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왜 출가하는가? (전편) (20150703)

담마마-마까 2021. 11. 20. 09:00

* 왜 출가하는가? (전편) (20150703)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얻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런 사람들 가운데 출가 생활을 지속해 나가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출가 생활에 어울릴 공덕, 바라밀이 있는 사람만이 재가 생활에서 벗어나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런 바라밀이 성숙한 사람들은 일평생 즐겁게 출가 생활을 합니다.

바라밀이 아직 익지 않은 사람들은 단기간만 출가 생활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바라밀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출가해 보려는 상상조차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라밀이라는 것은 도와 과, 혹은 닙바나를 얻기 위해 어울리는 바라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출가 생활에 어울리는 바라밀만을 말합니다.

도와 과, 혹은 닙바나라는 것은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관계없이 그 사람에게 바라밀이 있으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살의 몸으로 공덕을 쌓고 있던 기간인 4아승지겁 동안 출가 생활을 행한 것은 불과 9번뿐이었습니다.

 

어렵게 만난 출가생활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단기간 출가하는 사람이든, 일생동안 출가하는 사람이든, 자신이 왜 출가했는지, 자신이 출가한 목적은 무엇인지, 출가 생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출가 생활에 관한 견해, 목적,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 출가했는가를 분명히 해야만 의미 깊은 출가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출가한 의미를 깊이 되새겨보아야만, 얻기 어려운 출가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보람을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세간의 이익, 출세간의 이익, 자기 자신의 이익, 다른 사람의 이익, 그런 다양한 종류의 이익과 행복을 채울 수 있습니다.

 

출가자는 ‘왜 출가했는가?’ 라는 것을 항상 반문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출가한 목적, 목표, 견해를 언제나 마음속에 새겨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이 출가한 목적을 잊고 있는 사람은 노 없는 작은 배로 큰 강을 건너는 사람과 같아서 건너편 강가로 가고 있는지, 강둑에서 맴돌고 있는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배가 전복되어 가라앉거나,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가 부서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출가한 목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부적절한 행동을 취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이루어야 할 일을 잊어버리고 나태하게 되어 버립니다.

 

생활과 해야 할 일에 조화가 잘 안되어 목적을 잃게 되어 「교단의 구성원」이 아니라

「교단의 짐」이 되어 버립니다.

교단을 구성한다는 것은 자신이 아래로부터 들어 올려 메는 것을 말합니다.

위에 걸터앉아 무임승차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단에 무임승차 하는 짐이 많아지면, 교법은 쇠퇴해 기울게 되어 버립니다.

교단을 어깨에 메는 구성원이 증가하면, 교법은 융성해져서 발전하게 됩니다.

 

출가 생활 속에서 이루어야 할 일은 2가지입니다.

교법을 배우는 일과 수행에 힘쓰는 일입니다.

자신이 출가한 올바른 목적에 따라 주의를 기울이면서, 담마를 주로 배워야 할 사람은 교육과 학문을 주로 배우고, 실천을 주로 배워야 할 사람은 수행을 주로 배웁니다. 또한 양쪽을 균형 있게 배워야 할 사람은 양쪽 모두를 균형 있게 배웁니다.

그리고 담마를 주로 배우는 사람이라도 수행을 함께 하여야 하고, 수행을 주로 하는 사람이라도 담마를 함께 배워야 합니다.

어느 한쪽만 따로 떼어내서 할 수는 없습니다.

담마 공부에 바탕을 둔 수행, 수행에 바탕을 둔 담마 공부가 올바른 법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어딘가에 치우치면 진리의 길도 치우쳐 버릴 가능성이 있기에, 좋은 출가자 고귀한 출가자는 담마 공부도 수행도 같이 하게 됩니다.

 

여기서 「출가자」라는 말을 「청정범행자, 수행자」라고 옮겨놓아도 됩니다.

출가자가 담마 공부와 수행이라는 2가지의 일을 실천하듯이, 재가의 범행자나 수행자도 담마 공부와 수행이라는 2가지의 일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설법을 듣고, 불교에 관한 책을 읽고, 법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출가의 목적은 출가자만이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 인과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고 싶은 사람 모두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출가의 목적이란 윤회하는 삶을 어떻게 볼 것인지, 이 몸과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평안과 윤회하는 생으로부터의 해탈을 바라는 사람은 실제로 출가자로 한정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출가했는가 물어보면 그 대답은 각양각색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이나 견해가 비슷한 것을 요약해보면 2가지 항목이 됩니다.

