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탈하신 분들의 상태 4가지와 능력 4가지 (20140904)
오늘은 깨달음에 이른 분들의 마음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우찌 틀릴까? 여러분들 마음하고.
또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수행자 대답 : 도와 과에 이르면)
도와 과에 누가 이르면 누가 보는데?
(수행자 대답 : 본인이나 안 그러면 더 위에 있는 분)
본인도 모를 수도 있는데 어떡할까?
열반의 상태에 들어있을 때는 열반에 있는지를 모릅니다.
보통 열반은 한번 드는 것이 아니고 여러번 드는 것이기 때문에 들어갈 때의 마음은 알지만 열반에 들었을 때는 모릅니다. 거기서 도의 마음과 과의 마음이 일어나지고, 그러고 나서 나중에 수다원에 이르렀다. 그러고 나면 다시 나옵니다. 나올 때 마음만 압니다. 그러니까 들어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뭔지는 분명하게 아는데, 그 안에는 몸과 마음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모른단 말이라. 본인도 사실은 아리까리한 거야. 이게 내가 뭔가 하는 그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본인이 물론 안다는 것은 아, 내가 여기에 이르렀다 하고 이해는 하게 됩니다. 번뇌가 떨어진 것이 뭐가 떨어졌고 뭐가 다시 안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그 이후에 그거는 가능한 거고, 실제로 도와 과에 이르는 상태에서는 사실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분명하게 알죠.
그래서 보통 도와 과에 이르렀을 경우에는 도와 과에 이른 스승들이 그것을 알려주게 돼있습니다. 너는 인제 깨달음에 이르렀다. 아니면 수다원에 이르렀다. 경전에 보면 전부 그렇게 나와 있죠? 부처님이 그럽니다.
스승들이 그 사실을 알려주게 돼있는데, 지금의 스승들은 그런 것조차도 알려주지 마라 하고 훈시가 돼있거든. 옛날하고는 좀 달라가지고 지금은 그걸 알려주면 아만심들이, 계속 마나(māna)라고 하는 것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에, 오히려 수행에 크게 장애들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조차도 알려주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누가 누구를 깨달음을 인가하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지.
어쨌든 이거는 여담이고, 그래도 열반은 있다는 것은 압니까?
열반은 있어요? 확실합니까? 경험 안 해보고 뭐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아?
그리고 열반을 경험한, 해탈에 이르른 성자들, 그 성자들의 마음하고 일반인들의 마음하고는 틀림없이 다를 것이다 하는 것은 어렴풋이는 알고 있다는 거라.
열반이 있다는 것은 보통 뭐로 아느냐면 '아, 참 저 상태에 이르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그런 마음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도, 열반이 가장 궁극적인 행복이다.(nibbānaṁ paramaṁ sukhaṁ) 더 이상의 행복은 없다 하면서 얘기들을 하는 거죠. 그래서 나도 그 상태에 이르러야지 하는 그런 마음들을 가지게끔 됩니다.
우리는 조그만 거 맛있는 거 하나만 먹어도 좋아갖고 죽는데, 그것에 비해서 열반에 이르렀을 때의 행복은 더없이 큰 것이고, 또 열반에 이르른 성자들 해탈한 자들의 마음은 열반에서 일어나는 마음들입니다. 그래서 항상 궁극적인 행복을 가지고 있는 마음들이죠. 그 사람들의 마음들은 참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게끔 됩니다.
경전을 비추어 봐가지고 열반 그리고 깨달음에 이른 분들의 마음의 상태는 이렇다 하는 것들을 우리가 추측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걸 알려줄테니까 여러분들도 그렇게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라훌라가 일곱살에 출가한 건 알죠? 그러고 나서 경전에 라훌라교계경이라 해가지고 큰거 작은거, 그다음에 리훌라에 관련된 경전들이 상당수가 있습니다. 그것들을 종합을 해보면 라훌라 일대기를 구성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중에 라훌라가 깨달음을 이룬 시기, 또 무엇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들을 알 수가 있는데, 호흡을 통해서 라훌라는 깨달음에 이르릅니다. "숨을 길게 쉬면 길게 쉰다고 알고 짧게 쉬면 짧게 쉰다고 알고, 이런 식으로 아나빠나 사띠를 지속적으로 하라" 하는 것으로 인해서 열반에 이르는 과정들이 설명이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이가 라훌라가 스무살 전후거든. 그런데 아무리 아라한이 돼있다고 하더라도, 물론 비구이고 아라한이 돼있다고 하더라도 연장자가 오면은 항상 예를 다해야 됩니다. 내가 아무리 도와 과가 높다고 하더라도 도와 과를 아무것도 얻지 않은 선배 스님이 오면 삼배의 예를 올리거든.
