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마다 좋은날 (Bhaddekaratta Sutta) 2. (20140828)
오늘은 날마다 좋은날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저번에 첫 번째 게송이 뭐였어요? 과거 그다음에 미래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리고 마음에 붙잡히지 말고, 고요하고 맑게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려라. 그렇게 하면 적어도 날마다 잘 살아갈 수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 밧데까랏따 경은 여러 스님에게 얘기를 했습니다.
아난다 존자한테도 하고, 마하 깟짜나 존자한테도 하고, 그리고 깟사빠 존자한테도 하고, 또 사밋디 존자한테도 하고 그래서 각각의 이름을 붙여가지고 아난다 밧데까랏따 숫따, 마하 깟짜나 밧데까랏따 숫따 이렇게 쭉 경전 곳곳에 있습니다.
조금 다른 부분은 그래서 오늘 두 번째 시간으로써 뒤에 부분을 설명을 할려고 그럽니다.
사밋디 존자가 수행을 하고 있는데 천신이 내려와서 그 사밋디 존자한테 물어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천신에 대해서 그냥 환상 속에서 있는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스님도 경험을 했고, 다른 스님들이 경험을 한 것을 들어봐도 똑같이 일반인과 같이 대화를 합니다. 경전에 그렇게 되어있죠? 천신이 물어보면 답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뭐 천신의 언어로써 얘길 하겠어요? 얘길 하면 천신들이 알아듣고 이렇게 합니다. 실제 그런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 경전에서도 꼭 마찬가지로 그렇게 합니다.
천신이 사밋디 존자한테 혹시 스님은 부처님이 날마다 좋은날 경 설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밧데까랏따 경이라고 하는 것은 주석서에도 분명하게 기록이 돼있는데,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머릿속에 기억해두어야 될 그런 경전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현재에 일어난 대상들을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것이 사마타 수행이든 위빳사나 수행이든 어떤 수행이든.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잘 설명한 것이 밧데까랏따 경입니다.
그래서 나는 잘 모른다 하니까 천신이 부처님이 얘기한 이 게송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자세하게 설명을 들으십시오. 나는 사실은 이 게송은 외우고 있지만 뭔 뜻인지는 잘 모릅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와서 이 게송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들을려고 하는 그런 식으로 경전이 이루어집니다.
하나 물어봅시다. 시간은 존재하는 겁니까?
(수행자 대답 :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럼 존재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금 살아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 개념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죠.)
음, 개념적인 것이다? 그렇게 판단해야 됩니다. "시간은 개념이고 망상일 뿐이다" 하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 것은 시간에 대해서 자꾸 알려고 하지 말고 시간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는, 오히려 모든 현상들은 무상한 것이다 하고 자꾸 받아들이도록 해야 됩니다.
과거를 생각하더라도 과거는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있었던 사실일 뿐이라는 거라. 그리고 미래는 다가올 것들인데 그것도 무상한 성품에서 이것이 흘러갔을 때 그것들이 현재가 되는 것일 뿐이라고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지,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특정한 것이 존재를 해가지고 그것들이 내 기억속에서 아니면 내가 계획하는 것으로 인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하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법을 설할 때도 항상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식이 죽어가지고 반미치광이가 돼있는 사람한테도 그 이야기를 합니다. 네 아들만 죽냐, 다른 사람들도 다 죽지 않느냐?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죽는다는 사실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 과거에 일어났던 것을 지금 현재라고 착각해서 그것에 집착해있을 것 같으면 과거는 지금 현재가 되어야 됩니다. 과거는 무상한 성품이라서 이미 지나간 것뿐인데 개념으로써 받아들이게 되니까 과거가 지금 현재로써 돼있습니다.
또 항상 큰스님들이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스님들은 절대 보험들지 말아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험들지 말아라는 거라. 그러니까 미래를 생각해가지고, 무슨 보험있는지 모르겠는데, 무슨 암보험, 요즘 뭐 치아보험도 있다고 그러대. 무슨 보험, 무슨 보험 그런 거 들지 말아라는 거라. 미래에 다가올 것들을 미리 있다고 개념화한 상태에서 살지 말아라 하는 거라.