 

(1)「공덕을 더 많이 쌓기 위해서 출가했다」

(2)「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 출가했다」

즉 이 2가지 목적으로 출가한 것입니다.

 

(1)「공덕을 더 많이 쌓기 위해서 출가했다」는 것은 「더 많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엄마 얼마만큼 좋아해?」라고 물어보면, 「나는 엄마가 하늘만큼 땅만큼 좋아!」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공덕을 더 많이 쌓기 위해서 출가합니다.

재가에서도 보시하는 공덕, 계를 지키는 공덕, 수행하는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가한다면 재가 생활에서 쌓을 수 있는 공덕보다 훨씬 더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출가했다면 자신의 가사를 씻는 것에 의해서도 공덕을 쌓게 됩니다.

재가 생활에서 자신의 옷을 씻을 때의 다만 씻은 것만으로는 아무런 공덕이 되지 않습니다.

옷의 더러움을 제거하여 깨끗이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옷을 씻을 때 삼보의 공덕을 회상하며 씻고, 자비의 명상을 하면서 씻고, 씻는 행위를 분명히 알아차리는 수행의 방법으로 씻는다면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출가하면 이런 것을 배워서 분명히 알게 되어 모든 행위에 공덕이 되도록 노력하게 됩니다.

출가자는 땀으로 젖고 때로 더러워진 자신의 가사를 깨끗이 씻을 때에 부처님이 정해진 율, 즉 부처님이 규정하고 결정한 것에 맞도록 씻기에 세탁을 하면서도 공덕을 쌓게 됩니다.

 

율과 법에 맞도록 실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식사도 이와 같습니다.

그냥 먹는 것만으로는 어떤 공덕도 얻을 수 없습니다.

출가자는 부처님이 규정된 계율에 맞게 식사를 하기 때문에 공덕을 쌓게 됩니다.

한입 가득 밥을 먹다가 남기지도 않고, 깨작깨작 거리며 먹지도 않으며, 적당한 양을 헤아려 먹고, 흘리지 않게 잘 정돈하여 먹고, 먹고 있는 행위를 알아차리면서 먹기에 공덕을 쌓게 됩니다.

 

물을 마실 때는 소리 내어 마시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 마시기에, 계율에 맞고, 물 한잔 마실 때도 공덕을 쌓게 됩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조차 부처님이 정하진 계율대로 실천한다면, 일을 볼 때마다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특정한 장소에서 시간을 내어 수행하지 않아도 매시간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계를 잘 따르는 것만으로도 공덕이 됩니다.

집착함이 없어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는 보시하는 공덕, 오로지 할 일이라고는 해탈을 향한 수행실천뿐이기에 수행하는 공덕 등도 출가자는 용이하게 할 수 있기에 재가자보다 공덕을 더 쌓게 됩니다.

그래서 공덕을 더 많이 쌓고 싶기에 출가하는 것입니다.

 

(2)「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 출가했다」는 것은 공덕을 더 많이 쌓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덕을 보다 빠르게 쌓기 위해서도 물론 출가합니다.

그러나 최상의 공덕, 최고의 선행은 아라한이라는 목표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라한도를 얻지 않았다면 아직 목표에 이르지 않았고 아직 최상의 공덕도 아닙니다.

아라한도를 얻으면 머지않아 아라한과에 이르게 되고 아라한자가 되어 닙바나를 완전하게 깨닫게 됩니다. 아라한도는 닙바나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라한도에 이를 때까지 공덕을 쌓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경우, 보편적으로 재가자보다 출가자가 보다 빠르게 아라한도에 도달할 수 있는 공덕을 채울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선 재가 생활은 공작을 닮아 있고, 출가 생활은 독수리를 닮아 있다고 하셨습니다.

공작은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끝이 뾰족한 꽃술 모양 장식 깃털이 곧게 서 있으며, 목에는 파란색을 띤 예쁜 링 모양이 있습니다. 날개에는 얼룩무늬가 있어서, 형태도 색채도 다양합니다. 공작새의 깃과 꽁지도 여러 가지 색깔이 있어서, 넓게 펼쳐 보이면 매우 아름다운 모양이 나타납니다.

한편 독수리의 부리는 갈고리처럼 휘어져 있고, 날개나 다리를 봐도 마치 가죽을 감은 것 같아서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공작처럼 아름다운 색채를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공작과 흉한 독수리를 하늘로 날게 해서 겨루게 해 보면, 공작은 얼마 날지도 못하고 헐떡거리며 몹시 지치게 됩니다.

