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6~2018 붓다야나선원법문

불리 2559년 웨사카 붓다의 날 (20160520. 대구)

담마마-마까 2022. 2. 20. 09:00

https://youtu.be/q570lau6BIU

* 2016년 웨사카 붓다의 날 (20160520. 대구)

 

오늘은 「웨사카 붓다의 날」에 대한 것을 얘기하겠습니다.

오늘 여기서는 전야제죠? 전야제 때 많이 하는 게 보통 탑돌이를 많이 합니다.

"이띠삐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 삼붓도~~" 하면서 부처님 십대명호 아니면 삼보예찬을 똑같이 합송하면서 탑을 계속 도는 탑돌이 행사들을 보통 많이 합니다.

 

여기 보니까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돼 있던데, 앞으로는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하지 말고, 「붓다의 날」이라고 그렇게 하십시오.

올해가 불기 몇년이죠? (수행자 : 2559년) 2559년. 한국에서는 2560년 그러죠? 그거는 뭘 기준으로 해서 그런 겁니까? (수행자 : 부처님 열반하신 날)

 

1956년도에 그때 전 세계 불교도들이 그해가 불기 2500년이 되도록 결정했습니다. 테라와다 전통에 따라서. 그때 전세계 불교도들이 불기를 통일하게 됩니다. 그때는 우리나라든 일본이든 그전까지는 전부 다르게 불기를 썼었어요.

그렇게 쓰다가 보니까 1956년도에 불기가 통일되게 됩니다. 그냥 테라와다 방식을 그대로 따르게 된 거죠. 그래서 지금은 그 방식대로 그대로 하는데 문제가 뭐냐면, 해만 따라하고 나머지는 안 따라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오신날이라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 입멸한 해를 기준으로 해서 불기를 잡는 것이기 때문에 그럼 어떻게 돼요? 부처님 오신 날이 2559년이 아니고, 더하기 +544를 해버리면 불기가 틀려져 버리죠?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방식에서는 부처님 태어나시고 성도하시고 열반하신 날이 똑같은 날입니다.

 

열반하신 날을 우리나라에서는 2월 보름이라고 하죠? 그게 왜냐면 중국에서 번역하는 분들이, 인도력 2월달입니다. 테라와다에서는 저번 달에 정월을 지냈습니다. 새해가 되는 게 음력 3월 보름이거든. 그러니까 음력 4월 보름은 우리나라 달로 할 거 같으면 2월 보름이 되는 거라. 그런데 그걸 그대로 그냥 번역들을 해버리니까 우리나라의 2월 보름하고는 틀린데 그렇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어쨌든 부처님 열반하신 날도 다르게 하고, 성도하신 날도 다르게 하고 하는 결과는 앞으로는 아마 시정이 안 되겠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쨌든 불기는 통일됐다는 거라.

 

불기는 통일 됐는데 그러면 불기는 언제 한 해가 올라가게 될까?

오늘을 기준으로 해서 한 해가 올라갑니다.

오늘 지나고 나면 2560년이 돼버리게 됩니다. 원칙적으로.

그런데 우리는 서기를 쓰다 보니까 이게 잘 안 맞아요. 올해는 전체가 2559년이고, 내년 1월 1일부터가 2560년 이렇게 되는데, 실제적으로 테라와다 방식에서는 오늘을 기점으로 해가지고 해가 바뀝니다.

(수행자 : 그럼 내일부터 2560년이 되는 겁니까?)

그렇죠. 그렇게 되는데 해가 바뀌는 게 테라와다 방식하고 대승불교 방식하고는 또 다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입멸하고 나서 첫 번째 맞이한 해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부처님 맞이하고 나서 우안거를 지내고 나서 마지막 우안거를 끝낸 날로부터 불기가 바뀐다 하고 기준을 잡습니다.

그렇게 되면 음력 6월 보름에 안거결제 들어가게 되니까, 음력 9월 보름에 해가 바뀌는 것으로 옛날에는 그렇게 기준을 잡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그 기준도 안 써요.

 

그런데 테라와다 방식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부처님 입멸한 날을 기준으로 해서 불기가 바뀌는 것으로 됩니다. 그러니까 그 방식대로 따를 것 같으면 우리나라에도 음력 2월 보름을 입멸일로 돼있을 것 같으면 2월 보름을 기준으로 해서 불기가 바뀌어야 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테라와다 방식에서는 음력 4월 보름날이 부처님 태어나고 성도하고 입멸하신 날이니까, 입멸하신 날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그때부터 불기가 바뀌게끔 됩니다.

