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jV-aKtpLer0
9강. 신념처- 몸의 자세 4가지(四威儀)- 행주좌와에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하라. (20110430)
오늘 프린트물 누가 한번 읽어봐요 한글로 번역된 것만 한번 읽어봐요.
[수행자 독송 :
빅쿠들이여, 잠시 나아가서 빅쿠는 걸어가면서는 걸어간다 라고 분명하게 알고,
서있을 때는 서있다고 분명하게 알고, 앉아있을 때는 앉아있다고 분명하게 알고, 누우면서는 눕고있다 라고 분명하게 안다. 그와 같이 연이어서 그의 몸이 향하고 있는 상태에 따라서 그것을 분명하게 안다.]
예. 거기까지. 빨리어 풀이는 일부러 안 하겠습니다. 크게 문제될 부분은 없습니다. 현재분사냐 과거분사냐 하는 그 부분만 조금 차이가 나는 것들이고, 그래서 과거분사와 현재분사에 따라서 용어를 조금 달리 썼습니다.
'누운 상태'를 얘기한 것이 아니고 '눕고 있는 상태'를 얘기할 때를 얘기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현재분사'를 쓰는 거고.
다른 데는 누운 상태를 얘기하기 때문에 그거는 그렇게 되면 과거분사가 돼버리기 때문에, 용어상으로 현재분사일 때 그런 부분만 약간씩만 주의하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이 문장을 이해못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렇죠!
가고 있으면 가고있는 줄 알지! (수행자 대답)
그런데 가고 있는데 가고 있는줄 알아차리고 있는가?
이 앞의 파트는 수행에서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수행법으로 하는 것들을 얘기했다고 할 거 같으면, 여기에서는 수행이, 생활과 수행이 접목되는 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생활하는 것이 곧 수행이고 수행이 곧 생활하는 것이라 해서 서로 손을 잡고 있는 관계라고 봐야 됩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평이한 단어들입니다. 말들인데,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게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눈을 뜬 줄을 안다, 그럴 거 같으면 눈을 뜬 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하고 부처님께서 얘기를 합니다. 마지막 잠자리에 들 때도 꼭 마찬가지고. 모든 생활 자체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 하는 것들이 경전 곳곳에서 등장을 합니다.
몸이 알아차릴 대상이면 몸을 알아차리는 거고,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이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거고.
눈을 떠서 내가 먼저 알아차린 게 뭐라? 내 마음이 흐리멍텅한 상태다 그러면 흐리멍텅한 마음을 먼저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지금 누워있는 상태의 몸을 알아차릴 거 같으면 몸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라는 거라. 그렇게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수행은 쉽게 말하면 눈 떠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눈 감을 때까지 철저하게 일치되도록 하라 하는 것이, 오늘 두 번째 몸의 자세, 보통 '4위의(四威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네 가지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하도록 하라'하는 것들입니다.
스님을 따라서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대상이 생긴 순간 생긴 그대로 반드시 알아차린다.'
'동작이나 장소, 자세와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이게 이 문장의 주요 테마입니다.
수행은 생겨나는 것을 생겨났다고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들인데, 그 생겨나는 것이 뭐 특정한 장소에서만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내가 원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것만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또 몸이 항상 좌선하고 있을 때만 그런 것들이 알아차릴 대상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장소에서만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또 특정한 자세 누웠을 때 앉아있을 때 서 있을 때 걸어갈 때 이럴 때만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또 특정한 시간에만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은 이것을 선택할 수도 없고, 선택해서도 안 되고, 단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들입니다.
그게 이 문장인데, '대상이 생긴 순간'이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떤 대상이 먼저 생길까? 대상이 생긴 순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대상이 생긴 순간이라는 의미는 만약에 걸어가고 있다, 그러면 걸어가는 대상이 생긴 거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생각하고 있는 대상이 생긴 겁니다. 그렇게 생긴 순간에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생활하고 수행하고 일치가 되느냐?