그거와 마찬가지로 보험들지 말아라고 합니다. 미래에 내가 좀 더 안정되기 위해서 절을 만든다든지 내 소유가 뭐가 있다든지 이런 것들을 출가한 스님들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재가자들은 조금 다르겠죠.
그 얘기는 뭐냐 하면 무상한 성품들이기 때문에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붙잡혀있지 말아라는 거라. 미래에 절 지으려면 지금 현재 얼마나 내가 부지런히 해야 될까? 부지런히만 해서 되면 문제가 없는데 그걸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얼마나 또 남을 속여야 될까? 그거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 번뇌를 일으키는 일들을 왜 하느냐는 거라.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이고 망상일 뿐이다" 하고 자꾸 받아들여야 됩니다.
시간이라고 자꾸 보지 말고, 어떤 것이든 무상한 것이다 하고 받아들여서 과거를 기억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집착하는 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미래에 대해서 계획을 세우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붙잡히지 말아라는 거라.
미래를 바라보고 열심히 살아야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그리고 과거에 대해서 생각하고 내가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돌이킬 수도 있고, 또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들은 아, 내가 이런 잘못은 저지르지 말아야지 하는 것들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거는 무상한 성품으로 받아들일 때는 과거나 미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현상으로써 존재를 해버리게 됩니다.
현상으로 존재해버릴 것 같으면 적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지금 현재는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과거에 나한테 잘못한 사람이라 해서 지금 '저놈'하고 붙잡혀있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무상한 성품으로써 시간들을 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들었던 게송이 그 첫 번째 게송에 연결해서 그다음 게송을 얘길 합니다. 원문 그대로 읽어드릴게요.
「오늘이야말로 노력하고 힘써야 되는 것이다.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겠는가.
그렇게 오늘 힘쓰는 자는, 죽음의 대군이 다가온다 해도 고민하는 일이 없다.
밤낮을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면서 힘쓰는 자,
그자는 확실히 날마다 좋은 날이다.」
오늘이야말로 노력하고 힘써야 되는 것이다.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겠는가.
누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거라. 그러니까 지금 현재 열심히 하는 게 맞다는 거라.
그렇게 살아갈 때 죽음의 대군이 나에게 이르게 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괴롭지 않다. 고민하는 일이 없다는 거라.
여기서 대군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형태는 여러 가지라는 거라. 갑작스럽게 죽기도 하고 뭐 어떤 식으로도 하게 되며, 여러 가지이기 때문에 대군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 죽음이 왔을 때 지금 현재 열심히 잘 살아가고 한 것들, 그리고 죽음은 확실한 것이고 살아가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지금 분명하게 해야 될 일을 잘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설혹 내가 죽음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다음에 얘기한 게 밤낮 게으름 없이 열심히 힘쓰면서 살아라. 그리하면 그는 확실히 날마다 좋은날이라고 나 적정자가 말하는 것이다.
밤낮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잘 살아라는 거라. 그러니까 잘 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과거나 미래에 붙잡히는 경우들이 많다는 거라.
여기서 이 게송에서 여러분들이 꼭 알아두어야 되는 것들이 좀 있습니다.
'찬다랏사'하고 하고 '아비난다나'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눈이 있다. 눈앞에 있는 대상이 있다. 그러면 먼저 일어나는 게 '찬다랏사' 라고 하는 겁니다. 눈이 있고 대상이 있으면 보이죠? 그 보이는 것이 일어나면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아비난다나'라고 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애착하고 집착하는 것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 마음의 요소가 두 개가 일어난다는 거지.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은 무엇으로 알아야 돼요? 마음으로 알지 다른 걸로 아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 있는데 보이는 것에 대해서 애착하고 집착하는 것이나 아니면 싫어하는 마음이나 이런 것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보이기만 하면 참 좋은데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자꾸 개념화시켜가지고 뭔가 또 마음의 작용들을 "하나 더" 한다는 거라.