그리고 관모를 쓴 것 같은 머리는 이쪽 수풀, 저쪽 수풀에 걸리고, 새의 깃과 꽁지는 저쪽 나무, 이쪽 나무에 걸려서 나아가기 힘듭니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았다 해도 날개가 약하여 멀리 날 수 없습니다.

얼마 날지 못하고 헐떡거리며 다시 땅에 내려와 버립니다.

독수리는 흉한 모습의 새입니다.

그러나 하늘로 날아오르면 멀리까지도 쉬지 않고 지치지도 않고 날 수가 있습니다.

긴 시간 계속 힘차게 날 수가 있습니다.

독수리는 걸리적거리는 관모같은 것이 없습니다.

걸리는 것이 없으면, 날고 있는 도중에 어떤 트러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재가 생활은 공작을 닮아 있습니다.

모습은 매우 아름다울 것입니다.

머리를 봐도 여러 가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봐도 여러 가지 색으로 화장하고, 장식품으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입고 있는 옷도 다양한 색깔, 형태, 모양을 하고 있어서 외관을 본다면 매우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미나 비구를 보면 머리카락은 깎여 있습니다.

입고 있는 옷도 나무껍질 같은 진한 갈색으로 물들여져 있고, 아무런 장식도 없습니다.

적어도 5매 이상의 옷감을 꿰매어 봉합한 것입니다. 한 장의 옷감이 아닙니다.

출가자의 모습은 재가자와 같이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여러 가지 색의 옷도 입지 않고, 한 가지 색일 뿐입니다.

재가자는 여러 가지 색의 옷을 여러 개 두고 매일 다르게 개성적으로 몸치장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재가자의 모습들은 아름답습니다.

사미나 비구의 모습들은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출가자가 명상한다면 출가자의 위빳사나 지혜는 매우 강력합니다.

감각적인 것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장시간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힘차게 진보할 수가 있습니다.

출가자에게는 걸리는 것, 달라붙는 것이 없습니다.

아들, 딸, 친척 등 집착할 수 있는 이들이나 속박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닙바나라고 하는 큰 목표로 나아가는 여행은 매우 진척이 빠릅니다.

재가자가 명상하는 경우 아들이나 딸, 친척, 할 일 때문에 걸리는 것, 달라붙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지혜를 얻는 진보는 매우 늦을 것입니다.

 

그래서 출가자와 재가자가 닙바나라고 하는 목표까지 달렸을 경우, 출가자가 빠르게 도착합니다.

재가자는 아무리해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닙바나로 나아가는 여행은 위빳사나 한가지만으로는 이를 수 없습니다.

계․정․혜의 삼학을 함께 실천해야 합니다.

재가자에게는 오계가 있습니다. 또는 팔계, 혹은 십계가 있습니다.

재가자에게는 십계가 최대한으로, 더 이상을 지키고 싶어도, 유지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즉 재가자의 계의 힘은 기계나 탈 것에 비유한다면 그 엔진은 5마력, 8마력, 10마력까지 있습니다.

최대 10마력입니다.

 

그런데 출가한 사미의 계는 120가지가 있습니다.

즉 120마력, 정확하게 말하면 119마력입니다.

그래서 사미의 계의 엔진에는 큰 힘이 있습니다.

비구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요약하면 227가지의 계가 있습니다. 227마력입니다.

상세하게 말한다면 10,009,000가지입니다.

 

마력을 생각해 봅시다.

정확하게 말하면 1000만 플러스 9180, 그 외에 536,000가지가 있습니다.

비구의 학처(sikkhapada)는 이렇게 많습니다.

그래서 닙바나로의 여행에서 비구가 달고 있는 계의 엔진의 마력은 10,009,000마력 이상입니다.

5마력, 8마력, 10마력의 사람과 227마력, 10,009,000마력의 사람, 어느 쪽이 빠르게 도달할까요?

마력이 많은 쪽이 당연히 빠를 것입니다.

즉, 재가자와 출가자의 계라고 하는 엔진의 힘은 전혀 다릅니다.

 

정과 혜에 있어서도, 출가자들은 집착이나 속박의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보다 강력합니다.

그 때문에 출가자들은 공덕을 많이 쌓을 수가 있습니다.

빠르게 쌓을 수가 있습니다.

출가자에게 누군가가 「당신은 왜 출가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공덕을 최대한으로 쌓기 위해서, 최고 속도로 쌓기 위해서 출가했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이, 빠르게, 공덕을 흘러넘치게 하려면, 출가하십시오!」

공덕을 흘러넘치게 한다는 것은 흘러넘칠 정도로 많은 양으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출가하는 또 하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왜 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 출가하는가 하면, 도와 과를 얻지 않는다면 새로운 생을 반복해서 받기 때문입니다.

