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후회는 미덕이 아니라 자기 파괴이다. (20160513. 대구)

담마마-마까 2022. 2. 18. 09:00

https://youtu.be/SGa7aXh_fc4

* 후회는 미덕이 아니라 자기 파괴이다. (20160513. 대구)

 

「후회는 미덕이 아니라 자기 파괴이다」 하는 내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후회 안 하고 사는 사람 없죠? 대부분 후회들을 할 겁니다. 만족하지 못해서 후회할때도 있을 거고, 또는 잘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는 경우들도 있을 거고, 아니면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후회하는 경우들도 있을 거고, 후회는 여러 가지들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후회를 하게 될까? 여러분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렇죠?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후회들을 합니다.

가끔씩 스님도 돌아보면 그런 일들이 있습니다. 특히 행정적인 부분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스님이 안 접해봤습니다. 사회생활을 안 해보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상가에서 뭔가 결정 내릴 때 그때 그리할 걸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입멸하신 냐나로까 스님이 있을 때 재가자 운영위원회를 만들자 해가지고 그럼 그렇게 하자 했는데, 재가자가 있어야 이 상가가 유지돼나가기 때문에, 그래서 재가자 운영위원을 임명하는 걸 돈 많이 낼 수 있는 사람을 운영위원으로 해가지고 하자 그래서 한 사람 당 그때 당시 천만원을 내자고 하자는 등 그렇게 했어. 그래서 내가 그걸 반대를 했었어. 그건 아니다. 돈이 있는 것으로 인해서 운영위원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돈 없는 사람은 재가자가 될 수 없다는 얘기냐 해가지고 반대를 했거든.

 

그런데 실제로 지나고 보니까 사회적인 상황에서 재정적인 게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되어야만이 상가에서 모여서 무슨 일을 할 때 어느 정도 형성돼나가겠더라고. 그래서 사회적인 상황을 내가 몰랐던 거지. 그래서 그때 반대한 게 어떨 땐 그때 그런 결정을 했어도 크게 무리하지 않은 범위내에서 잘 넘어갔을 거 같으면 그것도 좋은 방법 중에 하나일 건데, 나는 그때 왜 딱 부러지게 그래서는 안 된다! 하고 제동을 걸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그래서 만약에 지금 누군가가 나한테 다시 물어본다고 하면 다시 재가 운영위원회 할 때 그랬으면 좋겠다 하고 얘기한다 할 거 같으면 이때는 그냥 너희가 알아서 해라. 나는 그거 모르는 부분이다 하고 발을 빼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것뿐 아니라 지나오면서 그런 것들이 한두 가지겠어요?

 

그런데 여기 제목이 「후회는 미덕이 아니라 자기 파괴이다」 하는 제목입니다.

후회할 동안에는 어떤 마음이 듭니까? 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것에 대해서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 마음이 기울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후회로써만 끝나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오히려 후회하는 것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결국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형태로써 흘러간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기 앙굴리말라의 일화를 들어놨습니다. 앙굴리말라의 일화는 여러분들이 대부분 알고 있을 겁니다. 앙굴리말라가 태어날 때의 인도 당시에는 별점을 보기 때문에 별점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자리에서 태어났다 해가지고 그런 자리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대부분 기르지를 않습니다. 버려버리든지 죽여버리든지 이럽니다. 그래서 왕에게 가서 이런 아이가 태어났는데 어떻게 할까 하고 물어보니까 큰 대국의 왕 같은 경우에는 한사람이 그런 악행을 저지른다 해서 나라에 무슨 위협이 있겠나,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가지고 하는 행위가 아닐 것 같으면 한 사람일 것 같으면 그냥 놔두라. 그것도 자기에게 뭔가를 조언해주는 그런 대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놔두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앙굴리말라가 공부를 해나가는 상황이 되는데, 공부를 해나가더라도 워낙 뛰어난 능력을 지닌 아이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뛰어납니다. 그러니까 같은 학생들도 앙굴리말라를 시샘하게 되고, 또 체격도 건장하고 이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시샘해가지고 앙굴리말라의 스승에게 거짓으로 얘기하게 됩니다. 그런 부분들은 여러분들도 잘 알 겁니다. 그래서 이 스승이 앙굴리말라를 나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거짓되게 얘기합니다. "나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는 비밀스러운 것이 있다. 네가 이것을 할 것 같으면 내가 그것을 전해주겠다." 불교적인 것은 아니죠?

