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념처경 법문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18강. 심념처(心念處 찟따누빳사나) 1. (20111008)

담마마-마까 2019. 6. 1. 23:22

https://youtu.be/mO7n31-eEWo

18강. 심념처(心念處, Cittānupassanā) 1. (20111008)

 

오늘은 심념처 부분 할 차례입니다. 저번에 대충 심념처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마음이라는 것들에 대한 것들을 좀 얘기를 하고, 하나씩 하나씩 심념처 항목들을 살펴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경아, 연경이는 마음이 얼마만큼 커? 한번 여기에다 그려봐 봐. 그 정도 돼? 수한이는, 마음이 얼마만큼 크냐? 한번 그려봐 봐. 요만해? 이거보다는 커? 너 마음 네가 모르면 누가 아냐? 그런데 지금 요마만큼 마음이 요마만하다 하는 것은 지금 현재의 마음이 요마만 하다는 거지, 내일도 하면 요마만 해질 수도 있고 요만해질 수도 있지. 그지!

마음이 얼마만큼 열려있느냐에 따라서 살아가는 길이 좀 다릅니다. 마음이 안 열려가 있는 사람들은 절대 자기 견해하고 다른 것은 못 받아들일 거고, 마음이 좀 열려있는 사람들은 남이 나한테 싫은 소리를 해도 뭐 그려려니 하고 그냥 웃어넘기게 될 거라 그렇죠!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참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 삶을 좌우하는 부분이니까. 마음 크게 써질 거 같으면 큰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좁게 쓰고 작게 쓰면 항상 문제들은 따르게 돼있습니다.

내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이 사실은 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살아가는데 마음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내 마음이 이마만하다 해갖고 쥐뿔도 아무것도 없으면 먹을 것도 없으면 어때요? 대게 곤란을 당하죠.

살아가는 질은 꼭 마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닙니다. 물질적인 것도 어느 정도 갖춰져야 되고, 그런데다가 마음까지 갖춰지고 하면 더 좋죠. 그렇죠! 두 가지 다 좌우를 하기는 하는데, 그런데 이제 스님들이 보는 물질적인 거하고 여러분들이 보는 물질적인 거하고는 조금 차이가 나죠!

여러분들은 만약에 예를 들어서 음식이다 할 것 같으면 음식은 맛있다, 맛없다 하고 판단을 하는데, 스님들은 음식을 볼 때는 그냥 몸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써 생각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맛있고 맛없고 하는 거는 전혀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영양분이 많고 적고 하는 것도 크게 좌우를 받지지 않는 거죠. 단지 내가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이 몸을 유지해야 되니까,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들을 합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은 음식뿐 아니라 여러 가지도 출가자들과 일반 재가자들이 보는 입장은 조금 다를 겁니다. 스님들은 돈 요만큼만 있어도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요마만큼 있을 거 같으면 못 삽니다. 당장 아이들 학비조차도 안 되는 돈 가지고 살 수가 없죠. 물론 그것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물질적인 것으로 인해서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죠!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해가지고 그 사람이 행복하다는 얘기를 못 하는 거고, 적게 가졌다고 해도 불행하다고 얘기를 못 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바로 물질적인 것도 필요하지만은 정신적인 것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님뿐 아니라 부처님도 그거를 어쩌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물질적인 걸 갖춰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물론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아가는가, 바르게 살아가다 보면 물질적인 것도 갖춰지기도 하겠죠. 그것은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이지 돈 잘 버는 방법이라든지, 또 부유롭게 살아가는 것들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마음을 좀 부유롭게 만드는 것들은 틀림없이 부처님이 얘기를 해놨을 겁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물질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물질적인 것 가지고 행복의 지수가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인 것들은 갖춰지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해야 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을 더 갖추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 마음의 부분을 자꾸 갖추도록 해야 되는 것이 기본적인 바탕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일이 풀려나가지 물질적인 것만 계속 갖추다가 나중에 나이들어가지고 정신적인 부분도 뭐 수행이든지 뭐든지 아니면 보시 많이 하든지 해서 갖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이미 틀려버립니다. 안 됩니다 그거는.

