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념처경 법문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3강. 서론 부분 (무상•고•무아로 보려면)

담마마-마까 2019. 5. 13. 00:00

  https://youtu.be/_3NxIkKbiGY  

3강. 서론 부분 : 무상‧고‧무아로 보려면 (20110205)

 

오늘 들어갈 거 해봅시다. 세 번째 부분이죠, 오늘이?

책도 보고, 책은 여러분들이 다 숙지를 하고 와야 되는 거고.

프린트물 펴 보십시오.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이다 빅카웨- 빅쿠 까-예- 까-야-누빳시- 위하라띠,

빅쿠들이여! 여기, 빅쿠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이다(idha)'는 '여기' '이 세상' 이란 그런 뜻인데, 여기서는 이 문장의 도입부라고 보시면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것은 뭐냐' 하고 도입부에 들어가는 그런 의미입니다. 또 사성제라는 것이 뭔가 하고 도입부에 들어가는 그런 의미로써 '이다'를 봐야 되는 것이지, 그냥 단순하게 의미상으로 봐서 '이 세상' 이라든지 이렇게 봐버릴 것 같으면 문장을 이해하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게 됩니다. 이것은 도입 부분으로써 하나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봐야 됩니다.

 

원래는 우리 문장대로 할 거 같으면 '빅카웨' '빅쿠들이여' 하는 것이 먼저 앞으로 나와야 되겠지! '빅쿠들이여' 하고 나서 '여기'라고 하는 것이 딱 하나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여기'라고 하는 것이 '이 경전 전체'를 통칭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붓다사사나'라 해서 부처님의 말씀, '붓다 왓짜'라 해서 부처님의 직접적인 설법, 불설을 지칭할 때 '이다'라는 용어들을 많이 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의 맨 앞에 가있죠! 사성제란 이런 것이다 하고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빅카웨-(bhikkhave)' '빅쿠들이여' 하는 호격으로 쓰인 겁니다. 항상 부처님이 제자들을 부를 때는, 출가제자들에게는 '빅쿠들이여!'하고 불렀죠! 경전에는 거의 대부분 '비구들이여!'하고 부르게 됩니다.

'빅쿠(bhikkhu)'는 저번에 설명을 했습니다.

그다음에 '--(kāye)'라고 하는 것은 처소격입니다. '까야(kāya)'라고 하는 단수 처소격으로 쓰였죠! 그래서 몸에 대하여, 몸에서.

이 문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까예' '까야' 그런데 '까야'가 두 개 나오죠!

그다음에 '아누빳신(anupassin)'이라고 하는 것이 나옵니다.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관찰하라'라는 그런 뜻입니다. 문장 자체로 직역을 하면.

밑에 설명을 쭉 해놓았습니다. '까야'하고 '아누빳싱'이라고 하는 것이 복합된 것이 '--누빳시-(kāyānupassī)'라고 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설명을 해놔 놨습니다.

그래서 '아누빳시(anupassī)'라는 것을 쭉 설명을 해놔 놨습니다.

아주 미세한 것도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서, 그 즉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문장을 분석해가지고 설명을 해놔 놨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됩니다.

 

우리가 보통 '위빳사나' 그렇게 얘기하죠! 거기도 '빳사나'가 나오죠! '빳시'라고 하는 것, '빳삿디'라고 하는 것이 나오고, '아누빳사나' 할 때도 마찬가지로 그런 단어들이 나오고.

이 '아누빳사띠'라고 하는 것은 경전에서는 보통 우리가 통칭해가지고 '관찰한다'라고 얘기들을 합니다. 한글로 번역할 때. 그런데 그 관찰한다는 것은 보통의 의미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 일어난 것을 계속적으로 따라가면서 관찰한다는 의미인 것이지 한번 관찰해버리고 말아버린다는 의미는 아니죠!

 

수행은 뭐로 가지고 이루어진다고 그럽니까? 사띠로써 이루어진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사띠(sati)'의 의미만 내포를 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삼빠자-나(sampajāna)'라는 '따라가면서 알아차린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완전하게 안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는 '삼빠자나'의 의미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게 바로 이 '아누빳시'라는 단어다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하면 피상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몸과 마음이라는 '오온(五蘊)'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무상·고·무아로써 통찰해서 아는 것들을 '아누빳시'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무상··무아로써 통찰해서 알려면 어떤 과정을 겪어야 됩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다 한번 보십시오. 무상․고․무아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이 있는가. 삼법인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지금 여기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그 순간에 바로 관찰해서 무상·고·무아를 증득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어떤 과정을 겪게 될까? 무상·고·무아를 알게 될 때는 언제 알게 됩니까?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무상·고·무아를 알게 됩니까, 마음이 들떠 있는 상태에서 알게 됩니까? 고요한 상태에서죠. 고요한 상태만 되면 무상·고·무아를 알 수 있습니까? 또 하나 더 있어야 되는게 뭡니까? 바른 견해죠. 대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바르게 수행해나갈 때 무상·고·무아를 알 수가 있습니다.