 

스승의 손바닥 안에 감춰진 비밀스러운 것이 없다 하는 것이 불교적인 것인데, 그런데 대부분 지금도 마찬가지고 불교 외에 다른 것들은 대부분 그런 형태를 취합니다. 특별한 사람들만 천국을 약속하고 아니면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 뭔가 법을 전수하고 하는 그런 형태들을 취하게 됩니다. 불교적인 것은 아니라도 그것이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인도 당시에도 그런 형태들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비밀스런 것을 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여라. 그 죽인 사람들을 신에게 바쳐라." 하고 얘기합니다. 지금 생각할 것 같으면 참 말이 안 되는 얘기 같은데 인도 당시에는 그게 가능했습니다.

 

인도에 베다 경전이나 이런 것들을 보면은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이든 살아있지 않은 생명이든 간에 그걸 만든 사람은 신이라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신에게 바치기 위해서 그것을 죽인다고 하는 것은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는 사상이 만연해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에게 바치는 것들은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을 죽여가지고 바치는 것이든, 살아있는 것을 그대로 바치는 것이든 아니면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하더라도 꽃이나 이런 것들을 꺽어가지고 바치든 그것은 신에게 바치는 재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다. 얘기를 합니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그러죠? 신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해서 닭 가져가 가지고 그 앞에 가서 목을 땁니다. 따가지고 피를 그 재단에다가 묻히고 닭을 거기에 바칩니다. 닭만 그러겠어요? 소도 그러고 돼지도 그러고 그렇게 합니다. 사람이라고 안 할 거 같애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또 경전에도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대승경전인데 잡보장경이라는 부분에, 빨리어 경전에 그런 것은 없는데, 잡보장경이라고 하는 데에는 뭐라고 나왔느냐면 "살인을 하더라도 그 살인을 한 것들을 부처님한테 공양을 올릴 것 같으면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순전히 힌두교적인 사상이죠? 힌두교적인 사상이 그대로 들어와서 경전으로 만들어진 것이 잡보장경 중에 일부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한테 공양올리기 위해서 직접 죽여가지고 공양올린다고 하더라도 그 과보는 받지 않는다 하고, 살인에는 해당이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고, 그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설혹 살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과보가 없는 살인은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불교의 빨리어 경전에서는 분명하게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살인에 해당이 되는 것은 분명히 그 과보가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생에서 직접 받든지 아니면 다음 생에서 받든지 아니면 세세생생 받든지 과보는 반드시 있게 된다는 거죠.

있게 되는데 살인이라고 하는 것은 네가 의도를 가지고 살아있는 생명을 직접 죽이고 그리고 그 생명이 죽었다고 했을 경우에는 그것은 살인에 해당이 되게 됩니다. 그런 살인에 해당이 될 때에는 그것이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이 부처님에게 바치는 것이든 아니면 신에게 바치는 것이든 어떤 것이든 간에 과보는 반드시 발생한다 하고 빨리어 경전에는 얘기합니다. 빨리어 경전하고 다른 것들하고는 차이가 많이 나는 거죠.

 

그리하더라도 앙굴리말라는 이때 당시에, 이때가 언제냐면 부처님이 성도하고 한 12년째 됩니다. 널리 불교가 퍼져있다고 하더라도 전체가 다 불교를 알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는 거라. 대부분은 보면 힌두교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였기 때문에 힌두교의 논리에 따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까 살인을 하더라도 신에게 바치는 것들이기 때문에 나에게 과보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다시 누구를 죽여가지고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된다는 거라.

