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수행과 장애 (20141219)

담마마-마까 2021. 10. 3. 09:00

* 수행과 장애 (20141219) [기초수행 2]

 

❍ 수행하는 사람이 지켜야 하는 규칙 ❍

 

보디빌더들은 염분과 카페인을 멀리한다고 합니다. 먹는 음식 못 먹는 음식 가려야 하고, 그걸 엄격하게 지켜야 훌륭한 근육이 생겨나고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멀리할 것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멀리할 것을 피하는 규칙을 잘 지켜야 수행에서 힘이 길러집니다. 첫째, 생명체를 죽이는 일. 둘째, 훔치는 일. 셋째, 불건전한 성관계를 갖는 일. 넷째, 거짓말하는 일. 다섯째, 술이나 중독되는 약물을 섭취하는 일입니다.

 

첫 번째 것을 지키려면 이제 여름에 모기 한 마리도 잡으면 안 됩니다. 방문을 열어두고 전자모기향으로 모기를 방 밖으로 쫓아두고 방충망 모기장 쳐야됩니다.

두 번째 것을 지키면 장난으로 뭘 훔쳐오는 것도 없어질 것입니다.

세 번째 것은 상대를 대우해주고 떳떳하게 일대 일로 연애하거나 결혼 생활하며 상대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 외엔 양다리나 성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네 번째 것은 평상시에 말할 때 내가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는지, 상황을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것은 아마 제일 힘들 거 같지만 술을 안 마시는 것입니다. “그럼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거나 술이 원인이 되어 거짓말도 하고 외도도하고... 다른 지켜야 할 것들도 깨어버리게 합니다. 술 먹어야 하는 관계 속으로는 어떤 불이익도 감수할 각오를 하고 발을 들여놓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가치는 충분합니다. 할 작정이라면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이걸 못 지키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겁니다. 보디빌더가 염분과 카페인을 삼가야 하듯이, 술을 마시는 것은 수행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건상 술을 멀리할 수 없는 사람도 낙담하지는 마십시오. 술독에 빠져 살던 사람도 나중에 언제든 여건이 되고 결심하게 되었을 때 술 끊고 수행 시작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자기 손으로 도저히 끊지 못할 만큼 술을 좋아하더라도 수행센터에 들어가 일정 기간 그 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히 술이 끊어지기도 합니다.

 

이 다섯 가지 피해야 할 일을 멀리하도록 매일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을 위한 튼튼한 토대를 닦는 작업이고, 매일의 수행이 성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며칠 소홀했다면 또다시 노력해서, 언젠가는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저절로 지켜지게 몸에 배도록 해야 합니다.

 

❍ 한 시간 동안 한 자리에서 움직임 없이 앉아있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

 

가장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면서도 철저히 과학적이고 끝을 보여주는 수행법은 위빳사나 수행법입니다. 이것은 초기 불교의 수행방식이고 바로 부처님의 수행법입니다. 세상의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윤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수행상의 필요로 인해 자연히 그 이론 체계도 접하게 됐을 것이고, 그 철저하고 정확함에 놀라셨을 겁니다. 이제는 많이 해보아서 그 깊이를 직접 맛보게 되길 바랍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후에도 하루에 네 시간은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수행을 했습니다. 깨달은 사람, 부처님도 그렇게 매일 수행하는데, 그 나머지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앉고 서고 걷고 눕는 일상의 모든 순간이 수행의 순간이라는 말도 맞지만, 강력한 정신의 힘을 기르려면 배터리 충전하듯이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정신을 모으는 수행은 필수입니다.

 

의식적으로라도 노력을 많이 해주는 게 중요합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 보통 우리들은 좀이 쑤셔서 아마 10분도 가만히 앉아있기 힘들 것이고, 밖에서 무슨 소리만 나도 궁금해서 바로 일어나버리게 되기 쉽겠지요.

