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hāsatipaṭṭhāna Sutta(마하-사띠빳타-나 숫따)
대념처경
1강. 마하-사띠빳타-나숫따(Mahā-satipaṭṭhāna-sutta) (20110122)
자! 오늘 한번 봅시다.
교재가 있고 또 프린트물이 있죠? 교재는 한글로 된 교재입니다. 대신 프린트물은 빨리어죠! 중복되지 않게끔 하기 위한 것입니다. 빨리어 원전을 가지고, 대념처경 원전을 가지고 공부를 해나가면서, 책에 나와 있는 그 교재는 주석서의 형태들입니다. 거기에 대한 설명들을 아주 자세하게 해놓은 겁니다. 주석서는 읽어보면 크게 의문 나는 거 없죠? 의문 나는 거 그래도 있든가요? 많든가요? 그럼 그런 것들을 스님한테 물어보면 되는 거라. 그래서 프린트물을 위주로 해서 하고, 스님도 사실은 그 주석서 책은 안 읽어보았습니다. 대충 이렇게 한번 어떻게 구성돼서 써져있나 하는 것들은 읽어보죠. 자세하게 읽어보지는 않고, 그래서 거기에 있는 내용은 되도록이면 프린트물에는 피하고 원전 위주로만 그렇게 했습니다.
자! 프린트물을 한번 펴 보시기 바랍니다.
'마하-사띠빳타-나 숫따<숫단따> (Mahā-Satipaṭṭhāna-Sutta<Suttanta>)'
그렇게 나옵니다. 보통 '대념처경(大念處經)'이라고 그렇게 번역을 하는 겁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빨리어 경전에 염처와 관련된 두 가지 경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중부 경전에 있는 '사띠빳타나 숫따'이고, 또 하나는 장부 경전에 있는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 그렇게 두 가집니다. '짯따로 사띠빳타나 숫따'라고 할 거 같으면 '사념처경(四念處經)'이라고 번역이 되고,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라고 하면 '대념처경'이라고 번역되는 것들입니다. 어쨌든 '사띠 빳타나 숫따'는 두 경전의 내용이 비슷합니다.
단지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 에는 '사성제'에 대한 설명이 조금 더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교재로 선택을 할 경우에는 조금 더 자세하게 나와 있는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를 보통 교재로써 그렇게 선택을 합니다.
'마하(Mahā)'는 여러분들이 무슨 의미인지는 다 잘 알 거고,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가 무슨 뜻입니까? (수행자 대답)
앞서간다는 것이 아니고 '앞을 따라간다'는 거죠. '빠'에 '타나'가 되니까 '빠'라고 하는 것은 '앞에'라는 그런 뜻이 있으면, '타나'는 '장소, 대상'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앞에 있는 대상을 따라간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아마 그렇게 해석을 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 '사띠빳타나'가 '사띠'에 '빳타나'의 결합이 될 수도 있고, '사띠'에 '우빳타나'의 결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빳타나'라고 할 경우에는 내용이 많이 틀려집니다. '우빳타나'가 될 경우에는 '대상과 가까이 붙인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대상에다가 일치시킨다'는 그런 의미가 됩니다. 수행에서 쓰여지게 될 경우에는 '우빳타나'라는 것으로써 많이 쓰여지게 됩니다.
'사띠'에 '빳타나'가 될 경우에 '대상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그런 의미가 됩니다.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사띠를 대상을 향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
그리고 '우빳타나'가 되면 어떻게 돼요? '그 대상에 가까이 붙여서 대상에다 착 달라붙는다'는 그런 의미가 됩니다. 달라붙기 때문에 그걸 완전하게 덮어버려서 '대상과 일치시킨다'는 그런 의미를 가지게됩니다. 그게 '사띠빳타나'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사띠가 있을 경우엔 어떻게 돼요? 대상과 가까이 따라붙든지, 대상과 일치를 시키든지 간에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과 대상과 일치가 되기 때문에 마음이 다른 곳으로 벗어나면 안 되겠죠. 대상으로부터 벗어난다든지 아니면 마음이 들떠버린다든지 이런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띠빳타나'를 하는 자들은 반드시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벗어나서도 안 되고, 마음이 들떠서도 안 되고, 또한 사띠의 대상 외에는 다른 대상은 몰라야 되겠죠. 신념처를 하고 있다, 그럼 몸에 대해서 알아차리면 수념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수념처 할 때는 수념처를 해야됩니다. 이와 같은 조건들을 가지게 됩니다.
사띠(sati)라고 하는 알아차림을 경전에서 번역한 것들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스님은 뭐라고 씁니까?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통칭해서 쓰고 있습니다.
'사띠(sati)'는 '대상을 분명하게 아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기억'이라는 의미로는 수행에서는 잘 안 씁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되돌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에서는 되돌리지는 않죠? 기억이라 하더라도 현재 일어난 것들을 갖다가 대상으로 합니다.
'현존하는 기억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사띠의 의미에서 '기억한다'는 의미들은 잘 쓰지를 않습니다. 물론 사띠를 잘하면 잘 기억을 합니다. 그래서 사띠의 의미 중에는 기억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사띠는 그 기능보다는 어떤 기능이 많습니까?
아까 '사띠빳타나'라고 할 때에는 뭐라고 했어요? 대상에 달라붙고, 대상에 가까이 가도록 하고, 대상을 따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대상에 대해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대상이 뭔지를, 어떤 대상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사띠의 기능은 첫 번째가 그겁니다. 대상이 뭔지를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대상이 뭔지를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걸 '대상에 마음을 기울인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주의집중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게 우선이 되어야 됩니다. 내가 수행할 대상이 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되고, 그리고 수행할 대상이 뭔지를 알 거 같으면 그 대상이 '어! 이게 뭐지?' 하고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 기능이 쉽게 말하면 '사띠'라고 하는 기능입니다.
그러고 나서 생기는 여러 가지 기능들, 기억하는 기능이라든지, 아니면 분명하게 아는 기능이라든지, 또 그 대상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마음을 챙기는 기능이라든지 이런 것은 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들이지 사띠의 원래의 기능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띠의 기능에는 보통 뭐라고 그럽니까?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 그러니까 '느낌이 발전되기 이전에 것들을 사띠의 대상, 사띠라고 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알음알이가 일어나기 이전의 단계들을 얘기합니다. 즉시 지금 내가 순간적으로 번뜩하고 탁 알아차리는 것, 이것들이 사띠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아차린다는 기능이 우선시 돼야 된다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사띠'는 '알아차림'으로써 스님은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사띠빳타나'라고 할 거 같으면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그 대상에 대해서 확립한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 됩니다. 그럼 그 대상을 잃어버리지 않고 대상을 분명하게 알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얼마 전에 마라도에 물 밑에서 물 위로 첨탑을 세워가지고 등대를 세워놓았는데 그게 부식이 되어서 낡아서 떨어져나갔대요. 그걸 수리를 하러 들어갔는데 파도가 치니까 굉장히 힘이 들거든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장비를 가지고 그 부러진 다리만큼의 장비를 가지고 물속으로 푹 들어가겠죠. 들어가서는 어떻게 돼요? 그 부러진 곳 그 대상에다가 최대한 내가 다가가야 됩니다. 물이 아무리 밀어내더라도 그걸 고치기 위해서는 그걸 가져다가 내가 붙여야 되는 거라. 그걸 탁 붙이고 나서는 어떻게 돼요? 그냥 붙어있습니까? 절대 안 붙어있죠! 그걸 끈으로 매든지 아니면 납땜을 하든지 해가지고 완전하게 착 달라붙여야 됩니다. 그리해야만이 인제는 파도가 치고 하더라도 이 첨탑이 흔들리지 않고 보호받게 된다는 거라.