 

물론 경전에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왜 앙굴리말라가 그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까 하는 것은 불교 주석서에서는 빨리어 경전 주석서에서는 인과관계를 얘기합니다. 과거생에 앙굴리말라는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인데 누군가가 뒤에서 갑작스럽게 죽여버렸어요. 요즘도 그런 경우들이 있죠? 지나가는 사람을 무자비하게 그냥 죽여버리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으면서 그냥 죽으면 되는데 죽으면서 탁 죽이는 사람을 보고 ‘저놈 두고 보자, 내가 가만 두는가 보자’ 하고 마음을 먹은 상태가 되어버리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죽었으니까 이생에서 누군가를, 자기하고 아무 연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죽이는 그런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주석서에서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숲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거기에 앙굴리말라를 제도하기 위해서 들어갑니다. 어머니가 아들이 그렇게 살인자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려고 가는데, 살인자 입장에서는 그게 어머니든 아버지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목표를 채워야만이 비밀스러운 비책을 내가 전수 받는데, 그것도 내가 죽이는 것이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고 과보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어머니고 아버지고 무슨 관계가 있겠어?

 

그런데 불교에서는 분명히 오역죄라고 해가지고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죄 중에 하나가 어머니 아버지를 죽이는 죄입니다. 그건 아주 가장 큰 죄인데 부처님이 봤을 때는 그대로 뒀다가는 저 앙굴리말라가 어머니를 죽이겠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직접 숲으로 혼자 들어갑니다. 어느 누구도 같이 가지 않고 부처님 혼자서.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만류를 합니다.

부처님 가지 마십시오. 거기는 살인자가 있어가지고 들어가면 다 죽습니다.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가지고 열명이 스무명이 사십명씩 들어가더라도 워낙 건장한 사람이라서 그걸 다 죽였습니다. 그러니 부처님 가지 마십시오.

 

여러 사람이 만류해도 부처님은 그 말을 안 듣고 갑니다. 가가지고 저쪽에 앙굴리말라가 쫓아나오는 것을 보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데, 신통을 써가지고 부처님이 천천히 걸어가는데 앙굴리말라가 못 따라오는 거라. 그러니까 앙굴리말라가 거기 멈춰서라. 멈춰서야 자기가 죽일거니까, “멈춰서라 이 사문아!” 하고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나는 멈춰섰다. 그런데 너는 멈춰서지 못했지 않느냐?” 앙굴리말라는 분명히 열심히 뛰고 있었거든. 그래서 이상하게 생각해서 그게 무슨 말이냐 하니까, 나는 생명을 죽이는 악행은 이미 끊어버렸다는 거라. 멈춰섰다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그런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는 거라. 그런데 너는 아직도 그걸 멈추지 못하고 살생을 하고 있지 않느냐?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듭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출가를 하게 됩니다.

 

살인자도 출가할 수 있는 길을 부처님이 열어준 겁니다. 그렇게 흉악한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마음을 바꿔먹었을 경우에는 출가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부처님이 직접 보여주신 겁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죄를 지어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그렇게 해가지고 있어도 앙굴리말라가 쉽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워낙 자신이 한 일들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이고, 내가 왜 그랬을까?’ 거 무슨 비밀스러운 뭔가가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거기 속아가지고 사람을 직접 죽인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거라. 내가 그러한 악행을 저질렀으니까 악행을 저지른 것은 내가 받아야 되는데 내가 왜 그 짓을 했을까? 하는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탁발을 해서 살아가야 되는데 탁발을 나가면 사람들이 누가 머리 깍아있다 해가지고 앙굴리말라한테 밥을 줄라고 하겠어? 밥을 주는 대신에 돌을 던진다든지 욕을 한다든지 이렇게 만날 탁발나갔다오면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오는 거라.

