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념처경 법문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10강. 신념처- 삼빠자나(sampajāna)- 분명한 앎

담마마-마까 2019. 5. 18. 15:32

https://youtu.be/SKNa-DadnBU

https://youtu.be/mvxSxWOcDvM

 

10강. 신념처- 삼빠자나(sampajāna)- 분명한 앎(20110507)

 

자! 오늘은 '삼빠자나(sampajāna)' 부분입니다.

앞의 네 가지 몸의 자세에 대해서 알아차림과 크게 차이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는 사띠에 대한 이해들, 사띠에 대한 수행이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인제는 사띠와 더불어서 일어나는 삼빠자나 부분에 대한 이해를 하고 그것에 대한 수행을 하는 그런 부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게 '삼빠자-나 까-(sampajāna kārin)'이라고 해서 스님이 설명을 쭉 주를 달아놨습니다.

 

'일어나고 지탱하다가 사라지는 모든 과정의 특성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알아차려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사띠란 알아차림이 그 순간의 경험을 주시하여 알아차리는 작용이라면, 완전한 이해인 분명한 앎은 알아차린 그 담마의 특성을 뚜렷하게 꿰뚫어 아는 작용이다. 삼빠자나에는 그래서 네 가지 종류가 있다.'

하는 것이 기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배가 고프다. 그러면 밥을 먹어야 되겠죠. 밥을 먹으면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힘이 나죠. 배가 부르죠. 그러면 밥을 먹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죠! 그런데 지금 밥을 먹기 곤란한 상황이다. 집안에 누가 싸우고 있다, 아무리 배고파도 밥 먹을 수 있어요? 못 먹죠.

그래서 언제 먹는 게 가장 적당한가, 적절한가 하는 것을 살펴서 적당할 때 밥을 먹습니다. 그럼 또 밥을 먹을 때, 밥을 먹으면서 우리 엄마 아빠는 왜 싸웠을까 하면서 밥을 먹으면 밥맛이 없습니다. 밥 먹을 때는 밥만 착 알아차려서 먹으면 가장 맛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밥을 먹을 때 처음엔 딱딱한 것이었는데 씹으니까 점점 더 고소해지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이와 같습니다. 이게 쉽게 말하면 '삼빠자나' 라고 얘기를 하면 됩니다.

 

'삼빠자나에는 네 가지 특성이 있다'라고 그랬습니다.

사띠는 어느 순간에도 사띠가 있죠! 내가 지금 배가 고픈가 하고 아는 것도 알아차려서 아는 것이고, 내가 지금 밥을 먹을 때가 적당한가 하는 것도 알아차리는 것이고,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있는가 씹고 있는가 하는 걸 아는 것도 사띠로써 아는 것이고, 또 씹고 있는 것들이 처음 하고 다르게 씹으면 씹을수록 맛있구나 하고 아는 것도 사띠로써 아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띠와 더불어서 분명하게 일어나는 것이 있죠! 그게 뭡니까?

내가 분명하게 지금 내가 밥을 먹을 때인가 아닌가, 내가 지금 배고프니까 밥을 먹어야 되는가 하는 것들을 아는 것, 지금 밥을 먹고 있는 것들을 아는 것, 이런 것들은 '사띠와 더불어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삼빠자나'라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쉽죠? '삼빠자나!'

 

1. 어떤 것을 행할 때 그 행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지금 이익이 있는가 하고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첫 번째고,

2.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내가 지금 행하는 것이 적당한가 하고 분명하게 또 아는 것. 적당하지 않으면 안할 것이고, 적당할 것 같으면 할 것이고 그것이 두 번째,

3.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곳에 마음이 정확하게 가 있는가, 밥을 먹을 때 밥만 먹고 있는가, 걸어갈 때 걸어만 가고 있는가 하고, 지금 현재 행하고 있는 대상에 마음이 놓여져 있고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세 번째,

4. 그 대상을 그렇게 알아차리다 보니까 그 대상에 '나'라는 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들, 그리고 ''라는 하는 것이 그 속에는 없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 그것이 네 번째입니다.

 

삼빠자나를 구분하면 그렇게 네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일상생활에선 보통 어떻게 합니까? 앞의 두 가지만 하죠! 지금 내가 이걸 해가지고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 또 이걸 하는 것이 지금 적당한가 아닌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들입니다. 보통 일상생활에선 그것만 있으면 크게 무리는 없습니다. 그것만 있어도 다툼없이 오히려 고요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수행을 하는 자는 특히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자는,

여러분들이 알아차려야 될 것은 여러분들은 그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되고 특히 그 대상이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서 알아차려야 됩니다.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무상·고·무아를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분명한 앎의 세 번째가 일어나지 않으면 네 번째가 안 일어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네 번째는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될 부분이 아니고, 우선 그 대상에 분명하게 마음이 일치돼서, 그 대상을 움켜쥐지도 않고 밀쳐내지도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만 신경을 쓰면 당연히 네 번째 거는 아! 그것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끔 된다는 겁니다.

