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담마와나 선원의 법문 교재 입니다.)
사마-디(samādhi)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는 사마타 수행이 효과적입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선정에 도달한 적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제1선정에 도달한 것만으로도 마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다섯 장애(오개(五蓋)는 수면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상태가 갖추어져서 이때부터 본격적인 위빳사나 실천이 가능하게 됩니다.
사마타 수행의 경험이 없는 위빳사나 수행자도 곤란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빳사나 실천 속에서도 사마타 수행의 특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빳사나 실천만으로도 사마타 수행을 병행해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사마디는 8종류(아비담마의 분류에서는 9종류)입니다. 어떤 사마디에 도달하든 반드시 두 가지의 단계를 밟습니다.
① upacāra-samādhi(우빠짜-라 사마-디, 近行定)
사마디 수행을 하면 마음이 사마디에 완전하게 닮은 상태에 도달합니다.
② appanā-samādhi(압빠나- 사마-디, 安止定)
마음이 사마디 상태에 도달합니다.
upacāra(近行)라는 말은 '닮아있다'라는 의미입니다. upa는 '근처에서 어슬렁어슬렁'이라는 의미이고, cāra는 '걷고 있다'라는 의미이므로 우빠짜-라는 '근처를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다'가 됩니다.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upacāra-samādhi(近行定)는 욕계의 마음이 다듬어진 상태입니다. 보통의 마음이지만 다듬어져 있습니다. 사마디 상태와 같이 안정되어 있는 마음을 갖고 있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욕계심입니다. 사마디의 근처를 걷고 있는 상태입니다.
appanā-samādhi는 진짜 사마디를 얻은 마음입니다. 安止定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마디에 들어서 안정되게 그곳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수행하면 근행정은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모두가 거의 만족해서 멈추어버립니다. '이제 마음은 청정해졌다. 좀처럼 성나지 않는다. 좀처럼 욕망이 생겨나지 않는다. 온갖 대상을 보아도 안정되어 있다'라며, 수행으로 그만큼의 결과가 나오면 안심해버립니다.
그러나 진짜 사마디의 체험이 없으면 안심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아직 타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사마디를 이 두 종류로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행정으로 만족하고 '아아, 이제 됐다'라고 하면서 앞을 내다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마디라는 특별한 욕구(欲)의 차원을 부수고 위로 비상하는, 경험 없이 단지 납득이 간다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안지정은 인식의 패턴으로 '부셨다'라고 마음의 무엇인가가 끊깁니다. 그 무엇인가가 끊긴 상태, 무엇인가를 부순 상태, 더 이상 되돌아가지 않는 상태를 체험해야 합니다. 사람은 장시간 욕구(欲)가 없는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는 경우가 있으나 특별히 수행이나 명상을 하고 있으면 청정한 마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셨다'라는 상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 껍질을 부수고 뛰쳐나온 상태가 생기지 않았다면, 그것이 생길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사마디를 둘로 나누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행자를 위한 것입니다.
마음의 흐름을 보면 parikamma, upacāra, anuloma, gotrabhū까지의 4개는 근행정(近行定)입니다. 근행정에는 많은 마음이 들어갑니다.
그다음은 선정심(禪定心)이거나, 깨달음(悟)의 도심(道心)과 과심(果心)이거나, 어떤 것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것을 '안지정(安止定)'이라고 합니다. 정말로 껍질을 부순 상태입니다.
근행정의 첫 번째인 parikamma(빠리깜마)란 열심히 명상을 하고 있다.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이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두루두루 잘 노력하며 준비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편작(遍作)'이라고 합니다.
다음의 upacāra(우빠짜-라)란 '다가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마음은 앞으로 생겨나고자 하는 선정에 다가가는, 비슷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근행(近行)'이라고 합니다.
3번째의 anuloma(아눌로-마)는 '거의 닮아있다'라는 상태, 즉 거의 비슷한 상태입니다. 사마디에 찰싹 따라붙는다는 의미로 '수순(隨順)'이라고 합니다.
4번째의 마음도 사마디에 거의 닮아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을 gotrabhu(고뜨라부)라고 부릅니다. gotrabhū는 gotra와 bhū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gotra는 가족입니다. 어떤 족보라는 가계(家系)의 의미입니다. bhu는 '되었다'라는 의미로 '태어났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마음이 어떤 '가계(家系)로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gotrabhū 즉 '종성(種姓)'입니다. 어느 종족의 성(姓)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일까요?
'차원을 초월한 사람들의 가계(家系)에 들어갔다'라는 의미입니다. 선정에 들기 직전의 마음에는 선정에 드는 일체의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격이 갖추어지면 그 순간에 자동적으로 선정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gotrabhū의 마음이 생겨나면 다음에는 반드시 선정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parikamma, upacāra, anuloma, gotrabhū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사마디 수행을 해서 선정에 드는 선정(禪定)의 심로(心路 : 마음의 인식과정),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깨달음에 드는 도(道)의 심로(心路), 양쪽 모두 동일한 말로 설명하는 일반적인 말입니다.
