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념처경 법문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2강. 웃데-소(서론 부분)

담마마-마까 2019. 5. 12. 22:30

https://youtu.be/ilifIRNqlE8

 

2강. 서론 부분 (20110129)

 

I. UDDESO 웃데-소-(전체적인 설명)

 

Ekāyano ayaṁ, bhikkhave, maggo sattānaṁ visuddhiyā,

에-까-야노- 아양, 빅카웨-, 막고- 삿따-낭 위숫디야-

"비구들이여!" 바로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sokaparidevānaṁ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ṁ

atthaṅgamāya,

소까빠리데-와-낭 사마띡까마-야, 둑카도-마낫사-낭, 앗탕가마-야,

슬픔과 비탄들을 모두 넘어서기 위한, 괴로움과 근심들의 소멸을 위한,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냐얏사 아디가마-야, 닙바-낫사 삿치끼리야-야,

정확한 도의 방법을 터득하기 위한, 닙바나의 실현을 위한 것이니,

 

yadidaṁ cattāro satipaṭṭhānā.

야디당 짯따-로- 사띠빳타-나-.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여기까지는 웃데사 부분에 해당이 됩니다.

누가 한번 빨리어 원문 한번 읽어보세요.

'에까야노 아양 빅카웨~' 한번 누가 읽어봐봐요.

(수행자 독송 : 에까야노 아양 빅카웨 ~~ 야디당 짯따로 사띠빳타나)

자! 거기까지 하고, 외우십시오. 빨리어 원문들은 되도록이면 외울 수 있으면 외우도록 하십시오.

먼저 빨리어 풀이를 하고, 뒤에 수행방법에 연계된 것들을 얘기하겠습니다.

 

첫 번째 줄

Ekāyano ayaṁ bhikkhave maggo,

에-까-야노- 아양 빅카웨- 막고-, 부분입니다.

빅쿠들이여! 바로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하는 겁니다.

 

'에까야노(ekāyano)' '에까(eka)'가 하나라는 거고 여기서는 목적격으로 쓰였죠. '아야나(ayana)'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아야나'라 해서 '나아간다'는 뜻으로써 '길' '방법' 이런 뜻으로 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길' '하나로 나아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가끔씩 대승불교에서는 이걸 '일승(一乘)'으로 풀이를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는 '에까' 에다가 '야나(yana)'가 되겠죠! '아야나'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그건 아닙니다. 잘못 풀이를 한 경우입니다. '에까 아야나' 입니다. '에까' 다음에 '아(ā)'가 장음으로 돼 있죠! 그건 앞뒤로 '아(a)'가 사용되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에까 아야나'로 봐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길'이라고 봐야됩니다. '하나로 나아가는 길!'

 

어디로 나아갑니까? 뒤에 설명을 하고 있는 '청정을 위하는 길로 나아가고, 도와 과의 길로 나아가고, 닙바나에 이르도록 하는 그쪽으로 나아간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에까야나'라고 하는 그런 의밉니다. 자칫 잘못 해석하면 어떻게 됩니까? '오직 이 길밖에 없다'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 다른 경전들을 보면 '이 사념처 수행만이 오직 유일하게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하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꼭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조금 부드럽게 얘기하면 '하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도에 이르는 길이 다른 곳으로 벗어나지 않는다'는 그런 의밉니다. 누구든지 수다원에 이르렀으면 그 길을 따라가면 수다원에 이를 수가 있고, 수다원에서 나타나는 경지들 몸으로 보여지는 행실은, 다른 사람이 수다원에 이르렀을 때도 똑같이 그와 같은 행실들로써 나타난다는 그런 뜻으로써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문장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이 '에까야나'라고 하는 것은 어떤 다른 길보다도 뛰어난 길이라는 뜻입니다. '최상의 목표를 향해서 나아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어떤 수행법보다도 뒤에 '막가(magga)'가 붙으면 '뛰어난 법'이라는 그런 뜻이 됩니다. '도와 과에 이르는 가장 뛰어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빠른 길이다'라는 그런 뜻을 내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까야나 막가'라는 걸 주석서에서는, 밑에 스님이 주석을 달아놨죠! 다섯 가지로써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에까야나'라는 것의 의미라고 보면 됩니다.

 

'아양(ayaṁ)'은 '바로 이것'이라는 '에띠(eti)'에서 나온 거죠! 목적격으로. 그래서 바로 이것이 '에까야노 막고'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바로 이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오직 유일한 길이다' 하는 그런 뜻으로 해석이 되는 거죠.

 

'에까야노 막고'의 다섯 가지를 쭉 적어놨습니다.