 

자! 그게 기본적인 '삼빠자나'다 하는 것만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첫 번째 한번 봅시다.

지금부터 얘기하는 것들은 아주 수월한 것들입니다. 앞에 몸의 네 가지 위의(四威儀)에 대해서 얘기한 것과 별반 차이 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일부러 지금 적으려고 하는 사람, 적지 마십시오. 적지 말고 그냥 귀만 열어서 듣도록 한번 해보십시오.

스님을 일부러 볼려고 필요도 없이, 볼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냥 알음알이 없이, 그냥 듣기만 한번 해보십시오.

 

첫 번째가 abhikkante sampajānakārī hoti, paṭikkante sampajānakārī hoti.

'아빅깐떼- 삼빠자-나 까-리-호-띠, 빠띡깐떼- 삼빠자-나 까-리-호-띠.'

'앞으로 나아갈 때 분명한 앎으로써 행하라. 뒤돌아 올 때도 분명한 앎으로써 행하라.'

 

그렇게 됩니다. 수행이 잘되면 참 문제가 없는데, 앞으로 나아가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또 내가 지금 앞으로 나아가는데 다른 사람들하고 부딪침이 없는가 하는 것을 판단해서 부딪칠 거 같으면 멈춰서서 돌아서고.

또 내가 지금 경행을 이렇게 하는 것이 나한테 이익이 있다 할 것 같으면 계속하게 되는 거고 이익이 없으면 아, 내가 지금 경행으로 인해서 오히려 마음이 들뜨는구나 판단을 해서 좌선으로 또 들어가고 이렇게 합니다.

 

그래서 수행이 잘될 때는 실제적으로 삼빠자나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안 씁니다.

그런데 수행이 안 될 때가 문제가 됩니다.

앞으로 나아갈 때를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분명하게 알아라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수행이 잘 안 될 때 틀림없이 수행이 잘 안 되는 이유가 있을 거라. 내가 노력을 지금 안 하고 있던지, 그렇지 않으면 알아차리는 것을 좀 더 뚜렷하게 안 하던지, 아니면 대상에 대해서 집중을 잘못하던지, 뭔가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수행이 안 될 때는 아! 그걸 생각을 해야 되는 거라.

아! 내가 지금 왜 수행이 안 되지? 아! 내가 지금 노력을 좀 덜하고 있다. 그러면 좀 더 노력을 해야 되는 거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대상을 갖다가 내가 꽉 잡고 있으려고 한다. 잡고 있음으로 인해 가지고 대상은 분명하게 이해하는데 잡음으로 인해서는 그 대상이 변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든. 그러면 잡고있는 거를 내가 놓아버려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어야 되는거고.

 

또 내가 알아차리는 건 금방금방 알아차리는데 거기에서 어떤 고요한 특성들, 변해가는 특성이라든지, 무아의 특성이라든지, 특성들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아! 내가 집중력이 부족하구나' 해서 조금 더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상을 여러 개로 자꾸 옮겨가는 게 아니고 조그마한 대상들이 나타나면 그냥 무시해버리고, '아! 그것이 있구나' 하고만 알아차리고 그냥 자기가 하고 있는 주대상으로 돌아와서 그것만 쭉 하게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게 될 때 이것은 삼빠자나로써 알아차리는 것이다라고 판단을 하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이익이 있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판단을 했고 이익이 없으면 그걸 버려버리고, 이익이 있는 것에 대해서 적당하게 내가 바르게 알아차림을 계속적으로 유지해나가려고 노력을 하게 되고, 또 그런 집중을 하게끔 됩니다. 적당하게 수행방법을 찾아나가는 방법입니다.

