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20160527. 대구)
오늘은 「선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태국에 있을 때 실제 스님이 굉장히 감동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절 낙성식이라고 하나? 절 다 완성되고 나서 스님들을 초청하는 거, 거기를 한번 간 적이 있는데 아주 볼품없는 절이라 새로 지은 절인데. 그런데 거기는 농촌지역 중에서도 아주 못 사는 이산 지역이라고 해서 동북부 못사는 지역인데, 거기까지 가기도 힘들었지만 절을 보고 처음에는 다들 스님들이 의아해했어요. 이런 곳에 절을 지어갖고 뭐하러 스님들을 초청해가지고 낙성식을 한다고 그럴까 그렇게 다들 의아해했어요.
그런데 그 절을 지은 것들을 보고를 하는 얘기를 듣고 스님들이 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거기에는 숲에 스님 한 분이 와서 머물렀던 모양이라. 태국 같은 경우에는 탁발이 잘되기 때문에 숲에 머물러도 마을 쪽으로 가서 탁발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거주처가 없다고 하더라도 숲에 얼마든지 머물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숲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높은 산들이 아니고 나즈막한, 우리 같으면 동네 야산 같은 그런 수준들이기 때문에, 크게 위험한 것도 없고 물론 뱀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뱀에 물려 죽는 스님들도 많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외에는 크게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추위나 이런 것들 때문에 얼어죽을 염려도 없고, 그렇기는 하는데.
그 마을에 매일 같이 이 스님이 탁발을 나오는데, 그리해도 숲에 머물다 보니까 그 마을까지는 거리가 상당히 됩니다. 요즘 거리로 치면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라. 새벽에 일찍 출발해갖고 두 시간 동안 걸어내려가가지고 탁발을 하고 그러고 나서 다시 또 그 숲에 가서 공양을 잡수면, 그러면 그게 오전이 다 끝나.
매일 같이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고, 스님들이 없는 지역인데 그 스님이 와서 탁발을 하니까, 그 마을 주민들이 그래도 만날 스님이 오는 시간에는 딱 거기서 기다려가지고 스님에게 탁발을 해주고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마을 주민들이 보니까 스님이 있는 게 좋거든. 매일 같이 자기들도 스님한테 탁발을 올리고 하다 보니까, 매일 일찍 준비를 해가지고 스님한테 올리는 상태가 돼야 되는 거고, 또 그렇게 준비하는 것이 즐겁거든. 또 스님이 탁발하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환희심도 나고.
그렇게 계속되다 보니까 마을 사람들이 회의를 했어요. 거기서 “우리가 이러지 말고 그냥 스님한테 탁발을 올리고 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스님 법문도 좀 듣고 그렇게 하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하루는 거기다가 천막을 쳐놔놓고 그 스님한테 탁발공양을 올리면서 “스님, 저희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듣기를 원합니다. 법을 좀 설해주십시오.” 그렇게 하니까, 그 스님이 공양을 하고 나서 법을 간단하게 해주겠다 해가지고, 그 천막에서 공양을 잡숫고 법을 설해주게 된 거라.
그게 가끔씩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부처님 가르침 듣는 것도 좋고 또 탁발 올리는 것도 좋고 그렇거든. 그래가지고 결의를 해가지고 우리 이 자리에다가 조그마치만 스님이 머물 수 있는 꾸띠,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꾸띠입니다. 아주 허름한 초가집 같은 그런 거, 그걸 하나 지어가지고 스님이 여기 머물 수 있도록 하자, 두 시간 동안 매일같이 왔다갔다 하면서 번거로운 것보다 스님도 여기서 머물고 또 탁발하기도 용이하고, 또 우리들도 스님에게 매일 같이 법문 듣는 것 뿐아니라 자주 찾아뵙기 쉽고 하니까, 그렇게 하자 해가지고 꾸띠를 짓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가난한 동네에 가진 돈이 어딨어? 아무것도 없지. 그런데 태국은 좋은 게 뭐냐면 진흙을 가지고 벽돌을 직접 만듭니다. 그래서 큰 돈이 없어도 집을 지을 수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어느새 집이 그렇게 완성이 된 거라. 집이 완성되고 나니까 스님이 내가 머무는 것은 불편함이 없기는 한데, 그래도 다른 스님이 올 수 있으면 또 머물 공간이 필요할 거다 하니까 또 다른 스님이 머물 공간을 또 하나 짓고,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스님들이 몇 사람이 모이게 된 거라.
