많죠! 그래서 오히려 나쁜 업을 쌓도록 하는 것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그다음에 죽음에 대해서 사유를 할 때 생기는 안 좋은 게 뭐냐면 죽음을 관찰하면서 감정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감정이 복받치니까 울기도 하고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죽음을 관찰할 때 분명하게 이해를 하지 않고 관찰을 하면 일어나기 쉬운 부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죽음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그 방식을 따라서 관찰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부왕인 숫도다나 왕이 이 왕자에게 죽음에 대한 것을 안 보여주려고 무던하게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죽은 사람을 보게 되고, 병든 사람도 보게 되고, 늙어가는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그런 죽음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탁 부딪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죽음을 넘어서기 위해서 고행하는 수행자의 힘든 생활로 나아가게 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죽음에 탁 직면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수한이는 어떻게 될 거 같애? 부처님 같이 그렇게 출가하게 될까? 아니면 그냥 탁 죽어버릴 거야? 어떻게 할 거 같애? 안 그러면 열심히 더 수행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일어날까? (수행자 대답)

탁 죽어버릴 것 같애? 큰일 났네. 그럼 너는 이시간에 법문 듣지 마. 저쪽 저 방으로 가. 마라나눗사띠를 하다가 탁 죽어버리면 그거 어떡하냐? 그건 내가 간접적인 살인을 하게 되잖아. 너는 듣지 말고 저기 내 방에 가 있어라.

 

적어도 살아있을 때 더욱 더 수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일으켜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면 큰일인데...음...

그리고 또 하나 일으켜야되는 것들이 뭐냐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을 일으켜야 된다는 것들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죽음을 피하는 길이고, 살아가는 것 자체에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보통 머리에 뇌세포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고 한다고 그러죠! 과학적으로 엄밀하게 얘기할 것 같으면 생성되는 것은 없습니다. 소멸만 있을 뿐입니다. 분열해가지고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이미 분열되버리면 그것은 앞에 것하고는 관계없는 것이 돼버립니다.

새로운 개체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이지, 그걸 우리는 보통 세포분열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지만, 엄밀하게 얘기를 할 것 같으면 새로운 생명은 죽음만 있을 뿐입니다. 계속적인 죽음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끊임없이 죽음만 있는 것뿐입니다. 그 죽음으로 인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지 그건 새로운 생명은 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이란 얘깁니다.

 

호흡도 마찬가집니다. 들이쉬는 호흡이 있으면 내쉬게 돼있습니다.

그럼 그다음 다시 들이쉬는 호흡은 앞에 들이쉬는 호흡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겁니다. 성질 자체가 다른 겁니다. 똑같이 들이쉬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도 다르고 그다음에 길이도 다르고, 어떤 경우든지 똑같은 경우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연결고리만 있다는 것뿐인 것이지 각각 다 다른 겁니다.

우리는 숨을 쉬는 것 자체가 사실은 숨을 쉴 때마다 죽는 겁니다. 죽음을 우리 앞에 두고 있는데도 실제로는 그걸 인식을 안 하려고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빠따짜라'라고 하는 분도 자신의 가족들 특히 어린아이가 죽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 겁니다. 계속 거부하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그런 것들이 더욱더 커져버리게 됩니다.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되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더 커지게 되고, 죽음을 더욱더 피하려고 하게끔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고통이 더욱더 증장만 되는 것뿐이죠.

빠따짜라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강물에다가 발을 담가가지고 발을 씻다가 물이 흘러가는 걸 보고 '아! 이렇게 항상 변하는 거구나, 머물러 있는 것이 없구나' 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태어났으면 죽게 되어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무상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과 자기 자신의 마음이 조화를 이루게 되는 거죠. 그전에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 조화를 이루지 않으려고 했거든. 부정하려고 했으니까.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러한 성질들을 받아들이기만 할 거 같으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그런 근거들이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서 바르게 사유하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야만이 죽음의 공포를 약화시킬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야만이 마음이 고요한 상태로써 살아가게 된다는 거라.