 

첫 번째가, '샛길이 없는 단 하나의 길이다.' '나 드웨-다빠토-(na dvedhapatho)'

다른 샛길이 없다는 거라. 만약에 오솔길로 간다고 할 거 같다면 저기 저쪽에 목표가 있으면, 다른 샛길로 갈 거 같으면 둘러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샛길이라는 것은 없다는 거라. 오직 그 길만으로 가야만이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물론 숲을 가다 보면 다른 샛길들이 많죠!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다른 샛길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샛길로 가면 열반에 이르지 못하고, 또한 아주 느리게 갈 수밖에 없고, 몸에는 온데 상처들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번뇌 망상에 훨씬 더 많이 휩싸이게 될 수밖에 없다는 그런 뜻을 함유를 하고 있는 게 이 첫 번째의 의미입니다. '샛길이 없는 단 하나의 길이다' 하는 것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닙바나에 이르기 위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이 길을 따라가야 된다는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최고 빨리 가는 길인데,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가는 길이고, 또한 내가 덜 힘들게 아주 쉽게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다른 샛길로 갈 이유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확신들을 가지고 해탈에 이를 때까지 이 길을 따라가야 된다는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게 이 첫 번째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에-께-나 아이땁보-(ekena ayitabbo)' '혼자 스스로 실천하는 길'

그렇게 해놔 놨습니다.

수행은 누가 합니까? 자기 스스로 해야 하는 거죠! 절대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스스로 나아가야 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스스로 하는 거는 자기의 무얼 가지고 수행하는 겁니까? 자기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수행하는 것이지 남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즉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가지고 꾸준하게 실천해서 나아가야 되는 그런 길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아무리 스님이 법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수행법에 대해서 얘길 하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거죠. 부처님도 그 길을 갔지만 부처님이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주지 못했다고 그럽니다. “나도 한 사람도 제도를 못했다” 하고 얘기를 하거든요, 경전에. 그 얘기는 뭐냐면 제도를 하려면 자기가 스스로 노력을 해가지고 제도를 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처님이 “한 사람도 내가 열반으로 이끈 것은 아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스로 노력을 해야죠.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에-깟사막고-(ekassamaggo)' '부처님이 알아내신 길'이라는 겁니다.

부처님이 거기 도달해보니까 '아, 이게 닙바나에 이르는 길이구나, 이게 닙바나구나' 하는 걸 알았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라는 한 분이 알아내신 길이라는 거라. 오직 유일하게 석가모니 부처님이 알아내신 길이고, 우리도 그것 따라 나아가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도 오직 유일한 자가 된다는 그런 의미들을 가집니다.

누구든지 그 수행을 따라서 나아가면 가장 빨리 가고, 또 그러므로 인해서 내가 실천해 나가면서 각각의 이익들이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도 경지에 도달할 것 같으면 붓다와 똑같은 그런 경지에 이르른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아라한 경지나 내가 깨달은 아라한 경지나 똑같다는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담마(Dhamma)와 위나야(vinaya)에서만 존재하는 길이다.'

다른 곳에서 이 방법, 이것에 이르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조금 자부심이 있는 얘기죠! 그마만큼 부처님의 담마(法)와 위나야(律)는 세상을 거스르지 않고, 또 세상의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하고도 관계없고, 철학하고도 관계없이, 오로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얘기해 놓은 것이 '담마'이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몸을 갖추어 나가는 도덕적인 행위에 대해서 얘기한 것이 '위나야'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위나야'를 잘 지키면 세상에서 참 '잘 살아간다'하고 얘기를 듣게 되는 거고, 담마를 잘 지켜서 그것 따라서 실천해나가는 사람은 '잘 수행한다'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세상의 이치와 동떨어지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곧 부처님의 담마와 위나야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여기 선원에서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일상생활에서 곧 담마와 위나야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생활 자체가 바로 수행이고, 생활 자체가 계율 따라 행하는 것이 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법과 율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여러분들의 행위들을 보고,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경행 하는 모습 하나를 보더라도, 저 사람이 지금 현재 어떤 생활로써 사회서 하고 있고, 또 수행력은 얼마만큼 돼있는가 하는 것이 드러나게끔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에-깡 아야띠(ekaṁ ayati)' '열반으로 향한다'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로 가는 게 아니고 열반이라는 딱 하나의 길, 딱 하나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지 다른 곳으로 빠지는 것이, 다른 곳으로 나아가는 그것을 향해서 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오직 유일한 열반이라는 하나의 길을 향해서 나아가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에까야노 아양 빅카웨 막고'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막고'에 대한 문답중략)

 

그렇게 하고 나니까 뒤에 있는 게 '삿따-낭 위숫디야-' 그렇게 나오죠.

