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눈앞의 즐거움은 함정이다. (20140923)

담마마-마까 2021. 8. 16. 09:00

https://youtu.be/YQvSZgG6b58

* 눈앞의 즐거움은 함정이다. (20140923)

 

오늘은 "눈앞의 즐거움은 함정이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요즘은 그런 일들이 많습니다. 사회적인 문제. 술을 먹고 나서 대리기사를 불렀다가 싸움이 일어나서 붙잡혀가는 것, 또 무슨 골프 치러 갔다가 당장 자기 즐거움 찾다가 망신을 당하는 것, 이런 것들을 보면 사람들이 눈앞의 즐거움이 함정이란 생각들을 안 합니다. 함정이라 해서 누가 파놓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함정에 떨어진다는 생각들을 1차적으로 하지를 않게 됩니다. 대부분 패가망신하거나 다른 사람들한테 손가락질을 받는 게 그 눈앞의 즐거움을 쫓다가 보니까 그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아나타삔디까가 제따와나를 건립해서 기증한 것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꼭 세 번은 그 제따와나를 들렸다고 그럽니다. 아침에는 죽을 끓여가지고 그 대중 스님들 다 먹을 수 있게끔 하고, 점심 때는 또 공양을 준비해가고, 저녁에는 먹을 걸 가져갈 수가 없으니까 꽃이나 향 같은 걸 사서 올리고 이렇게 했다고 그럽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장사도 뒷전이 되고, 또 있는 재산들도 자꾸 없어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셈하고 하는 것들 다른 일들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자기가 돈을 빌려줘도 빌려줬는지조차도 까먹어버리고 이렇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러분들도 그 경전을 대부분 읽고 알고 있듯이 쫄딱 망하게 됐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염려스러워서 물어봅니다. 어떡하느냐. 재산도 다 없고 그렇게 공양을 계속 올려서 되겠느냐? 하니까 부처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대신에 전에는 맛있는 거 올리고 했는데 인제는 거칠고 맛없는 걸 올려도 이해해 주십시오. 그렇게 얘기합니다. 물론 부처님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언제 뭐 맛있고 맛없는 것에 따라서 음식을 가리든가? 나뿐 아니라 대중스님들도 마찬가지다. 하면서 얘기했는데, 부처님이 그렇게 염려할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굉장히 염려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좋은 일 한다고 하면서 결과는 오히려 모든 재산들을 다 잃어버린 그런 결과가 됐습니다.

 

경전에는 여신이라고 그렇게 나와있는데, 다른 말로 그냥 그 집에 살고 있던 분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시다. 그분이 봤을 때 지금은 도저히 공양올리고 보시올릴 때가 아니라 장사에 전념할 때다해고 그렇게 간청을 합니다. 그만하십시오. 스님들 오라고도 하지 말고 그 사원에 가서 공양을 올리고 보시하고 하는 것도 그만두십시오. 지금 우선에는 장사에 전념해야 될 때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아나타삔디까가 크게 역정을 냅니다. 남이 행하는 선한 일들에 대해서 잘한다고 칭찬해주지는 못할망정 그 선한 일을 그만두게 하는 일이 어딨느냐? 하는 거라. 너는 나와 같이 이 집에서 살 자격이 없다. 나가라! 하고 쫓아보냅니다. 쫓겨난 그분은 당장 어디 갈 데가 없어요.

그러다가 생각해낸 게 아나타삔디까가 옛날에 누구한테 돈을 많이 빌려줬지 하는 것들도 알고 있고, 그리고 후일에 대비해서 비밀스럽게 감춰놓은 재산도 어디 있는지 알고,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전부 찾아서 아나타삔디까에게 돌려줍니다. 실제로 그거는 아나타삔디까의 재산이죠? 아나타삔디까가 그걸 기억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그러면서 돌아와서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참 잘못했다. 좋은 일을 하는데 당장 눈앞에 있는 즐겁고 괴로운 것만 생각해가지고 그 좋은 일하는 것을 당신에게 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한 것에 대해서 용서를 바란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때 흔쾌히 아나타삔디까가 그 말을 받아주고 용서를 해줍니다. 그게 경전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진 것들이 많을 때는 즐깁니다. 그걸 좋아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을 때는 대부분 낙담하거나 아니면 소외당하기도 하고, 스스로 소외되기도 하고 그럽니다. 갑자기 하던 일들이 잘못됐을 경우에 주변 친구들이 떠나고 또 자기 스스로도 위축돼가지고 친구들을 안 만날려고 하기도 하고,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가지고 문제를 찾을 방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사실을 알고 내가 빨리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걸 그대로 가만히 보고 오히려 위축돼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또는 주변에 그러한 사람들이 있을 거 같으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자기하고 먼 사람으로서 분류를 할려고 그럽니다. 자신이 그렇게 될 수도 있는데도 다른 사람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는 그걸 봐줄려고 하질 않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그렇게 해가지고 형성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위축돼있을 때는 누군가가 그 일을 얘기했을 때, 그 일에 대해서 내가 심사숙고할 수가 있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거기에서 내가 빨리 빠져나오려고 해야 되는 것이고, 더구나 그것이 내가 하는 선한 일들이라 할 것 같으면 그것에 위축되어서도 안 되는 것들입니다.