 

그래서 하도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고 앙굴리말라가 후회하는 마음이 많이 들고 탁발을 안 나갈라고 하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도망가지 말아라. 그렇게 돌을 던지고 하더라도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걸 인내해라.” 인내하고 네 마음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악한 마음도 품지 말고 네가 그렇게 한 행위에 대해서 후회하는 마음도 가지지 말아라. 그렇게 하는 것이 너에게 맞다는 거라.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 길고 긴 윤회에서 네가 받아야 될 행위들 과보들, 과보를 지금 네가 다 그렇게 받는 것인데 뭘 그렇게 후회하느냐는 거라. 그러니까 때리면 맞아라는 거라. 그 얘기를 듣고 앙굴리말라가 뼈저리게 느낍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럴 겁니다. 지금 내가 나쁜 짓을 했으면 과보를 다 받아버리고 더 받을 것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한꺼번에 다 받을려고 할 거라. 그것이 어떤 상황이라도. 그런 마음을 품을 것 같으면 자기가 후회하고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그 과보를 다 받아서 씻어버릴려고 할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해가지고 앙굴리말라는 점차적으로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인내하면서 마음이 고요해지니까 수행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지만 앙굴리말라는 결국 사람들에게 맞아가지고 죽습니다. 아라한이 되어서. 그러면서 앙굴리말라가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나는 진짜 무간지옥에 떨어질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래서 그 과보가 지금 닥쳐온다는 거라. 내가 이생에서 지은 거 그냥 그대로 출가하기 전에 지은 거 그냥 그대로 과보로 받고 있다. 그래서 내가 맞아가지고 목숨이 끊어야 되는 상황이 됐다는 거라. 그런데 나는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는 빚이 없는 음식을 먹고 있다는 거라. 빚진 것이 없다는 거라. 인제 더 받을 것이 없다는 거라.

 

아라한들도 출가하기 전에 아니면 아라한이 되기 전에 지은 여러 가지 악행들이 있습니다. 그 과보는 그 몸을 받은 상태에서는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 과보를 받는 거라. 그래서 이생에서 받는 것들은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생이나 그다음 윤회를 하면서 하는 것들은 없어져버립니다. 왜? 그 다음생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거는 드러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뭔가를 밥을 먹고 있습니다. 빚 없는 상태에서 밥을 먹고 있습니까?

 

지금 수용하고 있는 것들 지금 먹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부처님이 네 가지로 얘기해놓았습니다.

 

'테이야 빠리보가'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훔쳐서 먹는 거와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지금 자기가 계를 지키지도 않고 잘 살지도 않아. 남에게 만날 나쁜짓 하고 아니면 훔쳐서라도 먹을라고 하고 그러면 빚지는 겁니다. 그것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먹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아, 내가 참 그래도 여러 사람 덕분에 이렇게 먹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반조하는 것도 없다는 거라.