'사띠빳타나'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기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아차림은 분명하게 대상에 대해서 깊이 들어가야 됩니다. 바닷속에 들어가야만 그걸 고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은 대상에다가 다가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 다가가고 났으면 어떻게 해요? 그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림으로써 탁 잡아야 됩니다. 그래야 거기에다가 붙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분명하게 거머쥐지 않으면 이게 얼마나 부셔졌고, 이것을 내가 어떻게 치료해야 된다는 걸 알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대상에 분명하게 탁 달라붙어 있어야 만이 여기서 일어나는 특성들, 무상·고·무아라든지, 아니면 선정이라든지, 통찰지가 일어난다든지 이런 것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어떻게 돼요? 그러고 나면 어떻게 돼요? 완전하게 확립이 되죠. 그 속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확립한다'는 거라. 완전히 탁 달라붙게 된다는 거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내가 보호를 받게 된다는 거라. 물속에 들어가서 부식된 것들을 부수는 것과, 부서진 것들을 고치는 것과 꼭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사띠빳타나'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사띠'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대상은 4가지다. 네 가지는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 이게 마음의 대상이라고 하는 네 가지입니다.
전체가 몇 가지가 있습니까? 21가지? 몇 가집니까? 21가지라 하는 것도 있고, 또 44가지라 하는 것도 있고, 보통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그중에 다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만 해도 크게 무리가 없죠! 쉽게 말하면 호흡만 관찰하고 있어도 전혀 무리는 없습니다.
호흡 관찰하기 힘든 사람은 어떤 경우든 다른 것들도 하겠지. 느낌에 대해서 싫은 느낌, 좋은 느낌 이런 느낌에 대해서 관찰할 수도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것들을 싫은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고요한 마음이 있는지 관찰하는 것들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대상들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특성들 무상한 성품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관찰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들도 있을 거고.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통칭해가지고 신·수·심·법(身受心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한국에 위빳사나 수행센터들은 각각의 특색들을 가지고 있죠! 신념처 하는 곳은 신념처 하고, 또 심념처 하는 데는 심념처 하고, 또 수념처 하는 데는 수념처 하고.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물론 자기들은 그게 최고라고 그렇게 하겠죠! 그거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거라. 다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까 21가지라 했죠. 또 44가지라 했고, 이거 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념처(四念處)에는 44가지를 다 설명을 해놔 놓은 거죠. 물론 스님도 44가지를 다 설명할 겁니다.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거는 이것 좀 해보고 저것 좀 해보고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되도록 그런 거보다는 대표적인 거 몇 가지를 선택해가지고 그것만 쭉 해나가도 틀림없이 열반에 이른다 하는 것들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두루 다 알 수도 있지마는 꼭 그럴 필요성까지는 없다 하는 겁니다.
보통 이 네 가지로 나누는데,
몸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대상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대표적으로 하는 것이 호흡이죠! 호흡의 들숨 날숨을 알아차리는 것.
또 몸에 하는 게 뭡니까? 내가 지금 서 있는지, 걸어가는지 하는 몸의 상태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게 있고, 그다음 내가 지금 밥 먹을 때는 밥 먹을 때 알아차리는 게 있고, 똥 쌀 때는 똥 쌀 때 하는 몸의 행동들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게 있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이 몸은 32가지 부정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머리털, 손톱, 발톱부터 시작해서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있습니다.
또 몸에는 여러분들이 잘하는 게 뭡니까? 호흡이든 뭐든 이 몸을 구성하는 것은 사대 요소로써 이루어져 있죠!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고 해서 사대 요소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 이게 딱딱한 성질이다, 이게 움직이는 성질이다 하고 알아차리는 것들이 있고.
또 어떤 게 있습니까? 죽은 시체, 여러분들에게는 이 부분이 해당이 잘 안 될 겁니다. 태국이나 동남아시아 같은 데서는 반드시 죽은 시체들을 진열을 해둡니다. 하루 지나고, 몇 시간이 지나고... 그 죽은 시체들을 보면서 수행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보통 이렇게 신념처(身念處) 수행들은 나누어집니다. 그 죽은 시체들을 잘게 쪼개어버리면 경우의 수가 많아지겠죠. 21가지가 44가지로 바뀌게 되고, 보통 크게 나누면 그렇게 됩니다.
그다음에 수념처(受念處)는 어떤 게 있습니까? 느낌에 대해서 관찰하는 것은
즐거운 느낌이 있으면 즐거운 느낌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괴로운 느낌이 있으면 괴로운 느낌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이 있으면 무덤덤한 느낌이 있다고 알아차리고.
수념처는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 괴로운 느낌에 대한 것,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것. 그건 정신적으로 알아차리는 거죠.
그다음에 육체적으로 즐거운 느낌이 있고,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이 있고, 육체적으로 무덤덤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
그다음에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것. 요렇게 해서 9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그게 느낌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심념처(心念處). 심념처는 어떤 것들입니까?
내가 욕심이 있으면 욕심이 있다고 알아차려야 되고, 욕심이 없다면 욕심이 없다고 알아차려야 되고, 자애가 있으면 자애가 있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죠.
탐․진․치가 있느냐, 없느냐. 아! 내가 지금 탐심이 있구나, 탐심이 없구나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그다음에 내가 지금 마음이 침체돼있다, 아니면 들떠있다 하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안 그러면 지금 내 마음이 한없이 자애로써 넓어져 있다, 아니면 충만 돼 있다, 그다음 내 마음이 수행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어떤 대상에 대해서 탁 고정돼 있다, 아니면 내 마음이 이미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해탈에 이르렀다, 이런 것들을 알아차리고. 이런 것들이 심념처에 해당이 됩니다.
법념처(法念處)는 그럼 어떤 게 있을까?
사성제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그다음에 다섯 가지 장애, 들뜸이 있구나, 의심이 있구나, 이런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 그다음에 오온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 12 연기의 12가지 요소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 그다음에 칠각지의 일곱 가지 요소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것. 이런 것들이 법념처에 해당이 됩니다.
신·수·심·법이라 해도 결국에는 몸과 마음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거죠!