그래서 오늘을 잘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거는 하지 말아라는 거라.
여기 앞에 예쁜 꽃이 있습니다. 그럼 이걸 그냥 '꽃이다' 하고 알면 되는데 '예쁘다', '예쁜 꽃이다' 하고 안다는 거라. 그전에 이미 막 시들어져 있는 꽃이면 '싫은 꽃', '안 예쁜 꽃이다' 하고 안다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마음에 대해서 애착하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거라. 그냥 꽃이라고 알고 보인다고 알면 되는데 그렇게 안 한다는 거라.
들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맛보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맛보는 걸 예를 들면 마누라가 해주는 것은 맛이 없다는 거라. 엄마가 해주는 김치가 맛있다는 거라. 그거는 거기에 딱 애착하고 있기 때문에! 괜히 부부싸움 만든다는 거라. 문제가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도 그렇게 돼버린다는 거라.
적어도 오늘을 잘 살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하지 말아라는 뜻이라.
애착하고 집착하는 것들이 있으면은 어떤 경우든지 그것은 내가 개념화시킨 것들이라. 내가 만들어낸 것들이라. 맛있는 거 엄마가 해준 거 지금 내가 맛보는 것도 아닌데도 엄마가 해준 것이 맛있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개념화시키지 않으면 그것이 맛있다고 떠올릴 수가 없습니다. 뭐하러 그렇게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야 되는 것이고,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야 되는 것이고, 맛보면 맛본다고 알아야 되는 것이지 이게 맛있다, 스님의 목소리가 이름답다, 이렇게 알면 안 된다는 거라. 그렇게 아는 즉시 전부 그것에 애착을 해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거라.
실재하는 것들을 알아차려야 되는데 개념화해버리면 그것은 시간도 거기서 딱 정지해버리는 거라. 지금 현재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딱 거기에 머물러 있어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을 피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경전에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개념을 시켜서 인식하는 것은 어떤 경우든지 애착과 연결되어있는 선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인식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가 거기에 딱 붙잡혀버릴 것 같으면 그거는 그 집착하는 접착제에 딱 달라붙어 버린 것과 같다 하는 거라. 쉬운 말로 해가지고 좋고 싫은 것들이 일어나는 것은 그 접착제에 딱 달라붙어 있는 거라.
예를 들어봅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다. 그럼 높은데만 가면 자기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도 무서워가지고 올라가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위에 올라가 있으면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자기가 거기에서 떨어지기를 합니까? 뭘 합니까? 안 그렇거든. 어떤 사람들은 그 높은데 가더라도 오히려 즐거워하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높은데 가면 나는 무섭다 하는 인식이 딱 생겨나가지고 거기에 착 달라붙어 버리니까, 그러니까 그것에 딱 붙잡혀있으니까 그위에 올라가더라도 항상 무서움이 일어나는 거라.
접착제를 제거를 해버리면 간단한 건데, 그런데 그 접착제 간단하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경에서는 그 접착제를 뭐라고 했느냐면 "나라고 하는 것들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나라고 하는 것들과 그리고 감정이라고 하는 두 가지가 접착제 역할을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기가 없을 것 같으면 무서울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지. 그리고 무섭다는 감정, 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무서워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지. 그런데 그 두 가지들이 항상 접착제 역할을 한다는 거라. 지금 고소공포증을 얘기를 한 것이지만 그거 말고 다른 것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좀 잘났다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견해 안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뭘 해도 잘 안된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는 잘난 사람보다 못났다고 생각합니다. 전부 '나'라고 해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먼저 '나'라고 하는 것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이거 먼저 해야 됩니다.
