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사무량심(CATU-APPAMAÑÑĀ-CITTA, 四無量心) (20141205)

담마마-마까 2021. 7. 15. 00:05

* 사무량심(CATU-APPAMAÑÑĀ-CITTA, 四無量心) (20141205)

 

「자비」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불교적 답입니다.

불교도가 목표로 하는 것은 지혜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최종적인 마음의 해탈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범부중생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고, 깨달음을 이루어도 자신의 수명이 끝날 때까지는 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서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떤 방법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자비의 삶을 말합니다.

이렇게 자비와 지혜는 불교의 두 가지 기둥이라고 할 만큼 어느 쪽도 빠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입니다. 독사나 바퀴벌레도 네트워크의 일원입니다.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를 서로 지탱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생명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두 것 덕분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서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절대적인 일로, 호흡하는 것과 같이 기본적인 일입니다. 자비를 호흡에 비유한 것은 먹는 것 보다 더 기본적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의 관계입니다. 불교에서 satta(중생, 유정)라는 말에는 우리가 인식 가능한 생명은 물론이거니와, 신들이나 지옥의 생명 등 다른 차원의 생명도 모두 포함됩니다. 자비는 그들 무량의 생명을 대하는데 한없고 큰마음입니다. 그 대상을 한정하지 않고, 평등하게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 대상으로 하기에 무량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러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한없는 복덕과 과보를 가져오기에 appamaññā-citta(무량심)이라고 합니다.

 

또는 이 4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사범주(四梵住, catu-brahma-vihāra)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4가지 마음을 가지는 것에 의해, 현세에서 해탈하지 못하더라도 사후에는 천상의 범천계에 태어나 살아간다고 하여 범주라고 합니다. 또한 이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숭고한 경지(초선)에 이르러 살아가는 것이므로 범주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생명에 대한 마음의 기능 중에서 순수하게 행복이 되는 4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mettā, karuṇā, muditā, upekkhā로 각각 자·비·희·사라고 합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화내지 않는 것(자), 해치려는 마음이 없는 것(비), 다른 생명의 행복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희), 평등한 마음으로 집착함이 없는 것(사)입니다.

 

한마디로 4가지 한량없는 마음은 수행자가 노력하고 인욕 해야 할 덕목이며, 수행에 의해 획득되는 선정 공덕의 하나이며, 도를 성취한 사람이 필연적으로 갖추게 되는 선한 마음의 성질입니다.

 

다시 말해 사무량심을 가지는 것은 출가한 빅쿠나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의무입니다. 또한 수행이 진행되는 것에 따라 필연적으로 획득되어 가는 이상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자비 희사의 숭고한 마음은 범천의 삶과 같이 최고의 삶의 방법입니다. 「자·비·희」를 습득하면 제일 선정·제2 선정·제3 선정에 이를 수가 있고, 「사」를 습득하면 제4 선정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또 자비는 성스러운 팔정도의 정사유(올바른 사고)에 포함되어 있어, 위빳사나를 실천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자비의 사고가 없으면 우리의 머릿속은 분노나 고민, 긴장, 불안, 오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마음을 침착하게 하는 것이 힘이 듭니다.

 

사무량심을 충만되게 실천하는 게송 ;

 

Ahaṁ sukhito homi. Niddukkho homi. Avero homi.

아항 수키또- 호-미. 닛둑코- 호-미. 아웨-로- 호-미.

 

Abyāpajjho homi. Anīgho homi. Sukhī attānaṁ pariharāmi.

아브야-빳조- 호-미. 아니-고- 호-미. 수키- 앗따-낭 빠리하라-미.

 

내가 행복하기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증오로부터 자유롭기를!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번민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스스로를 보호하여 행복을 누리기를!

 

(1) METTĀ (멧따-, 자애, 慈)

 

Sabbe sattā sukhitā hontu.

삽베- 삿따- 수키따- 혼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행복하기를!

 

Sabbe sattā averā hontu.

삽베- 삿따- 아웨-라- 혼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증오로부터 자유롭기를!

 

Sabbe sattā abyāpajjhā hontu.

삽베- 삿따- 아브야-빳자- 혼뚜. 모

든 살아있는 것들이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기를!

 

Sabbe sattā anīghā hontu.

삽베- 삿따- 아니-가- 혼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번민으로부터 자유롭기를!

 

Sabbe sattā sukhī attānaṁ pariharantu.

삽베- 삿따- 수키- 앗따-낭 빠리하란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스스로를 보호하여 행복을 누리기를!

 

(2) KARUṆĀ (까루나-, 연민, 悲)

 

Sabbe sattā sabbadukkhā pamuccantu.

삽베- 삿따- 삽바둑카- 빠뭇짠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3) MUDITĀ (무디따-, 기쁨, 喜)

 

Sabbe sattā laddhasampattito mā vigacchantu.

삽베- 삿따- 랏다삼빳띠또- 마- 위갓찬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그들이 성취한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를!

 

(4) UPEKKHĀ (우뻭카-, 평정, 捨)

 

Sabbe sattā kammassak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ṭisaraṇā.

삽베 삿따- 깜맛사까- 깜마다-야-다- 깜마요-니- 깜마반두- 깜마빠띠사라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자신의 업이기에, 자신이 업의 상속자이고, 업으로 인해 태어나서, 업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업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라네.

 

Yaṁ kammaṁ karissanti kalyāṇaṁ vā pāpakaṁ vā tassa dāyādā bhavissanti.

양 깜망 까릿산띠 깔르야-낭 와- 빠-빠깡 와- 땃사 다-야-다- 바윗산띠.

 

우리는 자신이 짓는 착한 행위이든 나쁜 행위이든, 그 결과는 자기 자신이 받아야만 하네.