몇 사람이 모여있으니까 몇분들이 모였을 때는 스님들이 상가가 되기 때문에 상가에서 할 수 있는 시마석, 시마홀 우뽀삿타라고 해가지고 포살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해가지고 또 포살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이렇게 해서 절을 이루게 된 거라.
그러다 보니 사람들도 우리도 스님 따라서 수행하고 싶다 해가지고 수행하는 수행홀도 또 하나 만들고, 그렇게 완성되고 나서 각지에 있는 스님들을 초청하게 된 거라.
그러다 보니까 그 절을 짓는데 시간이 굉장히 많이 걸렸어요. 근 10년 넘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스님도 있던 데가 치앙마이라고 하는 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 같은 그런 대도시죠. 그러다 보니까 다 삐까뻔쩍한 절이었지 그렇게 허름한 절을 본 적이 없거든. 거기서는 직접 벽돌을 찍어가지고 짓는 것이 아니고 공장에서 찍어진 걸 가져와서 다 짓고 해서 지붕도 아주 아름답게 화려하게 장식을 하고 그런 형태들로 돼있었기 때문에, 볼품은 별로 없이 보이죠.
그런데 그날 축사를 하면서 한 노인이 와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러더라고.
우리는 이 절을 짓기 위해서 돈이 한 푼 생기면 돈 한푼을 그냥 그대로 이 절을 짓기 위해서 모았다. 그래서 필요한 자재들을 사고 했다. 그런데 한 푼이 생기지도 않는 사람들은 자진해서 자기가 농사일을 짓다가 시간 날 때마다 와가지고 벽돌을 만들고 허드렛일을 하고, 사람들에게 밥을 만들어서 먹이고 이렇게 하면서 이 절을 지었다는 거라.
짓고 나니까 참 보잘것없는 절이지만은 우리들 마음에는 그 어디보다도 훌륭한 절이 됐다는 거라.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담마를 들을 수 있고, 스님들이 여기서 거주하면서 그렇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 마을에 처음 생기는 절이고 그래서 우리 마을의 참 자랑이다 하는 얘기를 하더라고.
그 얘기를 듣고 사람들이 다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원래 스님들이 그런데 초청받아가면 스님들한테 각각 보시물품하고 봉투에 여비하라면서 돈을 넣어주고 그렇게 하는데, 한 사람도 그 돈을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이 없는 거라. 다 받은 돈을 가지고 그 절에다가 다 기부를 하고 또 자기 호주머니에 있는 거 다 털어가지고 보태고 오는 거라.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래서 참 절이 있다는 것은 저렇게 사람들이 하나로 모일 수 있게 하고, 또 부처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장소가 있고, 또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태국에서는 참으로 행복한 일이구나.
사실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절의 개념은 거기서는 모든 회의를 하더라도 절에 가서 회의를 하고, 결혼식을 한다고 하더라도 절에 가서 하고, 장례식을 한다고 하더라도 절에 가서 하고, 모든 일상생활이 절하고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절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 모든 생활을 하는데 굉장히 불편함을 가지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참 태국이라는 나라가 그래도 참 대단하구나. 우리나라는 겨우 사찰 해봐야 몇천개 정도 되겠지만, 거기는 수많은 사찰들이 있으면서도 그 규모에 맞는 사찰들을 지닌다는 거라. 가난한 곳은 화려하진 않지만 조그맣지만 역할들은 그대로 사찰 역할들을 다한다는 거라. 도심에 있는 사찰이라 해가지고 그리고 화려하다 해가지고 그냥 전시용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도 사찰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거라.
