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까야누빳사나(身隨觀, 身念處) (20110226)
오늘은 '까-야-누빳사나-(kāyānupassanā)' 부분입니다.
그대로 글자대로 해석하면 '몸을 따라가면서 관찰한다' 해서 '신수관(身隨觀)'이 됩니다. 그런데 보통 한국에서는 '신념처(身念處)' 그렇게 얘기하죠! 신념처가 되려면 원래 '까야누빳사나'가 되는 게 아니죠? '까야 사띠빳타나' 그렇게 돼야 되겠죠! 그렇게 해도 뭐 똑같은 의미니까.
거기에 맨 첫 번째, 신념처는 14가지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첫 번째가 '아-나-빠-나 사띠(Ānāpānassati)' 부분입니다.
'아나빠나 빠빠'가 '출입식' 부분입니다. 거기에 대한 것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왜 대념처경(大念處經)에서 호흡에 대한 관찰이 맨 처음에 나왔을까?
당연히 중요하니까 맨 앞에 나왔겠죠. 왜 중요하냐는 거라?
왜 호흡에 대한 관찰이 중요합니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호흡을 안 하면 여러분은 죽는 겁니다. 살아있는 것은 호흡으로써 살아가는 겁니다. 또 하나 더 중요한 게 있죠! 다른 것은 항상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언제든지 호흡은 있습니다. 항상 주 관찰대상으로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마만큼 수행하기에 쉬운 대상이라는 그런 뜻도 되죠.
호흡을 굉장히 중요하게 부처님은 생각했습니다.
언제 부처님께서 '이 호흡법으로 내가 깨달음에 이르겠다'하고 알았을까?
부처님이 6년 고행을 포기하고 나서 수자따의 유미죽 공양을 받고 나서 회상을 해보죠. '아, 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해서 수행을 했는데 아직 깨달음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그럼 뭐를 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는가'하고 곰곰히 생각을 해봅니다. 그때 불현듯 스친 것이 내 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그래도 마음이 고요하고 수행이 잘 됐을 때는 언제인가 하고 돌이켜 봅니다.
그게 언제입니까? 8살 때 농경제 때, 그때 호흡을 관찰하면서 수행을 했었습니다. 제1선정까지 갔었죠. 그건 알죠? 여러분들. 그래서 이 방법으로 1선정으로 인해서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는 생각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렇죠!
그게 뭐냐면 「마하 삿짜까 경」이라고 하는 것의 주석서에 그렇게 돼있습니다.
'아나빠나 사띠를 통해서 증득한 초선이 깨달음을 얻는 길이구나'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하게 됩니다.
1선정까지 얻어도 좋고 또 4선정까지 얻어도 좋고 그거는 각자 하기 나름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초선정, 1선정까지만 가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틀림없이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다고 얘기를 해놓은 겁니다.
또 호흡에 대해서 중요하다고 부처님이 설해 놓은 경이 뭐가 있습니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라훌라'에게 가르친 것 중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마하 라훌라 와-다 경」 이라고 하는 건데, 라훌라 스님에게 호흡에 대해서, 호흡의 중요성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사실은 이 '아나빠나 사띠'의 부분은 '마하 라훌라 와-다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거기의 내용과 똑같습니다.
간혹 여기 호흡에 대한 관찰 중에 크게 문제 되는 것이
'전면에'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또 '안으로 밖으로 관찰한다' 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관찰할 것이냐?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몸 전체인가 호흡의 전체인가' 어떤 것이 맞는가?
이렇게 세 가지 부분으로 보통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중 오늘 하나를 지적을 해서 정리를 할 것인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는데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게 "이 경이 그럼 언제 설해진 것이냐?" 하는 것이 영향을 많이 미칩니다. '아나빠나 사띠 경'을 라훌라에게 설했으니까. 그 라훌라에게 설했을 때는 틀림없이 이런 목적으로 설했을 것이다 하고 추정들을 뒤에 주석가들이 하게 되죠. 그래서 거기에 배치되는 부분들도 있고 그렇게 됩니다.
어쨌든 부처님은 틀림없이 얘기했습니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얘기했습니다. 어쨌든 그 호흡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까지 단언을 해놔 놨고, 그리고 부처님 자신도 이 방법으로 인해서 깨달음을 이르게 됐단 말이라. 그러니까 수행상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게 이 '아나빠나 사띠' 부분이다 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이제 첫 부분에 대한 이해가 됐습니까?
[※ 이전 시간 배운 구절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이다 빅카웨- 빅쿠 까-예- 까-야-누빳시- 위하라띠,
빅쿠들이여! 여기, 빅쿠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자! 그 구절을 한번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볼래요? 앞에 '까탄짜' 이거는 할 필요 없고, 그거는 앞에 다 설명을 한 거죠! 스님이 전 시간에.
'까탄 짜' 다음에 '빅카웨- 빅쿠 까-예- 까-야-누빳시- 위하라띠'는 앞에 부분에 있었잖아. '이다' 부분이 들어갔지. '이다 빅카예'. '이다'가 '까탄짜'로 바뀐 것뿐입니다. '까탄짜' 하나 설명하려고 굳이 이 문장을 설명할 필요는 없죠!
그래서 거기에 '까탄짜'에 대한 걸 간단하게 써놔 놨습니다.
'어떻게?'라고 하는 건데 '마하 사띠빳타나 경' 말고 '사띠빳타나 경'이나 '마하 라훌라와-다 경' 같은 경우에는 '까탄짜 빠나'라고 그렇게 해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라고 경의 제목이 들어가는 부분에서 그렇게 해놨죠! 그리해도 어쨌든 이거는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kathaṁ bhāvitā ca, bhikkhave, ānāpānassati kathaṁ bahulīkatā mahapphalā hoti mahānisaṁsā?
