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념처경 법문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7강. 신념처- 아나빠나 사띠(Ānāpānassati)

담마마-마까 2019. 5. 15. 15:33

https://youtu.be/uPLSuVrAdIw

7강. 신념처(까야누빳사나)- 아나빠나 사띠(출입식념) (20110402)

 

오늘까지 하면 몸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중에 까야누빳사나 부분의 첫번째 부분이 마쳐집니다. 그런데 오늘 프린트물은 「아나빠나 숫따」 부분에서 크게 다른 부분이 없죠? 반복되는 것들이죠. 아! 오늘까지 되는 것이 아니고 다음시간까지 돼야 됩니다. 뒤에 아나빠나사띠라도 위빳사나 부분이 있기 때문에, 위빳사나 부분 열가지 부분은 또 따로 설명이 돼야 됩니다.

그전까지 오늘 프린트물 세번째 위빳사나라고 돼있는 그 앞에 부분까지는, 앞에 부분이 반복되죠! 그래서 별로 설명할 거는 없습니다. 복습 한번 해볼게요.

 

'아-나-빠-나 사띠(Ānāpānasati)'는 네 부분으로 나눠서 알아차린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네 부분으로 알아차리게 돼 있습니까?

 

[[ a. 호흡이 길면 긴 줄 분명하게 알고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b. 짧으면 짧은 줄 분명하게 알고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c. 전체적인 호흡 과정을 명확하게 알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쉴 것이다.

 d. 호흡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쉴 것이다.]]

 

호흡을 왜 길면 긴 줄 알고 짧으면 짧은 줄 안다고 알아차리라고 그랬어요?

(수행자 대답)

일단 내가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대상에 마음을 두기 위한 거죠.

내가 알아차리는 대상이 뭐라? 호흡이잖아. 그럼 호흡에다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두기 위한 겁니다. 그렇게 두다 보니까 길면 긴 줄 아는 거고, 짧으면 짧은 줄 아는 거고 그런 겁니다.

야생에 있는 원숭이를 잡아 오면 처음에는 말뚝에다가 묶어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날뛰겠죠. 날뛰다가 일정하게 날뛰지 않게 될 때까지는 어떻게 해야 돼요? 마음은 끊임없이 원숭이에게 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저기 끈이 풀렸는지 원숭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따라서 내가 대처를 할 거 아니라.

그게 첫 번째, 두 번째 호흡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첫 번째, 두 번째 호흡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뭐라?

원숭이를 묶기 위해서 말뚝이 필요한 것이고 원숭이를 묶어놓을 끈이 필요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호흡이 어떤 호흡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들이 있어야 되는 거고, 그 대상에 끊임없이 마음이 가있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는 어떤 수행을 하든지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죠.

그걸 보통 '위딱까(vitakka)' '위짜라(vicāra)'다 이렇게들 얘기를 합니다.

 

어쨌든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을 알고, 들이쉴 때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줄을 알고, 내쉴 때 길면 긴 줄 알고 짧으면 짧은 줄 분명하게 따라가면서 알아차려 나갑니다. 그래서 '아누빳시'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냥 '까야사띠'가 아니고, '아누빳시' 입니다. 끊임없이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서 그것을 알아차려 나가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알아차려 나가다 보니까 분명하게 호흡의 들이쉬는 시작과 중간과 끝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래서 멈춤이 있는 다음에 또 다른 호흡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호흡 전체를 완전하게 인식을 하게 되는 거죠.

그게 세 번째에 해당이 됩니다.

 

호흡을 완전하게 인식하게 되면 어떤 반응들이 일어날까?

마음에서 어떤 반응들이 일어날까? 기분 좋죠!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들을 알게 되면 마음은 기분 좋은 상태로써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 기분 좋은데 빠져버리면 대상을 잃어버리죠. 그렇지 않고 기분 좋다는 것만 알고 나서 또 호흡을 그대로 알아차리면 더욱더 호흡이 분명해지고 그 호흡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연속해서 이어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게 세 번째 부분입니다. 호흡의 전 과정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하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깐 호흡에 따라서 내가 몸도 영향을 받고 마음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호흡에 따라서 영향받는 것들을 인제는 줄이는 훈련들을 하게 됩니다.

