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죽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아짠 아사바 스님 입멸이야기) (20140925)

담마마-마까 2021. 8. 17. 09:00

https://youtu.be/JIeOulsbLcw

* 죽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 (아짠 아사바 스님 입멸이야기) (20140925)

 

「죽기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게송 먼저 읽어드리겠습니다.

 

"압빠마요 마눗사낭 낄레이야낭 수빠리소

짜레이야 디따 시소와 낫티 맛쭈사 나가모." 그렇게 됩니다.

 

"사람의 일생은 매우 짧다. 산다는 것은 매우 괴롭고 힘든 일이다.

이렇게 지혜롭게 생각해서 죽을 때까지 선행을 실천하십시오.

방일하지 말고 고귀한 수행을 실천하라." 이런 것입니다.

 

첫 번째 "사람의 일생은 매우 짧다 하는 걸 자주 생각하라" 하는 게송입니다.

4개로 돼있죠? 여러분 생이 짧은 걸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수명이 짧은 걸 경전에서 그것을 일곱 가지로 비유를 해놓은 게 있습니다.

1. 이슬과 같이 짧은 시간이다. 아침에 해 뜨면 사라져버리는 이슬과 같다.

2. 또는 비 올 때 물방울 탁 떨어지면 물거품 같이 톡 물방울이 튀잖아. 그것도 금방 탁 사라져버리는 것들이라.

3. 또는 물에 작대기를 가지고 선을 착 그린 것과 같다. 물에 그린 선. 그것도 금방 사라지는 것이다.

4. 그다음에 산으로부터 흐르는 강물. 산에서 계속 흘러오는 물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계속 사라져버립니다.

5. 그다음에 입에 고이는 침. 침을 안 삼키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침은 계속적으로 생겨나고 사라지고, 생겨나고 사라져버립니다.

6. 그다음에 고깃간에 걸려있는 고깃덩어리. 사람이 누가 사가지 않더라도 부패해서 썩어서 버려져버리게 됩니다. 그것도 굉장히 짧은 거라.

7. 그다음에 도살되기를 기다리는 소와 같이 생각하라.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을 운명에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하라 해서 사람의 수명이 짧은 걸 경전에서 이렇게 일곱 가지로 비유를 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줄 알면 좋은데 대부분 짧은 줄을 모릅니다. 짧은 줄을 모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그것이 나쁜 일인데도 그것으로부터 떠날 줄을 모르고, 또는 그것이 선한 일인데도 그것을 즐겨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짧은 줄 알면 빨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더욱더 그것을 할려고 하게 됩니다. 금방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지금 해야 될 것들이 분명해진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생명이 짧다는 생각을 자꾸 해야 됩니다. 짧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항상 다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경전에도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장삿꾼이 장사를 하러 가다가 비를 만났어요. 그 축제기간에 그 물품을 가서 팔아야 되는데 그때 당도를 못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생각하는 게 '아, 축제 지나고 나서 언제 또 좋은 일이 있지. 그때까지 거기서 기다려가지고 그 물건을 팔아야 되겠다' 생각을 하고 천천히 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 행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씨익 웃습니다. 아난다가 부처님보고 왜 그렇게 웃습니까? 저 사람은 일주일 뒤에 자기가 죽는데 자기가 죽는지도 모르고 앞으로 다음 축제 때 물건 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 사람에게 가서 아난다가 "당신은 일주일 밖에 못삽니다. 그런데 다음 축제 때까지 기다려서 그 물건 팔 수 있는 조건이 안됩니다." 부처님이 얘기한 것은 거짓말일 수는 없으니까 이 상인이 경각심을 일으킵니다. '어, 지금 내가 해야 될 게 느긋하게 다음 축제 때까지 기다려서 물건 팔 것이 아니다'하는 거라.

여러분이 일주일 뒤에 죽는다고 부처님이 얘기했다면 뭐할 거 같애요? 일주일 동안에. 이것들 실컷 쓰고 싶어? 아마 그리하면 죽을 때 돼서 후회할 겁니다. 또는 내가 죽음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큰 방호벽 쳐놓고 그 속에서 꼼짝 않고 있을 거라? 그런다고 죽음이 안 와?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것을 피할 방법은 없는데 죽음이 온다는 사실로부터 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해야 됩니다. 일주일 동안. 그 맞을 준비하는데 실컷 놀고 먹고 하는 것이 맞을 준비 하는 거는 아니잖아.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 그럼 나는 어찌하면 좋습니까? 다른 거 없다. 네가 일주일 동안 할 거는 그냥 열심히 호흡 알아차리면서 적어도 성인의 경지 문턱에만 들어가더라도 나쁜 데는 안 떨어질 거니까 그거라도 해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공양 올리고 일주일 동안 앉아서 내내 수행합니다. 수다원에 탁 이르러요.