Sabbe sattā sadā hontu, averā sukhajīvino.

삽베- 삿따- 사다- 혼뚜, 아웨-라- 수카지-위노-.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항상 증오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Kataṁ puññaphalaṁ mayhaṁ, sabbe bhāgī bhavantu te.

까땅 뿐냐팔랑 마이항, 삽베- 바-기- 바완뚜 떼-.

내가 행한 공덕의 결과를 누구든지 함께 누리게 되기를!

 

Hotu sabbaṁ sumaṅgalaṁ, rakkhantu sabbadevatā,

호-뚜 삽방 수망갈랑, 락칸뚜 삽바데-와따-,

모든 좋은 축복이 있고, 모든 천신들이 그대를 보호하며,

 

sabbabuddhānubhāvena, sotthī hontu nirantaraṁ.

삽바붓다-누바-웨-나, 솟티- 혼뚜 니란따랑.

모든 붓다의 위신력으로, 그대에게 끊임없는 길상이 있기를!

 

Hotu sabbaṁ sumaṅgalaṁ, rakkhantu sabbadevatā,

호-뚜 삽방 수망갈랑, 락칸뚜 삽바데-와따-,

모든 좋은 축복이 있고, 모든 천신들이 그대를 보호하며,

 

sabbadhammānubhāvena, sotthī hontu nirantaraṁ.

삽바담마-누바-웨-나, 솟티- 혼뚜 니란따랑.

모든 담마의 위신력으로, 그대에게 끊임없는 길상이 있기를!

 

hotu sabbaṁ sumaṅgalaṁ, rakkhantu sabbadevatā,

호-뚜 삽방 수망갈랑, 락칸뚜 삽바데-와따-,

모든 좋은 축복이 있고, 모든 천신들이 그대를 보호하며,

 

sabbasaṅghānubhāvena, sotthī hontu nirantaraṁ.

삽바상가-누바-웨-나, 솟티- 혼뚜 니란따랑.

모든 상가의 위신력으로, 그대에게 끊임없는 길상이 있기를!

 

(1) METTĀ (멧따-, 자애, 慈)

 

멧따는 「우정」이라는 의미로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말입니다. 사랑이나 애정은 집착이나 질투에 모습을 바꾸어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있지만, 우정은 어떤 때라도 마음 놓을 수 있는 밝고 즐거운 기분입니다. 뭐든지 이야기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친구와 함께 있을 때의 마음 편하고 즐거운 기분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친구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멧따를 기른 사람은 그러한 훌륭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끔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 다른 생명에 대해 무슨 자애도 배려도 없는 냉담하고 무관심한 인간이 된다.」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4개의 숭고한 마음을 기르도록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자애)·비(연민)·희(기쁨)·사(평정), 이 4가지 중에서도 첫 번째의 자애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재가 사람들의 시주물에 의해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 즉 스님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매일 일순간이라도 자애의 명상을 한다면, 재가자들로부터 빌린 것을 돌려줄 수가 있다」

 

자애경(Metta sutta)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자애의 알아차림을 확실히 길러라. 이것이 범천의 삶의 방법이다」

 

「알아차림」은 부처님의 가르침 전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80세에 열반에 들 때까지, 거의 모든 설법 중에서 「알아차림」을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애경에 「자애의 알아차림을 확실히 길러라」고 하듯이, 자애가 알아차림과 동등하게 중요한 것임을 이해할 때, 부처님이 가르침 중에서 자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알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자애를 완성시켰습니다. 그리고 자비와 지혜를 균형있게 유지했습니다. 깨달음을 이룬 뒤도 매일 처음으로 행했던 것은 자애의 결과인 대비(Mahā karunā)의 마음으로 세상을 관찰해서 누군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자애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분노를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분노는 마음의 에너지를 소모시켜 지금까지 쌓아올려 온 명상이나 계율의 실천을 엉망으로 하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화나 있는 사람은 화장 한 후에 남아 있는 반만 탄 몸과 같은 것입니다. 그 몸의 바깥은 타서 숯이 되어있고, 한가운데는 터지고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그 더러운 것을 주워 불을 피우기 위해서나 무엇인가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더러운 것에 손대면 자신의 손이 더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같이 어떤 사람도 할 수 있는 한 화나 있는 사람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멧따를 기르는 실천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나의 친한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행복하기를!」이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염송하며 멧따로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행복하기를!」이라고 생각하며 염송할 때 거기에 있는 것이 멧따인 것입니다.

마음을 상냥한 우정으로 가득 채우면 자애의 마음이 자랍니다.

 

「행복하지 않기를!」바라는 생명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나」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을 기르기 위해서는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괜찮으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위선적으로 되면 자애로부터 멀어져 버립니다.

「나만이 행복하기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었지만, 「 나도, 너도, 모두 다 행복하기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올바릅니다.

 

자애의 실천을 할 때 우선 먼저 자신에 대해 자비를 향하여 주십시오.

가끔 「왜 먼저 자신을 사랑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행위가 아닌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행위입니까?

자신의 마음을 잘 응시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자신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그 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전 세계의 어디를 찾아봐도, 자기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찾아낼 수 없다.

자신이 다른 누구보다 사랑스럽다.

그처럼 다른 생명도 자신에게는 제일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자애의 효과를 확실히 체험할 수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또 온 세상의 모든 생명이 자애의 마음으로 채워진다면,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내가 행복하기를!」이라고 간절히 염송하고 나면, 다음에는 「나의 친한 사람들이 행복하기를!」이라고 바랍니다.

이 때는 우선 사이가 좋은 동성의 친구를 명상의 대상으로 선택합니다. 이성의 친구는 선택하지 않도록 합니다.