 

그런데도 죽기 살기로 아침저녁에 한 시간씩 앉아서 수행하십시오. 정말 많이도 졸고, 이게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분간이 안 되는 상황도 많겠지만 그래도 꾸준히 하십시오. 늦잠자서 시간이 없을 때는 아침도 굶고 수행한 후 바로 출근하고, 과로로 녹초가 되어도 저녁에 한 시간은 앉아서 수행하고, 수행시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시체처럼 쓰러져 자는 한이 있어도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수행하겠다는 규칙을 지키는 생활을 해나가면 언젠가는 하루 두 시간의 수행, 이것만 바라보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앉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일단은 한번에 30분 앉아서 좌선하고, 30분 경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30분씩 좌선과 경행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해지면 시간은 서서히 늘리면 됩니다. 다리가 안 하던 자세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다리가 많이 저릴 텐데 계속 연습하다 보면 안 저리게 되고, 통증을 다루는 법도 노력하다 보면 터득됩니다. 매일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앉을 때 깔개가 필요한데 가장 좋은 것은 절할 때 쓰는 두텁고 평평한 보통 절방석입니다. ‘인체공학적’으로 엉덩이 부분이 패이게 변형되어 나온 방석은 오히려 불편해서 한 며칠 지나면 안 쓰게 됩니다. 평평한 절방석에 필요하면 보조방석으로 엉덩이를 높여주는 정도인데, 방석이 없으면 그냥 방바닥에 요 펴놓고 낮은 베개 받치고 해도 됩니다. 결가부좌일 때는 엉덩이에 받칠 것이 필요 없는데, 나머지 자세에서는 다리가 긴 사람이 아니면 엉덩이를 보조방석으로 받쳐서 높여주어야 뒤로 넘어가는 느낌이 안 들 것입니다.

 

자세는 중요합니다. 처음에 자세 잘못 잡히면 나중에 고생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자세로 앉고 엉덩이를 약간만 뒤로 빼서 땅에 닿는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을 편하게 펴주고, 척추를 동전 쌓듯이 밑에서부터 차례차례 한 마디씩 똑바로 세우고 정수리까지 똑바로 세운 다음 턱을 약간 당기고 앉습니다. 정수리가 하늘로 잡아당겨지듯이 허리를 쭈욱 폈다가 편안하게 내려놓으십시오. 손은 두 손을 모아서 손바닥이 천정을 향하게 겹쳐서 발 위에 자연스럽게 얹거나, 아니면 왼손등은 왼쪽 허벅지, 오른손등은 오른쪽 허벅지 위에 자연스레 얹습니다. 손바닥에서 열과 땀이 나기 때문에 손바닥을 허벅지에 닿게 놓지 않도록 하고, 엄지가 서로 닿아있으면 맥박 뛰는 소리 때문에 수행에 방해가 됩니다.

 

눈을 감고 머리와 척추만 세운 채로 옷걸이에 옷이 축 늘어지듯이 어깨와 상반신에 힘을 빼고 몸의 기운이 방바닥으로 착 가라앉는 느낌으로 편안히 놓아둡니다. 오래 수행한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상체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지고 긴장된 곳 없이 이완된 상태가 된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상체에 물이 꽉 차있다고 상상하고 그 물이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천천히 아래로 빠져나가 몸통이 텅 비워지는 듯이 몸의 긴장을 천천히 차례로 풀어서 이완시켜 주는 것도 좋습니다.

편안하게 있으면 움직이는 것은 호흡뿐이니까 자연히 숨으로 관심이 갑니다. 그리고 콧구멍의 잘 느껴지는 한 지점에서 숨이 나가는지 들어가는지 매순간 그 지점에서 머물러 지키면서 느낍니다(알아차린다). 그냥 앉아있기에 방안 공기가 차면 침대커버만한 것을 접어 몸을 감싸거나 숄로 어깨를 두르는 것이 좋습니다. 기후가 수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합니다.

수행 중에 척추가 조금 굽어졌다는 느낌이 들면 다시 알아차리면서 천천히 바르게 폅니다. 그런 후 긴장된 곳이 없는지 알아차려 풀어주고 계속 숨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를 느끼면서 알아차립니다. 시간을 차츰 늘려서 한 시간 동안은 아무 움직임 없이 수행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합니다.

 

1시간의 좌선을 먼저 할 때는 밥 먹고 2시간이 지난 후가 좋습니다. 수행 중에 앉아서 할 일은 오직 호흡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편안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 움직이지도 않고 앉아서 무엇을 하는 걸까? ❍

 