좌선만 할 것 같으면 좌선한 동작에서 그 좌선에서 생긴 만약에 호흡이면 호흡, 그렇지않으면 '이뭣고'면 '이뭣고'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두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대상과 다른 것들은 같이 병행해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수행은 생활 자체와 수행을 동시에 할 수 있다 하는 거라.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다 하는 거라. 두 가지를 동시에 하려고 할 것 같으면 틀림없이 마음이 그 생겨난 것에다가 두어야만이 두 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걸어가는 것이 하나가 있다, 그러면 걸어가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 이렇게 두 가지를 할 수 있다는 거라.
그런데 보통은 걸어갈 때 걸어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으면 수행이 안 될 뿐아니라 수행과 일상생활이 분리되게끔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무엇을 하고 있든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대상, 대상이 생긴 순간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도록 자꾸 해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단지,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뚜렷한 것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앉아있을 때 호흡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면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들을 해나가는데, 다리가 아프다 그럼 다리도 알아차려야 되고 다리를 알아차리는 마음도 있어야 되고 이럴 거 같으면 안 된다는 거라.
호흡이 있을 거 같으면 호흡이라고 하는 동작 그리고 호흡을 알아차리는 마음 이것만 이 두 가지만 있어야 되는 것이고, 통증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통증이 있다고 하는 것 그다음에 통증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 이것만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순차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돼야되는 것이지 호흡을 알아차리면서 통증을 동시에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걸어가면서는 오로지 걸어만 가야 되지, 걸어가면서 생각을 할 수도 없고 걸어가면서 망상을 피울 수도 없다는 거라. 또한 걸어가면서 냄새도 맡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냄새를 맡을 때는 분명하게 멈추어 서서 냄새를 맡아야 되는 거고, 생각할 때도 걸어가는 것을 멈추고 생각을 해야 된다는 거라.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는 것은 지금 일어난 것들이 하나이고, 그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하나, 이 두 가지가 쌍으로써 일치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지 대상 자체가 두 가지를 동시에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일어난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냐 하면, 대상 자체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다 하는 겁니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대상이고,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는 대상이다. 그래서 지금 일어난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존재하는 대상'을 얘기합니다. 그것이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고 그래야만이 지혜가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래서 '부땅 부따또 빳사띠(bhūtaṁ bhūtato passati)' 이럽니다. 현재 일어난 것 현재 생겨난 대상을 그 생긴 순간에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면 과거를 기억한다. 또 미래를 생각한다. 뭐를 가지고 하는 겁니까? 머리로 하는 거죠. 수행에서는 머리로써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은 붓다눗사띠를 한다. 부처님에 대해서 회상을 하면서 그것을 수행대상으로 한다. 그럴 경우 어떻게 됩니까? '부처님~' 하면서 부처님 형상을 보고 눈을 감고 그리고 그 부처님에 대해서 '부처님~'하고 마음속에 새깁니다.
이것도 과거의 것들을 대상으로 해서 마음에 새깁니다. 그거는 가능하죠? 그래서 과거의 일들을 회상할 수 있는데 한계점이 뭡니까?
'붓다눗사띠(buddhānussati)'의 한계점은
대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 오로지 거기에 마음을 묶어두는 데는 좋은 방법이 될지언정 거기서 무상·고·무아의 성품들로 발전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고 행위들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그 하나의 현상에 묶어두려고 할 것 같으면 일상생활하고는 떨어지게 된다는 거라. 그런 단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과거의 일들을 떠올려서는 안 된다, 또 미래의 계획들도 미리 앞당겨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철칙입니다. 그래서 현재 일어난 것, 현재 생각난 것, 현재 일어난 것들만 대상으로 반드시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의 단계에서 문소성, 사소성, 그다음에 바와나마야냐나를 한자로 뭐라 하는지 모르겠네. 아, 그걸 수소성이라고 그럽니다.
기억을 통해서 생각을 떠올려가지고 그것을 기억해내는 것들, 그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다음에 책을 통해서 책을 읽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환희심이 일어나고 거기에 마음을 꽉 붙잡아두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와나마야'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 차원을 달리 해버린다는 겁니다. 실재 현상들이 변해가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게 차이점입니다.