 

가족에게 명상할 때는 자신의 아내나 남편, 아이들을 맨 먼저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우선 부모님,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 친척 등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이성의 친구나 가족을 생각하면 멧따가 아니라 다른 감정, 즉 탐욕(rāga)이 일어나 버리기 쉽기에 명상의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동성의 친구와 즐거웠던 일을 생각해 내 보십시오. 그 행복한 기분이 멧따입니다. (친구가 없는 사람은 어릴 적에 엄마와 놀며 즐거웠던 일을 생각해 내도 괜찮습니다).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에게 멧따 명상을 하고 싶으면, 멧따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알고 나서, 같은 마음이 일어나게 하면 좋을 것입니다.

또한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자애의 명상을 하지 않습니다.

친한 사람의 죽음은 아무래도 슬픔과 연결됩니다. 슬픔도 분노의 일종이므로 밝고 행복한 자애의 마음을 기르는 명상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또한 선정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자애의 명상은 행복하게 되기 위한 치료법입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맑고 깨끗한 자애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욕구나 성냄)을 기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명상은 정해진 방식을 지키는 것이 안전합니다.

자애를 실제로 실천할 때는 「그 사람」 「이 사람」이라고 대상을 선택하지 않고 「나의 친한 사람들」이라고 전체적으로 정리해서 명상하는 것이 간단하고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행복하기를!」이라고 생명 전체에 자애를 넓혀 명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애 명상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최상의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밤에 자려고 할 때, 전철을 타고 있을 때 등 언제든지 시간을 찾아내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행복하기를!」이라고 마음속으로 계속 반복해 주십시오.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이야말로 사람을 확실히 행복하게 하는 강력한 주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행복하기를!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행복하기를!」 이라고 싫은 사람에 대해서도 명상합니다.

이것은 처음 자애를 명상하려면 저항이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솔직하고 진정으로 명상하여 다른 사람과 똑같이 명상하게 되었을 때에는 진정한 자애심이 일어납니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개나 고양이조차 좋아하는 상대에게는 상냥하다. 나는 「자신을 방해 하는 사람, 싫은 사람도 행복하기를!」 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이 되겠다.」라고 훌륭한 인격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우리가 기르려 하고 있는 자애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해! 이 사람이 좋아!」라고 하는 세속적인 애정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용모나 행위, 생각, 소리, 행동 등을 좋아하는 것이지, 진짜 자애는 아닙니다.

만약 상대의 생각이나 태도가 바뀌어 버리면, 그 사람이 싫게 될지도 모릅니다. 혹은 자기 자신의 취향이 바뀌거나 기분이 바뀌거나 마음이 바뀌거나 하면, 이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애정과 미움의 이중성」 안에서, 우리는 어느 특정한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미워합니다. 지금 사랑하지만 다음에는 미워합니다. 사랑하고 싶을 때에 사랑하고 미워하고 싶을 때에 미워합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되고 있을 때는 사랑하지만, 자신과 상대의 관계나 모든 것이 잘되지 않을 때에는 미워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애정이 때나 장소, 상황에 의해 바뀐다면 그 애정은 진짜의 애정(자애)이 아닙니다. 욕구나 탐욕, 성적인 욕망인 것입니다.

 

우리가 명상을 통해 기르려 하는 자애에는 그 뒤의 미움이나 속셈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지혜와 알아차림에 의해 자란 자애에는 「애정과 미움의 이중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황이 어떻게 변화해도 자애가 미움으로 바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진짜 자애」란 욕구와 분노와 무지의 쓰레기 산에 파묻혀 있는 자신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발견해서 주의 깊게 길러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애를 발견하고 길러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에 의해 「나」라고 하는 의식(ahankāra―에고)은 소멸하고, 에고가 있던 장소는 에고로부터 자애로 옮겨집니다.

 

에고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자신의 취향으로 생활하고, 호불호의 방식으로 행동하고, 호불호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방식은 싫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자신의 방식이나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다

면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되어 버립니다. 심할 때에는 이성을 잃어 그 사람들이 살 권리를 빼앗아 버릴지도 모릅니다.

 

자애를 실천할 때 자애를 향한 상대로부터 답례나 담보가 없어도 화를 내지 않게 해 주십시오. 화가 나는 것은 자신에게 속셈이 있거나 어떠한 담보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애의 큰마음으로 모든 생명을 있는 그대로 감싸고 차별도 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행복하기를!」이라고 바라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생명에 대해 자애의 마음으로 만나고, 자애의 마음으로 이야기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 사람이 눈앞에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자애의 마음을 계속 가지십시오.

 

명상을 하면 마음도 신체도 자연스럽게 편안해 집니다. 그리고 번뇌는 사라져 갑니다.

예를 들어, 졸음이나 수마는 주의 깊은 알아차림에 교체되고, 애매함이나 우유부단은 확신에 교체됩니다. 분노나 미움은 기쁨에 교체되고, 불안이나 고민은 행복에 교체됩니다. 그리고 잠재의식에 파묻혀 있던 자애가 표면에 나타나 거기에 따라 우리는 보다 온화하고 행복하게 됩니다.

 

이 명상 상태 안에서 마음은 침착성을 얻고 욕구를 넘을 수가 있습니다. 또 「자애의 명상은 분노를 지워버리고, 자애의 마음을 기른다」라고 하는 것, 「분노가 사라지면 명상하기 쉬워진다」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자애와 알아차림은 함께 작용합니다. 그 결과 선정(마음의 침착성)과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차림을 실천해서 마음을 능숙하게 조정하면서 자비의 파동을 길러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을 관찰하면 생각에는 ① 해롭고 파괴적이어서 고통을 동반하는 생각과  ② 온화하고 즐거워서 기쁨을 동반하는 생각의 2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리면 마음은 「해로운 생각」를 거부하게 되고, 「온화하고 기쁨이 있는 생각」을 기르게 됩니다.

