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테라와다불교사-3 (제 2차 결집) (20160618.서울)

담마마-마까 2022. 5. 28. 09:00

https://youtu.be/eg0lzX2Tm44?si=p_rsfgTzRobIrnkb

 

* 테라와다불교사-3 (제2차 결집) (20160618. 서울법회)

 

오전에는 테라와다 불교사 하고 있으니까 지금 제2차 결집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후에는 칠각지 부분을 할 겁니다. 자, 봅시다.

 

제2차 불교 결집

(1) 비계율적 10가지 문제점

 

2차 결집이 진행된 것은 소소하게는 스님이 설명을 안 할게요.

대충 보면 그렇습니다. 스님들은 안거 때를 제외하고는 보통 만행(萬行을) 갑니다. 짜리따(carita) 기간이라 해서 두타행을 하는 기간입니다. 그때는 어디든지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세 가지 계절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주하는 계절이 있고, 하나는 우기 계절이 있고, 하나는 만행을 다니는 계절이 있고, 이렇게 세 계절이 있게 돼있습니다.

 

보통 보면 정주하는 계절은 안거 들어가기 전에 가 정주하는 계절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안거 들어가는 3개월 동안 우기 계절이 있고, 우기 계절이 끝나고 나면 만행을 다니는 짜리따라고 하는 계절이 있습니다.

보통 그게 짧게는 3개월, 길게는 5개월까지 그렇게 갑니다. 그 기간 동안에는 법이 필요한 곳에는 어디든지 가서 법을 설하고, 또 본인이 생각하기에 거기에는 법을 전할 필요성이 있다 싶은 곳에 법을 전하게 됩니다. 사실은 이 짜리따 기간에 많은 곳에서 불교들이 퍼져나가기도 합니다. 인도로 봤을 때.

 

부처님이 입멸하시고 나서 많은 스님들이 다른 지역으로 가서 포교를 합니다. 이미 부처님이 계셨던, 지금 여러분들이 보통 인도에 가면 부처님의 4대 성지 아니면 8대 성지라고 하는 곳은 부처님이 있을 때 부처님이 대부분 다닌 곳이기 때문에 불교를 다들 알고 있고 불교를 믿고 있는 지역들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입멸 후에는 그 외의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됩니다.

그 지역이 보통 어디냐면, 지금 인도의 4대 성지의 서쪽 그리고 서북쪽 그다음에 서남쪽이 됩니다. 데칸고원이 인도의 거의 마지막 쪽인데, 데칸고원까지는 완전히 넘어가지를 않고, 데칸고원 이쪽으로 해서 지금의 델리 지역 그다음에 마투라 지역, 그 외에 또 파키스탄 지역 그쪽으로 진출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법을 설했던 지역은 지금 인도의 거의 동쪽 부분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서쪽 지역으로 진출을 많이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깟짜야나 존자가 대표적으로 마투라 지역이나 이런 데 가서 포교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입멸 후에 한 100년 정도가 될 때가 되면 불교의 중심이 지금의 불교의 4대 성지 지역에서 대부분이 보면 서쪽으로 넘어가 있는 상태가 됩니다.

지금 미얀마도 그렇다는 얘기를 하는데, 미얀마의 큰 스님들이 전부 서방으로 다 나가서 지금 포교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이름있는 스님들이 미얀마에는 많이 없다 하는 그런 얘기들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뭐 다른 지역보다는 낫겠지. 없기야 하겠어?

 

어쨌든 부처님 입멸 후에도 꼭 마찬가집니다. 깨달음을 이루고 나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심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려고 불교를 부처님 가르침을 자꾸 전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런 지역으로 가서 법을 전하게 되는데, 인도의 그때 당시 상황은 뭐냐면 지금 부처님이 법을 설했던 성지 부근에는 전부 상업도시로 다 변해져 있습니다. 도시화가 돼있는 거죠.

나머지 지금 전도 나가고 포교 나가고 하는 서쪽 지역은 거의 시골 지방이라. 그러니까 전도 나가는 게 굉장히 힘이 들죠? 힘이 드는 실정입니다.