계를 지키는 것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나 이런 것도 없이 먹는 것은 빚을 지면서 먹는 거라. 그 빚은 내가 지금 먹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가 갚아야 된다는 거라. 그것을 훔쳐서 먹는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빚을 지면서 먹는다'는 것은 뭐냐면 '이나 빠리보가'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계는 잘 지키고 그냥 열심히 살고 있는데 그걸 자기 혼자만 누리려고 한다는 거라.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인해서 내가 먹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내가 계를 잘지키고 내가 벌어서 내가 먹는다고 하더라도 아, 그래도 내가 이렇게 벌 수 있는 사회가 있고, 그런 조건이 되는 것들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알고 그리고 그러한 음식을 만드는 농부들이나 이러한 여러 가지들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마음없이 그냥 내가 벌어서 내가 먹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계는 잘 지키고 잘 살지는 몰라도 반조하는 것들이 없는 거라. 이것도 빚지는 것들이라는 거라. 훔쳐서 먹는 것은 더 나쁜 것이지만, 빚져서 먹는 것도 나쁜 것에 속한다는 거라. 그거는 언젠가는 다시 갚아줘야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과보를 낳는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하면 '다야짜 빠리보가'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상속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열심히 해서 내가 수다원이나 일래과나 불환과에 들었을 때 그것은 부처님의 법을 상속한 자가 됩니다. 그런 상속한 자로서 밥을 먹게 됩니다. 상속한 거니까 먹으면 먹을수록 나에게는 상속분이 더 많아져. 그러니까 나에게는 그것으로 인해서 더 좋은 결과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가끔씩 테라와다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아무리 가난하다 하더라도 스님들을 초청해서 일부러 공양을 올릴려고 그럽니다. 아니면 자기가 탁발을 스님에게 자꾸 올릴려고 그럽니다. 왜 그러냐면 그분들은 법을 상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올리는 것은 과보가 자기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그분들은 빚진 것도 없을 뿐 아니라 훔친 것도 없고 계율을 잘 지키면서 그리고 항상 반조한다는 거라.

‘아, 내가 이 먹은 것들에 대해서 모든 이들이 이 공덕을 함께 나누기를’ 하는 회향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거기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거라. 그래서 올릴려고 그런다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면 '사미 빠리보가'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주인되는 자' 아라한에 이르는 분들을 얘기합니다. 아라한은 완전하게 자기 자신이 주인입니다. 법을 상속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재물은 다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재산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 재산을 잘못 사용하고 관리할 것 같으면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 법을 만들 수 있는 주인이 돼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얼마든지 그거는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가장 큰 것이 아라한에 공양을 올리는 것들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런 것들이기 때문에 적어도 이 앙굴리말라는 뭘 먹어도 인제는 더이상 받아야 될 과보가 없는 상태가 됐다는 거라. 그걸 "빚 없는 음식을 먹는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지옥에 떨어졌지만 악한 곳에 떨어져서 과보를 지금 받고 있지만, 그거 전혀 내하고는 관계가 없다는 거라. 내가 행한 것에 대해서 내가 받는 건데 그거 어떡할 것이냐는 거라. 그냥 받아들이고 단지 나는 지금 뭘 먹고 있다고 하더라도 빚이 없는 상태에서, 인제 더 이상 갚을 것이 없는 상태라는 거라.

이게 앙굴리말라가 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앙굴리말라의 일화는 여러 가지가 많이 있습니다. 산모에 대해서, "나는 성스러운 성자가 되고 나서 어느 누구도 해치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내가 그런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써 산모가 고통받고 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출산이 잘되기를" 하는 그런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는 마지막 산모의 진통이 있을 거 같으면 그 게송을 항상 독송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얘기할려고 하는 것은 뭐냐면 후회하는 버릇들은 하지 말아라는 겁니다.

후회는 하면 할수록 여러분들에게는 덕이 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럼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떻게 하면 될까?

후회하지 말고, 빨리 반성하고 참회해라! 그게 우선인 것이지 후회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오히려 그 사실을 다시 또 끄집어내야 됩니다. 나쁜 걸 끄집어낼 것 같으면 선한 마음이 아니고 악한 마음이 또 일어나기 때문에 또 다른 악을 저지르게 된다는 거라.

 

그럼 어떻게 반성하고 참회해야 될까?

내가 잘못을 저지른 상대가 있을 거 같으면 그 잘못을 저지른 상대에 대해서 “아이고, 내가 참 잘못했다. 다시는 안 그럴게” 이러면 됩니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뭘 해야 되요?

 

반성하고 참회할려면 기본적으로 마음에 깔아야 되는 첫 번째가 , 내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자신이. 말로만 할려고 하지 말고 ‘아, 내가 참 잘못했구나’ 하는 걸 반드시 자기 스스로 인정해야 됩니다. 그거는 뭐냐면 내가 잘못을 저지르듯이 만약에 저 사람이 잘못을 저지를 때도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들 수가 있다는 거라. 나는 잘못에 대해서 반성하고 참회할려고 하는데 저 사람이 잘못했을 때 그걸 받아들이지 못할 거 같으면, 그거는 자기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라.