'삿따낭(sattānaṁ)' 모든 중생들 '삿따(satta)'에 소유격이 붙은 '낭(naṁ)'이 됩니다. '삿따'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존재, 중생들이라는 거. 이거는 소유격으로 봐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들의'라고 해석을 해야 됩니다.

'위숫디야(visuddhiyā)' '위숫디(visuddhi)'에 '이야'가 붙었죠? 그건 여격이 됩니다. 그래서 '청정을 위하여' '청정을 위해서'라는 그런 뜻이 됩니다. '중생들의 청정을 위해서 실천해야 될 오직 유일한 길이다' 이런 뜻이 됩니다.

그래서 '에까야노 막고'는 뒤에 나오는 다섯 가지에 다 해당이 되는 겁니다. 청정을 위하는 '에까야노 막고'고 닙바나에 이르는 '에까야노 막고'고 이런 식으로 다 해당이 되는 형태들을 띄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인제 이해가 됐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는 길! 무엇 때문에 여러분들 청정해지려고 그럽니까?

'위숫디' '청정', 청정해지려는 이유가 뭡니까? (수행자 대답)

번뇌로부터 마음이 더럽혀져 있으니까 그 번뇌의 영향을 받지 않고 번뇌로부터 마음이 벗어나기 위한 것, 벗어나면 청정해진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청정해지는 거고 '청정'이라는 용어들을 씁니다.

또 다른 의미가 뭐가 있을까? 청정이라 할 때?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생로병사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죠! 죽고 나서 여러분들 어디 태어날지 알 수 있습니까? 모르죠! 적어도 네 가지 악처로부터는 벗어나야 될 거 아니라. 그래야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든지 천인으로 태어나든지 해서 수행 또 열심히 해서 도와 과에 이르도록 노력할 수가 있습니다.

 

청정을 위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완전하게 번뇌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생로병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렇다고 지금 아무리 노력해 봐도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번뇌들을 다 제거하지는 못할 거 같은데 어찌하면 좋겠노? 어쩌면 좋겠어? (수행자 대답)

착하게 살면? 이사람아 우리가 지금 뭐 배우고 있어? '사띠빳타나' 배우고 있잖아! 사띠빳타나 하면 될 거 아냐!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청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오직 유일한 길이 뭐라? 사띠빳타나 잖아! 사띠빳타나 하면 돼!

 

그래서 청정하다 안 하다 하는 거는 어떤 겁니까? 물질적인 겁니까, 정신적인 겁니까? 정신적인 거죠! 물질은 여러분들이 얼마든지 청정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세탁기 돌려버리면 끝납니다. 그렇죠! 뜨신 물 넣고 세제 넣고 버튼 딱 누르면 옷은 깨끗하게 끝나.

마음은 어떻게 그럼 어떻게 깨끗하게 세탁을 할 거라? 어떻게 깨끗하게 만들 거라? 마음을. 오만 번뇌들에 물들어 있는데, 또 물들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 '사띠'하면 돼! 사띠를 확립하면 되는 거라. 알아차림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도록 해주는 것, 그래서 번뇌가 나에게 일어날 여유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들이다. 이게 청정에 이르는 길입니다.

 

어떻게 그럼 사띠를 할까? 사띠 하는 방법 얘기해봐. (수행자 대답)

가장 간단한 것들을 먼저 얘기를 하겠습니다. 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 '사마-히또- 야타-부-땅 빠자-나-띠(samāhitoyathābhūtaṁ pajānāti)'

'마음이 집중되어있는 자는 있는 그대로를 보고 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고 알면, 그게 번뇌이면 번뇌인 줄 알고, 또 내가 먹고 있으면 먹고 있는줄 있는 그대로 알 거 같으면 마음이 청정해진다 하는 겁니다. '마음이 집중되어있는 자는' 했습니다.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를 알려고 할 거 같으면 마음이 대상에 대해서 집중되어있지 않으면 그걸 알 수 없다는 얘깁니다.

 

수행할 때 '사띠빳타나'를 계발하기 위해서 전제조건이 뭐겠어요?

대상에 마음을 집중할, 대상이 뭔 줄 알아야 사띠를 할 수 있을 거 아니라.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들이 우선이 돼야 합니다.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데 많이 벗어나죠! 예를 들어서 배를 알아차리고 있다고 해도 한 두 번 '일어남' '사라짐' 하고 나면 언제 달아났는지, '집에 맛있는 거 뭐 있는데' 하면서 달아나버립니다.

이렇게 달아나면 어떻게 해야 될까? 달아나면 어떻게 다시 여기에다 집중해야 돼? 생각도 일어나고 또 여러 가지 현상들도 일어나집니다. 공부하기 싫다 하는 마음도 들고, 또 대상을 자주자주 잃어버립니다. 한두 번 하다가 없어, 대상이. 생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도 싫증을 일으켜가지고 멍하게 있기도 하고, 너무 고통스러운 거 때문에 그쪽으로 마음이 가기도 하고 그렇게 한단 말이라.

