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지금의 순간을 살자 (20150206)

담마마-마까 2021. 10. 5. 09:00

* 지금의 순간을 살자 (20150206)

 

세상의 모든 것은 일순간이라도 멈추는 일 없이 계속 변화하고 있습니다. 「사는 것=무상」이며, 이것이 존재의 법칙인 것입니다.

 

¤ 무상은 거역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무상에 거역하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과 같이 몸맵시도 좋고, 피부도 탱탱하고, 체력도 있어서,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늙고 병들며 체력은 쇠약해져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죽음이 옵니다. 생명은 무상인 것입니다.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우리는 처음으로 마음의 평온함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짧은 인생 속에서 싸우거나 탐내거나 어리석은 행위를 하면 손해라는 것을 알고, 선한 행위를 하며 인생을 가치 있게 보내려고 하면 결과적으로 즐겁고 충실한 인생을 보낼 수 있습니다.

 

절대로 화내지 않겠다고 결심해도 갑자기 화내 버리는 사람은 무상을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무상을 이해할 수 있으면 탐․진․치가 소멸하여 한량없는 행복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 알아차림

 

그럼 어떻게 하면 무상을 이해할 수가 있을까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지금 하는 행위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손을 들고 있을 때는 [지금 손을 들고 있음], 걷고 있을 때는 [지금 걷고 있음], 서 있을 때는 [서 있음], 물을 마시고 있을 때는 [지금 마시고 있음]이라고 지금 순간의 행위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 사띠를 순간순간 계속해 가면 마침내 무상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엇인가 싫은 일이 있어서 화냈다고 합시다. 그 때 「지금 화내고 있음」이라고 알아차리면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질투하고 있을 때 「지금 질투하고 있음」이라고 알아차리면 질투가 사라집니다. 망상하고 있을 때 「지금 망상하고 있음」이라고 알아차리면 망상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의 순간을 잘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나 미래의 일을 망상하면서 살아갑니다. 살아 있는 것은 지금 뿐이기 때문에 지금을 확실히 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지금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과거나 미래의 일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합시다. 몸은 회사에 있어도 마음은 망상의 세계에서 놀고 있습니다. 「일이 끝나면 어느 술집에 갈까?」 라든가 「주말은 무얼 할까?」 등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일을 소홀히 하여 일의 효율이 떨어집니다. 혹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거의 듣지 않습니다. 마음은 과거나 미래의 일에 날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1시간 강의를 듣고 있어도 겨우 1~2할 정도밖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 지금의 순간을 완성하자

 

「꿈이나 희망을 가지고 밝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자신의 가계를 가지고 싶다든가, 좀 더 수입이 좋은 곳에 취직을 하고 싶다든가, 유명하게 되고 싶은 등 여러 가지 이상을 그리며 꿈이나 희망으로 마음이 가득한 사람은 결코 행복하게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미래에 끌려가 현실과의 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더구나 꿈이나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은 지금보다 몇 배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적어지게 되고, 천천히 느긋하게 쉬는 시간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몹시 지쳐 괴로워합니다. 일류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생은 하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매일 매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희망하는 대학에 합격하면 좋겠지만, 떨어졌을 경우에는 큰 실망감과 좌절감을 맛봅니다. 이와 같이 꿈이나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괴로움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지금 순간을 확실히 살아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험생이라면 앞의 시험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공부를 확실히 하면 됩니다. 그래서 공부하고 있을 때 마음이 과거나 미래의 일을 망상하기 시작하면 곧바로 「지금 망상하고 있음」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곤 다시 공부로 돌아오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고 있든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지치면 「피곤함」, 싫어지면 「싫어지고 있음」, 망상이 일어나면 「망상하고 있음」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시험에 합격해야지라든가 망상을 전부 없애려고 분투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 일순간만 알아차리면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지금의 순간」만이라면 간단하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그리고는 그 알아차림을 지속시키면 됩니다. 그리고 순간순간의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에 의해, 마음은 온화하게 되어서 충실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에 끌려가지 않고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다.

과거는 벌써 끝나버렸고

미래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의 법(현상)을

그 자리 그 자리에서 관찰하라.

그러나 현재에도 실체가 없는 것을 알아라.

그처럼 아는 사람에게는 성장이 있다.

 

과거에 질질 끌지 않는 것과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 것을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습니다. 또한 「현재」라는 것도 실체가 없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마음이 성장해 행복하게 된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오늘 중에 노력해야 한다.

