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대념처경 법문

아짠 빤냐와로 스님의 대념처경 법문 20강. 심념처 3- 성냄이 있는 마음, 성냄이 없는 마음

담마마-마까 2019. 6. 5. 10:25

https://youtu.be/E_8apc__jpE

20강. 심념처 3- 성냄이 있는 마음, 성냄이 없는 마음 (20120217)

 

오늘은 '성냄이 있는 마음에 대한 것' '성냄이 없는 마음에 대한 것'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스님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화를 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도 화를 낼 경우에는 승려로서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여기에 화를 낸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벌컥 화를 내는 것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을 가지는 것도 해당이 되고, 남을 비방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해당이 되고, 이런 사소한 것들이 다 해당이 됩니다. 그런 마음들이 있다고 다른 스님들이 판단 할 경우에는 그 스님에게 다른 직책을 주지 않습니다.

 

대부분 스님들의 직책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주지가 있고, 총무가 있고, 재무가 있고 이렇게 하는데 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절을 맡아 있는 주지가 있고, 총무 재무가 있고, 그다음에 지객스님도 있고, 다 있는데 요즘 말로 하면 절에서는 3직, 5직 이렇게 얘기하죠.

그 직책에 들어갈 때의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게 있습니다.

보통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이 스님이 평소에 화를 내는가, 안 내는가" 쉽게 말하면 어떤 일을 행하고 판단할 때 공정하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점입니다. 화를 낸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들을 일으켰을 때 화를 내게 됩니다. 그래서 화를 냈을 경우에는 어떤 직책도 주지 않습니다.

 

또 스님이 은사를 정하고 그 스님 밑에서 '아! 수행을 해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었을 때도 이 부분이 굉장히 좌우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데 밑에서 엄마 따라 아빠 따라온 아이들이 떠들고 놀고 있으니까 이 스님이 제재를 합니다. “애들아, 여기서 사람들이 수행을 하니까 좀 조용히 해라. 다른데 가서 조금 놀아라”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도 아이들이 그 말을 듣습니까? 엄마 아빠 있는데 가까이에서 놀려고 그러고, 처음에는 잠깐 조용히 하다가도 또 떠들게 됩니다.

 

경행을 하면서 자리에서 그대로 서서 똑같이 “애들아, 수행을 하니까 조용히 하거라” 하고 얘기를 하고 다시 또 경행을 계속합니다. 아이들은 잠시 조용했다가 또 떠들어. 한 시간이 너머 되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그 말을 반복을 하는데 “애들아, 수행중이니까 조용히 하거라” 하는 말을 반복을 하는데, 처음 말하는 톤 하고 마지막에 말하는 톤이 똑같습니다.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똑같은 어투로 애들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은 그대로 가지고 있고, 수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배려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고, 그러면서 자기자신의 마음도 보호를 하면서 그대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게 성냄이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여러분도 그리할 수 있습니까? 아마 몇 번 말하기도 전에 입에서 거친 말들이 나오고 당장 쫓아내려가 가지고 애들을 저 멀리 쫓아 보내든지 아니면 막 손이 올라갈 겁니다.

 

그것이 여기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에서

세 번째 부분에 해당되는 '사도사 찟따(sadosa citta)'라고 하는 것입니다.

접두사 '사(sa)'에 '도사(dosa)'가 있는건데, '도사'는 '성냄·분노·악의' 이런 뜻으로 쓰여집니다.

"성냄이나 분노, 악의, 두려움이 있는 마음들이 있을 때는 그것을 그대로 관찰하라" 하는 겁니다.

 

경전에는 성냄이라고 하는 것을 "뿌리에 독이 있는 것과 같다" 하고 합니다. 뿌리에 독이 있는데 잎에는 꿀이 발라져 있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먹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뿌리에 있는 독이 점차적으로 그 나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꿀의 달콤함에 취해서 먹었기는 먹었는데 결국에는 뿌리에 있는 성냄이라는 영향을 받게끔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달콤함을 위해서 그걸 취하려고 할 것 같으면 성냄이 일어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하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들의 이익만을 바라고 무엇인가를 할 것 같으면 성냄의 경향이 더욱 깊어질 수 있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가끔씩 부모들이 애들이 말을 안 들으면 혼냅니다. 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회초리를 들어서 때리기도 합니다. 간혹 그런 얘기를 듣습니다. “때리고 나면 마음이 후련하다” 하고 그럽니다.

