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따까 이야기(공양청,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 (20140918)
여러분들은 망갈라에 의해 삶들을 따라가면 그래도 잘 살아가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오늘은 자-따까(jātaka)에 나온 이야기를 하면서 그에 담긴 뜻을 이야기 할려고 합니다.
요즘 경전에 보면 그냥 내용만, 코멘트리 주석만 봐도 그 속에 담긴 뜻들이 보여요. 부처님이 이 말씀을 했을 때 뭘 말하고 싶은 것인가 하는 것들이 보여지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건 그냥 내 혼자 보는 거기 때문에 맞는지 안 맞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게 책에 나와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부처님 뜻에 크게 어긋나지 않을 거라고 봐집니다.
조금 전에 탁발을 했는데,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같이 탁발을 하는 방식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공양청을 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탁발을 할 때는 누구든지 있는 사람들이 다 탁발을 하죠. 그래서 또 있는 스님들도 누구든지 탁발은 다 하게끔 돼있습니다. 특별하게 아픈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데 인제 공양청을 할 경우에는 공양청을 하는 사람이 초청하는 스님들을 지정을 하는 경우가 있고, 또 초청하는 인원수를 지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번에 우리 집에 누구 경사스러운 누구 생일이 있다. 그러면 생일밥 우리가 먹는 것보다 스님 초청해가지고 스님 공양 올리고 우리도 먹고 하는 것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면 스님을 초청을 하게 됩니다. 그럼 우리 형편에 한 스님 정도는 공양청을 해서 공양 잡숫게 해도 괜찮겠지 하면 한 스님 초청을 할 거고, 아니면 좀 여유가 있으면 다섯 분 스님 초청을 할 거고 안 그러면 뭐 여러명 더 초청을 할 거고, 인원은 초청하는 분이 정하기도 하고 합니다.
그런데 되도록이면 스님들이 "이것만은 하지마라" 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 뭐냐면 초청을 하면서 누구를 지목을 합니다. 반드시 진용스님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거든.
왜 스님들이 되도록이면 지목을 하지 말아라고 하느냐면 지목을 할 거 같으면 그 공덕은 그 스님에 한해서 해당이 됩니다. 공양을 올렸으면 공양을 올린 선한 공덕에 대해서 나에게 회향되어서 돌아오는 것들은 그 한 스님에 한해버립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초청한 스님이 한 스님이라고 하더라도 상가의 이름으로 초청을 할 경우에는 그 한 스님의 공덕이 아니고 모든 상가스님들 공덕을 내가 회향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초청을 할 때는 지목을 하지 말아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절에서는 만약에 세 스님 초청을 받았다면 1번부터 3번까지 가고, 그다음날에 누가 또 다섯 스님을 초청했다 그럴 거 같으면 4번부터 8번까지 그렇게 가고, 이렇게 순번을 딱 정해가지고 그렇게 가게 돼있습니다. 물론 그 속에는 큰스님들도 있을 수가 있고, 큰스님이 아예 없을 수도 있습니다.
공양 초청을 가면 반드시 하는 것이 공양만 받고 오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법을 설하게끔 돼있는 거라.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는 다섯 분 초청을 했는데 그중에 큰스님이 없어서 법문을 하는데 영 재미없고 시시한 얘기를 하다가 가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법을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공양을 초청했으면 상가 이름으로 공양을 초청했기 때문에 그 공덕은 그대로 받는 것이고, 법을 아무리 재미없는 것을 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 나름의 이익이 있습니다.
듣는 것에 따라서 오는 이익들, 또 상가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으면, 그 법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큰 문제는 없는데, 법을 듣는 것만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지목을 합니다. 그 다섯 분 중에서 어느 스님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공덕도 반감이 돼버리고, 실제 스님들을 초청하는 것은 상가에 대한 존경의 마음들을 더욱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것인데 그런 것들이 특정한 스님에게로만 가게 됩니다. 상가 전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기 쉽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하지마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다음에는 누가 돌아가셨다, 아니면 집안에 여러 가지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 그럴 거 같으면 스님들을 초청하는 일들을 자꾸 하도록 해야 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문화가 잘 안돼가지고 안 하고 있는데, 또 특히 스님들을 초청할 때 오후에 초청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와서 법문만 해달라는 거지. 그건 큰 의미가 없는 건데 왜 저렇게 할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자따까 이야기도 꼭 마찬가집니다.
아나타삔디까가 부처님이 안거를 마치고 사위성에 왔으니까 사위성에 있는 스님들을 다 초청을 했어. 그러니까 모든 스님들이 그 급고독 장자의 초청을 받아서 가야 되는 거라. 그런데 아나타삔디까가 그렇게 공양초청을 하고 나서 또 한 노파가 와서 공양초청을 하는 거라. 한 분만 보내주십시오 해서.