 

수행이 안 될 때는 원래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면 삼빠자나의 첫 번째하고 두 번째는 당연하게 내가 하게끔 됩니다. 그러고 나면 본인이 해야 될 거는 뭡니까? 이제는 오로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려고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걸어갈 때는 앞으로 나아갈 때는 '앞으로 나아간다'고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지, 나아가면서 발을 '들어올림'하면서 '내려놓음' 하면서 알아차리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나아감' 하면서 발이 오른발이 나아간다는 걸 알아차리지 왼발 디디고있는 것을 알아차리지는 않는다는 거라. 오른발이 나아간다는 것만 알기 때문에 왼발 디디고 있는 거는 전혀 모른다는 거라.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고짜라 삼빠자나' 지금 내가 취하고 있는, 내가 알아차린 대상이 뭔가 하는 걸 분명하게 안다는 것, 이 세 번째가 자동적으로 확립이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발이 앞으로 나아갈 때 나아가는 현상에서 처음에 나아갈 때와 마지막에 나아갈 때가 분명하게 다르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거기에는 '나'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상 자체가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이 나아가진다고 알아차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몸이 나아간다'든지 '내가 나아간다'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현상이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앞으로 나아갈 때 분명한 앎으로 행하라.' 하고 얘기한 부분입니다. 똑같이 '뒤돌아 올 때 분명한 앎으로써 행하라.' 하는 것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 나아갈 때나 뒤로 돌아올 때 수행자가 나아가고 돌아오는데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 이익이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왜 경행을 합니까? 노력의 힘이 떨어졌을 경우, 또 집중하는 힘이 과해졌을 경우에 경행을 합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현재 열심히 앉아서 좌선을 하면서 노력하고 있고, 또 집중하는 힘도 그렇게 강하지는 않으면서 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경행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이 무르익은 사람들은 세 시간 네 시간 그냥 좌선만 쭉 합니다. 좌선만 해도 충분히 경행의 효과를 가지고 옵니다. 하다가 또 좌선이 잘 안 될 거 같으면 경행의 효과를 가져오기 위해서 대상을 자주 움직여줍니다.

그래서 '일어남' '사라짐' 하다가 '앉음'을 또 이어주고, 또 '일어남' '사라짐' '앉음' 뿐 아니라 '닿음' 들 여러 가지들을 이어주고 대상을 이렇게 자꾸 바꿔주면서 노력의 힘도 키우고, 한 곳에 몰입되는 그런 것들도 방지를 하면서 내가 수행을 조화있게 잘해나가는 겁니다.

 

다섯 가지가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수행을 해나갑니다.

그럴 경우에는 굳이 걸어서 경행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경행을 하는 사람들이 경행만 쭉 계속 할 때가 있습니다. 좌선의 효과를 충분히 가져올 경우에는 경행만 해도 그리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앞으로 나아갈 때는 내가 걸어갔을 때 분명하게 수행의 이익이 있어야 될 거 아니라?

그냥 스님이 한 시간 동안 좌선하고, 한 시간 동안 경행하시오 하니까, 좌선 호로록 끝나고 나니까 벌떡 일어서가지고 경행을 하고, 또 경행하다가 한 시간을 채우면 또 좋은데 하기 싫으니까 한 이십 분이나 하다가 좌선으로 호로록 돌아오고, 또 좌선을 하면 마음이 좀 고요하고 편안해지니까 고요한 특성이 알아지든 어쩌든 간에 편안해지니까 우선 세상사 좀 잊을 수 있으니까 좌선을 좀 하고 있다가, 그러고 나서 호로록 집에 가버리고. 이럴 거 같으면 이익이 없어지는 거라.

 

앞으로 나아갈 때는 그마만한 이익이 있어야 됩니다. 경행을 해서 걸어갈 때는 그마만한 이익이 분명히 여러분들에게 있어야 된다는 거라. 경행하는데 그러한 효과들을 가져오지 않을 것 같으면 경행하지 말아라는 거라. 좌선할 때 좌선해서 그런 효과들이 있고 그런 이익이 없을거 같으면 좌선을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뭐 하러 그렇게 앉아있고 뭐 하러 그렇게 경행을 해?

그래서 그런 것들이 이익이 있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분명하게 알도록 하고, 그것에 대해서 이해하도록 하라는 거라.

 

'아! 내가 좌선을 어느 정도 하고 나니까 아! 대상에 대해서 자꾸 몰입이 된다. 아! 그래서 대상의 고유한 특성들을 알아차리는 것을 놓쳐버리고 대상에 자꾸 함몰되는구나' 하고 판단할 것 같으면 '아! 일어나서 경행을 해야 되겠다' 하고 판단을 해서 경행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경행을 하고 나면 대상이 자꾸 바뀌니까 하나의 대상에 함몰되는 것들은 방지를 해나가는 이익이 생긴다는 거라. 그럴 때 아! 내가 경행을 잘했구나 하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자! 그렇게 해서 앞으로 나아갈 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행합니다.

