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마를 아는 자는 실천 수행하는 자이다 (20150227)
부처님의 시대에 한 사람의 비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불법을 거의 배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게송만 들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기억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의 진심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해로 끝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가지고 체험으로 이르고 있었습니다. 알기 쉬운 말로 아라한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성자는 그리고 많이 불교를 배우려는 흥미는 없었습니다. 자신이 배우고 알고 있는 불교의 모든 것은 처음 들은 게송 하나 만이었습니다. 그 성자가 기억하고 있던 유일한 게송은 빨리 경전의 「우다나(자설게)」라고 하는 경의 37번 게송입니다.
Adhicetaso appamajjato,
Munino monapathesu sikkhato;
Sokā na bhavanti tādino,
Upasantassa sadā satīmato.
아디쩨-따소- 압빠맛자또-,
무니노- 모-나빠테-수 식카또-;
소-까- 나 바완띠 따-디노-,
우빠산땃사 사다- 사띠-마또-.
초월한 마음 상태를 가지고 불방일하고,
적묵의 길을 걸어 묵자(성자)가 되어 있네;
평안에 이르러 항상 알아차리고(sati) 있는,
그러한 사람에게 슬픔은 없다.
이 4가지 문장 속에 불도의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열반에 이르는 길과 열반의 경지가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 4행을 이해할 수 있다면, 불교를 이해한 것이 됩니다.
이 성자는 숲속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비구들은 보름과 초하룻날 가까운 곳에 함께 모여 설법하거나 설법을 듣거나 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이 성자도 그때가 되면, 「지금부터 설법 시간입니다」라고 알리고, 위의 4행을 독송합니다. 숲 속이라 인간은 아무도 듣는 상대가 없었지만, 독송이 끝나면, 「사두!」라는 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습니다. (사두는 동의한다, 찬성한다, 인정한다, 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불교도는 설법을 들었을 때, 그 기쁨을 나타낼 때, 사두!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의 아멘! 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
사두! 라고 외치어 숲에 울려 퍼지게 하는 자는 숲에 살고 있는 신들이었습니다.
이 성자는 「누군가가 설법을 듣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리가 누구의 소리인지 조사해 보는 흥미는 없었습니다. 성자는 보름마다 빠뜨리는 일 없이 정식적으로 알리고 계속 설법했습니다. 매번 사두! 하는 소리가 숲에 울렸습니다.
이 숲에 삼장에 능통한 비구 두 명이 들어왔습니다. 그날은 설법의 날이었습니다. 그 성자는 많이 기뻐하며 불교를 다 배워 통달한 분들로부터 오늘 설법을 해 주실 것을 부탁했습니다. 학식 있는 비구 두 명은 「허나 듣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지 않는가!」라고 꺼렸습니다. 성자는 「아니오!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신들이 설법을 들어, 사두! 하며 환성을 지르고 있는 것을 안 비구 두 명은 의욕에 넘쳐 많이 설법을 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역시 아무도 듣지 않는구나!」라고 비구들은 말했습니다. 성자가 「아니오, 매번 사두! 라는 소리를 높이 외쳤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당신이 설법해 보시오」라고 비구들이 부탁했더니, 성자는 정식적으로 알리고,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단 하나의 게송을 독송했습니다. 그러자 사두! 하는 소리로 숲에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뭐야! 신들도 특별히 이 스님을 편애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두 스님은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을 후에 그 비구 두 명이 부처님에게 보고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신들은 특별히 누군가를 편드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는 것에, 경험하고 있는 것에, 솔직하게 감동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불교는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진리의 말입니다. 불교는 진리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불설에는 이런 위없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들은 사람의 마음이 금방 맑고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러워진 마음이 청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번민과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향상되어서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불설에 사람의 번민과 괴로움을 없애고, 금방 행복하게 해 주는 힘을 후대의 사람들은 주술적인 의미로 파악했습니다. 「진언」이 되었습니다.
불설의 힘은 「신비적」인 것이 아닙니다. 「진리적」인 힘입니다. 심리적으로 마음이 낫는 것은 확실히 말의 힘이라고 말하면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겠지만, 다라니 주문을 독송해도 조금의 효력조차 없는 경우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배우려고 하면 일생을 배워도 배우지 못할 만큼 붓다가 말씀하신 진리는 무진장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불법으로, 짧은 하나의 게송으로, 모든 진리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진지하게
들어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붓다의 말씀 중 한마디라도 납득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그것과 동시에 바뀝니다. 향상합니다. 무지한 사람이 아닌 한, 붓다의 말씀을 배워 마음이 향상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하게 안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알지 못하는 주문을 말하는 말에 힘이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이 아니라, 그 말이 가지는 의미에 힘이 있습니다. 붓다의 말의 의미는 진리이므로, 불설보다 뛰어난 행복을 가져오는 말은 없습니다.