수다원에 이르면 어떻게 되요? 나쁜 데는 떨어지지 않죠? 적어도 다음생에서 태어나더라도 인간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는 거라. 인간이나 천상이나 범천계나 그렇게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지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런 확신은 분명하게 듭니다. 설혹 그렇지 않다고 경전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일주일 동안 얼마나 잘하겠어? 아주 편안하고 고요하고 그리고 그런 다른 잡다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행복을 누리는 겁니다. 일주일 동안에.

 

그리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거는 수다원에 이르른 사람들은 적어도 죽을 때 자기가 죽는 마지막 순간에 숨이 끊어지는 걸 분명하게 알고 죽습니다. 그 얼마나 좋은 일이라? 설혹 내가 일주일 뒤에 죽을지 안 죽을지 그것은 모른다고 하더라도 죽을 때 내가 어, 내가 숨을 들이쉬며 죽는지 내쉬며 죽는지, 죽을 때 마음이 어떠한 마음으로 죽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죽는다고 할 거 같으면 얼마나 행복한 죽음이라? 그걸 다들 못해서 난리인데.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수다원을 이루고 나서 일주일 뒤에 죽음을 맞이했어. 죽음은 부처님도 막을 방법이 없어. 아무리 나 좀 더 살려달라고 애원하더라도 그건 부처님이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은 수다원에 이르고 나서 죽은 거라. 얼마나 큰 이익이라? 그렇지 않았으면 죽는지도 모르고 죽었을 거고, 아니면 죽는 줄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엉뚱한 일들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수명이 짧다는 생각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야 지금 할 일들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게송입니다. 그렇게 사람의 수명은 짧은 것인데, 그 짧은 동안에도 사는 것은 괴로운 일들뿐이라는 거라.

 

좋은 일은 없고 만날 괴로운 일들만 있는다는 거라.

옛날에는 이러한 병들이 있었다고 그럽니다.

'시따'라고 해서 추위로부터 오는 병, 그다음에 '운하'라고 해서 뜨거움으로부터 오는 병, '지갓차' 라고 해서 배가 고픔으로부터 오는 병, 네번째 '삐빳사'라고 해서 목이 마르는 갈증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병, 다섯 번째 '웃자'라고 해서 대변을 너무 잘보고 못보고 하는 대변으로 인해서 오는 병, 여섯 번째 '빳사오'라고 해서 배출하고 싶어 하는 욕구로 인해서 오는 병.

이런 여섯 가지뿐이었다고 합니다. 아주 간단하죠?

그런데 사실은 우리 몸의 병이라고 하는 것은 이 여섯 가지로 인해서 대부분 일어나지게 됩니다. 지금은 이거보다도 훨씬 더 많죠? 요즘은 에볼라 라고 하는 것도 생기고, 뭐도 생기고 가면 갈수록 병들은 더 많아지게 됩니다. 병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마만큼 괴로움들도 더 많아진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과거보다도 괴로움이 많아지면 많아졌지 적어지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도 사람들은 과거보다도 훨씬 더 편안하고 좋다고 생각한다는 거라.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거라.

짧은 생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은 언제든지 올 수가 있고, 그 죽음이 올 때까지도 사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는 거라. 지치는 일이라는 거라. 그거 방어하기도 바쁘다는 거라.

 

스님도 이번에 치과 가서 이빨치료를 했거든요. 처음에는 단순하게 되게 아프기 때문에 좀 견디고 있다가 아, 이건 도저히 견딜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해서 갔더니 이빨 하나를 아예 반토막 이상 들어내고 그걸 씌워야 된대. 그래가지고 한참 동안 그걸 하니까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으로 인해서 끝났는가 싶더만 또 좀 있으니까 또 뭐를 다른 걸 하나 조치를 하는 거라.

또 있으니까 스님 이쪽에 이빨 하나가 없네요. 요거 임플란트 해야 되겠습니다. 자꾸 생겨나는 거라. 이빨 요거 하나만 하더라도.