"자기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 자기 잘난 게 얼마나 잘났다고 잘났다고 하느냐는 거라. 부처님은 지금 현재 내가 불환과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직 완성된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더 열심히 노력해라. 아라한이 될 때까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불환과에 이르지도 못했고 겨우 부처님 가르침을 인제 조금 이해하는 정도인데도, '내 견해가 맞다' '내가 잘하고 있다' 하는 생각을 가질 거 같으면 그거 어떡하냐는 거라.
특히 스님들 같은 경우 조그만한 삼매 경험하고 나면 난리가 납니다. 토론을 하면 토론이 안돼요. 자기게 맞다는 거라. 다른 사람 거는 틀리고. 어떨 때는 보면 ‘어이그 저것도 중이라고’ 거기에 딱 매여가지고 그럽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가 부처님과 같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으면 나는 훌륭한 사람이 아닙니다. 더 채워야 될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도 마찬가집니다. "나는 뭘 해도 안 된다."
숨은 쉬잖아. 자기가. 뭘 해도 안되는 것이 아니고 안된다고 포기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들이라. 안될 게 뭐가 있어? 여기 요근래에 새로온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새로온 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뭔가 새로운 것들을 듣고 하면 아! 참 좋다 하는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전에는 그런 마음이 안 들었겠어?
나는 재가자니까 그냥 열심히 보시나 하고 무슨 행사 있으면 열심히 쫄락쫄락 쫓아다니기도 하고, 나는 절대 스님과 같은 영역에 들어갈 수가 없고, 또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라. 그런데 와서 해보니까 안 그렇거든.
나도 충분히 그게 가능하다는 거라. 스님의 경지가 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스님이 알고 있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들도 내가 노력해서 하지 않은 것 뿐인 것이지 그걸 모를 이유가 없다는 거라. 그런데도 지레 그냥 포기하는 거라.
그냥 주는 것만 자꾸 받아먹을라고 하고, 자기가 안한다는 생각은 안 하고, '나는 그건 안된다'고 하는 거라. 안되는 게 어딨어?
안 바뀌는 것은 자기가 안하기 때문입니다. 아! 나는 도저히 성질부리는 것은 내가 못고치겠다. 지가 안하니까 못 고치는 거지, 왜 못 고쳐? 못 고칠 이유가 없는데. 여러분이 무슨 뭐 동물이라, 식물이라, 뭐라? 그래도 가장 고귀한 인간인데.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인데. 그 능력들을 왜 그냥 헛되이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이 두 가지를 먼저 하도록 하고.
그다음에 세 번째, 좋아하고 싫어하는 경향, 그거 가지면 안됩니다.
좋고 싫은 것은 어떤 경우든지 나를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이라는 거라.
태국에 있으면서 처음 내가 법문했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거의 한 세시간 반 너머를 했는데, 처음엔 큰스님이 삼십분만 하라고 하더라고. 그 삼십분 그것도 몇달을 준비해가지고 갔는데 삼십분 채우기가 힘들어. 다 까먹어버려. 긴장이 되니까. 겨우 삼십분 했는데 좀 있다 또 삼십분 더하래. 그럼 또 겨우 합니다. 끝나고 나면 또 삼십분을 더하래. 이런 식으로 세시간 반을 하는데 나중에는 보니까 재가자들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나중에 하나도 없어.
그런데 스님들은 그대로 남아있어. 큰스님이든 작은 스님이든. 그 스님들이 내가 하는 얘기를 몰라서 그거 듣고 앉아있겠어? 적어도 출가한 스님들은 그걸 안다는 거라.
내가 다 아는 거지만 그냥 듣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들린다고만 알아차리기만 해도 돼. 좋고 싫은 마음들을 떠나버릴 것 같으면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이든 아니면 남이 뭐라고 하는 것이든 그거는 그냥 들리면 들린다고 아는 것이지, 저게 화내는 소리라든지 아니면 내가 알고 있는 거라든지 이런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재가자들은 재미없거든. 시시하거든. 나도 다 알고 있는 거니까. 좋고 싫은 것에 탁 빠져버리면 다 빠져나가버리는 거라.