고요한 상태에서는 무상·고·무아가 계발이 안 될 수가 있습니다. 사마디 쪽으로 쭉 빠질 수가 있죠! 그런데 무상·고·무아로 알 때에는 '견해'가 발라야 합니다. 아! 이것은 변하는 것이구나, 조건 따라 일어난 것은 조건 따라서 사라지는 것이구나,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만이 무상·고·무아를 알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뭐가 또 필요하겠어요? 무상·고·무아는 변하는 성품입니다. 그 순간에 내가 거기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겨버리면 그거는 깨져버립니다.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갔을 때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무상·고·무아를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전제조건으로 알아야 되는 것이 세 가지죠? 그렇죠! 보통 마음의 청정이라는 것, 그다음에 견해의 청정이라는 것, 그리고 의심으로부터 벗어난 청정이라는 것. 이 세 가지가 전제조건이 되었을 때만이 위빳사나 수행에서 지혜가 열린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은 어떤 수행이라 합니까? 일어난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그럽니다. 끊임없이 사띠하는 수행이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다른 말로 '사띠 수행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띠, 사띠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단 1초라도 사띠를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수행을 안하고 있는 거죠. 여러분들은, 수행하는 자들은 항상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내가 단 1초라도 사띠를 가져보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1초 중에서 100분의 99는 놓친다 하더라도 100분의 1, 한 찰나만큼은 1초 중에서 내가 적어도 사띠를 유지하겠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만이 수행하려는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수행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수행을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잘 안되죠!

끊임없이 알아차려 지지 않죠! 마음은 온갖 망상 다 피우고 항상 벗어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합니까? 빨리 대상으로 마음을 잡아넣죠! 대상에서 벗어난 것들을 다시 잡아들이고, 또 잡아들이고 합니다. 물론 벗어난 것들이 대상이 클 때는 그걸 대상으로 하지만, 대상이 크지 않고 그것이 지혜를 계발시켜주지 않는 것들이라 할 거 같으면, 그리고 마음을 탐진치에 물들게 하는 것들이라 할 거 같으면 빨리 그것들을 알아차리고 '아, 내가 화가 일어났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빨리 주대상으로 돌아오죠. 그게 수행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띠를 놓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대신에 세 가지 조건이 전제가 돼야만이 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마음이 청정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이 탐진치에 물들어 있으면 안 돼. 어떤 경우든지. 그리고 어떤 대상이든지 그것이 변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라. 조건따라 일어났다가 조건따라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 원인·결과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거라.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 두 가지가 기본조건입니다.

그런 생각들이나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우리는 어떤 겨웅든지 마음과 물질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지루함이 일어나면 지루하다 하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통증이 일어나면 통증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려야 되고, 모든 것들에 알아차림을 유지를 해나가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이 보면서 들어올 때 저 사람이 문을 완전하게 닫는 것을 알고 들어오는가, 신발을 벗고 벗는 것을 완전하게 벗고 나서 들어오는가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보면 들어오면서 문은 자동으로 닫히니까 그냥 냅둬 버립니다. 신발도 벗을 땐 알겠지만 완전히 벗을 때는 또 모릅니다. 그러니까 신발이 휙 어디로 날라버립니다. 안 그러면 삐뚤어져 있다든지. 특히 화장실 신발 같은 걸 보면 사람들이 왔다갔다 합니다. 가보면 거의 대부분이 똑바로 놓여져 있는 것을 보질 못합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굉장히 빨리 움직이고 있는데, 그 움직이고 있는 걸 모르고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라. 마음이 달아났다는 거라.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하는 사람들은 달아나면 빨리 잡아와야 됩니다. 신발을 벗고 있으면 신발 벗고 있는 게 주대상이 되어 신발벗고 있는 데로 빨리 잡아와야 돼. 안 잡아 오니까 어떻게 돼요? 완전히 벗는 줄 모르니까 엉뚱한 데로 달아나는 거라.

 

그것조차도 안 되는데 어떻게 몸과 마음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것이 분리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겠어? 더 열심히 해야 되겠죠! 단 1초라도 자꾸 알아차리려고, 1초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자꾸 하다가 보면, 신발 벗는 것, 문을 하나 닫고 하는데 퉁퉁 소리 안 납니다. 신발을 벗고 놓고 하더라도 가지런히 그 자리에 놓입니다. 그대로 알아차려 나갑니다, 일상생활에서. 그게 이어져야만이 알아차림이 강해지는 거라.

알아차리는 힘들만 강해지는 것이 아니고 집중하는 힘들도 강해집니다.

그래서 알아차림과 집중은 똑같이 나아갑니다. 비례하게 됩니다.

집중의 힘들이 커지면 알아차림의 힘들도 커지게 돼있는 것이지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했을 때만이 사띠가 이어질 수가 있습니다. 사띠가 이어져야 만이 마음에서 청정한 것들이 유지가 되어나간다 하는 겁니다. 사띠가 이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마음이 청정해질 거라? 그렇게 될 수는 없겠죠!

그래서 수행의 기본은 마음의 청정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마음이 계속적으로 청정하게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마음이 청정해지고 나면 그 뒤부터는 내가 알아차리는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배가 불러오고 있다는 것은 물질적인 현상이고, 그 불러오는 것을 아는 것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게끔 된다는 겁니다. 몸과 마음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실제 그렇게 됩니까? 안됩니까, 아직? 되는 사람 한번 손들어봐봐.

왜 이렇게 되어야 하냐면 마음의 청정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마음의 청정이 깨어져 버렸을 경우에는 사띠도 깨어져 버리고 수행한다는 것도 깨어져 버립니다. 아무리 마음이 대상에 몰입돼있어서 신통력을 부릴 줄 알게 되고 또 내가 다른 특별한 능력이 계발되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청정이 깨어져버리고 나면 범부중생 보다도 못하게 돼버립니다.