 

내가 불완전한 사람이듯이 저 사람도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저 사람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거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반성하고 참회할 거 같으면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돼야 됩니다. 그게 자기가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 인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은 언제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남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그렇게 했을 때 그대로는 안된다는 거라. 지금 이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대로 계속했다가는 또 똑같은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거라. 마음을 굳게 먹어서 , 다시는 이런 상황이 되어서는 안되겠다하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내가 이거는 두 번 다시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 하고 굳게 자기가 스스로 결의를 할 수가 있습니다.

 

참회는 모든 잘못에 대해서 아, 내가 참 잘못했다. 다시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 하는 것이 아니고, "저지른 것에 대해서!" 저지른 것에 대해서 인정을 하고 다시는 이런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 하고 결의를 하는 것들을 참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상대가 있을 때는 그리하면 됩니다. 그럼 상대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하면 될까?

여러분들은 그걸 상대가 없는 경우는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내일 모레면 스승의 날이죠?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도 잘못입니다. 또는 내가 남에 대해서 뭔가 질투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도 잘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삐져버리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내가 뭔가를 하고 이루어놓은 것들에 대해서 ‘내가 이루었다’ 생각하지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인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잘못의 영역에 속한다는 거라.

 

잘못은 대상이 없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들이 허다하다는 거라.

그런데 본인은 그것들을 잘못이라고 생각을 안 한다는 거라.

그것도 꼭 마찬가지로 잘못이라는 거라.

 

그래서 그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참회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경전에는 열 가지 대상에 대해서 참회하라 하고 얘기합니다.

 

가장 먼저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게 부처님입니다.

부처님한테 ‘내가 지은 것들을 내혼자 독식할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회향할려고 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거라. 또는 내가 누군가에게 고마워하고 항상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애로운 마음을 가져야 되는데 그런 마음들을 잊어버렸다는 거라. 이런 식으로 부처님한테 참회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회의 대상 첫 번째가 부처님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세 번째가 성문, 연각이라고 그렇게 경전에는 나와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이 깨달음에 이른 분들이나 아니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서 깨달음에 이른 분들, 이런 분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이룬 분들에게도 참회할 대상이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부처님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른 큰 아라한들, 80분의 아라한들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님 같은 경우에는 사리뿟따 존자가 그래도 가슴에 가장 많이 와닿습니다. 그분의 생애나 여러 가지 행위들을 한 것이나. 그래서 부처님한테 하고 나서 그다음에 보통 하는 것이 사리뿟따 존자입니다. 사리뿟따 존자를 떠올리면서 그분이 행한 것들을 생각하면서 ‘아,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했는데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 하면서 반성하면서 사리뿟따 존자한테 '죄송합니다. 내가 참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갈라나 존자가 될 수 있고, 어떨 때에는 깟짜야나 존자가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난다 존자가 될 수 있고 합니다. 여러 분의 그런 부처님 당시 때부터 부처님에 의해 깨달음에 이른 80분의 아라한들에게 그중에 떠올려가지고 그분들에게 아, 이럴 경우에는 이분들은 어떻게 했을까 하는 것을 떠올린다는 거라.

떠올리면서 ‘아, 내가 그렇게 못했구나’ 인정하고 그분들에게 잘못했다고 하는 거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 여섯 번째가 어머니와 아버지입니다.