그러면 사념처를 신념처, 마음에 대한 심념처 두 가지만 해놔 놓지 왜 수념처하고 법념처를 넣어 놨을까? 왜 넣어 놨을까?
몸을 알아차리는 것이든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든 뭐로 알 수 있습니까? 느낌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느낌에 대한 관찰들을 넣어 놓은 겁니다.
그리고 그 대상들이 어떻게 됩니까? 변화되죠! 마음도 변화되고 그 변화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해야 됩니다. 그 변화되는 것들이 없이 나중에 깨달음의 상태, 도와 과에 이르렀다 할 거 같으면 그 도와 과의 상태에 이르른 마음, 그리고 열반의 상태에 이르렀으면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것, 이런 것들이 대상이 되는 것, 이런 것들을 법념처라고 하는 겁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래서 신수심법 이렇게 네 가지로 얘기합니다.
그러면은 이 신수심법 중에 어느 한 가지를 해도 무방하다고 했습니다.
몸에 대해서 알아차린다고 하면, 그럼 호흡에 대해서 알아차린다고 해봅시다. 호흡이 불러오고 꺼지고 하든지 아니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왜 하필 그걸? 무엇 때문에 숨을 알아차립니까? 호흡 잘하기 위해서 오래 살라고 알아차립니까? 뭣 때문에 알아차리는 거라? (수행자 대답) 그것도 맞습니다.
엄밀하게 따지면 아라한의 지혜를 얻기 위한 겁니다.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수행하고 있는 겁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면서. 수행하는 목적이 뭔지도 모를 거 같으면 뭐 하러 수행해? 내가 이생에서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고 아라한의 과위에 오르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겁니다. 그 아라한 과위에 오르기 위해서 뭐가 더 필요합니까? 무상·고·무아라고 하는 삼법인도 알아야 되는 거고, 사성제도 터득을 해야 되는 거고, 팔정도도 익혀나가야 되는 거고, 그렇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게 첫째 목적입니다.
그럼 설혹 아라한에 이르지 못해도 이익은 있죠! 어떤 이익들이 있습니까?
내 마음이 되도록이면 번뇌로부터 물드는 것이 적어지고, 빨리 그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외부적인 대상으로부터 내 마음이 영향을 덜 받게 되죠! 그게 목적입니다. 쉽게 말하면 욕심부리고 화내고 어리석고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거기서 오는 괴로움들,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 목적은 딱 두 가지입니다.
그런 목적이 없을 거 같으면 수행을 왜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남들이 한다고 따라 하면 안 됩니다. 분명하게 목적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번뇌로부터 벗어나져야 되는 거고, 그러므로 인해서 내가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져야 되고. 이런 것들이 자꾸 계속적으로 일어나져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내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띠빳타나'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밑에 한번 보십시오.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닷사.' 이렇게 돼있습니다.
'나모- Namo'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나마' '나모'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불변사'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보통 여러분들이 '귀의'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의지한다' '예배드린다' 그런 의밉니다.
'땃사 tassa' 여기서 '나모 땃사'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격'으로써 나타나 집니다. 그래서 '그분'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분에게'.
그다음에 밑에 보면 전부 '바가와또- Bhagavato' '아라핫또- Arahato' 이렇게 '오 o'로 끝나 있습니다. 여기도 전부다 '여격'이라는 의미입니다.
'바가완따'의 여격, '아라한따'의 여격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존귀하신 분에게' '아라한에게' 그런 의미입니다.
'삼마- Sammā'는 '올바르다' '완전하다'는 의밉니다.
'삼붓다사 sambuddhassa'는 분해를 해놨습니다. '사(sa)'+'붓다(buddha)',
스스로-'삼앙(sāmaṁ)'에서
'삼(sām)'이라고 하는 것은 '함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선 '삼' 의 의미로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상(saṁ)'이라고 하는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단지 '응(ṁ)'이 삽입이 되면서 '응'이 '음'으로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음운화되면서 '삼붓다'가 됩니다.
그래서 '붓다, 깨달은 사람', 앞에 '삼마(Sammā)'가 붙으니까 '스스로 완전하게 깨달은 사람' 요렇게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 존귀하신 분,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께 예배드립니다.' 하는 것이 직역한 해석이 됩니다.
모든 경전에는, 그 경전 단독으로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맨 앞 첫머리에 이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핫또 삼마삼붓다사'가 삽입이 됐습니다.
여러분들 법회 할 때 맨 처음 뭐했어요? 이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핫또 삼마삼붓다사' 이걸 먼저 했죠! 그러고 나서 그건 인제 끝났습니다. 그러고 나서 '삼보 예찬' 이렇게 했습니다.
오계 받을 때, 삼귀의 오계 받을 때 맨 처음에 뭐 했어요?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핫또 삼마삼붓다사'부터 합니다. 그러고 나서 삼귀의 오계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님 법문한다, 법문 앞에 맨 처음 뭐할 거 같아요? 어떤 경우든지 법문할 때 스님들은 맨 처음에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핫또 삼마삼붓다사' 먼저 딱하고 나서 법문을 합니다.
태국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하고 나서 그날 법문 내용을 빨리어로 간단하게 얘기를 합니다. 얘기를 하고 쉬운 말로 풀어서 합니다. 그 어떤 경우든지 그렇게 합니다. 경전 단독으로 돼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맨 앞에는 요게 먼저 들어갑니다.
이렇게 들어가지 않을 경우는 언제냐면 여러 가지를 같이 할 경우에, 쉽게 말하면 대념처경도 하고 12연기도 하고 이렇게 스님들 이렇게 독송을 쭉 할 경우에는 대념처경 앞에도 '나모 땃사~'하고. 12연기 앞에도 '나모 땃사~'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 번만 하면 됩니다. 그럴 경우엔 12연기 앞에는 '나모 땃사~'가 없죠.
어쨌든 한 단락이 시작이 될 때는 어떤 경우에든 한 단락의 앞에는 '나모 땃사~'라고 하는 것이 먼저 들어가게 됩니다. 그게 대념처경에 보면 대념처경 앞에는 '나모 땃사~' 부분이 없죠! 왜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 책 디가니까야면 디가니까야 맨 앞에는 반드시 '나모 땃사~'가 있죠. 그런 의미입니다. 다른 경들이 쭉 있을 때는 그 경 맨 앞에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입니다.
여기서는 여러분들은 지금 대념처경만 하기 때문에 대념처경 맨 앞에 '나모 땃사~'를 붙여놨다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kurūsu viharati
kammāsadhammaṃ nāma kurūnaṃ nigamo.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꾸루-수 위하라띠
깜마--사담망 나-마 꾸루-낭 니가모-.
그다음에 '에-왐메- 수땅(Evamme sutaṁ)' 그렇게 됩니다.