 

그래서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몸과 마음이 일치가 되고 나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몸의 현상과 마음의 현상을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응용력이 생길 거 아니라.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안 아프면 몸이 아픈 것들에 크게 영향을 못 받게 되는 것이고. 응용력이 생길 거 아니라. 화가 일어났으면 화가 일어난 것에 대해서 분리해서 볼 줄 알게 될 거 같으면 화가 증폭되진 않을 거 아니라.

 

마음의 청정을 한번 얻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마음의 청정을 끊임없이 유지시켜나가 줄 수 있는 방법은 몸과 마음의 관계를 분명하게 이해해서 아, 이것이 물질적인 현상이고, 이것이 정신적인 현상이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그렇게 자꾸 해나갈 때만이 자동적으로 수행은 무르익어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물질과 정신이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끊임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단 그것이 뒤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배가 불러왔다는 물질적인 게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불러온 것을 알았다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섞이지 않는다는 거라.

그 마음이 사라지고 나야만이 다시 물질적으로 배가 꺼지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끔 됩니다. 이렇게 섞일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하나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나면 다른 것이 연이어서 일어나고 사라지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져야만이 다음 것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게 절대 섞일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뭐냐면 '까-예- 까-야-누빳사나-'라고 하는 겁니다.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라는 것은 그런 의미들을 가지게 됩니다.

 

자! 그렇게 해서 알아차려 나갔는데 일어난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다 하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 아, 이것이 무상한 성품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그럴 거 같으면 그 무상한 성품은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둑카(dukkha)로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 그렇게 변하는 성품에는 '나의 것'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끔 됩니다. 무상한 성품 하나를 알게 되면 고와 무아를 더불어서 알게끔 됩니다. 한 특성을 알면 나머지 두 가지 특성도 동시에 알게끔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가 바로 견해의 청정을 얻게끔 됩니다.

또한 의심의 청정에도 이르르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의 청정, 견해의 청정, 의심의 청정에 이르러야 만이 분명하게 내가 수행에서 무상․고․무아의 성품들을 확연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어렵죠! 무상․고․무아를 알기가.

 

가끔씩 사람들이 찾아와서 얘기를 합니다. '스님 난 아무리 노력해도 무상한 걸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 더 있나. 그 상태에 이르지를 않았는데. 뭐부터 해야 되겠어요? 무상한 성품을 알려면?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으려고 불굴의 노력을 기울이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렇게 하지는 않고 “나는 수행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무상한 성품을 아는데 나는 왜 모릅니까?” 내가 우째라고, 그걸 갖다가. 지가 수행 안 했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자! 밑에 한번 봅시다.

'까-예- 까-야-누빳시-' '몸에서는 단지 몸을 관찰하라'는 의미이다.

'몸에서 몸을 따라서 관찰하라' 하는 의미입니다.

이 의미는 몸에서 '나의 몸'이라고 관찰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몸을 관찰할 때는 다른 것들 느낌(受)이나, 지각(想), 형성력(行), 식(識)이라고 하는 것을 섞지 말아라. 왜 섞지 말아라 그럴까? 섞어버리면 그 고유한 특성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몸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 느낌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 그 특성은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섞어버리면 절대 이걸 알 수가 없습니다. 몸에서는 몸의 특성으로써 알아차려야 됩니다. 느낌에서는 느낌의 특성으로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런데 수행할 때 처음에 어떻게 하라고 그랬습니까?

몸의 특성을 먼저 알아차리고 있으니까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알아차리라고 스님이 얘기를 하죠. 항상! 몸의 움직임을 분명히 먼저 알아차리고, 그리고 움직임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러고 나서 뭐 하라고 그럽니까? 그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알아차리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느낌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려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 게 정확한 것이지 몸의 알아차리면서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 느낌을 알아차린다? 섞어버린다? 이게 가능할까? 가능해요?

물론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발을 든다고 합시다. 발을 들고 있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는 느낌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아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움직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움직임도 알아차릴 뿐 아니라, 여기서 일어나는 가벼운 느낌 무거운 느낌도 같이 알아차리려고 그럽니다. 두 개를 같이 섞어버린다는 거라. 이렇게 섞지 말아라는 거라.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느낌만 알아차리고, 몸을 알아차릴 때는 몸만 알아차려라는 거라. 반드시 섞지 말아라는 거라. 섞어버리면 거기서 일어나는 고유한 특성들을 알 수가 없습니다.

 

가벼운 요소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가벼운 요소가 점점 변한다고 알 거 같으면 아, 이것이 무상한 성품이다, 그 변하는 것이 너무나 빠르다고 알 것 같으면 이것이 고의 특성이라는 걸 알 수가 있는데 움직이면서 느낌을 관찰한다고 해보십시오. 그게 가능합니까? 절대 가능하지 않다는 거라. 고유한 특성들을 알려고 할 거 같으면 반드시 섞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가끔씩 사람들에게 얘기합니다. 움직임을 알고 나서 느낌을 알아차리도록 하라. 느낌을 알고 나서는 의도를 알아차리도록 하라. 이렇게 단계적으로 설명 하는데, 남들이 느낌을 안다 해서 자기는 움직임을 알면서도 느낌을 알려고 한다는 거라. 그렇게 하지 말아라는 거라. 자기에게 맞게끔 하라. 알겠습니까?

(문답 중략)

 

그다음에 또 하나 중요한 게 뭐냐 하면, 몸에서 몸을 알아차릴 때는 분해해서 알아차리는 습관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몸은 각각의 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습니다. 경전을 통해서 많이 알고 있죠! 사대요소로 분해할 수도 있고, 몸의 각각의 기관으로 분해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왜 이런 습관들을 자꾸 가져야 되느냐면, 대부분이 보면 '나의 몸'이란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느낌이 일어나는 것들에 '나'라고 하는 것이 결합이 되면 그건 수행 못합니다.