 

그러면 그럴 땐 어떻게 하면 가장 간단하게 다시 호흡으로 돌아올까?

(수행자 대답) 자기가 대상을 놓친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할 거야.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 참 난점입니다. 어려운 부분인데, 일단 지금 내가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었다고 할 거 같으면 호흡을 강하게 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크게 해 줬을 때 그걸 대상으로써 빨리 받아들입니다.

마음은 항상 무거운 걸 따라 움직이게끔 돼있습니다. 그럼 대상을 놓쳤으면 대상을 놓치는 게 마음이 산란하고 싫어하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그런 정신적인 현상이라 할 거 같으면 그 대상을 크게 만들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만이 마음이 그 대상 쪽으로 다시 달라붙습니다. 갖다 붙습니다. 그렇게 해서 집중하는 힘들이 자꾸 떨어지면 그렇게 해서 어쨌든 자꾸 갖다 붙여줘야 돼. 그래야만이 그 대상을 자꾸 알아차려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게 인제 첫 번째로 해야되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만이 '야타부따(yathābhūta)'라고 '본질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하라. 대상은 모든 것들이 대상입니다. 대상 아닌 것이 없죠? 실제적으로. 모든 것들이 대상인데 수행하는 사람들은 보통 어떤 생각들을 가지냐면 단순한 것만 대상으로 자꾸 생각합니다. 호흡, 걸어갈 때, 아니면 밥 먹을 때 이런 것만 자꾸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죠? 나머지 때는 대상으로 인식을 안 합니다. 쉽게 말하면 집중하는 힘들이 없다는 겁니다. 대상이라는 인식을 못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빨리 그걸 해줘야 됩니다. 대상을 인식해주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떤 훈련들을 합니까? 대상을 이동하는 훈련들을 자꾸 해줍니다. 이거 봤다, 저거 봤다, 이거 봤다, 이런 식으로 자꾸 이동하면서 마음이 그 대상에 집중하는 훈련들을 자꾸 평상시 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이든 퍼뜩 일어나면 그걸 대상인 줄 알고 알아차려 나갈 수가 있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걸 놓쳐버리는 거라. 대상이 일어나도 대상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놔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런 훈련들을 자꾸 해줘야 됩니다.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때는 지금 하고 있는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수단들을 강하게 만들어 줘라. 아까 같이 호흡을 크게 하든지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그리고 평상시 있을 때는 모든 것이 대상이라는 인식을 자꾸 키워나가줘야 됩니다. 수행 아닌 대상이 없다는 생각을 자꾸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해야 만이 대상에 집중하는 힘들이 커져나가는 거라. 대상에 집중을 해야만이.

 

집중된 마음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 맨 꼬맹이! 마음이 대상에 집중되면 어떻게 될까? 자! 예를 들어서 손바닥 두 개 이렇게 내봐. 그렇게 해가지고 손바닥 두 개를 살짝 갖다 대봐. 그래가지고 손바닥을 딱 붙여봐봐. 딱 붙었지? 그러면서 천천히 한번 떼봐봐. 스톱. 자! 그렇게 손바닥을 붙였다가 뗄 동안에 마음이 다른 곳으로 벗어난 적은 있어? 바르게 했으면 그거 할 동안에 마음이 그 대상에서 벗어나지질 않습니다. 그게 대상에 집중하고 있다는 거거든. 그게 인제 첫 번째고.

 

대상에 집중하고 있으면 생기는 이점이 뭐냐면 번뇌가 안 들어옵니다. 안 일어나집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잘하고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판단을 하는 건 뭐냐면 어떤 대상을 만나더라도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가 아닌가를 가지고 판단들을 합니다. 경계마다, 대상마다 자꾸 마음이 바뀌고, 마음의 폭이 클 거 같으면 그건 수행하는 자가 아니라는 얘기라. 집중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것들은 그런 현상들입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쉬어버리고, 가라앉는다는 거라.

 

평온해질 거 같으면 거기서 일어나는 것들이 뭐가 있을까? '바른 사띠(sati)'입니다.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힘들이, 알아차리는 힘들이 생겨나갑니다. 그래서 사띠와 사마디는 쌍을 이룬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대상을 알아차려나갔을 때는, 그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나가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이 '삼빠자나(sampajāna)'라는 거라. 계속해서 그대상을 분명하게 인식해나가고, 분명하게 이해한다는 거라. 명확하게 안다는 거라. 그래서 '삼빠자나'를 '분명하게 앎' '정확하게 확실하게 이해한다.' 그렇게들 풀이를 하는 겁니다.