왜 그럴까? 왜 때리고 나면 마음이 후련할까?

경전에 비유한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즐거움의 꼭지를 딴다고 하는 것이 성냄에 바탕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을 미워하고 성내는 것들은 또 다른 한편으로 자기 자신의 즐거움과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은 "내가 강한 독을 먹고 있다고 판단을 해라"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소변이라고 하는 것이 약으로 쓰였습니다.

그래서 소변을 가지고 아픈 환자들을 많이 치유를 했죠. 그런데 그 소변에 독이 있으면 어떻게 될까? 그걸 먹는 사람은 그 독으로 인해서 치명적으로 해를 입게 됩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내 자신에게 먼저 해를 입히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남이 하는 일에 대해서 설혹 그게 잘못된 거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거 틀렸어. 안돼!” 하고 얘기했을 경우에는 그 소변에 독을 섞는 것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대부분 그거는 많이 하죠? 많이 할 겁니다. 애들이 잘못했을 때는 “잘못했다”고 분명하게 나무라고, 나쁜 길로 갈 때는 “안된다”고 그렇게 얘기하고 할 겁니다. 그런데 그걸 왜 경전에서는 독이라고 얘기할까? 성냄은 그마만큼 사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뿐이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면서 한번 경험을 해 보십시오.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할 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각들이 있습니다. 성냄이 있을 경우에 어떤 감각들이 있을까?

아주 미세한 성냄이 있을 경우에는 어떤 감각들이 있을까?

압박감, 무엇이 꽉 조이는 것 같은 느낌들, 통증들, 뜨거움들, 맥박이 뛰는 것들, 어떤 곳들에서 볼록볼록하면서 튀어 오르는 느낌들, 배 어느 한 곳이 폭 수축하는 느낌들, 이런 느낌들을 아마 경험해 본 적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성냄이라고 하는 것들이, 호흡을 통해서 표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세하게 드러나는 것들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화가 많이 일어났을 때 내가 호흡하는 것을 한 번 보십시오.

굉장히 거칠죠! 거칠다는 것은 압니다. 맥박도 평상시보다 빨라지고, 그리고 뭔가 몸을 쥐어짜는 그런 느낌들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스님이 얘기했던 것들이 그대로 화가 많이 일어났을 때는 자기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세하게 일어났을 때는 이런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호흡할 때 분명하게 그런 것들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아주 고요하고 부드럽고 현상들이 빨리빨리 변하는 것들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아! 이런 것들은 성냄의 일종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몸의 반응이구나' 또는 '집착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몸의 반응이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자! 그런 성냄이 있을 때는 '성냄이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수행에서 알 수 있을까? 대상으로 알면 됩니다. 여러분들 나하고 잘 모르는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싸운다고 하더라도 별로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에 영향을 안 받죠! 자기들끼리 싸우든 말든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듯이 바라봅니다. 대상을 받아들일 때는 그렇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냄이 일어나는 것도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성냄이 '나'는 아니죠? 그때 당시 일어난 마음일 뿐입니다. 일어나는 마음은 내가 수행으로서 알아차려야 될 대상일 뿐입니다. 대상으로서 그걸 바라봐버릴 것 같으면 아주 쉬워져 버립니다.

호흡을 할 때도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죠! 이것이 '나의 배다' 하고 바라보는 것은 아니죠! 모양과 형태로서 배를 관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를 통해서 호흡이 일어나는 것, 이것을 대상으로서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화도 꼭 마찬가집니다. 내가 일으킨 화, '나의 화'가 아니라 일어난 대상으로서의 화로써 바라볼 것 같으면 수월해져버립니다. 어떤 경우든지 대상으로 그것을 바라볼 때 그것은 분명하게 변하는 속성들로써 내가 알게끔 됩니다.