그래서 바와나마야냐나(bhāvanāmaya ñāṇa)를 할 경우에는 과거나 미래는 반드시 일으켜서는 안 된다.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 생각이면 생각, 그다음에 물질적인 현상이면 물질적인 현상, 그래서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만 대상으로 해야 된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거라. 대상이 생긴 순간이라는 것은! 그렇게 되면 대상이 생겼을 때 그게 어떤 대상이냐에 따라서 거기에다가 바로 마음을 두도록 하라는 거라.
그걸 경전 첫머리에 '걸어가고 있을 때는 걷고 있다라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갓찬또와 갓차미띠 빠자나띠 gacchanto vā gacchāmīti pajānāti'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걷고 있을 때는 걷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갖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으면 갖고 싶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거고. 또 내가 생각을 하고 있으면 생각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말하고 있으면 말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음식을 먹고 있으면 음식을 먹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손을 뻗고 있으면 손을 뻗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모든 행위 그게 육체적인 행위든 정신적인 행위든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럼 어떻게 알아차려야 될까? 어떻게 알아차려야 될까?
가고 있는 걸 누구든지 다 압니다. 지가 걷고 있으면 걷고 있다고 알지 앉아있다고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걷고 있을 때는 어떤 현상들이 있습니까? 걸어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걸어갈 수 있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걷고 싶은 의도가 있어야만이 걷게끔 됩니다. 앉고 싶어 하는 의도가 있어야만이 앉아지게 됩니다. 생각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어야 만이 생각을 하게끔 됩니다.
그러면 걸어가는 행위가 있으려고 할 것 같으면,
걷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야 됩니다. 그럼 걷고자 하는 의도만 있으면 걸어집니까? 그다음에 뭐가 필요하겠어요? 실제 몸이 움직여야 되겠죠. 몸이 움직이는 것이 있습니다.
행위 자체가 있다는 겁니다 걸어갈 때는 걷는 행위가 있고, 말을 할 때는 말을 하는 행위가 있고, 생각을 할 때는 생각을 하는 행위가 있습니다. 그 행위가 반드시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행위만 있으면 다 됩니까? 걷고 싶기 때문에 다들 걸어갑니다. 그래서 그런 걷는 행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마음으로 걷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춰져야 만이 걷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안다는 것이 됩니다.
모든 행위에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만이 수행이 바르게 된다는 겁니다.
의도를 알아차리기 쉬울 때가 언제 알아차리기 쉽습니까?
하나의 행위가 끝나고 다음 행위가 일어나기 전에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계속 걷고 있다 그러면 걸어간다는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언제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까?
일어서서 멈춘 상태에서 걸어가기 전에 '아, 내가 걷고자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의 행위가 시작되기 전에 걷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걷고자 한다고 알아차리고 나서 걸어가기가 수월하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동작이 끝나기 전에 아, 내가 멈추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만이 멈출 수가 있습니다. 하나의 동작이 끝나기 전에도 그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모든 동작의 시작과 끝부분에는 의도를 알아차리려고 강하게 마음을 일으켜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처음에 걸을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처음에 서 있는 상태에서 '걷고자 함' 하고 의도를 알아차리려고 하고 나서 반드시 걸음을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마지막 걸음 부분이 끝나는 부분에 올 거 같으면 '멈추고자 함' 하고 나서 발이 멈추도록 하고. 그러고 나서 딱 멈춰지고 나면은 '돌고자 함' 하고 돌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서 돌도록 하고. 그러고 나서 다시 나아가고자 한다는 의도를 내고 나서 '나아가고자 함' 하고 의도를 내고 나서 나아가지도록 하고, 걷도록 하고, 이렇게 자꾸 훈련을 쌓아나가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모든 행위에는 그 의도가 있고, 행위가 있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있고, 그 세 가지가 같이 어울려지게끔 됩니다.
이때까지는 수행을 해나가면서 그 대상 자체만 알아차리면 됐습니다.
호흡이 있으면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만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리고 그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그 행위에서 느낌으로써 딱딱한 느낌, 가벼운 느낌 그런 느낌들로써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서 그 모든 행위에는 의도가 먼저 앞선다는 걸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의도가 없으면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스님하고 같이 읽어봅시다.
