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오해하기 쉬운 것들 (20141002)

담마마-마까 2021. 8. 18. 09:00

https://youtu.be/cSVccsYP3Us

* 오해하기 쉬운 것들 (20141002)

 

오늘은 여러분들이 자칫 오해하기 쉬운 것들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이 게송, 이걸 보고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조금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이겼다. 모든 일을 알았다.

모든 것에 대해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버렸다.

갈애를 소멸해서 해탈에 이르렀다.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았기에 누구를 스승으로 삼을 것인가?

그 게송입니다.

 

모든 것을 이겼고, 모든 것을 알았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보통 우리가 일체지자(一切智者)라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 일체지자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 게송은 맛지마니까야에 있습니다. 또 담마빠다에도 있습니다. 담마빠다에는 이 게송만 있고, 맛지마니까야에는 여기서 덧붙여가지고, 「나는 모든 것에 승리했기 때문에 승리자라고 부를 수 있다」 하는 내용까지 들어가 있습니다. 내용은 상이합니다.

 

이 게송이 나온 것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처음 법을 설할려고 마음을 먹었죠? 어디로 갑니까? 바라나시에 있는 다섯 제자에게 초전법륜을 설하기 위해서 갑니다. 가면서 어느 수행자를 만났는데 그때 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이 이 말을 했는데 그사람은 콧방귀를 뀌면서 니가 뭐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다고 니가 모든 걸 알았다고 모든 것을 승리했다고 그렇게 하느냐면서 가버리게 됩니다.

거기에 나오는 게송입니다.

사람들이 이걸 보고 "부처님이 법문을 한 형태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또는 "부처님이 아직도 당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얘기들을 하는 게 있습니다. 그거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근본적으로는 어떤 분입니까? 내가 최고 잘났다 하고 얘기하는 부처님은 아니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회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합니다. 나는 이 분야에서 최고다, 아니면 나는 이걸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 부분에서는 또 최고다 하고 이런 얘기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 부분에서는 최고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고 일류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반드시 그거는 확인 받아야 되겠지? 최고인지 아닌지 확인을 받아야 다른 사람들이 아, 그것은 최고구나 하고 인정을 해주게 됩니다. 확인을 못 받으면 어떻게 돼요? 그거는 자기 혼자 최고라고 해봐야 다른 사람이 인정 안 해줘버리면 그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존심만 센 별로 보잘것없는 사람 취급받기가 쉽죠?

 

기독교도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유일한 신이다. 최고로 뛰어난 신이라는 거라. 그러면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마라. 유일한 신이 다른 신을 섬기든 말든 그거 뭘, 그정도 자신이 있으면 그걸 관여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지. 그 얘기는 유일하지 않다는 반증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하더라도 유일하다는 단정을 해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유일한 신이구나 하고 인정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 게송에 담긴 의미, 부처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뭔가 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에게 풀어서 얘기를 좀 더 해주겠습니다.

 

첫 번째, "나는 모든 것을 이겼다." "삽바비부(Sabbābhibhū)" 라고 빨리어로 씁니다.

모든 것을 이겼다 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어떤 걸 얘기할까? 부처님이 이길 상대가 뭐가 있겠어요? (수행자 대답 : 감각적인 욕망입니다.)

그것도 포함이 되겠죠. 여기 보통 '삽바'라고 할 것 같으면 사람들이 오해하면 진짜 모든 것들을 얘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삽바'는 그것이 아니죠?

부처님이 이길 대상은 딱 정해져 있습니다. 뭡니까? "자기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들'이란 '생명'을 얘기하죠. 몸과 마음이라는 생명. 그래서 몸과 마음이라는 생명은 오온으로 구성이 되있기 때문에, "오온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도 나는 다 다스려나갔다" "그것으로부터 다 이겨나갔다"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보는 것으로 인해서 보이는 대상으로 인해서 보게 됩니다. 그럼 눈을 통해가지고 오온이 일어나는 거라.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이기지 못하면 '아름답다', 아니면 '밉다' 하고 그것에 져버리게 됩니다. 번뇌를 이기지 못하고. 부처님은 그것으로 인해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죠? 그것으로부터 이미 이긴 상태이기 때문에! 그걸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이길 대상은 보통 세 가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갈애에 대해서 이겨라' 하고 얘기합니다. 갈애가 윤회하게끔 만들기 때문에! 그 갈애의 원인은 무명이지만 무명이 윤회를 하게끔 만드는데, 그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갈애에 인해서 오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갈애를 이겨버리면 윤회의 고리는 끊어진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갈애는 뭐가 있습니까? 세 종류가. 오욕락에 대한 갈애, 그다음에 존재하려는 갈애, 그다음에 존재하지 않으려고 하는 갈애 세 종류가 있습니다.