아주 간단한 것은 화가 일어났을 때는 그것을 대상으로 바라보면 됩니다. 그게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그리 됩니까?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확 일어났고, 이미 손이 올라가 있는 상태가 되고 이런데 그게 잘 안되죠!

 

화가 일어났을 때 그걸 다스리는 방법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인내하는 것!

화가 일어난 것을 알 것 같으면 "참아라!"

그것이 잘한 것이든 잘못한 것이든 어떤 것이든 "인내하라!"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자애로운 마음으로 전환시켜라!"

키포인트는 이겁니다.

맨 처음에 해야 되는 것은 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야 되겠죠!

화가 일어나는 것조차도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골치 아파지는 거고,

그래서 "화가 일어난 것을 먼저 알고, 인내하고, 그 마음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체하도록 하라" 하는 것입니다.

 

화가 일어나는 것들은 알아차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들은 참 알아차리기 힘이 듭니다.

두려움도 성냄의 일종입니다.

뱀이 기어가고 있으면 내가 가까이 가면 어떻게 됩니까? 뱀은 머리를 탁 치켜듭니다. 왜 치켜듭니까? 사람이 나를 공격할까 봐, 해꼬지할까 봐 두렵기 때문에 내가 방어하기 위해서 탁 머리를 치켜드는 겁니다.

 

스님은 그 두려움을 참 많이 경험해 보았습니다.

1년차가 지나고 나면 아주 한적한 곳으로 가서 수행을 하라 그럽니다. '짜리따 수행'이라 해가지고 그걸 하라 그럽니다. 그러면 이때까지는 만날 선원에서만 수행을 하다가 거기 가서 혼자 수행하려면, 물론 선원하고 그렇게 많이 떨어져있지는 않습니다. 보통 1km 이내에 있는데도, 밤에 혼자 있을려면 굉장히 무섭습니다. 무슨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뭐가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고, 밤새 잠을 못 잡니다. 몇 날을 그렇게 시달리다 보면 나중에는 소리가 들려도 '뭐 그런가 보다' 별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때 탁 깨달은 것이 뭐냐면 '마음의 두려움'이라는 것!

나중에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데, 그것을 내가 두렵다고 생각을 하니까 자꾸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게끔 되는 거라. 내가 뭐하러 이러고 있느냐는 거라. 밤에 잠도 못 자면서. 나중에는 실제 동물이 나타나도 두려워하지 않아. 없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 뭔가가 나타나도 그 대상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거라. 빤히 바라보고 있어요. 뱀이 몸 위로 기어가도 그냥 그거 바라보고 있는 거라. 그러면 지가 그냥 기어가 버려. 전혀 해꼬지 하지 않고. 그렇게 바뀌게 되더라고.

 

그러면서 두려움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을 해봤습니다.

'왜 이런 두려움이 일어나는가' '아직 성냄이라는 것이 완전하게 뿌리를 잘라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실패할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서 걱정하고, 이런 것들은 전부다 '성냄의 일종이다' 하고 판단을 해야됩니다.

 

두려움이 일어났을 때는 두려움을 몸으로 느끼도록 자꾸 해야 합니다.

특히 수행을 할 경우에는! 예를 들어봅시다. '일어남, 사라짐' 하고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생각이든 아니면 눈을 뜨고 있는 상태에서 뭔가를 봤든 뭔가가 휙 지나가는 것을 밤에 보았다고 합시다. 그때 이 배의 상태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알아차려지게 될까?

 

두려울 때 배를 알아차려 본 적 있어요? 배를 뭔가 꽉 잡는 듯합니다.

다른 경우에는 항상 그렇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배에 뭔가 나비 같은 것이 막 돌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느낌이 듭니다. 두려움은 그런 형태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배를 관찰할 때 무언가가 배를 꽉 조이는 느낌이나 배에서 나비 같은 것이 휙 휘젓고 다니는 느낌들이 있다면 '아! 이것은 두려움이구나' 하고 알아야 됩니다.