그러다 보니까 부처님 계신 곳은 아무래도 해제 때가 되면 사람들이 많이 부처님한테 찾아옵니다. 그간 수행했던 상황들이나 그 지방의 상황들에 대한 얘기들도 하고, 부처님한테 좋은 조언도 듣고, 또 부처님한테 베울 거는 배우고 그럴려고 찾아갑니다.
그러다 보니까 부처님 계신 곳은 해제 때가 되면 항상 방이 모자라. 스님들이 머물 곳이. 그러다 보니까 부처님 옆에서 시봉하고 있던 라훌라조차도 자기 방을 내주어야 될 판이라. 아무리 아라한이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방을 다른 스님들한테 내주고 나서 갈 곳이 마땅치 않으니까 부처님이 계신 방 옆에 문쪽을 바라보고 있는 쪽에 약간 파여진 곳이 있었어요. 거기에 쪼그려 앉아서 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고 경전에서는, 라훌라는 부처님의 아들이죠?
부처님을 어떻게 좀 해꼬지를 하고 부처님한테 장난을 걸어야 되겠는데, 부처님은 방안에 들어앉아서 계시니까 어떻게 장난을 걸 수가 없으니까, 아들을 갖다가 혼내키면은 그러니까 라훌라를 혼내키면은 부처님이 놀래가 쫓아나오면서 “이놈의 자식 와 내아들 건드리느냐” 하고 얘기할 것이 아닌가 해가지고, 그러니까 단순한 생각이라. 그래서 라훌라를 건드립니다.
동물원에 가서 코끼리를 봤어요? 큰 코끼리가 코를 내밀면 거기에다가 비스켓이나 이런 거를 줄려고 하는데 주면서 되게 겁나죠? 혹시라도 코끼리 그놈이 비스켓만 먹는 것이 아니고 내 손을 쏙 빨아땡기면 어쩔까? 아니면 코끼리 코가 그 비스켓 먹을려고 안 하고 나를 어떻게 차면 어쩔까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사실 줄 때도 되게 겁내면서 줍니다.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이거든. 그런데 만약에 그게 낮도 아니고 밤이면 어떻게 될까? 손을 쑥 내밀어 주어야 되는데 코끼리 코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이걸 어떻게 먹을지도 모르면 두려움이 낮보다도 훨씬 더 크겠죠.
그런데 그놈 코끼리가 코를 가지고 나를 덮치는 게 아니고 몸뚱이로 나를 덮치면 낮에도 겁나는데 밤이면 더 겁나는 거라. 한밤중에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런 상황이 된 거라. 그런데도 라훌라가 신음소리 하나 안 내고 아무렇지도 않게끔 있거든. 그러니까 이 마라의 계획이 어긋난 거라. 이건 뭐가 잘못됐다는 거라.
그 모습을 알고 부처님이 나와서 한 게송이 오늘 여러분들한테 들려주는 게송입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 아무 소리도 안 하고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을까, 라훌라는?
라훌라는 좀 전에 아라한에 이른 분이라고 했죠? 나이는 어리지만. 그러니까 아라한의 마음상태로 있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들이나 이런 것들은 전혀 영향을 못 미친다는 얘기라.
우리는 대낮에 뻔히 눈뜨고 코끼리한테 비스켓 주는 것도 겁내는 판인데, 그거보다도 더한 상황에서도 전혀 그런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적어도 아라한의 마음 상태는 그거 하나는 여러분하고 다르겠죠? 두려워하는 것이 어디 뭐 그것뿐이겠어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것들이.
게송을 먼저 읽어드릴게요.