사찰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역할들을 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냥 스님들만의 수행하기 위한 공간이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일반 재가자들이 접근하기 힘드는 공간이라든지 이렇게 돼버릴 것 같으면 절은 반쪽짜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면서 아, 참 훌륭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거기도 꼭 마찬가집니다. 처음에는 그냥 스님 모시고 법이나 들을까 해가지고 조그만한 초가집 하나 지은다고 생각을 한 게 세월이 이렇게 10년 넘어 지나면서 그런 꾸띠들도 여러 개 생겨나고, 또 포살당도 생겨나고 수행하는 곳도 생겨나고 이렇게 생겨나는 모습들도 보고, 그래서 작은 것부터 시작을 해야 된다는 거라. 작은 것부터!
그렇지 않고 누군가가 큰 마음을 내가지고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확 다 지었다, 그럴 것 같으면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마을에서는 그 절에 대한 애착은 그렇게 없을 거라. 그러니까 우리 절이라는 그런 생각보다는, 그냥 내가 필요할 때 와서 내가 수행한다고 할 것 같으면 수행하는 회비내고 수행하는 만큼 있다가 대접받고 있다가 그냥 나오길 바라는 거지, 뭐 수행하러 왔더라도 자기가 가가지고 스님들이 풀 벨 수 없으니까 자기가 풀베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공양간에 일 도와줄 게 없는가 해가지고 공양간 일 도와준다든지 이러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시작돼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모였을 때 그게 절다운 절로써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 첫머리에 보면 「모순」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빠까띠 위루따'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하는 거 있죠? 안 늙고 싶다! 그래서 안 늙기 위해서 뭔가를 막 하기는 하는데, 안 늙을 방법이 있습니까? 병 안 들고 싶다, 또 안 죽고 싶다, 안 죽기 위해서 여러 가지들을 하기는 하는데, 참 어찌 보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것을 그렇게 보면 되는데, 만약에 남이 아프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건 남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는 안 아플거라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남이 죽었다, 그럴 것 같으면 죽은 사람에 대해서 애도를 할지는 몰라도 기본적인 생각은 '나는 안 죽을 것이다' 생각을 하는 거라.
그러니 누군가가 뭔가 잘못을 했다, 잘못에 대해서 막 뭐라 합니다. 자기는 잘못 안 할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그런 모순을 가지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왜 그럴까? 왜 그렇게 모순되게 살게 될까? 두려움과 공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과 공포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이유는 생로병사가 있기 때문에! 생로병사가 없을 거 같으면 그런 두려움이 없고 공포가 없죠?
만날 젊은 상태가 유지돼 있다 할 것 같으면 뭐 거기다가 화장품 찍어바르면서 얼굴 펴지 않아도 되는 거고, 안 죽는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뭐가 걱정이겠어? 그런데 생로병사가 있기 때문에, 그건 어쩔 수 없는 건데 그것들로부터 피할려고 자꾸 하다 보니까, 그런 두려움과 공포들이 항상 일어나는 거라.
그런데 그걸 피할려고 해도 피할 수 있는 거라? 경전에 부처님이 한탄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출가를 했다가 아름다운 처자를 보고 마음이 홀딱 반해갖고 환속을 해가지고 결혼을 했어. 그런데 결혼을 해가지고 잘살면 될 건데, 출가한 스님들이 보통 오래도록 출가했다가 환속을 하거나 하면 사회생활 안 해봤기 때문에 사회생활을 잘 못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만날 부인하고 싸우고, 아니면 나쁜짓 하고 이렇게 생활을 하는 거라.