 

당장 지금 현재 어렵고 또 즐겁다고 해서 그 함정에 빠져버리면 더 큰 결과들을 받아야 됩니다. 또는 다른 사람듷이 그러한 일들을 당해서 그것들에 대해서 이해하고 또 충고해줄 일들을 자기 스스로 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자기 스스로는 이미 그 사람하고는 친구가 아니라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자신도 언제든지 그렇게 될 수가 있으면서. 나와 마찬가지로 남들도 그러한 함정에 빠질 수가 있다 하는 사실을 항상 기억할 줄 알아야 됩니다.

 

오늘은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 얘기를 하겠습니다.

아나타삔디까의 집에 살고 있던 분이 아나타삔디까에게 아, 인제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공양 올리고 하는 보시를 그만하라 얘기했을 때 아나타삔디까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나는 선한 일을 하고 있다. 그걸 네가 칭찬하지는 못할망정 그만두라고 얘기하는 건 안된다.

당장 아나타삔디까가 불행하게 될 것 같고 또 곤란을 당하고 있는 것들 때문에 그런 얘기를 했지만, 누구든지 우리는 그렇게 해야 됩니다. 선한 일을 할 것 같으면 선한 일을 잘했다고 해야 되는 것이고, 악한 일을 하고 있다면 악한 일을 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해야 됩니다. 그런데 즐겁고 괴로운 것들의 함정에 빠져버리면은 괴로운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자기뿐 아니라 친구나 주변의 사람들한테도 선한 일을 하고 있는데도 그 일을 하지 말아라고 그럽니다. 그 함정에 빠져버려가지고.

 

그런데 누구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당장 경제적인 것들이나 아니면 사회적인 관계들을 고려하다 보니까 그것이 우선에 놓여버리면 그렇게 돼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든지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스스로 인정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자신도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다른 사람도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인정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인정을 못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꼬여버립니다. 술을 먹는 것이 잘못됐다고 얘기하지 못할 거 같으면 술을 먹은 것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고 다툼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잘잘못만 따지게 됩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한 것들에 대해서 잘못을 얘기해야 되는데 그것을 얘기하지 않고 그 이후의 일들을 자꾸 얘기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나도 잘못을 저지를 줄 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 이해하고 용서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잘못에 대해서 인정할 줄 아는 마음을 항상 가질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나는 당장 눈앞의 즐거움이나 눈앞의 괴로움이라고 하는 함정에는 빠지지 말아야 되겠다 하고 스스로 마음을 먹어야 됩니다. 함정에만 빠지지 않았을 거 같으면 적어도 선한 일을 할 것 같으면 그 선한 일을 계속해서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악한 일인 줄 알 거 같으면 악한 일을 그만둘 수는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는, 자신이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항상 잘못들이 크게 일어나버립니다. 내가 이렇게 말을 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는가? 당장 지금 다른 일에도 신경쓰라고 얘기했는데 자신이 중심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놔놓으면 그것이 우선이 돼버립니다. 저사람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선한 일인지 악한 일인지, 또는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악의를 가지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탐심을 가지고 하는 것인지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들에 대해서 중심을 향하도록 하게 되는 거라.