실제로 어머니와 아버지한테 잘못을 안 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어릴 때 그랬습니다. 밖에서 뭔가 잘못하고 왔을 거 같으면 엄마 아버지한테 “엄마, 나 뭐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랬을 거라. 그런데 왜 나이 들어서 커서는 안 하느냐는 거라. 잘못한 것은 똑같은데 어릴 때 저지른 잘못은 과보가 적고 지금 저지른 잘못은 과보가 큰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행위에 따라서 과보의 중과가 생겨나는 것이지, 나이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다음에 일곱 번째가 스승님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는 스승이든지, 아니면 여러분들에게 몸으로 보여주는 스승이든지, 아니면 가르침을 전해주는 스승이든지.

스님은 아침 저녁으로 항상 그 참회게송을 합니다.

자신보다도 하루라도 더 먼저 출가한 스님한테 가서 "스님, 내가 오늘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뭘 잘못했는지도 사실은 잘 몰라. 그건 내가 틀림없이 내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거라. 그렇기 때문에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하고 참회를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예불 들어가면, 예불하기 전에 먼저 하는 것이 그거 먼저 합니다.

"아항 반떼- 삼바훌라- --왓투까-- -빳띠요-

-빳징 따- 뚬하 물레- 빠띠데--."

이렇게 하면서 게송을 합니다. 소소한 것이지만 잘못을 저지른다는 거라. 나는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한 잘못들을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다 하고 참회합니다.

 

그다음에 여덟 번째, 여러분들에게 바른길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가르쳐주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옳은 말을 하면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는 사람들도 있고, 학교 선생님들도 있을 수가 있고, 바른길을 가는 것은 꼭 진리의 길을 가는 것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그래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또 바르게 남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고 또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는 거라. 그런 분들에게도 한다는 거라.

 

그다음에 아홉 번째는 존경에 적합한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저사람은 오계도 잘 지키고 참 잘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열 번째 다른 사람들에게 잘 베푸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설혹 가진 게 없다고 하더라도 항상 베푸는 사람, 마음을 베푸는 것이든, 아니면 물질적인 걸 베푸는 것이든,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열 가지 사람들에게는, 대상이 없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그런 분들에게 가서 참회하라!

그래서 참회는 일상화되어야 되는 것이지 일상화되지 않고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거라. 부산에서 아마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참회의 힘」이라고 하는 법문을 한 번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참회 서원의 게송」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걸 잠시 들려드릴게요. 여러분들도 그런 대상이 없을 때 참회할 경우에는 부처님을 떠올린다든지, 스님과 같이 사리뿟따 존자를 떠올린다든지 이렇게 하면서 그분들에게 삼배를 드리고 나서 이 참회게송을 하면 좋습니다.

 

참회 서원의 게송

 

참회합니다.

어리석게 몸과 말과 마음으로 범해버린 잘못이 나에게는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을 마음깊이 참회합니다.

다시는 이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범한 잘못도 마음으로 받아들여 용서하겠습니다.

이후로는 작은 잘못도 범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해나가겠습니다.

내가 힘써 해야 할 일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순간순간 변해가는 이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진정한 행복을 얻는 길입니다.

이와 같이 해탈에 이를 때까지 바르게 노력할 것을 서원합니다.

 

이게 참회서원의 게송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침저녁으로는 항상 참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든지 후회하지 않는 행위들을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후회한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잘못했으면 잘못을 반드시 인정하고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다시는 저지르지 않도록 스스로 다짐할려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자꾸 습관화해야 되는 것이지, 과거를 떠올린다든지 아니면 잘못한 것들을 떠올리면서 후회할 것 같으면 이런 것들을 자꾸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또 잘한 것들에 대해서도 그걸 떠올려가지고 자기 자신의 아만심을 키우는 일들을 해서도 또한 안 됩니다.

 

그런 위주로 쭉 적어놓은 겁니다. 그 뒤에 마지막에 적어놓은 것을 보면

• 사람은 지은 잘못에 대해 후회가 아니라 참회(반성) 해야 한다.

• 잘못을 범하는 인간이 다른 이를 비난하는 것은 더 큰 죄이다.

자기도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인간인데도 다른 사람이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해서는 항상 비난한다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럴 자격이 있습니까? 없다는 거라.