그런데 그 스님은 그전에는 출가생활 할 때는 사마디 삼매를 체험하고 삼매를 아주 자유롭게 해서 적어도 그 상태에서는 마음도 고요하고 번뇌도 없이 살아왔었거든.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사마디 상태만 경험했기 때문에, 비유를 들자면 그렇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는 물을 계속적으로 냉각시켜줘야 됩니다. 물을 냉각시켜주지 않으면 그 원자력발전소는 핵이 빠져나오든지 터져버리든지 그럴 겁니다. 냉각되는 상태에서는 그게 안전해. 그런데 이게 냉각되는 물의 순환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 큰 문제가 생겨버리는 거라.
사마디라고 하는 것은 그렇습니다. 삼매 상태에서 그냥 그대로 있을 경우에는 그 냉각되는 거와 같이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하고 번뇌가 안 일어나는데, 그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내가 벗어나버릴 것 같으면 그건 문제가 생겨나버립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번뇌가 다시 또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반드시 해야 되는 이유가 뭐냐면 그런 원자핵을 아예 없애버리는 거라. 우리 지금 현재 과학에서는 그 원자로에 남은 핵 찌꺼기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죠? 과학에는 없지만 불교수행에서는 오직 유일하게 그걸 없애는 방법이 위빳사나 수행법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사마디 상태가 아니라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는 생활들을 하라는 겁니다.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면 항상 마음은 삼매의 상태가 아니더라도 삼매와 마찬가지로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대상에 대해서 끄달려들어가지 않고 생활을 하게 되는 거죠.
어쨌든 그런 사마디를 경험하고 자유롭게 자재했던 분인데도 살아가는 것들은 세속에 나와가지고 아주 불량하게 살아가는 거라. 그러다가 도둑질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해서 처형대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그럽니다.
"저게 죽음을 피하는 길을 구할려고 그 길을 갔다가, 다시 또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안 그럴 거라고 그렇게 출가를 해놓고 그 길을 계속 가면 되는데, 그 길 안 가고 또 반대 방향으로 간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안 죽을려고 노력하는 것들, 또는 안 늙을려고 노력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부처님이 봤을 때는 반대 방향으로 나간다는 거라.
그래서 거기에 대한 집착하는 것들이나 거기에 대한 갈애들이 일어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으로부터 초월해버리게 되는데, 그것이 내가 지금 죽든 내가 지금 병이 들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걸 하고 있다는 거라, 부처님이. 반대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현상들은 무상한 것들을 알고, 그리고 모든 현상들은 조건 따라 일어났다가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것인데 그것은 반드시 원인·결과들이다. 인과법칙에 따라서 지은 행위들은 반드시 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그리고 그런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것들은 그 어디에도 실체가 없는 것이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봐야만이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습니다.
죽음, 실체 있는 겁니까? 병 아니면 늙음, 실체 없습니다. 다 변하는 존재들입니다. 죽었으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거고, 태어났으면 또 그것이 변해야 되는 것이지, 변하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암세포라고 하더라도 그게 변하지 않는 거면 암세포의 기능을 못합니다. 암세포는 계속 더 변하면서 증강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어떤 것이든 그런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항상 변하는 것이고, 뭐든 원인·결과를 가지는 것이고, 그것들 변하는 것들이 뭐 누가 시켜서 그런 건가? 실체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그 조건 따라서 반드시 되는 것들 뿐이라는 거라.
그걸 알 수 있는 방법은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그것이 가능해진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 제자들에게 그렇게 "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순된 생활을 하고 있다" 하고 제자들에게 그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바라문이 부처님을 만나 뵙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는 누구의 생각도 결코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이 말하기를 「그럼 너도 너의 생각이 마음에 안 들겠네.」
어느 누구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들은 자기에게도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 마음 자기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데, 왜 자기 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는 생각을 안 하느냐는 거라. 남들 마음에 안 드는 것만 자꾸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자기의 생각도 사실은 자기 자신도 마음에 안 드는 것들이라는 얘기라.