그럼 앉아서는 무엇을 하나? 호흡수행에서 하는 일은 산만함을 거두고 마음을 하나에 모으는 힘을 기르는 정신적 훈련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의 평상시 마음은 미친 듯이 산만합니다. 그 마음을 지금 여기 이 몸에 머무르게 하는 훈련을 먼저 합니다. 이것을 ‘소를 말뚝에 매어놓는다’ ‘야생 코끼리를 길들인다.’고 비유합니다. 소나 코끼리는 한 사람의 힘으로 제어하기 벅찬 크고 힘센 동물입니다. 그런 야생동물 같은 마음을 한 자리(지금 여기 이 몸)에 붙잡아두어 용쓰지 않아도 수월하게 말을 듣도록 길들이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평상시 제멋대로 빠른 속도로 과거 현재 미래를 돌아다니는 마음을 지금 여기에 되돌려놓는 훈련을 끈질기게 해서 자신의 의지로 통제되게 하는 일입니다. 앉아서 이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광범위하다면 광범위한 일을 아주 끈질기게 계속해서 시도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아서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리고 매일을 훈련하다 보면 누구나 마음을 자신의 몸에 잡아두는 것이 어느 정도 수월해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만 몸에 매어둔 의지의 고삐를 끊고 미친 듯이 마음이 헤매다니기만 하고 진전이 없는 듯이 보일 것이지만, 진전이 있건 없건 매일 앉는 것, 그리고 앉아있을 때 수행대상을 놓치는 매순간 자신에게 화내지 않고 다시 또다시 시도하는 것이 키포인트입니다. 한 1년 세월이 흐른 후 예전에 수행할 때 어땠는지 돌이켜보면 내가 완전히 변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세를 정리하고 앉아서, 몸과 마음을 편안히 내려놓고, 눈을 살며시 감고, 자신의 호흡을 자연스럽게 편안히 내버려 둔 채로 콧구멍의 한 지점에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매순간 알아차립니다. 지금 숨이 들어오면 들이쉼하고 알아차리고, 지금 숨을 내쉬면 내쉼이라고 알아차리면서 매순간 그것을 놓치지 말고 계속합니다. 지금 숨이 들어오고 있는지, 나가고 있는지 알아차릴 때, 숨을 어떻게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호흡을 인위적으로 조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냥 편안하게, 강둑에 앉은 아이가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듯이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매순간 있는 그대로 알고 있으면 됩니다. 숨을 따라서 콧구멍에서 숨의 흐름을 따라 가슴으로 배로 따라갔다가 다시 따라서 콧구멍까지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불교 호흡수행과 다른 호흡명상이 다른 점입니다. 콧구멍의 한 지점에 문지기처럼 지키고 서서, 문지기가 들어오는 사람, 나가는 사람을 한 명 한 명 체크하듯이, 그렇게 콧구멍의 한 지점에서만 순간순간 지금 숨이 들어가고 있다, 나가고 있다고 알아차린다고 경전에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요점은 마음이 매순간 콧구멍에 붙어서 숨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를 주의가 끊어지는 순간 없이 계속해서 알아차리고 느끼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끊어짐 없이 아주 길게 이어지는 것은 드문 일이고, 먹고 싶은 것 못 참고 누가 자극하면 쉽게 화나는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는 잘 안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한 순간도 안 놓치고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불로소득을 바라면 안 됩니다. 수행은 과학적이고 정확합니다. 평소에 마음 쓰고 산 그대로 나타나는 겁니다. 먹고 싶은 맛에, 불쾌한 자극에 쉽게 휘둘리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산만하고 힘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제 먹은 요리에, 내일 준비해야 하는 일거리에 가 있다는 것을, 지금 숨을 알아차리지 않고 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즉시로, 즉시즉시 다시 콧구멍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고삐를 끊고 달아난 야생 코끼리 같은 마음을 콧구멍이라는 말뚝에 다시 데려오고, 다시 데려오고, 다시 데려오고, 다시 데려오고, 다시 데려오고, 다시 데려오고, 다시 데려오고...... 줄기차게 다시 데려오는 것, 이것이 수행 중에 해야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자꾸 도망간다고 화를 내는 것은 역효과입니다. 지금까지 마음대로 헤매다니게 내버려 두고 수십 년을 살아왔으니 그런 결과인 것은 당연한 겁니다. 화내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차분히 계속 시도하고 반복해서 자연스럽게 길이 들 때까지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 호흡과 위빳사나 수행 ❍

 

호흡에 마음을 잡아두는 것은 위빳사나 수행의 준비단계이면서, 위빳사나 수행의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평상시 우리는 자기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극히 표면적인 일부밖에 알지 못합니다. 관심이 밖을 향해 있기 때문에 바깥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느라고 바쁩니다. 마음의 불순물이 일어나고 작용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렇게 방치된 마음은 내면에서 점차 생각으로 커지고, 언행으로 밖으로 표출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다시 마음에 남게 됩니다. 이런 연쇄작용을 어디서 끊어줄 수 있을까요?