 

사마디가 있으면 사띠가 같이 겸해지게 되고 이 두 개가 지속이 될 거 같으면 삼빠자나가 이어진다는 거라. 그럼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죠? 살아가는데. 뭐가 더 있어야 되겠어요? '지혜(慧)'라고 하는 '빤냐(paññā)'가 들어가져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렇게 하더라도 힘이 완전하게 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번뇌들은 침투해 들어옵니다. 침투해 들어오면 그 번뇌에 휩쓸리게 됩니다. 화가 일어나면 화에 휩쓸리게 된다는 거라. 그것을 막아줄 수 있는 것은 지혜밖에 없다는 거라.

 

지혜가 어떤 기능을 하느냐면 쉽게 말하면 지금 친구가 내 보고 놀러가자 한다 그럴 것 같으면 '아, 내가 지금은 놀러 갈 때가 아니지' 하고 판단을 내린다는 거라. 그건 지혜가 하는 것이지 사띠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사마디가 하는 것도 아니고. 그와 마찬가집니다.

이 사띠(sati)와 사마디(samādhi)라고 하는 양쪽 기둥을 드는 사람이 이 물건을 여기서 저쪽으로 옮기면 삼빠자나(sampajāna)가 이어집니다. 그럼 이게 무거운 줄 알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이걸 도와주러 온다는 거라. 그게 바로 지혜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잘 사띠와 사마디를 이어나갈 거 같으면 지혜(paññā)는 반드시 일어난다는 거라. 잘 못하니까 지혜가 안 일어나는 거라.

 

수행은 그런 식으로 해나가야 만이 청정에 이르는 상태가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이든지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끔 되었을 때 몸과 마음에서는 청정한 상태, 번뇌가 없는 상태를 이어나가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위빳사나 수행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sokaparidevānaṁ samatikkamāya,

소-까빠리데-와-낭 사마띡까마-야,

슬픔과 비탄들을 모두 넘어서기 위한,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실제로는 '소-까낭 빠리데-와-낭(sokanaṁ paridevānaṁ)' 그렇게 되죠. 소유격 '낭(naṁ)'이 붙어놓으니까 '-까빠리데--(sokaparidevānaṁ)'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소-까낭 빠리데-와-낭' 그런 겁니다. '슬픔의, 비탄들의'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붙어있기 때문에 '슬픔과 비탄들의' 그렇게 되는 거죠!

그다음에 '사마띡까마-(samatikkamāya)' 입니다. '상(saṁ)'이라 그러면 '모인다'는 뜻이고, '아띠(ati)' '초월한다', 그다음에 '까마(kama)' '차례대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에 k에 k가 하나 더 붙죠! 그거는 첨가되는 것입니다. '아띡까마' 그다음에 '이야(iya)'는 여격이죠. '모든 것을 넘어서기 위하여'라는 그런 뜻이 됩니다. 그래서 슬픔과 비탄들을 모두 넘어서기 위한 '에까야노 막고'이다 하는 그런 뜻이 됩니다.

 

어떤 때 여러분들에게 슬픔과 비탄들이 일어납니까?

(수행자 대답) 뭔가 잃어버렸을 때, 애인하고 헤어졌을 때,

(수행자 대답) 망상이 일어났는데 슬픔이 일어납니까?

(수행자 대답) 과거의 기억들에 대해서 그것이 슬픈 것일 때 슬픔이 일어나든지는 하겠지만, 망상이 슬픔을 일으키는 건 아니죠! 망상으로 인해서 ‘아이! 내가 공부할 건데, 이 시간 손해봤다’는 생각때문에 슬퍼지겠죠. 그렇게 봐야될 겁니다. 어쨌든 뭔가 손해 봤을 때 슬픔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슬픔과 비탄은 조금 차이가 나죠? 슬픔보다는 비탄이 조금 더 강하죠!

주석서에는 그걸 프라이팬에 기름을 넣어서 불에 달구는데 그 달구어지는 강도에 따라서 약한 불에서 일어나는 것이 슬픔이고, 강하게 했을 때 툭툭툭툭 튀면서 다른 사람이나 나한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비탄에 해당 된다, 그렇게 강도에 따라서 구분하는 것이지, 슬픔과 비탄은 하나의 자락이죠! 정신적인 부분들입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재산이나 명예라든지 아니면 내 주변에 가족들이든지 그런 것들, 그다음에 병에 걸려도 그렇게 됩니다. 질병들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오는 것들이 슬픔이나 비탄입니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죠? 안 잃어버리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 나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것은 거짓말이겠죠!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슬픔과 비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지 뭐 어떻게 해. 잃어버렸으면 ‘잃어버렸는가 보다’ 생각해야 슬픔과 비탄으로부터 벗어날거 아니라. 다른 방법이 없잖아. 가장 좋은 방법이 뭐냐면 슬픔과 비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아에 대한 개념 관념들을 가지는 것들을 하루빨리 떼어버려야 만이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수월하다는 겁니다.