 

「해로운 생각」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 생각을 계속 가지지 않도록 하고, 「온화한 생각」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 생각을 길러야 합니다.

 

이와 같이 생각을 관찰하는 것에 의해서도 마음에 자애가 자라는 조건이 만들어집니다. 즉, 「온화한 생각」의 파동이 점차 자유롭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애는 자신의 마음 안에서 자란다.」라고 알고, 「밖의 환경이나 상황은 자애를 기르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라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자애의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잔혹한 사람도 자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숨어 있는 자애를 「알아차림」을 통해 꺼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애는 태양에 비유됩니다. 아마 그것은 자애는 모든 생명에 대해 매우 따뜻한 마음을 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태양이 지구에 따뜻함을 가져오듯이, 자애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따뜻함을 가져옵니다. 태양이 세계의 모든 것들에 차별 없이 쏟아지듯이, 자애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차별 없이 스며듭니다. 태양이 어두운 곳을 지우듯이, 자애는 미움의 어두운 곳을 지웁니다.

 

물질 속에는 태양을 흡수하기 쉬운 물질이 있습니다. 그처럼 생명 속에는 다른 생명보다 자애를 흡수하기 쉬운 생명이 있습니다. 자애를 흡수하기 쉬운 사람은 그 사람의 업(kamma)의 결과, 편하게 자애를 얻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애의 말을 다만 반복해 염송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자애의 마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상투적으로 다만 반복해 염송하는 것은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주지 않고 처방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애의 게송을 반복할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증장시켜야 합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행복하기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증오로부터 자유롭기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위험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번민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스스로를 보호하여 행복을 누리기를!

 

마음속으로 이 문장들을 반복할 때, 우리는 자애를 방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암송이 마음속에 흐르면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의 대상, 즉 자애를 펼치는 쪽으로 집중됩니다. 이때 마음은 방황을 멈추고 자애의 마음 하나로 연속하여 흐르게 됩니다. 방황이 멈춰지면, 생각, 걱정, 망상, 계획이 멈춰지고, 마음은 집중을 얻게 됩니다.

 

그러한 집중 속에서 고요함과 마음의 평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행복감과 가벼움,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끊임없는 생각, 걱정, 망상의 회오리 속에서 근심에 사로잡힌 마음으로부터 멀리 벗어난다는 것은 매우 기쁘고 반가운 경험입니다.

 

이러한 집중에서 비롯되는 고요함은 매우 큰 힘이 됩니다.

세속적인 행복, 감각적인 행복이 아니라, 집중에서 얻는 행복 혹은 기쁨은 소중한 경험입니다.

그 맛을 한번 보게 되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이끌림은 서서히 줄어들게 되고,

결국 더 이상 감각적 올가미의 노예가 되지 않게 될 것이고,

자신의 감각적 욕망을 더 잘 다스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애의 직접적인 적은 성냄(dosa) 또는 미움(kodha)이고,

그 간접적인 적은 애정(pema)입니다.

자애는 선에 대한 진실한 서원과 모든 존재에 대한 이익과 행복입니다.

그래서 자애는 악의를 버립니다.

자애가 능숙하게 계발된 자는 인자한 태도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펼치는 자애는 성냄(dosa)의 반대입니다. 성냄의 반대이므로 미움(kodha)의 반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발견하게 되면 성냄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에 미움, 성냄이 일어나게 되면 건조하고 마르게 됩니다. 풍성하고 촉촉하지 않게 됩니다.

 

이때 이런 사람들도 나처럼 행복해지기를 원할 것이라는 마음을 갖게 되면 자애의 촉촉함이 들어오게 되고 그러면 마음이 풍성해지고 윤활해집니다. 그렇게 자애가 들어오게 되었을 때 미움(kodha), 성냄(dosa)이라는 자리에 성내지 않음(adosa)이라는 마음의 요소가 대신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자애의 직접적인 적, 자애의 반대되는 것이 성냄(dosa) 또는 미움(kodha)입니다.

 

수행으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성냄을 제거하면, 누가 욕을 하고 저주를 해도 절대로 미워하고 화나는 일이 생겨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생의 이익을 바라는 자애를 갖게 됩니다. 수행 중에는 성냄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이러한 애착에 자애라는 말을 갖다 붙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탐욕(lobha)의 범주에 속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애정(pema)이지 진정한 자애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애정(pema)이 절대 진정한 자애로 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애정이 간접적인 원인이 되어 선한 마음(kusala citta)이 일어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척, 친구, 부부, 부모, 자식 간의 사랑도 진정한 자애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촉촉하게 하는 자애의 힘은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바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들의 이익과 번영을 바라는 것이 자애입니다.

 

이러한 자애의 특성은 마음 안에서 생겨나는 이롭게 해주고자 하는 특성입니다. 여기에 ‘자애가 함께 하는 몸의 행위’와 ‘자애가 함께 하는 말의 행위’가 생길 수 있게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하고 편안할 수 있도록 행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이익을 바라면서 실제로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 자애의 기능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의 이익을 바라면서 어떤 부모나 스승보다 힘이 컸습니다. 어느 누구와도 달랐습니다. 실제 행함에 있어서도 달랐습니다. 법을 얻을 수 있을 만한 존재가 있다면 아무리 멀어도 가서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런 큰 자애를 몸으로도 보여주셨고, 말로도 법을 설하며 도우셨습니다.