그런데 이미 그전에 모든 스님들이 그 공양청에 가도록 돼있으니까 남아있는 스님이 없어. 그러니까 공양청을 접수 받은 스님이 난감한 거야. 우리 생각에는 그중에 한 스님을 빼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스님이라 할 것 같으면 그 사원에 거주하는 모든 스님이 가야 됩니다.
그때 생각이 미친 게 아, 사리불 존자는 이 사원에 거주하고 있지 않고 숲에 거주하고 있다는 거라. 아, 그러면 사리불 존자에게 빨리 연락을 해가지고 한 분이 이 가난한 노파가 초청을 하는데 가도록 해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먹고 사리불 존자한테 얘기합니다.
사리불 존자는 일반적으로 공양 초청에 안 가는 분으로 유명합니다. 탁발만 하면서 살았거든. 그런데 딱 공양청 가는 때가 언제냐면 부자한테는 안 가요. 아주 가난한 사람. 그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한 스님만 초청을 합니다. 그럼 그럴 때만 가서 그 공양을 잡숫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리불 존자는 거기 갑니다.
거기 간다고 소문이 나니까 꼬살라 국왕이든 여러 사람들이 이 노파가 가난한 걸 뻔히 아니까 많은 공양물을 노파한테 줍니다. 맛있는 음식도 주고 뭐도 주고 또 이거는 스님한테 올려라 하면서 주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정작 사리불 존자가 거기 가서 공양을 잡숫는 것은 그 노파가 해주는 밥만, 아주 맛없고 한 그것만 딱 잡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공양청 받으러 갔으니까 맛있는 거 있으면 맛있는 거 먹을라고 그러지 맛없는 거 먹을라고 하겠어? 그런데 거기에는 그런 이유들이 있습니다.
사리불 존자를 우리들이 존경하는 이유들이 뭐냐하면 공양 올리기 어렵지 않다는 겁니다. 아무리 맛없는 걸 공양올려도 아무 군소리 안 하고 잡수시는 거라. 그게 쓰든 짜든 아니면 아주 부담이 가든 밀기울을 주든 아무런 군말 없이 그걸 맛있게 잡숫고 법을 설한다는 거라.
여기 남자들은 부인이 해주는 밥을 아무 소리 안 하고 먹어야 돼. 군소리할 게 뭐 있어? 지가 해 먹는 것도 아니고 남이 정성껏 차려준 건데 그게 조금 짜면 어떻고 조금 맛없는 것들이 들어오면 어때서. 그건 사실 중요한 게 아니라. 맛없는 걸 먹었든 맛있는 걸 먹었든 영양분이 되는 건 똑같습니다. 크게 차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까다롭게 하느냐는 거라.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될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부담스럽지 않아야 된다는 겁니다. 어떤 자리에 가든 어떤 상황이 돼도 부담스럽지 않아야 됩니다.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재가자들한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밥 먹으면서 실컷 떠들며 놀고 싶어도 스님이 밥 먹는데 같이 있으면 맘껏 떠들고 놀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아예 재가자들 밥 먹는데 같이 안 먹어요. 계율상으로 딱 그렇게 만들어놨어요. 그렇게 먹어버리면 이미 스님들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물론 출가한 스님이 재가자하고 똑같은 상황에서 거기서 같이 떠들고 놀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출가자의 자격 자체가 아예 안 되는 거고, 출가자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재가자들에게 부담스럽지 않으려고 할 것 같으면 재가자들하고는 같이 밥을 먹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계율로써 정해놓은 겁니다.
그래서 저 골방에 만날 나혼자 상 차려주고 저희들끼리는 요 밖에서 실컷 떠들고 있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내가 언제 뭐라 하나, 가끔씩 와서 그래도 알아차려가면서 먹어라 하는 얘기는 하겠지만.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지 말아라.
밥을 먹을 때도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지 말아야 되고, 어떤 모임에 가도 자기 자신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지 말아야 되는 것이고, 또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면 안됩니다. 여기 모임에 앉아서 있으면서 아, 참 저사람이 오면 내가 왠지 법회 오기 힘들다고 할 것 같으면 그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안 옵니다. 이미 그사람은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는 거라.
그런데 본인은 부담스러운 존재인지를 몰라. 이게 문제인 거라. 왜 그럴까? 왜 부담스러운 존재인 줄 모를까?
이렇게 한번 보십시오.
경전에 뭐라고 돼있느냐면 "자기애를 가지는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으면 자기 자신만 사랑할 줄 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경전에 뭐라고 나와있느냐면 "자기애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들은 그 자기 자신이 악에 물들지 않게끔 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진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또 자신이 자존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악에 물들지 않게끔 한다는 거라.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은 줄만 알고 자기가 남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생각만 하는 것이지 그러면서 자기자신의 그런 마음이 악에 물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거라.