 

지금 만약에 아껴서 쓸 거 같으면 크게 무리가 없다 할 것 같으면 너무 물질적인 것에 연연해하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내 것이 없어지든 아니면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든 뭐 그런데 전혀 마음을 두지말아라 하는 겁니다. 그 대신에 정신적인 부분, 마음의 부분은 반드시 생각들을 조금 고쳐갈 필요성은 있다 하는 겁니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그것이 더 많아지고 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행복해지려고 그러는 거라. 내가 잘살기 위해서는 잘살면 내가 행복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대접받으니까 행복하고. 물질적인 것에 쪼들리지 않으니까 행복한 거고. 그리고 마음이 여유로워지니까 행복한 거고.

그래서 '모든 생명들은 항상 행복을 바란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모든 생명들! 여러분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생명은 꼭 마찬가집니다.

 

행복하기 위한 측면에는 두 가지 측면이 반드시 따라야 됩니다.

물질적인 측면하고, 정신적인 측면하고.

행복하다고 느낄 땐 언제 행복할까? 맛있는 거 먹고 나면 행복하다, 물질적인 것으로 인해서 행복해진다. 그 행복은 어떻게 온 거라? 물질로 인해서 왔지만 물질로 인해서 일어나는 접촉, 맛있는 걸 먹음으로 인해서 그 접촉으로 인해서 ‘맛있다’ 하는 느낌이 오게 되는 거라. 접촉으로 인해서 느낌이 와서 행복해지게 되는 거라.

그런데 맛있는 거 먹는다고 먹었는데 누가 그게 뱀고기다 할 것 같으면 똑같은 접촉이 있었는데도 굉장히 찝찝해져 버립니다. 그걸 몰랐을 때는 아주 행복했는데.

 

접촉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이 행복을 가져오기도 하고 또는 마음의 불편함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 부분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이 행복하다는 것이 일어나는 것은, 또는 불쾌하다는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다른 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물질적인 것으로 인한 것이든 정신적인 것으로 인한 것이든 뭐든지 마음에서 일어나게 돼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항상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이왕 먹는 거 맛있다고 먹고 행복하다고 먹는 게 낫지 찜찜하고 불쾌하다 하고 먹는 것이 낫지는 않을 겁니다. 누구든지. 왜? 누구든지 모든 생명은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동일한 자극에 따라서 이렇게 우리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제각각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사실은 출발을 하게끔 됩니다.

 

찜찜하게 느꼈을 때는 틀림없이 그 마음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든지, 그리고 내가 그것에 대해서 증오감이 일어난다든지, 이런 마음이 일어났을 때 찜찜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행복한 마음을 느끼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서, 접촉으로 인해서 오는 느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이 부드럽다든지 아니면 맛있다든지 이런 것으로 인해서 행복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마음은 어떤 면에서는 결정된 것은 없습니다. 결정된 것은.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어디로 튈지를 모릅니다.

탁구공하고 똑같습니다. 뭔가 다른 자극이 탁 주어지면 요리 튀고,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또 저리 튀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종잡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 종잡을 수가 없는 거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 마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요놈이 내가 원하는 방향, 행복하기 위한 방향 쪽으로만 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거라.

그런데 이걸 그쪽 방향으로 못 가는 것은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렇게 잡아주는 노력을 안 하기 때문에 그럽니다.

마음은 항상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고 봐야 됩니다.

행복하냐, 불행하냐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위리야(vīriya)' 노력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알라시양(ālasiyaṁ)'이라 해서 게으름피우고 있느냐 두 가지에 따라서 불행하기도 하고 또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이렇게 되게 됩니다.

 

마음에서 탐·진·치가 일어났을 때는 불행한 방향으로 넘어가게끔 됩니다.

그런데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선한 방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마음이 되도록이면 선한 마음이 자꾸 일어나도록 그렇게 만들어야 됩니다. 탐심이 일어나서 좋은 거 하나도 없습니다. 화가 일어나서 좋은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내가 자비로운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수행하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이익들을 주게끔 됩니다.

 

그 노력들을 하는 시점,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서 선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 게을러지면 악한 마음도 일어납니다.

? 우리 마음은 항상 나쁜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추가 가만히 요렇게 멈춰서 있으면 참 좋은데 이때까지 여러분들은 습관지어진 것들이 항상 나쁜 쪽이 많아요. 그거는 누구도 부정 못합니다. 습관지어진 쪽으로 기울어지게 돼있는 거라.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돼? 자꾸 나쁜 쪽으로 기울어져!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거라.