거듭 어머니의 태에 들어 태어남을 반복한다면, 생로병사의 괴로움, 가지고 싶은데 가지지 못하는 괴로움, 비탄과 슬픔의 괴로움, 육체적 고통을 받는 괴로움, 정신적 고통을 받는 괴로움, 격렬한 불안의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 싫은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 등 여러 가지 괴로움을 받습니다. 도와 과를 얻는 것에 의해 그 윤회·인과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도와 과에 의해 닙바나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와 과에 의해 닙바나를 깨달아, 윤회·인과의 괴로움을 종료시키기 위해서 출가합니다.

 

알기 쉽게 랏타빨라 장로(Raṭṭhapāla Thera)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시다.

 

랏타빨라 장로는 출가하는 사람 모두 항상 명심해 두어야할 스님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께 출가한 사람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가장 우수하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고, 부처님 스스로 법명을 지어준 분입니다.

랏타빨라 장로의 부처님께 출가하고 싶다고 하는 소망이 얼마나 강했는가 하면, 출가하기 위해 7일간 마시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부모님을 설득했을 정도입니다.

 

어느 때 툴라꼿티까(thullakoṭṭhikā) 마을에 부처님이 오셔서 설법을 하실 때, 그 설법을 한 번 들은 것만으로 랏타빨라는 믿음을 지니게 되어, 출가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7일간 부모님은 설득해서 출가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마을에서 15일간 머무신 후에 기원정사로 돌아가셨습니다.

랏타빨라 장로는 기원정사에서 부처님의 지도를 받아 사마타·위빳사나 명상을 수행해서 곧바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꼬라브야(koravya)왕은 랏타빨라 장로가 출가했다고 들었을 때로부터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침 가까운 숲에 랏타빨라가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왕은 곧바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묻고 싶었던 것을 서둘러 물었습니다.

 

「스님! 이 세상에서 출가하는 이유는 나의 경험과 생각으로부터 4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늙음, Jarā」을 이유로 출가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몸이 약해져,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없게 됩니다.

아직 얻지 못한 재산을 얻을 수도 없고, 이미 얻은 재산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친족의 죽음이라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출가하자, 가사를 입자」라고 말하며 출가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출가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아직 젊습니다.

외형도 젊디젊은 청년입니다.

머리카락도 검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젊은데, 왜 당신은 출가하셨는지요?

 

또 하나는 「중병, byādhi 」입니다.

세상에서는 만성적인 질병에 괴로워하거나, 불치의 병에 걸려서, 「이왕 죽을 바에 차라리 출가해서 죽는 것이 좋겠다.」라고 생각해서 병이 들고 나서 출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환자로서 건강을 해친 자가 재가 생활을 해도,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될 수 없고, 사회에서 일할 수도 없기 때문에 「출가하는 편이 좋겠다. 출가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며 병이 든 사람들도 출가합니다.

그러나 스님은 매우 건강한 분입니다. 골격도 탄탄한 혈기 왕성한 나이입니다.

건강하고 어떤 병도 없어서 괴로워하지 않는데, 왜 당신은 출가하셨는지요?

 

다른 하나는 「재산, bhoga」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파산하여 재산을 잃기도 합니다.

그래서 풍요로운 생활, 충족한 생활로부터 몰락합니다.

정신적으로도 낙담해서 의지가 꺾여버립니다.

「이제 어떻게 노력해도 재기 할 수 없다. 파산자로서 명예가 실추되어 견딜 수 없다.

이전과 같이 재산을 쌓아 올릴 수 없다」라고 생각하여 출가합니다.

풍족한 생활로부터 굴러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은 「나는 재가 생활을 계속해도 풍족하게 살 수 없다.

출세하거나 유명하게 될 수도 없다. 출가하는 편이 좋겠다.」라며 자신의 몰락을 계기로 출가합니다.

그러나 스님은 매우 유복한 자산가입니다.

부모님의 재산도 많고, 친척들도 풍족한 분들 뿐입니다.

당신 자신도 가업을 번창하게 일으켜 세울 능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속의 재산이 풍족한데, 왜 당신은 출가하셨는지요?