 

여기 수행처에서는 여기서 저기까지 왔다 갔다 경행을 하면 적어도 이 길이가 한 15m, 20m는 됩니다. 요렇게 요렇게 한 변만으로 왔다갔다 하면 그정도 되나? 지금 경행을 세로로 하고있죠? 어쨌든 그정도 된단 말이라. 그러면 오늘 같이 인원이 적을 때는 이 60평이라 해도 그렇게 사람들 걸리적거리지 않고 경행을 순조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으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못하죠! 요만큼 왔다가 반도 안 돼서 돌아가야 됩니다. 내 이익만 생각해서 그냥 경행만 계속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적당하지는 않겠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혀가면서 수행을 할 수는 없죠.

 

그래서 내가 지금 경행을 하는 것이 이 정도 걸어가서 멈춰서서 돌아오기에 적절한가는 스스로 판단을 해야됩니다. 만약에 사람이 걸리지 않고 혼자 한다고 하더라도 이 변에서 저기 변까지 걸어가는데 5분이 걸린다. 5분 동안 걸어가면서 내가 경행의 효과를 충분히 가져오는가? 그렇지 않으면 1분 동안 경행을 할 경우에 그 경행의 효과를 충분히 가져오는가를 스스로 판단해야 됩니다.

 

어떤 게 적당한 거라? 사람마다 다르겠죠! 경행의 속도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또 경행의 길이도 15m를 하는 것이 편할지 20m를 하는 것이 적당할지 아니면 5m를 하는 것이 적당할지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경행을 아주 빠르게 경보 수준으로 할 경우에면 한 20~30m 되는 것이 오히려 적당합니다. 그럼 5m, 10m는 오히려 짧습니다. 경행을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적당하게 하라는 거라. 어떤 것이 경행의 효과를 잘 가져오게 해서 내가 경행을 하는데 다섯 가지 힘이 적당하게 균형을 맞춰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판단을 했으면 이제는 경행을 할 때, 여러분들이 경행할 때 알아차리는 대상은 어딥니까? 움직이는 발이죠!

절대 움직이지 않는 발이 여러분들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온 마음을 움직이는 발에다가 두도록 해야 됩니다. 다른 것은 일절 여러분들 관심사항 밖입니다. 보이는 대상, 들리는 대상, 다른 쪽 발 이런 것은 전혀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로지 걸을 때는 걸어가는 발에만 온 마음을 집중하도록 해야됩니다.

 

그 발은 여러분들 발이 아닙니다.

발바닥을 알아차리고 있으면, 발바닥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아차리면 느낌은 가볍고 무겁고 하는 느낌들로써 알아집니다. 또 여러 가지 느낌들로 알아집니다.

그것이 만약에 여러분들의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마음대로 조절해야 됩니다. 실재하는 대상이 여러분 마음대로 조절이 돼야됩니다.

나는 이번에 경행 할 때 발을 들어 올릴 때 가벼운 것이 점점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딱딱한 것이 계속 증가되게 하고 싶다 그럴 거 같으면 증가하도록 그렇게 돼야 됩니다. 그런데 실제 발을 들어올릴 때는 딱딱함이 계속 증가될 수가 없습니다.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그 대상에 마음이 가 있을 때 거기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것들을 알게끔 됩니다.

 

그런데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발을 들어 올릴 때 딱딱함이 점점 증가될 수가 있습니다. 고무풍선 같이 발이 부풀어 오를 수도 있습니다. 왜? 나의 생각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거 같으면 있는 현상을 그대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 특성은 무상·고·무아로써 여러분들에게 알아지게끔 된다는 거라.

 

그게 바로 '앞으로 나아갈 때 분명한 앎으로써 행하는 것이다. 뒤돌아 올 때 분명한 앎으로 행하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이해하겠습니까?

 

그다음에 그 밑에 봅시다.

두 번째, ālokite sampajānakārī hoti, vilokite sampajānakārī hoti

'아-로-끼떼- 삼빠자-나 까-리- 호-띠, 위로-끼떼- 삼빠자-나 까-리- 호-띠.'

'앞을 볼 때에 분명한 앎으로 행하라. 뒤를 볼 때에 분명한 앎으로 행하라.'