뭐 그게 스님이라고 그렇게 되는 거고, 재가자라고 그렇게 안 되는 것은 아니잖아. 좋고 싫어하는 경향을 없애버릴 것 같으면 '나'라고 하는 것에 그렇게 얽매여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세시간 반동안 하고 나면 그 스님들 입에서 "사-두!"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뭐 잘해서 "사-두" 하는 게 아니고. 참 잘했다는 거라.
나를 수행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고 그리고 말하는 것도 그것으로 인해서 공부가 되고 수행되었기 때문에 참 잘했다는 거라.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어긋남이 없이 그게 무슨 시시한 얘기든 뭘 하든 간에 들려줘서 고맙다는 거라.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경향을 없애도록 해보십시오. 그래서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음, 내가 또 나를 견고하게 하는구나.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음, 나를 또 견고하게 하는구나.
'나'가 견고하면 견고해질수록 여러분들은 윤회의 껍질을 깨부술 수가 없습니다. 계속 그 패턴을 유지합니다. 안 괴로워?
사람들 직장 갔다 집에 오고 왔다갔다 해도 몇년 지나면 “아, 힘들어 죽겠다, 괴로워 죽겠다”고 하면서, 무수하게 살아오면서 그 패턴 하고 있는 거, 그거 안 싫어?
우선 '자아'라고 하는 접착제가 나에게 달라붙지 않도록 만들어라는 거라. 여러분은 잘나지도 않았고, 못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경향도 가지면 안됩니다. 적어도 그렇게만 하면 '나'라고 하는 접착제는 엷어질 수가 있다는 거라. 딱 달라붙지 않도록 하라는 거라. 그게 첫 번째 부분입니다.
두 번째, 감정! 감정은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경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과거를 생각해내서 감정을 일으키게 하면, 그 되살아난 감정은 현재이고 그마음은 더러워져 있다. 미래에 대해서 기대하고 장래를 생각해서 감정을 만들면, 현재의 마음이 더러워져 있다."
과거를 생각하든 미래를 생각하든 그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현재에 일어난 겁니다. 그럼 현재에 일어난 감정들이 더러워지지 않게끔만 만들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청정해지기 위해서는 더러워질 수 있는 요소들은 일으키지 않아야 된다는 겁니다.
감정이 접착제로써 작용을 하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일으키는 감정들이 더러워지지 않도록만 하면 됩니다. 마음이 더러워지면 그 마음만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고 더러워지는 것으로 인해서 말하고 행동하고 그다음에 생각하고 하는 것들이 더불어서 더러워져버리게 됩니다.
수행의 가장 기본되는 것들을 그렇게 얘기합니다.
우선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지 말고, 마음이 깨끗해지도록 고요해지고 가벼워지도록 만들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들 마음은 지금 현재 더러워져있지 않는가?
탐·진·치가 일어나면 마음은 더러워져 있습니다. 내 마음에 탐·진·치가 일어났는가 안 일어났는가를 잘 확인들을 하고 살아라는 거라. 열심히 남에게 좋은 일 해주면서 마음에서 '음, 내가 저거 해주고 나면 내가 뭐 받겠지' 열심히 해줄 때는 탐·진·치가 없었는데 '받겠지' 하는 순간 딱 물들어버린다는 거라.
'자식 잘 키워주면 나중에 나를 잘 부양하겠지' 여러분들이 해줄 거는 그냥 자식 잘 키우는 일이라. 나중에 그 자식이 여러분들을 부양해주고 안 해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 몫이 아니라. 기대한다고 해서 그게 되는 것은 아니잖아? 그런데 왜 그걸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러면은 내 마음은 더러워져 버리는데, 자신의 마음을 더럽힐 일들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몸과 말과 마음을 잘 방어를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마음이 감정적이고 생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더러워지는 마음으로 바뀌질 않습니다. 그것만 잘 보라는 거라. 그것만! 그래서 '나'라고 하는 접착제와 감정이라고 하는 접착제가 자꾸 붙지 않도록 만들어라는 겁니다. 나에게서. 적어도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지금 현재 나는 잘 살아가게 되는 거라.