 

일상적으로 수행할 때도 그런 느낌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 이것은 두려움의 일종으로서 배가 이렇게 변하는구나' 하고 대상으로서만 받아들여버릴 것 같으면 금방 그런 현상도 없어져버리고, 두려움도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실제 두려움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짜 보잘것없는 것들입니다.

화를 다스리는데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것이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들입니다.

 

스리랑카에 있을 때 그랬어요.

스님들이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운전기사가 운전을 하고, 나는 그 옆 좌석에 앉아있었습니다. 누가 저쪽에서 자전거를 타고 갑자기 튀어나와가지고 달리는 차에 탁 부딪쳤어요. 부딪쳐가지고 유리창에 탁 맞아가지고 이쪽 저쪽으로 탁 떨어집니다.

내가 두려워했을 것 같으면 핸들을 갑자기 확 꺾었다든지 아니면 그 사람이 어떻게 부딪치고 어떻게 떨어졌다는 것들의 반응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그냥 그대로 핸들을 잘못 꺾었을 경우에는 떨어진 사람을 다시 또 짓밟을 수가 있습니다. 실제 우리 운전사는 겁이 나가지고 탁 하고 부딪치니까 갑자기 핸들을 탁 꺽어.

그래서 내가 핸들을 바로 탁 잡아챈 거라. 그게 보이는 거라. 그게 탁 부딪치고 다시 유리창에 탁 부딪치고 넘어가면서 이쪽 한쪽으로 탁 떨어지는 게,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지만, 두려움이 없을 거 같으면 그것을 그냥 그대로 보면서 대처를 해나갈 수 있는 거라.

 

자! 그런 것이 보통 '성냄이 있는 마음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왜 성냄이 일어나는가?

첫 번째 왜 성질이 나요? 여러분들 경우 한 번 보십시오.

세상의 여덟 가지 법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세간팔법 : 이익·손해, 칭찬·비난, 명예·불명예, 즐거움·괴로움)

내가 이익을 취하려고 할 경우, 내 명예가 깍아지는 경우가 될 때, 나를 좀 잘 봐주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않을 때, 내 재산에 손해가 날 때, 이런 경우에는 틀림없이 성질이 나게 됩니다.

누가 나를 욕했다, 화를 냅니다. 누가 내 것을 뺏어가 버렸다, 화를 냅니다. 내 물건을 잃어버렸다, 화가 납니다. 그리고 내 명예를 더럽혔다, 화를 낸다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 보면 그러한 것들은 여러분들이 크게 영향을 안 받아도 될 것들입니다. 재산도 있다가 사라지게 되는 건 여러분들이 더 잘 압니다. 명예도 마찬가지고, 자신의 이익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들이 그렇게 붙잡을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거 그냥 조금 손해 보면 화를 낸다는 거라. 그러지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것을 '세간팔법'이라고 얘기했을까?

참 비열한 사람들, 열등한 사람들이나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간법'이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수행하는 사람이면 그것에 그렇게 영향 받지마. 그것에 영향을 안 받으면 실제로 여러분들이 화낼 일은 별로 그리 없습니다. '그거 뭐 그러려니' 하고 하다 보면 다시 또 잃어버린 것도 찾게 되는 거고 그런 것이지, 그것에 영향을 받지 말아라는 거라.

성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제일 첫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여덟 가지 세간법들'입니다. 여러분들은 크게 영향을 받지 마십시오. 마음을 그렇게 먹으십시오.

 

두 번째는 감각적인 욕망들입니다.

감각적인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성내는 버릇들이 더 강해집니다. 뭔가 맛있는 것을 많이 먹으려 하고, 맛있는 것만 맨날 찾아다니려 하고, 아름다운 여자 잘생긴 남자만 보면 확 안아보고 싶고 이런 마음들이 들고, 예쁜 것을 보면 내가 가지고 싶어 하고, 그런 감각적인 것들에 자꾸 빠져들게 되면 성내는 버릇들도 더 커져 버립니다. 나이 든 사람들은 감각적인 욕망 별로 없죠? 그래서 성도 잘 안냅니다.