 

마지막 하나는 「친족, ñāti」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형(오빠)이 죽었기 때문에, 언니(누나)가 죽었기 때문에 등 자신의 가족 친지를 잃어 버렸을 때에 「아! 나는 천애고아가 되어 버렸다.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이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져 버렸다. 도와줄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이 세상에서 외롭게 사느니, 출가하는 편이 좋겠다.」라며 출가합니다.

그러나 스님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살아계십니다. 친족도 모두 건강합니다.

친구도 모두 건강하고 여럿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위의 사람들이 옆에 계시는데, 왜 당신은 출가하셨는지요?」

 

즉, 왕의 견해에서 출가라는 것은 늙음, 중병, 재산, 친족을 잃어버린 네 가지 파멸

(Cattari Parijunnani)의 괴로움으로 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4개의 불행, 4개의 실패, 4개의 쇠퇴, 4개의 파멸에 해당하면 사람들은 출가한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즉, 사회에서 능숙하게 살고 있다면 출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기에 출가의 가치를 굉장히 낮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왕에게 있어서 출가는 실패자의 대기 장소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질문에 랏타빨라 장로는 답했습니다.

 

나는 부처님이 설하신 4가지 구절의 말씀에 감격하여 출가했습니다.

 

그 첫 구절은…

“Upaniyati loko addhuvo(우빠니야띠 로-꼬- 앗두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항상 머무는 법이 없다. 견고하지 않다.」

노․병․사라는 목장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나는 출가했습니다.」

 

「왕께서는 젊은 시절에 전차 조종술, 검술, 창술 등 온갖 무술에 뛰어났겠지요.

그 무술과 근력·완력으로 전장에서도 생각했던 대로 뛰어다니며 활약하는 힘이 충분했겠지요.

그러나 나이가 든 지금 전장에서 누비며 활약했던 체력이 아직 있습니까?

그와 같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항상 머무는 법이 없고, 견고하지 않아 노․병․사라는 목장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설법에 감동했기 때문에 나는 출가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노․병․사로 내몰리고 있는 생으로부터 해탈하고 싶기에 출가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도와 과를 얻기 위해」라는 목적과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 출가자들과 설법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자신의 지혜로 고찰해 봅시다.

 

우리 중생들의 생명은 항상 노․병․사라는 3종류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삶입니다. 다른 말로 말한다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항상 죽음의 왕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찰나의 멈춤도 없고, 휴일도 없이 죽음의 왕을 향하고 있습니다.

설법하는 스님도, 설법을 듣는 여러분도, 설법을 들으면서 죽음의 왕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직장으로 가는 아빠도, 시장으로 향하는 엄마도, 학교로 가는 아이도, 여기저기로 향하지만, 법의 견지로부터 보면 모두 죽음의 왕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의 왕을 향해 가는 그 걸음은 멈출 수 없습니다.

앉아있든, 누워있든, 자고 있든, 걸음을 멈추었든, 죽음의 왕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행주좌와 모두 것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시시각각 죽음의 왕으로 행진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죽음의 나라에 하루가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지날 때 마다 죽음이 하루 가까워집니다.

한 달 지날 때 마다 죽음이 한 달 가까워집니다.

일 년 지날 때 마다 죽음이 일 년 가까워집니다.

1분 1초 마다 죽음의 왕을 향해 시시각각 나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되돌아보면 어제보다 다르고, 작년보다 다르고, 젊은 시절보다 다름을 알 것입니다.

 

계속 늙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느껴보십시오. 지금 손목이나 팔을 잡아 보십시오.

체온을 느낄 것입니다.

이 열은 노화열입니다.

jirana tejo(지라나 떼-조-)라고 부릅니다.

몸을 노화시키는 성질의 열입니다.

멀리 있는 세계의 것이 아니라, 바로 체온이 노화열입니다.

항상 불타고 있습니다.

1초마다 노화하고 있지만 분명하게 알지 못할 뿐입니다.

 

40세가 지나면 알기 쉬워지고, 50세가 지나면 밝혀지고, 60세가 지나면 이제는 숨길 수 없게 됩니다.

숨기려 해도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 버립니다.

늙음은 모태에 머무는 생으로부터 시작되어 버립니다.

모태에 머물 때부터 늙음으로 옮겨져 갑니다.

소를 치는 목동에게 소가 목장으로 내몰리고 있는 모습이 닮았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중생은 도살장으로 보내지는 소와 같은 것입니다.

도살장으로 보내진 소는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죽음에 가까워집니다.

 

우리도 한 걸음 옮길 때 마다, 1초가 지날 때 마다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태에 머물렀을 때로부터 늙음으로, 늙음으로부터 병들음으로, 병들음으로부터 죽음으로, 차례차례 옮겨져 갑니다.