마음속으로 그리해 봐요. ‘에이, 내가 뭐 잘났다고 아무것도 아니다’하고 그리 한번 생각들을 가져 봐요. 물론 개념적인 부분이지만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 하는 것들에 대해서 크게 불만도 안 가지고, 또 세상에서 내가 좀 손해 보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그렇게 슬퍼하고 하는 것들은 좀 줄어듭니다.

그런 것들을 먼저 자꾸 인식을 가져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1) '나, 나의 것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해야되는 것이

(2) '변하는 것, 모든 것들은 변하고 있다'고 생각을 가져야 만이 이런 것들이 일어나도 빨리 극복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3) '이런 것들은, 잃어버리는 것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나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 할 거 같으면 그건 배가 돼버려, 슬픔들이. 그래서 누구에게나 일어난다는 생각들을 자꾸 가져야 되는 거라.

경전에 각각의 슬픔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도 그걸 극복하는 것이 이 세 가지 때문에 극복한 겁니다. 부처님이 들려준 법문들도 다 정리해보면 이것들이라. 하루빨리 내가 이 견해들을 가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참 힘이 듭니다. 그거는, 그렇죠! 슬픔과 비탄을 완전하게 극복하려면 아라한과를 얻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때만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수다원이 돼도 이게 안 됩니다. 사다함이 돼도 안 되고, 미세하게들 남아있습니다. 수다원에서는 아주 많이 남아있고. 그리해도 먼저 우리 자신이 그런 개념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스스로 그런 바른 견해를 확립할 거 같으면 실제적으로 없애는 것과 비슷한 효과들을 가져오게 됩니다.

'변하고 있다는 것', '누구에게든지 일어난다는 것',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자꾸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조금 빨리 합시다. 오늘은 적어도 이거는 마쳐야지.

 

dukkhadomanassānaṁ atthaṅgamāya,

둑카도-마낫사-낭 앗탕가마-야,

괴로움과 근심들의 소멸을 위한,

 

dukkhadomanassānaṁ : dukkha(괴로움)+ domanassa(근심)의 복수 소유격= 괴로움과 근심들의,

atthaṅgamāya : atthaṅgama(= atthagama, 소멸, 태양이 서쪽으로 향하여 사라짐을 의미함, attha+ gama)의 단수 여격= 소멸을 위한

 

빨리어 해석 쫙 다 돼 있죠!  괴로움과 근심들의 소멸을 위한, 태양이 서쪽으로 향해서 사라져가는 것이니까 소멸이라고 표현들을 합니다. 소멸을 위한 '에까야노 막고'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둑카'입니다. 쉽게 말하면 '둑카'의 소멸. 부처님이 설하신 것은 '둑카와 둑카의 소멸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둑카가 있으면 둑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둑카를 완전히 소멸했을 때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다 하는 그런 겁니다.

 

둑카, 둑카의 소멸을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수행자 대답)

간단한 방법, 그리고 가장 강력한 시스템. 스님은 그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망상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자동적으로 내가 욕심부리고 혐오하고, 그러니까 붙잡고 밀쳐내고 하는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망상만 안 부리면 그렇게 됩니다. 망상을 안 부리면 마음이 둑카 쪽으로 기우는 일은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평정한 상태로 그대로 유지해나가면서 그것이 오히려 수행에서 오는 즐거움으로서 이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둑카로부터 벗어나져 버립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망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 맨 첫 번째 해야 하는 것이 뭐라? 생각하지 마라!

어느 수행처에 가든지 생각을 일으킬 수 있는 것들은 아예 안 합니다. 그래서 집중수행처에 가면 그런 것들을 위해 가지고 법문도 잘 안 하고, 책도 보지 마라, 다른 사람하고 말도 하지 마라 그렇게 하는 거라. 그 근원적인 부분이 뭐냐면 '생각을 일으키는 망상' 이 부분이거든. 이 망상을 하지 않는 시스템만 구축이 되면 둑카의 소멸은 거의 반은 떨어져 나간다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평상시 여러분들이 생각이 얼마나 많은지 수행을 조금만 해보면 압니다. 언제 벗어나는지 3초를 견디지 못하고 벗어납니다, 마음이. 진짜 그렇습니다. 3초 견디였으면 많이 견디는 거라. 경전에도 스리랑카에 있는 스님이 그랬다고 했잖아. 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면 내가 한 발짝 떼겠다고 했는데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는 거라. 수행한 스님들도 그렇다는 거라. 그게 망상입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구조들을 자꾸 만들도록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가장 좋은 방법은 확인하는 방법!!