【완성된 경지, 목적지에 도달한 경지에 이르러서 두려움이 없으며
갈애로부터 멀어져 오점이 없는 이는 생존의 화살을 꺽어버렸기에
이것이야말로 그의 마지막 몸이다.
갈애로부터 멀어져 집착이 없으며
경전의 뜻에 능통하고 문자의 배열과 어순을 안다면
그는 참으로 마지막 몸을 갖춘 사람으로
큰 지혜를 가진 자, 대장부라 부른다.】
그렇게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앞에 부분은 이해하기 쉬운데 뒤에 거 "경전의 의의, 뜻에 능통하고 문자의 배열과 순서를 안다" 그런 사람도 대장부 아라한이라고 이렇게 했는데, 그걸 잘 이해를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연결된 것들인데, 그래서 그걸 조금 더 알기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아까 열반은 어떤 경지라고 그랬어요? 뭐라 그랬어? 다 까먹어버렸어?
(수행자 대답 : 궁극적인 행복, 번뇌가 없는 상태)
예. 번뇌가 없는 상태, 궁극적인 행복, 그렇습니다.
열반을 얘기할 때, 경지를 얘기하는 것이 있고, 그러한 상태를 얘기할 때가 있고, 그리고 또 이르는 데서 그것이 소멸된 것들을 통칭해서 얘기할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딱 꼬집어서 어떤 것이다 하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리해도 우리가 바라는 것은 열반이란 거라. 가장 이상적인 경지고, 또 가장 행복한 경지이기 때문에. 그래서 궁극적인 행복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참 좋은 행복을 얘기하는데 그걸 이루기 위해서 부처님은 왜 무상·고·무아를 얘기했을까? 그 좋은 행복에 대해서 좋은 걸 얘기하면서. '무상' 하면 좀 부정적이고, '고' 해도 부정적이고, '무아' 해도 부정적인데 그거 왜 그렇게 얘기했을까?
왜 그래요? (수행자 대답 : 실체를 바로 알라고)
그렇죠. 무상·고·무아는 우리 실체인데, 실체를 아는 것, 실체를 알면은 행복해질 수는 있는데 완전하게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체를 봤을 때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죠!
실체를 봤을 때는 그것으로부터 멀어져버립니다. 그것의 영향을 또 받지 않게 되는 거고. 그래서 다시는 그것을 가지려고 집착하는 것들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 이렇게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또 알게 되는 거고, 그래서 내가 짓는 행위들에 대해서 업을 쌓는 것들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것들은 내 옆에 자꾸 붙는 것들이고 가지는 것들이기 때문에,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고 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들을 안 할려고 그럽니다.
저번에 '괴로움의 소멸의 상태에 대한 것'을 네 가지로 한번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상·고·무아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면은 적어도 나는 아, 이제는 내가 살아있는 정당한 이유를 아는 거라. 그리고 원인·결과에 대해서 분명하게 압니다.
그러다 보면 아, 내가 무엇을 하면 윤회의 원인이 되고, 또 무엇을 짓지 않으면 나는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호흡을 관찰하고 있는 거라든지, 아니면 모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들을 무상·고무·무아로 자꾸 보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그마만큼 참 소중한 것입니다.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모든 것들을 볼려고 하는 것들이! 그게 사실은 수행의 출발점이자 마지막까지 그것들을 해야 되고, 또 수행을 이룬 완성자가 됐다 하더라도 또한 그러면서 이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엔 살아가게끔 돼있는 이치입니다.
첫 번째 게송 부분입니다.
Niṭṭhaṅgato asantāsī(닛탕가또- 아산따-시-) 라고 돼있습니다.
목적에 이른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아까 라훌라의 얘기도 마찬가지고 해탈에 이른 자들은 무서워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돼 있으면 불안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것들은 없어집니다. 안정 돼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급작스런 상황이 돼있더라도 마음만 안정돼있으면 두려워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대신에 내가 할 일들을 분명하게 압니다. 내가 그것을 관찰할 일이라고 할 것 같으면 관찰을 하게 되는 거고, 또 내가 해야 될 일일 거 같으면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냥 묵묵하게 해나갑니다.