분명히 늙음을 보이지 않고 죽는 사람도 있고, 큰 병이 들지 않고 죽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을 포함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지혜의 눈으로 보면 항상 죽음의 왕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죽음의 왕의 입에 삼켜지려 하고 있는 이 인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싶다고 생각해 출가합니다.

지혜가 향상되면 반드시 압니다.

 

두 번째 구절은…

“Atano loko anabhissaro(아따노- 로-꼬- 아나빗사로-)”

「이 세상 생명은 지켜 주는 사람이 없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동하고, 납득하여, 지켜주는 사람이 없는 인생,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인생으로부터 해탈하고 싶다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출가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친구들과 가족이 있기에, 그들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나에게 죽을 만큼 극심한 병에 걸려 생명이 위험하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 친척, 친구 중 단 한사람도 병을 분담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이 그 병의 괴로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슬피 울어주고, 말로 격려하며 나의 병의 괴로움을 분담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병의 괴로움은 나 혼자만이 받아 참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분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제대로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서로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있는 연인이라고 해도 한사람이 격렬한 병의 괴로움을 받고 있을 때, 다른 한사람이 그 괴로움을 분담할 수 없습니다.

괴로움은 그 병의 몸의 소유자만이 혼자서 받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그 괴로움을 분담하고 느낄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가져가게 할 수 있고, 받을 수가 있다면, 병의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통체온보다 5℃도정도 열이 오른 것이라면 친척 다섯 명이 1℃만 서로 나누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한사람이 1℃ 오를 뿐이라면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알기 쉬운 비유지만 병뿐만 아니라 노화도 분담할 수 없습니다.

 

70세가 된 어머니를 위해 자식들이 「어머니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인 것이 보기 안 좋으니, 우리 다섯 명의 자식이 조금씩 그 주름을 서로 나눕시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좋겠지요. 주름진 피부가 즉각 소생하겠지요.

다른 사람이 조금씩 나눈다면 이제 늙음은 거의 모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늙어 주름이 생겼다면, 자신만이 그 늙음을 받고 주름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늙음도 또한 누구에게도 나눌 수 없습니다. 아픔도 나눌 수 없습니다. 죽음도 나눌 수 없습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사람이 친척 20명을 불러 「자! 한명이 1년씩 가져가세요. 다음 세상에서 갚을게요.」라고 부탁한다면 지금 수명이 20년 늘어납니까? 그런 일이 생길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자연현상을 서로 나눌 수 없습니다.

 

지금 노․병․사는 염리(saṁvega)의 제일의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외의 괴로움이나 감정도, 결코 다른 사람과 서로 나눌 수 없습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서 비참함을 느끼거나 걱정하거나 유감으로 생각하거나 했을 때, 다른 사람은 그 괴로움에 대해 격려하는 것만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괴로움이나 감정을 분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 나눈 것으로 괴로움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그것은 이야기하면서 자기 자신의 해석 방법이 조금씩 변화해 갔기 때문이고,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의 가르침에 따랐기 때문에 괴로움이 줄어들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분담해 주었기 때문에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그처럼 괴로움, 감정 등은 누구와도 분담할 수 없습니다.

자신 혼자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분명히 주의 깊게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훌륭한 가르침은 마음에 큰 영향을 줍니다. 염리의 마음도 많이 싹틉니다.

지켜주는 사람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강한척해도 실제로는 취약한 인간입니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다. 취약할 뿐이다」

 

이 문장을 여러분은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억하고 항상 생각이 미쳐서, 염리의 지혜를 일으키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염리의 지혜의 힘이 강해지면, 보시, 지계, 사마디, 위빳사나 등의 선행을 힘차고 강력하게 전심전력으로 힘쓸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의 목적은…

“Assako loko, sabbaṁ pahāya gamanīyaṁ(앗사꼬- 로-꼬, 삽방 빠하-야 가마니-양)”

「이 세상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 없다.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한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에 감동하고, 납득하여, 나는 출가했습니다.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다음 세상까지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났을 때 현재의 풍족한 생활대로 영화와 유복함을 타고난다고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지은 선업이나 악업에 의해 어떤 생으로 태어난다고 믿고 있습니까?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재산은 남겨진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지, 자신이 다음 세상에 가지고 가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자신이 행한 선업이나 악업에 의해 어떤 생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깊이 잘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재산을 손에 넣고 있을 뿐입니다.