 

적어도 수행자들은 가장 먼저 탈피해야 되는 것이 감각적인 욕망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미칠 수 있는 것은 성내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이 가장 먼저 갖춰야 되는 것이 성내는 버릇들을 들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감각적인 욕망들을 자꾸 줄이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성내는 것들도 줄어들어 갑니다.

 

그다음 질투하는 것, 그리고 인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냄의 직접적인 원인들입니다.

 

그러면 성내게 되는 것들을 바르게 치료하고 또 성내는 버릇들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될까요?

아까 뭐라고 그랬어요? 성냄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인내하고 그다음에 뭐 하라고 그랬어요? 자애의 마음을 가져라! 치료하려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까 성냄이 일어났을 때 호흡의 상태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렇게 세밀하게 알아차리지 못해도 적어도 성내고 있으면 '아, 내가 성질났구나' 하는 정도는 분명하게 알도록 먼저 하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인내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겠지.

혀를 꽉 깨물고 있든지, 손을 꽉 쥐고 있든지, 일체 말을 하지 않든지, 움직이지 않고 땅바닥에 달라붙은 듯이 잠시 동안이라도 가만히 있든지, 호흡을 길게 들이쉬고 내쉬고 후~~~ 하든지, 아니면 숨을 몇 초간이라도 딱 멈춰 보든지, 인내하는 방법들에는 각각의 방법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인내하는 방법들을 동원해서 먼저 인내하라는 거라.

그리고 화내는 것들을 먼저 다스리라는 거라. 다스려야만 그다음에 '아!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마음을 품고, '아,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지, 인내할 줄도 모르고 성질나 있는데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행복하기를.....' 한다고 해도 안 되는 거라.

 

그 밑에 바로 오는 것이 네 번째, '위따도사 찟따(vitadosa citta)'라고 합니다.

'성냄에서 벗어난,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여기서 성냄이 없는 마음,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는 것은 성냄이 없다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애를 가지는 마음들입니다. 어떤 상태든 내가 항상 자비롭고, 관대하고, 그리고 친절하고, 이런 마음들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라는 것입니다.

 

성냄이 없는 마음, 쉽게 말하면 자애로운 마음들이 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긍정적인 사고!' 사람들은 잘하는 것도 있고 잘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어. 그런데 '저 사람만 보면 맨날 못하는 것만 눈에 보인다'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해서 자비로운 마음은 안 생깁니다. '저 사람만 보면 뭐든지 잘한다'는 마음이 들면 마음이 온화해 지면서 자비로운 마음이 듭니다.

 

자애를 기르려고 할 것 같으면 맨 먼저 해야 되는 것이 여러 대상들, 존재들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들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긍정적인 것들, '아, 저 사람 참 뭐 잘한다' 뭐든지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하고 자꾸 해주라는 거라. 그 사람에게 이익이 있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자꾸 가져 보면 자기 자신은 굉장히 자비로워지고 너그러워집니다.

 

그 사람이 진짜 잘해서 '잘한다, 잘한다' 하겠어? 잘못하는 것도 있지.

그런데도 그런 것들은 보려 하지 않고, 그리고 그런 것들은 그 사람 몫으로 놔두고, 내가 할 몫은 그 사람이 잘하는 것들만 자꾸 볼려고 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보려고 자꾸 해야 합니다. 미운 점을 볼려고 하지 않고 좋은 점을 보도록 자꾸 하라는 거라. 그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 씀씀이 하는 것들을, 훌륭한 것들로서 자꾸 이렇게 볼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리 해야만이 그 사람에게는 자애가 생깁니다. 자비가. 그랬을 때 성냄이 없는 마음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자애 수행을 할 때는 여러 가지 법칙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하도록 하십시오.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고통이 없기를! 내가 원한이 없기를! 내가 악의가 없기를! 내가 근심이 없기를! 내가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를!' 이런 마음들을 가지십시오. 자기 자신에게 먼저 합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자애를 이렇게 나눠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 자애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득 차야만 넘쳐 나오는 것이지 자신의 것도 차지 않고 이것을 남들에게 나눠준다는 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될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넘쳐 나올 때 넘쳐 나오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 주변에 그게 영향을 받게 되고, 아니면 이 선원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되고, 아니면 더 나아가서 전 세계가 영향을 받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자꾸 채우도록 해야 됩니다.