이것도 지금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오욕락에 대한 갈애는 여러분들이 수행할 때 대상으로써 많이 삼는 것들입니다. 그렇죠? 어떤 경우든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려고 자꾸 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마음이 욕구 욕락을 일으키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오욕락에 대한 것들만 잘 알고 있어도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음, 그냥 먹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맛있게 먹으면 되는 거고, 어디 가고 싶은 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다 오욕락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욕락의 첫 번째는 여러분들이 별로 그렇게 오해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좋고 싫은 것들에 대한 것들을 끊어버리면 되니까.

 

그런데 두 번째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 이 부분도 보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살고 싶다는 것들이기 때문에!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살고 싶다는 욕구로 이해를 하면 안됩니다. "더 가지고 싶다는 욕구"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래서 만족하지 못하는 성향이 될 것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 욕구를 멈출 줄 모릅니다. 쉽게 말하면 갈애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뭔가를 조금 더 가지고 싶고 조금 더 원할려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목표를 가지지 말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걸 오해를 합니다. 만족할 줄 아는 것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다른 부분입니다. 그런데 만족할 줄 모르면 어떠한 경우든지 계속적으로 갈애들은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인제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존재하지 않고자 하는 욕구라고 하는 것은, 이게 가장 많이 오해를 하는 부분입니다. '죽을려고 하는 것' 이걸 보통 얘기합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것도 일견 맞습니다.

뭔가를 했을 때 실패하고 우울증이 오고 그러고나면 탁 죽을려고 해서 죽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걸 다른 사람들이 풀면서 확대해석하면 육도윤회로부터 벗어날려고 하는 그런 욕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건 원래의 원어하고는 좀 벗어나있는 겁니다.

죽을려고 하는 욕구도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에 해당이 되기는 합니다. 그거는 쉽게 말하면 졌을 때, 졌을 때의 얘기입니다. 욕구가 일어난 것에 대해서 져버렸을 경우에는 탁 그걸 손 놓아버립니다.

 

그러면 안 졌을 때는 어떻게 될까? 갈애가 일어나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나는 것들은 어떤 경우들이 있을까? "분노"로써 표출됩니다. 쉽게 말하면 "자애의 마음이 없이 분노가 표출되는 것들은 전부 존재하지 않고자 하는 욕구"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파괴하려고 하는 욕구"입니다. 자신을 파괴하는 것은 자기자신을 해치는 행위라고 그럽니다.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것들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위들입니다.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오욕락 즐길려고 하는 것, 이것도 참 끊기 힘든 겁니다. 그다음에 만족할 줄 모르는 것, 이것도 참 끊기 힘든 것들입니다. 그리고 분노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 이것도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 그걸 해야만이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되는데! 또 그걸 해야만이 내 몸과 마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게 되는데!

 

그래서 경전에는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무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면 윤회로부터 벗어난다." 무상한 줄 알기 때문에 그런 세 가지 욕구들은 안 일어난다는 거라.

무상한데 내가 화낼 이유가 뭐 있고, 무상한데 내가 더 집착할 게 뭐 있고, 무상한데 그걸 즐길려고 할 이유가 없다는 거라.

무상한 성품만 뼈저리게 알 것 같으면 그래서 윤회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는 거라.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오욕락에 대해서 즐기는 것, 그거는 여러분들이 딱 머릿속에 마음에 두기를 '이것은 악마가 주는 선물이다.' 악마가 여러분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거라. 악마에 조종당하지 않으면은 적어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는 수행자가 오욕락에 젖어 빠진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거라. 그러니까 뭔가 정신이 헤까닥 뺏겨버렸다는 거라.