근행정(近行定, upacāra-samādhi)의 경우는 수행자가 수행 중이라면 문제가 없으나, 수행을 중단하면 그 상태도 없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불안정합니다. 근행정에서 안지정(安止定, appanā-samādhi)에 도달하면 본격적인 사마디입니다. 그 정신상태는 수행을 중단해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서 생활하지 않으면 수면상태가 된 번뇌가 깨어날(각성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번뇌가 눈을 뜨면 사마디 상태가 깨어집니다. 그러면 재차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해탈을 목표로 하는 수행자는 근행정이나 안지정이 필요합니다. 사마디를 닮아있는 상태나 사마디에 도달한 상태를 어째서 「마음을 청정하게 한 상태」라고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계율·도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번뇌가 부단히 이빨을 드러내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계를 지키면 번뇌에 시달리지 않고 편히 생활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번뇌는 활성화(活性化)된 채로입니다. 단지 계율에 막혀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마음속에서 번뇌가 휘젓고 다닙니다. 그래서 수행을 합니다. 수행을 성공하여 선정에 이릅니다. 선정에 이르렀다는 것은 활성화(活性化)하고 있는 번뇌가 수면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불교심리학에는 오개(五蓋)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마음이 초월상태로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5가지의 덮개를 의미합니다.
오개(五蓋)는 ① 감각적 탐욕(욕애(欲愛, kāmacchanda) ② 증오(瞋恚, byāpāda) ③ 혼침(昏沈, thīna)·수면(睡眠, middha) ④ 들뜸(도거(掉擧, uddhacca)·후회(後悔, kukkucca) ⑤ 의심(疑心, vicikicchā) 입니다.
기본적으로는 탐(貪), 진(瞋), 치(痴)를 의미하지만 탐(貪), 진(瞋), 치(痴)의 다양한 기능을 언어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탐(貪), 진(瞋), 치(痴)가 아니라, 오개(五蓋)라고 하는 경우에는 마음이 초월상태에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활동을 일컫습니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름(본명(本名)을 가지고 있지만 이름이 아닌 택시기사, 교사, 의사 등으로 불리는 경우에는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어떤 직업을 의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명보다는 직업을 일컫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기능을 하는 탐(貪), 진(瞋), 치(痴)를 그 활동을 일컬어서 말하는 경우에는 5가지의 덮개(五蓋)라는 호칭으로 바뀝니다. 이러한 5가지의 덮개(蓋)들이 들어오지 않고, 대상에만 집중해서 머무는 사마디 상태를 마음의 청정이라고 합니다.
근행정이나 안지정에 도달한 마음은 정신적으로 안정됩니다. 항상 집중력이 갖추어져 있고, 감정의 물결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로부터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해탈은 아닙니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번뇌가 수면상태로 된 것입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한 작업은 지금부터입니다.
위빳사나 실천의 경우는 「감각을 확인한다」라는 작업을 합니다. 그때는 마음이 격렬하게 공격을 합니다. 그 공격이란 끝없는 사고(思考)·망상(妄想)할 때마다 번뇌가 증가합니다.
마음이 항상 행하고 있는 이 작업(思考·妄想)은 위빳사나 실천의 적입니다. 적이 활발하게 활동하면 위빳사나 실천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계율을 지키고 있음에도 마음이 상처받게 됩니다. 그때 근행정이나 안지정이 있으면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마음이 더러워져 있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안정을 이루고 망상의 방해 없이 관찰을 지속할 수 있게 됩니다.
◉ 위빳사나 수행은 제1선정에서 마음청정을 완료합니다. ◉
아비담마적으로는 9종류의 사마디 단계가 있습니다. 어느 단계의 사마디에 도달하면 마음의 청정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그다지 문제삼지 않습니다. 사고(思考)가 폭주(暴走)하지 않는, 안정된 정신상태에 도달하면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근행정(近行定)이나 안지정(安止定)」은 언급만 하고 있습니다.
그대신 찰나정(刹那定, khaṇika-samādhi)이 강해야 알아차림이 잘된다고 설명합니다.
옛 수행자는 수행할 시간이 충분하였으므로 평생에 걸쳐 수행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인 사마타 수행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색계 제1선정에서 제5선정까지 도달하고자 노력하였고, 각 개인의 정신력에 부응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다섯 번째의 선정에 도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1선정에서 멈춘 사람도 있었습니다. 강력한 정신력의 소지자라면 무색계의 4가지 선정에 도전하는 것도 가능하였습니다. 어느 선정에 들어가든 불교에서는 「오개(五蓋)가 수면상태로 되었다」라고 설명합니다.
사마디가 높아지면(上向) 집중력이 향상합니다. 각 사마디로 체감하는 경험도 다릅니다. 무색계의 사마디에 도달하면 마음이 물질에 의존하지 않고 기능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자는 어느 사마디에 도달해 있는지 묻지 않습니다. 실천적으로 말하면 무색계의 4가지 사마디에 도달하여 그대로 있으면 위빳사나 실천은 할 수 없습니다. 위빳사나 실천은 물질(色)의 작용, 마음의 작용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마디에 든 상태로 위빳사나 실천은 할 수 없습니다.