 

그걸 잡아주는 역할들을 할 수 있는 게 뭐냐면 분명하게 지금 내가 이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 하는 걸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어! 내가 욕심부리고 있네’ 하고 알아차릴 거 같으면 욕심 안 부린다는 거라. 그게 나쁜 거고 나에게 불행을 가져온다는 거를 알기 때문에. 그럼 ‘어! 내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네’. 그러면 ‘어! 내가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내가 참 좋은 방향으로 가는구나’ 해서 더 하려고 하게 되는 거고.

 

습관지어진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많이 습관지어졌을 거 같으면 더욱더 노력을 해야 되는 거고, 적게 습관지어졌을 거 같으면 조금 노력을 해도 그래도 바로 잡아진다는 거라. 그게 마음이라고 하는 성질입니다.

 

그런 마음은 세 가지로 구성돼있습니다.

마음 본 사람 있어? 여기 거울이 있습니다. 그럼 여기 앞에 태집님이 이 거울을 보고 있다, 그럼 어떻게 돼요? 태집님 모습이 이 거울에 딱 투영이 되겠죠? 투영이 된단 말이라. 그러면 내가 이 거울을 보고 있어도 태집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음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존재하는 것들이 거울을 통해서 투영이 되는 상황.

 

투영만 되더라도 내가 안 보면 어떻게 돼요? 투영이 돼있는지 안 되어있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거울을 인식을 하면서 태집님 모습을 내가 분명하게 인지하게끔 됩니다.

투영된 것과 인식하는 건 분명히 다르죠! 이거 수행에서 구분할 수 있어요? 안돼요? 이걸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걸 구분할 줄 알면 수행은, 이미 그 사람은 어느 정도 수행의 경지의 도와 과에 이르른 상태라. 마음에 대한 관찰을 가르쳐주는 것은 이것을 구분하는 법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이것만 이뤄진 게 아니죠! 쉽게 얘기하면 내가 눈을 감고 있어도, 이 거울을 통하지 않아도, 이미 태집님의 모습을 내가 그릴 수가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도 있죠! 그거는 뭡니까? 이 마음이 습관되어져 가지고 이미 많이 태집님 모습 봐왔기 때문에 눈을 감고있어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한 번만 이렇게 탁 봐도 그 모습이 그대로 영상으로 거울에 비치듯이 내 마음의 영상에 딱 맺히게끔 됩니다. 지금 있는 거울을 보지 않더라도.

기억하고 저장하는 기능들도 합니다.

 

마음은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크게 나눠가지고.

투영하는 기능, 인식하는 기능, 그리고 기억하는 기능.

그런데 수행에서 이걸 구분을 할 줄 알아야 되는데 참 어렵습니다.

 

자! 한번 봅시다.

첫 번째 거울에 비쳐지는 기능을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스님 소리 들리죠? 스님 소리는 여러분들 귀를 통해서 소리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 진동이 귀를 통해서 들어오게 됩니다. 그럼 거울하고 귀가 똑같죠! 이거는 그런 받아들이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기능에서 여러분들이 이 소리 들리는 걸 분명하게 알죠! 그러니까 여러분들 지금 스님 소리를 들을 거 아닙니까!

그럼 받아들이는 기능하고 내가 그것을 아는 기능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구분이 안 됩니까? 음, 지금은 안 될 수밖에 없겠지.

 

그러면은 그걸 아는 기능하고 기억하는 기능하고는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건 어떻게 구분해요? 지금 스님이 '거울이 있다' 하고 얘기했을 때 '거' 라는 소리 듣는 거하고 '울' 하고 소리 듣는 거하고 분명히 받아들이고 그걸 아는 기능은 똑같습니다. 그리고 기억하는 기능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거'라고만 알고 '울'이라고만 알고 하는데, 어떤 때는 기억하는 기능이 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거울이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까지 다 알게끔 됩니다.

 

혹시 그런 때 있었어요? 멍청해져 있으면 그 소리를 분명히 듣고 있는데 뭔 소린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내가 마음이 거기에 기울여져 있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뭔 소리 하는지를 알아듣습니다. 그거는 구분이 되죠!

받아들여 가지고 알아차리는 기능하고, 기억하는 기능은 이렇게 다릅니다.

얼마만큼 알아차리는 기능이 유지돼 나가느냐 거기서 좌우되어집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기능하고 아는 기능하고는 여러분들이 지금 구분을 못합니다. 거는 왜 그럴까? 이걸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지금 여러분들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는 분명하게 구분이 되죠!