 

그래서 음력 4월 보름이 부처님의 세 가지 경사가 겹친 날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태어난 날, 성도한 날, 입멸한 날이 동일한 날입니다.

또 하나가 뭐가 있을까? 경전에 쭉 다 들여다보면 부처님이 고향을 떠났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법을 처음 설한 날이 사월 보름 이라고 돼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들은 4대 경사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어떤 곳이든 부처님 자신으로 봤을 때는 세 가지 경사는 틀림없습니다.

그런 날이기 때문에 그걸 "웨사카 달의 보름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웨사카 보름날 특별한 날인데, 그날은 부처님 태어난 날일 뿐만 아니라 성도하고 열반하신 날이기 때문에 그날을 "부처님의 날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UN에서는 용어를 웨삭데이아니면 붓다의 날그렇게 호칭을 하게 됩니다.

 

자! 그런데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돼있으니까, 부처님 탄생에 대한 것을 한번 얘기해봅시다.

부처님 태어날 때 뭐라고 했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태어나실 때? 그전에 그렇게 7걸음을 걸으면서 얘기하기 전에 무슨 일부터 있었느냐면,

 

"빛이 비추었는데 빛이 비추어지지 않는 곳이 없다." 가려진 곳도 다 비추고, 쉽게 말하면 만약에 해가 비추는데 땅속에는 비출 수가 있습니까? 땅속에는 못 비추죠. 동굴 속에도 못 비추는 거고. 그런데 그 빛이 안 비춰지는 곳이 없이 전체를 다 비췄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우주에 블랙홀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블랙홀은 거기에는 빛이 전혀 미칠 수가 없는 곳입니다. 태양계 뿐만아니라 다른 빛들도 미칠 수가 없는 곳이라는 거라. 그런데 거기까지도 미쳤다는 얘기거든.

 

실제적으로 가능하겠어요? 그래서 그것은 물질적인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부분을 얘기한다고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실제 과학계에서는 블랙홀에 생명체가 살지 않는다고 그러는데 불교에서는 블랙홀에도 생명체가 산다고 그럽니다.

생명체가 사는데 그 생명체는 '움직일 수가 없는 생명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빛이 비추면서 그 블랙홀에 있는 생명체도 놀라움을 표했다 하는 것이 주석서에는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 정도로 빛이 비쳤다는 것은 정신적인 부분에서 뛰어난 분이 탄생하셨다는 걸 예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고 보시면 됩니다. 물질적인 부분은 부처님은 어차피 태어났으면 죽음을 맞는 인간으로 태어난 겁니다. 우리와 별반 차이나는 것이 없습니다. 아픔이 있고, 또 늙어가고, 또 죽음을 맞고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빛이라고 하는 물질적인 것들이 빛을 비쳤다고 하는 것보다는 마음이라고 하는 정신적인 것들이 그렇게 모든 것들에 다 미치는 형태를 띠었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이 청정하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또는 부처님 가르침으로 인해서 행복함을 느끼는 존재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그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됩니다.

지옥에 있는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되고, 아귀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천상에 있는 신들에게도 영향이 미치는 것이고,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고 봐야 됩니다.

그걸 경전에서는 "빛이 그렇게 비췄다" 하고 얘기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러고 나서 "일만 세계가 진동을 했다" 하고 그렇게 나옵니다.

일만 세계가 진동했다고 하는 것도 꼭 마찬가지로 봐야 됩니다. 실제 물질적인 지진이나 진동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 모든 일만 세계에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영향을 미치는 형태들을 띤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이 태어나서 북쪽을 향해서 7걸음을 걸으면서 탄생게송을 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뭘까?

왜 그 탄생게송을 하게 됐을까?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더더구나 이 세상이 완전하게 부수어져서 없어지기 전에는 다시 부처님이 태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미륵불이라든지 미래불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지금 이 세상 하고는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오직 한 분의 부처님만이 탄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깨달음을 이루어가지고 “나는 부처다” 그것은 전부 사기라는 거라. 부처님은 어떠한 경우든지 이 세상에서는 한 분의 부처님뿐이라는 거라. 태양이 두 개가 뜰 수 없듯이 두 분의 부처님이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처님이 태어나고 살아계신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부처님 법이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 그리고 부처님이 남긴 사리가 그대로 아직 존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다음 미륵불이 태어날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조차도 다 잊혀져 버리게 되고, 부처님의 사리조차도 다 사라져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럴 때가 돼야만이 다음 부처님이 태어나는 형태들을 띠기 때문에, 아직은 여러분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부처님의 사리가 존재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부처님이 태어날 수 있는 조건은 못 되는 거라.