 

자애 수행의 방법은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거 다 여러분들이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도 안되고, 나하고 원수진 사람한테도 안되고, 이성간에도 안되고, 그거 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냥 자기 자신에게 그런 자비의 마음들을 자꾸 충만되게 만들도록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런 주변적인 여건들, 그게 나하고 원수진 사람이든 아니면 돌아가신 분이든, 이성간이든 뭐든 간에 다 영향을 받게끔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 먼저 자비로운 마음들이 자꾸 충만되게끔 하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비로운 수행이 잘 안 될 때 자애수행을 원활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여기 앞에 있는 사람을 떠올리면 '아! 저 사람 참 미워죽겠다' 하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이 사람을 떠올리면 안 되겠지!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떠올렸을 때 자비로운 마음이 일어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떠올려야 됩니다. 이 사람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그러면 적어도 분노가 일어나는 것들은 잠재울 수 있는 거라. 대상에 대해서 만약에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미워 죽겠다'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다른 대상을 떠올리십시오. 그 사람의 좋은 점이 보이도록 하면 좋은데, 내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이 사람의 좋은 점이 안 떠오른단 말이라.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되는 거라.

 

아이를 예로 들어봅시다. 아이가 뭐를 하면 뭐 하는 것마다 마음에 안 들고 한다, 그럴 것 같으면 아이를 대상으로 말을 하려고 하지 말고, 실제 내가 말하는 대상은 내가 좋아하고 참 존경하고 그 사람을 떠올리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얘기를 하라는 거라. 그러면 적어도 내가 말을 할 때, 행동할 때, 마음을 먹을 때 악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거라. 그것을 먼저 하도록 하십시오.

 

그다음에 그렇게 해도 안 된다.

새로운 대상을 떠올린다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화가 일어나고 할 때는 잘 안 떠올려집니다. 부처님 말씀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나쁜 사람들이 너를 해꼬지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어느 날 부처님한테 와서 “부처님, 저는 부처님 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았으니까 이 좋은 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러 가겠습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 가라.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들이 너에게 좋은 말을 안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예, 좋은 말 안 하고, 욕설을 하고, 나쁜 말을 하더라도 저 사람이 나를 안 때리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생각하겠습니다”

“만약에 때리면 어떻게 할 것이냐?”

“저 사람이 나를 안 죽이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생각하겠습니다”

“너를 죽이면 어떻게 할 것이냐?”

“내가 바른 부처님의 법을 위해서 죽는데 얼마나 다행이냐 생각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절대 분노를 일으키지 말아라. 너의 몸 사지가 절단이 되고 갈갈이 찢기는 한이 있어도 분노를 일으키지 말아라."

 

내가 좋은 부처님 법을 전하러 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소소한 것 때문에 내가 화를 일으킬 이유가 있겠어요? 아이가 애를 먹인다고 해서 이 하잘 것 없는 것,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닌 것들, 이것 가지고 내가 왜 화를 일으키느냐는 거라. 법을 전하러 갔을 때도 화를 일으키지 말아야 되는데, 이것 가지고 내가 화를 일으킬 이유가 있겠느냐 하는 거라.

그것을 「톱의 비유 경」이라고 합니다. 톱으로 몸을 절단하는 것, 그리하더라도 화를 일으키지 말아야 되는 거라. 그와 같이 화가 일어날 때는 '! 이것 이 아주 소소한 이것을 가지고 내가 화를 일으키지 말아야되겠다' 하고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그렇게 해도 안 되면?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은 다 다릅니다.

각자각자 다른 구조를 가지고 다른 개념을 가지고 살아있다는 것들, 개개인을 존중할 줄 알면 화는 사라집니다. 아이는 아이 대로의 역량, 아이 대로의 생각, 그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사고로서 생각하고, 내 역량에 맞게끔 하길 바라기 때문에 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각자각자 '개개인들의 특성들을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화는 잠재워지게 됩니다.