내 속에 악마가 선물을 주도록 만들어줘가지고는 안 되는 거라. 밤에 뭐 조그만한 헛깨비라도 보면 화들짝 놀라면서 자기 몸에 그걸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은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오욕락에 빠질 때마다 아, 이것은 악마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거라. 선물을 받으면 받을수록 자기는 오욕락에 더 빠질 뿐아니라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존재에 대한 욕구. 그거는 '만족하지 않는 것들'로 인한 것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차를 몰고 어디를 다녀본 사람들은 압니다. 숲 휴게소가 없으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중간에 가다가 잠깐이라도 쉬어주고 해야 되는데 그 쉴 장소가 없어. 휴게소가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위험을 자기가 더 증가시키고 그 위험에 빠뜨리는 짓을 계속적으로 행한다는 거라. 만족할 줄 모르는 것도 그와 마찬가집니다. 모든 문제들 그 위험에 빠지는 것들은 그 휴게소들을 만들지 못하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서울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더라도 휴게소에 몇번 들려가지고 갈 거 같으면 충분히 안전하게 갈 수 있는데 그걸 안 하고 그냥 급하게 서울까지만 갈려고 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 휴게소를 반드시 만들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파괴 욕구라고 하는 것인데 분노로 인한 겁니다. '자동적으로 불이 붙는 점화장치'와 같습니다. 자동점화장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분노는 어떠한 경우든지 자동점화장치 하고 같습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 건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모든 것들은 분노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탐욕에 대해서는 한가지 종류로써 설해놨지만, 분노에 대해서는 크게 봐도 네 가지로써 설해놓은 거라. 그마만큼 거의 모든 것들이 분노와 연결되어 있다는 거라. 자동점화장치라는 거라.

그러니까 말을 할 때도 자동점화장치가 발동되는 거라. 행동할 때도 그게 발동이 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마음에서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하라는 거라. 그 점화장치에 불을 끌 수 있는 것은 자애의 힘밖에 없다는 거라.

불을 붙여가지고 나를 태우든지 다른 사람을 태우든지. 그래서 분노라고 하는 것은 자동점화장치와 같이 파괴하는 욕구의 갈애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알았을 때는 이 세 개에 대한 갈애들은 끊기가 쉽습니다.

 

부처님은 이걸 다 알았다는 거라. 아,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그걸 일으킬 일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삽베(sabbe)' 라고 하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고, '아빈뉴' 라고 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그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로부터 승리했다, 이겼다 하는 뜻입니다. 나와 싸워서 이겼다는 거라. 나의 감정과 싸워서 이겼다는 거라.

 

여러분은 과연 얼마나 이기고 있나?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이 뭘 거 같애요?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자극에 내가 얼마나 반응하고 있는가? 어떤 반응들을 하고 있는가? 분노로써 반응하고 있는가? 아니면 욕심으로써 반응하고 있는가? 가지고 싶은 것으로써 반응하고 있는가? 뭐로 반응하는가? 거기에 따라서 존재 욕구가 클 수도 있는 거고, 존재하지 않고 사는 욕구가 클 수도 있는 거고, 오욕락을 즐길려고 하는 욕구가 클 수도 있는 거고. 그렇지만 그 세 개는 한 묶음입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누가 맛있는 감자를 줬다. 그럼 그 감자 먹을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감자를 예쁘게 깍아야 되겠죠? 예쁘게 깍고 나서 감자를 생으로 먹을 수 없으니까 삶아먹든지 구워먹든지 해가지고 조리를 해가지고 먹게 됩니다. 감자를 주었으면 우리는 우선 그걸 먹을려고 하는 욕구가 먼저 일어나게 됩니다. 오욕락에 대한 욕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살아가는데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일으키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부처님 가르침을 배운 사람들은 아무리 감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밥 먹을 때가 아닐 거 같으면 안 먹어. 방에 아무리 맛있는 것이 쌓여있어도 밥 때가 아니면 그걸 안 먹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만 이 감자를 이용하는 것이지 맛있다해서 내가 먹기 위한 도구로써 쓰지는 않는다는 거라.