자신이 부담스러운 존재일 것 같으면 ‘아, 내가 부담스러운 존재다’ 하는 사실만 알더라도 악에 물들지는 않습니다. 그럼 내가 부담스러운 부분을 해소할려고 자꾸 노력하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전에는 밥투정하다가도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밥을 먹게끔 된다는 거라. 밥투정할 때 자기 자신의 마음을 한번 들여다 봐봐. 악에 물들지 않고 투정할 방법이 없습니다. 악에 물들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은 당연히 받는 것으로 생각을 해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당연히 받는 게 어딨습니까? 세상에.
설혹 당연히 받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은 그걸 당연히 받아먹지만, 악에는 물들지 않게끔 해야 되는 것이 자기 자신이 해야 될 것인데, 자기 자신은 이미 악에 물들어 있다는 거라.
자기 자신이 남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인가, 아니면 어떤 경우든지 참 어울리기 편안하고 같이 있으면 참 좋은 사람인가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어떤 쪽, 지금 악에 물들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걸로 자꾸 판단을 하면 됩니다.
자기 자신이 악에 물들어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그사람을 보면 괜히 좋아. 같이 어울리려고 그러고. 그런데 자기 자신이 악에 물들어 있는 순간에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게 돼있습니다.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럼 상대방도 당연히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악에 물들어가지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사리불 존자가 이 노파에게 가서 한 일은 맛있게 공양물을 잡숴주고 또 법을 설해줍니다. 그래서 이 노파는 수다원에 이르르게 됩니다.
그 사리불 존자는 자기 자신이 해야 될 일을 분명하게 압니다. 시간에 맞춰서 공양하러 가고 시간에 맞춰서 다시 또 스르르르 돌아오고. 그러면서 그자리에 있으면서 해야 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은 지금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까?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해야 될 일들을 자꾸 잊어먹게 됩니다. 또 내가 뭔가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알고 보니까 별 필요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필요 없는 것들을 그냥 지금 하고 있는 거라.
밥 먹으면서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밥 먹으면서는 밥만 먹는 게 최고 좋은데 그것까지는 내가 이해한다고 치자. 법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칭찬하는 이야기들 하는 것까지는 내가 봐줄려고 하는데, 밥 먹으면서 괜히 남 험담이나 하고 안 좋은 이야기들이나 하고, 뭐하러 그래? 그때 그 상황에서 해야 될 일들을 하지 못하는 거라.
그렇게 됐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경전에는 뭐라고 나와있느냐면, "계율을 잘 지키지 않고, 또 해야 될 일들을 하지 않고, 그렇게 살다가 늙어간 사람들은 바짝 마른 호수에 물고기 잡아먹으려고 쳐다보고 있는 백로와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바짝 마른 호수에 무슨 물고기가 있어? 이미 물고기는 없지. 그때사 자기가 할 일들을 찾지만 그때는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그때 자기가 해야 될 일들을 하지 않고, 또 가치가 있는 일들을 하지 않고 나중에 그걸 찾으면 그게 있나? 없지.
지금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은 알아야 됩니다.
가끔씩 스님이 누구하고 약속을 해놓으면 스님은 거의 약속시간을 어긴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차가 막힌다고 하더라도 그걸 감안해가지고 미리 가든지 하지, 그 어떤 핑계를 대가지고 차 막혀가지고 늦었다 하고 그 시간을 늦게 간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한 5분 일찍 가든지 그렇게 하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보면 때마다 늦어.
또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여기 모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고 그러기 위해서 왔는데, 그건 뒷전이야. 들을려고 하지를 않아. 특히 같이 간 스님들은 만날 얘기해라 나는 뭐 엉뚱한 짓 하고 있고, 어떨 때는 옆에서 법문하고 있으면서도 ‘참, 쟤는 여기 뭐하러 앉아있을꼬’ 그거 할려고 안 하고. 앉아가지고 뭐 휴대폰 만지작거리면서 막 뭐 하고 있는 경우가 있어. 차라리 나가서 휴대폰 만지는 일을 하든지. 그런데 앉아가지고 그거 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마치고 나서도 괜히 어정어정해. 마치고 나면 후딱 떠나줘야 되는데 안 떠나고 괜히 그때사 사람들하고 앉아가지고 얘기한다고 막 그래. 다른 사람들은 스님들이 있으니까 자기들끼리 실컷 떠들지도 못하고, 다른 스님들은 다 갔는데 그 스님은 또 앉아가지고 그러고 있으니까. 바뀌어버리는 거라.