마음은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을 때까지 알아차리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보통 우리는 '받아들였을 때는 의(意)와 식(識)이 합쳐진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태집님 모습이 여기 거울에 '탁 맺혀지는 것', 이걸 보통 '마노(mano)'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거울이 이 태집님 모습을 딱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 거울에 모습이 착 비쳐지게 됩니다. 그걸 '반영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뒤에 걸 쉽게 말하면 '윈냐냐(vinñāṇa)'라고 그럽니다.

'마노' 하고 '윈냐나'가 합쳐진 걸 '의(意)와 식(識)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받아들여서 거기에 딱 맺혔다는 얘깁니다. 그냥 받아만 들여가 있는게 아니고 거기에 딱 맺혀진다는 겁니다.

이게 마음의 첫 번째 기능입니다.

 

어떤 것이든 여러분들이 정상적인 귀를 가지고 있고, 코를 가지고 있고, 입을 가지고 있으면 받아들여서 딱 맺혀지게 돼있습니다. 거기에 반영되게끔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걸 가지고 맛있다고 얘기하는 거고, 보인다고 얘기하는 거고, 들린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걸 받아만 탁 들여놔놓으면 예를 들어서, 보면 어떻게 돼요? 내가 보는 게 아니고 보여지게끔 돼있죠! 왜? 와서 탁 맺혀지니까! 내가 눈이 태집님한테 쏙 빼어가지고 저리 가는 게 아니잖아요?

눈은 그대로 있는데 저 모습이 나한테 와서 탁 맺혀지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게 아니고 보여지는 겁니다. 저 모습이 나한테 보여지는 겁니다. 그렇게 자꾸 이해를 해야 됩니다.

 

뭐든지 들려지고 보여지고 한다고 여겨야 되는 것이지 내가 본다고, 내가 듣는다고 생각해버리면 이미 왜곡돼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받아들이는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나는 가만히 있는데 외부적인 자극이나 이런 것들이 와서 자꾸 나를 치는 거라. 나를 쳐가지고 나를 좀 봐주시오, 들어주시오 하고 그냥 때리는 역할들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때릴 때 우리는 그걸 가지고 '귀찮다' 할 때도 있고, '아이고 좋다' 할 때도 있다는 거라.

 

그때 뭐냐면 마음에 또 다른 마음이 일어나집니다. 그게 '좋은 마음이나, 싫은 마음'이나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아는 겁니다.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좋은 마음을 아는 거고, 싫은 마음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알아차릴 때 좋은 마음일 때는 '어, 좋은 마음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거고, 싫은 마음일 때는 '싫은 마음이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자! 그렇게 분명하게 받아들이는 기능과 그것을 아는 기능은 구분돼 있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또한 그것이 기억되는 기능도 분명하게 다르다 하는 것들을 알도록 해야 됩니다.

 

자! 그럼 중요한 거는 뭐냐면 밖의 것이 와서 내한테 부딪치는 거니까, 내가 일단 육근(六根)을 가지고 있으면 처음에 받아들이는 기능, 그거는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오지 마라 한다 해가지고 안 오는 것도 아니고 그걸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단지 할 수 있는 거는 뭡니까? 그것을 아는 기능, 그것을 기억하는 기능은 얼마든지 바꾸어나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수행의 포인트는 여깁니다.

 

그래서 안 들을려고 할 필요도 없고 안 듣는다고 안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저기 수행한답시고 저기 소리도 안 들리는 무문관 가서 한다는 것은 이미 수행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거라. 수행하기 위해서 여기 선원에 와서 조용한 데서만 하려고 한다. 그것도 이미 방향을 잘못 잡은 거라.

첫 번째 것을 내가 컨트롤해서도 안 되고, 컨트롤한다 해서 컨트롤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계속 그렇게 살 거 같으면 몰라도 그렇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두 번째 거, 그다음에 세 번째 거 이것들로 가지고 수행들을 하면 됩니다.

 

두 번째 거, '알아차리는 기능'에서 '짧은 순간에 정보가 와서 탁 맺혀지고 그것을 아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참 그냥 알기만 하면 참 좋은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어린애들은요 눈에 보이면 그냥 눈에 보이는 거만 압니다. 아직 물이 안 들어가지고. 쉽게 말하면 때가 안 묻어가지고.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눈에 선풍기가 보이면 그냥 선풍기가 보이기 때문에 그걸 만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선풍기에 손 안 넣죠! 거기 넣으면 손 다치니까. 어른들은 그걸 볼 때 이미 거기에 막이 탁 씌어버리게 됩니다. 이때까지 습관되어온 것들이 거기에 결합을 딱 하게끔 됩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거라.