''라고 하는 것을 떨어뜨려야 됩니다. 그걸 떨어뜨리기 위한 방법은 요걸 갖다가 잘게 쪼개어서 보는 수밖에 없는 거라. 그래서 요소에 대해서 관찰할 때도 가벼움의 요소가 일어나면 가벼움의 요소만 알아차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가벼운데 또 움직임의 요소를 같이 알아차리려고 뭉뚱그릴 거 같으면 안 된다는 거라. 가벼움의 요소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게 일차적인 목표라는 거라. 그래서 몸을 알아차릴 때는 반드시 분해해서 알아차리는 습관들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거기다가 주를 달아놨습니다. '보통 분명하게 알아차림이 이어지고 있으면 이것의 의미가 명백해진다.' 하고 주를 달아놨습니다.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알아차린다.' 몸이 지닌 진실이 있습니다. 그렇죠!

무상·고·무아, 이 몸은 부정한 것이다, 이런 진실된 것,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내가 받아들인다는 의밉니다. 몸에서 몸을 따라가는 것은. 그것을 알지 않을 거 같으면 몸을 뭐 하러 관찰해?

 

자! 그다음에 밑에 '위하라띠(viharati)' '머문다. 지낸다.'

'위(vi)' 분리해서, '하(har)' 가져가다, '아(a)' 부정, '띠(ti)' 접미사로 쓰인 겁니다.

분리해서 가져가지 않는다하는 겁니다. 분리해서 떨어트려 놓고 저쪽으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니까 '머문다'는 거라. 그게 '위하라띠' '머문다, 지낸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 대상에 머물러라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알아차리고 있는 대상에 머물러라. 그 대상에 머무르지 않으면 번뇌들이 굉장히 많이 일어납니다.

 

전에 스님이 언젠가 '아누사야(anusaya)'를 설명한 적이 있죠. 잠재되어있는 성향을 지닌 번뇌를 얘기할 때 '아누사야 낄레사(anusaya-kilesa)'라는 걸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왓사' 하고 '아누사야' 구분하면서 그런 설명을 한 적이 있죠!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잠재적인 번뇌들이 있습니까? 탐심(貪心) 잠재돼있죠! 언제든지 튀어나오죠! 진심(嗔心) 있습니까? 그다음에 게을러지려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것만 있습니까? 또 어떤 게 잠재되어있습니까?

좋은 마음도 잠재되어있겠지. 자비스러운 마음도 잠재되어있고, 그렇죠!

그다음에 '나'라고 하는 그런 것도 잠재되어있을 거고, 또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내가 최고다' 하는 자만심들도 잠재되어있고. 또 어떤 게 잠재되어있습니까? '아, 이거 해도 되나' 하는 의심들도 잠재되어있고, 잠재되어있는 것들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일곱 가지 정도만 잠재되어있는 것들을 일어나지 않게끔만 하면 그건 수행에서 성공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현재 대상에 머무르면 잠재된 성향(번뇌)들은 제거가 돼 나갑니다.

어떻게 제거될까? 제거한다는 것은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면 일시적으로는 소멸됩니다.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적으로 지속되면 그러한 잠재돼있는 성향 자체가 일어날 기미를 만들질 않습니다. 그것이 수행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화가 일어나는 것뿐 아니라 화가 일어날 수 있는 요지를 가져있는 것들도 일으키지 않게끔 되는 거라. 욕심을 가질 수 있는 것들도 일어나지 않게끔 만드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자는 그 삶을 유지해 나가는 거라.

 

그런데 수행 초기에는 어떻게 돼요? 당장 일어난 것들만 누릅니다.

그런데 그것을 꾸준하게 해나가면 탐진치가 없는 상태로서 거의 유지를 해나갑니다. 그런 상태를 하다다 도와 과에 이르면 어떻게 됩니까? 완전하게 뿌리째 뽑아버린다는 거라. 이런 과정들을 겪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머문다'라고 하는 것은 잠재돼있는 번뇌들을 제거한다는 말과 똑 마찬가집니다. 그 대상에 머물지 않으면, 알아차림이란 그 대상에 머물지 않으면 지금 일어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잠재돼있는 것까지도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대부분은 우리는 남이 죽었다고 할 것 같으면 별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잠재돼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부모가 죽었을 때는 슬픔이 금방 일어나 버린다는 거라.

 

잠재돼있는 것이 언제 내 것이 될 지, 언제 발현될지 누구도 모른다는 거라.

그런 것까지 자꾸 제거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하라띠' 하라. 여기에 머물러라, 머무르면서 지내라.

그래서 이다, 빅카웨-, 빅쿠 까-예- 까-야-누빳시- 위하라띠.

빅쿠들이여! 여기 빅쿠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지내라고 하는 그런 의밉니다.

 

그다음에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 도-마낫상.

열심히, 분명한 앎이 있고,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고뇌를 제어하기를!

 

수행에서 굉장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분명하게만 이해하고 있으면 수행은 물론 벗어나기도 하겠지만 다시 돌이킬 수가 있습니다.

'---(ātāpī)' 형용사고 단수 주격이다. 열심히, 보통 한국에서는 이걸 '노력'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노력'과 '열심히'라는 것은 의미가 조금 틀립니다.

몸의 사대요소 중에 불의 요소를 '따뽀(tapo)'라고 얘기하죠.