그전에는 가늘고 고요한 호흡으로 인해서 몸도 안정이 되고 마음도 안정되고, 그런 반면에 짧고 거친 호흡은 몸과 마음이 거칠어지고 안정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할 것 같으면, 인제는 동일한 조건들을 만들려고 합니다. 되도록이면 고요하고 또 미세한 호흡들을 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호흡이 어떤 경우든 그것이 짧은 것이든 굵은 것이든 긴 것이든 미세한 것이든 관계하지 않고 마음은 일정한 상태를 유지해 나가도록 그렇게 만들어나갑니다.

 

그게 인제 '-야상카-(kāya saṅkhāra)'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저번 시간에 아마 이 '까야상카라' 부분을 얘기하다가 중단됐죠! 중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경전에 '상카라'가 등장하는 게 어디서 등장을 합니까?

(수행자 대답) 오온에서 나오고 또 어디서 나옵니까?

오온에서는 상카라를 어떻게 해석을 해요?

오온(五蘊)은 뭡니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행(行)이 '상카라'죠. 마음의 작용은 '수·상·행·식' 이죠.

 

그런데 수·상·행까지가 마음의 여러 가지 작용들 52가지(심소)라고 얘기를 하죠!

식(識)은 마음의 요소가 아니고 마음이니까! 따로 떨어져나가니까.

그러면 수·상(受·想)을 빼고 나면 행(行)이 몇 가집니까? 수(受)가 하나고, (想)상이 하나다. 그렇게 되죠. 그러면 마음의 요소 거의 전부가 수·상(受·想)을 빼고 나면 사실은 '상카라'라고 봐야되는 거죠.

그러니까 오온에서 얘기할 때 '상카라' 어떻게 해석이 돼요? 그냥 '정신적인 현상'이 되는 거지.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좋은 현상이든 나쁜 현상이든 모든 정신적인 현상들이 상카라, '삽베 상카라'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모든 정신적인 현상들, 심리적인 현상들 이런 것들을 얘기할 때 '상카라' 라고 합니다.

 

그럼 거기서 말할 때 정신적인 현상들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그럼 상카라가 다른 데서도 다 정신적인 현상으로써 될까?

 

가장 대표적인 게 '12연기'. '아윗자 빳자야 상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무명을 연해서 상카라가 일어난다.' 그렇게 얘기를 하죠! 그럴 땐 어떻게 돼? 그것도 정신적인 현상일까? '무명을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는 모든 대상은 상카라다' 하는 거죠! 그 단어 자체가. 그래서 '의지 작용으로 인해서 형성된 것들, 조건 지워진 현상'이란 뜻으로 쓰여지게 됩니다.

무명이 없으면 상카라가 없겠죠! 그건 조건 지워진 겁니다.

그런데 그 상카라로 인해서 또 다른 뭐가 생겨난단 말이라.

그럼 그걸 생기게 하기 위한 상카라는 형성되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걸 '형성력'이라고 보통 그렇게 얘기하게 됩니다.

그럴 때 12연기에서 상카라를 쓸 때는 '의지 작용, 형성력, 조건지워진 것'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겠죠. 그냥 정신적인 현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좀 따르죠? 그렇게 됩니다.

 

또 어떤 것이 있습니까? 경전 도처에 있죠!

'모든 조건 지워진 것들은 무상이다.' 그런 구절들도 있고 그렇죠!

'삽베 상카라 아닛짜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제행무상. 거기도 상카라 라고 쓰여집니다. 거기도 마찬가지로 그 상카라는 조건 지워진 것들, 그런 것들은 다 무상한 것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조건 지워진 것! 조건 지워지지 않는 것들은 사실은 없습니다. 인간뿐 아니라 그냥 단순한 물체 이런 것들도 조건 지워진 것이죠.

어떤 조건들이 지워졌습니까? 물체는 당연히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을 거고, 지수화풍이 끊임없이 그 사이에서 움직이도록 하는 공간이 있어야 될 것이고, 일어났다 사라지는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공간들이 있어야 될 것이고, 그것이 또 변해가게 만드는 것이 있어야 되고, 이런 조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것들은 다들 변하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을 얘기할 때는 '형성된 것들' 이란 그런 뜻으로 쓰여집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 그렇게 만들어진 것들은 다 변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이제 형성된 것들이란 뜻으로써 또 쓰여지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까야 상카라' 그렇게 얘기를 했죠!