가끔씩 그런 것들을 봅니다. 길을 가다가 특히 부산대학병원 있는데 보면 여자애들이 무슨 구두 있는데 가서 머리 빠지게 보고 있어요. 이렇게 보면서, 아 얼마나 거기에 꽂혀가지고 매여있으면 거기서 떠나지를 않는 거라. 누가 옆에 와도 몰라. 접착제가 딱 달라붙어갖고 안 떨어져. 나중에 누군가 친구가 “와서 야! 뭐하노?” 하면 그때야 정신을 번쩍 차리는 거라. 마트에 가서 애들이 장난감 앞에 가서 붙어있는 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엄마가 강제로 손을 끌고 가도 그 미련을 못버려가지고 얼굴은 요쪽을 돌아보고 있는 거라. 질질 끌려가면서.
접착제는 그렇습니다. 접착제라고 하는 것은, 그마만큼 영향을 많이 미치는 거라. 지금 현재 그것으로부터 떠나있어도 그게 안 떨어져. 마음에서.
지금 내가 그 신발 구입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장난감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거기서 못 떨어지는 거라. 없는 걸 왜 거기다가 그렇게 매여가 있느냐는 거라? 접착제로써.
그래서 경전에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과거의 일을 생각해내는 것은 관계없다. 그러나 감정을 일으키게 하지는 말아라.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관계가 없다. 그러나 감정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지금 보거나 듣거나 하는 여러 가지들은 그거는 어쩔 수가 없다. 그거는 일어난다는 거라.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는 말고 그것으로 인해서 감정을 만들어서 거기에 집착하지 말아라."
살아있는 동안에 보고 듣고 안 할 수가 어딨어? 그런데 보고 듣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감정들을 만들어내지 말아라는 거라. 만드는 즉시 거기에 딱 붙잡히는 접착제와 같은 것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마지막에 집착하는 일 없이, 동요하는 일 없이 현재를 확실하게 활기차게 살아가도록 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경전은 이렇게 해서 끝납니다.
날마다 좋은날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스님이 나름대로 정리를 해봤습니다.
첫 번째, 자기 자신과 사람들하고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애를 가지고 대하라.
물론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내 스스로는 비판하지는 말아라. 남을 비판할 게 뭐 있어? 자기도 모자란 인간이면서. 남을 비판하는 즉시 자기 자신은 '나'가 훌륭하다는 생각, 자아에 딱 붙잡혀버립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남에 대해서 비판할려고 하고, 특히 여자들 그런 거 잘하지. 그걸 뭐라 그래? 남을 씹는다고 그러나? 그거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런다고 해서 여러분들 당장 지금 조금 행복해질지는 몰라도 그마만큼 나는 윤회에 딱 붙잡혀버리는데. 내 마음은 나쁜데 자꾸 휩싸여버리게 되고. 경험을 해봐서 알잖아? 비판할 거 여기 없다고 해서 안 생기는 거 아니잖아. 저쪽에 또 생기고, 만날 그거 하다가 볼일 다 보는 거라. 지금 해야 되는 거 그냥 놓쳐버리고. 해야 될 일 못하면서 그짓을 왜 해?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사람이 무슨 뭐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남 일을 가지고 왜 그러느냐는 거라. 나는 어떤 경우든지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항상 지녀야 됩니다. 그래서 남을 비판하는 것들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럼 비판받는 것들은 어떻게 할까?
두 번째, 다른 사람들이나 사회에서 자신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너는 못났다. 그럼 어! 나는 못났다.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자아가 강해집니다. 그러면은 못났다 할 거 같으면 뭐가 못났는지를 보고 내가 그것을 바꿀려고 하는 것이 바른 것이지, 남이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 침울해 있다든지 아니면 저놈의 자식이 왜 나를 비난하느냐 하는 것에 신경쓸 거 같으면 그 사람은 바뀌지를 않는다는 거라. 오히려 자기 자신은 더욱더 아! 내가 참 못났다 하는데 더 깊숙히 들어가서 자아가 강해지는 거라.
