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실을 아는 것과 진리에 이르는 것 (20150710)
Satyaṁ eva jayante(사뜨양 에-와 자얀떼-)란 인도 문화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슬로건입니다. 「진실만이 승리를 얻는다, 진실은 항상 승리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 낙담하고 있을 때, 이 슬로건이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인도의 모든 화폐에는 이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에서는 반드시 진실만이 승리를 얻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진실이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증거가 불충분하다」 등으로 공격하거나, 「신이 인간을 혼란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지구의 오래된 지층에 화석을 묻어 두었다」라고 허무맹랑한 말들을 하며 혼란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포의 구성이나 유전자 등의 연구로부터 「모든 생명은 일순간도 멈추는 일 없이 계속 진화하고 있다」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진실입니다. 세상은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려고 있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일, 신앙, 미신, 선입관, 문화적 가치관 등이 우선적으로 신뢰됩니다. 인간의 머리에 진실을 이식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입니다.
진실을 아는 편이, 인정하는 편이 좋은 것은 당연합니다. 병은 악령의 원한이나 신의 심판의 결과라고 보는 것보다는 바이러스나 세균 등에 감염되어 일어나는 것으로 인정하는 편이 상식적입니다. 그런데도 진실·사실을 이 세상에 통용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진실만이 승리를 얻는다.」라는 말을 현실에 맞게 고치면, 「진실만이 승리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진리(dhamma)의 의미는 여러 가지입니다.
문제는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진실도 있고, 과학적인 사실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때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사실의 경우는 사실이 정정됩니다. 세속의 진실의 경우는 그 보증이 없어, 인간의 사정에 따라 진실의 정의가 바뀝니다.
인도 문화에서는 진실(satya, sacca)과 진리(dharma, dhamma)라는 2개의 개념이 있습니다. 진실(satya, sacca)은 인간이 아는 범위의 일이지만, 진리(dharma, dhamma)는 최종적인 진실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실(satya, sacca)을 그 나름대로 알고 있을 가능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진리(dharma, dhamma)를 알고 있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거짓말의 반대말은 진실(satya, sacca)이지, 진리(dharma, dhamma)가 아닙니다. 진리(dharma, dhamma)의 반대말은 비법·위법(adharma, adhamma)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며 진리(dharma, dhamma)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진리(dharma, dhamma)에 이르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Dhamma(담마)라는 말은 불교 용어입니다. 부처님이 발견된 진리는 dhamma입니다. 생명의 법칙입니다. 즉 인과 법칙도 dhamma입니다. 마음과 물질의 최종적인 상태도 dhamma입니다.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목적인 열반도 dhamma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설법도 dhamma라고 말합니다. 불교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은 dhamma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dhamma에 이르는 것(해탈)을 목표로 합니다.
대반열반경을 보면, 80세에 이르신 부처님께서는 앞으로 4개월이 지나면 반열반에 든다고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붓다의 말(dhamma)은 그대로 진실이므로, 부처님 제자들은 슬픔에 졌었습니다. 모두 부처님 곁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방으로부터도 출가 제자들이 마지막 작별인사를 위해서 끊임없이 방문해서 부처님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담마라마(Dhammārāma) 비구는 부처님의 반열반이라는 인류 사상 최초의 사건에 대해 놀라는 일 없이 침착하였습니다. 자신의 사원에 머물며 동료 수행자들과 일상적으로 인사하는 것조차 멈추어 버렸습니다. 다른 비구들은 그런 담마라마 비구에게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친구 담마라마여! 4개월이 지나면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십니다. 출가자도 재가자도 사방으로부터 끊임없이 부처님께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고 있습니다. 당신도 사원에 머물며 두문불출하지 말고, 스승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합니다. 함께 갑시다.」 그러나 담마라마는 입 다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비구들의 권유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실례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처님께 인사하는 것조차도 거절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비구들이 보기에 무례하기 그지없는 태도였습니다.
이 사건은 당연히 비구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습니다. 비구들은 이 사실을 부처님께 보고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를 불러, 「네가 여래에게 예를 하는 것조차 거절한다 라는 이야기가 정말이냐?」라고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그 담마라마 비구는 「네 스승님! 그대로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은 어떤 이유이냐?」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담마라마 비구는 대답했습니다. 「천인사인 위대한 부처님께서 앞으로 4개월 이내에서 반열반에 들어가십니다. 이제 두 번 다시 아무도 만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직 마음이 더러워진 채로 입니다. 번뇌투성이인 채로 입니다. 아직도 욕망의 얽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인간을 초월한 진리에 이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알린 반열반의 예고를 듣고, 나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부처님의 눈이 검을 동안에 뭐라도 해서 해탈에 이르고 싶습니다. 출가한 목적에 이르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여유가 없습니다. 밤낮 dhamma를 관찰하고 있는 그 시간을 쓸데 없
게 소비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홀로 지냈습니다.」
담마라마 비구의 말을 들은 부처님께서는 3번 사두(sādhu)라고 말하셨습니다. 사두(sādhu)란 「그대로입니다, 훌륭한 일입니다, 찬성합니다, 잘하셨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모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만약 나의 제자들이 나를 존경하고 싶고, 나에게 예를 표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그런 비구는 이 담마라마 비구와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담마라마 비구는 나에 대해서 진짜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꽃, 향 등을 올리며 존경하는 것은 나에게는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제자가 진리(dhamma)를 실천하는 것이 여래에 대한 진짜 공양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비구들을 향해 아래와 같이 설법을 하셨습니다.