'대상이 생긴 순간, 생긴 그대로 반드시 안다.'
그래서 '생긴 그대로 반드시 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 행위에는 의도가 있고, 그 행위가 있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알 수 있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처음에는 구분이 잘 안 될 겁니다. 구분이 안 돼도 의도적으로라도 그렇게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의도를 어떻게 알아차리라고 했어요?
발을 들어 올릴 때, 의도를 알아차리려면 처음엔 어떻게 알아차려집니까? 몸이 바람 앞에 이렇게 서 있습니다. 몸이 휘청합니다. 어떤 느낌이 듭니까? 바람이 뒤에서 확 미는 느낌이 들죠? 미는 느낌이 들면 몸이 휘청하게끔 됩니다. 실제로 그렇게 밀 때.
의도를 알아차릴 때 초보자들은 어떻게 알아차려지느냐면,
발을 들어 올릴 때는 땅바닥이 탁 밀어 올려지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런 느낌이 일어남과 동시에 발은 탁 들리게끔 됩니다.
의도를 알아차릴 땐 그렇게 알아차려 보십시오.
'바람의 요소'로써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 가장 수월합니다.
그래서 발을 들어 올릴 때 땅바닥이 발바닥을 탁 튕겨주는 느낌을 받을 때 ‘아, 이것이 의도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 짧은 찰나에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서, 그러고 나서는 발이 들어올려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들어올리면서 들어올린다고 알아차리도록 하라. 나아갈 때도 마찬가지고, 내려놓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내려놓을 때는 땅바닥이 차는 그런 느낌과 같은 의도가 일어나는 게 아니고, 또 다르게 느껴집니다. 발바닥을 땅으로 누군가가 끌어내리려는 느낌이 들든지 그러고 나서 발이 땅으로 이렇게 내려가는 것들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경험해보려고 할 것 같으면 발을 여러분들이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정지를 한번 해보십시오.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물론 그 대상에 마음을 오롯이 알아차리고 있어야지 만이 그대로 정지해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한 시간이고 좋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도가 일어나면 반드시 땅으로 뭔가가 다리를 끌어내리려고 하는 느낌들이 틀림없이 일어납니다. ‘아, 이게 의도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그러고 나서 땅으로 발이 서서히 내려가는 걸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발을 들어 올릴 때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섣불리 들어 올리지 말고 땅에다가 딱 붙이고 있다가, 내가 걸어가려고 하는 의도가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걸 분명하게 한번 보십시오.
왜 이렇게 알아차려야 되느냐 하면 마음은 자꾸 움직이려고 합니다.
지 혼자서 가만히 매여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움직이려고 할 것 같으면 의도가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그럼 가만히 있을 거 같으면 뭔가 의도가 일어납니다. 움직이려고 하는 의도가 일어날 것 같으면 틀림없이 일어나고 나서 발이 들리게끔 됩니다. 한참 동안 오래도록 참고 있으면 그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수월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의도가 있어야 만이 모든 행위가 있다.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고, 보는 것도 마찬가지고, 듣는 것도 마찬가지고, 모든 행위에는 의도가 앞선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대상이 생긴 순간 생긴 그대로 반드시 알아차린다'는 의미입니다.
의도가 앞서서 행위가 따른다는 걸 알아차려서, 그 행위가 일어난 걸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마음으로써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동작이나 장소, 자세와 시간을 선택하지 않고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수행은 '동작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어떤 동작을 해도 그건 그대로 그냥 알아차려야 됩니다. 요리를 하고 있으면 요리를 하고 있다고 알아차려야 되고, 운전을 하고 있으면 운전을 하고 있다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경전에는 심지어 이렇게까지 쓰여 있습니다. 대소변을 볼 때 대소변을 본다고도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깨끗한 것들, 또 알아차리기 쉬운 것들만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모든 동작, 모든 동작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는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고, 마실 때는 마신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됩니다.
수행 초보자들이 빠뜨리기 쉬운 것이 그겁니다.