태국에서는 '에-왐메-' 해서 '왐메-'가 붙어가지고 나옵니다. '에-왐메- 수땅' 그렇게 되고, 다른 나라에서는 '에-왕 메- 수땅' '에-왕' 다음에 '메-'를 띄우고 '수땅' 그렇게 됩니다. 태국에서는 빨리어 공부하기 참 힘듭니다. 대부분 이 단어들을 붙여놨습니다. 대부분이 보면 그렇게 그냥 막 마구잡이로 붙여있습니다. 요걸 분해하기가 참 힘이 들어. 다른 나라들은 조금 떨어져 있는 경우들이 있죠. 공부하기가 좀 수월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에-왐메- 수땅(Evamme sutaṁ)' 이라고 하는 것은 '에-왕, 이와 같이' '메-, 나는' '수땅, 수따,들었다' '수따(suta)'는 '경전'이라 할 때의 '숫따(Sutta)'가 아닙니다. '들었다' 할 때의 '수따'입니다.
'들었다'는 사실은 '들었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지금 내 소리 들립니까? 들려지죠. '들렸다'고 해야 됩니다, '수따'라고 할 때는.
'수낫띠'라고 하는 것의 과거수동분사 이기 때문에 수동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마음을 기울여서 듣는 게 아니고, 다른 게 와서 나한테 탁 들리는 걸 얘기를 합니다. 그걸 수동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들려지는 겁니다. 과거에 들려진 거니까 어떻게 됩니까? 들려진 겁니다.
사실은 엄밀하게 분석을 할 거 같으면 '메'는 구격이기 때문에 '나에 의해서 들려졌다'라고 사실은 해석을 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나에 의해서 들려졌다' 들려진 건 누가 들은 겁니까?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로 인해서 들려진 겁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원래는 바른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우리말에는 좀 안 맞지. 그래서 대부분이 보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보통 번역들을 합니다.
그런데 이게 뭔지는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게 구격으로 쓰여진 건지, 수동분사인지 뭔지는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실제로 여러분들 수행하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소리가 들리는 것은 들리면 안 되죠? 들려져야 되죠! 그렇죠! 수행에서. 들려져야 수행 잘하는 겁니다. 소리가 들리면 안 됩니다. 그거는 왜 그렇습니까? 들리려고 할 것 같으면,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을 의도적으로 거기에 기울여야 됩니다. 그런데 들려지는 것은 기울이지 않아도 자기가 자동으로 와서 내한테 탁 붙어서 들리는 겁니다. 마음은 다른데 있다가도 그 소리에 찰나적으로 와서 탁 머물 경우에는 들려지게 됩니다.
사띠는 이런 것들입니다. 원래 사띠는. 사띠는 그래서 자연스러워야 되는 거고, 사띠는 붙잡아서도 안 되는 거고, 달라붙어서도 안 되는 거고, 밀쳐내서도 안 되는 것들입니다. 지금 현재 일어난 것을 단지 알아차리는 것뿐이라는 거라. 그렇게 하려면 실제로는 들려져야 됩니다. 이해가 됩니까?
(...) 아난다죠.
아난다하고 부처님 하고는 나이가 똑같습니다. 맞습니까? 그렇죠? 아난다 태어날 때 부처님도 같이 태어났죠. 부처님이 태어날 때 같이 태어난 게 일곱 가지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주석서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데에는 아난다가 태어났다고 얘기를 하고, 아난다를 빼버리고 코끼리 이름을 넣어놓기도 하고 그렇게 됩니다. 대표적인 게 뭡니까? 아난다가 태어났고, 부처님이 결혼 한 야소다라도 같은 달 같은 때 같은 날에 태어나죠.
그다음에 또 부처님을 평생 동안 시봉했던 마부 찬나도 같은 날 태어났고, 그리고 그 말 칸따까도 같은 날 태어났고, 그다음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렀던 보리수나무- 그때 당시에는 아삿다 나무라고 했는데 마하보디 아삿다 그 보리수나무도 그때 싹을 틔웠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정반왕이 '나중에 부처님 제발 우리 왕국으로 오십시오' 하고 간청을 넣을 때 보냈던 대신 깔루다이 대신이라고 있습니다. 그 깔루다이 대신도 같은 때 태어났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또 황금 항아리, 황금이 많아서 아무리 가져가도 줄어들지 않는 황금 항아리 4개가 같은 때 만들어졌다 하고 얘기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다른 것은 똑같은데 아난다가 일곱 가지 중에 하나에 들어간 주석서가 있고 어떤 주석서는 아난다는 빼고 이름이 아로하나야인가 뭔가 하는 코끼리가 아난다 대신에 들어간 경우가 있고 그렇습니다.
아난다는 부처님하고 나이가 똑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똑같은 나이인데 부처님 시봉을 한 거라. 여러분들 그리하겠어요?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했으면 꼼짝못하고 시봉을 했겠노? 그것도 25년간이나. 부처님이 20년 동안에는 특별하게 시자가 정해진 게 없었죠? 여러 스님들이 시봉을 했습니다. 시봉하다가도 ‘에이 나 시봉못하겠다’ 해가지고 도망가버리면 부처님은 안 잡았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21년부터는 아난다가 부처님 마지막 열반하실 때까지 줄기차게 계속 시봉을 했습니다.
시봉을 할 때, 하기 전에 아난다가 조건을 겁니다. 아난다는 부처님하고 똑같은 동갑이란 말이라. 그럼 다른 사람들이 와서 봤을 경우에는 자칫 착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 스승이고 누기 제자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아난다가 그런 것들을 미연에 방지하기위해서 '이거는 내가 부처님께 안 하겠다 하는 게 있고, 이거는 부처님이 반드시 내 청을 들어줘야 된다'는 게 있습니다. 그런 조건을 내걸고 그 조건이 채워졌을 때 아난다가 시자가 됩니다.
시자가 되는 과정들은, 그걸 상가에서는 '상가 깜마'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자꾸 부처님의 시자가 바뀌니까 제자들도 좀 답답하거든. 누구 하나 지속적으로 있어가지고 부처님 시봉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상가 깜마를 해서 상가 회의를 엽니다. 누가 가장 부처님 시봉을 잘하겠는가 하고. 거기서 인제 아난다가 결정이 됩니다. 그래서 아난다에게 의향을 물으니까 그럼 그 자리 상가 깜마에서 '부처님이 나에게 이런 것은 하지 말고 이런 것은 해주면 나는 부처님을 평생토록 시봉을 하겠습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하지 말아라' 하는 건 보통 의식주와 관계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누가 여기 있는 진용 스님한테 가사를 줬다, 그럼 시자가 보기엔 가사가 좋거든. 그러면 “스님 가사가 좋네요” 이렇게 할 거 같으면 나는 어떻게 합니까? “그래. 니 입어라” 하고 이 가사를 줘 버립니다. 그러지 말아라는 거라 부처님한테. 부처님한테 준 가사는 자기한테 주지 말아라는 거라. 나는 아직 욕심이 있기 때문에 가사가 좋다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부처님은 이 가사를 나한테 주지 말아라는 거라.