 

그런 부처님인데 그 부처님이 우리와 똑같이 윤회를 했지만, 윤회하면서 쌓은 공덕은 우리하고는 굉장한 차이를 가지게 됩니다.

자따까라든지 이런 경전들을 보면 열 가지 바라밀을 완성했던 것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바라밀들 중 과연 우리가 몇개나 지금 따라 하고 있을까? 또 완성할 수 있을까? 보시하라고 할 것 같으면 내가 가진 것들 나눠주는 것은 쉽지만, 내가 가진 것이 어디 물질적인 금전만이겠어? 내가 가진 것은 그것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내 가족들도 있는 거고, 또 내 자신의 생명들도 있는 거고, 그것조차도 필요할 경우에는 아낌없이 보시할 수 있습니까? 없다는 거라.

그런데 경전에는 부처님이 그렇게 했던 것들이 분명하게 나옵니다. 한두 번 그런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그렇게 완성을 하고.

 

결정심을 내더라도 여러분들은 뭘 하든지 아마 결정심은 없이 할 거라.

오늘 스님한테 공양물을 올렸는데, 공양물을 올리고 나서 결정심을 내는 사람들은 그렇게 합니다. ", 이와 같은 공덕을 쌓은 것들은 분명하게 나에게 그 과보가 돌아오는 것이 결정된 것이다" 하고 마음을 먹는 사람들은 없다는 거라. 부처님은 과거생부터 그럴 때마다, 물을 나무에다 따르면서 '내가 오늘 쌓은 공덕들을 지신 네가 증명해라' 하고 딱 결정을 내려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를 때 많은 마군들이 와서 부처님을 훼방할려고 했을 때, 내가 과거생부터 쌓은 공덕들로 이 조그만 물병하나도 움직이지 못한다 하고 얘기하면서, 땅을 이렇게 가리키고, 항마촉지법을 씁니다. 실제로 건들지도 못하는 거라.

 

그런 결정심들을 여러분들은 그냥 흘려버린다는 거라. 뭘 하나 할 것 같으면, 하나 한 것들 선한 것들을 ‘아, 이것은 모든 이들에게 같이 회향한다’ 하는 마음을 낸다든지, 아니면 '이것들은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에게 올 것이다' 하고 결정심을 낸다든지 이런 마음 없이 그냥 올립니다. 그렇게 하니까 올린 것들을 안 먹으면 성질이 나버리고 이렇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이와 같이 바라밀을 쌓는 것에도 우리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부처님이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차이는 굉장히 많이 납니다.

 

태국에서 몇 번 그런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되면 스님들을 초청을 합니다. 사람이 죽고 나서가 아니고 죽을 때 돼서도 스님들을 초청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태어날 때가 되면 스님을 초청합니다. 그러면 가가지고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해도 독경을 하면서 그 모습을 상상을 합니다. 아이가 태어났다 할 것 같으면 독경을 그치고 합니다. 대부분은 보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병원에서 하든 집에서 하든 아이들이 울거든. 그런데 일부 아이들은 울지를 안 해.

울지 않고 태어나자마자 방긋방긋방긋 웃으면서 손을 이리이리 하면서 엄마 손이나 옆에 있는 사람 손을 잡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난리납니다. 아이가 안 우니까. 그럼 스님한테 와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가보면 그 아이는 다른 사람보다 스님 손을 자꾸 잡을려고 하면서 계속 방긋방긋방긋 하면서 우는 것이 아니고 웃어요. 까르륵 까르륵.

 

실제 스님은 그런 모습들을 많이 봤어요. 그때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들이 뭐냐면 “이 아이는 우리보다도 훨씬 더 많은 공덕들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다” 합니다. 실제 그 아이들이 커나가는 것을 보면은 굉장히 훌륭하게 커나가게 됩니다. 출가해서 승려생활을 하더라도 참 짬지게 잘 살아가게 되고.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 같은 공덕을 쌓은 분일 거 같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때 부처님이 한 얘기가 있습니다. 여기에 적어놨죠?

 

Aggo'ham asmi lokassa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다.

Seṭṭho'ham lokassa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하다.

Jeṭṭho'ham asmi lokassa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공경 받는 존재다.