까탕 바-위따- 짜, 빅카웨, 아-나-빠-나삿띠 까탕 바훌리-까따- 마하팔라- 호-띠 마하-니상사-?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관찰을 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그래서 스님이 해석을 해놓길 '비구들이여' 해가지고 '그러면'이라고 괄호 쳐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관찰을 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아누빳사나' '까야누빳사나' '까예' 다 앞에서 설명을 한 부분입니다. 그 부분은 읽어보면 됩니다.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nisīdati
이다 빅카웨- 빅쿠 아란야가또- 와- 루카물-라가또- 와- 순냐-가-라가또- 와- 니시-다띠
비구들이여 여기 이 빅쿠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앉아라.
그다음에 밑에 '이다 빅카웨- 빅쿠 아란야가또- 와- 루카물-라가또- 와- 순냐-가-라가또- 와- 니시-다띠' 그렇게 돼있습니다. 수행하는 장소 대한 얘깁니다.
어떤 게 수행하기 좋은 장소입니까?
이제는 아나빠나 사띠를 수행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장소에 가야 될 거 아닙니까? 여러분들에게 어떤 데가 수행하기 가장 좋은 장소입니까? 집에서 잘 됩니까? 잘 되죠? 집보다는 여기 수행처가 조금 더 낫습니까? 그럼 여기보다 더 나은 데가 어딨겠어요? 숲속? 숲속에 들어가면 무서움 많은 사람들은 무서워가지고 수행 못해.
여기는 세 가지로 드러났죠! 숲속, 나무 아래, 그다음에 한적한 곳, 그렇게 해놔 놨습니다. 각각 특징이 있겠죠! 세 가지로 드러난 것은 대표적인 것만 드러냈다고 봐야되죠! 그런데 수행하기 좋은 장소가 사실은 따로 있는 게 아니죠!
여러분들은 수행의 대상이 뭡니까? 이 장소가 아니죠!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이 여러분들 수행의 대상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내가 좌선하기 위해서는 이 수행처에 있든 여러분들 방에 있든 아니면 공동묘지에 있든 앉아만 있을 수 있을 거 같으면 몸과 마음 알아차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죠!
경행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툭 트여있든 뭘 하든 간에 전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수행자가 머물러야 되는 장소는 다른 데 있다고 판단을 하면은 안됩니다. 여러분들 몸과 마음이라고 자꾸 판단을 해야 됩니다.
수행처 좋은 조건들만 찾다 보면 공부 못합니다. 저기 오늘 청주에서 오신 분 있죠? 저렇게 멀리서 찾아오는 거라. 집에서 공부할 생각 못 하고. 그렇죠? 물론 어떻게 공부하는지를 모르니까 와서 배우기는 해야 되니까 그거는 맞기는 맞는데, 원래 수행하는 장소는 다른 곳이 아니고 바로 내 몸과 마음이다 하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게 첫 번쨉니다.
왜 그럴까? 아무리 좋은 장소, 고요한 곳에 가더라도 망상 다 피웁니다.
그런 고요한 장소에 가더라도 마음이 복잡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복잡합니다. 그런데 스님이 시장통에 걸어갈 때는 그 시장통 소리가 안 들립니다. 부처님이 명상하고 앉아있을 때 천둥 번개가 쳐도 그 소리가 안 들렸습니다. 집중하고 있으면 아무리 혼란한 곳에 가더라도 자기의 몸과 마음이 수행 대상이기 때문에, 수행 장소이기 때문에 전혀 영향을 안 미친다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여러분들은 내 몸과 마음이 수행하는 장소다 하는 것을 먼저 생각을 해야 됩니다.
또 하나 '여기는 좋은 자리, 저기는 나쁜 자리' 그런 얘기들이 있습니다.
우리 여기 수행처에 오니까 나는 만날 요 앞에서 하니까 수행이 잘되더라. 그럼 요기는 자기한텐 좋은 자리고 저 저 뒤쪽에 중앙에 있는 건 자기한테는 나쁜 자리라. 그 얘기는 다르게 얘기하면 기운이 좋은 거, 기운이 나쁜 것이 따로 있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 그걸 믿습니까? 안 믿죠! 그러면 누가 여기에서 수행하는데 수행 못 하는 상황이 됐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한 마음이 깨진다 할 것 같으면 그건 이미 기본을 벗어나 버린 거라.
장소가 좋고 싫고, 좋은 기운 나쁜 기운이란 것은 없습니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버리면 영향을 받습니다. 저기 있더라도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영향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나쁜 자리라 하더라도 자기에게는 좋은 자리가 되버린다는 거라. 절대 마음을 밖으로 향하면 안 됩니다.
수행 장소는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이 수행 장소이고, 밖에 외부적인 영향을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에서 받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만들어라 하는 것이 수행의 장소의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알겠습니까? 참 말은 쉬운데 이건 누구든지 안단 말이라.
그런데도 왜 수행처를 찾느냐는 거라. 왜?
욕심 많은 사람 손 들어 봐. 솔직히 손들어 봐. 욕심 안 많은 사람 있어?