그런데 '3, 신구의의 행위'를 얘기할 때 '상카라'가 또 하나 있습니다. 수행에서 직접적인 것들이죠! 그때의 행(行)은 또 다른 의미로써 쓰여집니다.

몸에서의 상카라는 뭡니까? 호흡이라 그랬죠.

그리고 말에서의 상카라는 뭐라고 했습니까? 말을 하려면 '위딱까'와 '위짜라'가 있어야 말을 한다고 그랬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겨냥을 해서 그걸 생각을 해야 말이 튀어나오는 거지 말이 자기 혼자 툭 튀어나오진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마음에서의 상카라는? '느낌과 지각'. 느낌과 지각이 있어야만이 인식을 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느낌과 지각이라 그랬습니다.

이렇게 상카라는 거기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쓰여지게 됩니다.

 

그럼 호흡에서의 상카-(saṅkhāra)라고 하는 것은, 이 몸에서의 상카라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어떻게 호흡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상카라를 가라앉힐 수도 있고, 상카라를 강하게 작용을 해서 들뜨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과정을 이렇게 겪어온 거라.

길면 긴 줄 알고 짧으면 짧은 줄 알고, 그리고 호흡이 시작되는 것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끝나는데까지 분명하게 인식하게 하고, 이런 과정들을 겪어왔단 말이라. 그렇게 해서 분명하게 내가 인식할 것 같으면 호흡이 가라앉을 것이고, 그렇게 인식하지 못할 것 같으면, 들뜨니까 호흡이 당연히 거칠어지게 된다는 거라.

내가 어떻게 알아차리느냐에 따라서 상카라는 변해갑니다.

그럴 때 상카라를 얘기할 때는 '의도적인 행위'라고 이렇게 풀이들을 합니다.

내 행위에 따라서, 하는 것에 따라서 변해가는 거기 때문에.

 

자! 그게 '까-야 상카-라(kāya saṅkhāra)'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상카라가 고요해져서 완전하게 가라앉히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될까?

호흡은 어떨 땐 길어지기도 하고, 어떨 땐 짧아지기도 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호흡에 따라서 상카라가 날뛰도록 만들지 않고 그대로 평온하게 만들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될까? 호흡 자체에 집중을 해야 되겠죠. 호흡이 곧 나의 마음과 일체가 되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그런 상태를 보통 '삽바 상카라 사마타'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상카라를 고요하게 만든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사마타적인 방법으로 상카라를 고요하게 가라앉힐 수가 있다는 겁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호흡에 따라서 마음이 들뜨기도 하고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지는 것들을 없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그 상카라가 충동하고 유발하는 것들을 없도록 만들어버리면 됩니다.

상카라 자체를 가라앉히는 것이 아니고, 상카라 자체가 없도록 만들어 버리면 된다는 겁니다. 그걸 '아상카라', 그러니까 '열반의 상태는 아상카라의 상태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수행에서 여러분들은 지금 현재 열반을 수행의 대상으로 할 수는 없죠? 그럼 여러분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거는 뭐라? '삽베 상카라 사마타'라고 하는 거라. 그 상카라를 고요하게 만들고 가라앉히는 훈련들을 하라.

 

그게 네 번째 방법 '모든 상카라를 고요하게 하라'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까야 상카라를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요령이 뭘까?

어떻게 하면 고요하게 가라앉혀질까? 짧은 호흡보다는 긴 호흡이 고요하게 가라앉히기에 쉽죠! 길다고 하는 거는 일부러 숨을 크게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고요하게 미세하게 쉬는 호흡들을 얘기합니다. 그러면 상카라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우선 호흡들을 되도록 고요하고 길게 해주면 상카라는 가라앉힐 수가 있다는 거라. 화가 났을 때 숨을 길게 한번 쉬어주면 화가 가라앉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상카라를 가라앉히는 첫 번째 요령은 호흡을 미세하고 길게 해 줘라.

 

두 번째 방법은 뭘까? 그렇게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일시적인 거죠! 호흡을 길게 하는거 말고, 호흡을 약하게 해주는 겁니다.