Ayaṁ antimā jāti, na'tthi dāni punabbhavo. 이것이 마지막 탄생이며, 이생 이후 또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경전에서는 이걸 뭘 얘기하고 싶었을까? 뭘 얘기하고 싶어서 이 문장을 부처님이 탄생했을 때 얘기했다 하고 적어놨을까? 실제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입니다. 나중에 부처님이 되고 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인 걸 우리는 아는 것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하다, 가장 공경받는 존재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 생이고 태어남은 없다. 이것은 실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라고 하는 것들은, 여러분이 만약에 '태어난 아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믿고 있을 거 같으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믿었다, 실제로 나중에 부처님은 그 어떤 누구보다도 가장 뛰어난 존재였고,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뛰어나게 법을 설해서 사람들을 인도했고, 부처님 그생이 마지막 탄생이었다는 거라. 그래서 가장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믿음은, 믿은 것들이 올바르다는 사실이 확인이 돼야 됩니다. 그게 첫 번째입니다.

경전에는 그걸 비유를 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천상 신 사천왕이, 그냥 우리 예를 들어봅시다. 누군가가 자동차를 몰고 시냇물을 건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 시냇물은 자동차 바퀴가 지나가면서 흙탕물이 돼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누군가가 “마실게 그 물 좀 떠온나” 할 것 같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뭐라고 그래요? “그거 아주 흙탕물인데 그거 못 먹습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실천을 해왔거든. 그렇게 해왔는데 경전에는 그 사천왕이 그 흙탕물에다가 자기 보배를 딱 넣으니까, 그 물이 싹 정화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특징 중에 하나가 그겁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거라.

'닷사나나' 라고 빨리어 용어로는 얘기합니다. 내가 믿은 것들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는 ‘아, 그것이 진짜였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거라. 그게 믿음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내가 그것들을 ‘설마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그럴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것을 믿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이미 믿음의 단추부터 내가 끼우지 못한 것이라는 거라.

그러면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법을 설한 것, 그건 어떻게 믿을 거라? 그걸 믿을려면 방법이 뭐가 있어요? 그 법대로 실천해서 내가 그렇게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아, 이것은 올바르다 하고 아는 거라. 그럼 여러분들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을 거 같으면 부처님 가르침도 사실은 믿지 못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가르침 따라서 많은 제자들이 부처님 당시 때 부터 80제자들이든 그 이후의 제자들이든 그렇게 해서 아라한이 된 분들이 있다? 여러분이 직접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믿을 거라?

 

그걸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은 믿은 것들은 반드시 올바르게 돼야 됩니다. 올바르다는 거라. 그게 전제 조건입니다. 실제 나중에 ‘아, 그분이 가장 위대한 존재이고 가장 공경받을 만한 존재이고, 그생이 마지막 생이었다’ 알 것 같으면 그러면 우리는 처음부터 ‘아, 부처님 태어날 때 그런 말씀을 하셨구나’ 하고 믿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방법이라는 거라.

가르침을 듣고 ‘아, 내가 조금씩 바뀌어나간다’ 하고 알 것 같으면 ‘아, 나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하는 것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 법은 올바르다’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두 번째는 뭐냐면 믿은 것들은 반드시 차이가 난다는 거라.

차이가 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것은 믿음이 되지 않는다는 거라. 믿으니까 당연히 아, 법을 따라 해보니까 내가 조금씩 바뀌어나가고 차이가 난다는 거라. 내가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거라. 그러면 그 믿은 것들이 ‘아, 내가 참 잘했구나, 올바르구나’ 하고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믿음을 지닌 자는 그 대상을 깨끗하게 안다는 거라.

여러분이 만약에 믿음을 지녔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 ‘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테라와다 스님들은 그 의문을 안 가집니다. 틀림없이 그럴 분이다 라는 거라!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이고, 나보다 훨씬 위대하고 뛰어난 분이기 때문에 말 못할 이유가 뭐 있느냐는 거라. 실제 나중에는 그렇게 되묻고 있는다는 겁니다. 그냥 믿는다는 거라. 그 부분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들은 뭐냐 하면 사실은 이러한 것들은 참 드문 일입니다.

어떻게 세상이 진동을 하고, 빛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미치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는 거라.

경전에는 「전대미문희유경」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났을 때나 성도했을 때나 열반에 이르렀을 때나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아주 희유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일어나는데, 그 경의 끝마디에 뭐라고 돼있느냐면

 

「부처님이 말한 것들은 가능성이 아니고 진리이다. 그리고 결코 잘못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결과를 내지 않는 것이다. 그런 특색이 있다.