화 잘내는 사람 손 들어 봐. 게으른 사람 손 들어 봐. 다 드네 그냥. ㅎㅎ
그중에서 자기가 좀 '게으른 사람'이다 라고 할 거 같으면 되도록이면 '숲'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조금 수행하는 데는 용이합니다. 숲이 왜 용이할까? 숲은 여러 가지 영향들을 많이 받게 됩니다. 고요할 것 같지 숲이? 실제 가보면 안 그렇습니다. 오만 소리, 잔잔한 소리, 물론 좋은 영향을 미치는 소리들도 있겠죠. 그런데 나쁘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 마음이 나쁜 마음으로 작용을 하고 있으면 그게 나쁘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럼 숲에서는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정신 바짝 안 차리면 그냥 마음은 홀까닥 쏠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게으른 사람은 되도록이면 숲에 들어가서 하는 게 좋습니다.
게으른 사람이 나무 밑에서 하면 어떻게 될까? 나무 아래는 아주 바람도 막아주고 안온합니다. 더 게을러져 버립니다. 그래서 좀 게으름이 많은 사람들은 숲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낫고.
또 어떤 사람이 '숲'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좋으냐면 '대상을 보는 것이 아주 빠르게 알아차리는 사람'. 수행을 해보면 빨리 걸어도 그 알아차리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알아차리기는 알아차리는데 깊이있게 알아차리지는 잘 못합니다. 그렇죠? 그런 사람들은 숲에 들어가서 수행하는 것이 좀 더 적합하다고 얘기들은 합니다. 다 맞는 것은 아니겠죠!
그다음에 숲 말고 '나무 아래'가 있습니다. 나무 아래에 가 있는 것은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성질 더러운 사람', 내가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들과 잘 못 어울리고 성격이 좀 모났다 그런 사람들은 나무 아래에 가서 수행을 하면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그럼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 많이 알게끔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무 아래에 가서 수행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있냐면 '화를 잘 내는 사람', 이미 주위 자체가 안온하고 바람으로부터 막아주고 더위로부터 막아주고 추위로부터 막아주고 하기 때문에 성을 낼 수 있는 조건들을 되도록 차단을 합니다. 나무 아래는. 숲하고는 좀 많이 틀립니다. 그래서 좀 화가 많은 사람들은 나무 아래 가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있는 곳이 '빈 장소'라고 그렇게 돼있습니다. 빈 장소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살라' 개념인데 '트여져 있는 공간'이란 뜻입니다. 열려져 있는 공간. 그러니까 모든 것이 다 열려있어서 뭐든 다 볼 수 있는 그런 공간, 지붕만 이렇게 있고, 그런 곳들이 해당이 된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 곳들은 되도록 '말이 많은 사람', 여기도 그런 사람 있지? 씨익 웃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트여진 공간에 가라 하고 그렇게 말합니다.
수행처의 기본 조건이 뭡니까? 일체 말을 못 하게 하죠? 많은 사람들을 자기가 봐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또 보고 있고. 그러면 말을 못하니까 어떻게 돼요? 그걸 인내해야 됩니다. 그래서 홀로 독립된 공간에서 수행을 하는 것보다는 '트여져 있는 공간, 대중들하고 같이 할 수 있는 곳'에서 반드시 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말이 많은 사람'들 그리고 '생각이 많은 사람'들은 되도록 대중들 하고 같이 하라는 거라.
아마 여기도 그런 경험들을 해 본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자기 혼자 하면은 잘 할 것 같지만 실제 해보면 그렇게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각이 많고 말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좀 많은 경우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되도록 '열린 공간'에서 수행을 하도록 하라.
또 하나는 '욕심 많은 사람'도 그런 데에 해당이 된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건 대충 구분했을 때 인제 그런 구분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러면은 거기에 설명 쭉 해놨으니까 그거 다 읽어보면 됩니다.
'사만따 빠사딧까'라고 하는 주석서에는 보면 '아란야'의 거리를 보통 825m 이상이다 그렇게 얘기를 하고, 어떤 책에는 이걸 3점 몇 킬로라고 그렇게 돼있는데 그건 아마 계산을 좀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500궁이라고 주석서에는 분명히 나와 있기 때문에, 1궁을 얼마로 치느냐 하는 것인데, 1궁은 보통 화살의 길이입니다. 그래서 사람 4척, 1m65cm죠. 그게 1궁의 길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보통 궁 길이, 화살 요 길이가 보통 그 정도밖엔 안 됩니다. 그 이상은 잘 안됩니다. 그런데 이걸 너무 확대해석을 해버리면 500궁이 뭐 3점 몇 킬로가 되기도 하고 그러는데 실제로는 그렇진 않죠.
그래서 마을 경계선에서 보통 1km를 범위를 벗어나는 곳은 '아란야'라고 보면 됩니다. 여러분들 집 주위 부분이 곧 아란야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서 수행할 수 있는 분은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하라. 왜? 집에서 수행이 안 되니까. 그렇죠!
그런 숲에서 할 때는 되도록 경행을 하는 게 좋겠죠? 그리고 나무 아래에서 할 때는 좌선을 하는 것이 좋고, 그리고 공터 같은 데는 여럿이 모여서 수행을 하는 것이 좋고, 그렇게 판단을 하면 좀 수월할 겁니다. 그게 이 수행하는 장소입니다.
'비구들이여 여기 이 빅쿠는 숲으로 가거나 나무 아래로 가거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앉아라'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곳에 가서 수행하라는 겁니다. 집중해서. 그런데 아까 처음에 서두에서 얘기를 했지만 수행하기에 좋은 장소는 뭡니까? 자신이 머물러야 될 좋은 장소는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그거 이상이 없다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됩니다.
(수행자 질문) 시장통에 가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숲하고 시장통은 정반대죠? 시장통에 가서 수행할 수 있습니까?