이렇게 계속 계발시키다 보면 죽음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들로 인해서 닙바나를 얻는데 반드시 도움을 받는다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붙잡지 않고 머물르게 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알아차리므로 인해서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지기 때문에 닙바나를 성취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가 있게 된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수행을 할 때 '알라까'라고 하는 스승이 하는 얘기들을 제자들에게 들려줍니다. '우리가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해가 뜨면 곧 사라지는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다' 덧없다는 거라.

 

인간의 수명이 그렇게 덧없다는 것을 일곱 가지로 비유를 해놓았습니다.

-이슬과 같다.

-물거품과 같다. 물거품은 일어났으면 반드시 꺼지게 되어있으니까.

-물에다가 그어 놓은 선과 같다. 그을 때는 그어지지만 금방 사라져버린다는 거라.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같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언젠가는 폭포 같은 데서 톡 떨어지게 돼있다는 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게 되니까.

-침과 같다. 입안에 가래가 끓고 할 것 같으면 그걸 탁 모아가지고 그대로 탁 뱉어내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리고 숯불에 구워놓은 고깃덩어리와 같다. 숯불이 타고 있는 데다가 고깃덩어리를 놔놓으면 금방 익어버리고 금방 새카맣게 타버립니다.

-도살되기 위해서 도살장 앞에 잡혀 있는 소와 같다. 시기만 문제이지 언젠가는 죽는다는 거라. 도살장 앞에 있는 소는 죽여서 고기로 쓰기위해서 있는 거라.

 

죽음은 이렇게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항상 일으켜라는 거라.

죽음이 자신으로부터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것들로부터,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힘이 약해져버리게 됩니다. 그런 집착하려는 힘이 강해져서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염리심(厭離心)이 일어나지 않으면 각자가 해야 될 일들을 반드시 하지 않는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방일하게 된다는 거라.

지금 내가 뭘 해야 되는지를 분명하게 알지를 못한다는 거라.

 

그걸 '죽음에 대해서 관찰하지 않으면 일어나는 네 가지 방일(放逸)이다' 그럽니다.

1. '다나빠마다' '버리는 것들'을 방일하게 된다는 거라. 뭔가를 자꾸 모으려 하고 집착하려고 하지 그것을 놓아버릴 줄을 모른다는 거라.

 

2. '실라' 계에 대해서 방일하게 된다는 거라. 자기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 계인데, 자기 자신을 지켜주는 것들로부터 방일하게 된다는 거라. 수호하는 일들 몸과 말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켜주는 일로부터 자꾸 게으름피우게 된다는 거라.

 

3. '사마타'에 대해서 방일하게 된다는 거라. 사마타는 보통 집중하는 것,

아! 내가 이분을 만나서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참 부처님이란 분이 참 잘 가신 분이구나 그 길을 따라가야 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잘 안 되는 거고, 내가 마음에서 항상 자비의 마음을 가져야 되겠다 하며 자애수행을 하는 것들도 게으르게 되고, 대상에 대해서 그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집중해서 그 대상과 오롯하게 되는 그런 수행도 게으르게 되는 거라. 일어난 대상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아차려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도 흐릿하게 돼버린다는 거라. 그것이 집중의 힘이 약해져 버린다는 거라.

 

4. '바와나' '위빳사나 바와나'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들에서 조사하는 일들이 게을러져버린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뭐가 진실한 것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 것들을 분명하게 조사해서 그 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그걸 안 한다는 거라.

거짓말인 줄 알 것 같으면 거짓말을 결단코 안 해버려야 되고, 진실을 말해야 되는 데도 “아, 그냥” 하면서 넘어가 버린다는 거라.

이 길이 바른길이고 이 길이 내가 나아가야 되는 길이다 하고 판단하였을 거 같으면 그 길을 따라가야 되는데도 안 한다는 거라. 좋은 줄 알면서도 안 한다는 거라. 올바르게 알고 그 길을 따라가는 힘들을 키우질 못한다는 거라.

 

이걸 '죽음에 대하여 명확히 관찰하지 않으면 일어나는 네 가지 방일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죽음을 앞둔 자는 모두 다입니다. 죽음을 앞두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부처님은 죽음을 앞둔 자는 반드시 두 가지를 해야 된다 하셨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바른 일들을 몸소 실천할 것.