가사만 그런 게 아니고 맛있는 음식이 들어왔을 때도 꼭 마찬가지. 부처님은 아무런 욕심이 없고 번뇌가 없기 때문에 이걸 먹든지 이걸 입든지 간에 전혀 관계가 없는데 아난다는 안 그렇다는 거라, 자기는. 그러니까 옷도 들어와도 나한테 주지 말고 좋은 음식 들어와도 나한테 주지 말고. 또 음식을 나가서 탁발만 하고 먹습니까? 그렇지 않죠! 공양청을 합니다. 공양청을 하더라도 나보고 같이 가자는 소리 하지 말아라는 거라. 나는 거기 안 간다는 거라. 공양에 대한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하나가 뭐냐면 시자는 지금도 마찬가진데 여기에 부처님이 머무르고 있다, 시자는 저기 조그만 방에 가서, 시자 방이 따로 있습니다. 여기 같이 방 안에 있는 거죠. 그렇게 돼있는 것이지, 따로 방을 하나 만드는 법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독방은 안 된다는 거라. 항상 그렇게 붙어있다는 거라. 그래서 독방을 쓰는 것은 나한테 용인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이 네 가지는 부처님 제발 부탁인데 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럼 이 네 가지는 반드시 청을 들어줘야 된다 하는 경우는,
누가 법문 청했다 그러면 “아이, 내 바빠서 법문 못 간다” 이 소리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스님이 죽겠습니다. 법문 청이 있으면 안 간다 소리를 못하니까 가야되는 거라. 내가 아무리 바빠도 겹치기가 안 되면 그걸 조정해서라도 가야 되는 거라. 아난다도 조건을 이렇게 부처님 법문 청하면 무조건 가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법을 청하는데는 반드시 가야되는데 내가 따라가야 된다는 거라. 부처님 말씀 다 듣겠다는 얘기라. 법문하는 데는 무조건 가야 되고.
그다음에 누가 있으면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럼 “내가 아파서” 이런 소리 하지 말아라. 큰스님이라고 “에헴”하고 있으면서 쉽게 말해서 '찾아가서 보기도 힘들다'고 하는 그런 것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누가 찾아오든지 왔다고 내가 얘기하면 부처님은 반드시 만나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거부를 못한다는 거라. 부처님이 아파서 드러누워가지고 설사병이 났든지 어쨌든 간에 만나야 된다는 거라. 모든 사람들에게 법을 나눠줘야 된다는 거라. 그렇게 만나야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는 뭐냐면 부처님한테 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들을 물어보는 것이라. “아, 내 오늘 피곤하니까 제발 그만하자” 이 소리 하지 말아라는 거라. “없습니까?” “예 없습니다!” 하면 부처님이 그만해도 되는데 그러기 전에는 절대 질문하고 하는데 그만하자 소리 하지 말아라는 거라. 뭐든지 의문 나는 걸 물어보면 반드시 답을 다해야 된다는 거라. 그거 다해라는 거라. 부처님 보고 죽으라는 얘기야. 그게 정해져 놔 놓으니까 지금도 스님들은 그게 불변율입니다. 죽겠어요, 아난다 저 스님 때문에 지금 스님들이.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면 20년간은 부처님 시봉을 안 했죠 아난다가. 지난 20년간 법문 했던 거 나한테 전부 다 들려주라. 전부다! 지금부터는, 21년부터는 자기가 다 들을 거니까, 어쨌든 부처님 법 설하는 데는 자기가 다 참가한다고 했고, 사람들 찾아오는데도 자기가 다 있으면서 다 듣고 질문하는 것들도 다 듣고 할 거니까 부처님과 항상 붙어있는 거니까 문제없는데, 그전에 20년간은 아난다가 못 들었다는 거라. 그러니까 20년간 했던 법문을 자기한테 다 들려주라는 거라. 그러니까 모든 부처님 법문은 다 듣겠다는 얘기라. 부처님이 허락을 했거든.
그래가지고 아난다가 시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왜 경에 보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한때 부처님께서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무슨 말씀을 하셨고...] 전부 정형구화 돼있습니다. 왜 이렇게 돼 있을까? 일부에서는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그랬다. 쉽게 말하면 아주 쉽습니다.
- '에왐메수땅 에깡' 그다음에는 '도시 이름', 쉽게 말해서 '에깡 사마양 바가와 위하라띠' 다음에는 쉽게 말하면 '사와띠양' 하든지 여기 같으면 '꾸루족의 깜마사담마' 어쩌고 하면서 그다음에 '사념처경이라는 짯따로 사띠빳타나 숫따를 설했다' - 뭐 이렇게 하면 아주 수월하단 말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기억하는 입장에서는 참 수월해.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됐다 하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럴까?
아난다가 물어봅니다. “부처님! 부처님은 좀 있으면 열반합니다. 열반하고 나면 우리는 무엇을 의지해서 살아야됩니까?” 하고 묻습니다. 뭘 의지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부처님 열반하고 나서는. 부처님은 "법을 의지해서 살아라" 그랬죠! 그래서 "사념처를 의지해서 살아라." 주석서에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법을 의지해서 살아라. 사념처를 의지해서."
그러면 그걸 의지해서 산다고 치자, 그러면 “부처님 돌아가시고 나면은 누가 우리 스승이 됩니까? 누구를 스승으로 해야됩니까?” 가섭 존자가 있어서 가섭을 스승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인제 어른이 됐으니까 아난다를 스승으로 할 건지 쉽게 말해서 후계자가 누구냐 하는 거라. "위나야-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이렇게 얘길 합니다. 계율을.
그다음에 또 물어봅니다. 부처님 마부였던 '찬나'가 아주 부처님 때도 말썽을 많이 피웠습니다. 부처님 있을 때도 저렇게 말썽을 피우는 비구들이 있는데 부처님 열반하고 나면 말썽 피우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라. “그런 말썽 피우는 이 스님들은 우째해야 됩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쉽게 말하면 누가 와서 불교를 훼손했다, 이 선원에 와서 부처님을 부숴버렸다, 그럼 내가 부순 사람이 누군지는 안단 말이라. 그럼 요앞에 다니는 oo교회 목사님이 와서 부쉈다. 그럼 니 우짤끼라? 나쁜짓 했다는 거라. 나쁜짓한 적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거라. 어떻게 해야 돼요?
"말없이 상대하지 말아라" 가서 예수님 부숴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말없이 상대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걸 '별중(別衆)'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찬나에게 별중죄를 먹입니다. 찬나가 내한테 와서 뭘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 쉽게 말하면 저건 투명인간이라. 지가 무슨 짓을 하든지 뭘 하든 간에 일절 없는 사람이 돼버리는 거라. 그걸 '별중'이라고 그럽니다.
그럼 말없이 상대하지 말아라는 거라. 말 걸지도 말고, 말 걸어와도 대꾸도 하지 말고,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하라는 거라. 그럼 저 사람이 어떻게 되겠어? 나중에는 자기 잘못을 뉘우칩니다. 찬나는.
oo교회 목사님도 만약에 주변에서 그렇게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아! 내가 부처님을 훼손한 것 때문에 내가 이렇게 외롭게 혼자가 되는구나 하고 알아차린다는 거라. 그래서 증오는 증오로서 다스릴 수 없다고 그러죠! 맞대응하는 것은 불교적인 방식은 아니라는 거죠.