 

오욕락이 일어난다고 해서 일어나는 대로 그걸 누릴만큼 다 누릴 거 같으면 아마 여러분들은 살쪄가지고 비만이 되는 거하고 마찬가지일 겁니다. 삶이 힘들어져버립니다. 오욕락은 즐길 대상이 아니고 오욕락이라고 하는 것은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을 해야 됩니다. 몸과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해야 되는 것이지 감자라고 해가지고 만날 그거 깍아가지고 끓여먹을 수는 없다는 거라.

그런데 어쨌든 감자는 먹을려고 조리하고 깍아내야 되는 거라. 그럼 어떻게 해요? 그거 맛있게 먹을라고 감자에 뭐 넣나? 소금 넣나? 어떤 사람은 소금, 어떤 사람은 설탕을, 맛있게 먹을려고 넣습니다. 감자만으로 먹어보는 거하고 그걸 넣고 먹어보는 거하고 차이가 나거든. 좀 더 맛있게 먹을려고 한다는 거라. 만족할 수가 없는 거라. 그러니 감자 요리법도 여러 가지 발견되는 거고,

 

그러니까 누구는 소금을 넣으면 맛있다고 그러는 거고, 누구는 설탕을 넣으면 맛있다고 그러고, 설탕을 넣는 사람은 소금 넣는 사람을 틀렸다고 그러고, 견해가 서로 충돌하는 거고. 니는 소금이 맛있으면 소금 넣어가지고 먹어라, 나는 뭐 설탕 넣는 게 맛있다면 설탕 넣어서 먹으면 될 건데 그걸 가지고 싸우는 거라.

자기의 견해에 대해서 만족하지도 못하고, 남이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존재하려는 갈애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거라.

그래서 남들이 감자를 먹은 것에 대해서 잘못된 방법으로 먹었다고 할 것 같으면 비난합니다. 또는 자기가 먹은 것들에 대해서 맛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그 맛없는 감자에 대해서 비난하든지 조리법에 대해서 비난을 합니다.

 

감자를 먹어도 사실은 이 세 개의 갈애가 동시에 다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어떤 특정한 것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보면. 먹고 싶다는 욕구만 가지고 그쳐버리면은 더 이상은 일어나지 않는데 대부분 그것을 먹었을 경우에는 이 세 개의 부분이 동시에 다 같이 일어나는, 동시는 아니지만 점차적으로 다같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거라. 그게 '아빈뉴' 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적어도 여러분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은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만이 이것을 멈출 수 있는가 하는 것들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삽바위두-하마스미(sabbavidūhamasmi)"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알았다."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할 거 같으면 보통 사람들은 전지전능을 뜻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 거라고. 가끔씩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스님한테 가면 내가 뭐 잘못한 거 있는 것, 그거 알 거 같아가지고 가까이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거 없습니다. 내가 남의 일을 뭐하러 신경써? 내 일하기도 바빠죽겠는데.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게 있습니다. 어떤 분이 "아, 나는 인제 해탈했다. 나는 인제 모든 걸 다 알았다." 하고 외치는 사람이 있었어요. 부처님이 봤을 땐 한심하거든. 그분은 삼매를 자유자재로 드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삼매에 들 것 같으면 대상이 없어져버리거든. 일반적으로 말하는 여러분들의 대상입니다. 기쁨을 대상으로 한다든지, 열반을 대상으로 한다든지 이런 대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보고 듣고 하는 감각으로 일어나는 대상들이 없어져버리기 때문에 뭐 성낼 이유도 없고 욕심부릴 이유도 전혀 없거든. 그러니까 아, 나는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나는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이 봤을 때는 그건 착각이라는 거라. 그거는 삼매에 들었을 때의 일인 것이고 삼매로부터 빠져나왔을 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를 시켜가지고 그 스님을 부처님이 있는 데로 오도록 하거든. 그러니까 오는데 하루는 공동묘지를 지나오게끔 하는 거라. 하루는 인제 막 죽은 사람을 옷을 발가벗겨가지고 던져놓은 거라. 그러니까 살아있는 사람하고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데를 지나오게 합니다.