(1) Dhammārāmo(담마-라-모-)
Dhamma를 지주·주처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dhamma(진리)를 지주로 해서 살아야 합니다. 욕구투성이가 되어, 욕구를 위해서 사는 일부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진리를 지주로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일 절대의 신을 신앙하는 것이 진리를 지주로 한 것이 됩니다. 힌두교들은 선인들의 말을 지주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 상식적인 도덕을 지키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교의 경우 의미가 명백합니다. 부처님께서 dhamma(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 dhamma에 이르는 길도 가르치셨습니다. 그 진리에 이르는 길이란 일상생활로부터 동떨어진 고행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현재 자신의 신체·감각·마음 등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그 길입니다. 자신의 일상 삶의 방법 그 자체가 진리에 이르는 길의 실천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방법을 명상이라고 부릅니다. 명상은 사마타와 위빳사나라는 2종류입니다. 명상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을 Dhammārāmo(담마-라- 모-)라고 말합니다.
(2) Dhammarato(담마라또-)
Dhamma를 좋아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Dhamma의 정의는 앞서 말했습니다. 그 정의로부터 생각하면, 자신이 dhamma를 알고 있는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사람은 dhamma를 좋아해야 합니다. 최종적인 진리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사마타·위빳사나라고 하는 명상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설합니다. 명상 실천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올바른 성향입니다. 그러나 이 의미를 조금 깊이 생각하면 Dhamma를 좋아한다는 것은 열반·해탈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어떻게든 해탈에 이르고 싶다는 목표를 세워 그것을 목표로 해 사는 것이 Dhammarato(담마라또-)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3) Dhammaṁ anuvicintayaṁ(담망 아누위찐따양)
Dhamma(진리)를 반복해서 생각하는, 사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진리를 지주로 하는 것은 자신의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고찰하게 되면 다른 종교인들은 「성서」나 「코란」 등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진리라고 생각하는 무엇인가를 고찰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진리에 이른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불법으로서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을 이해하는 것, 배우는 것, 반복 고찰하는 것, 납득이 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Dhammaṁ anuvicintayaṁ(담망 아누위찐따양)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수행에 필요한, 해탈에 관한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4) Dhammaṁ anussaraṁ(담망 아눗사랑)
Dhamma(진리)를 거듭해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특정한 말을 생각하는 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일신교에는 기도가 있고, 힌두교에는 만트라가 있습니다. 종파 불교에도 「염불」 등이 있습니다. 담마의 의미가 세속적인 것이라면 기도나 염불 등도 적절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는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진리를 발견하시고, 진리에 이르는 방법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관찰해야 하는가 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대념처경에서 신·수·심·법이라는 4부류를 관찰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개발하기 위해서, 성장시키기 위해서, 반복해서 관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번 들은 것만으로는 그것을 기억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반복해서 주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의미를 모르는 주문이 아니라, 결코 열매 맺을 수 없는 기도가 아니라, dhamma(진리)를 반복해서 마음에 입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개발됩니다. 진리를 발견합니다. 해탈에 이릅니다. 대념처경에서 말씀하셨듯이, 밤낮 계속해서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Dhammaṁ anussaraṁ(담망 아눗사랑)입니다.
(5) Saddhammā na parihāyati(삿담마- 나 빠리하-야띠)
바른 Dhamma(진리)로부터 물러나 퇴보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이해하고 있지 않아도, 법을 목표로 할 권리는 모두에게 있습니다. 궁극의 진리는 saddhamma(삿담마)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세속적으로 추측하고 있는 dhamma와 구별하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이 진리에 이를 목적으로 적당한 주문을 선택해 반복하여 생각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이 도와 과라고 확신한 다음 시작한 수행이 아닙니다. 머리에서 반복하여 입력하는 정보에 의해 머리가 변화해 버립니다. 깨달음에 이르기는커녕, 환각을 만들어 거기에 빠지는 결과가 됩니다. 뇌를 무리하게 바꾸었다면, 원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목표로 한 사람이 진리로부터 물러난 꼴이 됩니다. 진리와는 반대방향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진리를 목표로 하는 누구라도 이런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발견하시고 가르치신 진리를 반복해서 알아차리는 사람은 바른 진리에 이릅니다. saddhamma(바른 진리)로부터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인격 완성이 필요합니다. 인격 완성은 37보리분법을 실천해서 몸에 익히는 것입니다. 대념처경에서 말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관찰하면, 해탈에 필요한 37보리분법이 점차 따라옵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자연스럽게 들어와, 인격이 완성되어 버립니다.
필요로 하는 것은 담마·진리를 지주로 하는 것, 담마·진리를 좋아하는 것, 담마·진리를 지속적으로 배워 익히는 것, 담마·진리를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입니다.
담마를 주처로 하고, 담마를 좋아하며, 담마를 거듭 배우고, 담마를 거듭 관찰하는 자는 올바른 담마로부터 물러나 퇴락하는 일이 없습니다
● 이번 포인트
• 진실을 아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진리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 진리는 생명이 도달해야 할 목적입니다.
• 불도를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에 대한 진짜 공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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