(수행자 질문) 그거 하고는 정반대의 방향입니다.
여기서 수행하는 장소로써 기본적으로 괜찮다고 경전에서 설명하는 곳은 마을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을 뜻합니다. 그런데 시장통은 정반대죠! 그래서 그거하고 같이 비교를 하면 안 됩니다. 대상이 많은 것은 물론 같겠지만 그 대상은 완전하게 다릅니다. 완전하게.
시장통에서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숲에서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숲에서 영향을 미쳐봐야 얼마만큼 미치겠습니까?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데 단지 싫고 좋고 하는 느낌들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미세하게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거는 다스리기 좋고 그런 형태들을 띠고는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들이 끊임없이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을 자꾸 알아차릴려고 하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은 숲에 들어가라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공부해야 되니까, 자꾸. 그런 의미에서 숲에 들어가라는 것이지 시장통하고 연결시키는 것은 조금 너무 가버렸다...
그다음에 두 번째 연이어서 나오는 게 호흡을 통해서 몸을 알아차리는 '아나빠나 사띠' 부분입니다.
pallaṅkaṁ ābhujitvā ujuṁ kāyaṁ paṇidhāya parimukhaṁ satiṁ upaṭṭhapetvā.
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빨랑깡 아-브지뜨와- 우중 까-양 빠니다-야 빠리무캉 사띵 우빳타뻬-뜨와-.
소- 사또-와 앗사사띠 사또-와 빳사사띠.
'다리를 구부려서 편안하게 앉은 후에 몸을 똑바로 세우고 현재 일어난 주요한 대상에 완전하게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림을 유지한다.'
'그는 단지 알아차리면서 숨을 들이쉬고 단지 알아차리면서 숨을 내쉰다.'
그다음에 밑에 한번 봅시다.
호흡을 통해서 몸을 알아차리는 것, '빨랑깡'이라고 돼있습니다. '몸의 넓적다리 부분'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걸 자꾸 사람들은 '결가부좌'라고 풀이를 하는데 꼭 그런 뜻은 아닙니다.
'빨랑깡 아-부지뜨와-' : '아부지뜨와'는 '아분지뜨와'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스님은 보고 있고, 다른 주석가들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렇죠. '아부자띠의 절대분사이기 때문에 'n'자가 들어가져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다리를 교차해서'라는 부분인데, 혹시 태국의 스님들이 부처님한테 절하는데 어떻게 절하는지 아세요? (대답) 스님들끼리 먼저 절하고 참회게송할 때? 아까 스님이 구부리듯이 그렇게 해가지고 몸을 앞으로 구부려서 하는 것. (대답)
버마 스님들은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그냥 요렇게 앉아갖고 요렇게 합니다.
방식이 다르죠? 거 왜 그럴까? 이 '아부지뜨와' 라고 하는 것을 해석하는 해석의 차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태국에서는 '구부린다'고 하는 것들을 다리만 구부리는 것이 아니고 몸까지도 구부린다고 판단을 하는 거고, 버마에서는 다리만 구부리는 형태들을 취합니다. 그것만 받아들이는 거죠. 그러니까 굳이 뭐 꿇어 앉아가지고 이렇게 몸을 구부릴 이유가 없어지는 거죠. 다리만 요렇게만 있으면 돼요. 어쨌든 교차하기는 교차해야 되니까, 그렇게 있는 형태들을 띄게 됩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서 스님들 간에 참회하는 방법이 좀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요한 부분은 아니죠!
여기서 우리는 이 게송을 가지고 생각해야 되는 게 뭡니까?
편하게 앉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수행은 좌선에서는 앉는 것이 돼야만이 좌선이 됩니다. 버마나 태국 같은 경우에 그렇게 갖가지 방식들이 그렇게 정착될 때는 그것이 가장 자기들에게 수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렇게 정립이 돼나가집니다. 태국 사람들보다 버마 사람들이 키가 좀 큽니다. 또 다리가 조금 더 깁니다. 그러니까 태국 방식으로 할 것 같으면 버마 스님들은 힘들어. 그런데 태국 스님들은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편한 거라. 다리가 짧은 사람이 이렇게 있으면 오히려 몸이 힘들어져요. 그런 방식들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은 다리를 여러분들이 좌선하기 위해서 가부좌를 할 때 요렇게 결가부좌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한쪽만 올리는 반가부좌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책상다리하는 것이 좋습니까? 어떤 게 좋습니까? 각자 다르겠지 뭐.
그러면 각자의 방식으로 가장 편하게 오래도록 수행할 수 있는 자세가 그게 정답인 거라. 이걸 갖다가 결가부좌로 앉고 할 거 같으면 결가부좌 외에는 전부 다 틀리게 돼버리는 거라. 그렇게 해석을 해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다리를 꼬고, 어떤 식으로든 꼬아지겠지, 그렇게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대부분은 책상다리 형식을 취합니다.
한쪽 다리는 완전히 허벅지 쪽으로 붙이고, 그리고 한쪽 다리는 그 다리 앞에 딱 갖다 붙이고, 그 대신에 양쪽 무릎은 되도록이면 땅에 짝 달라 붙이도록, 그래서 엉덩이뼈와 양쪽 다리(무릎) 세 개가 꼭짓점이 되어서 삼각형 변을 이루게 될 때 몸은 밑에는 중심이 딱 가라앉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이로운 자세가 아마도 결가부좌를 하면 당연히 양쪽 다리가 밑으로 탁 쳐지겠지. 그러니까 그게 가장 안정된 자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 꼬이다 보니까 다리가 힘들어지죠.