좌선했다가 경행 할 때 일어난다고 알아차리지를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경행할 때는 또 알아차리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또 좌선 들어갈 때는 좌선으로 들어가는 동작 자체를 알아차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 경전에서는 동작을 내가 선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동작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걸 빠트리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라. 모든 움직임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차리려고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장소를 선택하지 않는다.'
알아차릴 때는 장소를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이 자리에만 와서 여러분들이 수행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알아차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집에서든지, 전철 안에서든지, 아니면 어떤 모임의 장소이든지, 아니면 어디 파티장에 가 있든지, 어떤 장소에서든지 항상 알아차릴 대상이라는 생각을 해야된다는 거라.
수행을 꼭 여기에서만 할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여러분들이 여기에 와서 수행하는 시간들이 일주일에 꼴라당 몇 시간이나 돼요? 나머지 때는 전부 여러분들이 행해있는 장소입니다. 서 있는 장소들이라는 거라. 모든 장소에서 알아차리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여기 같이 환경조건이 좋고 수행하기 수월한 곳들만 수행의 장소라고만 생각하지 말아라 하는 거라.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 불결한 화장실에서 조차도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라는 거라. 그것도 하나의 장소라는 거라.
모든 것들이 장소가 된다는 거라. 그런 뜻으로써 어떤 경우든지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해야된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자세를 선택하지 않는다.'
자세를 선택하지 않고 알아차린다 하는 거라. 자세를 선택해서 알아차린다고 할 것 같으면 수행은 네 가지밖에 없습니다. 걸어갈 때 수행하고, 앉아서 수행하고, 서 있을 때 수행하고, 멈췄을 때 수행하고.
물론 그게 자세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멈췄을 때는 '서있음'하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천천히 알아차려 나갑니다. 돌아설 때는 돌아선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걸어갈 때는 걸어가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누워있을 때는 누워있는 걸 또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앉아있을 때는 앉아있다는 것을 또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그 자세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 외의 자세들이 여러분들에게 얼마든지 있습니다. 팔을 뻗는 자세도 있는 거고, 아난다 같이 머리가 땅에 닿기 전의 자세도 있는 거고, 내가 밥을 먹을 때 손을 꺽는 자세도 있는 거고, 갖가지 자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세들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라. 모든 자세들은 수행해야 될 자세이고, 그걸 알아차릴 대상이라고 자꾸 생각을 해야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수행은 반드시 네 자세에서만 하려고 한다는 거라.
자! 우선 네 자세(四威儀)! 가장 크게 한번 봅시다.
`앉아있을 때는 뭘 대상으로 합니까? 일차적인 대상이 호흡이죠.
왜 호흡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합니까? 하고 많은 대상 중에 왜 앉아서 호흡을 대상으로 합니까? (수행자 대답) 언제나 계속되는 건 호흡뿐 아니라 생각도 언제나 계속됩니다. 살아있으면 그건 언제든지 계속되게 돼있습니다.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겠죠. 물론 언제나 계속되기 때문에 그것을 합니다. 예? (수행자 대답) 그게 정답입니다.
가장 움직임이 많은 게 뭡니까? 앉아있을 때는 호흡입니다. 움직임이 많으면 변화하게 돼있습니다. 그럼 변화를 알아차리기 쉬운 게 호흡이기 때문에 호흡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앉아있을 때는 고요하고 하면 생각도 잘 일어나지 않고, 몸도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힘이 듭니다. 그러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릴 때는 마음을 갖다 붙이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앉아있을 때는 호흡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라는 거라.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움직임이 있다, 생각이라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면 생각이 대상이 되는 거고. 통증이라는 움직임이 있다, 그러면 그게 대상이 되는 거고. 그런데 어쨌든 앉아있을 때는 가장 큰 움직임은 호흡이기 때문에 호흡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라는 겁니다.
`걸어갈 때는 어떤 게 일차적인 대상입니까? 걷는 동작입니다.