완전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자리에 있어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일정기간만 재산을 손에 넣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일정 기간도 완전하게 소유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도 5종류의 재해(수해, 풍해, 화재, 왕, 재액)를 당하면 자신을 두고 떠나 버립니다.

재산을 허비하는 일 없이 완전히 남았다고 해도 자신이 죽으면 그것들을 손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에 관계가 있다고는 말할 수 있어도, 소유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승에서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음 세상까지 전부 그대로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가져 갈 수 없는데 가져가려고 생각해서 집착하는 사람은 「돈의 망자」가 됩니다.

그들은 그런 악업으로 사후에 「아귀」가 되기 쉽습니다.

자신의 재산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세에 묻어 둔 금은 단지에 매달려 지키고 있는 것을 돈의 망자라고 합니다.

또 「보물 창고로부터 온 아이」인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습니다.

보물 창고로부터 온 아이란 태어난 것에 의해, 부모님에게 막대한 영향(행운 혹은 악운)을 가져오는 아이를 말합니다. 그런 아이들은 전생의 기억이나 전생의 몸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닙니다. 아귀계로부터 온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재산에 집착해서 모아둔 재산을 자신이 죽고 나서 악처에서 그 재산을 지키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지켜지지도 않지만.

「재산은 자신을 기다려 주지 않지만, 그 재산으로 보시라는 선행을 하면 그 선업이 자신에게 옵니다.」

그것은 선행과 악행이라고 하는 관점, 업의 자성(kammassakatā, 자신의 업은 자신이 받는 것)이라는 관점으로부터 보면 올바릅니다.

 

그러나 생으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는 관점으로부터 봅시다.

재산을 베풀어 얻은 보시의 공덕도 이승에 자신이 손에 넣은 종류의 재산을 다시 가져올 뿐입니다.

금은보석, 물건들, 감각적인 괘락이나 오종의 욕구, 지위나 권력, 주위의 사람들 등 생명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으면 손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자각하는 것으로 그 공덕은 다시 가져오게 됩니다.

 

이승에서 가지고 있는 재산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마음에 새겨, 보시의 공덕을 쌓고, 다음 세상에 그 공덕을 가져갔다고 해도, 다음 세상에서 받는 그 선한 과보도, 이승의 재산과 같이 자신의 소유는 되지 않는 재산을 가져온 것일 뿐입니다.

다음 세상에 가져 간 보시의 공덕도 정말로 자신의 재산은 되지 않습니다.

보시의 공덕, 지계의 공덕이 다음 세상에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음 세상에 가져온 선한 과보도, 반복해서 받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때문입니다.

 

그래서 손 놓아 버림으로 이제 결코 태어날 것은 없다고 하는 편이 확실히 좋은 일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손 놓아 남겨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지 않고 끝난다면 좋은 일입니다.

가지 않고 끝난다면 다시 새로운 생을 얻지 않고,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기에 매우 행복합니다.

 

공덕을 쌓는다면 행복한 천상이나 인간계에 태어납니다.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행한 악처와 비교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 신들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지옥의 괴로움, 악처의 괴로움과 비교되기 때문에 행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닙바나의 행복과 비교한다면 천상과 인간의 행복은 보잘것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려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로부터 해탈하기 위해서 출가합니다.

아라한이 되어 닙바나라는 큰 재산을 손에 넣었다면, 그 재산은 이제 처분할 필요도 없고, 남기고 떠날 필요도 없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는 행복, 필적할 수 없는 닙바나의 행복을 손에 넣습니다. 그 닙바나의 행복은 무엇으로도 손상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겨두고 떠나야 할 것이 이제 없습니다.

그처럼 남길 필요가 없는 진정한 자신의 재산을 얻고 싶기 때문에, 아라한이 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닙바나라고 하는 재산을 얻고 싶기 때문에 출가합니다.

 

그러기위해 자신의 것에 대해서 염리의 마음을 가집시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의 목적은…

“Ūno loko atitto taṇhādāso(우-노- 로-꼬- 아띳또- 딴하-다-소-)”

「이 세상 중생들은 항상 부족해한다. 만족함이 없다. 갈애의 노예이다. 」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에 감동하고, 소중히 생각해서, 부족한 인생, 채워지지 않은 인생, 마음에 여유가 없는 인생, 갈애의 노예인 인생으로부터 해탈하고 싶기 때문에 출가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은 항상 부족하고, 채워지지 않고, 만족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확실히 갈애의 노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명확하게 고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현실의 생활에 접근하는 부처님의 견해입니다. 염리의 견해, 해탈의 견해이기도 합니다.