그다음에 또 물어봅니다. “그러면 부처님 열반하고 나서 부처님이 남긴 말씀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우리가 기억을 해야됩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부처님이 그럽니다. 그때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이 어디에서 뭘 어떻게 어떻게 설했다. 이렇게 암송하도록 하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경전들은 그런 체계들로써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참 애달픈 게 왜 '어느 한때'가 됐을까? 고마 부처님 깨달음 후 첫 번째 안거 때, 아니면 세 번째 안거 때, 아니면 해제 지나고 한 달 뒤에, 이렇게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주면 참 우리가 이해하기도 수월할 건데, 왜 이렇게 '어느 한때', 모든 경전이 다 '어느 한때' 라고 돼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왜 그럴까요? 사념처경 경전을 설한 게 어디 꾸루 지방에 가서만 설했겠어요? 사위성 가서도 설했을 거고, 어디 다른데 여기 한국에 와서 설 안 했다고 누가 얘기할 수 있어요? 내용은 똑같지만 어느 곳에서도 설할 수 있다는 거라.
그럼 그 설한 것이 꼭 어느 한때라고 정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대부분 경전들을 보면 겹쳐지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유들이 있습니다. 스님이 법을 설하는 것도 여기서는 요렇게 하고 저기서는 또 딴말하고 이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여기서 이렇게 했으면 저기서도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라. 비슷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스님 내용은 “거의 비슷합니다.” 당연히 비슷할 수밖에 없지 뭐. 내가 뭐 딴말하는 것이 아니니까 비슷할 수밖에 더 있나! 어느 한때라고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그런 부분은 빠져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도 문화에서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언제 이게 만들어졌다는 건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언제 만들어졌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시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용이 중요할 것 같으면 그 내용으로 인해서 그때 깨달은 사람이 나타나고, 그 내용으로 인해서 지금 깨달은 사람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해당이 되게끔 됩니다. 인도의 사상은 그런 사상이라. 언제 이걸 만들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언제든지 그것을 실천할 수 있을 때는 '때'라고 하는 것은 관계가 없어져버리게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kurūsu viharati kammāsadhammaṃ
nāma kurūnaṃ nigamo.
에-왕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꾸루-수 위하라띠 깜마-사담망
나-마 꾸루-낭 니가모-.
그래서 보면 '에왐메 수땅' 하고 나서 '에깡 사마양(Ekaṃ samayaṃ)' 그렇게 나옵니다. '어느 때' '어느 한때' '에깡' '사마양' 다 시간을 나타냅니다. '한 때'라고 보통 표현들을 합니다.
'에까' 부분은 뒤에 부분에 나옵니다. '에까야노 막고' 할 때 '에까'가 나옵니다.
그다음에 '바가와(bhagavā)' '바가(bhaga)' 하고 '완따(vant)' 하고 합해진 겁니다. '존귀하신 분, 행복이 가득하신 분'이란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항상 행복하면 여러분이 '바가와'입니다.
그다음에 '꾸루수 위하랏띠(kurūsu viharati)' '꾸루국에 머물렀다'가 됩니다. 뒤에 보면 '위하랏띠'라고 돼 있죠. '위하랏띠'는 현재분사로 돼있습니다. 그게 빨리어의 장점입니다.
그다음에 꾸루국 어디에서 머물렀느냐면 '깜마사담마(kammāsadhammaṃ)' 라고 하는 도시 이름입니다. '나마(nāma)' 라고 부르는 라고 이름하는, '깜마사담마'라고 이름하는 곳에 머물렀는데.
누구를 대상으로? '꾸루낭 니가모(kurūnaṃ nigamo)' 꾸루국 사람들의 마을에서, 꾸루국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래서 '어느 한때 세존께서는 꾸루국의 깜마사담마 라고 불리는 꾸루인들의 마을에 머무셨다.' 그렇게 되어집니다.
꾸루국에서 부처님이 경을 설하신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이 대념처경이 있고, 12연기는 어디서 설했을까? 꾸루국이죠. 아난다가 물어봅니다. “아, 부처님 12연기 그거 참 쉽습니다.” “이놈의 자식아, 연기가 그리 쉬운 거 아니다. 아주 심오하고 어려운 것이다.” 하고 그렇게 얘기했던 것도 이 꾸루국에서 했습니다.
또 부처님에게 해코지했던 마간디야, 자기 딸이 아주 절세미인이니까 부처님하고 결혼시키려고 하는 거 있죠? 담마빠다에 나오는 마간디야. 그래서 부처님은 “이 썩어빠진 몸뚱이가 뭐가 좋다고 이것에 대해 집착하냐, 이 집착을 나는 여의어 버렸다” 하는 그런 얘기들을 했던 것도 이 꾸루국에서 일어납니다.
또 스님들이 가장 출가하는 목적이 뭔가 하고 물어볼 때 랏타빨라 스님의 일화를 많이 듭니다. 보통 "스님은 왜 출가했어요?" 물어보지. 그럼 스님들이 정형화된 답이 있습니다. 네 가지 모범답안.
변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고집할만한 것이 없다는 거라. 다 흩어지고, 쉽게 말하면 안 죽고 싶어도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죽을 때는 누가 나하고 같이 동행해주는 사람도 없고 죽을 때 내재산 가지고 갈 수 있는 방법도 없다는 거라. 내것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진리를 알기 때문에 나는 출가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이세상은 불만족스럽고 갈망의 노예로서 살아간다하는 얘기를 합니다. 얼마나 여러분들 묶여 삽니까? 요즘은 휴대폰도 뭐 스마트폰 그거 놓으면 사람들이 대화를 더 안 한대. 집에 같이 있어도 그거 하기 바빠가지고. 그 노예로 그리 사는 거라. 스님도 얼마 전에 휴대폰을 바꿨거든. 돈이 들었어. 스마트폰 안 한다고. 나는 스마트폰 쓸 일이 없어. 내가 그 스마트폰 해야 될 이유가 없는 거라. 그냥 일반 전화기라. 스마트폰하고 비슷하게 생겼어 생긴 거는. 그런데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걸로 하려 하니까 돈을 내야 된대. 그래서 돈을 줬어. 내가 쓸 이유가 없을 거 같으면 내가 쓸 필요가 없으니까 안 하는 거지. 어쨌든 이렇게 갈망의 노예로 산다는 거라.
갈애라고 하는 진리를 봤기 때문에 나는 출가했다. 이게 네 가집니다.
스님들이 "스님 왜 출가했어요?" 하고 물어보면 전부다 이 네 가지 답 중에 하납니다. 출가의 목적입니다. 출가의 목적에 대해서 스님들이 얘기할 때는 이 스님의 일화를 많이 얘기를 합니다.