 

마음의 불순물이란 것은 크게 세 부류입니다. 탐⦁진⦁치, 삼독심입니다.

이것이 일어나면 우리 몸에선 어떤 느낌이 일어납니다. 옛말에 ‘냄비에 탄 음식이 눌어붙듯이 탐욕이 일어나 탐욕의 대상에 들러붙는다. 성냄은 한 모금의 독처럼 퍼져나간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보았을 때의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 누가 나를 모욕했을 때 내 몸에 일어나는 느낌들을 보면 참 정확한 말입니다.

 

보통 바쁜 생활 중에는 밖의 상황에 반응하고 대처하느라 이런 부분에 주의를 미처 못 기울이는데, 안 보이는 동안에도 내부에서 이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덩치가 커집니다. 우리가 과거에 했던 생각과 언행도, 어떤 결과를 마음에 남겨서, 무의식으로 남아 있다가 어떤 계기를 만나면 그것이 일어나 반응을 또 일으키는데, 이것을 우리는 몸의 느낌으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이것이 충동해서 언행을 일으키게 되고 연쇄반응을 지속시키게 됩니다. 또 거기에 상대방이 반응해오면, 내 집도 불타고 남의 집도 불타게 됩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몸의 느낌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일단은 미친 듯이 산만한 마음을 내가 원할 때 몸에 잘 붙잡아 둘 수 있게 길을 들여야,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주의를 쏟을 수 있으니까 호흡수행으로 그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힘이 생기면 그 힘을 쏟아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실제로 정화시키게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며 앉아있는 동안에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이 아주 편안한, 예전에는 몰랐던 특유의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으면, 이제 호흡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려고 하십시오. 그렇다고 수행 중 특유의 좋은 기분을 탐내는 것으로 나도 모르게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 기분은 어디까지나 마음이 한 곳에 머물렀기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 결과를 탐내게 되면 수행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습니다. 탐내는 마음이란 탐⦁진⦁치 삼독심의 종류라 수행 중에 불순물을 끌어들이는 꼴이 됩니다.

 

❍ 수행을 지속하는 것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 ❍

 

수행을 계속하다 보면, 처음 몇 번은 호흡이 들고 나는 것을 체크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몽롱하게 호흡을 놓치고 있게 될 때도 있고, 조금 호흡을 알아차리다 어제 나에게 기분 나쁜 말을 했던 사람이 떠올라 머릿속에서 어떻게 멋지게 한방 먹일까 생각에 빠져 호흡을 잊어버리는 때도 있고, 자꾸만 호흡을 놓치는 자신을 한심해 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유독 다리 통증이 심한 날도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시간 자체가 아깝고 초조하고 불안한 경우도 있고, 수행 끝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하면서 나중에 할 일을 머릿속으로 그리느라고 호흡을 잊을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앉아서 눈 감고 마음을 모으는 수행에선 모든 것이 자기 점검의 단서가 됩니다. 그래서 수행을 방해하는 이런저런 것들을 분류해서 다섯 가지 장애로 통상 이야기합니다. 그런 장애들이 일어나면, 그 장애들이 나타나는 것을 눈치채고 거기서 태도를 바로잡는 노력을 해주면 할 일을 다 하는 겁니다. 간단하게 수행대상으로 다시 돌아와 그 대상(호흡수행에서는 호흡)에 마음이 머물도록 하는 것이 할 일의 전부입니다.

 

수행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요소의 첫 번째는 탐욕(감각적 욕망)입니다. 예를 들어, 잘 해보려고 과욕을 부려서 자꾸만 호흡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려 드는 것은 현재의 대상에 대한 것이 될 테고, 호흡을 체크하다가 어제 먹은 맛있는 빵이 문득 생각나서 그 맛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 것은 과거의 대상을 끌고 온 것일 테고, 그러다가 ‘그 빵집에 가서 내일은 어제 못 먹은 이런 저런 빵을 사와야지.’ 하고 있는 것은 수행 대상을 잊고 생각에 빠져 미래로 마음이 가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아! 이거 호흡을 놓쳤네!’ 하고 되도록 빨리 눈치채면 좋은데 이게 한 없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흐를 수도 있습니다. 눈치챘을 때 바로 수행대상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한순간 한순간 그렇게 탐욕이란 장애를 극복해 나가는 겁니다.