옛날에는 안 그랬거든. 옛날에는 그냥 먹고 양치를 안 해도 별로 신경 안 써도 됐는데, 인제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렇게 해가지고는 못견디는 거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 몸은 병들어가게 돼 있고, 내 몸은 지쳐가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은 안 그럴 거 같습니까? 그 짧은 수명인데도 점점 더 병들고 힘들고 지치는 일들만 더 많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사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즐거운 일만 자꾸 쫓아가지고 간다? 그건 오히려 괴로움을 더 만드는 일들이라는 거라.

나이가 들면 들수록 즐거운 일들을 쫓아가야 되는 것이 아니고 아, 내가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나도 죽음을 맞이해야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을 대비해야 되는 것이지 즐거움을 쫓아가야 될 일은 아니라는 거라.

 

괴로움을 받으면서 죽는 날을 기다려야 된다고 생각을 해보면 참 비참합니다. 암에 걸린 사람들 죽음을 얼마 남겨두고 그냥 괴로움 받으면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겠죠. 그렇지만 그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괴롭고 힘들 거라. 점점 더 암덩어리는 커질 것이고 점점 더 괴로움은 많아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병원에서 손쓸 수 없는 것들을 그걸 도려내고 어떻게 할 방법도 없는데.

여러분들은 그와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괴로운 일들은 점점 더 많아질 수밖에 없고 죽음은 딱 정해져 있습니다. 그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뭘 지금 즐거운 일들을 쫓아가면서 살 이유가 어딨느냐는 거라.

그래서 항상 생각을 해야 됩니다. 살아가는 것이 짧다는 생각과 함께 아, 사는 것은 괴로운 일들만 계속적으로 더 많아지고 죽음은 내 앞에 딱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죽음을 앞둔 자들이 해야 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고 세 번째 네 번째 게송에 얘기합니다. 그게 뭐냐면

깟땁방 꾸살랑(kattabbaṃ kusalaṃ) - 선한 일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

짜리땁방 브리흐마짜리양(carittabbaṃ brahmacariyaṃ) - 고귀한 수행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두 가집니다.

 

선한 일들을 실천하는 것. 경전에는 보시의 일을 행하고, 지계의 일을 행하고, 또 사마타 수행을 하고,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하는 것들이 선한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바꿔서 얘기해봅시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상태이고 괴로운 일들만 자꾸 일어나는데 집착해야 될 것들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우선 자꾸 버리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버리는 연습!

누가 이게 필요하다 그러면 그냥 줘. 나에게 이게 없어지고 이걸 버려버리는 겁니다. 지금 당장 급한 것도 아니고 조금 아쉬움이 있을지 몰라도 내가 줌으로 인해서 오는 기쁨이 오히려 더 크다고 할 것 같으면 버려버리고 줘버리라는 거라.

주는 데서 오는 기쁨들은 굉장히 큽니다. 일상적으로 빌려주는 거하고 아무 대가 없이 주는 거하고 나에게 오는 기쁨들은 차이가 많이 납니다.

 

오늘 대구에서 오시는 분들은 공양을 이마만큼 가지고 왔습니다. 그거 준비할려면 아마 대구에서 오는데 만도 시간이 걸리는데 새벽부터 아마 부리나케 준비를 했을 거라. 스님 입장에서는 칭찬할 일은 아닙니다. 부담스럽지 않고 아, 이것을 내가 공양을 올림으로 인해서 기쁨들이 일어나야 되는데, 물론 기쁨이 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간소하게 부담스럽지 않게 할 거 같으면 일하면서도 기쁨이 일어나는데 일할 때는 생고생하는 거라. 그거 다 준비할려면. 줄 때 기쁨은 일어날지 몰라도 그거 왜 만들면서 준비하면서 생고생하면서, 기쁨들은 일으키지 못하느냐는 거라. 그것은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주는 것이라고 해서, 많이 주는 것이라고 해서 그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줄 때 기쁨이 일어나야 되는 거고, 주기 전에 내가 그걸 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마련하면서 기쁨이 일어나야 되는 거고, 주고 나서도 이후에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기쁨이 일어나야 된다는 거라.