그래서 이런 자세는 어느 정도 능숙하게 수행이 진행이 되고, 몸을 조복 받고 나서는 이 자세를 해도 전혀 무리는 없는데, 초보자가 할 거 같으면 한 시간 좌선해라 할 거 같으면 이 다리 때문에 공부시간 다 놓쳐버리게 됩니다. 꼭 그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선사들은 책상다리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마하시 스님도 그랬고, 빤디따 스님부터 시작해가지고, 모든 스승들이 대부분 그 책상다리였습니다. 가장 오래도록 편안하게 자세를 안정되게 취해주는 것들이 이 꼭짓점만 맞춰주면 되니까. 그 대신에 그거보다도 더 중요한 게 뭐냐면 허리!
그래서 그 밑에 보면은 '우중 까-양'이라고 바로 나옵니다. 똑바르게. '몸을 똑바르게'라는 뜻입니다. 위에 몸이 밑에 하중 전부를 지탱하게 되면 몸이 무거워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 허리뼈를 동전을 차곡차곡차곡 쌓아놓듯이 일자로 이렇게 쭈욱 쌓아놓는다고, 아주 가지런히 쌓아놓는다고 생각을 하고 허리를 그렇게 펴라는 거라. 그런데 허리를 쭉 펴는데 이렇게 허리를 쭈욱 펴면 어떻게 돼요? 동전들이 중간에 퉁 퉁 퉁 퉁 떠버리게 되겠죠. 그럼 불안정해집니다.
그래서 허리는 편다고 하더라도 긴장하지 말고 그대로 쭈욱 밑으로, 동전들을 물속에다 넣으면 똑같이 톡 가라앉듯이 가라앉는다는 느낌으로 허리를 똑바르게 펴야 됩니다. 그게 정답이라는 거라. 그리해야만이 다리에 분산되는 힘이 똑같이 받아집니다. 그래서 허리를 바로 펴는 것이 다리를 바로 앉는 것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또 왜 그럴까? 다리보다도 허리를 왜 쭉 펴라고 할까?
허리가 구부러지든지 긴장이 돼 있으면 자연스럽게 호흡을 못합니다. 다리든지 허리든지 이거는 부차적인 겁니다. 왜 앉습니까? 여러분들이? 호흡을 관찰하기 위해서 앉는 거라. 주목적을 까먹어버리면 안 돼. 그러면 호흡이 아주 자연스럽게 될 수 있는 방법이 최고 좋은 거라. 다리가 아픈 사람이다. 그럼 의자에 앉는 거라. 또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다 할 거 같으면 다리를 쭉 뻗고 앉는 거라. 그 대신에 호흡만 자연스럽게 할 수 있으면 되는 거라. 그게 일차적인 목적인 거라. 그걸 자꾸 벗어나서 자세만 잡을려고 할 거 같으면 남에게 보여지는 건 좋을지 몰라도 자기 수행은 안 돼. 알겠습니까?
그다음에 있는 것이 '빠니다-야' '결정한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
여러분들 뭘 결정했습니까? 앉아서 호흡을 관찰할 때 뭘 결정해야 됩니까? 뭘 수행대상으로써 결정해야 됩니까? 호흡입니다. 호흡을 '아, 이게 내 주수행대상이다' 하고 결정을 한다는 거라. 수행대상이 뭔가를 정하지도 않고 수행할 거 같으면 안 되겠죠! 호흡이면 호흡이 수행 대상인 것이고, 그렇지 않고 생각이면 생각이 수행 대상인 것이고, 다리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면 느낌이 수행대상이라. 쉽게 말하면 적절하고 바른 대상을 스스로 결정해야 된다는 거라.
여기서는 '아나빠나 사띠' 호흡에 대해서 관찰하는 거니까 뭐가 주 대상입니까? 호흡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호흡에다가 두어야 됩니다. 마음을 다른 데다가 흩어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마음이 다른데 벗어나도록 하면 안 된다는 거라. 호흡에 마음을 자꾸 두라는 거라. 이렇게 순차적으로 경에서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호흡이 주대상이다 하는 것을 설명을 합니다.
그다음에 호흡을 알아차리는데 그럼 어떻게 알아차릴 것이냐? 밑에 있는 게
'빠리무캉' 이라고 하는 '아나빠나 사띠'에서 문제되는 여러 가지 중에서 제일 첫 번째에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빠리무캉'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자! 스님이 거기에 설명한 것을 한번 봅시다.
[사마타 수행의 입장에서는 코나 얼굴 등의 특정 부위를 지칭한 특수한 의미로 쓰이고, 위빳사나의 수행의 입장에서는 현재 일어난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알아차림을 유지한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인다] 그렇게 스님이 설명을 해놨습니다. 맞습니까? '빠리무캉'의 의미가? 음? 뭐가 맞아?
스리랑카 스님들한테 이렇게 하면 "에이 죽일 놈" 합니다.
스리랑카 스님들은 이 방법을 채택하지 않습니다. '빠리무캉'이라고 하는 거는 문자 그대로 해석합니다. '무엇의 주위에', '무카-입술이나 얼굴'입니다. '입술 주위' '얼굴 주위에'. 그것을 해석할 때 사띠를 두는 곳이 어디냐? '윗입술에 둔다.' 아니면 '면전에 둔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걸 이제 '전면'이라고 그러죠. '전면에 둔다'고.