사회의 비난 비판에 대해서는 그걸 수용을 하고 그리고 그것을 바꿀 계기로 삼아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에 대해서 대응해야 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거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비난이나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거는 마음을 둬서는 안되는 것들이라.
부처님도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부처님 저놈 죽일놈 살릴놈 하고 비난을 하더라도, 부처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나는 괜찮다. 너가 아니면 되는 거지, 그거 뭐하러 신경 쓰느냐? 부처님! 그거 내가 안 한 건데 남들이 비난하는 게 도저히 내가 못 겨디겠습니다. 그래도 견뎌라는 거라. 그래도 견뎌라!
지가 안한 것이고, 자기가 뛰어나고 훌륭한데도 그렇게 비난하는데도 그렇게 하라는데, 모자란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아! 내가 바꿀 수 있는 좋은 계기라. 그렇게 삼아야 되는 것이지 그 비난에 대해서 마음에 담아두면 그게 되겠느냐는 거라. 그래서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서 비난하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두지 말아라 하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나'라고 하는 것을 없애는 방법, 그리고 몸과 말과 마음을 잘 방어하라.
청정한 마음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하고,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을 없애는데 노력할 거 같으면 접착제는 엷어져버립니다. 그것이 세 번째입니다.
네 번째는, 하루를 쓸데없이 보내지 말아라. 쓸데없는 것에 시간 보내지 말아라.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깨달음에 관계된 것 외에는 전부 쓸데없는 얘기라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서른두 가지 예를 들어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전부다 여기에 포함됩니다.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쓸데없이 하루를 보내지 말아라는 거라. 하루 보내고 나서 뭐 했는지도 모를 것 같으면 뭐할 거라, 그거? 자기 자신을 더욱더 향상시켜야 되는 거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더욱더 증장시키는 쪽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 하루 지나고 나서 뭐 했는지조차도 모르고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느냐는 거라.
여러분 안 죽어? 여러분은 죽습니다. 죽을 때 어떻게 할려고 그래?
후회없이 살아라는 거라. 쓸데없이 하루 보낼려고 하지 말고, 하루를 그래도 진짜 아! 내가 하루를 참 잘 보냈다. 아! 오늘 하루동안은 전혀 성냄이 없이 보냈다. 오늘 하루동안은 열심히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보냈다. 저녁에 잘 때 얼마나 좋아? 하루를 쓸데없이 보내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 마음의 번뇌를 가지지 말아라.
쉽게 말하면 머리 굴리지 말아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머리를 회전하는 것은 쓸데없는 쓰레기를 그속에서 자꾸 생산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마음의 번뇌는 어떠한 경우든 일으킬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계획을 했으면 계획하고 나서 거기서 끝내야 됩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는 그것을 실천하는 것뿐입니다. 머릿속을 생각하고 굴리고 하는 것이 아니고. 설혹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고 한 것이 잘못됐다고 하더라도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것을 실천해나가면은 그 잘못된 것도 바른 것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설혹 내가 산속에서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하더라도 열심히 내가 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 산을 벗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잘못 왔다고 또 생각하고 또 다른 길로 가고 할 것 같으면 그냥 산속에서 헤매버리는 거라.
머리에서 생각하는 것들은 전부 번뇌라고 보면 됩니다. 실천되지 않는 것들은 전부 번뇌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시간은 신기루와 같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것은 전부 신기루입니다. 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은 무상한 것으로써 보고 집착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마지막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할 것 같으면 과거나 현재에 붙잡히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지금 현재에도 붙잡히지 않고, 현재를 열심히 잘 사는, 그리고 수행을 하더라도 바른 수행을 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됩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항상 날마다 좋은날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순간순간을 잃어버리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카낭 오 마 우빳짜가(khaṇo vo mā upaccagā)" 순간순간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알아차려라. 그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들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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