보시를 많이 한다고 해서 기쁨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에게 적정한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무조건 버리라 해가지고 다 버려버리고 날 것 같으면, 자기는 오히려 더 기쁨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잘못된 보시라는 거라.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해야 되는 것이 이렇게 보시의 기쁨을 누리는 것, 버려버리고 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을 자꾸 누리도록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계를 지키는 일도 마찬가집니다. 아, 오늘 내가 팔계 받는 날이니까 오늘 팔계 잘 받았다. 잘 지켰다. 그러면 자기 자신도 뿌듯합니다. 배고픔도 오후에 참고 잘 견뎠다, 배는 고플지 몰라도. 그 시간에 내가 올바른 일들도 더 많이 하고 올바르게 해야 할 일들을 했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더 기쁨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차라리 그렇지 않고 굶어가지고 괴로움이 일어나고 또 하루 지나고 나서도 '아이고, 하는 일들이 밥을 안 먹으니까 영 뭐 아무 것도 못 하겠고 엉망이 됐다.'

차라리 그걸 오계면 오계를 지키고 팔계를 지키지 않는 것이 나은 것이지, 억지로 그것을 지킨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라.

 

그 일을 하고 나서 또 할 동안에 얼마만한 기쁨과 행복감들이 나에게 일어나느냐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은 보면 팔계 정도는 하루 정도 그리해도 크게 무리는 없습니다. 단지 정신적으로 아, 이거 안 먹으면 어떡할건지 하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이지 실제로는 크게 지장이 없습니다. 그게 생활화되고 습관화되면 오히려 더 개운하고 몸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일주일에 한번씩은 불재일날은 팔계를 지킬려고 자꾸 하게 되고, 좋으니까!

그런 지계의 기쁨들을 누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사마타 수행, 위빳사나 수행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 선한 일들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을까? 죽음이 눈앞에 와 있기 때문에! 화살이 박혔는데 이놈이 누가 쐈는지, 이 화살이 어떤 색깔인지, 어떤 종류로 만들어진 건지 그거 지금 조사하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급한 거는 화살을 뽑는 일입니다.

죽음이 여러분들 앞에 와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선한 일들을 실천하는 겁니다. 화살을 먼저 뽑아야 그게 좋은지 나쁜지 뭔지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지 화살 뽑지 않고 그거 조사하고 있으면 그냥 죽습니다.

 

선한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야 되는 것이지 할 기회가 없을 때 할려고 해도 그걸 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마타 수행, 위빳사나 수행 앞으로 여러분들 몇 년 더 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죽을 때까지 그거 할 수 있을 거 같죠? 힘이 딸려서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님들한테도 출가 할려면 빨리 해라. 늦게 출가 해가지고는 평생 수행도 못하고 오히려 선한 일 할 수 있는 기회도 뺏겨버리고 아무 이익 없다. 그래서 늦깍이에 출가하는 스님을 반대합니다. 더욱더 열심히 수행할려고 출가해 놓고 수행할 기회가 없는데, 차라리 그 기회에 선한 일들을 더 할 수 있는데 그 기회조차도 스스로 뺏어버리는 거라.

 

여러분들은 지금 수행할 시간 얼마 없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일분 일초가 점점 더 힘들어지는 시간들입니다. 좋은 법을 만났을 때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그거 지금 조사하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라.

선한 일들을 지금 실천해야 됩니다. 왜? 죽음이 여러분들 앞에 있기 때문에!

 

그다음에 자신이 죽을 때를 정확히 아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지금도 스님은 우리 스승님을 생각하면 미소짓는 게 뭐가 떠오르냐 하면 삼개월 전에 전화가 와가지고, 그때 내가 한국에 있었거든. 뜬금없이 "야, 삼개월 뒤에 태국으로 온나" "스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 "나 죽는다" 삼개월 뒤에 죽는다는 거라. "나 그때 죽음을 맞이하니까 그날 온나." "예. 알겠습니다." 하고 처음에는 삼 개월 뒤에 무슨 일이 있겠거니 생각을 했는데, 나한테만 전화한 게 아니고 외국에 나가 있는 스님의 애제자들 몇사람한테는 전화를 하고 태국에 있는 제자들한테도 똑같이 그렇게 얘기를 한 거라.

그때 사실은 외국에 있는 스님들도 마찬가지고 거기에 있는 스님들도 반신반의 하면서 그날 갔었어요. 그날 점심까지 공양 잘 잡쉈거든. 그리고 그전에 스님 다른 일 있었느냐 하니까 전혀 이상 징후가 없었다는 거라. 매일 법문할 거 있으면 법문하고, 수행 지도하고, 평일하고 똑같이 했다는 거라.