물에 갑작스럽게 빠져있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사람은 내가 작대기를 사용해서 건질 것인지 아니면 내가 직접 뛰어들어 가가지고 그 사람을 건질 것인지를 분명하게 압니다. 그럼 작대기를 던져가지고 건질 거 같으면 작대기를 내려가지고 잡아서 끄집어 올려야 되는 거고.
그런데 아직도 무서워하고 두려운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건져야 된다는 것이 우선돼있기 때문에 그냥 뛰어들어서 건지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잘못하면 같이 휘말려 죽게 되는 거라.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돼있지 못하면 그러한 결과들이 올 수가 있습니다. 물론 그걸 사회에서는 의사자다, 뭐다 하고 얘기할 수 있을진 몰라도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잘못된 선택이라는 겁니다.
가끔씩 언제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돼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일상적일 때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급작스런 일이 생겼을 때는 내 자신이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압니다. 볼 수가 있습니다.
차에 갑작스럽게 뭐가 탁 뛰어들었다. 그럴 때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사람은 그거 분명하게 봅니다. 내가 브레이크를 밟아도 어쩔 수 없는 제동시간들 이런 것들 때문에 사람이 다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싫어하거나 아니면 놀라거나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받치는 그 모습 그대로 봅니다. 그걸 봐야 그다음에 내가 할 것들이 분명하게 판단이 섭니다. 또는 설혹 내가 차에 부딪쳐가지고 죽는 상황에 있더라도 마음이 안정되어 있을 때는 그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그 받치는 모습들을 봅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을 거 같으면 다가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피하는 거고,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받쳐서 설혹 죽는 한이 있더라도 두려움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면서 죽지는 않는다는 거라.
아라한들은 마음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그건 안다는 거라.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것과 안정되어 있지 않은 것은 굉장한 차이를 가집니다. 꼭 아라한이 아니라도 마음은 안정시킬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아, 내가 이 좋은 법을 만났다. 그래서 다시는 이 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확신만 들어도 마음은 안정됩니다.
가끔씩 스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님이 병에 걸리고 아픔을 겪고 또 힘드는 상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급작스럽게 죽지는 안 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왜 그런 얘기를 할까? 근거 없이 그런 얘기를 할 수는 없잖아.
마음이 안정되어 있을 거 같으면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오는 두려움들이 없기 때문에 내가 그러한 상황들을 만들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거라.
그러한 상황 자체가 일어날 조건들을 만들지 않으면은 나는 급작스럽게 죽을 일은 없어요. 또 만약에 내가 급작스럽게 죽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두려움을 가지고 죽지는 않는다는 거라. 분명하게 그때 그 짧은 찰나지만 내 할 일들을 다 하고 죽는다는 거라. 시간의 문제가 아니고, 마음에 두려움이 없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돼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들이 첫 번째로 갖추어야 될 것들입니다.
그러면은 두 번째,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안정돼서 두려움이 없을까?
누구든지 살아있으면 두려움들은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코끼리가 요렇게 하면 그것만 두려움이 일어나겠어요? 그외에 두려움들이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두 번째 게송입니다.
Vītataṇho anaṅgaṇo(위-따딴호- 아난가노-)
갈애가 떨어져버려서 더러움이 없다.
무서워하지 않고 어떠한 상황이 돼도 마음이 안정되는 이유는 원하는 것이 없어서 가능한 거라. 갈애가 없는 거라. 그래서 어떤 것에도 마음이 더렵혀지지 않는다는 거라.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은 더러워집니다. 그리고 갈애는 일어납니다. '저 사람 살려야지' 또는 '내가 부딪쳐서 다치지 않아야지' 그 어떤 것이든 갈애가 일어나게 돼있다는 거라. 마음이 안정되어 있으면 그런 갈애들은 점점 더 적어집니다. 안정돼있지 못하니까 갈애들은 일어나게 됩니다.
안정되어서 나는 지금 고요하고 행복하게 즐기고 있는데 더 원할 게 뭐가 있어?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하면은 더 바랄 것들이 없습니다. 더 바랄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도와 과에 대해서 바라는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뿐이지, 그것도 찰나 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걸 분명하게 봅니다. 그 외에는 없어요. 그래서 어떠한 상황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물들지 않는 거라. 내 할 일들만 하는 거지.