 

그런데 그게 왜 더 큰 죄라고 할까? 잘못을 범한 사람은 만약에 아, 내가 잘못했다 하고 인정하고 참회할 것 같으면, 참회하고 나서 더 큰 선한 일을 할 거 같으면 그것이 가려져가지고 드러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더더구나 도와 과에 이르는 선한 것들이 생겨났다 할 거 같으면 그것에 가려져가지고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거의 95%라는 거라.

 

그런데 나는 나도 잘못을 저지를 줄 아는데 다른 사람을 만날 비난하는 거라. 그리고 저지른 것은 그때인데 나는 또 떠올려가지고 그사람을 또 비난한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에게 잘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에 품고 있을 거 같으면, 그 비난하는 것을 계속적으로 하게 됩니다. 더 큰 죄를 저지르려는 거라. 더 큰 과보를 받을 짓을 스스로 하고 있다는 거라. 그건 안된다는 거라.

용서해줄 줄 알았을 거 같으면 ‘나도 그럴 수 있는데’ 하고 받아들이고 나서 용서해주어야 됩니다. 그걸 거울삼아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먹는 것이 바른 것이지, 그걸 두고두고 계속 비난하고 그런 마음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자신이 더 큰 죄를 자꾸 저지를 수 있게 한다는 거라.

 

그래서 세 번째가

• 깨닫지 않는 이상 선한 일을 행해도 지은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은 행위는 그것은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앙굴리말라가 내가 나쁜 짓을 많이 저질렀는데 선한 것으로 인해서 그것을 가려버렸다, 덮어버렸다,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다 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선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조그만 선한 일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라한! 아라한이 된 사람이 과보를 지었기 때문에 나쁜 행위들은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지,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되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걸 착각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과보가 드러나지 않게끔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라한이 되지 않아도. 어떤 거에요? 앙굴리말라의 경우도 보면 항상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알아차리면 선한 마음을 계속 이어갑니다. 그럼 선한 마음을 이어갈 동안에는 선한 마음과 선하지 않는 마음은 동시에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과보도 선한 마음으로 해서 선한 과보가 있을 경우에는 불선한 과보가 드러날 시간적인 여유가 없게 됩니다.

그럼 내가 아라한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유지해 나갈 것 같으면 악한 행위를 저지른 것에 대한 과보가 드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거는 있을지는 몰라도 조그만한 선한 일을 했다고 해가지고 내가 전에 저지른거 그거 덮어진다? 그렇게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 모든 죄의 원인은 탐·진·치이다.

모든 악한 행위를 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의 악한 과보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은 탐·진·치로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탐·진·치는 어떠한 경우든지 짤라내버리고 몰아내버릴려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내가 일으킬려고 하고 그것이 내 옆에 붙어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 당신의 마음 속의 탐·진·치가 당신의 적이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탐·진·치가 여러분들의 적이라는 거라. 나한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잘못한 행위를 후회하는 것들로 인해서 그 잘못한 것들이 내 적이 되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탐·진·치가 여러분들의 적이라는 거라.

적과 아군을 구분해서도 안 되겠지만 여러분들의 마음이 적과 아군을 만들게 됩니다. 탐·진·치가 없을 때는 그것은 여러분들에게는 아군이 됩니다. 탐·진·치가 있을 때는 그것은 여러분들에게는 적이 항상 생겨나버리게 된다는 거라. 적은 여러분들에게 해코지를 하게 됩니다. 그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게 오늘 얘기한 주제 「후회는 미덕이 아니라 자기 파괴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자꾸 참회하고 반성하고, 다른 사람이 잘못하더라도 받아들일려고 하고, 그리고 항상 나에게 탐·진·치가 없는 생활들을 이어나갈려고 해서, 설혹 내가 이생에서 뭔가 잘못한 것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덮어버릴 수 있게끔 깨달음에 이를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유지해 나가라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