그게 모순이라는 거라.
자기 자신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남의 잘못에 대해서 이해하고 용서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게 되지. 또 자기 자신이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남이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았을 때 자기와 같이 생각해서 그것들을 위로할려고 하고 또 간호할려고 하고,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안정을 시켜주고 해야 된다는 거라. 자기는 그렇게 안 할 것처럼 생각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거라.
그래서 살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모순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생존욕구 그리고 갈애!
쉽게 말하면 살고 싶다고 하는 것하고 그리고 죽고 싶지 않다 하는 것, 이 2개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순되게 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런데 뭐 지가 죽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 죽어지는 것도 아니고, 살고 싶다고 해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는 거라. 이 생존욕구와 갈애 이게 원인이라서 끊임없이 모순되게 살아가고 생로병사를 겪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어떻게 하면 생존욕구와 갈애를 몰아낼 수 있을까?
그 답이 "선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생존욕구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수행에서 생존욕구를 완전히 끊는 것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끊을 방법이 없습니다.
갈애,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할 거 같으면 번뇌, 모든 번뇌를 다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는 거라. 그런데 수다원이 되면 어떤 번뇌들은 떨어져나갑니다. 또 생존욕구는 조금 더 엷어집니다.
수다원이 되지 않고 아라한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수다원이 되고 일래과가 되고 불환과가 되고 아라한과가 되는 것이지, 그걸 거치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에 대해서 적어도 구분할 줄 알아가지고 그것들로 인해서 정신적인 괴로움을 받는 것들은 어느 정도 끊어낼 줄은 알아야 되는 거고, 어떠한 대상들에 대해서도 항상 평온한 마음들을 가질 수 있어야 되는 거고, 그런 과정들을 겪지 않고 수다원이 될 수 있는 방법도 또 없다는 거라.
하나씩 하나씩 단계를 지어서 나아가지게 되는 것이지, 그것을 자기가 원한다고 해가지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안 죽고 싶다해서 그렇게 되는 방법이 없듯이, 안 죽는 길인 아라한이 되는 것도 그걸 바란다고 해가지고 그게 바로 한꺼번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거라.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쩔 수 없이 한 단계 한 단계 밟아나갈 수밖에 없다는 거라. 한 단계 한 단계 밟아나가야 되는 것이지 그걸 한 번에 뭔가를 한다? 그건 참 어리석은 일이라는 거라.
‘내가 돈이 많이 생기면 스님 절 지어줘야지’ 참 어리석은 일이라는 거라.
변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바라는 것들, 그것은 참 어리석은 일들이라.
자기 생각도 바뀔 것이고 아니면 그 물질적인 재산도 변하는 것인데, 그것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나? 이게 안 되는 거라.
작은 것부터 시작이 되어질 때 여러분들은 이와 같은 삶의 모순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의 혁명을 일으켜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해야 되는 것들은 그 두 번째 페이지에 보면 「서로 경쟁하거나, 경쟁의식을 가지거면 안된다.」 그렇게 돼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스님! 어느 스님은 누군가가 땅을 기증을 하고 또 어떻게 돈을 마련을 해가지고 선원을 여기도 짓고 또 저기도 짓고 한다는데, 스님 보면 안타깝습니다. 왜 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어요.
거 뭐하러 경쟁해쌌는데? 누가 절 지었다 해가지고 내가 절 지어야 될 이유가 뭐가 있어? 절 지으면 참 잘했다 하고 축하해주면 될 일인데, 저 스님은 나보다 못한데, 왜 쟤는 저걸 하는데 나는 이걸 못할까? 왜 그런 생각을 가지느냐는 거라.