 

자신이 중심이 될 수 있습니까? 눈이라고 하는 것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방법이 없습니다. 맛보는 것도 해도 맛보는 역할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개개인이 자기 역할을 하는 것밖에 없는데, 그 속에 '나'라고 하는 것이 없는 건데, '나'라고 하는 것이 중심이 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일들을 할 경우에 자신이 중심이 되게끔 해서는 안됩니다. "왜 엄마 말 안 들어?" 이렇게 해버리면 그 사고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아이 입장을 생각을 해봤고 그리고 그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선한 일인지 악한 일인지 고려해봤느냐는 거라. 엄마 입장을 자꾸 드러낼려고 한다는 거라.

자신이 중심이 돼버리면 어떠한 것도 문제가 항상 커져버린다 하는 것을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에는 힘들어져버린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눈앞의 결과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함정입니다.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도 함정인 거고,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도 함정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 함정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앞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함정, 눈앞의 괴로움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한번 보십시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몸을 객관적으로 관찰을 해보십시오.

자신의 몸을 객관적으로 관찰해볼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몸도 동일하게 보게 됩니다.

나는 깨끗하다고 볼 것 같으면 다른 사람도 깨끗하다고 봐야 되는 것이고, 내가 부정하다고 볼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도 부정하다고 봐야 됩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한번 객관적으로 보십시오. 어디 하나 완전한 것이 있는가? 내 생각이 완전합니까? 아니면 내가 하는 행동이 완전합니까? 내가 말하는 것이 탐·진·치 없이 말하고 있고 완전합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되면은 그러한 나라고 하는 중심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또한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나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남이 한 잘못에 대해서 용서하고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려고 하는 거고. 또한 내 자신이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항상 조심하게 되는 거고.

 

그다음에 두 번째로 그런 눈앞의 즐거움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감각기관을 제어할 줄 알아야 됩니다.

밖의 정보들에 대해서 좌우되지 않을 수 있는가? 특히 요즘 가을이 되니까 단풍철이라서 나무색도 울긋불굿 하고 들판도 황금색으로 바뀌고 합니다. 그냥 혹 갑니다. 누가 옆에서 누구야, 어디 단풍 구경가자 그러면 혹 가버립니다. 밖의 정보에 좌우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내가 할 일이 있는데, 당장 내가 선원에 와서 수행해야 되는 데도 거기 혹 가버리는 거라. 감각기관을 제어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돼버립니다.

 

밖에서 오는 감각기관만 그렇습니까? 자기 자신의 감각기관에 와닿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눈은 보는 역할밖에 못 하고, 혀는 맛보는 역할밖에 못 하는데도, 더 이상을 원합니다. 그냥 본다고 보지 않고 예쁘다고 보게 되는 거고, 그냥 맛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맛있다 맛없다 할려고 하는 거라. 그런데 맛본 음식 한번만 씹어가지고 손바닥에 뱉어내봐봐. 그게 얼마나 맛있는 음식이야? 아마 그거 다시 먹을려고 하지 않을 거라. 그런데도 그냥 맛보지 않고 맛있다고 먹는 거라.

그것이 점점 내려가면 더 부정한 것으로 바뀌어가지고 결국에는 아주 부정한 상태로 해서 몸 밖으로 배출되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먹을 때는 자꾸 맛있다고 먹을려고 한다는 거라. 오히려 부정한 것으로 보고 먹는 것이 맞는 것이지, 더 나아가가지고 그런 부정하고 맛있다고 먹지 않고 그냥 맛본다고 먹는 것이 맞는 것이라.

 

눈이라고 하는 것, 귀라고 하는 것, 모든 감각기관들은 스스로 그렇게 제어를 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그의 역할 밖에는 못합니다. 왜 자꾸 예쁘다고 볼려고 하고 맛있다고 맛볼려고 하느냐는 거라.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됩니다.

자신의 감각기관도 그렇게 제어를 해야 되고, 밖에서 오는 외부의 자극들도 제어를 해야 됩니다. 감각기관을 제어하지 못하면 항상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다음에, 적당량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보는 것 과다하게 보고, 맛보는 것 과다하게 맛보고, 그러면 적당량을 모릅니다. 그럼 더욱더 좋은 거 볼려고 하고, 더욱 더 맛있는 걸 찾아 헤매게 됩니다.

 

만날 아침 저녁으로 스님들은 그 게송을 독송합니다.