 

인식하는, 알아차리는 기능에도 이렇게 과거의 습관들이나 기억들이 탁 결합이 돼버릴 거 같으면 그걸 똑바로 못 보게 됩니다.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게 되는 거라. 그러면 알아차리는 기능에서도 되도록이면 이 기능을 벗겨내는 작업들을 해야 됩니다.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것이 덧칠이 되어 나가지느냐?

보통 그걸 우리는 보통 탐··치로써 그렇게 본다고 합니다. 보면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욕심을 내서 보게 되고, 화를 내서 보게 되고 그리고 선입견을 가지고, 편견을 가지고 보게끔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아이가 있으니까, 내 아이가 옆에 있단 말입니다.

만약에 지금 공부 안 하고 있다, 그럼 엄마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공부 안 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똑같은 아이가 옆에 있는데 내 하고는 전혀 무관한 애야. 그런데 그 아이가 공부 안하고 있어도 내 아이를 보는 마음으로는 안 일어납니다. 무덤덤하게 그냥 봅니다.

나하고 관계있는 사람을 볼 때는 뭔가 끼인 상태에서 보게끔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 남편이 12시 돼서 집에 안 들어오면 성질부립니다. 그런데 넘의 집 남편이 12시 돼서 안 들어와도 들어오든 말든 뭐 나하고 뭔 관계냐 하고 놔둬버립니다. 꼭 그와 같습니다.

 

'나'라고 하는 관념이 결합이 되게 되면, 끼이게 되면 그것은 반드시 막을 씌우게 된다는 거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는 거라. 알아차리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려고 할 것 같으면 이 작업을 해야 됩니다.

''라고 하는 것. '견해'를 반드시 떨쳐내 버려야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문제가 뭐냐면 과거의 기억들이 덧칠을 하게 됩니다. 볼 때.

과거에 저 사람이 심하게 나한테 나쁜 짓을 한 사람이다. 그러면 십 년이 지나고 나서 그 사람을 탁 봤을 때 그 기억이 덧칠이 되어져가지고 이 사람을 지금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을 그때와 겹쳐가지고 보게끔 됩니다. 그러니까 나쁜 상태로써 그냥 보게끔 됩니다.

과거 없앨 수 있습니까? 과거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미 지은 것이기 때문에 그걸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업장소멸하면 되지 하고 얘기했지만 불교에서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소멸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자기가 지은 것들은 그거는 어쩌지를 못합니다. 단지 안 드러나게끔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들 이것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과거가 지금 현재 내가 알아차리는데 덧칠을 할 경우에는 뭐를 가지고 이걸 갖다가 바르게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의 힘으로써만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얼마만큼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져 버립니다. 예를 들어가지고 과거에 그런 나쁜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태집님을 십 년 뒤에 탁 봤는데도 그 기억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내가 강하게 다른 것에다가 탁 집중하고 있을 거 같으면 과거의 기억은 나에게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지 못합니다.

 

왜? 마음이 다른 것에다 딱 묶여져 있으니까. 아무리 강한 과거의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여러 군데서 침투하려고 하더라도, 마음이 딱 오롯하게 한 곳에 딱 묶여져 있을 거 같으면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화두 두는 사람들은 화두에 딱 마음을 갖다가 집중하고 있을 거 같으면 다른 것들이 침투하지 못하는 거라.

과거의 기억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다하더라도,

그것을 왜곡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있다는 거라. 강한 집중력으로.

 

수행은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하는 방법,

그 다음에 집중하는 방법.

이 두 개를 얼마만큼 잘 조화롭게 쓰느냐, 그것에 따라서 수행의 깊이는 달라지게끔 됩니다.

 

자!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먼저 얘기를 하겠습니다.

첫 번째, 구속당하지 말아라.

