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사와 해탈의 관계 (20141121)
생명을 연결하는 「영양소(Āhāra)」
생명을 연결하는 영양소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네 종류의 영양소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음식·음료 등의 물질입니다. 나머지 3가지는 마음을 유지하는 정신적인 영양소입니다. 음식 등은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소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양소의 4분의 3은 마음이 필요로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마음의 영양소에 대해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① 촉(phassa)
정신적 영양소의 첫 번째는 촉(phassa)입니다. 안·이·비·설·신·의라고 하는 육근에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정보가 접하면 의식이 일어납니다. 신체에 정보가 접하지 않으면 살아있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신체의 어떤 부위의 신경이 망가져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면, 그 부위가 죽었다고 말하고, 그 부위는 서서히 쇠약해져 갑니다. 눈, 귀, 코 등에도, 마음에도, 정보가 접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유지는 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정보가 접하지 않게 되면 금방 죽습니다. 그래서 촉은 음식보다 훨씬 소중한 영양소인 것입니다.
② 의지력·의욕(mano sañcetanā)
정신적 영양소의 두 번째는 의지력·의욕(mano sañcetanā)입니다. 의지력이 일하지 않으면 걷거나 일하거나 이야기하거나 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일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순간이라도 의지력이 사라지는 것은 그 생명의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력·의욕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신체라고 하는 물체에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이 감각은 본래 「근심, 괴로움」인 것입니다. 근심은 갖고 싶지는 않다, 근심을 바꾸고 싶다고 하는 의지력이 생깁니다. 항상 근심이 있기 때문에 항상 의지력도 생깁니다. 「의지력이 사라지면 죽는구나!」라고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근심이 있는 한 그것을 바꾸고 싶다고 하는 의지력은 일어납니다.
의지력이 사라질 걱정은 없지만, 문제는 의지력에 물결이 있는 것입니다. 의지력이 강할 때는 활발하게 삽니다. 의지력이 약해지면 사는 힘도 약해져 버립니다.
다음은 의지력의 종류입니다. 의지력은 「근심을 바꾸고 싶다」라고 하는 종류이지만, 그 의지력이 여러 가지로 형태를 바꾸어 나타납니다. 사는 것에 강한 애착이 있어서, 그것과 의지력이 관련되면, 수단을 선택하지 않고, 뭐든지 해서라도 육근에 자극을 주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악행이 됩니다. 사람의 기분은 대부분 탐․진․치에 오염되고 있으므로 의지력도 더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명이 행하는 행위는 유감스럽게도 악행이 되어 버립니다. 불교는 맑고 깨끗한 의지력으로 사는 것을 추천하고 있지만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③ 식(viññāna)
정신적 영양소의 세 번째는 식(viññāna)입니다. 계속 인식하는 것은 마음의 영양소인 것입니다. 이 육체의 인식 기능이 정지하는 순간이 그 생명의 죽음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물건이 있어, 그것이 인식기능을 하고 있다, 라고만 생각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TV라고 하는 물건이 있어, 그것이 영상과 음성을 흘려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은 인식 기능 그 자체인 것입니다. 감각과 구별하는 편이 이해하기 쉽습니다. 육체에 감각이라고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접하는 정보를 느낍니다. 느꼈다고 하는 것은 인식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 최초의 인식이 잇달아 대량의 인식의 흐름을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귀에 감각이 있습니다. 소리가 접합니다. 느낍니다. 청각이 생깁니다. 그리고 어떤 소리인가, 좋아하는 소리인가 싫은 소리인가, 내용은 무엇인가, 거기에 따라 자신의 감정은 무엇인가...., 등 대량의 인식이 흐릅니다. 한 개의 인식이 일어나는 것은 많은 인식의 흐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식은 마음의 빠뜨릴 수 없는 영양소의 하나입니다.
마음의 생멸과 윤회
이해해야 할 포인트가 하나 더 있습니다. 식이란 마음입니다. 동일한 기능입니다.
그렇다면 식이 식을 영양소로 하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영양소로 하여 성장한다고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의 단락에서 설명한 것처럼, 한 개의 식이 대량의 식의 흐름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마음을 영양소로 하여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는 santati(산따띠, 상속, 흐름)라고 하는 법칙이 있습니다. 하나의 마음이 없어지면, 새롭게 새로운 마음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법칙입니다. 마음의 수명은 순간입니다. 순간에 마음은 사라집니다. 한 개의 마음이 사라지면, 사라진 것을 원인으로 해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것도 순간에 사라집니다. 또 다른 새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을 santati(산따띠, 상속, 흐름)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순간의 마음은, 그 순간의 바로 전에 소멸한 마음의 에너지에 의해 생긴 것이 됩니다.
마음은 자가 발생으로 생멸하며 계속 존재합니다. 한 개의 마음이 멸하는 것이, 다음의 순간의 마음이 생기는 원인이 됩니다. 불교의 인과법칙에서는 원인이 있어 결과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인과법칙이 이것뿐이라면, 하나의 사건으로 모든 것은 끝날 것입니다. 부풀어 오른 풍선이 원인이라고 하면, 소리를 내며 터지는 것은 결과가 됩니다. 풍선이 터지면, 인과관계는 종료됩니다. 이와 같이 생각하겠지만, 진정한 인과법칙은 조금 다른 기능을 합니다.
기호로 설명하면, a가 원인으로 b가 생긴다. 다음에 b가 원인으로 c가 생깁니다. 그 말은 b가 과이면서, 인으로도 됩니다. 그래서 다음에 c를 원인으로 해서 d가 생깁니다. 이렇게 마지막이 보이지 않는 무한의 사이클·회전이 일어납니다.