내일은 죽지 않으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죽음의 왕의 큰 군대와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노력하는 사람의 날들은 길일이다.

 

「내일은 죽지 않으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를 알기 쉽게 말하면, 「내일도 살아 있다는 보증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살아 있다고 해도, 내일도 살아 있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죽음의 왕의 큰 군대와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란 이른바 「~이 있다」라고 하는 견해입니다. 돈이 있는, 가족이 있는, 일이 있으면, 무엇에 대해서도 「~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있는」 것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일시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이 있으면 안심하고 있어도, 그것은 정리해고나 정년이 될 것입니다. 「있다」라고 착각해 세상의 다양한 일로 걸리면, ~의 노예가 되어 괴로워합니다. 이것이 악마의 세계, 즉 죽음의 왕입니다. 죽음의 왕의 큰 군대란 이 세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의 왕의 큰 군대에게 손이나 다리나 몸도 모두 속박되어 있습니다. 「~이 있다」라고 볼 때도 속박되어 지고, 「~이 없다」라고 볼 때도 속박되어 집니다. 이것을 죽음의 왕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에 부처님은 「오늘 중에 노력하는 사람의 날들은 길일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서는 「날마다 좋은 날」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날마다 좋은 날로 살 수 있는가요?

 

과거에 끌려가지 않는 것,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금의 순간을 관찰해 올바르게 사는 것, 이것으로 매일을 즐겁게 살 수가 있습니다.

 

지금의 순간도 과거나 미래와 같이, 곧바로 사라지는 연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실천을 지금 해 보십시오. 내일은 늦습니다. 지금하지 않으면 내일 살아 있다고 하는 보장은 없기 때문입니다.

 

¤ 과거를 고민하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마라

 

한 때 부처님과 제자들이 숲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천인이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제사나 기도만 하고 있는 곳에 천인이 오지 않지만,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서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오는 일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인도 덕을 쌓으려하기 때문입니다.

 

집이나 지붕도 없는 숲에 살며,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않는데, 부처님과 제자들인 아라한들의 얼굴을 보면 온화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천인에게는 이것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일반적인 인간과 비교하면 매우 허술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부처님에게 묻었습니다. 「숲에 살며, 안온한 마음의 수행자가, 하루 한끼밖에 취하지 않는데, 왜 안색이 온화합니까?」라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과거를 고민하지 않고,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현재에 살아 있다. 따라서 온화한 것이다」.

 

즉 순간순간을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기대하고, 과거의 일로 고민하고 있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는 말라간다. 베어버린 푸른 대나무와 같이.」

 

푸른 대나무를 베어버리면 푸른색이 자꾸자꾸 퇴색해 갑니다. 그처럼 과거나 미래의 일만 신경 쓰고 있으면 온화함이나 밝음, 생명력이 사라져 갑니다.

 

¤ 깨달을 때까지의 응급책

 

무명을 찢는 것이 마음의 분기점입니다. 우리는 「~이 있다·없다」라는 유무로 밖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를 배워 실천해 나가는 동안에 무명의 벽이 서서히 깨지면, 이윽고 마음은 크나큰 개혁을 일으켜, 인과 법칙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어떻게 살면 좋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깨달을 때까지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은 1분 1초라도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응급책이 있습니다. 깨달음에 이르지 않아도, 아직 번뇌가 남아 있어도, 날마다 즐겁게 온화하게 살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마음을 전환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런 다음 다음의 방법을 실천해 보십시오. 2가지가 있습니다.

 

¤ 응급책의 첫 번째는 도덕의 방정식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도덕의 방정식에 따라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에는 생각하는 행위(citta), 말하는 행위(vācā), 몸으로 하는 행위(kāya)의 3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3가지로 선행이나 악행 등 여러 가지 행위를 하며 살아갑니다. 여기서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것은 생각하는 일도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습니다.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 한은 무엇을 생각해도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이 제일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손발이나 몸을 사용하고 하는 행위에는 한계가 있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터무니없이 나쁜 일이나 탐욕스런 일을 얼마든지 생각하게 됩니다. 「저 녀석이 밉다」라고 생각하면 평생 미움의 감정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머리로 생각하는 행위가 제일 큰 죄가 됩니다.

 

다음의 행위는 그만두어야 할 악행입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불이익의 결과가 된다.

·주위에 있어서 불이익의 결과가 된다.

·생명 전체에 있어서 불이익의 결과가 된다.