가장 움직임이 큰 게 뭡니까? 걸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걸어갈 때 발바닥을 알아차리면서 걸어가라는 거라. 걸어가더라도 생각이 일어났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호흡할 때도 호흡을 중단하고 생각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걸어갈 때도 걸음을 중단하고 생각을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보는 것들이 있다, 그게 크게 움직임으로써 내게 다가왔다, 그러면 걷는 걸 멈추고 보도록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서 있을 때는 뭐가 가장 일차적인 대상입니까?
서 있을 때, 뭐가 움직입니까? 별로 내세울 게 없죠! 그러면 그대로 가만히 있어야 됩니까? 그렇기때문에 마음을 내야됩니다.
서 있을 때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일으켜서, 머리끝부터 시작해서 '접촉돼있는 부분'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잡아야 됩니다. 어떤 것이 접촉돼있습니까? 입술이 서로 접촉돼있죠. 손이 붙잡아져 있으면 손이 접촉돼있습니다. 오른쪽 발바닥이 접촉돼있고, 왼쪽 발바닥이 접해져 있습니다. 이것을 순차적으로 알아차려라는 겁니다.
'서있음'하고 전체적으로 머리끝부터 해서 발끝까지 내 몸의 상태가 어떤가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나서, 그러면 내가 분명하게 압니다.
아! 손은 내가 이렇게 잡고 있구나. 내가 어깨가 긴장을 하고 있는가 아닌가, 똑바로 서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하나씩 알아차리고 나서는, 그다음에 순차적으로 하나씩 오른쪽 눈이 닿고 있으면 '오른쪽 눈' 하고 알아차리고, 왼쪽 눈이 닿아있으면 '왼쪽 눈' 하고 알아차리고, 손이 맞잡고 있으면 '손'하고 알아차리고, '오른쪽 발바닥' '왼쪽 발바닥' 하면서 순차적으로 하나씩 알아차리라는 거라.
이건 오래 할 수 있어요, 없어요? 한두번 이렇게 왕복해서 알아차리고 나면 그다음에는 별로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 있을 때는 그렇게만 알아차리고 나서는 알아차림 대상을 바꾸어야 됩니다. 어떤 것으로 알아차려야 됩니까?
서 있을 때 그거 말고 가장 움직임이 큰 게 뭡니까? 호흡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서 있는 동작, 서 있는 현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나서, 호흡으로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호흡이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그런데 앉아있을 때와 서 있을 때의 차이점은,
호흡을 알아차리더라도 앉아있을 때는 자세가 안정이 돼 있기때문에 오래도록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 있을 때는 자세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호흡을 오래도록 알아차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5분 이상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것을 알아차려라. 그래서 서 있을 때는 그렇게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면 됩니다.
`누워있을 때는 어떻게 대상을 해야 됩니까? 누워있을 때도 꼭 마찬가지죠!
서있을 때와 같이 몸이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누워있는 상태를 먼저 관찰해야 됩니다. 누워있을 때는 어디가 닿아있습니까? 머리가 닿아있고 엉덩이가 닿아있고 오른쪽 발뒤꿈치가 닿아있고 왼쪽 발뒤꿈치가 닿아있고 손도 맞대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씩 알아차려야 됩니다.
왜 자세를 먼저 알아차려야 되느냐 하면
자세를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않을 거 같으면 몸이 긴장을 해버립니다.
서 있는 상태도 몸의 자세를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않으면 몸이 긴장을 해버리기 때문에 경행을 오래도록 할 수가 없습니다. 좌선을 할 때도 몸의 자세를 먼저 알아차리지 않으면 긴장을 해 있기 때문에 오래도록 할 것 같으면 항상 문제가 생겨버립니다. 누워있을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누워있는 자세들을 하나씩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닿아있는 느낌들이 편안한가? 닿아있는 느낌들을 어떻게 내가 알아차리고 있는가? '머리가 닿아있다'고 알아차리고, '손이 닿아있다'고 알아차리고, '엉덩이가 닿아있다'고 알아차리고, 불편하다 할 것 같으면 편안하게 만들어주라는 거라. 그렇게 해서 누워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는, 서 있을 때와 꼭 마찬가지로 강하게 움직이는 것은 호흡입니다. 그러면 호흡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누워있을 때와 앉아있을 때의 차이점이 뭡니까? 호흡을 알아차릴 때.