 

탐욕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마음에 드는 물건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이 그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탐욕에 대해 기쁨과 즐거움이 생기는데 이것이 탐욕의 즐거움입니다. 모두가 내 것이었는데 이제 하나도 내 것이 아니구나 하고 비탄에 빠지는데 이것이 탐욕의 재앙입니다. 또한 내가 받는 고통이 모두 탐욕의 재앙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냄(악의)입니다. 자꾸만 수행대상에 머물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다니는 자기 마음에 대해 특히 화가 납니다. 이런 ‘화’가 수행의 장애물입니다. 그런데 사실 화낼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것이, 내 마음이 심하게 헤매다니는 것은 평소에 마음을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훈련을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리고 훈련을 하면 하는 만큼 길이 들게 돼 있기 때문에 조금도 낙담할 것이 없습니다. 자랑스러울 것도 없고 수치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헤매는 것을 지금 발견했으면 지금부터 꾸준히 열심히 하면 되는 겁니다.

 

수행의 길에서 한 순간 노력한 것이라도 무의미하게 잃어버리는 법은 없습니다. 차곡차곡 마음의 힘으로 저장되는 것이니, 혹시 실망한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폄하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마치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한 걸음도 헛걸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이 호흡에서 떠났음을 발견했다면, 발견한 것 자체가 참 잘한 겁니다. 거기서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서, 지금 들이쉬고 있는지 내쉬고 있는지 체크해보면 됩니다. 자꾸만 데려오다 보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아예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나태함과 졸음입니다. 평소에 별별 재미있는 것들을 쫓아다니던 습관에 젖은 마음이 볼 때, 호흡이라는 대상은 지극히 무덤덤하고 평범한 대상입니다. 수행 초기에는 마음은 항상 불평합니다. ‘아~ 재미없어. 이걸 내가 왜 하고 있는 거지?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알람이 고장 났나.......’ 호흡을 체크하고 있다 보면 자꾸만 호흡을 무시하고 마음이 도망갑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의 전부인데....... 마음이 정작 해야 하는 일거리에 태만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호흡을 놓칩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꾸벅꾸벅 좁니다. 태만한 중에 지금 태만하다고 발견하는 것, 졸던 중에 지금 졸고 있다고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이 장애를 한순간 또 한순간 넘어가야 합니다. 앉으면 졸던 사람도 1년 만에 그걸 완전히 극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먹고 노력하면 되는 일입니다.

 

네 번째는 들뜸과 후회입니다. 너무 잘하려고 긴장해서 오히려 호흡을 자연 상태로 내버려두지 못하여서 수행대상을 놓치는 것 같은 것이 들뜨는 장애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잘못했던 일 등을 그냥 반성하고 지금부터 잘하면 되는데, 지나간 자신의 잘못에 붙어서 자책하며 정작 지금 여기서 진행되고 있는 호흡을 놓치는 것이 후회입니다. 수행에서는 탐욕과 성냄의 좀 약한 상태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이런 것을 느낄 때 ‘아 수행의 장애가 나타났구나!’ 하고 확인하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의심입니다. ‘이걸 수행이라고 하다니 내가 정말 바보 같다! 나는 불교도도 아닌데.. 난 안 할래.’라고 생각하거나, ‘수행법은 정말 단순하면서도 대단한 것 같은데 나 같은 사람이 이런 걸 해도 될까? 나한테는 너무 힘들다! 나는 여기 안 맞는 사람 아닐까? 이걸 할 자격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생각들이 다섯 번째의 수행 장애라고 합니다. 앞의 의심에 대해서는, 전 세계 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2천 6백 년 전부터, 또 지금도 닦고 있고, 그 사람들 모두 불교도도 아니었고, 바보도 아니었습니다. 다른 종교를 갖고 있더라도 종교는 종교대로 소중하게 지키면서 그와 무관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일이기에 자신이 지니고 있는 종교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에 관계없이, 시대를 뛰어넘어 수행하는 바른 방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뒤의 의심인 ‘나는 자격이 안 되나 보다.’ 라는 생각은 자신을 실제보다 너무 낮추어보는 착각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불교 이론을 조사하면서 확신이 생겨 이 수행을 한 사나흘 바짝 하면 되는 줄 아는 것도 착각입니다. 노력할 때 노력하면, 그 노력이 쌓여 누구나 되게 돼 있으니 포기는 너무 섣부른 것입니다.