 

불이익의 결과가 되는 행위는 그만두는 편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이 생각은 이익일까 불이익일까」라고 생각해서, 불이익이라면 곧바로 그만두십시오. 가끔 「나는 안 된다」라고 생각해서 자신을 탓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자신에게 있어 불이익이기 때문에 악행입니다. 그만두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라고 생각해서 상대를 탓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에 대해서 불이익이기 때문에 악행에 도움을 줍니다. 혹은 세상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나쁜 일을 생각하는 일도 있지만 이것도 악행입니다. 그만두어야 합니다. 말도, 행위도 같습니다. 불이익의 결과가 나온다면 그 행위는 그만두어야 합니다.

 

다음의 행위는 실천해야 할 선행입니다.

 

• 자신에게 있어서 이익의 결과가 된다.

• 주위에 있어서 이익의 결과가 된다.

• 생명 전체에 있어서 이익의 결과가 된다.

 

이익의 결과가 되는 행위는 실천해야 할 선행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사고를 관찰해 보십시오. 아마 하루 종일 시시한 것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나쁜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이 생각은 불선이다, 마음이 더러워져 버린다.」라고 알아차리고, 그만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주일만 실천해 보십시오. 지금보다 몇 백배 마음이 편안할 것입니다. 행하는 일도 진척이 빠르고, 실패도 거의 없어집니다. 그래서 좋은 결과가 되는 것만을 선택하고, 그 이외의 행위는 하지 않는다고 마음으로 결정해 주십시오. 그러면 행복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이익과 불이익

 

그리고 우리는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익)이라도, 상대에게 있어서는 폐(불이익)가 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판단하면 좋을까요?

 

자신, 주위, 생명 전체의 어느 쪽인가에 하나라도 불이익이 돌아가는 행위는 모두 악행이 됩니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는 이익이지만 상대에게는 불이익이라고 하는 경우, 불이익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 행위는 악행이 됩니다. 또한 상대에게는 이익이지만 자신에게는 불이익이라면 그 행위도 악행입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아내가 몸살로 열이 심한데도 남편이나 아이를 위해서 무리를 해서 저녁밥을 만든다고 합시다. 이것은 악행입니다. 가족에게 있어서는 이익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불이익입니다. 그래서 이 행위는 그만두는 편이 좋습니다. 혹은 집에서 밤늦게까지 춤과 노래를 하며 파티를 하고 있다고 합시다. 자신이나 가족에게 있어서는 즐거울 것이지만(이익), 근처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시끄러워서 참을 수 없습니다. 귀찮습니다(불이익). 그르므로 이것도 악행인 것입니다. 자신, 주위, 생명 전체의 어느 쪽인가에 하나라도 불이익이 되면 악행이 됩니다. 불이익은 하나라도 해당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익과 제로라고 하는 편성도 있습니다. 이것은 선행이 됩니다. 방금 전의 아내의 예에서, 감기에 걸려 속이 메스껍지만 요리 정도는 만들어도 괜찮은 상태라면, 자신에게 있어서는 이익도 불이익도 아닌 제로(0)가 됩니다. 한편 가족에게 있어서는 이익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해도 괜찮은 선행인 것입니다. 이익과 제로의 편성은 좋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리고 「생명 전체에 이익」이라고 하는 경우는, 자동적으로 주위에도 자신에게도 이익이라고 하는 결과가 됩니다. 죽이지 않는, 훔치지 않는, 거짓말하지 않는 등의 행위는 모두에게 있어 이익이 되는 행위입니다. 그 말은 자동적으로, 주위에도 자신에게도 이익이 됩니다.

 

자신, 주위, 생명 전체에 이익이라면, 이것은 완전무결한 선행입니다. 그러므로 힘써 행하여 주십시오.

 

¤ 응급책의 두 번째는 「자비」입니다.

 

도덕의 방정식이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되는 분은 자비를 실천해 주십시오. 자비를 실천하는 것에 의해, 도덕의 방정식도 완전하게 완성할 수가 있습니다. 자비의 실천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에 대해서 「모두가 행복하기를!」이라고 마음을 담아 사띠하는 일입니다. 시간이나 장소를 결정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마음속으로 염송하여 주십시오. 자비의 마음만 있으면, 우리는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즐겁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면 안 됩니다. 도덕의 방정식도, 자비의 실천도, 어디까지나 응급책이며, 괴로움을 해결하는 완전한 해방책은 아닙니다. 이것들이 망가지면 문제를 일으키는 위험도 있기에, 최종적으로는 지혜의 개발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인과 법칙을 이해해서, 마음의 개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도덕도 자비도 거기까지 이르기 위한 예방책입니다.