마음의 경우는 멸이 원인으로 생이 일어납니다. 다음에 생이 원인으로 멸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생→멸→생→멸→생→멸의 회전이 일어납니다. 식이라고 하는 영양소는 이 기능입니다.
이 법칙에 의해서, 사람의 육체가 소멸했다고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죽는 순간에 이 육체 중에서 최후의 인식이 일어나 사라집니다. 이 육체 중에서는 새로운 인식이 일어나지 않는 조건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와 별도로 식을 관찰하면, 식이 멸했지만, 인과 법칙에 의해 반드시 새로운 식이 생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멸한 순간에, 새로운 인식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불교에서 설명하는 「윤회」라는 기능입니다.
④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음식(kabaliṇkāra)
인간이 섭취하는 음식에 대해 불교에서는 그다지 흥미가 없습니다. 타종교에서는 사람의 음식에도 참견을 합니다. 어패류를 먹어서는 안 된다, 돼지고기는 안 된다, 쇠고기는 안 된다, 육 고기는 모두 안 된다, 등이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육 고기뿐만 아니라, 마늘, 파 등도 안 됩니다. (붓다의 시대의 인도에서는 여성이 강정제로서 마늘을 먹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여성으로부터 마늘 냄새가 나면, 남자들은 흥분했습니다. 어느 날 비구니들이 마늘을 먹었습니다. 재가자들이 비구니들에게서 마늘 냄새가 났으므로 심하게 불평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여성에게 마늘을 금지하는 계율을 만들었습니다. 대승불교는 이 훈계를 잘못 해석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는가 하는 것은 육체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채식자는 마음이 청정하고, 육식자는 마음이 더러워져 있다는 이야기는 불교가 아닙니다. 의학적으로는 마늘이 강정제로 쓰일지 모르지만, 마늘을 먹은 사람에게 성욕이 없으면, 불교는 마늘을 강정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간다경」(숫따니빠따239-252)에 육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육체에 어떤 물질을 먹으며 돌봐도 늙어 죽는 것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죽은 시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일생 맑고 깨끗한 음식으로 신체를 유지하는 사람도, 육 고기를 먹어 생활하는 사람도 죽을 때는 변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하며 생명에 한계가 없는 괴로움을 주는 마음을 증장시키는 방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음식과 음식에 대한 애착에 대해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출가자가 식사를 할 때는 이와 같이 관찰하며 먹으라며 말씀하신 게송이 있습니다.
「제가 공양 받은 음식에 대해 바른 생각으로 관찰합니다.
맛을 즐기기 위함도 아니요, 배부르게 먹기 위함도 아니요,
몸을 살찌우기 위함도 아니요, 보기 좋게 가꾸고자함도 아니니,
다만 이 몸을 유지하고, 건강을 지키고, 상해를 방지하고, 청정수행을 돕기 위함이니:
이와 같이 '바른 관찰로써 배고픔의 오래된 느낌만 제거하고
배부름의 새로운 느낌은 일으키지 않고,
건강하고 허물없이(비난받지 않고) 평온하게 머물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수행하기 위해 이 공양을 받겠습니다.」
출가자는 반드시 이 게송을 마음속으로나, 소리 내어 독송하고 나서, 식사를 해야 합니다. 이 말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음식에 대한 인간의 감정을 모두 버려버리고 있습니다. 음식의 좋음과 싫음도 무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육체를 유지해 주면 충분합니다. 당연히 많이 먹는 것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배부를 때까지 먹어선 안 된다는 것이 규칙입니다. 때 없이 먹는 일도 금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먹고 싶은 음식을 요구하는 일도 금지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선택하는 일도 탁발의 경우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레르기 등의 체질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는 거기에 맞은 음식을 먹는 것이 인정됩니다. 병 등에 걸렸을 경우도 병을 고치기 위해서 필요한 음식을 요구하는 일은 인정됩니다.
음식에 대해서 불교는 완벽하게 상식의 범위에 있습니다. 교리나 학문적인 견해는 전혀 없습니다. 음식에 의해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불교에서는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도와 과는 미식주의와도 인연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음식에 대해서 도를 넘는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재료나 요리의 방법 등에 많은 시간과 지식, 재산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먹기 위해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어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먹는다고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썩어들어가는 육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성장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마음이 더러워져 버립니다. 쾌락주의, 미식주의는 위험합니다.
부처님이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배불리 먹고 굼벵이처럼 데굴데굴 신체를 굴리면서 거의 자고 있다가, 또 일어나 배불리 먹는다. 꼴통에 버려둔 돼지와 같이 살아간다. (돼지는 먹고 자는 성격입니다.) 배불리 먹는 자는 육체만 신경 씁니다. 그래서 해탈과는 관계가 없게 됩니다. 그들은 한없이 윤회를 계속합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을 목표로 한다면, 번뇌를 소멸하는 것을 기대한다면, 인격 향상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윤회를 탈출할 의욕이 있다면, 음식은 신체를 유지하는 정도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비유하여, 자동차를 위해서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행하기 위해서 자동차를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식도락(쾌락주의)의 길과 불교의 길은 처음부터 길이 다릅니다.
• 생명은 영양소에 의해 성립됩니다.
• 영양소는 네 종류입니다.
• 육체의 영양소는 몸의 건강을 유지하여 수행을 위한 것입니다.
• 음식을 불필요하게 신경 쓰면 해탈은 멀어집니다.
• 먹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식사하면 집중력은 단번에 늘어납니다.
• 마음의 영양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 음식이 없어도 곧 죽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영양소가 사라진 순간에 사람은
죽습니다.
• 자애 수행,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알아차림, 몸의 부정함에 대한 숙고는 마음의
필수 영양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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