얼마 전에 대구에서 어떤 분이 와서 스님 모시고 법당을 좀 했으면 좋겠다 하고 그러더라고. 얘기를 들어보니까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라. 그래서 그렇게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내가 법문하고 또 수행지도를 하루종일 해주겠다. 그 이상은 지금 내 몸의 상태로 봐서는 무리다. 그리해도 괜찮겠느냐 하니까 그리해도 괜찮대. 일주일에 한 번씩 와주는 것도 어디냐는 거지.
그러면 두 번째로 내가 거기 가서 상주하지는 못한다. 가끔씩 가서 어떨 경우에는 하룻 저녁 잘 수는 있지만 내가 거기 상주하지는 못한다. 그러면은 상주할 스님이 필요한데 상주할 스님이 거기에 상주하도록 하고 그 선원에 주인 스님이 되는 거지. 나는 단순히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수행지도 해주고 법문해주는 것밖에 안되는 거라.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니까 안 된다는 거라.
스님 때문에 이 선원을 지을려고 하는데 다른 스님이 주인이 돼있고 스님은 객처럼 왔다갔다 하면 내가 불편하지 않겠느냐는 거라. 나는 전혀 안 불편한데.
대구 그거 만드는 게 내 거라서 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라, 아니면 대구에서 무슨 신도들이 생겨나가지고 나에게 뭘 해주기를 바라는 거라.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그것 때문에 불편할 이유가 뭐 있어? 그냥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서 법문해주고 수행지도 해주면 되는 거라. 그것도 만약에 상주하는 스님이 스님 다음부터는 오지 마십시오 아니면 거기에 있는 신도들이 오지 마십시오 할 거 같으면 안 가면 그만인 거고, 뭐 답답하다고 내가 그러고 있어? 원하고 바라는 것이 없는데.
이 두 번째에 딱 걸려있는 거라. 다른 스님이 한국식으로 하면 주지가 돼있고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그냥 법문해주고 수행지도하는 것만 가능하다 하니까, 원래 선원 만들려했던 사람이 뭐가 이상하게 잘못됐다 싶은 거라. 스님 때문에 만들려고 한 건데 엉뚱한 스님이 주인이 되게 생겼으니까.
그래서 이해를 시켰어요. 고요하게 봐봐라. 일주일에 한 번씩 내가 가서 여러분들에게 하면 이익이 있는가? 이익이 있다는 거라. 그럼 내가 가서 해줄 동안에 여러분들에게 이익이 있지 않느냐는 거라. 거기에 주인이 누가 되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라.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와서 이익되는 일이 있을 거 같으면 그냥 가서 이익되는 일을 들으면 돼. 그리고 수행하면 돼. 그 스님이 주인이다.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는 생각을 벗어나버리고 그걸 딱 놓아버리고 나서 한번 객관적으로 보라는 거라. 없을 때보다 있는 게 낫거든. 그럼 이익되는 일 하는데 그거 따질 이유가 뭐 있느냐는 거라.
갈애는 그와 같습니다. 갈애를 가지는 것은 원하는 것이 있고, 어떤 규정화되는 것들을 내가 딱 마음에 품고 있을 때는 갈애는 항상 생깁니다. 그거 가지지 말고 한번 보라는 거라. 그럼 마음은 그것으로 인해서 어떤 문제들을 갖다가 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더러워질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마음만 고요하게 안정이 돼서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을 거 같으면, 두 번째 이거는 자동적으로 되는 거라. 갈애가 떨어져버리고 그리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 성자들의 마음은 이게 두 번째 마음입니다.
이것도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돼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대신에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내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더러움에 물드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하지 말아야 되는 거라. 신구의(身口意)를 통해서 일어나는 탐·진·치들은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그것을 일으키면 더러움에 물들게 되는 거라.
또 윤회의 원인이 되는 갈애, 업을 지속적으로 쌓게 되어서 그것은 틀림없이 나를 또 다음생으로 인도하게끔 되는 겁니다. 이제 그만 뺑뺑이 돌았으면 됐다는 거라. 그 지긋지긋한 거 그냥 인제 더 이상 여기서는 하지 말자.