그리고 심념처 수행하는 사람들은 '전면에 둔다'는 것을
'마음이 알아차리는 대상' 대상을 어떻게 알아차리느냐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릴 때 가슴으로 알아차리는 건 알죠!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마음을 앞에, 전면에다’! 그래서 그걸 '전면'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마음 앞에서 알아차린다는 거라.
그렇게 판단을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맞습니다. 그렇게 할 거 같으면 마하시 스님 같은 경우엔 '배'를 관찰합니다. 얼굴 하곤 전혀 관계가 없는 곳입니다. 그럼 이건 틀린 방법이 됩니다. 그렇죠! 그런데 왜 이걸 맞다고 그럴까? 이게 왜 맞다고 그럴까?
'빠리 무카'라고 하는 의미가 많이 바뀌어져 왔습니다.
불교의 역사에서 보면 '일어난 특정한 대상', '주요한 대상'이라는 의미가 가장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걸 빨리어로 옮겨지고, 또는 산스크리트어로 옮겨지고 하면서 이게 의미들이 바뀌어져 나갑니다. 그래서 이걸 '빠리 무카' '쁘랏띠 무카' 요렇게 산스크리트어로 바뀌면서 '면전'이 되기도 하고 '전면'이 되기도 하고, '코끝', '윗입술'이 되기도 하고 이렇게 바뀌어져 나갑니다.
그게 언제냐면 '청정도론'이 만들어진 5세기경에 그렇게 정립이 돼 나갑니다.
그러고 나서 뒤의 후대에 와서 이게 확대됩니다. 수행에 사띠를 두는 포인트를 그러면 앉아있을 때는 여기를 할 수가 있는데, 걸어갈 때는 어디로 할 거라? 또 내가 움직일 때는 사띠의 포인트를 어디다 둘 거라? 어디다 둡니까? 걸어갈 때는 발바닥에 두든지, 움직일 때는 접시 잡고 있으면 접시 잡고 있는데다 두든지 이렇게 된다는거라. 사띠 포인트가 자꾸 넓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현대에 와서 사띠의 포인트는 '지금 일어난 가장 큰 대상'이 사띠의 포인트입니다. 그렇게 됐을 경우에는 배도 될 수 있고, 어디든지 될 수가 있습니다. 강하게 일어나는 곳, 주요한 대상이니까. 그렇게 봤을 때는 마하시 스님의 방법은 결코 틀린 방법이 아닙니다. 그렇죠!
자! 그러면은 사실은 다 맞는 겁니다.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다른데 그러면 왜 스리랑카 스님들이나 사마타 수행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은 요걸 고집을 할까? 여기를?
왜 이 '빠리무카'를 해석하는 걸 아주 협소적으로 여기만으로 생각을 할까? 호흡을 관찰할 때 어떻게 관찰을 합니까?
사마타 수행을 할 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서 일어나는 무겁고 가볍고 또 차갑고 하는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그렇죠!
그런데 사마타 수행하는 사람들은 뭘 관찰합니까? 그거 관찰 안 합니다. 단지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것만 알아차립니다. 그렇죠! 그래서 호흡에서 나중에 '니미따'가 일어나면, '니미따'가 완전하게 형성 돼서 움직이지 않을 때가 되면 그 대상이 '니미따'로는 바뀔지언정 이 호흡에서 한치도 벗어나지질 않습니다, 이 코끝에서! 윗입술하고 코 여기 삼각점 여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단 말이라. 그게 사마타의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집중하는 포인트가 자꾸 바뀔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마음이 산란해집니다. 그래서 경전에도 그런 내용들이 나옵니다. 호흡이 들어오는 걸 알고, 가슴을 스치는 걸 알고, 그걸로 인해서 배가 불러오는 걸 알고, 배가 꺼지는 걸 알고, 가슴을 스치고, 코끝을 통해서 나가는 걸 아는 사람은 마음이 산란해지고 마음이 동요하게 된다. 분명하게 기록을 해놨습니다. 왜? 집중을 해야 되는데 집중의 포인트가 자꾸 바뀐다는 거거든. 바뀔 거 같으면 자꾸 산란해지고 동요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사마타 수행은 집중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여야 됩니다. 딱 하나의 포인트.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러면 이걸 어떻게 응용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들 수행할 때 이걸 어떻게 응용해요? 변하는 성품을 분명하게 알아차려 나갈 경우에는 사띠를 두는 장소는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렇죠! 크게 일어나는 대상에다가 사띠를 두면 됩니다. 알아차림을 두는 장소는 그래서 각각 자꾸 바뀝니다. 그래서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될 때, 수행이 잘 안 될 때, 만날 똑같은 현상들, 뭐 하는지도 모르고, 똑같이 느껴질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사마타의 방법으로 돌리라는 거라.
그걸 응용한 것이 뭐냐면 이 보통 '고엥카' 수행법에서 그런 방법들을 많이 동원합니다.
여기 드나드는 호흡, 호흡만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들이쉬면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쉬면 내쉰다고 알아차려라. 내쉬면서 들이쉰다고는 알아차리지 말고, 들이쉴 때는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쉴 땐 내쉰다고 알아차려라. 그래서 '들이쉼' '내쉼' '들이쉼' '내쉼' 호흡만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딱 여기!
그러고 나서 그것이 되고 나면 여기서 느껴지는 감촉, 들이쉴 때 느끼는 감촉, 내쉴 때 느끼는 감촉, 뭔가가 느껴진다는 거라, 감촉이. 이슬이 맺힌 감촉이든지 뭔가가 느껴진다는 거라. 뭔가가 스치는 것, 스치는 것만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그것이 되고 나면, 스치는 것이 되고 나면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 스치는 데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텁텁한 느낌도 있고, 차가운 느낌도 있고.