그 스님이 부처님을 찾아갈 때 어떤 마음으로 갔을까? 그렇게 삼매에 잘 드는 사람인데. 앞에 공동묘지가 있으니까 돌아오는 거라. 보기 싫은 거라. 발가벗겨진 여인이 누워있는 걸 보니까, 더 보고 싶고 욕정이 일어나는 거라. 그런데 어떻게 마음이 고요해? 부처님이 그 얘기를 합니다. "너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아는 것이 아니다. 그건 네가 착각하는 것들이다."

 

전지전능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신통력이 있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 아니면 내가 삼매를 자유롭게 드는 것, 아니면 설혹 죽음을 조절해가지고 죽음에서 다른 어떤 특별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 그런 것을 가지고 전지전능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지전능이라고 하는 것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어떠한 경우라도 항상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나가야 되는 겁니다. 부처님은 그걸 어떻게 하는지를 분명히 안다는 거라.

그래서 '모든 것들을 알았다'는 것은 '모든 현상들을 잘 다스려서 그것들로 인해서 마음에서 번뇌가 일어나고 갈애가 일어나는 것 없이 하는 것들을 안다'는 뜻이라는 거라.

 

외부적인 대상들로 인해가지고는 항상 마음은 요동치게 됩니다. 또는 내부적인 것들로써도 마음은 요동치게끔 됩니다.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모든 현상들은 여러분들 수행 대상입니다. 그걸 수행의 대상으로 알아야 되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요동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대상을 대상으로 볼 때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아픔이 일어나더라도 또 좋은 것을 보더라도 그것은 대상일 뿐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삽베-수 담메-수 아누-빨릿또-(sabbesu dhammesu anūpalitto) 라고 합니다. 모든 것들에 대해서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는다. 하는 뜻입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빨리 좀 하겠습니다.

그것은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끔 마음은 항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마음이 동요하는 일도 없고, 마음이 번뇌에 물드는 일도 없이, 적정의 상태를 유지해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삽반자호(sabbañjaho) 모든 것을 버렸다 하는 겁니다.

그거는 여러분들 뭔 뜻인지 알겠죠? 집착할 대상들을 버리라는 거라. 집착할 대상들을 버려라. 그래서 집착할 대상들을 버려버리기 때문에 세 가지 욕구, 세 가지 갈애라고 하는 것도 버려버린다는 거라. 더이상 존재할려고 하는 욕구조차도 없기 때문에 육체의 죽음에 이르고 나면 존재욕구가 없기 때문에 더이상 태어날 일이 없어져버립니다.

자신의 몸도 그런 것인데, 버리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필요에 따라서 사용을 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그다음에, 딴학카예- 위뭇또-(taṇhakkhaye vimutto). 갈애를 멸진, 소멸해서 해탈에 이르렀다 하는 겁니다.

갈애를 소멸하면 해탈에 이릅니다. 이것은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그리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내가 스스로 알았기 때문에 나는 어느 누구도 스승으로 삼을 일이 없다는 거라. 누구를 스승으로 삼을 것이냐? 오로지 법을 의지처로써 법을 의지해서 그 법 속에서 살아가는 거고 법을 가르칠 때가 되면 가르치는 것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의지처를 찾게 됩니다. 선원이라는 의지처 또는 스님이라는, 스승이라는 의지처, 어떤 의지처를 찾게 됩니다. 마음이 불안함에 빠지지 않으면 법을 의지처로 삼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게 됩니다. 마음이 불안한 것들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법을 의지할 수 있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이렇게 했을 때 부처님은 "모든 것들에 승리한 승리자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이 게송의 근본 의미입니다.

 

다르게 이 게송들을 자꾸 볼려고 하지 말고, '전지전능자'라든지 아니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라든지, 아니면 최고의 윗자리에 있는 어른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이해할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해낸 위대한 스승'으로서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게 될 때 부처님이 가르친 바를 이해를 하게 됩니다.

 

해탈·열반이라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몸과 마음에서 그것들을 극복해낼 때, 그런 갈애들 그런 번뇌들을 극복해갈 때, 해탈·열반은 여러분들 곁에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해탈한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요동치는 일 없이 마음은 고요합니다.

그런 해탈한 사람들을 일컬어서 "완전지자다" 하고 얘기합니다. "모든 것들을 알고, 모든 것들을 버려버리고, 모든 것들을 이해한 성자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이 거기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 점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