 

그런데 마지막 날 나까지 쫓아가고 나니까 스님이 자기 상호를 나보고 보래. 그러면서 "니 거짓말인 줄 알았지" 그러는 거라. 거짓말인 줄 알았지.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스님 정정하시네요. 공양하시고 나서 법문하실 거죠?" 법문하실 거래. 그러면서 씨익 웃으면서 "진짜야" 그러는 거라. 그때사 정신이 번쩍 드는 거라.

아니나 다를까 공양 잡수시고 나서 다른 일반 재가자들 공양 다 드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까지 우리랑 밖에 사람들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죽음에 대한 얘기는 전혀 안 했거든.

 

그러고 나서 공양 끝나니까 법문 한 삼십분 하시고 나서, "좌선수행하자" 하시더라고. 그래서 그런 갑다 하고 수행에 탁 들어가는데 이미 느낌이 틀리는 거라. 스님에게서 풍겨져오는 느낌이 탁 틀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고 몇몇 스님들이 동시에 그렇게 느끼는 거라. 어느 스님들은 아, 스님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나 하는 걸 일부러 알려고 하고, 예민한 사람은 조금 있다가 스님 열반하셨습니다 하고, 이렇게 동요를 하면서 속닥속닥 하기도 하고. 변한 건 하나도 없어. 고개만 약간 이렇게 되고 숨을 대보니까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라. 그때사 인제 뒤늦게 출가자고 재가자고 아이고 스님 어쩌고 저쩌고 울고불고 난리 난 거라. 이미 스님은 먼저 벌써 가셨는데.

그래서 난 우리 스님을 떠올릴 때마다 그 생각이 최고 먼저 떠올라. 그래서 우리 스님만 생각하면 입가에서 미소가 쫘악 번져.

자신이 죽을 때를 알고, 그게 무슨 아라한이 돼야 가능한 겁니까? 아닙니다. 아라한이 되지 않아도 가능한 겁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역사에 보면 수다원에 이른 스님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스님은 신통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스님이었어요. 제자들한테 물어봅니다. 야, 옛날 스님들 유명한 스님들 죽을 때 어찌 죽었노?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사람, 서서 죽었다는 사람, 뭐 별 소릴 다 들어. 그래? 그럼 나는 죽을 때 다른 방법으로 죽어야 되는데.

그래서 제자들이 웃으면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걸어가면서 죽은 스님은 없습니다. 어떻게 걸어가면서 죽을 거라? 걸음을 멈출 때 죽을 거 아니라.

그런데 이 스님은 옳다구나 하고 내가 그러면 죽을 때 걸어가면서 죽을테니까 잘봐라 이. 진짜 그렇게 돌아가셨어. 경행처를 깨끗이 닦아라 해놔 놓고 나 여기서 저기까지 이 선을 따라서 걸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저리 걷다가 저쪽 끝에 가서 착 돌면서 도는 순간 한발 들린 상태에서 내가 죽을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한발은 전방을 향해있고 한발은 요렇게 들린 상태로 돌고 있고, 그러면서 몸은 반쯤 고개를 돌리고 있는 상태에서 딱 열반에 들게 됩니다. 실제 그랬다는 거라.

 

죽을 때를 안다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데도 그게 참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 왜 그게 가능할까? 호흡의 상태만 분명하게 알면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호흡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호흡이 거칠어지는지 느려지는지 호흡으로 인해서 내가 탐심이 일어나는지를 분명하게 압니다. 호흡만 잘 조절해버리면 그런 것들은 없어져버립니다.

그리고 평상시 호흡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면 이게 적어도 몇 개월, 삼개월 전부터는 아, 내 호흡이 이 정도에서 반드시 멈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길게는 그렇게 삼개월 짧게는 한 일주일, 그냥 예감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분명하게 그것을 아는 거라. 그 정도는 수다원만 되어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 이하에서는 실제로 무리라는 거라. 여러분은 아직 무리겠지? 그래도 어쨌든 죽는 순간을 안다는 그 행복이 어디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앞에 보시, 지계, 사마타, 위빳사나 어쩌고 저쩌고 하더라도 그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죽고 나서 나쁜데 안 떨어지기 위한 거고, 죽을 때 적어도 내가 죽음의 순간은 알고, 언제 죽을지를 알려고 할 거 같으면 다른 거 없습니다. 호흡을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자신의 호흡 상태조차도 분명하게 몰라가지고 뭔 자기 거 가지고 산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거라.