(네 가지 공양물을 사용할 때의 관찰 게송, taṅkhaṇika paccavekkhaṇa)

빠띠상카- 요-니소- 삔다빠-땅 빠띠세-와-미

(paṭisaṅkhā yoniso piṇḍapātaṃ paṭisevāmi)

이렇게 하면서.

 

"내가 먹는 이 음식은 단지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하는 거라. 즐거운 느낌을 일으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배고프다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 배고픈 느낌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거 음식을 먹는 것이지, 이걸 맛있다고 먹고 그리고 그걸 더 갈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러기 위해서 먹지 않겠습니다 하고 다짐하고 먹는 거라.

몸의 영양분으로 음식을 먹을려고 해야 되는 것이고, 또 옷이라고 하는 것도 몸을 덮기 위해, 추위와 더위로부터 피하기 위한 도구로써 자꾸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 이상을 생각을 해버릴 것 같으면 그걸 제어하지 못하면 넘어가버린다는 거라.

 

왜 적당량을 몰라? 스님들은 현대사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돈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차비도 있어야 되고, 급작스럽게 뭘 써야되고, 그리하더라도 적당량은 안 넘길려고 그럽니다. 통장에 돈이 몇십만원이 있으면 나머지가 있으면 나눠줘버립니다. 그것을 유용하게 쓸 줄 몰라서 그러고 있는 거라? 옷 같은 것이 생기면 다른 스님들한테 그거 나눠줍니다. 그거 쓸 줄 몰라서 그러는 거 아니라. 적당량을 알기 때문에 그 적당량 이상은 가지지 않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에 물들 수 있는 조건을 만들지 않을려고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항상 그 적당량을 항상 알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적당량 이상들은 과하다고 자꾸 인식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즐거움의 함정에 빠지질 않습니다. 적당량을 알면은 술을 먹다가도 아, 적당하다 싶을 때 그만두어버립니다. 그럼 그 이후의 일들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잘 놀다가도 적당한 때를 알 거 같으면 그 이후에 나쁜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재가자니까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신다, 어쩔 수 없이 놀아야 된다, 부처님은 그것조차도 하지마라 했지만 그거는 이해를 한다 치자. 그래도 자기가 스스로 제어할 줄 알고 적당량은 알아야 될 거 아니라!

 

그다음에, 그러한 눈앞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자비의 마음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자비의 마음이 없어가지고는 살아가는데 항상 탐·진·치에 휩싸여버립니다. 나를 내세울려고 하고 항상 탐심과 진심과 어리석은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은 조건 따라서 일어납니다. 어떤 조건을 따르느냐에 따라서 마음은 그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자애의 마음이 밑바탕에 깔려있을 거 같으면 어떠한 조건을 만나더라도 적어도 일어나는 마음들은 선한 마음들을 일으킬 수가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남을 돕고 은혜를 아는 마음들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아나타삔디까에게 이때까지 같이 생활해오고 은혜를 입은 것에 대해서 그것을 알기 때문에 잃어버린 재산들을 찾아줄 수가 있는 거고, 또 아나타삔디까를 돕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 소유로 하지 않고 도와주게 되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큰 금액이 생기면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게 됩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면 항상 남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받을려고만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올바른 노력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노력의 힘은 굉장한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아무리 선한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올바르게 노력하지 않으면, 그 선한 마음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의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다시 또 그 대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이나교에서는 "살생하는 것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노력하지 않는 마음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올바르게 노력하는 마음이 있으면은 적어도 살생하는 업은 면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물론 불교하고 정확하게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올바른 노력이라고 하는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거라. 그것을 유지시켜 주고 그것을 나쁜 것들을 방어해줄 수 있는 것은 그 노력의 힘에 있다는 거라.

 

게을러 가지고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도 지속해나갈 수가 없고, 함정에 빠지는 것들도 막을 수가 없고, 그래서 여러분들은 자꾸 노력을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도 올바른 노력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올바른 일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노력을 계속해나가야 됩니다. 승가, 상가에 보시하는 일이 올바른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지금 현재 가난하게 돼도 그걸 계속한다는 거라. 눈앞에 있는 좋은 것 싫은 것들의 함정에 빠져버리면 올바른 노력을 지속해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눈앞에 있는 즐거움이라고 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 일들입니다.

 

경전은 이렇게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제시를 해줍니다. 경전을 읽을 때에도 그것을 잘 되짚어보고 거기에서 자기가 교훈을 삼아서 실천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