'깟땁방 꾸살랑(kattabbaṁ kusalaṁ)' 그럽니다. 내가 지금 뭘 해야 되는가? 어떤 것이 바른 것이고, 어떤 것이 선한 일들을 일어나게끔 하는가? 자꾸 선한 일들을 결단코 실천해야 된다는 거라.

두 번째가 '짜리땁방 브라흐마짜리양(carittabbaṁ brahmacariyaṁ)'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한 일을 실천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말고 수행하는 것, 수행하는 것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라. 성스러운 길로 인도하는 방법인데 그 길을 따라가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라.

죽음을 앞둔 자는 누구든지 이 두 가지를 반드시 해야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마만큼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수행방법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명상할 때는 단계들이 있습니다. 그 단계들을 밟아야 됩니다.

 

자애명상을 할 때는 어떻게 단계를 합니까?

제일 먼저 나 자신부터 하죠. 내 자신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중립적인 사람 그것도 이성이 아니라 동성에게 그다음으로 하고.

그다음에는 이성이라 하더라도 부모들에게 하고.

그게 되고 나면 그다음에는 자식이라든지 애착이 가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그다음에는 자기를 싫어하고 또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그렇게 해서 점점 넓혀가가지고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넓혀갑니다.

그러한 방법들을 반드시 쓰라고 합니다.

그 방법을 쓰지 않고, 그 방법대로 하지 않고 바로 그냥 '내 자식이 행복하기를' 할 것 같으면 뭐가 생겨버립니까? 바로 '뻬마(pema)'가 생겨버립니다. 내 자식에 대한 애정이 강해져 버립니다. 그럼 애정이 자애로 넘어가지지 못한다는 거라.

 

죽음에 대해서 수행하는 것도 꼭 같이 그 길 (단계)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먼저 죽음에 대해서 사유를 하라. 그게 첫 번째입니다.

누구든지 죽는다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대통령이든 아니면 거렁뱅이든 누구든지 죽음의 과정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는 거라. 죽음에 대해서 자꾸 사유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도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죽음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 죽음은 언제 죽는다고 보장된 날이 없다. 죽음에는 그래서 달력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보장할 수 없기때문에 보험에 들 수가 없다는 거라.

 

그 프린트물 보면 있습니다. 그 프린트물 나간 것은 죽음에 대한 명상의 첫 번째 방법에 해당이 되는 것들을 적어놓은 겁니다.

네 가지를 모른다고 그럽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 그것에 대해서 바르게 사유를 하라.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어떻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라. 병에 걸려 죽을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죽을지 급작스럽게 죽을지 어떻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거라.

죽고 나서 또한 내 몸이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라. 영혼이 있고 없고를 떠나가지고 죽고 나서 지 몸이 어떻게 되는지를 어떻게 알아? 화장장 그 뜨거운데 가서 달궈질지 아니면 산소에 묻힐지 어떻게 알 거라 죽고 난 사람이.

또 하나는 죽고 나서 다음 세상에 내가 어디로 갈지 나도 모른다는 거라.

저 천상세계에 태어날지 지옥에 떨어질지 여러분들이 알 수가 있습니까? 모른다는 거라. 죽음은 반드시 나에게 닥치지만 그런 것들을 모른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들을 자꾸 사유를 하라.

죽음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마라낭 둑캉' 죽음은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태어나는 것도 괴롭지만 죽음도 괴로운 것이다. 왜? 죽기 싫으니까. 또 여러분만 괴로운 게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다 괴로운 겁니다. 불교 믿는 사람만 괴롭고 기독교 믿는 사람은 안 괴롭습니까? 그런 것도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을 진리라고 그러는 거라.

 

단지 죽음의 공포를 일으키지 않도록 사유를 하라.

죽음의 공포를 일으키지 않으려면 현재의 고통들을 관찰할 때 공포가 일어나질 않습니다. 미래에 닥쳐올 것들, 죽음은 먼 미래라고 생각하고 미래의 것들을 사유를 하게 되면 반드시 공포가 일어납니다. 지금 현재 살아가는 데다가 집중을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죽음의 공포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왜? 죽음의 공포는 언제 일어납니까? 미래를 관찰하는 것이든 아니면 과거를 관찰하는 것이든 공포라는 것은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현재에 머물고 있으면 적어도 공포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이와 같이 죽음에 대해서 반드시 사유를 하라 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이 죽음에 대한 것을 특정한 사람에게 적용하는 겁니다.