 

가끔씩 이 '위로끼떼'를 '옆으로 볼 때'라고 풀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리해도 관계는 없습니다. 그런데 원어의 뜻은 분명하게 '위(vi)'는 반대의 의미이기 때문에 '뒤로'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원어의 뜻에 가깝다고 봐집니다. '아-로께띠' 그다음에 '위-로께띠' 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 아마 정확할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여담은 스님들은 옆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정면을 보고 있죠? 정면을 보면서 옆에서 누가 부르면 고개를 옆으로 돌립니다. 스님들의 계율에는 몸을 돌리지 않고 옆으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옆으로 볼 때는 반드시 몸을 돌리고 봐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몸을 돌려서 '바이살리'를 바라보면서 "아! 바이살리 참 아름답구나.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이구나" 하고 마지막 열반하러 가는 길에 이런 말씀을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거기도 보면 몸을 돌려서 뒤에 있는 바이살리를 봤다고 돼 있지 고개를 홱 돌려서 봤다고는 안나옵니다.

그것이 스님들 위의(威儀)입니다.

좀 몸은 그대로 있으면서 옆으로 홱 돌리면 좀 천박스럽게 보이죠. 여러분들도 좀 고상하게 보일려고 할 것 같으면 고개를 휙 돌리지 말고 몸을 같이 돌려소 보도록 하십시요. 왜 웃어, 웃기는.

뒤를 볼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몸을 돌려서 보도록, 그게 습관화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하는 자들은 몸은 그대로 있으면서 자꾸 고개를 돌린다든지 이런 버릇들은 되도록 없애야 됩니다. 물론 잠깐씩 왔다갔다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홱가닥 홱가닥 홱가닥 이렇게 하고 할 것 같으면 그거 되게 보기 싫습니다. 되도록이면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여담으로 얘기한 겁니다이.

 

'앞을 볼 때에 분명한 앎으로 행하고 뒤를 볼 때에 분명한 앎으로 행하라'

물론 옆으로 볼 때에도 분명한 앎으로 행해야 됩니다. 그래서 볼 때에 앞을 보든 뒤를 보든 옆을 보든 아니면 위를 보든 아래를 보든 어쨌든 그 볼 때는 분명한 앎으로써 행위하라는 거라. 분명하게!

분명하게 알아차리려면 앞을 보고 있으면 내가 분명히 똑바로 앞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야 될 거 아니라. 똑바로 쳐다보는데 앞에 있는 저기 아가씨가 내 맘에 쏙 든다. 그럴 거 같으면 수행하는 사람은 '어! 내가 그래선 안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눈을 닫아버리든지, 안 그러면 옆으로 돌려야 됩니다. 좋아하는 것이 팍 일어날 거 같으면 대상을 바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냥 대상으로써 알아차려야 되는데 ‘아름답다 좋다 싫다’는 마음이 일어났으니까 그거는 바로 보는 것은 아니죠.

 

바라볼 때도 4가지 종류의 분명한 앎이 일어나도록 그것을 지니고서 보라는 뜻입니다.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 있는지, 지금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적절한지를 분명하게 알고 바라보라는 거라. 지금 이익이 없고 바라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보지 마!

여러분들 스님 법문을 듣는데 스님을 보는 것이 적절합니까? 적절하지 않죠! 절대 적절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귀로써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귀에 가 있어야되지 스님을 향해서 스님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거는 이익이 없습니다. 마음이 스님한테 가 있으면 뭐할 거야? 이익도 없고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 소리가 들릴 때는 소리 들리는 귀에다가 마음을 두어야 됩니다. 전방을 향해서 스님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여러분들에게는 이익이 있고 적절한 것이라. 그런데 스님을 바라보니까 부처님 바라보는 것 같이 환희심이 일어난다. 그래서 내가 그 대상에 집중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럴 거 같으면 소리 듣지 말고 스님만 바라보고. 바라봤을 때는 그렇게 바라보라는 겁니다. 똑바로 바라보든지 옆을 바라보든지 뒤를 바라보든지 간에 분명하게 그것에 대해서 이익이 있고 적절할 때 보도록 하라.

 

앞에 대상을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대상이 고정돼 있습니까? 어떻게 보여요?

자! 앞에 있는 꽃을 봅시다.

꽃을 보면서 어떻게 게송을 마음속에서 새깁니까?

“가나 사라빠딧테낭~” 하는 부분이 있죠? 여기있네.

 

◈ 부처님께 촛불과 향, 꽃, 청정수를 공양 올리는 게송

 

Ghanasārappadittena, dīpena tamadhaṁsinā.

Tilokadīpaṁ sambuddhaṁ, pūjayāmi tamonudaṁ.

촛불은 스스로 몸을 태워 빛을 내며,

무명이란 어두움을 없앱니다.