불교도들은 절대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동료의식, 그리고 평화와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조건입니다. 적어도 테라와다 불자라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좀 더 조화롭게 좀 더 평화롭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행위를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다르게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걸 해결하는 길도 한 번에 뭔가를 해서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출가하고 나면은 5년간 아니면 10년간 그 스승 밑에서 꾸준하게 배워야 됩니다. 왜 그렇게 정해놨을까?
그 스승은 인제 출가한 제자보다도 좀 더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그걸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는 거라. 그래서 5년이 지나기 전에 만약에 떠난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떤 경우는 그 스승은 마음속으로 쟤는 인제 내 제자 아니다 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들도 허다하게 있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하면 배워야 될 것들을 완전하게 배우지 못했다는 거라. 배우지 못했으니까 만날 다른 사람하고 경쟁할려고 한다는 거라.
얼마 전에도 어느 스님이 그런 적이 있습니다. 스님 나는 빨리어를 좀 배우고 싶은데 여기서는 지금 안 가르쳐줍니다, 아직 안 된다고. 그래서 빨리어를 배우기 위해서 다른 데로 갈랍니다. “그러지 마라! 그러지 마라!” 그거 지금 빨리어를 배우는 게 중요한 거냐? 뭣 때문에 빨리어를 배우고, 뭣 때문에 수행을 하느냐는 거라.
경전을 배우는 것들은 좀 더 수행해나가는데 해탈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받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지금 다른 사람들은 다 공부하는데 하는 생각에 미처 있을 거 같으면 마음이 고요해지지 못합니다. 그럼 마음 하나 고요하게 돼있지도 못하는데 만약에 빨리어 배우러 갔다, 그러면 그 사람은 경쟁하는 마음이 계속 안 생기겠어요? 계속적으로 생겨난다는 거라.
그래도 태국에서 스님이 잘한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그래도 나는 11년 넘어 동안 스승 밑에서 스승을 떠나지를 않았어요. 물론 버마에 가서 수행하기도 하고, 스리랑카에 가서 수행하기도 하고 이런 것은 있지만, 그것은 잠시잠깐 안거 철에만 가서 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지, 그 스승 밑을 떠나지를 않았어요.
스승 시봉도 다 해보고, 또 그 자리에서 가까운 데에 가서 경전공부도 배우고, 또 학교도 다니고 또 수행하러 가고, 그렇게는 하더라도 항상 일정한 기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또 스승 밑으로 돌아오는 거라.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이 다른 스님들하고 히히덕거리더라도 거기 또 들어가는 거라.
그런데 어찌 보면은 내가 더 빨리 수행을 성취하고 또는 좀 더 빨리 공부를 마치고 했을 거 같으면 그렇게 쭉 한 곳에서 계속 머물면서 했을 거 같으면 더 빨리 했을 수도 있어. 그런데 무르익지는 못하는 거라.
스승은 어떠한 경우든지 제자를 해탈로 이끌어주게 됩니다. 그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래서 어떻게 하면 네가 좀 더 조화롭게 그리고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자꾸 익히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스승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그것은 어떤 경우든지 해탈로 나아가기 위한 방편입니다. 관습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길을 따르는 것이 맞습니다. 그게 틀렸다고 할 것 같으면 2500년 넘어 동안 계속 그런 상태가 유지돼나가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해탈로 나아가기 위한 것은 선한 것들을 작은 것부터 하나씩 자꾸 시작하는 것들입니다. 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이 프린트물에 비유로써 설명을 해놓았습니다.
아까 스님이 직접 경험한 것과 별반 차이 나는 것이 없습니다.
스님이 탁발나오니까, 먼 곳에서 오니까 당연히 숲에는 이슬이 머금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스님은 당연히 그 이슬 머금은 풀숲을 헤쳐나와야 되는데 가사가 젖게 돼있습니다. 가사가 젖어 있는 것을 보고 아이고, 스님이 가사가 젖은 상태에서 저렇게 다니고 하면 당연히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숲에 있는 잔잔한 풀 같은 걸 싹 베어주고, 또 비가 오고 나니까 땅바닥이 젖어가지고 흙탕물이 튀고 하니까 그거 좀 편안하게 해줄려고 자갈을 깔고 땅도 싹 다지고, 더위로부터 좀 피하라고 공간 만들어주려고 천막도 만들어주고, 좀 더 편안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건물도 짓고, 한 사람인데도 한 사람이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에 이게 절이 돼버리는 거라.