'아따삐'는 '불타다'는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아-따빠띠(ātapati)'라고 하는 '불타다'의 아오리스트-과거형이라는 뜻입니다. 과거형인데 '현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죠.

 

대상을 놓쳤을 때 그 대상으로 다시 마음을 돌리는 것들을 '아따삐'라고 얘기합니다. 자꾸 마음이 벗어나면 벗어날 때마다 그 대상으로 다시 마음을 갖다 붙이는 거라. 이걸 '아따삐'라고 합니다.

수행에서 그런 마음이 없으면 수행 못합니다. 안 그러면 계속 머물러 버리든지 수행대상을 놓쳐버리면 놓쳐버리는 대로 그냥 흐릿하게 있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할 때는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게 이 '아따삐'라. 안 놓칠 수가 없습니다, 수행대상을. 일 초에도 수십 번 놓치게 됩니다. 놓치게 되면 놓칠 때마다 다시 또 잡아오는 거라. 마음이 대상에 머무를 수 있도록 마음에서 의도를 내는 것들을 '아따삐'라고 보면 됩니다.

 

수행을 자꾸 하다 보면 이게 자동적으로 됩니다. 벗어나면 금방 다시 잡아옵니다. 마음이 그러한 마음들을 계속적으로 유지시켜 나가고 있으면 수행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 수행대상을 놓치지 않겠다 하는 마음을 계속적으로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잡아옵니다. 벗어나면 벗어난 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내가 다시 또 잡아옵니다. 그걸 잊어버리면 안되는 거라.

'나는 지금 수행자다' '나는 지금 단 일 초라도 알아차림 없이 살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을 자꾸 굳건하게 해야 되는 거라. 그게 '의도'라. 그 의도로 인해서 붙잡아오게 될 때 이것을 '아따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그래서 수행할 때 뭐라고 그럽니까? 한 시간 좌선한다면 '한 시간 좌선 동안 내가 절대 일어나지 않겠다.'하고 굳게 마음을 먹죠!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겠다." 그런 것들이 바로 '아따삐'입니다. 항상 마음은 벗어날 수 있습니다. 벗어난 마음을 다시 내가 잡아온다는 마음을 자꾸 가져야 됩니다.

 

그다음에 여기서는 '삼빠자노'가 문장에서 먼저 나왔는데 밑에 '사띠마'라고 하는 것을 먼저 보겠습니다.

'사띠마(satimā)' : '사띠(sati)' '만뜨(mant)' 알아차림을 지닌다 하는 뜻입니다. '알아차림을 지니라', '알아차림을 갖춰라' 하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 수행 대상에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지녀야 됩니다. 알아차려야 됩니다. 사띠는 마음이 대상에 가서 접촉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알아차림을 하면서 이 '아따삐'라고 하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있을 때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은 대상에 머무르게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벽에 뭘 걸기 위해서 구멍을 뚫어야 된단 말이라. 그럼 드릴을 가지고 앞에 나사를 딱 붙여야 되겠지. 붙여가 여기 구멍을 뚫어야 돼. 그러면 드릴을 끊임없이 돌려줘야 만이 이 나사가 벽에다가 구멍을 뚫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이라도 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돼요? 구멍은 더 이상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돌려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려 가지고 돌리도록 만드는 건 뭡니까? '아따삐'입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돌리는 것은 '사띠'가 하는 거라. 그래서 '아따삐'와 '사띠'는 같이 일어나야만이 이걸 돌릴 수가 있는 거라. 그래야만이 이 바닥에 딱 달라붙어서 구멍이 나게끔 되는 거라.

이렇게 해서 구멍이 났다, 구멍이 나가지고 뚫렸다 할 거 같으면 아! 요마만큼 구멍이 뚫렸다, 내가 지금 필요한 만큼 구멍이 뚫렸다, 아니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은 뭡니까? '삼빠자나'라는 거라. '아따삐' '사띠' '삼빠자나'라는 것들은 그런 의미들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마음이 대상에 가서 대상에 머무르게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아따삐'와 '사띠'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죠! 마음이 대상에 머무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구멍은 뚫립니다. 그럼 집중력은 생겨난다는 거라. 그 집중력으로 인해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이 계속 가능해진다고 할 거 같으면 이 구멍은 완전하게 뚫리게 되는 거라. 그 특성을 분명하게 이해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걸 '삼빠자나'라고 얘기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어쨌든 결정적인 건 뭡니까? 사띠죠! 사띠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은 안되니까 강제적으로라도 일을 하게끔 만들어줘야 되는 거라.

 

그다음에 '삼빠자--(sampajāno)' 단수 주격에 '삼(saṁ)'이라고 하는 것과 '빠(pa)'와 '즈냐(jñā)'라는 것을 분리를 해놨습니다. '분명하게 아는 것', '완전한 이해'라는 그런 뜻입니다.

한국에서 이 '삼빠자노'를 다르게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바르게 좀 이해를 하도록 해야 됩니다. 일어나고 지탱하다가 사라지는 모든 과정의 특성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알아차려서 이해하는 것을 '삼빠자노'라 그럽니다.

그래서 '삼빠자-(sampajāna)''완전한 이해, 분명한 앎'이라고 그렇게 한글로 풀이를 합니다. 그 특성, 현상들의 특성을 또렷하게 꿰뚫어 아는 작용들을 얘기합니다. '삼빠자노'는 4가지로 구분을 하고 있습니다. 뒤에 가면 몸에 대한 관찰 부분에 '삼빠자나'에 대한 것이 나옵니다. 그때 좀 더 자세하게 하겠습니다.