그다음에 세 번째 게송입니다.
Acchindi bhavasallāni(앗친디 바와살라-니) 그렇게 돼있습니다.
존재하려는 속박을 끊어버렸다. 생존의 욕구를 끊어버렸다. 하는 뜻입니다.
갈애가 없으니까 윤회할 원인들을 짓지 않는 거라.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고. 그러니 생존의 욕구가 끊어져버렸다는 거라.
마음이 안정돼있지 않는 것, 그리고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 그래서 생존의 욕구가 끊어져버리는 것, 그것은 다 한 묶음입니다. 존재하려는 욕망!
살아있으면서도 존재할려는 욕망을 가지지 않는 것, 그게 아라한의 마음이라는 거라. 존재를 하든 안 하든 그것은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는 거라. 지금 당장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 하는 거라.
그리 살 수 있어요? 아둥바둥 살아야 되겠지. 그리해도 여러분들은 적어도 나의 좋은 일, 나의 이익을 위해서만 살면 안 됩니다.
생존에 대한 욕구들은 세속적인 여덟 가지들을 떨쳐내면 떨쳐낼수록 생존에 대한 욕구들은 줄어듭니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누가 나를 잘 봐주고 못 봐주고 하는, 그리고 나한테 뭔가 가진 게 있고 없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떨어뜨리면 떨어뜨릴수록 생존에 대한 욕구들은 줄어든다는 거라.
남이 나를 좋아하든, 남이 나를 비난하든 그거 뭐 신경 쓸 게 있어? 그거 신경 쓰지 말아라는 거라. 내가 지금 좀 가난하면 어떻고, 내가 지금 또 좀 부자면 그게 무슨 큰 대수냐는 거라. 그것이 있으면 있을수록 또는 그런 것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는 생존에 대한 욕구들이 더 강해서 여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거라.
윤회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인데 그거 크게 마음 두지 말아라는 거라.
생존에 대한 욕구들 더러움에 물들지 않을려고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여러분들은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것들을 자꾸 멀리 하려고 해야 됩니다. 세속에 있으면서도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멀어지라는 거라. 크게 영향받지 않도록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마지막에 한 게송이
Antimoyaṁ samussayo(안띠모-양 사뭇사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몸이다.
경전에 이걸 뭐로 비유를 해놓느냐면, 큰 구멍에 떨어질려고 하는데 이 사람이 그 구멍을 보니까 구멍에는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화산용암이 막 분출해가 올라오고 있거든. 그 모습을 보고 아이구야, 저기 떨어졌다가는 뼈도 안 남고 그냥 다 사라져버리겠다 싶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창을 갖다가 몸에 팍 찌릅니다. 그래가지고 바위벽에다가 그걸 같이 찔러요, 자기 몸하고 같이. 얼마나 아플고. 손 하나 살짝 베여도 아파 죽겠는데 자기 몸을 뚫어갖고 그 바위에다 연결해놨으니 얼마나 아플 거라. 그런데 밑에만 보면 아픔이 사라져. 그게 너무 강렬하게 되기 때문에, 저거만 보면 내가 식겁을 하는 거라. 몸이 아프고 자시고 하는 것들을 몰라.
이 몸이 마지막 몸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것들을 가지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창에 찔린 몸을 잊어버립니다.
무엇으로 인해서? 다른 때는 그 창에 찔린 몸을 자기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잊어버리는 건 밑에 유황덩어리가 치밀어가지고 용솟음치는 걸 보면 잊어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는 자기 몸은 창에 찔려가지고 피가 철철 나고 있다는 거라.
무아(無我)인데 '나는 살아있다'고, '나는 있다'고 착각을 한다는 거라. 그 밑에만 보면 나는 '나라고 하는 것들이 상주하는 것으로 착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실제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면 자신은 아프고 괴롭고 하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가지는 사람들은 유황덩어리를 보는 자와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마만큼 '나라고 하는 견해' '나라고 하는 것'들을 버리기가 힘들다는 얘기라.