아까 맨 처음 서두에 스님이 직접 보고 경험했던 거하고 꼭 마찬가지 상황이라는 거라. 그런데 결국은 그렇게 되다 보니까 더 많은 이익들이 오히려 그것을 만든 사람이나 아니면 그것을 재가자들이 누리게 되는 거라. 그걸 비유로써 써놓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낙성식 때 가서 하신 말씀이 참 일품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의 좋은 행위는 다음의 좋은 행위로 연결된다. 작지만 선한 일을 해서 마음의 기쁨을 느낀 사람은 잇달아 선한 일을 계속한다. 시간이 지나면 처음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단히 크고 좋은 일도 가볍게 이루어진다.」
생각도 못했던 것들인데도 이루어진다는 거라. 해보니까 자기 마음도 기쁘고 좋거든. 그러니까 더욱 더 자꾸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선한 행위를 하면서 마음에 자꾸 기쁨을 느끼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이게 뭐 특별한 일이라고’ 하고 생각해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 탁발 올리는 거 기쁨을 느끼지 않을 거 같으면, 만약에 예를 들어서 전철을 타고 가는데 테라와다 스님이 있다. 그럼 테라와다 스님한테 공양올릴려는 마음이 안 생깁니다. 모르는 스님이 되는 거라. 조그만한 것들을 하면서 자꾸 기쁨이 생겨서 아, 내가 또해야지, 또 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겨야만이, 그래야만이 다음주에 또 와서 할려고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거라. 그렇게 진행이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살아가는 것들을 두려움과 갈애에 맞춰가지고 그 상태로써 계속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꾸 그 모순된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거라. 예를 들어볼까요?
왜 갈애와 두려움들이 생긴다고 했어요? 생노병사가 있기 때문에!
그럼 죽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요? 그 생존욕구와 갈애를 없앨려고 하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 것들을 향해서 나아가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하더라도 영원히 죽지 않는 것, 몸을 획득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거라. 범천과 같은 범아일여, 그래서 뭔가 특별한 것들을 내가 발견하기 위해서 수행을 합니다.
또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런 수행을 안 할 거 같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세계를 자꾸 상정을 합니다. 열반도 어떤 세계라고 상정을 하고, 극락정토라든지 아니면 금강계 천상계 하는 그런 세계라든지 이런 세계를 자꾸 상정을 하게 됩니다. 적어도 죽고 나서 거기 갈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세계는 영원히 죽지 않는 세계라, 항상 행복한 세상으로 상정을 해놓았다는 거라.
반대 방향으로 자꾸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념화시켜가지고 그걸 만든다 해가지고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꾸 사람들은 그렇게 자꾸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나가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 모순된 걸 분명하게 알고, 오히려 그런 생존욕구와 갈애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지금 현재 순간순간을 자꾸 알아차려야 되는 거라. 순간순간 또 선한 일들을 자꾸 해나가는 거라. 이것들이 지금 살아가는 모순된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지 다른 것들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선은 작은 것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조그만한 선한 것들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조그만한 악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보면 「선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불도를 완성하는 길이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완전한 조언은 선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모순된 길에서 헤매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이번 포인트는
생명은 기본적으로 모순이다.
그러한 모순은 마음의 성장을 방해하게 된다.
지혜 있는 사람들은 모순의 벽을 넘어서는데 그 길은
선한 일들을 작은 것으로부터 자꾸 시작을 한다.
그러한 사람은 서서히 성장해서 해탈로 나아가는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게 오늘의 주제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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