 

'위네이야(vineyya)' 스님은 이것을 원망법으로 풀이를 했습니다. 원망법이란 것이 뭡니까? '뭐가 되기를'하고 바라는 것들을 원망법이라 합니다. '위(vi)' '네띠(neti)'의 절대분사, 그래서 원망법으로 풀이를 했습니다. 스스로 조절되기를, 스스로 제어되기를, 통제되기를 하는 그런 뜻입니다. 뭐가 통제되어야 한다고? 뒤에 나오는 것들이!

왜 이걸 원망법으로 풀이를 했냐면 '제어하다, 제거하다'로 풀이를 할 거 같으면 위빳사나 수행하고는 조금 멀어져 버립니다. 수행은 어떤 것도 없애려고 해서도 안 되고, 어떤 것도 붙잡으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것도 제거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제거하려고 그걸 바래서도 안 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제거한다고 할 거 같으면 수행의 기본적인 모토하고는 조금 벗어나버리게 됩니다.

 

제거가 자연스럽게 '이러 이렇게 하면 제거가 되어지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실제 그렇죠! 수행에서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화가 일어나는 게 제거가 되어져버리는 것이지, 내가 그걸 화를 안 일으키겠다고 제거한다고, 칼로 싹둑 자른다 해서 제거되는 게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이것을 원망법으로 보는 것이 수행하는 데는 오히려 더 맞지 않을까.

 

그래서 풀이를 할 때도 밑에 있는 것을 보면 '열심히, 분명한 앎이 있고,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고뇌를 제어하기를!' 하고 풀이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에 나오는 머문다 하는 것들이 들어가줘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두 번 쓰이게 되죠! '위네이야띠'라고 하는 것들이 두 번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피하기 위해서도 이것을 절대분사 원망법으로써 풀이를 했습니다.

 

알아차리는 것은 선한 행위입니다. 그렇죠! 불선한 행위는 아니죠! 알아차림이 있으면 항상 선한 마음의 상태를 지니게끔 됩니다. 그런 선한 마음의 상태가 있을 거 같으면 당연히 불선한 마음은 힘을 갖지 않게끔 된다는 거라. 침투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사띠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바로 '위네이야' '제어하게끔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사띠가 항상 있게끔 하라 하는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loke)' '로까(loka)' 여기서는 단순히 그냥 '세간' '세상'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은 아니죠! 수행의 대상인 '오온' 입니다. 그리고 수행의 대상인 이 몸과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아빗자-도마낫사(abhijjhādomanassa)' '아빗자'와 '도마낫사' 풀이를 분리해서 설명해 놨습니다. '탐욕과 고뇌'로 얘기해 놓았습니다.

'도마낫사(domanassa)'를 '싫어하는 마음'이라고 풀이를 하는 경우들도 있는데, 원래의 의미는 '두(du)'라고 하는 '둑카' 할 때의 '두(du)'와 마찬가집니다. '곤란하다' '반대로'라고 하는 것, 그다음 '마나(mana)나'라고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곤란하다, 마음이 반대로 간다는 의미니까 그것은 '고뇌한다'는 의미로써 쓰여집니다.

감각적인 욕망인 탐욕, 그리고 고뇌로 인해서 생겨나는 싫어하는 마음, 이 두 가지를 먼저 알아차려서 제어하기를 바란다 하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가 있죠! 지금 얘기한 이 두 가지와 뭐가 또 있습니까? 혼침·망상 부리는 거, 그다음에 들뜨는 거, 그다음에 의심을 하는 거 이것이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그래서 장애들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탐욕과 고뇌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입니다.

 

수행은 어떤 경우든지 좋아하고 싫어하면 안 됩니다.

붙잡고 밀쳐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를 먼저 해야만이 균형이 잡힌다는 거라. 균형이 잡혀야만이 내가 싫어하는 마음들도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들뜨는 것들도 일어나지 않고, 또 더불어 가지고 이 길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게끔 된다는 거라. 이 두 가지가 균형이 맞지 않으면 다섯 가지 장애는 제거를 못 시킨다는 거라.

다섯 가지 장애는 다른 말로 할 거 같으면 이 두 가지입니다. 붙잡고 밀쳐내고 하는 것들! 반드시 수행에서는 하면 안 됩니다. 대상을 붙잡을려고 해서도 안 되고 대상을 밀쳐내서도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이 두 가지를 반드시 먼저 하도록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붙잡는 걸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 떠나가도 별로 괴롭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 몸에 대한 거니까 몸에 대해서 내가 붙잡는 것들이 없을 거 같으면 어때요? 편안합니다.

그다음에 몸에 대해서 붙잡는 것이 없을 것 같으면 당연히 내가 지나치게 기뻐하고 지나치게 들뜨고 하는 것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온한 상태가 유지돼나갑니다.

그리고 또한 붙잡는 것이 없을 거 같으면 몸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지 않는다는 거라. 아! 내 이 몸은 참 아름다운 것이구나, 내 몸은 참 좋은 것이구나 하는 그런 환상을 갖지 않는다는 거라.

그다음에 싫어하는 것, 고뇌라고 하는 것을 가지지 않는다는 거라.