호흡을 강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호흡을 약하게, 약하게 쉬어버리면 상카라는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호흡을 길게 하든 호흡을 약하게 해주든 부작용이 생기죠? 그렇죠! 긴장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떨 때는 그것이 오래도록 지속이 되면은 들뜨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방법은 오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닙니다.

 

그럼 오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니미따',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갖다 붙이는 훈련들을 하는 겁니다. 그게 니미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면 호흡이면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에 지속적으로 마음을 갖다 붙이는 겁니다. 하나의 점,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가져다 붙이는 방법. 그래서 마음이 들뜨고 또 아니면 다른 대상들로 인해서 내가 탐진치가 일어날 때 호흡에다가 마음을 가져다 붙여놔 놓으면, 호흡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점에 마음을 두는 것이 세 번째, 상카라를 고요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거는 오래도록 지속해 나갈 수가 있죠! 그게 니미따가 안 생긴다 하더라도 오래도록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찰하는 방법이 사마타 쪽으로 할 경우에는 단순하게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이것을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변화되는 것들을 보게 되면 위빳사나 수행 쪽으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마타적인 방법으로 하든지 위빳사나 수행적인 방법으로 하든지 그것은 선택의 나름인 것이고, 어쨌든 하나의 대상, 호흡이라고 하는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두는 방법이 까야 상카라를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방법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면 틀림없이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두게 되면 그 대상 자체에서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또 다른 방법으로 까야 상카라를 고요하게 하는 방법은, 그 일어나는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들입니다. 그걸 '니미따에 마음을 둔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니미따가 아니고 또 다른 것들, 행복이 일어난다든지, 기쁨이 일어난다든지 이런 것들이 일어나면 거기에다가 마음을 두게 되는 거라. 그 방법으로 인해서 까야 상카라를 고요하게 하는 방법들이 있다는 거라.

호흡이 아니라도,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부차적인 것, 이차적인 것에다가 마음을 두는 것들이죠.

 

그렇게 하는 것들이 보통 까야 상카라를 고요하게 하는 요령입니다.

 

어느 방법으로 쓸지는 여러분들이 선택을 하면 됩니다. 지금의 내 상태에서 맞는 방법들을 쓰면 됩니다.  

? 까야 상카라를 고요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고요하게 하지 않으면 대상에 항상 끄달려가게 됩니다!!!

긴 호흡 짧은 호흡에 따라서 마음이 바뀌게 되고 호흡을 아무리 완전하게 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따라서 마음이 바뀌어나가게 된다는 거라. 항상 고요한 상태로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까야 상카라를 고요하게 자꾸 만드는 훈련들을 하라는 겁니다.

 

그게 호흡의 4가지 부분으로써 이때까지 설명한 겁니다.

 

1. 긴 호흡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2. 짧은 호흡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3. 호흡에 따라서 몸이 변해나가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

4. 호흡을 고요하고 부드럽게 해서 몸도 마음도 온화하게 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이렇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으면 어떻게 돼요?

그 속에는 대상에 갖다가 마음을 붙이고 있기 때문에 '위딱까(vitakka )'가 있습니다. 적어도 내가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도 그건 위딱까가 있는 거라. 위딱까를 크게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그런 호흡하고 있는데 들이쉬는 것이 있고 나서 내쉬는 것이 있다고만 알고 있어도 그건 위짜라가 있다는 거라. 들이쉬는 거하고 내쉬는 거하고 분명히 다른데, 나는 그걸 분명하게 들이쉬는 건 들이쉰다고 알고, 내쉬는 건 내쉰다고 알았으니까, 그걸 따라갔기 때문에, 마음이 따라갔기 때문에, 마음이 그 대상을 계속 따라간 것은 '위짜-(vicāra )'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대상을 따라가다 보니까 당연히 대상과 일치가 되니까 몸에서 기쁨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아! 참 좋구나. 그런 것들에 대해서 만족하게 되는 거라. 그건 이미 '-(pīti )'가 있는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런 것들로 인해서 편안해지고 고요해지고 기분 좋은 일이 생겨나면 '수카(sukha )'가 있는 상태가 되는 거고. 