그 느낌을 알아차리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 느낌이 변하는 것을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텁텁한 느낌도 똑같은 게 아니고 꼭 변화가 있구나. 이렇게 변화를 알아차려라.
그렇게 되고 나면 그다음에 하는 것이 이 사띠를 코끝에만 두지 말고 머리끝부터, 머리끝에서 일어나는 느낌, 손에서 손이 접촉해서 손에서 일어나는 느낌, 엉덩이에서 발끝까지 하나씩 하나씩 느끼도록, 그런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동원을 합니다.
그거는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섞여져 있죠! 그 방법으로 해서, 다시 사띠를 두는 곳을 내가 찾고 위빳사나 수행 쪽으로 전환하도록 그렇게 하는 거라.
자! 그렇게 봤을 때 '빠리 무카'라고 하는 것을 해석하는 것은 내가 지금 뭘 수행하느냐에 따라서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지겠죠? 그렇죠!
그래서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그것을 해석을 할 때는 밑에 해석에 보면 '현재 일어난 주요한 대상에 완전하게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림을 유지하라.' 그것이 스님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는 방법이고, 여기 선원에서는 그게 정답입니다.
물론 내가 사마타 수행방법으로 가르친다고 할 거 같으면 이걸 '전면'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을 거고 아니면 '코끝' 이라고도 얘기를 하겠죠. 그런데 스님이 가르치는 건 그 방법이 아니죠! '현재 일어난 주요한 대상에 완전하게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림을 유지하라.' 하는 겁니다. 그게 '빠리 무카'라고 하는 겁니다.
거기에 보면 '빠리 무카'의 세 가지 의미에 대해서 설명을 해놨습니다.
첫 번째는 일반적인 수행의 대상에서는- 집중하는 대상, 그래서 현재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물질적 심리적 현상들을 완전하게 알아차려 놓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는 특정한 사마타 수행법에서는- 코 주위, 아니면 윗입술에 호흡을 알아차려서 확고하게 유지시켜 주는 것.
세 번째는 이것은 주석서에 의한 건데- 해탈의 방법을 파악하는 것.
아! 내가 수행하다 보면 탐욕이 있다 그러면 탐욕을 버려야지 하고 알아차리고 탐욕이 버려졌음을 알아차리고, 탐욕이 버려지고 나서 아! 내 마음이 탐욕으로부터 떠나가지고 아! 자유롭구나 하는 걸 알아차리고, 그게 길이라는 거라. 해탈의 길이라는 거라. 그걸 따라가면서 알아차리는 방법. 조금 관념적이죠! 그래도 어쨌든 그것도 '빠리 무카'라고 그럽니다. 그것들을 대상으로 했을 경우에.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통 세 가지로 '빠리 무카'를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것은 스님이 봤을 때는 '빠리 무카'가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이걸 가지고 싸워야 될 게 아니고, 밑에 나오는 '우빳타 뻬-뜨와-'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이것을 절대분사 사역형으로 스님은 보고 있는데 이것을 '가까이'라고, '가까이 둔다'는 개념, 그다음에 반석이 있다 그러면 '반석 위에 올라서서 굳게 선다'는 개념, 어떤 것으로 두느냐에 따라서 이 문제가 조금 달라집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는 어떻게 됩니까?
마음을 대상에다가 찰싹 갖다 붙입니까? 아니면 떨어져서 대상을 봅니까?
'벌이 꽃에 있는 꿀을 채취할 때 꽃을 움직이지 않고 꿀을 채취하듯이 하라' 주석서에는 그렇게 나옵니다. 또 현대의 스승들은 '영화의 스크린을 멀찍이 떨어진 제삼자의 입장에서 그냥 보듯이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게 대상을 알아차리는 방법이라고 그럽니다. 착 달라붙지 않죠!
그러면 '우빳타 뻬-뜨와-'를 어떻게 해석을 해야 돼? 현재 일어난 대상에 마음을 자연스럽게 거기에다 갖다 두는 것이지, 거기 찰싹 달라붙으라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거기에 붙잡아 매어두라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붙잡아 매어버릴 것 같으면 그것이 변하는 걸 모릅니다. 붙잡아 매어두는 게 아니고 거기에 마음이 계속적으로 유지되도록 해주면 된다는 거라. 그래야만이 이게 변할 때마다 그대로 알아차려 나간다는 거라.
그게 사띠의 본래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걸 스님은 '마음을 기울여서 알아차림을 유지한다.'라고 풀이를 하는 겁니다. 마음은 사띠를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나가주는 거라. 이것이 오히려 더 수행에 적합한 것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것, 그것을 해석할 때 그것을 '전면'으로 해석하든지 뭘로 해석하든지 그것에 큰 의미를 가지면 안 됩니다.
(수행자 질문)
그것은 붙잡아라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뜻입니다.
수행은 어떤 경우든지 붙잡든지 밀쳐내면 수행이 안 됩니다. 마음이 그것을 알아차리게끔 하면 됩니다. 마음을 분명하게 거기에 가져가가지고 그것이 뭔가를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 수행의 기본입니다. 자연스러워야 됩니다. 붙잡아 버리려고 할 것 같으면 거기에는 먼저 탐심이 작용을 합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라.
자! 그래서 해석을 해놓은 게 '다리를 구부려서 편안하게 앉은 후에 몸을 똑바로 세우고 현재 일어난 주요한 대상에 완전하게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림을 유지한다.'