몸이 조금 불편해도 불편한 줄을 모릅니다. 그것을 즉시 알아차려 나갑니다. 그래서 크게 집안이 좁다 그리해도 불편한 줄을 모릅니다.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고뇌하지 않는다는 거라. 힘들어서 막 열을 내면서 그걸 되씹고 아, 이건 왜 이럴까 하고 고뇌하지 않는다는 거라. 불만족한 것들이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실제 고뇌하는 것들, 괴로움이라 하는 것들을 제어 해나가게 됩니다. 실제 생활에서 붙잡고 밀쳐내고만 하지 않아도 거의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힘든 부분들은 없습니다. 거의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경전에서 "집착하는 것이 없는 사람은 사물에 대해서 갈망하지 않는다."하고 얘기합니다. 어떤 대상이든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거라. 설혹 죽음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 죽음을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 거라. "그렇게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평화로움 속에서 머문다."하고 얘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경전에는.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이런 것들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붙잡고 밀쳐내는 것들을 하면 안 됩니다. 대상을 지나치게 붙잡으려고도 하지 말고 대상을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서 벗어나려고 하지도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도-마낫상.

열심히, 분명한 앎이 있고,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고뇌를 제어하기를! 하는 것입니다.

 

Vedanāsu vedanānupassī viharati,

웨-다나-수 웨-다나-누빳시- 위하라띠,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 도-마낫상.

열심히, 분명한 앎이 있고,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고뇌를 제어하기를!

 

똑같이 위에는 '웨다나' '찟따' '담마'가 들어가 집니다.

앞에 '까야~'와 문장은 동일합니다. '몸에 대해서'라는 것이 '느낌에 대해서' '마음에 대해서' '담마에 대해서'로 바뀐 것뿐입니다.

 

느낌은 보통 여러분들 느낌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즐겁고, 괴롭고, 무덤덤한 느낌이죠! 그게 세간적인 느낌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간적인 느낌들을 보통 우리는 정신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죠! 정신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이 증폭돼 나갑니다.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그것을,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야만이 그것이 그것을 벗어난 출세간적인 느낌으로써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출세간적인 느낌으로 머물러라는 겁니다.

어떻게 알아차려가지고 머뭅니까? 즐거운 것들은 무엇으로 알아차리라고 그랬어요? 괴로운 것으로 알아차려라 하고 했습니다. 괴로운 것은 빠르게 지나가는 화살로써 알아차려라. 무덤덤한 것은 무상한 것으로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얘기를 했죠? 그렇죠! 느낌에 대한 관찰은 뒤에 나가면서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이 자세하게 나올 겁니다.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찟떼- 찟따-누빳시- 위하라띠,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 도-마낫상.

열심히, 분명한 앎이 있고,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고뇌를 제어하기를!

 

그다음에 '찟데-(citte)' '찟다(citta)' 마음에 대해서도 마음으로써 알아차려서 따라가면서 알아차리면서 머물러라. 이렇게 돼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건 좀 힘이 들죠? 마음을 알아차릴 때 주의해야 될 것, '나의 마음'이라고 알아차리지만 않으면 됩니다. 단지 내가 아는 마음이 일어났다고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것만 하면 마음에 대한 것은 성공 합니다. 왜? 마음은 항상 매순간 변합니다. 변해나가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똑같은 것이 없습니다. 각각 다 틀립니다. 그 속에 '나'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없습니다. 대부분은 '나의 마음'이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난 마음은 각각 틀리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일어났을 때는 그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만 분명하게 알면 됩니다. 탐욕이 있으면 아, 탐욕이 있는 마음이구나만 알아차리면 되고, 화가 일어났으면 아, 성냄이 있는 마음이구나 하고만 알아차리면 돼. 내가 자애가 있으면 아, 자애로운 마음이구나만 알아차려라는 거라. 그것이 '찟다' 수행방법입니다.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담메-수 담마-누빳시- 위하라띠,

담마에서 담마를 따라가며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 도-마낫상.

열심히, 분명한 앎이 있고,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고뇌를 제어하기를.

 

그다음에 뒤에 '담메-(dhammesu)' '담마'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알아차려야 됩니다. '담마'는 알아차릴 대상일 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앞에 마찬가지로, 몸과 느낌과 마음과 마찬가지로 담마도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 담마는 마음이 대상일 뿐입니다.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 현상들이 바로 담마입니다. 몸과 마음 알아차릴 때 눈에 뭐 부처님이 보이기도 할 거고, 지나온 과거들이 홱 떠오르기도 할 거고 여러 가지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그것들이 바로 담마라는 거라. 그러면 그것이 수행 대상이라는 거라.

수행할 때 현상들이 없으면 수행은 못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담마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없으면 수행이 늘지를 않습니다. 현상들이 없으면 어떻게 돼요? 만날 해도 '일어남' '사라짐' 이것만 하고 있는 거라. 발전이 없는 거라. 그래서 담마에 대해서 관찰하고 담마에 대해서 수행하는 것들은,

 

담마 수행법에는 다섯 가지 장애들이 일어나는 것들, 오온에 대한 것들,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라는 12처에 대한 것들 이런 것들이 주가 됩니다. 그리고 또 뭐가 담마의 대상이 되겠습니까?

도에 이르렀을 때는 도에 이르른 그 자체가 담마의 대상이 됩니다. 열반이 담마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선정에 들었으면 선정이 그 담마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칠각지와 사성제가 담마의 대상이 되는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세간적으로 알아차리는 마음의 대상이 출세간적인 마음의 대상으로 바뀐 것뿐입니다. 이걸 착각하면 삼매에 들면 대상이 없다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틀린 겁니다. 그렇죠! 내가 지금 열반의 상태에 있다, 열반의 상태에 있어도 대상이 없습니까? 대상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대상은 있게 된다는 겁니다.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담마에 대한 것들을 뒤에 사성제까지도 집어넣어 놓은 이유입니다.