 

다음은 수행자의 지혜에 자애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입니다. 그것은 원한이 사라지고 풀리게 하는 법으로 드러납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냄을 완전히 제거하셨기 때문에 원한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와 같이 완전하진 않더라도, 상대방에게 자애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익을 위해 행하면 원래 존재하던 원한도 풀릴 수 있습니다. 자애를 수행하는 수행자의 지혜에 원한이 사라지게 하는 법으로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에게 불만스러워하고 원한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성냄을 완전히 제거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원한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원한과 적의가 사라져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원한과 적의가 없어서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음은 자애가 생기는 가장 근접한 원인에 대해서 입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미운 구석도 있고 사랑스러운 구석도 있습니다. 어떤 존재의 미운 구석을 보고 계속 생각하면 미운 마음이 자라나게 되어 자애가 생기지 않게 됩니다. 있던 자애도 없어지고 약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애가 생기게 하려면 미운 점을 보지 않고 사랑스러운 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행동, 말, 마음씀씀이에 대해 훌륭한 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점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갈애로 집착으로 보라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스러운 점이 보이면 이 사람 위에 자애가 생깁니다. 그러면 자애가 들어가는 몸의 행위, 말의 행위, 마음의 행위로 행해주면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모든 존재들의 소중히 여길 만한 사랑스러운 점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많은 중생에 대해서 미워할만한 것도 알지만 이것을 미워할만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소중한 것을 보고 이 사람의 이익을 실천해주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본받아 자애에 힘을 실어 장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애 명상을 하면 그것이 선정을 얻기 위한 방식도 되지만, 선업을 쌓는다는 점에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애가 성취되는 것은 성내는 마음이 무너지고, 성내고 화내는 것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성냄이 소멸될 때 자애가 성취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애가 커질수록 성냄은 줄어듭니다. 자애가 성공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갈애가 자애로 둔갑해서 속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부나 애인과 같은 관계는 자애 같지만 갈애와 집착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애를 죽이게 될 수 있습니다.

성냄으로 마음에 자애가 오지 못하게 하여 자애들 제거한다면, 갈애는 대상과 붙어서 자애를 완전히 제거해 버립니다.

 

마음에 진정한 자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행복하게 잠들고, 행복하게 깨어나며, 사람들의 사랑과 천신들의 사랑을 받고, 다른 해로움이 미치지 않는 이익이 있게 됩니다. 이것은 자애가 자리하게 되었을 때 저절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애를 보내는 방법 중에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 적이 없기를!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적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불선업이라는 적은 탐, 진, 치라는 욕구에 따라 행동함으로서 생기는 적입니다. 그 사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내부의 적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적이 없어지기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없어지면 탐진치로 행동하는 불선업이 없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잘못된 몸과 말과 마음의 행위가 사라집니다. 이렇게 내부의 적이 사라져야 몸과 말과 마음의 좋은 행과 좋은 습이 따라오게 됩니다.

 

오계를 완전히 지킬 수 없다면 불선업이라는 적이 들끓게 됩니다. 잘못된 행위를 저지르면 성냄이라는 적이 들끓고 있는 것입니다. 탐욕에 따라 삿된 음행, 도둑질 등의 행동을 하게 되어 역시 탐욕이라는 내부의 적이 들끓게 됩니다. 또 탐냄과 성냄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알지 못하고 행동할 때는 어리석음이 들끓게 됩니다. 이것들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이러한 적은 고요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저지르거나 범하는 내부의 불선업이라는 적이 꺼지지 않았다면 사람이라는 적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쁜 불선업을 행하게 되면 친구가 생기기는커녕 적이 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래서 ‘내부의 적이 꺼지고 외부의 사람이라는 적도 사라지게 되기를’이라고 하며 자애를 보내주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내부의 불선업이라는 적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오계를 지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부의 적이 사라지면 외부의 사람이라는 적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없어지게 되고, 그러면 마음이 행복하고 가벼워지고 몸도 행복해질 것입니다. 틀림없이 두려움이 없어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불선업이라는 적과 사람이라는 적이 없어지게 되면 두려워할 만한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내부의 적이 사라지지 않아 불선업을 행하면 스스로를 비난하게 됩니다. 또 지혜롭고 선한 이들에게 비난받게 됩니다. 다음으로 법적으로 벌을 받게 되는 위험도 있게 됩니다.

내부의 적이 사라지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되고 처벌을 받게 되는 이런 위험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자애의 마음은 헛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상대방이 좋지 않은 곳에 가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애를 보내주는 방법은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좋지 않은 네 가지 위험, 즉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 남들에게 비난받는 것, 처벌을 받게 되는 것, 좋지 않은 곳에 가게 되는 것 등의 이러한 위험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행복해지게 됩니다. 또 몸도 행복해집니다.

 

이 자애를 펼치는 것으로 상대방이 이익을 누릴 수도 있고 누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내 마음에 미움과 성냄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가장 분명하고 직접적인 것입니다.

 

적이 사라져서 몸이 행복해지고 마음이 행복해진다고 해도 사람은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배설해야 하고, 온도를 조절해 주어야 하고, 쉬어야 하고, 자야 하는 매일 해야 하는 것들이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을 편안하게 쉽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도 필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진정한 자애를 모든 존재 위에 둘 줄 아는 이는 자신의 자애가 결여된 행동 때문에 다른 존재가 힘들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인내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자기에게 인내해야 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용서합니다. 인내는 하지만 용서하지는 않는 경우도 있지만, 자애로운 사람은 인내하고 용서합니다. 그런 사람은 인내와 용서뿐 아니라 필요한 적절한 상황에서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자애의 뒤를 이어서 인내, 용서, 희생과 같은 선한 법이 따라오게 됩니다. 이 사람에게 선한 법이 늘어나게 됩니다. 여기서 자애가 얼마나 이로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자애를 바탕으로 선한 법이 늘어나는 뒤에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자기가 행복하기를 바라듯이 다른 이도 행복하기를 바랄 것이고, 자기가 고통을 바라지 않듯이 다른 이도 고통당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고통 받기 원하지 않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 고통을 제거하고 싶어집니다.