삐띠와 수카는 순차적인 것이지 별로 시간적인 간격을 두지 않고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수카가 일어났을 때 수카가 강할 경우에는 삐띠는 사라져버립니다.

 

사실은 1선정 다음에 2선정, 3선정은 그렇게 시간적인 간격을 두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삐띠가 일어나기 전에 1선정을 우리는 보통 그걸 선정이라고 얘기를 합니까?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만 되더라도? 선정이라고는 보통 얘길 안 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그게 선정입니다.

선정을 너무 크게 봐버릴 것 같으면 물론 지속하지 않고 중간에 끊어져버릴 것 같으면 선정이 깨져버린 상태지만, 잠시 잠깐이라도 나는 1선정을 경험하고 있는 상태라.

그렇게 판단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계속적으로 한 시간이면 한 시간, 삼십 분이면 삼십 분 그렇게 순일할 것이다 라고 판단할 것 같으면, 이미 그 선정은 깊은 선정까지를 경험했을 때 가능한 거고, 깊은 선정이 아닐 경우엔 잠시 잠깐이라도 대상을 분명하게 따라가면서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만 하고 있어도 나는 충분히 첫 번째 삼매는 경험하고 있는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수행하는 사람들은 첫 번째 선정삼매는 선정삼매에 들지 않는다 하고 얘기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입니다. 실제로는 그것이 삼매인 줄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어쨌든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지속적으로 머무르게 되는

-깍가따-(ekaggatā)' '찟따 에-깍가따-' 라고 하는 것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다섯 가지는 수행하면서 항상 우리 곁에 맴돌게 돼있게끔 되어있습니다.

호흡을 그것이 긴 호흡을 알아차리든, 짧은 호흡을 알아차리든, 아니면 호흡의 전 과정을 알든, 아니면 상카라를 고요하게 해서 몸과 마음이 안정된 상태이든, 어쨌든 간에 이 다섯 가지는 항상 우리 곁에 남아있는 상태라는 거라. 일어난다는 것들입니다. 그걸 보통 호흡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안다 해서 '아나빠나 사띠'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자! 「대념처경」에는 여기까지가 설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나빠나 사띠'에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집니다.

지금 네 가지가 얘기가 됐죠! 그다음에는

 

느낌(vedanā)에 대한 것 네 가지,

마음(citta)에 대한 것 네 가지,

법(Dhamma)에 대한 것 네 가지가 '아나빠나 사띠'에는 더 들어있습니다.

 

「마하 사띠빳타나」나 「까야누빳사나」든 아니면 「사띠빳타나」이든 그 경들에는 여기까지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 다른게

「아나빠나 사띠」에는 이 부분 말고 (느낌, 마음, 법에 대한) 네 가지가 더 설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조금 더 얘기를 하겠습니다. 똑같은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호흡의 네 가지 과정과 마찬가지로 느낌의 네 가지 과정, 마음의 네 가지 과정, 법의 네 가지 과정 이런 것들로 이해를 하면 됩니다.

 

느낌은 정신적인 느낌을 얘기합니다.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느낌 4가지,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네 가지,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담마라고 하는 네 가지 이렇게 이해를 하시는 것이 편합니다.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느낌을 알아차려야 되는 이유는 뭘까?

그냥 호흡만 하면 간단할 건데 쉬울 건데. 왜 그럴까? 호흡하고 있으면 갖가지 정신적인 느낌들이 일어납니다. 쉽게 말하면 아까 기쁘다는 것도 정신적인 느낌인 거고, 행복하다는 것도 정신적인 느낌입니다. 아! 좋다 하는 것도 정신적인 느낌이고, 이 수행을 계속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정신적인 느낌입니다.

 

그 정신적인 느낌이 일어나면 어떻게 돼요? 대부분 거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집착하게 되면 당연히 근심이 생깁니다. '둑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 집착으로 인해서 또한 원하는 욕망들이 일어납니다. 욕망 집착 둑카들이 생기기 때문에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느낌을 알아차리라 하고  아나빠나 사띠에서는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하필 느낌 중에서 아나빠나 사띠에서는 하기 쉬운 느낌들도 많은데 왜 정신적인 느낌을 알아차리라 할까? 앉아있으면 다리가 아프단 말이라 그것도 느낌인데, 그거는 육체적인 느낌이죠? 이런 거 알아차려라 할 거 같으면 쉬울 건데 왜 정신적인 느낌을 알아차리라 할까?