탁 보고 아마로님이네! 태집님이네! 이렇게 확인하는 방법. 확인할 때는 적어도 머릿속의 구조는, 그거 확인하려면 여러 구조들을 거쳐야 됩니다. 마음의 구조에서. 그럼 자꾸 이렇게 확인하는 것만 하더라도 망상은 거의 없어져 버립니다.

마하시 선원 같은 경우 수행할 때 대상을 어떻게 하라 그럽니까?

명칭을 붙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일어남' 하고 명칭을 붙이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사라짐' 하면서 명칭을 붙이면서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확인하는 작업들이라. 적어도 그거 확인할 동안에는 망상부리지 않는다는 거라.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만이 실질적인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는 거라. 그 확인하는 작업이 '개념'이라도 그 확인하는 작업이 없으면 그게 안 된다는 거라. 실재적인 것들을 확인하기 위한 것들이. 망상이 일어나는 것도 그와 같이 대상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훈련들을 자꾸 한번 해보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적어도 괴로움과 근심의 소멸을 위한 가장 빠른 길이 됩니다.

 

그다음에 밑에 한번 봅시다.

ñāyassa adhigamāya,

냐-얏사 아디가마-야,

정확한 도의 방법을 터득하기 위한,

 

(문답 중략) 

그다음에 '냐-얏사 아디가마야'라고 하는 것.

정확한 도의 방법을 터득하기 위한 '에까야나 막고'

'-얏사(ñāyassa)' '냐-야(ñāya)' 그거는 '니'라고 하는 것이 어근입니다.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어디로 인도하느냐면 정확한 방법, 진리로 인도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어근이 인도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ñāya)'를 '팔정성도'로 많이 얘기들을 합니다.

팔정성도가 아니라도 관계는 없습니다. 어쨌든 팔정성도가 드러나지 않으면 도와 과가 성취되지 않죠! 경전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팔정성도에 이르지 않으면 수다원과에 이를 수 없다, 수다원도에 이르를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적어놓은 경전들도 있습니다. 어쨌든 도와 과에 이를려면 팔정성도를 분명하게 밟아나가야 됩니다. 팔정성도를 벗어난 상태에서 도와 과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냐-야'라고 하는 것이 인도하는 것이 어디로 인도하겠어요? 당연히 팔정성도로 인도를 하겠죠.

 

그래서 팔정성도로 얘기하는 주석가도 있고, 또 한편으론 팔정성도로 인도를 했으면 당연히 어디로 인도합니까? '도'로 인도하는 거죠! 그래서 사쌍팔배 중에 성인의 도, 도에 이르른 그런 상태들로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럼 밑에 뒤에 있는 게 '닙바-나(nibbāna)'라고 하는 '과'이기 때문에 앞에 거를 '도'로 '성스러운 도'로 인도한다 하고 풀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팔정성도이든 성스러운 도든 '냐-야'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고.

 

(수행자 질문)

어떤 경우든지 하나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는 것보다 차라리 여러분들은 문자 그대로 정확하게 '도의 방법을 터득하기 위한'으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더 합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부처님의 수행법은 어떤 식이든 바른 과정을 밟아나가게 됩니다.

그 과정 없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사띠를 할 거 같으면 당연히 관찰력이 뛰어나지게 됩니다. 또 기억하는 것들도 뛰어나게끔 됩니다. 그러니까 사물의 실재적인 것들에 대해서 더 통찰하는 힘이 커집니다. 그래서 '무상'한 거니까, 변하는 거니까, '무아'니까, '고'니까 하고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 통찰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점점 더 도와 과에 이르르게 되는, 그런 진행과정을 밟게끔 돼있습니다. 그런 의미가 바로 '냐-야'라고 보면 됩니다. 알겠습니까?

그런 것이지 그런 과정 다 생략해버리고 한방에 그냥 '돈오' 하고 탁 깨쳤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거는 반드시 그 과정을 밟아가지고 돈오가 되는 것들입니다. 급작스럽게 됐다는 것뿐인 것이지, 더 얘기를 하면 안 될 거 같네 그거는.

 

그다음에 nibbānassa sacchikiriyāya, 닙바-낫사 삿치끼리야-야,

닙바나의 실현을 위한 것이니,

 

닙바나의 실현을 위한 '에까야노 막고'라는 겁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으로 다가가는 거죠. 이거는 뭐 다른 부분 설명할 것도 없습니다.