 

이것을 까루나(연민)라고 합니다.

 

(2) KARUṆĀ (까루나-, 연민, 悲)

 

까루나는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없애 주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까루나는 불행에 빠져 있는, 고민하고 있는, 괴로워하고 있는, 피해를 당한 사람 등을 보면 마음에 나타나는 기분입니다. 어떻게든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까루나(karuṇā, 연민, 悲)입니다.

 

자신의 아이가 병이 들거나 사고를 당했다면 엄마는 순수하게 그 아이를 도와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이 까루나(karuṇā, 연민, 悲)의 마음입니다. 아이가 상처를 입으면 엄마는 낙심하지 않고, 서둘러 병원까지 데려갑니다. 꽤 활발합니다. 그처럼 진심으로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은 매우 밝고 건강하고 활발한 상태가 됩니다. 상대를 도와주면 「지친다!」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았어!」라고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한 밝은 마음을 길러서 나쁠 것은 없습니다.

 

연민(karuṇā)은 「가엾다! 불쌍하다…」라고 감정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이 되면 이성이 사라져 지혜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족을 그대로 두면 가엾다」 등의 감정적인 이유로 수행을 그만두는 것은 이성적이지는 않습니다. 자비의 사람은 자기희생적이기만 하는 삶의 방법은 하지 않습니다. 서로 좋은 길을 찾습니다. 이성적으로 자타를 위해서 활발하게 행동해 능숙하게 사는 사람이 자비의 사람입니다. 연민을 실천하는 그 순간에는 자신이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 기분, 활발하게 된 순간, 활동적이 된 순간을 기억해 두기 바랍니다. 몸도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이른바 넋을 잃은 순간, 자아를 버린 순간입니다. 상대방에게 「어떤 곤란한 일이 있습니까? 무얼 도와 드릴까요?」라고 묻은 순간에 마음은 해방되어 버립니다. 돕고 싶다는 기분은 마음을 해방시킵니다. 활발하게 합니다. 그래서 연민은 마음의 초조, 불안, 고민, 슬픔 등에 대한 해독제입니다. 굉장한 일입니다.

 

그런데 감정이란 번뇌는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망상하거나 자신의 감정에 빠져 있으면 어떤 에너지도 사라져 버립니다. 자아는 견고해지고 침울하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감정을 자비 희사의 마음으로 바꾸어 넣을 것을 권장합니다. 자비는 지혜가 발달하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자아를 없애는 방향으로도 작용합니다.

 

연민의 자비심을 기르는 실천법이 있습니다. 「나의 괴로움이 사라져서 자유롭게 되기를! 나의 친한 사람들의 괴로움이 사라져서 자유롭게 되기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괴로움이 사라져서 자유롭게 되기를!」이라고 바라며 연민의 마음을 채웁니다. 연민은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르기 쉬운 마음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뒷전으로 미루는 게으름뱅이에게는 좋은 약이 됩니다. 밝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연민심을 기르면 좋습니다. 연민을 실천하면 활발하게 될 뿐만 아니라, 즐거움과 충실감을 느끼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이 사라져서 자유롭게 되기를!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이 사라져서 자유롭게 되기를!」이라고 바랍니다. 이것은 실제 생활에서 가능한 한 실천해 보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괜히 심술부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내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괴로움이 사라져서 자유롭게 되기를! 이 사람도 행복하기를!」이라고 바랍니다. 이 사람이 지금 일으키고 있는 성냄과 미움, 질투라는 악한 행위로 인해서 그에 따른 나쁜 결과를 알기에 더욱 연민의 마음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연민의 마음으로 충만해지게 되고, 흔들림 없이 평화롭고 의연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한 이 사람을 도와 줍니다. 싫은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자비의 마음을 기르면 강한 자비심이 일어납니다.

 

또한 그 때는 대가를 기대하는 마음이 없기에, 순수한 자비를 기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쁜 사람의 친구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 대해서 화내지 않고, 반대로 걱정해 주는 상냥한 마음을 기르는 것입니다. 「무지한 어리석은 이에 대해서 공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화내는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내는 사람은 더 나쁘다」그러한 생각이 아니면 이 세상은 행복하게 되지 않습니다. 상대가 어리석기에 공격해도 된다는 것은 자신이 행복하게 되고 싶은데 올바른 방법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이라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걱정해 줍니다.

 

그처럼 불교에서는 자신의 적에 대해서도 연민심을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자신에게 해를 준 사람이나 싫은 사람을 도와도 자신에게는 이익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어떤 악인이라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무얼 그리 나쁜 일일까요? 현자는 그처럼 생각하므로 「적」이 아무도 없습니다.

 

자따까 이야기(Jātaka,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에는 보살이 자신을 심하게 해코지 한 상대를 돕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친절하게 해 준 상대에게 살해당해버리는 이야기마저 있습니다. 자따까 이야기 속의 보살은 불교도의 삶의 방법의 모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한 삶의 방법을 하는 것입니다. 선한 삶의 방법을 따르다가 살해당했다고 해도 억울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죽습니다. 연민의 마음으로 악인을 도와주다가 죽는다면 그 죽음은 쓸데없지는 않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실로 현명한 사람밖에 가능하지 않는 훌륭한 행위입니다.