탐진치를 다스려서 지혜광명 이루고자,

이 촛불을 부처님께 올리옵고 합장공경 하옵니다. (큰절)

 

Ghandhasambhārayuttena, dhūpenāhaṁ sugandhinā.

Pūjaye pūjaneyyaṁ taṁ, pūjabhājana muttamaṁ.

향기로운 재료로써 좋은 향기 만들듯이,

법의 향기 널리널리 퍼져가네.

그 담마 실천하여 지혜로움 이루고자,

이 향을 부처님께 올리옵고 합장공경 하옵니다. (큰절)

 

Vaṇṇagandhaguṇopetaṁ, etaṁ kusumasantatiṁ.

Pūjayāmi munindassa, sirīpādasaroruhe.

Pūjemi buddhaṁ kusumenanena,

Puññena metena ca hotu mokkhaṁ.

Pupphaṁ milāyāti yathā idaṁ me,

Kāyo tathā yāti vināsabhāvaṁ.

여기 이 한 아름의 꽃다발은 신선하며 향기롭고 아름답네.

향기로운 이 꽃들을 연꽃같이 성스러운,

부처님의 두 발 아래 올리옵고 합장공경 하옵니다.

부처님께 향기로운 이 꽃들을 올리오니,

이 공덕 바탕 되어 해탈의 길로 들어서길 바랍니다.

향기롭던 이 꽃들도 때가 되면 시들듯이,

이 몸 또한 사라지고 마는 것을 되새깁니다.

 

Adhivāsetu no bhante, pāniyaṁ parikappitaṁ.

Anukampaṁ upādāya, paṭiggaṇhātu muttamaṁ.

존경하는 부처님께 수승하고 향기로운 이 청정수를 올리오니,

저희들을 연민히 여기시어 자비롭게 받아주옵소서. (큰절)

 

[한국테라와다 불교의범에서 게송 인용]

 

 

'여기 이 한 아름의 꽃다발은 신선하고 향기롭고 아름답다.' 이 꽃은 지금 탁 쳐다보니까 신선하고 향기도 나고 아름답다는 거라. 그래서 '향기로운 이 꽃들을 연꽃같이 성스러운 부처님의 두 발아래 올리옵고 합장 공경하옵니다.' 부처님한테 이 꽃을 올린다는 거라. 이 좋고 향기나고 신선한 것들을. 그렇지만은 '부처님께 향기로운 이 꽃을 올리오니 이 공덕 바탕되어 해탈의 길에 들어서길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 해탈의 길에 들었어요?

'향기롭던 이 꽃들도 때가 되면 시들듯이 이 몸 또한 사라지고 마는 것을' 하고 되새긴다 하는 거라. 꽃은 반드시 피었으면 시든다는 거라. 앞에 있는 스님도 반드시 태어났으면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로써 보라는 거라.

대상을 바라볼 때는 그러한 마음으로 그 대상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 대상이 변해가고 있다는 현상으로써 바라보아야 되는 것이지, 그리고 그 대상이 절대 깨끗하고 아름답지 않고, 부정한 것이고 불결한 것이다 라고 알아차리면서 대상을 봐야만이, 그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래야만이 그 대상에 대해서 바르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바라볼 때는 그렇게 바라봐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대상이 변하는 속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들리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거 같으면 '아! 저 소리도 항상하지 않고 변하는구나'하고 알아차립니다. 저렇게 언성이 높아지고 저렇게 화나는 것도 변한다는 사실로써 알 거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크게 반응을 일으키질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쁜 소리에 크게 반응을 일으키고, 아름다운 사람에 대해서 크게 마음이 동요하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앞을 볼 때 분명한 앎으로써 행하라. 뒤를 볼 때도 마찬가지 옆을 볼 때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앞에 있는 대상을 봅니다. 내가 보려고 하는 의도가 있어야만이 앞에 있는 대상이 보입니다. 보려고 하는 의도로 인해서 보는 행위가 있다. 그리고 보여지는 대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써 알아라.

 

의도와 보는 행위와 보여지는 대상은 다릅니다.

의도를 내지 않으면 보는 행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대상이 있고 내가 보는 행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의도를 내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보려고 해도 내게 보여지는 대상이 없을 거 같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각각 다 별개라는 거라.

보려고 하는 의도도 별개의 행위이고, 보는 행위도 별개의 행위이고, 보여지는 대상도 별개의 것이라는 거라. 왜 별개의 것인 줄 알면서 이것들을 하나로써 보느냐는 거라. 대상을 바라볼 때는 이와 같이 바라보도록 하라. 그래서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고 보면 안 된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두 번째, 볼 때 분명한 앎을 지니고 행하라 하는 것들입니다.