누워 있을 때는 크게 노력을 하지 않아도 호흡을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앉아있을 때는 강하게 알아차리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누워있을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압니다. 노력이 크게 들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노력이 크게 들지 않으니까 어떻게 돼요? 알아차림도 자연히 약해져 버립니다. 그러면은 대상이 없으면 어떻게 돼요? 잠에 툭 떨어져 버립니다.
잠자기 전에는 그래서 반드시 이렇게 수행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편안하게 잠에 들기 전에는 누워서 알아차림 하는 것을 반드시 하고 잠자리에 들도록 하라.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누워있는 상태에서 하기 쉬운 것이 누워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누워있는 상태를 알아차리고, 호흡을 알아차리고 해서 그때는 알아차림을 강하게 해서 완전히 깨어나도록 하라.
누워서 수행할 경우에는 잠자리에 들기 직전과 잠자리에서 막 깨어났을 때, 이때는 누워서 하는 수행들을 되도록 합니다.
이게 사위의(四依止) 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수행은 좌선하고 경행이죠. 좌선할 때는 아까같이 그렇게 호흡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해서 합니다. 경행을 할 때는 걸음걸이를 일차적인 대상으로 합니다.
그런데 경행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분명하게 갔다가, 그대로 멈춰 서서, 돌아서서, 다시 처음 출발했던 대로 옵니다. 이리 갔다가 또 저리 갔다가 이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산만해지기 때문에. 마음이 산만해지는 것들은 되도록이면 피해야됩니다.
피하기 위해서 시선도 되도록이면 바닥을 향하도록 하고,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 것들도 되도록이면 안 들을려고 하고, 보이는 것도 안 보이도록 하고, 냄새 맡는 것도 안 맡아지도록,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하면서 오로지 걷는데 만 마음을 두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갔을 때는 반드시 멈춰서고 나서 '멈춤' 하고 알아차리라고 합니다.
왜 멈추라고 할까? 왜 멈춤을 알아차리라고 할까? (수행자 대답)
멈춤을 모르면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힘이 듭니다. 모든 의도는 새롭게 시작될 때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 멈춤이 있어야 만이 시작이 돼나갑니다. 그래서 의도를 알아차리기 가장 용이한 것이 멈춤을 알고 나면, 그다음에는 마음이 분명히 다른 것들을 하게끔 됩니다. 그 다른 걸 하게끔 되는 마음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래서 경행을 하고 딱 끝나고 나면 '멈춤'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리고 멈춘 상태가 오래도록 지속이 될 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서 있는 상태를 알아차리면 됩니다. '멈춤'하고 알아차리고 나서 서 있는 상태 머리끝부터 해서 발끝까지 전체적인 것들을 하나씩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마음을 멈추는 것이 그래도 더 멈춰있을 경우에는 배를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라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멈춤'하고 다시 알아차리고 나서 몸을 틀어야 되는 동작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의도를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발이 '들어올림' '돌림' '내려놓음' '왼발 들어올림, 돌림, 내려놓음' 다시 '오른발 들어올림, 돌림, 내려놓음' 다시 '왼발 들어올림, 돌림, 내려놓음' 하면서 180도 돌도록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돌아와서 다시 또 '멈춤'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그리고 나아갈 때는 '나아가고자 함'하고 의도를 알아차리고, 반드시 발걸음을 떼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게 일반적으로 자세, 수행의 자세에서 알아차려야 되는 것들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모든 자세들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으라는 거라.
하나라도 놓치려고 자꾸 마음을 두지마라 라는 거라. 이것만 수행이다 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수행의 대상입니다. 그것뿐 아니라 이 네 가지 자세 말고도 우리는 여러 가지 자세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자세들을 다 알아차릴 대상으로써 보라 하는 겁니다. 밥을 씹고 있으면 씹고 있다는 자세,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래서 '씹고 있음' 하고 알아차리도록 하라. 팔을 뻗고 있으면 뻗는다고 알아차리고, 숟가락을 가져오면 가져온다고 알아차리고, 입에 넣을 것 같으면 입에 넣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모든 동작을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다 분해해서 알아차리도록 하라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수행은 시간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수행 시간은 아침에 깨어나기 시작해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모든 시간들은 수행의 시간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모든 것들이 수행이다 하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사띠가 일어난 것들, 앞의 사띠와 뒤의 사띠가 연속하게 됩니다. 앞의 사마디와 뒤의 사마디가 연속을 하게끔 됩니다. 앞에 일어난 마음과 뒤에 일어난 마음들이 연속함을 분명하게 알게끔 됩니다. 이렇게 해야만이 수행이 무르익어 가지는 거라!!!