 

(3) MUDITĀ (무디따-, 기쁨, 喜)

 

무디따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다정함을 말하는데, 이것은 다른 생명의 행복을 「좋았어!」라고 공감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면 어머니는 몹시 즐거울 것입니다. 그 순수한 기쁨이 무디따(muditā, 기쁨)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누군가가 성공하면 질투합니다. 그렇게 기뻐하던 조금 전의 어머니도 아이의 친구가 좀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듣자마자 분해하며 행복이 사라져 버립니다. 세상에서는 누군가가 성공하면 관계없는 다른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그런 우스운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기쁨의 사람은 다른 아이의 합격을 기뻐합니다. 노력하여 성공한 것은 다른 사람인데도 함께 기뻐하기에 자신도 행복하게 됩니다. 기쁨의 사람은 자신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언제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기쁨의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의 밝은 면을 보고 그것을 기뻐하므로 재난을 당해도 행복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해도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다」라고 밝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잘 웃지 않는 사람은 기쁨을 기르면 좋습니다.

 

기쁨(muditā)은 질투의 해독제입니다. 기본적으로 생명은 탐·진·치의 충동으로 살아갑니다. 그 중에 분노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상황·환경·사람들이 맞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분노」로 반응하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뛰어나다고 느꼈을 때는 「질투」라는 반항적 태도로 나타나고, 「자신」이 우위인 입장에 있다고 판단하면 그 능력·재산 등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인색함」으로 반항하고, 「자신」의 실패에는 「후회」로 반항합니다. 그

중에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 māna(아만)라는 번뇌도 일어나지만, 질투라는 파괴력이 큰 핵폐기물도 흘러나옵니다. 고농도의 핵폐기물은 위험합니다. 질투에는 기쁨(muditā)의 실천이 특효약입니다.

 

기쁨을 기르는 명상은 우선 나의 좋은 점을 떠올리며 마음속에서 미소 지어 봅니다. 다음으로는 내가 좀 더 행복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면서「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져서 성취한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를!」이라고 기쁨이 충만 되게 반복적으로 염송합니다.

 

다음은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여러 명이나 한 사람을 선택합니다. 그런 사람이 없으면 애완동물이라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좋은 점을 떠올리며 마음속에서 미소 지어 봅니다. 다음으로는 그 상대방이 좀 더 행복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면서 「나의 친한 사람 ○○○○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져서 성취한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를!」이라고 기쁨이 충만 되게 반복적으로 염송합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상대를 선택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성욕이나 애착을 일으키는 상대를 피하도록 하십시오. 성욕이나 애착을 일으키는 상대에 대해서는 미소 짓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처음에는 배우자나 자식도 대상으로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번뇌에서 벗어나 깨끗한 미소가 일어나는 상대를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한 상대의 아름다운 행위나 좋은 점, 마음에 드는 부분이나 장점만을 떠올리며 미소 지어 봅니다. 단점이 떠올라도 즉시 무시합니다. 단점보다 장점을 확대해서 보도록 합니다. 그런 후 상대방이 기쁨을 느끼고 있는 일을 조사해서 같은 사고방식이 되도록 해서 미소 지어 봅니다.

 

다음은 서서히 대상이 되는 생명의 수를 늘려 봅니다.「친구의 친구는 모두 친구」라는 방식으로 「내 아이 친구 ○○는 우리 아이와 똑같기에 아이의 친구 ○○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져서 성취한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를!」 「내 아이 친구 △△는 우리 아이와 똑같기에 아이의 친구 △△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져서 성취한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를!」이렇게 사람의 수를 늘려가서 마음으로 느끼는 기쁨을 증대시킵니다. 이렇게 더 이상 할 상대가 없을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친한 관계가 없는 생명의 아름다운 공덕들도 느끼도록 다음으로 진행합니다. 예를 들면 전철, 편의점 등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봅니다. 짧은 대화나 인사를 통해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들도 관찰하며 「미덕 발견의 탐험」을 해 봅니다. 자신과 그들을 똑같이 봅니다. 관계없는 사람들이나 여러 생명에도 각각의 미덕이 있다고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생명은 평등하구나!」「그들 모두 무엇인가 장점이 있고, 사랑스러운 부분도 있기에, 좋게 평가할 수가 있구나!」이 사실을 몸과 마음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느낄 수 있는 기쁨은 상상이상입니다. 보통의 인간이 보통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이 아닙니다. 가끔은 아주 큰 기쁨이 일어나 정신을 잃거나 쓰러져 울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기쁨의 수행은 더욱 큰 것입니다. 이렇게 큰 기쁨이 일어나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져서 성취한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를!」이라고 기쁨이 더욱 더 충만 되게 반복적으로 염송합니다.

 

상식을 넘어선 붓다의 실천 방법은 완전하고 안전하게 서서히 기쁨을 느끼는 범위와 양을 늘려 가는 것입니다. 한량없는 생명을 인식해서 기쁨을 느끼게 되면 상식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때 마음은 육체로부터 멀어져 기능하게 됩니다.

 

이것이 samādhi(삼매)라고 하는 경지입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궁극적인 기쁨을 느끼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세계의 차별·질투·미움·스트레스를 없애는 방법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한 신」과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져서 성취한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를!