그런데 아라한들은 지금 죽든 아니면 십 년 후에 죽든, 아니면 이 몸이 지금 어떤 상태에 이르렀든 그게 전혀 의미가 없어. 지금 현재 나는 완전한 아라한에 이르렀고, 해야 될 일들을 다 마쳤기 때문에, 할 거 다 했는데 뭐 할 게 있어?
이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거라. 단지 이 몸의 과거 전생부터 인연에 의해서 몸이 유지돼나갈 동안 그냥 유지돼나가는 것뿐이라. 그게 어떤 일로 인해가지고 내가 죽음에 이르렀든, 아니면 (..)적인 상태로 인해서 목숨이 다하든 그것은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들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할 일을 다했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그와 마찬가집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을 가지지 않으면은 적어도 여러분들은 그 유황덩어리에 떨어질 일은 없다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들을 내세우지 않을 거 같으면 그러한 괴로움을 맛볼 일들은 없다는 거라.
조그만 다툼이든 아니면 어떤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 것들이든 가만히 한번 돌아보라고.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 그 괴로움들은 왜 받고 있는 건가? '나'가 있다고 '나'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사실은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인데. 아라한이 되어서 의미가 없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라고 하는 실체하는 존재는 없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거 그냥 내세우면서 괴로움을 받는 거라.
지금은 그게 조그만 괴로움일지 몰라도 가면 갈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라고 하는 것은 더 강해집니다. 그럼 진짜 그 유황덩어리를 맛볼 그런 괴로움을 보게 된다는 거라.
적어도 아라한이 되어서 이것이 나의 마지막 몸이라서, '나'라고 하는 것들을 가지지 않는 상태에서 지내는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나'라고 하는 것들을 자꾸 몰아내도록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 '나의 견해가 이렇다' '이것은 내 것이다' 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자꾸 없애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있는 게송들입니다.
"그렇게 깨달음 해탈에 이르는 분들께 갖추어지는 능력이 네 가지가 있습니다."
조금 전에 네 가지 부분은 그런 깨달음에 이른 분들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게송에는 그런 분들의 능력에 대한 것들을 얘기해놓았습니다. 이걸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 앗타(attha), '의의' '말의 뜻'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말의 뜻을 안다, 문자의 뜻을 안다' 그렇게 하니까 그것을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들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그거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 귀는 왜 있습니까? 들어라고 있는 거죠? 먹어라고 있는 것은 아니죠? 눈은 보라고 있는 겁니다. 그럼 귀로는 들어야 되는 것이고, 눈으로는 봐야 되는 겁니다. 그것 가지고 딴짓거리 할 수가 없다는 거라. 딴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있으면 마음은 내가 조금 더 발전시키라고 있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을 더욱 좋은 상태로 만들려고 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문자의 뜻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겁니다. 이 육근이 있는 의미들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래서 나는 볼 때 보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라는 거라. 그것이 눈을 가지는 뜻입니다. 왜 이걸 가지고 있는데? 그냥 달고만 있을 거라? 이걸 보면서 '예쁘다 밉다 좋다 싫다' 하고 할 것이 아니고, '보인다'고 분명하게 알도록 하라는 거라.
혀가 있으면서 맛난 것들 먹고 맛없는 것들 먹지마라는 것이 아니고, 먹어라는 거라. 맛을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그걸 하라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좋고 싫음을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숨겨놓은 비밀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눈을 통해가지고 보라고 한 것이지 봐서 그속에 감춰진 비밀스러운 거 '아, 저사람이 예쁘다 싫다' 이걸 일으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말의 의미와 뜻을 안다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스님이 법문을 이렇게 했으면 그거 그냥 그대로 알면 됩니다. 그런데 그중에 자기가 발췌합니다. 내용이 착 왜곡됩니다. 듣기만 했으면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들리는 대로 그냥 듣기만 했으면. 내가 그것을 취사선택하고 만들지 말아라는 거라.
들릴 때는 들리는 것만 분명하게 알도록 하라. 보일 때는 보이는 것만 분명하게 알도록 하라는 거라. 맛볼 때는 맛보는 것만 분명하게 알도록 하라. 마음이 일어났으면 일어난 마음들을 분명하게 알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 그것이 있는 그대로 그것을 다 아는 것들입니다.