그런데도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상업지역으로 바뀌다 보니까 그 속에서 편하게 부처님 가르침으로 인해서 정주하고 불교가 이미 널리 퍼져있는 곳에서 지내다 보니까 출가한 스님들이 게으름을 피우기 쉬워집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게으름 피우면 최고 먼저 나타나는 게 뭐가 먼저 나타나겠어요? 계율을 안 지킬려고 그럽니다. 가만히 있어도 탁발이 들어오고 가만히 있어도 대접을 해주는데 뭐 굳이 뭐하러 노력을 할려고 할 거라. 그러다 보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변형시킬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특히 율장 같은 경우는 두 가지 형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부처님이 처음부터 법을 "이거는 율에 어긋난다 이거는 하지마라" 하고 한 번 정해놨다 해가지고 그것이 고정화 되는 게 아니고, 또 변경사항이 있으면 거기다가 첨가를 해가지고 그 부분을 변경을 합니다.

 

비구 계가 227계입니다. 한 율에 227계 중에 하나에 보통은 보면 많게는 한 열 번 정도 변형이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한 번도 변형이 안 된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근데 대부분은 보면 한두 번씩은 변형들을 다 가져오게 돼 있습니다. 율장에는 그 변형된 역사를 쭉 기록을 해 놓았거든. "누구로 인해서 이렇게 변경됐다" 해가지고 변경된 것이 마지막에 쓰여지게 돼 있습니다. 그게 율의 기본적인 겁니다.

부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 해가지고 한번 정해놓은 것이 끝까지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변경된 것으로서 나중에 고착화되는 경우가 됩니다. 그게 율의 대표적인 특성입니다.

 

그걸 뭐라고 하냐면 정법(淨法, kappa)이라고 얘기합니다. '깝빠 담마(kappa dhamma)'라고 빨리어로 얘기하는데, 쉽게 말하면 이렇게 규정된 것이라고 해도 요 정도의 융통성을 가질 것 같으면 그 율에는 저촉이 되지 않는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에서 크게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율 자체를 변경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는 그런 의미들입니다. 부처님 자신이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다음에 율의 두 번째 특징이 뭐가 있느냐면, 한 번 정해진 건 어떠한 경우든지 바꿀 수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거는 뭐를 얘기하냐면 부처님 입멸 후에는 어떠한 것도 사소한 것도 변경이 안 됩니다. 부처님이 있을 때는 조금 불편하고 불합리한 것들은 부처님 자신이 바꾸어나갔다고. 바꾸어나갔는데, 부처님 입멸 후에는 1차 결집 때도 그 얘기를 했죠? 소소계(小小戒)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아난다 존자한테 부처님이 소소계-소소한 계율들은 바꾸어도 된다고 했는데, 뭘 바꾸어도 된다고 했냐? 그 항목이 뭐냐? 하니까 아난다가 그 얘기를 못 들었거든. 그래서 아난다에게 질책을 합니다. 그걸 거죄갈마(擧罪羯磨)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니 죄는 니가 알렸다!" 그건 그 얘깁니다. 그 얘기를 물어봐야 우리가 바꿀 수 있지, 지금 부처님이 입멸하고 나서 어떻게 뭘 바꿔라는 건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바꿀거냐는 거라. 그 책임을 아난다는 못했기 때문에 그 죄를 너는 대중들한테 참회해라. 그런 뜻입니다. 그걸 거죄갈마라고 그럽니다.

 

아난다는 사실은 크게 잘못한 건 없지. 부처님한테 단지 그 소소계가 뭐냐 하고 항목을 안 물어본 것뿐인데, 그리해도 그건 나중에 문제가 되기 때문에 스님들이 그걸 지적을 합니다. 안 물어본 것은 잘못된 것이니까 죄를 참회해라 해가지고 아난다가 대중들한테 죄를 참회합니다.

그런 게 거죄갈마인데, 그런 소소계들은 부처님이 바꿔도 된다고 했는데, 사실은 나중에 마하깟사빠 존자가 그 항목이 어떤 건지를 대중들한테 토론에 부쳤어요. 그리하니까 각각 다 틀릴 거 아니라. 어떤 게 소소계인지. 지금도 아마 학자들한테 소소계가 뭔지를 물어볼 것 같으면 다 틀릴 겁니다.