이 랏타빨라 스님도 마찬가지로 꾸루 지방에 계셨던 분입니다. 그것이 있고, 그다음에 어느 바라문이 여섯 감각기관을 절제하는 것을 오히려 부정했던 것이 있습니다. '욕심이 생기면 욕심대로 행하는 그것이 오히려 바른 것이다' 하니까 부처님이 그게 아니다. '여섯 감각기관을 절제하는 것이 오히려 바른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부분이 있을 때도 이 꾸루 지방에서 법을 설했습니다.
꾸루지방에서 우리에게는 가슴 깊이 담겨있는 그런 경전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뭡니까? 이 대념처경이죠! 그런 곳이 이 꾸루 지방이다 하는 것들을 아시기 바랍니다.
에-왕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꾸루-수 위하라띠 깜마-사담망 나-마 꾸루-낭 니가모-.
'어느 한 때 세존께서는 꾸루국의 깜마사담마라고 불리는 꾸루인들의 마을에 머무셨다.' 가 됩니다.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bhikkhavo!"ti.
따뜨라 코- 바가와- 빅쿠- 아-만떼-시 : "빅카오-띠."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빅쿠들에게 "빅쿠들이여!"라고 부르셨다.
그다음에는 따뜨라 코- 바가와- 빅쿠- 아-만떼-시 "빅카오-띠." 라고 돼있습니다.
'따뜨라(tatra)'는 '그곳에서'
'코-(kho)'는 그곳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가와-(bhagavā)'는 앞에 와 똑같고 [bhaga(행복) + vant(구족한 분, 있으신 분)]
'빅쿠-(bhikkhū)'라 하는 것들을 '보통 빌어먹을 사람' 이렇게 풀이하는 곳도 있고, 그다음에 '바른 구족계 의식을 받고 출가한 남자'를 얘기하기도 하고, 그리고 '도를 닦는 자'를 얘기하기도 하고, 그다음에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빅쿠라는 의미는 각각의 경전과 주석서에 따라서 해석하는 방법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서양식 방식으로 비구를 '빌어먹는 자'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갖가지의 해석방법이 있습니다.
그리하더라고 빅쿠의 가장 큰 의미는 뭡니까? 수행 안 하는 자는 빅쿠가 아닙니다. 출가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수행하는 자는 비구라고 얘기한다' 하고 경전에 설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수행 열심히 하면 비구가 되는 겁니다. 그 대신에 출가해서 구족계를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비구라는 이름을 안 쓰는 것뿐입니다. 의미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이 수행 안 하는 스님들은 그것은 출가자의 자격이 없는 겁니다. 어떤 경우든지. 그것이 빌어먹든지, 내가 윤회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고 있든지, 아니면 바르게 '우빠삼빠타'라고 하는 것으로 구족계를 받았든지, 어쨌든지 그것은 차후의 문제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하는 자'입니다. '바른 도의 길을 닦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다음에는 '아-만떼-시(āmantesi)' '부르다'
밑에는 보면 '빳짯소-숭(paccassosuṁ)' 이라고 돼있습니다. '말하다'. 부르니까 대답한 거겠지. 부처님이 '비구들아!' 하고 부르니까 '예, 스님!' 하고 대답을 하는 거하고 같은 의미로, 3인칭 단수 아오리스트라고 돼있습니다.
아오리스트는 뭐냐면 이미 과거에 했던 건데(과거형) 지금 현재 시점에서 해석하는 것. 원래의 의미는 '부르셨다'입니다. 이미 불렀지만 부른 것은 과거에 한 겁니다. 그런데 부르신 건 언제 시점에서 보는 겁니까? 지금 시점에서 보는 겁니다. 불렀으니까 내가 대답을 하는 거라. 부른 시점으로 봤을 때는 현재가 됩니다. 그 대신에 부처님이 불렀던 시점은 이미 과거가 됩니다. 어떤 경우는 이게 현재인지 과거인지 오리무중 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통 '아오리스트'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bhikkhavo!"ti.
따뜨라 코- 바가와- 빅쿠- 아-만떼-시 빅카오-띠.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빅쿠들에게 빅쿠들이여!라고 부르셨다'가 됩니다.
그다음에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ṁ.
바단떼-띠 떼- 빅쿠- 바가와또- 빳짯소-숭.
"대덕이시여!"라고 그 빅쿠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그다음에 '바단떼-띠(Bhadante! ti)'라고 하는 겁니다.
'바단따(Bhadanta)'라고 많이 들어봤죠? 스승을 칭할 때 '바단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기서는 '바단따'라고 대답을 한 겁니다.
어떨 때는 부처님을 칭하는 용어 중에 뭐 그렇게 뛰어난 용어는 아닙니다. 어떨 때는 '반떼'라고 이렇게 하는 경우도 있고, 더 나쁘게 표현할 거 같으면 '앗사'라고 까지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다음에 또 부르는 가장 흔한 것이 '고따마'라고, 안 그러면 '사마나'라고 부르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용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선 '바단따'라고 부른 겁니다.
'바단따(Bhadanta)'는 '아주 덕행이 뛰어난, 언행이 일치된 사람'에게 부르는 용어가 '바단따'입니다.
'빤디따(pandita)'라고 들어봤죠! '빤디따'는 어떤 때 부르는지 아십니까? '빤디따'는 덕행이 일치가 안 되도 됩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그러니까 경험이 풍부해가지고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는 경우에는 '바단따'라고 안 하고 '빤디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여기서 '바단따'라고 할 경우에는 '두라(dhura)'의 개념. 익히 닦아가지고 내가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동일하게 될 때는 보통 '바단따'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빤디따 보다는 조금 더 나은 개념이죠! 존경이 스스로 우러난다는 그런 뜻입니다. '존경하는 분', '큰 어른'이라는 뜻입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대덕이시여', '존자시여' 이렇게 표현들을 많이 해놔 놨습니다.
그다음 '띠(ti)' '떼(te)' 다 밑에 설명을 해놔 놨습니다. '빅쿠' '빅카오',
그다음에 '빳짯소숭(paccassosuṁ)' 그렇게 합니다. '말에 대답했다'. '빠띳수나-띠(paṭissuṇāti)'라고 하는 '빠띠(paṭi)'는, 아까 '사띠빳타나' 할 때 '빠'하고 비슷하게 쓰여집니다. '빠띠(paṭi)' '수(su)' 그다음에 '나(na)'는 부정형이죠!
'빠띠(paṭi)'를 보통 두 가지로 해석을 합니다. 흐름을 향해서 나아가는 거하고 흐름을 거슬러서 나아가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은 '빠띠'는 그런 의미입니다. 흐름하고 관계가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수빠띠'라고 했다 그러면 '수빠띠'를 뭐라고 해석할 거 같아요? 흐름을 따라 잘 나아간 사람을 '수빠띠'라고 할 거야 아니면 흐름을 향해서 잘 거스른 걸 '수빠띠'라고 할 거야? 두 개 다 맞습니다. '빠띠'라고 하는 의미는 요 흐름의 딱 중앙에 있다는 거라. 어디로 따라갈 거라? 바른 방향으로 따라갈 거야? 그른 방향으로 따라갈 거야?