문자의 의의를 안다는 것은 그와 같은 겁니다.
그다음에 담마라고 돼있습니다.
• 담마(dhamma), 현상이 성립돼있는 것, 조건지워져서 일어나고, 그것은 조건지워져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것, 원인·결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니룻띠라고 돼있습니다.
• 니룻띠(nirutti), 조금 전에 언어와 어법 그런 것들에 정통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서 빠띠바나라고 합니다.
• 빠띠바-나(patibhāna), 그러한 아는 것들이 번쩍이듯이 안다.
가끔씩 스님이 "아라한들은 판단하지 않는다" 하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두 갈래 길이 있을 때 어느 쪽으로 갈까 판단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해를 잘 못합니다. “그럼 생각도 안 하고 삽니까?” 생각 안 합니다. “그럼 어찌 살아있습니까?” 하고 얘기합니다. 생각 안 한다고 못삽니까? 삽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해도 생각 안 해도 내가 일부러 개념화시키고 그걸 골똘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 정도의 능력들은 갖추어져 있다는 거라.
그렇게 해서 번뜩이는 것들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실행할 것 같으면 그것이 맞는 것들이라는 거라.
범부중생들은 오만 생각해가지고 탁 결정해도 그것이 틀릴 경우들이 많은데, 아라한들은 아무런 생각 안 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냥 그대로 압니다.
가끔씩 그런 분들을 봅니다. 뭔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물어봤을 때 아무런 생각을 안 하는데도 뭔가 툭 말을 던질 때 아주 재치있게 탁 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사람들은 설령 아라한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런 번뜩거리는 지혜들은 예전부터 갈고 닦아왔다는 거라. 그러니까 생각 없이 또 씨익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번뜩거리게 되는, 번뜩거리는 문제해결의 기미를 갖추도록 해준다는 거라.
자신의 몸에 그러한 능력이 붙어있는 사람들은 일부러 그것을 생각하고, 또 그것들에 대해서 판단할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앗타, 담마, 니룻띠, 빠띠바나 이 네 가지가 성자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입니다.
앗타는 그 존재해 있는 이유를 분명하게 압니다. 문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건 분명히 할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어떤 현상을 보더라도 원인·결과로써 볼려고 하라는 겁니다. 원인·결과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그다음에 세 번째, 니룻띠, 뭔가 사람이 뭔 말을 하면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려고 하는 것, 그 사람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분명하게 아는 것. 그것은 적어도 여러분들이 그것을 순수하게 듣기만 할 거 같으면 뭔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압니다. 왜 나를 내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할 게 뭐 있어? 그냥 듣기만 하더라도 충분히 그걸 이해를 한다는 거라. 그걸 대부분 못한다는 거라. 안 한다는 거라.
말이 나오면 자기가 먼저 머릿속에서 회전해서 '저거는 저럴 것이다' 하고 판단을 하고 또 그 방향으로 나아가버리는 거라. 그 사람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는데.
남을 대상으로 할 때는 들을 때는 듣기만 해야 됩니다. 남이 하는 행위들을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일려고 해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니룻띠라고 하는 능력들이 생겨납니다. '아, 그래서 저 사람한테 가서 얘기하면 참 잘 들어주고, 내 마음을 이해하더라.'
그다음에 네 번째, 빠띠바나 - 번쩍거리는 것들, 지혜들입니다. 총명함들입니다.
정답은 생각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으면 정답은 드러나집니다. 그래서 수행에서는 생각들은 쓰레기와 같은 잡동사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대상을 놓쳐버리기 때문에 생각은 일어납니다. 있는 그대로 그냥 알아차리기만 할 거 같으면 대상은 무수하게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냥 그거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알면 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생각하지 않는 버릇들을 자꾸 들여야만이 바른판단들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게 아라한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입니다.
그 4가지를 그 밑에다가 얘기를 해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의 의의에 능통하고 문자의 배열과 어순을 안다면' 이라고 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을 '대장부, 깨달은 자라고 얘기한다' 하고, 두 번째 구절에서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능력들을 갖추고 또 그러한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을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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