 

yadidaṁ cattāro satipaṭṭhānā. 야디당 짯따-로- 사띠빳타-나-.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Katame cattāro? 까따메- 짯따-로-.

무엇이 네 가지인가?

 

그것이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고, 앞으로 설명해야 될 것이, 이 네 가지는 뭔가 하는 부분입니다. 「서언 부분」은 이 정도로 해서 그치도록 하고 다음 시간에는 네 가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더불어 신념처 수행으로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서론은 이 정도 하면 되겠죠? 대충 '사띠빳타나'가 어떻게 이루어졌다 하는 것들은 이해가 됐을 거라고 봅니다.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하십시오.

 

 

※ 아래의 빨리어 문법 풀이 부분은 붓다의 길따라 선원의 홈페이지에서 인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I. UDDESO 웃데-소-(전체적인 설명)

 

Ekāyano ayaṁ bhikkhave maggo sattānaṁ visuddhiyā,

에-까-야노- 아양 빅카웨- 막고- 삿따-낭 위숫디야-,

"빅쿠들이여!" 바로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ekāyano : 유일한 길, eka(하나, 혼자, 유일한, 오직 이것 하나), 단수 목적격+ ayana(목적, 길, 방법, 행로), 단수 주격

ayaṁ : eti(바로 이것), 단수 목적격

bhikkhave : 빅쿠들이여! 능동태 호격

maggo : magga(도),

ekayana magga : ①샛길이 없는 단 하나의 길(ekamaggo, na dvedhapatho), ②혼자 스스로 실천해야 하는 길(ekena ayitabbo), ③붓다라는 한 분께서 알아내신 길(ekassamaggo), ④붓다의 가르침이라는 법과 율에서만 존재하는 길, ⑤열반이라는 하나를 향해서 가는 유일한 길(ekaṁ ayati),

sattānaṁ : satta(존재, 중생, 유정)의 복수 소유격(~장모음+naṁ)= 중생들의,

visuddhiyā : visuddhi(청정)의 여성 단수 여격=청정을 위하여,

 

sokaparidevānaṁ samatikkamāya,

소-까빠리데-와-낭 사마띡까마-야,

슬픔과 비탄들을 모두 넘어서기 위한,

sokaparidevānaṁ : soka(슬픔)남성명사+ parideva(비탄)남성명사의 복수 소유격= 슬픔과 비탄들의,

samatikkamāya : saṁ(모두, 함께 모인)+ ati(초월)+ k+ kama(차례대로 나아가다)+ iya 여격= 모두 넘어서기 위하여, 초월을 위한, 부사 단수 여격

 

dukkhadomanassānaṁ atthaṅgamāya,

둑카도-마낫사-낭 앗탕가마-야,

괴로움과 근심들의 소멸을 위한,

dukkhadomanassānaṁ : dukkha(괴로움)+ domanassa(근심)의 복수 소유격= 괴로움과 근심들의,

atthaṅgamāya : atthaṅgama(= atthagama, 소멸, 태양이 서쪽으로 향하여 사라짐을 의미함, attha+gama)의 단수 여격= 소멸을 위한

 

ñāyassa adhigamāya,

냐-얏사 아디가마-야,

정확한 도의 방법을 터득하기 위한,

ñāyassa : ñāya(= baya, 진리, 정확한 방법)의 단수 소유격= 진리의, 정확한 (도의) 방법의,

*ñāya(진리)는 ariyo atthaṅgiko maggo, 즉 팔정성도를 말한다.

adhigamāya : adhigama(증득, 도달)의 단수 여격= 증득을 위한,

 

nibbānassa sacchikiriyāya,

닙바-낫사 삿치끼리야-야,

닙바나의 실현을 위한 것이니,

nibbānassa : nibbana(닙바나, 열반)의 단수 소유격= 닙바나의,

sacchikiriyāya : sacchikaroti(= sa<함께>+ acchi<눈>+ karoti<행하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경험하다, 보다)의 명사형= sacchikiriyā(실현)+ 단수 여격(āya)= 실현을 위한,

 

yadidaṁ cattāro satipaṭṭhānā.

야디당 짯따-로- 사띠빳타-나-.

그것은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yadidaṁ : yad(yaṁ, ~은 바로)+ idaṁ(그것), 불변화사

cattāro : catu의 남성명사 복수= 네 가지

satipaṭṭhānā : satipaṭṭhāna(알아차림의 확립)의 복수 주격, sati+ upaṭṭhāna(가까이 있는 상태)

 

Katame cattāro?

까따메- 짯따-로-.

무엇이 네 가지인가?

Katame : katama, 어떤 것이, 무엇이, 형용사, 복수 주격

cattāro : catu의 남성명사, 복수 주격= 네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