수행의 세 가지 기본이 있습니다. 어떤 겁니까? <수행의 기본(3대 원칙)>
1. 현재 일어난 것만 대상으로 해야됩니다.
현재 일어난 것을 반드시 알아차리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현재를 떠나서 어떤 것도 여러분들 수행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현재를 반드시 대상으로 해야 되고. 현재를 대상으로 하더라도 현재 뭘 대상으로 해야 됩니까?
2. 현재 일어난 것이 변하는 것.
변하는 현상을 대상으로 해야지 붙잡혀 있어버리면 안됩니다. 그 대상이 변하는 것을 알아차리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원래 두 개의 기본축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게 안 될 때 어떻게 합니까?
3. 그것들이 잘 안 될 때는 천천히 하라는 거라.
그걸 알기 위해서 현재 일어난 대상을 알아차리고, 그것이 변화되는 것을 따라가면서 알아차리려고 하는데 그게 안 될 경우에는 천천히 하라는 거라.
그래서 그걸 삼대 원칙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천천히 하는 것은 절대 위빳사나 수행은 아닙니다. 그건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가장 위빳사나 답습니다. 그런데 안되니까 어쩔 수 없이 천천히 하라는 거라.
자! 그 밑에
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소- 사또-와 앗사사띠 사또-와 빳사사띠'
'그는 단지 알아차리면서 숨을 들이쉬고 단지 알아차리면서 숨을 내쉰다.'
'사또-' 그걸 해석하는 걸 '사또' 여기에서는 뒤에 '와(va)' 돼있습니다. '에와(eva)'로 해석할 것이냐 '이와(iva)'로 해석할 것이냐에 따라서 이게 해석하는 방법에 조금 차이가 납니다. '에와'로 해석했을 경우에는 '완전하게 알아차린다'는 의미이고, '이와'로 해석했을 경우에는 단지 그냥 '아, 그것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거고,
여러분들은 어떻게 알아차려야 돼? 호흡을 들이쉰다. 들이쉬는 걸 '호흡 들이쉬고 있네'하고 그냥 단지 알아차리는 거라? 아니면 호흡을 볼 때 완전하게 호흡을 들이쉬면서 처음부터 마지막 끝까지 완전하게 알아차리는 거라?
완전하게 알아차려야 됩니까? '완전하게' 알아차릴 수 있으면 완전하게 알아차리십시오. '단지' 호흡을 알아차리려면 그렇게 알아차려도 됩니다.
수행에는 먼저, 움직임을 먼저 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움직임을 분명하게 들이쉬고 끝나는 걸 알고, 내쉬고 끝나는 걸 알고, 움직임을 알아야만이 움직임에 따라서 호흡의 움직임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느낌의 변화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느낌이 변하는 걸 아는 거는 잘 수행한 수행자들이나 가능합니다. 대부분은 그걸 모른다는 거라.
움직임만을 알 경우에는 완전하게 알려고 할 거 같으면 붙잡아 버립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알려고 할 때는 그냥 '단지' 움직이고 있다는 것만 알려고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그래서 호흡이 있다는 것, 들이쉬면 '아, 들이쉬는구나'하고 알아차리는 것, 그래서 들이쉬는 처음부터 시작을 해서 들이쉬는 끝나는 데까지를 분명하게 딱 아는 것, 이것은 '단지'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라. 그럴 경우에는 '단지 알아차린다'라고 얘기합니다.
초기 부분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스님은 그냥
아! 이것을 '완전하게'로 해야 되나, '단지'로 해야 되나 고민을 하다가, 아! 초판 초기 부분이니까 그리고 지금은 짧게 들이쉬면 짧게 들이쉬는 것 길게 들이쉬면 길게 들이쉬는 것 이걸 하기 전이니까,
그냥 '단지 알아차리는 것'이 문맥상에서 안 맞겠나 하고 스님이 판단을 한 겁니다. 이거는 꼭 그게 맞다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알아차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도 맞아. 그리고 그것도 없이 '단지 그냥 알아차리며 숨을 들이쉰다' 할 거 같으면 그것도 맞아.
그런데 그냥 알아차리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하기에는 뒤에 '와(va)'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해석을 했고.
앞에 있는 '소(so)'는 단수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의미상으로 봤을 때는 단수는 단수인데 남성형으로 쓰여지는 것보다는 중성형으로 쓰는 것이 안 낫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번역하기는 '그는' 삼인칭을 썼죠. '그는 단지 알아차리면서' 이렇게 돼있는데, 의미상으로는 너도 그고, 너도 그고, 다 '그'라는 거라. 문맥상으로 '그들은' '수행자들은'하는 그런 의미로써 받아들여야 됩니다.
왜 그러냐면 뒤에 '앗사띠' 하고 '빳사띠' 하고가 전부 3인칭입니다. 3인칭으로 돼있는 거기 때문에 '너'는 3인칭입니까? 예? 2인칭이죠. 그래서 2인칭으로 보기보다는 3인칭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안 맞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렇게 스님은 해석을 해놔놨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질문받겠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대념처경 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6강. 신념처- 아나빠나 사띠(Ānāpānassati) (0) | 2019.05.14 |
---|---|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5강. 수행의 기본 패턴(핵심) - 앞 법문 총정리 (0) | 2019.05.13 |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3강. 서론 부분 (무상•고•무아로 보려면) (0) | 2019.05.13 |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2강. 웃데-소(서론 부분) (0) | 2019.05.12 |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1강.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Mahāsatipaṭṭhāna Sutta)(20110122) (0) | 2019.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