육체적인 느낌은 보통 보면 밀쳐내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집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신적인 느낌은 밀쳐내고 집착하고 하는 것이 훨씬 강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났단 말이라. 그거를 집착하는 것이 이 육체적인 느낌이 일어난 것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아마 더 잘 알 겁니다. 그래서 모든 느낌들 중에서 이런 정신적인 느낌이 가장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기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들도 많아지고 거기서 일어나는 욕망들도 많아지고 둑카들도 많아지기 때문에 그 정신적인 느낌을 알아차리라 하고 얘기합니다.

 

결국 정신적인 느낌은 사마디(samādhi)의 상태입니다.

기쁨의 상태가 지속되고, 행복의 상태가 지속되고, 평온함의 상태가 지속되고 하는 것은 사마디의 상태입니다. 그러면 사마디의 상태도 알아차려서 쉽게 말하면 그걸 뛰어넘어라는 겁니다. 그런 정신적인 느낌들에 대한 집착을 누를 수가 있든지 끊을 수가 있으면 당연히 낮은 느낌들은 끊어내기 쉽다는 거라. 그래서 육체적으로 일어나는 즐겁고 괴로운 느낌들은 훨씬 끊어내기가 쉽다는 거라.

 

그래서 호흡으로 일어나는 정신적인 느낌을 대상으로 하라 하고 아나빠나 사띠에서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 첫 번째가 뭐냐면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면 당연히 '기쁨·희열'이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그걸 분명하게 인식하라는 거라.  

두 번째는 '행복'이 일어납니다. 그 몸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기쁨이 일어나고 나면 몸이 잠잠해지면서 마음도 더불어서 행복하고 고요한 상태로써 '아! 좋다' 하는 상태로 쭉 연결이 됩니다. 그것도 정신적인 느낌으로써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게 지나고 나면 기쁨과 행복, 즐겁다고 하는 것이 몸을 바꾸고 마음을 변화시킨다는 사실도 알아차려라는 거라. 당연히 몸을 변화시킵니다. 마음도 변화를 시킵니다. 몸이 변화가 될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는 사소한 병들도 치료가 되기도 하고, 마음이 변화가 될 거 같으면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강해졌는지, 아니면 그런 것들에 대해서 크게 개의치 않는 마음이 되든지 이렇게 바뀌어져 나간다는 거라.

그런 것들도 몸이나 마음이 변화되는 것들도 분명하게 인식을 하라는 거라.

이런 느낌으로 인해서 내가 뭐가 되고 싶다 아니면 뭘 하고 싶다 하는 욕망의 생각을 일으키게 된다는 거라. 그 욕망의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거라. 그게 세 번째입니다.

 

네 번째는 당연히 상카라를 가라앉혀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변화시키는 것들, 기쁨이나 즐거움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들을 멈추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서 기쁨이 있든 즐거움이 있든 어떤 상태의 느낌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고요한 상태를 만들도록 하라는 거라. 그런 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요동치지 않도록 만들어라 하는 거라.

 

이게 느낌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4가지 부분입니다.

 

아까 얘기한 호흡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방법하고 똑같은 방법이죠!

마찬가지로 마음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마음은 왜 또 알아차리라고 할까? 호흡으로 통해서 일어나는 마음.

마음이 뭔가를 집착하는 것을 알 것 같으면 그 집착하는 것을 놓아버릴 수가 있다는 거라. 그리고 그 마음이 집착으로부터 해방돼버린다는 거라. 벗어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하라는 겁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스님 법문하고 있으면 ‘스님 법문 조금 더 해주기를’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어떻게 돼요? 그런 것을 바라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호흡으로 인해서 고요해졌다 ‘아! 고요한 것이 더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하고 바란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알아차리면 그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버려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보는 훈련들, 마음을 관리하는 훈련들, 마음을 지배하는 훈련들,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분명하게 보는 훈련들을 호흡을 할 때마다 알아차리도록 하라는 것이 이 세 번째(마음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부분입니다.

 

세 번째 부분 마음에 대한 것도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먼저 호흡을 할 때 일어나는 마음이 지금 어떤 마음인가?