그래서 가장 알아차림이 성숙할 때, 가장 알아차림이 날카롭게 되어나갈 때, 분명하게 예리하게 깨어있을 때 지혜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아! 이것이 물질적인 현상이고, 이것이 정신적인 현상이구나 하고 구분을 해볼 수가 있게 되고. 아! 이것이 사라지는 현상이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되고.
지혜가 일어나려면 이와 같이 앞의 사띠와 뒤의 사띠, 앞의 사마디와 뒤의 사마디, 그런 알아차림들이 연속해나갈 때 지혜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걸 놓쳐버리지 않도록 자꾸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이 열반을 증득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내가 이마만큼 되었으면 아, 내가 이마만큼 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경전에는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행복하다고 마음을 먹지 말아라고 그럽니다. 수다원이 됐으면 아, 수다원에 이르렀다고 행복하다고 마음을 먹지 말고, 수다원에서 더 나아가려고 하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사다함으로 나아가지고, 아나함으로 나아가지게 됩니다.
이것을 알아차렸으면, 하나의 대상을 알아차렸으면 그다음 대상도 알아차리려고 자꾸 노력을 하라는 거라. 그렇지않으면 앞의 대상을 알아차린 데서 그냥 행복하다고 느끼고 거기서 정주를 해버린다는 거라.
그러면 사띠도 연속이 안 되는 거고, 알아차림도 연속이 안 되고, 사마디도 연속이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하나를 알아차렸으면 그다음 걸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거라.
수행은 여러분들이 아라한이 될 때까지도 끝남이 없습니다. 아라한이 되어도 계속적으로 해나가야 되는 것이,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해나가야 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 생각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실천해나가는 자들에게는 마음속에서 탐·진·치가 엷어지게 됩니다.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탐·진·치가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한 번의 알아차림이 있을 때는 한 번의 탐·진·치는 없습니다. 열 번의 알아차림이 있는 자는 열 번의 탐·진·치가 없는 마음으로서 살아간 겁니다.
내가 지금 스트레스가 많다, 내가 지금 무슨 고민이 많다, 아니면 내가 어려운 것들이 있다, 그럴 거 같으면 알아차림을 연속하도록 자꾸 하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 알아차림의 힘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것이 항상 밝게 되고 고요하게 되고 탐·진·치가 없이 나아가지게 되는 것들입니다.
내가 인내심이 없다 그러면 아, 알아차림이 연속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아십시오. 알아차림이 연속해나가면 인내심은 당연히 길러집니다. 내가 화내는 것들이 많다 그러면 알아차림이 연속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십시오. 내가 욕심이 많다 그러면 알아차림이 연속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게 이 장(章)에서 얘기한 겁니다.
모든 것들은 일어난 즉시 분명하게 알아차리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에는 시간이나 자세나 여러 가지들이 구애받지 않는다는 거라. 어떤 상태, 어떤 시간, 어떤 자세에서도 수행은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게 이 대념처경의 두 번째 시간입니다. (몸의 자세)
그렇게 해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몸에서 몸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고,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들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고, 그리고 '아! 이것은 몸이다' '몸이 있다'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들을 확립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더 높은 지혜와 이해의 단계까지 머무르게 되면 어떤 대상에든지 의존하지 않고 머무르게 되고, 어떤 물질적인 대상이든 정신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게끔 되는 겁니다. 이것이 몸에서 몸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수행입니다. 자세에서 몸에서 몸을 놓치지 않는 방법입니다.
자! 오늘은 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삼빠자나(sampajāna)'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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