먼저 누구에게 적용해야 되겠어요?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적용할 거 같죠?

그런데 죽음에 대한 명상은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지 않습니다. 무르익지 않으면 당연히 공포가 일어나고 그것을 피하려고 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반드시 중립적인 사람에게 죽음에 대해서 사유를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고, 예를 들어서 저 밖에 길거리에 나하고 무관하게 다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서 죽음에 대해서 명상을 해보십시오. 공포심이 일어납니까? 그렇게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단지 저 사람들도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끔 된다는 거라.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중립적인 사람에게 먼저 죽음에 대해서 적용해야 됩니다.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보통 중립적인 사람을 누구를 대상으로 하느냐 하면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뭐 ㅇㅇㅇ씨를 좋아하고 싫어하지도 않았다고 가정을 하면, 그런데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그걸 대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죽고 나서 어떻게 됐어요? 한줌 뼈로써 그렇게 화장당해가지고 묻혔습니다. 또 세월이 지나서 그 유골을 누가 탈취를 해가지고 괴로움들을 받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지금은 또 그 산소 자체가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죽고 나서 많은 사람이 왔든 안 왔든 죽은 사람은 그걸 모릅니다. 그리고 그 재산들 다 놔두고 가야 된다는 거라. 나하고 무관한 사람일 거 같으면 그런 것들을 떠올리는 거라.

 

중립적인 사람에게 이와 같은 것들을 떠올림으로 해서 죽음에 대해서 사유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 대신에 여러분들은 지금 죽었습니까, 살아있습니까? 삶의 현실에 대해서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내가 지금 죽음에 대해서 중립적인 사람에게 사유를 하므로 인해서 내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되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일깨워주게 되는 거라.

예를 들어서 중립적인 사람에게도 공포심이 떠오른다. 그럴 거 같으면 지금 현재 삶을 살고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공포' '공포' '공포' 하면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두려움이 일어나면 '두려움' '두려움' '두려움' 하면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게 살아있는 사람이 해야 될 몫이라는 거라.

그리하는데 두려움이나 공포 이런 것들은 중립적인 사람을 대상으로 할 것 같으면 크게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단계에서는 반드시 중립적인 사람에게 죽음에 대한 명상을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돌아가신 분, 내 주변에 나하고 접했다가 돌아가신 분께 죽음에 대한 명상을 대상으로 하라.

먼 조상은 나하고는 전혀 연결이 없이 돌아가신 분들이죠? 해서 그분들을 대상으로 하면 안 돼. 그분들에 대한 기억이 나는 전혀 없으니까. 적어도 나하고 연결고리를 갖고 있던 친한 이들이 돌아가셨을 경우에 그분들을 대상으로 하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스님 같은 경우에는 모친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럼 모친에 대해서 내가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합니다. 아! 모친이 죽음을 맞았지, 살아갈 때 어떤어떤 좋은 일들을 했구나. 아! 나도 그렇게 따라가야 되겠다. 어떤어떤 것들을 나쁜 일들을 했구나. 그런 것들은 내가 하지 말아야 되겠다. 그런 마음들을 일으키게 됩니다.

죽은 이들에게 대해서 죽음을 명상을 하면서 얻는 이익들이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이 뭔지를 분명하게 일깨워 주게끔 됩니다.

 

네 번째는 이제는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을 해야 됩니다.

내가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숨을 딱 멈춘 상태에서 관에 들어갔다고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요즘 그런 체험 하는 곳들도 있죠? 어떤 생각이 일어날까?

대부분 그 사람들은 그 관에서 나오고 나면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아! 잘 살아야 되겠다. 열심히 잘 살아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는다고 그럽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볼까? 관 가지고 와서 못질을 해가지고?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어두운 방 안에 앉아서 자신이 숨이 끊어져서 죽음을 맞이한 상황들을 보십시오. 자기가 아직 못하고 죽었을 때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피해 입히는 것이 없는지, 또 그 사람들이 나를 떠올릴 때 좋은 것을 떠올리는지, 참 많은 생각들이 일어날 거라. 그게 네 번째 하는 겁니다.