 

홍수에 가족을 잃고 미쳐서 길거리를 떠돌던 사람도 이 수행법을 닦아서 목적을 달성했고, 동네 바보로 놀림 받던 사람도 이 수행법을 닦아서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온 누구라도, 노력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차곡차곡 힘이 붙게 됩니다. 지나친 자기 의심도 일종의 마음의 불순물이 일으키는 거라고 알아야 합니다.

 

❍ 다섯 가지 장애의 극복 ❍

 

먼저 수행 중에 일어나는 다섯 가지 장애는 알아차릴 대상으로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결과를 낸다고 부처님이 명언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sanditthiko(산딧티꼬)·눈앞에 결과가 나온다」 「akāliko(아깔리꼬)·시기를 묻지 않는다.」 요컨대 곧 결과가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시대라도 실천하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결과가 나오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인 종교는 「사후, 천국에 들어감」의 이야기입니다. 불교는 「지금·여기서 깨달음에 이른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고 있지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결과를 내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그것은 왜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해탈하고 싶다는 마음이 진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탈에 이르고 싶다고 하는 진지한 의욕은 그렇게 간단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해탈에 이르고 싶다고 하는 진지한 의욕은 현명한 자의 특권입니다. 부처님께서 「지혜에 의해 집착을 버려 해탈에 이른다.」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으므로 지혜와 해탈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완성하면 깨달음에 이르지만, 지혜가 깨달음은 아닙니다. 지혜에는 2종류가 있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현상을 관찰하면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또한, 불교를 잘 배워 고찰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조하고, 또 타인의 삶에도 대조해서, 부처님이 말한 것은 진리인 것임에 틀림없다고 납득합니다. 그것도 지혜입니다. 납득한 현명한 자가 이론은 완벽해서 실천·실행해 보자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수행을 시작하면 머지않아 좋은 결과를 냅니다.

 

현재 수행하는 사람들이 부처님 당시나 먼 옛날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불법이 진리이다! 라는 납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도에게는 삼보에 대한 믿음과 불법이 진리인 것은 당연한 이야기라고 자신만만해야 합니다. 불교를 배우고, 이해하고, 납득하여, 해탈에 이르고 싶다고 하는 진정한 의욕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5가지의 장애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가지 장애는 수행을 하려면 제일 먼저 나타나서 수행자의 수행을 방해하는 장애(덮개)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 다섯 장애를 싫어하거나 없애려하지 말고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담마로 받아들여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들도 원인·결과라는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무상한 성품을 지닌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기억해 두어 장애가 나타나지 않게 조심합시다.

 

① (kamacchnda) 오욕락에 대한 미련, 감각적인 욕망, 특히 성적인 욕망.

 

② (vyapada) 분노·싫은 기분, 적의·라이벌 의식·이유 없는 격렬한 분노.

 

③ (thina-midha) 혼침과 수면인데, 혼침은 마음의 힘이 둔하여 약해지는 것, 행동하고 싶지 않은·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 수면은 졸려서 최종적으로 자버리는 상태.

 

④ (uddhacca-kukkucca) 들뜸과 후회인데, 들뜸은 마음이 들떠고, 초조해 하고 있고, 열이 오르고 있고, 집중력이 없어 혼란스럽고 흥분해 있는 상태. 후회는 자신이 한 것을 생각해서 「아! 왜 저런 일을 했을까? 해선 안 되는 것을 해 버렸네! 나는 나쁜 사람이다!」 등을 생각하여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

 

⑤ (vicikiccha) 의심인데, 의심은 Yes/No가 확실치 않은 상태. 들어오는 정보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것. 불교에서 「의심」은 매우 무서운 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정보나 데이터를 조사하려고도 하지 않고, 머리로부터 생각하여 부정하는 일도 의심입니다. 또한 이해함이 없이 통째로 받아들이는 일도 의심입니다. 「의심」이 있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지혜는 자라지 않습니다.