이 희유한 현상보다도 부처님이 정신적으로 자유자재하는 것이 더욱 더 훌륭하다.」

아무리 희유한 일들이 많았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이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정신적으로 자유자재한 것보다 더 희유한 일이 어딨느냐는 거라. 그게 부처님이 처음 탄생했을 때의 얘기고,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마음을 두어야 될 부분입니다.

그렇게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또 성도하시고 열반에 들게 됩니다.

 

처음에 스님이 공부할 때 참 가슴이 아팠던 것이 뭐냐면, 열반에 들기 전에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감춰놓은 비밀스러운 것은 없이 모든 것들을 다 설해놓았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것을 배우고 실천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러라.

그것이 내가 여러분들한테 바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우리한테 바라는 것이 뭘까?

첫 번째, 부처님 가르침을 반드시 이해하고 그것을 들을려고 하라.

출가한 스님들한테는 그것을 암송해서 다음 세상에까지 전해야 될 의무가 있다는 거라. 그걸 변함없이, 변경시키지 말고, 첨가하거나 빼거나 하는 것들도 없이, 그대로 이 사실을 전할 의무가 있다는 거라. 부처님이 바라는 첫 번째가 그겁니다.

과연 여러분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르침 그대로 이해해서 받아들이고 있느냐는 거라. 자기식대로 그냥 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거라. 가끔씩 그걸 읽을 때마다 자꾸 돌아보게 됩니다.

부처님이 꼴라당 세 개 소원을 얘기했는데, 그거 하나 내가 못 들어드리고 있느냐는 거라. 부처님은 한 번도 그런 얘기를, 내 소원은 너희들한테 바라는 것은 이거다 하고 얘기한 적이 없는데, 딱 마지막에 열반하기 직전에 한 얘기가 그겁니다.

내 가르침을 그대로 너희들이 이해하고 알고 그것을 실천하라는 거라.

 

두 번째, 그런 가르침을 무슨 목적으로 사용하라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그리고 보다 더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다 보니까 이렇게 좋구나 하고 더 큰 행복을 자꾸 얻을려고 노력을 하라는 거라. 내가 바라는 것은 그거라는 거라. 과연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들으면서 얼마만큼 행복해하고 있느냐는 거라. 다른 어떤 거보다도 더 행복할 수가 있느냐는 거라. 그걸 또 따르고 있으면서 그런 행복을 우리가 누리고 있느냐는 거라.

 

세 번째가 그 목적은 해탈에 이르러야 되는 것이라는 거라.

해탈에 이르는 사람이 나와야 되는 것이지, 그래야 부처님 가르침이 완성되는 것이지, 닙바나에 이르지 않고 해탈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절반의 성공밖엔 안 된다는 거라.

 

부처님이 바라는 것은 그 세 가지라는 거라.

부처님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그걸 따라서 내가 더 멀리까지 말고 지금 현재 내가 더 좋고 더 행복해져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내가 부처님이 도달했다는 닙바나, 그 해탈에 이르러서 어떤 번뇌로부터도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나는 스승의 손아귀에 감추어둔 비밀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렇게 되기 위한 모든 것들을 다 아낌없이 공평하게 다 설해놨다는 거라.

과연 우리는 부처님의 소원 3가지 중에 우리는 몇가지나 들어주고 있느냐는 거라.

 

붓다의 날은 그런 날입니다. 부처님이 원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우리가 실천해나가는 것들, 부처님이 태어나고 성도하고 열반하는 것들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리고 부처님한테 꽃을 올리고, 향을 올리고, 청정수도 올리고 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그것들은 시들게 돼있고 또 타 없어지게 돼있습니다.

그걸 보면서 우리는 ‘아, 나도 저와 같이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되돌아보면서, 부처님이 원했던 것들을 따라갈려고 자꾸 노력해야 됩니다.

 

연등 제등행렬을 하는 것이든 아니면, 등을 다는 것이든, 아니면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든, 아니면 양로원에 가서 보시를 하는 것이든, 오히려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 것들에만 치우치다 보면 형식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붓다의 날, 그래서 이 웨사카를 그래서 축제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것들을 돌아보고, 흥청망청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고 마음에 내가 이런 기쁨을 누릴 수가 있다는 거라. 아, 그래도 내가 부처님 가르침대로 잘 따르고 있다는 것을 돌아보면서 ‘아, 내가 참 잘했구나’ 하고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거라. 그래서 더욱더 노력할려고 하게 되는 거라.

그게 「웨사카 붓다의 날」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모든 것들을 이기는 자, 또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서 청정하게 믿음을 지니는 자, 또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서 해탈에 이르는 자가 되기 위해서 더욱 더 노력을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