2. 짧은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고, 긴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라.

3. 마음이 호흡으로 인해서 마음이 대상에 딱 일치가 되어있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에서는 기쁨의 상태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 기쁨의 상태들도 알아차리도록 하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는 거라.

4. 또한 마음이 어떤 대상에 따라서도 바뀌지 않고 항상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알아차려라.

이렇게 마음을 네 부분으로 나눠서 알아차리도록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들도 분명하게 알아차릴 대상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자! 이까지는 사마타적인 방법으로 할 수도 있고 위빳사나적인 방법으로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대상에 몰입돼서 수행을 할 것 같으면 사마타적인 방법으로 하게 될 것이고, 그 일어나는 대상 자체를 변화로써 볼 거 같으면 위빳사나적인 방법으로 수행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호흡으로 인해서 느낌으로 일어난 것, 마음으로 일어난 것들 네 가지들은 사마타적인 방법과 위빳사나적인 방법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네 번째 법(담마)에 대한 것은 사마타적인 방법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법에 대한 것도 꼭 마찬가지로 네 가지 부분입니다.

왜 호흡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담마, 여러 가지 현상들도 알아차릴 대상으로 했을까?

그 담마는 어떻게 알아차려요? 뭐로 알아차려요? 느낌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 느낌을 적절한 상태에서 관리하는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게 됩니다. 그걸 '담마'라고 그렇게 합니다.

 

여러 가지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그 알아차릴 때 첫 번째는 무상한 성품으로 알아차리는 것.

'아닛짜 누빳시(anattānupassī)'라고 그럽니다. 변화되는 것들로써 알아차리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그것들을 끊임없이 따라가야 됩니다. 그래서 무상한 성품으로써 알아차리는 방법이 하나가 있고.

 

두 번째는 대상을 분명하게 앎으로 인해서 그 대상에 집착하는 것이 점점 더 엷어지는 것들로 인해서 알아차리는 방법. 이만큼 집착하던 것이 이만큼 집착하게 되고 집착이 점점 더 엷어지는 것, 이렇게 변화되는 것, 집착의 변화,

그걸 '위랏까 누빳시(virāgānupassī)'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집착하는 마음의 집착이 엷어져가는 것들을 알아차려 나가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둑카가 소멸해나가는 방법으로 알아차리는 방법.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대상은 일어났다가 소멸해나갑니다. 그 대상 자체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둑카로써 인식을 합니다. 그렇게 인식하면 그 둑카는 반드시 소멸해 나갑니다. 그렇게 알아차려 나가는 방법,

'니로다 누빳시(nirodhānupassī)'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네 번째는 뭐냐면 모든 상카라를 떠나버리는 겁니다.

그걸 보통 10가지 상요자나 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악한 마음도 있고, 의심하는 것들도 있고, 형식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도 있고, 선정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들도 있고, 무색계에 대한 집착들도 있고, 이런 여러 가지, 열 가지 상요자나의 집착으로부터 떠나버리는 상태, 버려버리는 상태로써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그것을 '빠띠닛삭가 누빳시(paṭinissaggānupassī)'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내가 지금 어느 상태에 있는가를 자기 자신이 분명하게 인식을 합니다.

다시는 부처님 법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어떤 형식에도 매이지 않는 상태가 돼 있다. 그렇다면 ''아! 적어도 내가 수다원과에는 이르렀구나 하고 스스로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이 열 가지 상요자나, 그걸 집착하는 것이 완전히 떨어졌는가 아닌가를 알아차렸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아! 아직 '나'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구나, 그럼 내가 어느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다' 하는 거를 분명하게 인식을 하게 된다는 거라.

 

이게 호흡과 느낌과 마음과 법에 대해서 네 가지 방법으로써 알아차리는 것들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게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이라고 하는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에는 설해져 있습니다.

 

오늘 여기 여러분들이 공부하고 있는 대념처경에는 이 뒤에 부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여러분들도 그것을 그렇게 인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해야 만이 이 아나빠나 사띠 마지막에 있는 "세 번째 위빳사나라고 하는 열 가지 부분"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위빳사나 부분에 대한 것 '아나빠나 사띠 빠빠'에 위빳사나 부분에 대한 것들을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도록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