 

¤ 최승의 삶의 방법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에 대할 확신이 최고의 재산이다.

진리를 실천하면 행복하게 된다.

진실(진리)이 최고의 맛(즐거움)이다.

지혜의 삶의 방법이 최승의 삶의 방법이다.

 

「진리」란 무상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신하도록 해야 합니다. 「무상 밖에 없다. 다른 가르침은 믿을 수 없다」라고. 진리를 확신할 정도의 재산은 그 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실천한다」란 사띠를 실천하는 것이고, 자신의 몸과 마음에 생겨나는 현상을 순간순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띠가 어렵다고 생각되는 분은 도덕이나 자비의 실천으로부터 시작해 주십시오. 그러면 행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최고의 즐거움」이란 진리를 아는 것이며,

「최승의 삶의 방법」이란 지혜의 삶의 방법입니다. 지혜의 삶의 방법만큼 우수한 삶의 방법은 그밖에 없습니다.

 

¤ 즐거운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즐거움은 돈이나 가족, 오락 등의 외부의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은 사람이나 물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의 접근법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한 장 있다고 합시다. 그 그림을 보고, 모든 사람이 「훌륭하다」라고 느끼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감동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고, 전혀 흥미를 나타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 자체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거기에 놓여져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즐거워지거나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은 개개인의 접근법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집을 가지고 있어도, 접근법이 나쁘면 행복하게 될 수 없습니다. 돈도, 집도, 아이나 가족도, 회사도, 외부의 것은 행복을 옮겨 주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접근법 나름입니다. 접근법이 나쁘면 무엇을 얻어도 불행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 중에도 가출을 하거나 비행하는 아이도 상당히 있습니다. 돈이 없는 사람이 보면 아쉬움 없이 자유롭게 살고 있는 아이가 어째서 저런 일을 할까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이들은 매우 불안합니다. 부모는 애정을 주지 않고,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고, 그것이 아이에게 있어서는 몹시 싫습니다. 그래서 마약에 손을 대거나 도둑질을 해서라도, 부모를 곤란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풍부하다는 것만으로는 행복하게 될 수 없습니다. 접근법이 나쁘면 불행한 결과로 끝납니다.

 

반대로 접근법이 좋다면, 물질적으로 풍부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실제 돈도, 가족도, 일도 없는데, 불평불만 없이,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 노숙자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날마다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먹을 수가 있으면 충분하고, 병이 들어도, 비록 죽어 버려도, 그것은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온화한 마음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접근법을 바꾸면 인생은 행복하게 됩니다. 돈이 있으면 반드시 행복하게 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행복하게 되는 사람도 있고,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 마음의 접근법을 제어하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은 욕구가 아니다.

사람의 생각(상념)이 욕구인 것이다.

여러 가지 것은 세상에 그처럼 있는 것뿐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마음의 욕구를 버린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나 즐거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백화점에 가면 옷이나 장식품, 가구, 장난감, 식품 등 다양한 것을 팔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건들은 욕구가 아닙니다. 물건을 보았을 때에 자신의 마음에 솟아올라 오는 「즐거운, 갖고 싶다」라고 하는 감정이 욕구인 것입니다. 욕구는 물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의 접근법인 것입니다. 같은 영화를 봐도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음의 접근법이 욕구인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대로 거기에 있을 뿐인 것입니다. 동물원에서 판다곰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귀엽다」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판다곰은 다만 데굴데굴 구르거나 먹이를 먹고 있을 뿐으로, 판다곰이 인간을 향해 「나를 봐!」라고 유혹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판다곰을 보자마자 우리의 마음이 변화해서 「귀엽다」라는 욕구가 솟아올라 옵니다. 백화점에서 팔고 있는 옷이나 장식품도 「나를 사!」라고 손님을 유혹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거기에 놓여져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사람의 마음에 「예쁘다, 이것 갖고 싶다」라고 하는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문제이며, 고민이나 괴로움의 원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현자는 자신의 마음을 관찰해서, 물건에 대한 접근법을 조절합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세계, 즉 자유의 세계입니다. 물건에 의존하는 일 없이, 좌지우지될 것도 없이, 마음에 있는 「갖고 싶다」라고 하는 접근법을 지우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경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