그래서 빨리어가 어렵다는 거라. 똑같은 단어인데도 어떤 데서는 '수빠띠'가 흐름을 거스른 것으로 해석해야 되고, 어떤 데서는 흐름을 바르게 나아가는 거로 해석이 되야되고 바로 그런 차이라. 문맥에 따라서 해석을 하는 것이 달라지게 된다는 거라.
쉽게 말해서 여기서는 일치해가지고 "야" 하고 부르니까 "어" 하고 바로 흐름을 따라서 대답을 한 것이 되는 거죠. "야" 했는데 대답을 안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이 단어를 쓸 수가 있습니다. 흐름을 거슬렸을 경우에. 그런데 앞에 보니까 '바단떼'라고 적어놨으니까 흐름을 거스른 것은 아니고 따라간 것이 되는 거죠. 그래서 '대덕이시여라고 그 빅쿠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그렇게 됩니다.
그 다음에
Bhagavā etadavoca :
바가와- 에-따다오-짜.
세존께서는 이렇게 설하셨네.
'바가와- 에-따다오-짜' 이렇게 돼있습니다. 바가와 에따, '에땃(etad)'이 됩니다. '에땅(etaṁ)'으로 바뀌죠. '에땃(etad) 아오짜(avoca)'그렇게 됩니다.
'에-따다오-짜(etadavoca)' '이렇게 설하셨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설하셨다.
뭐라고 설했어요? 그게 '에까야노 아양 빅카오 빅카웨 막고 삿따-낭 위숫디야' 하면서 이렇게 쭉 연결되는 겁니다. '빅쿠들이여 바로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길이고...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쭉 설명을 해놓은 겁니다.
그다음에는 '웃데사' 부분입니다.
사실은 앞에는 이 경을 설한 유래에 대한 것들이기 때문에 크게 수행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웃데소'를 서론으로 볼 경우에는 서론 부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웃데소' 하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보면 앞에 [부처님이 어디에 계셨고 뭘 하셨고...] 하는 것은 '웃데소' 부분으로 대부분 안 넣습니다. 그거는 '총설' 부분이라 해서 그 부분이 지나고 나서 '웃데소'로 되어있습니다.
스님은 그 방식을 따른 겁니다. 이거는 스님의 방식입니다.
그 '웃데소'를 맨 처음부터 넣든지 아니면 지금부터 '에까야노 아양~' 부터 넣든지 그거는 여러분들 마음입니다. 스님이 봤을 때 '웃데소'라고 하는 것은 서론 부분에 해당되는 게 아니고, 이 경이 전체적으로 어떤 경이냐 하는 걸 얘기했을 때 '웃데소' 라고 이름을 붙인다고 봤기 때문에, 지금 '에까야노 아양 빅카웨 ~' 부터는 '웃데소' 부분으로써 분류를 해놓은 겁니다.
사실은 이 '웃데소'가 경 전체를 좌우하게 됩니다.
수행하면 이런 이로움들이 있다, 그다음에 어떤 수행을 어떻게 해야된다 하는 것들을 설명해 놓고, 그 뒤에는 상세하게 신수심법으로 설명이 들어가는 본론 부분이 나오고, 그다음에 그렇게 수행했을 때 어떤 이익이 있다는 결론 부분으로 만들어진 게 이 대념처경입니다. 오늘은 앞에 이까지만 하고, '웃데소' 부분은 다음 시간에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 아래 빨리어 문법 풀이 부분은 붓다의 길따라 선원의 홈페이지에서 인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kurūsu viharati kammāsadhammaṃ nāma kurūnaṃ nigamo.
에-왕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꾸루-수 위하라띠 깜마-사담망 나-마 꾸루-낭 니가모-.
어느 한때 세존께서는 꾸루국의 깜마사담마라고 불리는 꾸루인들의 마을에 머무셨다.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bhikkhavo!"ti.
따뜨라 코- 바가와- 빅쿠- 아-만떼-시 빅카오-띠.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빅쿠들에게 "빅쿠들이여!"라고 부르셨다.
tatra : 그곳에서, 부사
kho : 강조하는 말,
bhagavā : 세존께서는, 행복한 분께서는, 남성 단수 주격. bhaga(행복)+ vant(구족한 분, 있으신 분).
bhikkhū : bhikkhu(빅쿠)의 복수 목적격= 빅쿠들에게,
*bhikkhu= bhaya, bhī(두려움)+ ikkhu(본다), 즉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 바른 구족계 의식을 받고 출가한 남자, 탁발로써 살아가는 자, 도를 닦는 자.
āmantesi : 부르다, 말을 걸다. 3인칭 단수 아오리스트
bhikkhavo : 빅쿠들이여! 복수 호격,
ti : ~라고, iti의 생략형, 불변화사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ṁ.
바단떼-띠 떼- 빅쿠- 바가와또- 빳짯소-숭.
"대덕이시여!"라고 그 빅쿠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bhadante : bhadanta(덕이 높고 귀중한 분, 존경받는 분, 상서롭고 선한 분)의 단수호격= 대덕이시여!, 존자시여!
ti : ~라고, iti의 생략형, 불변화사
te : 그, so의 의미, 복수 목적격
bhikkhū : bhikkhu(빅쿠)의 복수 주격= 빅쿠들은,
bhagavato : 세존에게, bhagavant의 단수 여격
paccassosuṁ : 말하다, 동의하다, 일치하다, 대답하다, paṭissuṇāti(paṭi~을 향하여+su잘)의 3인칭 단수 아오리스트,
Bhagavā etadavoca :
바가와- 에-따다오-짜.
세존께서는 이렇게 설하셨네.
bhagavā : 세존께서는, 단수 주격
etadavoca : etaṁ(이렇게), 단수 목적격+ avoca(vatti의 아오리스트, 설하셨다), 3인칭 단수 아오리스트
***
삼보에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이 법문 글은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들에서 녹음된 것을 토대로 필사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공부로써 삼장법사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옮겨 적으며 되도록이면 최대한 선원장 스님의 육성을 그대로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옮긴이의 앎과 노력이 부족하여 법문 본래의 뜻과 요지를 오롯하게 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법문내용의 속뜻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변형 없이 오롯이 전해주시는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스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올바르고 귀중한 법문들이 설해질 수 있는 장소와 조건을 유지해주시고, 설해진 법문들을 잘 보존해오신 선배도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서로 힘이 되어주시는 모든 테라와다 도반님들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공덕이 골고루 나누어지길 바랍니다.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 가르침으로 인해 법의 눈이 열리고 지혜가 증장되어지기를
이 가르침이 실천수행으로 이어져 닙바나의 토대가 굳건해지기를
2022년 12월 다시 필사하며 담마마-마까 올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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