 

그리해도 화가 가라앉지 않으면?

'내가 이렇게 화를 냈을 때 이것은 누가 받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업을 짓는 것은 자기가 받는 겁니다. 업은 자기 자신의 것이고, 자신이 상속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친족과 같은 것, 내 팔 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 어떤 것들을 가지고 그 업의 굴레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겠는가? 하는 거라. 내가 화를 낸다는 것은 그 나쁜 업을 자꾸 쌓는 것들이라.

 

업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인지 아시죠? 굉장한 영향을 받습니다.

부처님의 가족들, 부처님의 종족들도 물고기 잡아먹은 죄로 인해가지고 몰살을 당합니다. 남에게 나쁜 말을 한 죄로 인해가지고 목련존자는 돌에 맞아 죽습니다.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과 그 부처님의 제자들 그리고 주변의 영향을 받는 분들은 그 덕으로 그래도 편안하게 살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거라. 그마만큼 업은 무서운 거라.

내가 왜 그 업을 계속 짓는 것을 갖다가 계속해야 돼? 아이에게 뭐라 하는 것은 둘째 문제라. 내가 업을 짓고 있는데 뭐하러 내가 그 짓을 하고 있느냐는 거라. 퍼뜩 정신을 차려야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자비의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인해서 어떤 이익이 있는가'를 떠올려야 됩니다. 참 그리하니까 마음이 편안하고, 잠을 잘 때도 편하고, 다리 쭉 뻗고 자고, 악몽 안 꾸고, 편안하게 깨어나고, 피로감 없이 잘 자고, 또 일상생활을 할 때도 자비로운 마음이 있으니까 항상 행복감이 충족되고.

이 좋은 것들의 이익이 있는데 내가 왜 자애와 반대되는 성내는 것들을 하고 있느냐는 거라. 빨리 '자비심, 자애의 이익을 떠올리라'는 거라. 그래서 빨리 마음을 전환해야 됩니다. 마음은 금방 전환됩니다.

 

그다음에 그렇게 해도 안 될 경우에는?

내가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어디서 화를 내고 있는가? 내 머리털이 화를 내고 있는 거라? 내 입이 화를 내고 있는 거라? 아니면 내 심장이 화를 내고 있는 거라? 어디서 화를 내고 있는 거라?

실체가 없습니다. '화를 내는 실체가 없는데 내가 왜 화를 내고 있느냐?'는 거라. 빨리 버려야 됩니다.

 

그리해도 안 되면? 부처님이 마지막에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베풀어 버려라, 보시해버려라" 줘 버릴 것 같으면 화가 안 일어납니다. 집착하는 것들을 떨쳐버리라는 거라. 내가 줘버리면 내 자신도 편안해지고, 받은 사람도 고마워하게 된다는 거라. 아이가 잘못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이해해 버리라는 거라. 마음을 그 아이에게 줘버리고 나면, 나는 편안하고 아이도 스스로 자기가 알게끔 된다는 거라.

 

그런 것들이 자애의 마음을 기르는 방법입니다.

이런 방법을 동원을 해서 반드시 자애의 마음, 성냄이 없이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들이 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관찰하는 세 번째, 네 번째 '성냄이 있는 마음은 성냄이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성냄이 없을 때는 성냄이 없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려라' 하는 것입니다. 이해하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내는 것들이 있다는 마음은, 그것은 생각이 아니라 내용입니다. 그것을 알아차릴 때는 대상으로서 자꾸 알아차리려고 해야 합니다.

그 생각 자체를 알아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으로서! 성냄이 있다고 하는 대상, 성내는 마음이 있다는 대상으로서,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떨어뜨려서 알아차리려고 해야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더 이상 성냄은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성냄이 있을 경우에는 더욱더 인내하는 마음들을 기르도록 하고, 성내는 마음보다 자애로운 마음들이 자꾸 일어나도록 만들어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