 

세 번째, samiñjite sampajānakārī hoti, pasārite sampajānakārī hoti.

'사민지떼- 삼빠자나-까-리 호-띠, 빠사-리떼- 삼빠자나-까-리 호-띠',

'구부릴 때나 펼 때에 분명한 앎으로써 행하라.'

'구부릴 때 분명한 앎으로써 행하고, 펼 때 분명한 앎으로써 행하라.'

 

팔 한번 구부려 보십시오. 팔 한번 펴보십시오.

누가 네 가지 삼빠자나에 대해서 얘기해 봐요. 구부릴 때 어떻게 네 가지 삼빠자나가 있었고, 펼 때 어떻게 네 가지 삼빠자나가 있었어요? 수한이 얘기해 볼래? 어려워? 어렵게 자꾸 생각을 하지 마. 그거 뭐 어려울 게 있어?

가끔씩 스님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번뇌가 없으면 내가 걸어갈 것이다' 하고 마음을 먹고 경행을 하려고 탁 서서 발을 들어 올리려고 하는데 번뇌가 없는 때가 없는 거야. 발을 한 발짝도 들어올리지도 못하겠는 거야. 여러분들 이거 팔 구부릴 때 번뇌 없이 구부렸어요? 팔 펼 때 번뇌 없이 폈어요? 번뇌가 있었어, 없었어? 있었어요? 뭔 번뇌가 있었어? 스님이 "구부려봐!" 하니까 그냥 구부렸지 언제 내가 번뇌 일으켜가지고 구부렸어? 그렇지는 않을 거 아니라. 그렇죠!

 

어떤 동작을 하든지 간에 항상 명심을 해야 될 것들이 있습니다.

그 하는 행위에는 탐·진·치가 없도록 해야 됩니다. 탐심을 가지고, 또 성냄을 가지고, 또 게을러지는 마음을 가지고 행위를 할 경우에는 그것은 바른 행위가 아니다하고 얘기합니다. 구부리는 것을 행하라 할 때는 반드시 바른 행위라야 됩니다. 바른 행위가 됐을 때 그걸 분명하게 알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게 두번째입니다.

 

행위를 하고 있는 걸 내가 사띠로써 알아차리고 있다, 그건 바른 행위만 얘기하는 겁니다, 탐·진·치가 없을 때. 그걸 알아차릴 때도 그냥 알아차리지 말고 분명한 앎으로써 알아차리면서 행하라는 거라. 행동을 할 때는 분명하게 이익이 있고 적절할 때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실수를 하게 됩니다.

  

스님도 태국에서 뱀한테 몇 번 발을 물린 적이 있습니다. 특히 내가 있던 '왓람쁭' 같은 경우에는 마을에서 굉장히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아침에 탁발나가는 데만 한 시간 반이 걸려. 첫 밥을 얻을 때 시작점이 한 시간반 지나야 겨우 밥 한 덩어리 얻을 수가 있어. 그러니까 새벽에 나갈 수밖에 없는 거라. 가는데 한 시간반, 오는데 한 시간반, 탁발하는데 한 삼십 분 쳐. 그럼 세 시간이 넘는데 몇 시에 나가야 돼?

보통 스님들은 수행처에서 일종식을 합니다.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에 보통 공양을 해. 그럼 그 세 시간 제하면 몇 시에 출발해야 되는 거라?

스님도 그래서 그걸 알았어요. 탁발하는 시간이 새벽에 손을 딱 펴가지고 손금이 보이는 시간부터 탁발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하는 걸.

앞에 앉아서 스님들이 바리때들고 요러고 있어요. 손금이 보이나 안 보이나. 보여야 출발을 하니까, 안 보이면 탁발나가면 안되거든. 계율위반이니까. 그러니까 어두컴컴한데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서 다 모여가지고 앞에서 요러고 있는거라 다들. 이게 보여야 가니까.

그때 출발을 하면 대부분 땅바닥에 있는 것들 잘 안 보입니다. 바로 밑에만 보면 그게 보이죠. 걸어가면서 밑에만 쳐다보면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자칫 알아차림을 놓쳐버리면 물구덩이에 텅 발이 빠지기도 하고, 맨발로써 가야 되니까. 또 자칫 잘못하면 새벽에 아직 자고있는 뱀 옆에 땅을 디디다가 뱀이 놀라서 탁 물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수행 초기, 처음 출가하고 나서 초기 때 많이 물렸지 나중에 지나면 안 물려요. 왜 그런지 아세요?