마음에서 구속당하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십 년 전에 일을 아직도 끌고 가지고 있을 거 같으면 십 년간 구속당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비슷한 상황만 되어도 그게 떠오르니까. 특히 여자들 그런 거 많죠. 구속당해 버리는 겁니다. 그냥 거기에 구속당하고 사는 거라. 십 년을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할 것 같으면 십 년간 구속당해버리는 겁니다. 왜 그렇게 살아? 여러분들 목줄 매 놔놓고 밥은 주겠지만 개집에다 딱 묶어놔 놓으면, 그 얼마나 답답해? 그 마음을 자유롭게 흘러가도록 놔두지를 못하고 꼭 묶여져 있으면. 절대 구속당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지금 현재 만약에 나에게 나쁜 과거의 일들로 인해서 그것이 탁 떠오른다 하더라도 항상 마음을 그렇게 해야 됩니다. '내가 여기에 구속당하지 말자!' 해서 그것들 떨쳐버려요. 그냥 놓아버려요. 그럼 구속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 강하게 집중할 수밖에 없는 거라. 내가 지금 현재의 대상에 집중하도록 하라는 거라.

연경이, 잘하는 거 있지? 흰 원에다가 마음을 집중하는 것. 과거의 일들에 구속당하지 않으려면 수행의 대상,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분명하게 집중 하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거기에 구속당하지 않는 거라. 비슷한 것이 떠오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또 떠오르게 됩니다. 갖가지 것들이 여러분들을 구속하지 않게끔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행위 짓는 것들을 그런 방향으로 넘어가지 않게끔 만들어야 됩니다.

아무리 부부간이라고 하더라도 싸움박질 할 때는요 한 시간 이상 안 갑니다. 지쳐버리기 때문에. 막 물건을 집어던지고 뭘 어쩌고 저쩌고 하더라도 한 시간이면 게임은 끝나버립니다. 요즘은 그것도 안 가겠지 뭐. 어쨌든 실제적인 싸움은 한 시간밖에 안 했는데 이놈의 거 그거 기억이나 이런 것들은 십 년을 가지고 가는 거라. 왜 그래야 하느냐는 거라. 그냥 한 시간 해서 끝내라는 거라. 한 시간 해서.

 

보통 이렇게 하는 것들을 보통 뭐라고 그러냐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을 붙잡고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실제 존재하지 않는 거라. 그 비슷한 상황으로 인해서 그런 생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지금 현재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겁니다. 허깨비를 붙잡고 있는 거라. 왜 허깨비를 뭐 하러 붙잡고 있느냐는 거라. 반드시 구속당하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마음에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되는 것은, 거품 제.

여러분들 거품 많죠? 자기 있는 거는 이만큼 되는데 남한테 보이고 싶은 것은 요만큼 보이고 싶고, 집에 재산은 요만큼 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들 볼 때는 요마만큼 있는 것처럼 보이게끔 하려고 하고.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마음도 항상 거품이 있습니다. 그 거품을 반드시 제거를 해야 됩니다.

 

그 거품을 어떻게 제거할까? 있는 그대로 그냥 드러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속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려하고. 남을 속이는 거고. 속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있는 그대로 그냥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다 해가지고 완전하게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거품이.

 

그럼 그 거품을 완전하게 빼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될까?

스펀지에 이렇게 물이 탁 묻으면 스펀지에 물이 완전히 스며들게 됩니다. 이 물을 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꽉 짜야 됩니다. 꽉 짜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이게 빠지지 않습니다.

수행에서 꽉 짜야 된다는 것은 뭐냐면, 하나의 대상에 집중을 한다는 겁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면은 적어도 거품 없이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할 것 같으면 그 대상에 집중해야 됩니다. 하나의 대상에. 그래야만이 스펀지를 꽉 쪼이게 됩니다.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압력이 세지기 때문에,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그 물은 빠져나오게 됩니다.

 

수행에서 집중의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내가 지금 거품으로써 보고 있는 것들은 빠져나오고,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됩니다. 반드시 집중력을 자꾸 키워주도록 해야 됩니다. 안 되면 자꾸 마음을 돌아와야 됩니다.

흰 타원을 보는 집중을 하는데 이게 잘 안되고 마음이 벗어나면, 또 잡아오고 또 잡아오고 하더라도 어쨌든 이것이 오롯하게 되도록 자꾸 잡아와야 됩니다.

집중력을 키워주라는 거라.

그냥 흐릿하게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그냥 내내 놀다가 와가지고 한 순간 잠깐 흰점 하나 보고, 또 한참 도망 다니고 있는 걸 잡아올 생각을 안 하고 있다가 또 한 번 흰점 보고. 그래 가지고는 절대 집중력 안 커집니다.