나의 친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져서 성취한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져서 성취한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를!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져서 성취한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를!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져서 성취한 행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를!」

 

그런데 「싫어하는 사람의 소원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다」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소원」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적인 소원과는 다릅니다. 사람은 「부자가 되고 싶다, 지위나 명예를 갖고 싶다」 등 다양하게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망상이고, 머릿속에서 꾸는 꿈과 같습니다. 「나이를 먹고 싶지 않다, 병이 들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라고 하는 것도 망상입니다. 구체적인 소원이 아닙니다. 또 그런 일이 실현될 리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구체적으로 인생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의 길이는 정해져 있습니다. 인생은 1초 1초마다 확실히 줄어들어 갑니다. 그 1초가 실제의 세계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 등 그런 일이 실현될 수 없어도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망상과 관계없이, 사는데 필요한 소원이 1초마다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무엇인가 먹고 싶고, 숨을 들이마시면 내쉬고 싶고, 내쉬면 들이마시고 싶다고 하는 것은 언제라도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큰일이 아닙니다. 항상 「무엇인가 하고 싶다」라는 충동이 있어서, 그것을 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초단위로 소원이 있어서, 그것을 어떻게든 하려고 다음의 초에 노력합니다. 호흡하는 일도, 밥을 먹는 일도, 자는 일도, 초단위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실패하면 힘듭니다.

 

그것이 진정한 소원의 흐름입니다. 그러한 소원은 어느 생명에도 그런 흐름이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구체적인 1초 단위로 살아 있습니다. 그 1초만을 성공하면 됩니다. 인생에 성공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도 단순한 관념적인 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1초, 그것은 스스로가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망상, 사고입니다. 단순한 인간관계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평온하고 스트레스가 없으면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싫어하는 사람도 부드럽고 즐겁게 산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좋은 일인 것입니다.

 

결국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이라는 것은 「모두 온화하고, 침착하고, 스트레스 없이 살아가면 좋겠다!」라는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살면 온화한 기쁨의 삶의 방법이 생깁니다. 그야말로 강력한 삶의 방법인 것입니다. 자비는 진리의 말이므로, 세속의 개념으로 파악하면 잘못입니다. 붓다는 진리의 눈으로 보셔서, 사람들이 실로 행복하게 되는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4) UPEKKHĀ(우뻭카-, 평정, 捨)

 

우뻭카(upekkhā)는 차별이 없는 넓고 평등한 마음을 말하는데, 「침착하게, 포괄적으로」라는 의미가 있는 Upa라는 접두어에, 「보다, 관찰한다」라는 ikkhati가 합쳐진, 동사 upekkhati의 명사형이 upekkha로, 「침착하게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편견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 의미를 봐도 알듯이 upekkha 는 지혜와 가깝습니다. 「Upekkha가 자란다」와「지혜가 자란다」는 동의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지혜를 기르기 위해서는 본 것, 들은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고정관념을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Upekkha를 번역할 때 「捨」라는 한 것을 보고 「버린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취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말할 때, 「다른 생명은 평등하지 않다」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평등을 부수는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 「평화 운동」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평등」은 단순한 사기입니다.

 

불교의 「평등」은 대단히 넓은 개념입니다. satta(생명)란 우주 전체의 생명, 여러 차원의 생명(신들·정령·아귀·귀신 등)을 포함합니다. 평정(upekkhā)한 사람은 주관적인 자신의 견해가 사라진 넓은 마음으로 「생명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며 각각 살아 있다. 그렇지만 모두 똑같은 생명이다. 나도 단지 그 일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봅니다.

 

불교에는 윤회라고 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과거로부터 태어나서 죽고 태어나서 죽음을 무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을 살아 왔습니다. 그 시간은 몇 억년, 몇 천년이라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긴 윤회 속에서 우리 모두는 동물이나 벌레, 물고기, 천상이나 지옥에도 수없이 생사를 반복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누가 훌륭하고 누가 훌륭하지 않는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연히 지위가 높다고 우쭐거릴 것도 없습니다. 다음 세상에서는 벌레로 태어날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평등이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어 구체적으로 생명은 평등하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평정(upekkhā)을 기르는 명상의 말은 「나에게 깨달음의 빛이 나타나기를!」입니다. 이 말을 자신에게, 친한 사람들에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차례차례로 평정의 마음으로 충만 되게 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더러움을 지워버리고, 마음의 낮은 상태를 넘어서 무량한 크기의 넓은 마음 상태를 만드는 수행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서 평온하면서도 진지하게 평정의 마음을 충만 되게 해보십시오.

 

지금까지 4가지의 한량없는 마음을 설명했습니다. 자·비·희·사는 각각 다른 마음의 기능이지만, 4가지 모두 생명에 대한 마음의 친절함입니다. 모든 생명과의 관계를 이런 4가지 중의 어떤 마음으로 접하면 좋을 것입니다. Upekkha(평정)와 metta(자애)는 닮았습니다. 그러나 평정은 자애보다 훨씬 넓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난폭한 사람이 떠들고 있다고 합시다. Metta의 자애가 있으면 「시끄럽다」라고 마음 편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난폭자도 상냥한 친구의 말에는 화나지 않습니다.

 

Upekkha의 사람은 조용하게 「모두 각각 자신의 삶의 방법을 하고 있으니까, 뭐 좋지 않은가!」라는 느낌으로 아무 일도 없이 침착하게 있습니다. 이것은 무관심하고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무관심은 무지이고, 침착성은 지혜입니다. 침착성은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에 의해 일어납니다. 누구에 대해서도 조용하고 침착하게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위의 사람들도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4가지 한량없는 마음은 각각 무량하게 충만시킬 수가 있습니다. 4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수행해도 괜찮지만, 4가지 모두를 수행하면 자신에게 맞은 자비심이 자연스럽게 자랍니다.

 

사무량심이 충만해지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바뀝니다. 분명히 딴사람이 됩니다. 몹시 온화하고, 항상 기쁨의 물결로 채워진 사람이 됩니다. 사무량심이야말로 종교를 넘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