9가지의 사마디 중 어느 사마디에 들어서 오개(五蓋)를 수면상태로 만듭니다. 그러고 나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인식하는 보통의 상태로 되돌아와서 위빳사나 실천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 필요한 것은 사마디의 도움으로 마음이 폭주하지 않는 상태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사고(思考)·망상(妄想)이 폭주하지 않는 상태란 어느 정도 마음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제1선정에 도전하는 수행자는 우선 근행정에 도달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의 실천을 위해서는 근행정의 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혹은 사마타 수행을 전혀 하지 않고 위빳사나 수행을 시작하여도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확인하는 실천을 계속하면 사고(思考)·망상(妄想)이 폭주하지 않는 지점까지 정신적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은 결과를 도출하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므로 사마타 수행을 빼고 위빳사나부터 수행을 시작하여도 상관없습니다. 사마디의 경험이 없어도 해탈에 도달합니다. 해탈에 도달한다는 의미는 번뇌를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부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이 진전되어서 깨달음에 가까워졌다고 하자, 그때의 정신상태는 제1선정의 근행정 수준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한 순간 마음은 제1선정의 힘을 갖게됩니다. 그런 까닭으로 전통에 따라 사마타 수행을 끝내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에 입문하는 순서를 취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위빳사나만의 방법은 결과가 빠릅니다.
위빳사나를 실천하는 분들은 누구나 망상에 짓눌립니다. 그에 굴하지 않고 수행을 지속하면 망상의 힘이 약해집니다. 망상이 확인작업에 방해를 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면 됩니다.
위빳사나 실천을 시작한 분들에게는 관찰만 할 것을 주문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다양한 수행에 대하여 알고 있고, 그것에 의해서 마음이 세뇌가 되어 있기 때문에 오로지 명상으로 대상에 대하여 알아차리는 이 방법에 대하여 「이런 것은 고도의 수행이 아닙니다.」라는 기분이 들기 쉽습니다.
어떤 정해져 있는 말을 염송하면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수념(隨念 anussati 아눗사띠) 입니다. 그것은 사마타 수행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정해져 있는 대상 없이 그때그때 나타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면서 적절한 명칭을 붙여서 집중하는 것이 수관(隨觀 anupassanā 아누빳사나-)입니다. 그것은 위빳사나 수행의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호흡 수행에서 사마타 수행의 경우에는 「들이쉼, 내쉼」 말을 일관되게 염송합니다. 위빳사나의 경우에는 「들이쉼, 내쉼」이라고 하든 「팽창, 수축」이라고 하든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하든,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또한 수행 중에 어딘가에 통증이 생기면 그것을 「통증」이라고 확인합니다. 추우면 「추움」이라고 확인합니다. 반드시 호흡에 집중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마타 수행을 먼저 실천해서 집중력을 키우고 나서, 지혜를 개발하는 위빳사나로 전환하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전통적인 수행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마타 수행에는 상당한 시간을 지불해야 합니다. 출가한 사람들은 매일 수행 이외에는 할 것이 없으므로 삼매를 얻기 위해 다양한 수행방법을 시도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령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나, 나이는 젊어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고 위기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느긋하게 수행할 여유가 없습니다. 「나의 생명은 무상(無常)하다. 지금 당장 죽음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라고 이성적인 절박감을 심하게 느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은 덧없다고 이성을 바탕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사마타 수행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렇더라도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집중력을 갖추어야 하는 성격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침착하지 못한 성격, 끝없이 망상에 빠져있는 성격의 사람들은 먼저 사마타 수행으로 안정하는 쪽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이성적인 절박감을 느끼는 사람들인 경우에는 어느 정도 집중력이 생겨나면 자연스럽게 위빳사나 실천으로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사마타 수행을 하여 집중력을 높인다면 관찰하는 위빳사나의 실천은 쉬워질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타 수행의 경험이 반드시 지혜로 연결된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사마타 수행의 희열감(喜悅感)에 집착해버리면 해탈로의 흥미를 잃어버릴 소지가 있습니다. 위빳사나는 해탈을 겨냥하는 실천 방법입니다. 위빳사나 실천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신체의 움직임, 신체의 감각을 명칭으로 알아차리도록 추천합니다. 이 훈련이 익숙해지게 되면 알아차림이 끊어짐 없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지혜가 열립니다. 마음은 장애로부터 청정하게 됩니다.
위빳사나를 실천하는 수행자에게 오력(신심, 노력, 알아차림, 선정, 지혜)의 힘이 좋고, 균형을 잘 이루게 되면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계속 이어져 마음이 깨끗하게 됩니다. 장애들이 중간에 끼어들어 생길 여지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찰나 간에 생겨나는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만을 의지하여 사띠(알아차림)를 지속하면 고요히 집중하는 사마디가 분명하게 생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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