 

「번뇌는 인간에게 원래 갖춰져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욕구가 있고, 분노가 있고, 혼란스런 마음이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의심」에 굴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심」은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행을 실천해도 머리는 망상·사고로 가득합니다. 왜 한없이 망상이 맴도는 것일까요? 결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치 않기 때문입니다. 망상은 답이 나오면, 결론에 이르면, 종료하는 것입니다. 수행할 때에도 「이러는 것이 좋은 것인지? 다른 방법은 없는가? 자신에게 하기 쉽게 이렇게 하면 좋지 않을까? 자아가 없다고 말해도 자의식은 있겠지! 자의식은 자아는 아닌 것인가?」 등을 생각합니다. 마음이 보이는, 들리는, 느끼는 등으로 알아차려서 멈추지 않는 한, 수행은 능숙하게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전 재산도 버릴 수 있고, 가족도 버릴 수 있고, 사치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개념에 대한 집착은 버릴 수 없습니다.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이 「의심」이라고 하는 마음의 누름돌입니다.

 

이런 다섯 가지 장애는 실제로 수행에서 마음이 좀 고요해지면 망상, 통증, 졸림, 싫증, 의심 등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담마로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이런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것에서 법의 성품을 보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장애를 그냥 장애라고 생각하면 수행을 할 수가 없고, 이들이 알아차릴 대상이라고 볼 수 있어야 수행이 됩니다. 이런 장애들을 탐․진․치로 반응하지 않고 그것을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알아차릴 때 수행이 발전합니다. 수행의 기초는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알아차림으로 이겨내는 작업에서 다져집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미련은 부정관(Asubha-bhāvanā), 감각기관에 대한 관찰, 식사의 절제, 훌륭한 스승, 적절한 대화 등으로 다스리면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의 대상에 대한 집중력과 알아차림이 강하면 해결됩니다.

 

분노는 자애수행, 기쁨에 대한 무량한 마음, 삼보에 대한 믿음, 평온함에 대한 집중, 업에 대한 숙고로 다스리면 됩니다.

 

이렇게 욕구와 분노는 무언가에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제외됩니다. 욕구는 다만 가라앉히는 것만으로도 되지만, 분노를 가라앉히려면 정반대의 마음인 자애를 마음에 만들면 간단하게 상쇄됩니다. 자비의 명상을 하면 좋습니다.

 

혼침과 수면은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알아차림(Maraṇānussati), 환희심을 일으키는 대상을 회상함, 부처님을 따라 성인들이 가신 법의 길을 따라 가야함을 되새김, 분발심을 일으키면 됩니다. 또한 대상에 대해 부지런히 집중하고 있으면 졸음은 자연스럽게 물러갑니다. 졸음이 물러가면 머리가 칼날처럼 명쾌하고 주위가 빛나게 됩니다. 눈으로 보는 것 같은 빛이 아니라, 눈부신 것도 어슴푸레한 것도 아니지만 분명히 「밝다」는 것을 압니다. 물론 그 밝음도 올바르게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들뜸이 있을 때는 경전과 계율에 대한 독송, 차분하게 하나의 대상에만 몰두하면 제거가 됩니다. 또한 집중이 잘되면 들뜨기도 하는데 그것은 마음의 혼란이므로 주의해서 들뜨지 않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수행이 잘 되지 않는다.」는 마음도 들뜨게 하므로 제거해야 합니다. 「잘 되어가든 잘 되지 않든, 다만 알아차림을 할 뿐」이라고 마음을 정합니다.

 

의심은 삼보에 대한 믿음, 적절한 대화로 원인·결과에 대해 고찰함, 모든 현상을 삼법인에 비추어 지혜롭게 행함으로 제거됩니다. 일어난 마음은 제대로 결과를 내기 때문에 「역시 이 가르침은 올바르다」라고 확신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혐의나 불안, 의심도 날려버려야 합니다.

 

5가지 장애는 지혜를 약하게 하는 번뇌이기 때문에 그것이 제거되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나타납니다.

 

결국 다섯 가지 장애는 장애가 아니고 알아차릴 대상으로서 수행의 재료입니다. 수행자가 다섯 가지 장애를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진리를 볼 수 있는 힘이 쌓이고, 알아차리지 못하면 계속 장애가 수행자를 휩쓸어 버립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 다섯 가지 장애를 수행자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그런 현상에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리고, 그 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즉시 몸으로 돌아와 가슴의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다가 느낌이 사라지면 다시 수행의 주 대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럴 때 수행자는 장애에서 알아차림의 힘을 키우고 장애를 극복하게 됩니다.

 

이 과정은 알아차림을 하려는 수행자에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힘과 참고 견디는 인내력을 키워줍니다. 이런 노력과 알아차림이 결국 고요한 마음상태를 얻게 하고, 드디어 생멸하는 법의 성품을 보게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