그때의 가치있는 일들은 그때에 해야 됩니다. 그때를 놓쳐버리면 뒤죽박죽이 돼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가치있는 일들을 할려고 하더라도 할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은 팔계를 받았다, 그럼 팔계를 지켜야 되는 것이 오늘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입니다. 언제 또 팔계 지킬 거라? 해제하고 나서 스스로 하겠다? 그거 참 힘든 일입니다. 만들어줬는데 왜 안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게 자꾸 습관화되도록 만들어주고 있는데도 안 하고 또 다른 때 할려고 하는 거라.
지금 마음을 청정히 하는 법을 가르쳐줬는데도 그거 안 하고 앉아서 수행하면서 온갖 망상하면서 근심 걱정하고 앉아있는 거라. 마음을 청정히 하고 지금 현재에 머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데도 그거 안 하는 거라.
있는 그대로 진리를 이해하게 될 때 여러분들은 가치있는 일들을 하게 됩니다.
또 상대방에 대해서 까루나의 마음들이 있을 거 같으면 어떠한 경우도 약속 시간 어기지도 않고 또 끝나고 나서 다른 사람들하고 쓸데없이 그사람들 붙잡아가면서 그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을 할 때 자기는 딴 일 하지 않는다는 거라. 뻔히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을 거 같으면 그 스님보고 뭐라 할 거라?
연민심의 마음이 없으면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가치있는 일들과 그렇지 않고 가치없는 일들을 구분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거라.
사리뿟따 존자는 분명히 그것을 할 줄 아는 거라. 그게 뭐 아라한인 성자라서 가능한 건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시간 맞춰 갈 수 있고, 시간 맞춰 올 수 있고, 해야 될 일들이 있을 때 분명히 자기가 해야 될 일들은 하고 끝낼 수가 있습니다. 단지 그것은 성자인 사리뿟따 존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뿐인 거고, 여러분들은 안되면 강제로라도 그렇게 해야 되는 거라.
그다음에 사리뿟따 존자뿐 아니라, 그 나이 든 노파도 도움이 되는 일들을 분명하게 할 줄 압니다. 공양 한끼 올린다는 거 그 공양 잡숫는 스님한테도 도움이 될 뿐아니라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겁니다. 법을 설하고 공양을 잡숫고 하는 스님도 그 공양을 잡숫고 자기한테도 도움이 되고 또 다른 사람들한테도 도움이 되는 좋은 법을 설하게 된다는 거라. 그때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것들을 분명하게 할 줄을 안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도 가난한 노파이기 때문에 저 노파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분명하게 한 거라. 그래서 음식물 부족할 거 같으니까 음식물부터 갖다 주고 뭐가 필요할 거 같으니까 뭐도 갖다 주고.
경전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확실하게 이 세상에서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구나 이 세상에서 여행을 떠나는, 죽음을 맞이하는 생명이라고 하더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여러분들에게는 도움이 됩니다."
도움이 되는 일들을 했으면 이생에서 도움이 되고 그다음생에서도 도움이 된다는 거라.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지 않고, 도움이 되지 않는 일들을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뭔가? 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뭔가? 한번 곰곰이 생각을 해보십시오.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지금 법문 듣는 시간이면 법문만 열심히 들으면 됩니다. 딴짓 안 하고 또 안 떠들고. 그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자기 자신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거라.
이 경전이 아주 짧은 거지만 그냥 간단하게 가서 공양 잡숫고 온 것이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절대 남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면 안 됩니다. 보면 부담스럽지 않고 보면 즐겁고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존재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살아가면서 뭘 하는 것이 지금 가치 있는 일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그 가치 있는 일들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이생이나 다음생을 위해서라도 도움이 되는 일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자꾸 하시기 바랍니다.
이걸 부처님이 얘길 하면서 자따까의 뒤에 부분을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가 이생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그전 생에서도 이러한 일들을 했다 하고 얘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좀 대동소이합니다. 대동소이하고 물론 거기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 신두(?) 말은 분명하게 압니다.
자신이 귀의받아야 될 때는 귀의받아야 되는 것이고, 자신이 뛰어난 줄 알면서도 자기 자신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아야 될 때는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잘 못합니다. 자기가 좀 뛰어나면 그걸 드러낼려고만 하지 그걸 감출 줄도 모를 뿐 아니라, 또 자신이 뛰어난 존재인데도 뛰어난 존재인 줄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떤 존재들보다도 훨씬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해야 될 일들을 분명하게 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설혹 자기 자신이 이생에서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에는 조그만한 성취에 만족하지 말고 그것 가지고 길길이 날뛰며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얘기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부족하고 채워야 될 것들입니다. 채울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내가 채울 수 있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부족하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그거 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생각을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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