 

그렇게 몸과 느낌과 마음과 담마에서 그것들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이 있고,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고뇌를 제어하기를 하는 것이 '웃데소 니띠또'라고 그럽니다.

서론 부분을 마치는 부분입니다.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하나씩 몸에 대한 관찰, 그중에 '아나빠나사띠' '호흡으로 인해서 알아차리는 것들' 이런 식으로 하나씩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 아래의 빨리어 문법 풀이 부분은 붓다의 길따라 선원의 홈페이지에서 인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이다 빅카웨- 빅쿠 까-예- 까-야-누빳시- 위하라띠,

빅쿠들이여! 여기, 빅쿠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idha : 부사, 여기에, 이 세상에, <이 문제와 관련하여>라는 의미를 지닌 논의 주제의 도입부 역할.

bhikkhave : 능동태 호격, 빅쿠들이여!

bhikkhu : 단수 주격, 빅쿠는.

kāye : 단수 처소격, 몸에 대하여, 몸에서.

kāyānupassī : kāya (명사, 몸을)+ anupassin (형용사, 따라가며 관찰하는,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며) anupassin= anupassati= anu (아주 미세한 것도 놓치지 않고 따라가며)+ √paś (= dis, 그 즉시, 올바르게, 있는 그대로, 상세하게 설명하다)+ sati (알아차림). 한자로 수관(隨觀) 혹은 순관(順觀) 이라고 한다.

anu는 놓치지 않고 그 즉시 따라서, 좇아서, 바로 이어서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이며, passiṅ(passati)는 상세하게 있는 그대로를 본다, 관찰한다, 안다, 알아차린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관찰한다'는 것은 'jānato passato yathābhūtam(실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안다, 如實知見)'과 상통하기에, 놓침 없이 알아차려 있는 그대로 꿰뚫어본다는 뜻이다. 즉, anupassin은 satimā (바로 알아차림)와 sampajāna (완전한 이해, 분명하게 앎)을 아우른다.

kāye kāyānupassī : 몸에서는 단지 몸을 관찰하라는 의미이다. 몸에서 나의 몸이라고 관찰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며, 또한 물질적인 것(몸)을 관찰할 때는 물질적인 것(몸)만 관찰해야 하는 것이기에 물질적인 것을 관찰할 때에 느낌이나 지각, 형성력, 식을 섞지 말라는 의미이다. 보통 분명하게 알아차림이 이어지고 있으면 이것의 의미가 명확해진다.

viharati : vi(분리해서)+ har(가져가다)+ a(부정)+ ti(iti, 이것들을, 접미사)= 머물다, 지내다.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 도-마낫상.

열심히, 분명한 앎이 있고,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고뇌를 제어하기를!

ātāpī : 형용사, 단수 주격, 열심히, ātapati(불타다)의 아오리스트, 몇 번이고 도망칠 때마다 마음을 수행의 대상으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sampajāno : 형용사, 단수 주격, saṁ(함께, 바르게, 정확하게, 완전하게)+ pa(~을 향하여, 강조)+ jñā (알다)= 분명한 앎이 있는, 완전한 이해가 있는, 일어나고 지탱하다가 사라지는 모든 과정의 특성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알아차려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알아차림(sati)이 그 순간의 경험을 주시하여 알아차리는 작용이라면, 완전한 이해(sampajāna)는 알아차린 그 담마의 특성을 또렷하게 꿰뚫어 아는 작용이다. 삼빠자나는 4가지 종류가 있다.

satimā : 형용사, 단수 주격, sati( 알아차림)+ mant (지니다), 알아차림을 지니고, 알아차림을 갖추고,

vineyya : vi(분리, 반대로, 여러 가지로)+ neti (인도하다)의 절대분사 원망법, 스스로 제어하다, 조절하다, 통제하다.

loke : 단수 처소격, 세상에 대한, 여기에서 'loka'는 단순한 세상이 아니라, 알아차리고 또렷이 알아야 하는 수행 대상이며, 집착하는 대상인 오온과 마음을 말한다.

abhijjhādomanassa : abhijjhā (abhi~을 넘어서, 향하여+ jhāyati 상념= 탐욕), domanassa (du 곤란한, 반대로+ manas 마음= 고뇌)

 

Vedanāsu vedanānupassī viharati,

웨-다나-수 웨-다나-누빳시- 위하라띠,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vedanāsu : 복수 처소격, 느낌에 대하여, 느낌에서,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 도-마낫상.

열심히, 분명한 앎이 있고,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고뇌를 제어하기를!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찟떼- 찟따-누빳시- 위하라띠,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citte : 단수 처소격, 마음에 대하여, 마음에서.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 도-마낫상.

열심히, 분명한 앎이 있고,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고뇌를 제어하기를!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담메-수 담마-누빳시- 위하라띠,

담마에서 담마를 따라가며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dhammesu: 복수처소격, 담마에 대하여. 담마에서. 담마의 의미는 자연의 현상, 정신적인 대상, 상태, 진리, 실제로 경험된 것, 지혜에 의해 드러난 것, 좋은 행동, 실천수행, 원인과 결과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세상)서는 마음의 대상을 말한다.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ṁ.

아-따-삐- 삼빠자-노- 사띠마- 위네이야 로-께- 아빗자- 도-마낫상.

열심히, 분명한 앎이 있고, 알아차림을 지니고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고뇌를 제어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