내가 여기 발을 디딜 덴가 아닌가를 딱 압니다. 거짓말 같겠지만 내가 발을 디딜 때 적당한가, 그리고 그런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를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발이 들렸다가도, 앞에 뱀도 안 보여 그리고 웅덩이 있는지도 모르는데도 그걸 아는 거라. 나중에 세월이 지나면서 아! 내가 수행하는데 사띠만 있으면 다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구나 하는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어요.

 

사띠와 함께 일어나야 하는 게 바로 '삼빠자나' 입니다.

팔을 구부리고 펼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런 삼빠자나에 대한 이해들을 분명하게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동작에서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유지하면서 그 동작들에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가끔씩 한국와서도 그런 경우들을 당합니다. 얼마전에 스님 차가 고속도로 가다가 퍼졌거든요. 가지 전에 차에 시동을 거니까 시동이 걸려요. 그런데 전에 스타트를 했을 때하고 지금 스타트를 했을 때는 느낌이 다릅니다. 차를 많이 몰아본 사람들은 아마 알겁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내가 분명하개 삼빠자나가 없었을 거 같으면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고 그냥 가버립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다르다는걸 이해를 딱 하고나면, 그다음에 해야될 것이 자동적으로 떠오릅니다.

‘아! 가기 전에 카센타 가서 이걸 점검을 하고 가야 되겠다’

 

그래서 카센타에 갔어요. “이게 시동을 거니까 좀 틀립니다.” 카센타 사장이 해보더니 “뭐가 틀립니까?” 그러는 거라. 자기는 안해봤으니까 모르지. 그런데 나는 분명히 틀린 줄을 알거든. 그럼 “내가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어쨌든 틀리니까 점검을 해주십시요” 해가지고 이렇게 점검을 했어. “아무 이상 없습니다!” 이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다시 물어봤어요. “이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꼼꼼하게 보십시요.” 했는데도 또 괜찮대.

 

그래서 찜찜하면서도 고속도로를 갔어. 그런데 가다가 보니까 차가 전에 같은 그런 속도로 나아가지지를 않는 거라. 그걸 분명하게 몰랐을 거 같으면 가다가 그냥 속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가버렸을 거라. 그런데도 분명하게 이상이 있는거라. 그래서 속도를 늦추었어.

아니나 다를까, 속도를 늦추고 갓길로 해가지고 한 30km 40km 속도로 가다보니까 차가 스르르르 꺼져버리는 거라. 만약에 그렇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냥 내 속도로 갔을 거 같으면 차가 저절로 시동이 꺼지고 퍼지고나면 이 핸들이 제어도 안됩니다. 그냥 어디가서 받는 수밖에 없는 거라.

 

'분명한 앎'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지금 당장 내가 눈앞에 닥친 것만이 아니고 전후 사정을 봤을 때, 이것이 어떻게 내가 행동하는 것이 바른 것이고 어떻게 지금 내가 하는 것이 적당한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끔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그와 같이 알아차려야 됩니다.

 

수행이 안 될 때는 그 안될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수행이 잘되는가, 내가 지금 뭐가 부족한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분명하게 알도록 그걸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안된다고 성질부리고 안된다고 용을 쓰고 이렇게 하지 말고.

 

시간이 많이 됐는데 이까지만 하도록 합시다.

그 뒤에 부분은, 사실은 뒤에가 더 중요한 건데, 한번 보십시오. 크게 설명 안 해줘도 큰 문제는 없겠죠! 그렇죠! 먹는 것에 대한 것은 다음에 언제 시간 날 때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먹을 때나 마실 때나 씹을 때나 맛을 볼 때 분명한 앎으로 행하라.' 하는 이 부분은 굉장히 좀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다음에 한번 시간을 내서 자세하게 얘기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맛이라고 하는 갈애에 대한 부분하고 연관이 돼있는 것들이고 하기 때문에 자세하게 얘기를 하도록 하고,

'대소변 부분'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거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려고 할 때나 깨어있을 때' 이거는 한 번 더 하기는 해야 될 것 같은데.

'말할 때' 이런 부분은, 한번 보고 꼭 해야 될 경우에는 다음 시간에 한번 더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은 사띠하면서 사는 습관을 가지라는 것, 알아차림을 가지는 습관을 자꾸 가지라는 것. 그다음 두 번째가 발란스를 맞춰라는 것. 몸과 마음에 대한 발란스, 수행하는 힘에 대한 발란스, 이런 발란스를 자꾸 맞추도록 하라는 그 부탁만 좀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