 

반드시 이게 오롯하게 그냥 변하지 않도록 될 때까지 자꾸 잡아와야 됩니다. 마음 자꾸 도망가니까 그거 어쩔 수가 없어. 자꾸 잡아오는 수밖에 없는 거라. 빨리 알아차리고, 빨리 알아차리고, 얼마만큼 빨리 잡아오느냐는 거라.

일 초라도 빨리 잡아올 수 있는 것, 그것은 집중할 때는 분명하게 알아차림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 집중을 유지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냥 집중만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흐리멍텅하게 할 것 같으면 알아차림이 없어져 버립니다. 그럼 집중력도 깨져버립니다.

그래서 반드시 자꾸 잡아오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마음을 알아차리는데 꼭 해야 될 것은 휴식을 취하는 법입니다.

몸도 좀 쉬어야 되고 마음도 좀 쉬어야 됩니다. 수행 재미없죠? 수행은 재미없는 겁니다. 재미없는데도 놀이 삼아 해야 된다는겁니다. 놀이 삼아. '안된다'고 할 것 같으면 수행 안 됩니다. '수행은 잘 안 되는 것이다' 하고 자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휴식을, 마음의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수행할 때 어떻게 휴식을 취할까? 몸은 휴식 취하려면 여러분들 휴식 취하는 방법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릴랙스 하게 만들어주는 거죠! 몸을 휴식 취하게 하는 건 릴랙스 하게 해주는 겁니다. 뭐 강하게 몸을 트레이닝을 시키는 게 릴랙스 하게 하는 게 아닙니다. 휴식을 취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쉬도록 해주는 겁니다.

마음도 마찬가집니다. 쉬도록 할 공간을 주어야 됩니다.

 

수행에서 휴식을 취하는 공간은 뭐냐면 '주대상'입니다.

주대상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걸어갈 때 주대상은 뭡니까? 발바닥에서 일어나는 느낌입니다. 앉아서 좌선할 때 주대상은 뭡니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거를 알아차리는 겁니다.

배가 주대상이고 발바닥이 주대상입니다. 주대상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배를 알아차리고 있더라도 마음을 알아차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꾸 움직이다 보면 어떻게 돼요?

굉장히 피곤해져 버립니다. 그러면 마음이 와서 쉬어야 됩니다. 어디 와서? 주대상에서. 호흡에서 쉴 수 있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주대상에 자꾸 들어오는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무조건 어떤 것이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라 해서 자꾸 바쁘게 마음이 알아차리는 쪽으로만 훈련을 할 것 같으면 피곤해져 버립니다.

수행을 지속해 나가지 못합니다. 반드시 주대상을 까먹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마음에서 오는 스트레스, 마음에서 오는 긴장들을 덜어나갈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게 주 포인트입니다.

이것만 잊어버리지 않으면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건 수월해집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탐욕도 일어나고, 성냄도 일어나고, 그런 것만 있을 거 같아요? 탐욕이 없는 상태의 마음도 일어나지는 거고, 성냄이 없는 상태의 마음 상태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들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것들도 알아차릴 대상으로써 받아들여야 됩니다.

대부분은 보면 탐·진·치는 알아차릴 대상, 그 마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생각하는데, 탐·진·치가 없는 상태의 마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안 여깁니다. 오히려 즐길 대상으로 여겨버립니다.

탐심이 없다, 탐심이 없는 상태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해서 나아가야만이 수행이 진척이 있게끔 됩니다.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돼요? 업을 짓지 않아야 되겠죠.

업을 짓는 거는 악한 업만 업입니까? 아니죠! 선한 업도 업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라고 하는 선한 업을 지었다. 그거는 뭐 윤회하는 업을 지은 건 아닙니까? 마찬가집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악한 업을 짓는 거보다는 선한 업을 짓는 것이 낫죠! 그리해도 윤회하는 데는 꼭 마찬가집니다. 단지 좀 더 좋은 윤회를 할 수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면은 수행에서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리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탐·진·치의 마음도 알아차릴 대상일 뿐만 아니라, 탐·진·치가 없는 마음의 상태도 알아차릴 대상으로 생각을 해야 됩니다.

 

대념처경에서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여덟 가지로 그렇게 구분을 해놨습니다.

탐심이 있는 마음, 탐심이 없는 마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다음 시간부터는 탐심부터 하나씩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