여러분은 분명하게 알 수 있어야 됩니다. 자신이 죽을 때를 분명하게 알려고 하는 것. 그 생각을 일으키더라도 지금 내가 할 일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게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나는 나이 들고 병들고 해서 이생에서는 틀렸다. 이생에서 수다원까지 이르기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 사실은 안되는 것은 아닌데, 어려운 것뿐인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죽기 전에 뭔가를 해서 나쁜 곳에는 태어나지 않도록 자꾸 연습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죽음의 순간에 탁 떠오르는 생각이 다음생을 많이 좌우합니다. 내가 죽음의 순간에 그래도 좋은 생각을 일으킬 수만 있으면 적어도 윤회를 하더라도 나쁜 데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라.

 

우리 모친이 그랬거든. 위빳사나 수행 안지 얼마 안됐습니다. 그전에 계속적으로 얘기는 듣고 했지만 실제로 당신 본인이 수행한 거는 얼마 안 돼요. 한 이삼년 됐을까? 그러고 나서 죽음을 맞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그때가 한 몇개월 전부터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라. 암 선고를 받고 나서 급하니까 나한테 "수행하는 거 좀 더 가르켜도" "왜? 지금 해갖고 뭐 깨달을 수 있을 거 같애?" 그건 자신 없대. 그리고 자기는 그거 바라지도 않는대. 내가 수다원이 되고 일래과가 되고, 불환과가 되고 아라한이 되고 하는 그거 바라는 거는 아니라는 거라. 그런데 딱 하나 하고 싶은 것이 있대. 마지막 죽을 때 적어도 내가 좋은 생각하고 죽고 싶다는 거라. 좋은 생각!

 

그럴 자신 있어요? 평상시 때 닐리리 하며 놀더라도 가끔씩은 호흡관찰 하라는 거라. 호흡관찰하는 것만 잊어버리지 않으면은,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면은 언제든지 그것을 불러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호흡의 상태를 잘 모르고 하더라도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는 그걸 탁 떠오를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호흡하면서 탁 죽음을 맞이하니까 나쁜 생각 떠올리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거라.

 

마지막 손을 이렇게 잡고 있었거든. 그런데 손의 느낌이 있습니다. 호흡을 관찰하고 있는 사람의 손의 맥박하고, 관찰하지 않고 생각이 떠올라서 일어날 때의 맥박하고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 맥박이 어느 순간 아주 편안하고 조용해지는 거라. 거의 흐름이 없어지는 거라. 그래서 가만히 코에다 손을 대보니까 호흡이 아주 자연스러워. 거의 쉬지 않을 정도로. 그러면서 마지막을 탁 맞이하게 됩니다. 그 짧은 찰나지만 적어도 죽음의 순간에 나쁜 생각 일으키지 않고 호흡을 하면서 탁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거라.

 

공부했으면 적어도 그건 해야 될 거 아냐? 다른 거 다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것 정도는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 앞에 죽음이 와있는데 그 연습 안 하고 돼? 자꾸 떠올리라는 거라. 밥을 먹을 때든 아니면 걸어갈 때든 아니면 친구하고 얘기할 때든 그 생각을 잠깐이라도 떠올려가지고 호흡하는 거 관찰하고. 그러고 또 얘기하기도 하고. 그걸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거라. 그래야 죽음의 직전에 나쁜 생각 나쁜 느낌들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돼가지고 다 못하는데, 어쨌든 죽음이 여러분들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해야 될 것은 방일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죽음을 대하는 길입니다.

그것만 하더라도 적어도 선행을 쌓아서 지금 살아가면서 기쁨을 누리는 거고 그것들로 인해서 나쁜 데는 떨어지지 않을 거고, 또 정 그거조차도 못하면 호흡이라도 알아차려서 마지막 순간에 나쁜 생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고, 더 나아가가지고 내가 성인의 경지에 이르겠다. 그래서 윤회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무섭고 두려워해야 될 것이 아니고 나에게 반드시 오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피할 방법은 없다는 생각을 자꾸 일으키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지금 할 일과 또 해야 할 일들을 분명하게 구분을 하게 됩니다.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 여기 법문에서의 스승님은 아짠 아사바 스님이십니다.

수행 첫 스승이신 아사바 큰스님은 미얀마 스님이며 마하시 스님 직계제자이셨습니다. (2004년 10월 28일 입멸. 세수 8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