「먼저 자신이 실천하고 나서 타인에게 말하는 사람은 타락하지 않는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수행을 뒷전으로 하고, 타인에게 설법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에게 존경받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존경을 받고, 풍족하게 되어, 그리고 인생에서 타락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덕이나 윤리를 말하지만, 지키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에는 힘이 없습니다. 먼저 자신이 실천하면, 말에 힘이 있습니다. 즉 설득력이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성자가 매번 똑같은 4행의 게송밖에 독송하지 않았는데도, 같은 게송을 몇 번을 들어도 신들은 감동했습니다. 그 게송을 독송할 때, 그 성자의 마음은 게송의 내용에(불도와 깨달음에) 몰입합니다. 듣는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학식만으로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안이한 생각입니다. 현대 사회는 지식인에게 이끌리지 않습니다. 탐․진․치에 눈이 멀고, 재산욕구, 권력욕, 명예욕의 충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행복하게 이끄는 진정한 스승은 우리의 인격을 향상시키고,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이끌어 주는 분입니다.
학식 있는 두 명의 비구가 의욕에 넘쳐 설법했는데 주위로부터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불법을 하나의 게송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비구가 그 4행을 독송하면, 주위가 환성으로 들끓었습니다. 두 명의 비구는 「신들도 사람들을 편애하는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편애를 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와 가짜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진리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진리를 아는 것으로 무지가 없어집니다. 옳은 삶의 방법이 보여집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물을 수가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불완전한 인생을 완성시킵니다. 미숙한 인격을 완성시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진리입니다. 그것을 담마(법)라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불법을 가르치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럼 법을 배우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배우는 것만으로는 효력이 없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학문으로서 불교를 배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암송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옛날이 아니기에, 활자화된 책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쉽게 식자가 될 수 있습니다. 스승의 법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하여, 우리는 손쉽게 불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배울 뿐입니다. 지식이 증가할 뿐입니다. 지식이 증가하면, 더욱더 사는 것이 괴로워집니다. 성격이 솔직하지 않게 됩니다. 학식만으로 머리가 굳어지면 유연성은 없어집니다. 자기 관리를 할 수 없게 됩니다.
배우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지만, 배울 뿐이라면 오히려 오만하고 완고한 인간이 되어 버릴 뿐입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사람들은 진리·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배우지 않는 이상 인격 향상을 바랄 수 없습니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그런 법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경전을 많이 안다고 법을 아는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삼장을 통째로 암기하고 있어도, 그 사람의 마음이 법을 따라가지 않으면, 경전을 책장에 쌓아두고 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경전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법을 안다. 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붓다가 말씀하신 법은 길든 짧든, 그 하나하나에는 해탈에 이르는 방법을 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만으로도 해탈에 이를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도우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다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해 능력의 차이가 있기에 많은 경전이 있는 것입니다. 경전을 읽다 보면,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경이 한 두개는 반드시 있습니다. 「나의 경전(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신 붓다의 가르침)」을 찾아낼 수 있으면, 가장 뛰어난 보물을 파낸 것이 됩니다.
그리고 「나의 경전」을 배웁니다. 그 안내에 따라, 붓다가 말씀하신 안온, 해탈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날마다 정진합니다. 가르침을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사람을 「법을 가진 사람(dhammadharo)」이라고 말합니다. 삼장을 통째로 암기해도, 잘 설법할 수 있는 사람도, 담마다로(dhammadharo)는 아닙니다.
설혹 깨달음에 이르지 않았어도, 「오늘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자」라는 마음으로 날마다 정진하는 사람, 법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 법을 체험한 사람이 담마다로(dhammadharo)인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마음에 향상이 있어도, 타락은 있을 수 없습니다.
수행중의 사람을 법의 체득자와 동일한 취급을 하는 것은 왜일까라고 생각되겠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은 알아차림(sati)의 실천인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실천하고 있는 순간순간에, 마음은 일시적으로 탐․진․치로부터 멀어집니다. 마음이 탐․진․치로 더러워져도, 금방 알아차림을 실천해서 고칩니다. 망상을 완전하게 멈추신 부처의 마음의 흉내를 계속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배우들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연습을 합니다. 연습이라고 해서 적당히 장난치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성실하게 하면 연습이라도 보는 사람은 감동합니다. 무대의상도 입지 않고, 평상복인 채로 땀 흘리며 하는 리허설이지만 보는 사람들은 감동합니다. 리허설로 감동시키는 능력이 자기 것이 되었다면 실전이 됩니다. 수행은 리허설 중의 배우와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가르침을 타인에게 말하면, 타인의 마음은 감동하여 실천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가르침의 설득력이라는 입장으로부터 보아서, 수행 중의 사람도, 법의 체득자도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담마다로(Dhammadharo)가 말하는 경우는 그 말에 이상한 힘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좋은 방향으로 바뀝니다. 다양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은 법을 체험한 사람의 조언을 받는다면 고민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바뀌는 가르침은 사람들의 도움이 됩니다. 법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법을 가지는 것, 지니는 것(Dhammadharo)입니다. 담마다로만이 사람을 이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불법을 학문적으로 배우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사후를 결정할 때는, 학문은 효과가 없습니다. 학자여도 지식이 없는 사람이어도, 부자여도 가난한 사람이어도, 속세적인 가치관과 관계없이 사후 행복하게 되는 것은 「마음이 맑고 깨끗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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