 

다섯 번째는 가장 존경하는 분을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스님을 대상으로 한다. 아니면 내가 가장 존경하는 어떤 스승님에게 한다. 그분들을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가끔씩 이런 과정을 겪지 않고 또 죽음에 대해서 명상을 안 할 것 같으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할 것 같으면 그분만이 최고라고 생각해버립니다. 다른 스승들은 다 틀렸다고 그럽니다.

마하시 계통에서 수행해서 마하시 스님에 대해서 떠올리고 하는 사람들은 순륜 스님 아니면 아잔차 방법 다 틀렸다고 합니다. 또 아잔차 스님 방법으로 할 것 같으면 또 다른 것들은 다 틀렸다고 합니다.

그게 왜 그러냐면 이런 계통들을 밟아오지 않아서 그럽니다.

순차적으로 마음이 어떤 대상이든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일으킨 상태에서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렇지 않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맨 마지막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대상에게 해야 되는 거라.

 

이런 다섯 가지 방법을 통해서 반드시 죽음에 대한 명상을 반복해야 됩니다.

첫 번째가 뭐라고요? 죽음이 어떤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을 반드시 사유하라.

그건 여러분들 프린트물 거의 15페이지로 내준 프린트물이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죽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한다고요? 중립적인 사람, 나하고는 무관한 사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무덤덤한 관계에 있는 대부분의 군중들에게 하는 것이 두 번째 방법입니다.

세 번째는 나와 가깝게 지냈다가 돌아가신 분.

네 번째는 자기 자신.

다섯 번째는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대상.

그런 순차적인 방법으로 '마라나눗사띠'를 반드시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마라나눗사띠'를 하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프린트물은 여러분들이 좀 읽어보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을 겁니다.

그 부분을 읽고 다음 시간에는 그 부분에 의문되는 것만 질문하십시오.

그러면 그 부분에 대해서 내가 설명을 조금 더 자세히 해드릴 겁니다.

그리고 대념처경에 나오는 그 구절은 다음 주에 프린트물로써만 내줄 겁니다. 여러분들이 크게 그걸 보고 그 방법으로 수행을 할 필요성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죽고 나서 하루 이틀 삼일 지나고 나서 몸이 부패해지고, 몸이 푸르딩딩 해지고, 구더기가 나오는 것들을 첫 번째 방법으로 명상을 하고, 뭐 그다음에는 어떤 방법으로 해가지고 이렇게 순차적으로 해서 아홉 가지 방법으로 해서 마지막 백골이 되어있는 것까지 관찰하는 방법입니다.

그거는 실재적인 것이 아닙니다.

저런 테라와다 불교 같이 병원에 가면 그런 것들을 다 전시를 해 놓습니다. 스님들은 '마라나눗사띠'를 할 경우 거기 가서 합니다. 그거를 직접 보면서.

 

그런데 한국은 지금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왜? 죽음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한테 그걸 관찰하라 해가지고 남의 묏등을 뒤져가지고 해골을 꺼내놔 놓고 할 수도 없는 거고.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이 방법은 한국에서는 사실은 잘 안 맞아. 그렇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하는 것이 지금 스님이 얘기하는 '마라나눗사띠' 방법입니다.

그것은 대념처경에 있는 거니까 어쨌든 프린트물을 내 드릴테니까 빨리어 문법은 참조하도록 하시고, 대신에 다음 시간에는 이 '마라나눗사띠'의 방법에 대한 것을 조금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써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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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눗사띠(Maraṇānussati bhāvanā)_죽기 전에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20110523)

https://youtu.be/pAWZZqY7qgw * 마라나눗사띠(Maraṇānussati bhāvanā) (20110523) 저번 시간에 죽음에 대한 얘기를 좀 했습니다. 그때 "몇 살에 죽는가 하는 걸 모른다. 무슨 병으로 죽는가 하는 걸 모른다.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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