중생은 항상 부족합니다. 채워질 때를 기다려도 오질 않습니다. 부족하다는 것, 채워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족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소유 재산, 자신이 손에 넣은 영화로움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는 먹을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먹을 수 있게 되면 만족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행복을 바랍니다.

집이 없는 사람은 허름한 나무판자 집이라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 집이 있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실제로 허름한 나무판자 집이 지어졌을 때에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허름한 나무판자 집보다 벽돌집이면 좋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집을 짓기 위해 노력하고 더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벽돌집을 지으면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 1층보다 2층집이 좋겠다.」 그것이 이루어지면 「호화롭고 정원이 있는 큰 집」을 원합니다.

 

그처럼 소망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채워질 수는 없습니다.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면 만족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더 갖고 싶어져 버립니다.

억만장자가 되어도 충분하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것을 손에 넣어도 그 이상의 것을 손에 넣기를 또 바랍니다. 그래서 또 열심히 벌어야 하고 계속 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하지 않아도 좋다거나, 벌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의 견해, 자연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부를 위해서 돈을 버는 일도 같습니다. 목적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무엇으로든 자신이 얻은 만큼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는 본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처럼 무엇으로도 손에 넣을 수 없고, 만족할 수 없고, 채워지지 않은 것은 갈애 때문입니다. 갈애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중생은 갈애가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갈애가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확실히 갈애의 노예인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서 아라한은 제외됩니다.

 

범부는 갈애가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면 자신이 갖고 싶은 재산이나 영화가 손에 들어온다면, 죽여 버립니다. 훔치면 손에 들어온다면, 훔칩니다. 갈애가 그렇게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아자따삿뚜(Ajātasattu)왕이 빔비사라(Bimbisāra) 부왕을 죽였던 것도 왕위에 오르고 싶은 갈애 때문입니다.

 

예류자가 되면 악처에 떨어지는 종류의 갈애, 악처에 떨어지는 행위을 시키는 종류의 갈애는 이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종욕구의 감각을 즐기고 싶다는 갈애는 아직 있으므로 그것을 아직은 요구합니다. 그러한 갈애에는 따라 버립니다.

 

일래자에게는 몇 안 되는 욕애(kāma-taṇhā, 欲愛)가 아직 있으므로 그것을 아직은 요구합니다. 그러한 갈애에는 따라 버립니다.

 

불환자가 되면 욕애는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묘욕(kāma-guṇa, 妙欲), 천상에 대한 묘욕을 추구하는 마음은 없지만, 색애(rūpa—taṇhā, 色愛)라는 범천계를 요구하는 갈애가 아직 있으므로 그 갈애에 아직 따라 버립니다. 불환자들에게는 갈애를 위한 마음의 괴로움, 몸의 괴로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행(saṅkhāra)의 괴로움이라고 하는 몸과 마음의 생멸의 괴로움은 아직 받습니다.

 

아라한이 되어 갈애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모두 없어지면 괴로움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모든 것은 확실히 갈애의 노예이다. 갈애가 명령하는 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염리심이 생기므로, 갈애의 노예인 인생으로부터 해탈하고 싶기 때문에 출가합니다.

 

「소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는다. 확실히 갈애의 노예다.」

 

랏타빨라 장로가 이야기한 이 목적은 도와 과를 얻는다고 하는 목적과 같은 의미입니다. 죽음의 왕으로 향하는 인생으로부터 해탈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도와 과를 얻고 싶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지켜주는 사람이 없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허약한 생으로부터 해탈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도와 과를 얻고 싶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자신이 소유하는 것이 없는 인생으로부터 해탈해서, 닙바나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고 싶다」고 하는 것도 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항상 부족한 인생, 만족할 수 없는 인생, 갈애의 노예인 인생으로부터 해탈하기 위해서 출가하는 것도 도와 과를 얻고 싶어서」입니다.

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 출가한다고 하는 것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도와 과·닙바나를 얻기 위해서, 젊을 때 출가하십시오.」

부처님은 나이를 먹고 나서 출가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젊음, 체력, 지력, 정신력이 왕성할 때에 출가하는 것이 바람직스럽습니다.

나이를 먹고 나서 출가하면 마음껏 수행에 힘쓰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젊은 나이, 청년일 때에 출가하는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공덕을 얻기 위해서, 즉 공덕을 많이 빨리 얻는다는 목적, 그리고 도와 과를 얻는다고 하는 목적, 이 2개의 목적으로 출가한다면 특별한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전편 끝, 후편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