 

지금 만약에 비구들의 227계가 있다, 그것은 크게 여덟 가지 항목으로 나뉘어지거든. 4가지 바라이죄부터, 13가지 승잔죄, 2가지 부정법(不定法) 이렇게 8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대부분 바라이죄는 바꿀 수가 없으니까 변경할 수 없는 거라고 치고, 13가지 승잔죄 이것도 바꿀 수 없는 거라고 치고, 그러고 나서는 세키야담마(sekhiya dhamma 중학법) 이런 것들에 들어가면 좀 변경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특히 중학법(衆學法)이라고 하는 항목은 그게 75가지인데 그거는 스님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소소한 것들을 얘기합니다. 스님들은 옷은 이렇게 입어야 된다, 밖에 나갈 때는 옷을 몸에 감싸가지고 몸이 보이지 않도록 입어야 된다. 밥을 먹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된다 하는 이런 소소한 것들을 얘기해 놓은 것들입니다.

 

비구 227계를 뜯어보면 8가지 항목 중에 7가지 항목은 "이 계는 몇개다" 하고 분명하게 딱 정해놨습니다.

4가지 바라이죄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하고나서 바라이죄 4가지를 쭉 얘기하고, 4가지 바라이죄를 마쳤습니다.

13가지 승잔죄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하고나서 13가지 승잔죄를 말하고, 13가지 승잔죄를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했는데, 중학법-세키야담마라고 하는 75가지에는 그 항목을 안 해놨어요.

 

그러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그 중학법, 소소한 스님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것들 그것들은 부처님이 소소한 거는 변경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변경해도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지금 빨리어에서 나온 계율 비구 계율 말고, 사분율 오분율 십송율 하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마하승기율 까지 보통 한 다섯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종류는 항목이 다 틀리는데 어떤 부분이 틀리느냐면 이 중학법이 대부분 틀립니다.

 

사분율 같은 경우는 중학법에 탑에 대한 예경이 있는데, 부처님이 절대 출가한 스님들은 탑에 대한 예경은 하지 말아라 했는데 탑에 대한 예경들이 이십몇 가지 더 첨가되기도 하고, 또 스님들 세세한 규정을 갖다가 또 좀 더 변경시키고 또 빼고 첨가하고 한 것들이 많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거의 동일합니다.

그렇게 대승불교의 계율이든, 테라와다의 계율이든, 스님들의 계율은 사실 앞에 것은 거의 다 동일하다고 봐야 됩니다.

 

그러면 소소계는 중학법이라고 봐야 될 것 같은데, 꼭 중학법이라고도 얘기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면 앞에 있는 부분에서도 바꾸고 싶은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오늘은 스님이 서울에 온다고 KTX 타고 와가지고 서울역에서 우리 라자왕사님의 차를 타고 왔단 말이라. 예를 들어서 평상시 때는 지나님 차가 중형차거든. SM5인가 그걸 이때까지 이용을 했는데, 오늘은 벤츠를 타고 왔거든. 라자왕사님의 차가 벤츠니까. 근데 벤츠를 탈 때 뒤통수가 좀 따가웠어. 일반인들이 보기에 중이 벤츠를 타고 다닌다 그렇게 할 거 아니라. 어떤 경우는 신심이 있는 사람들은 '큰스님 오시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할 거라. 사람마다 차이가 나긴 나는데.

 

사회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이건 분명히 뭔가 정해야 될 필요가 있거든. 이거는 중학법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라. 그러면 이런 것들도 사실은 현대사회에서 볼 거 같으면 변경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스님들은 어느 차급 이상은 타서는 안된다 하고 딱 규정을 두어야 되는 거라. 외제차는 안 된다, 아니면 2000cc급 이상은 안 된다, 하고 규정을 탁 두어버리고 날 거 같으면 문제는 간단해져 버리는 거라.

 

왜 그러냐면 그게 계율에 항목이 있거든, 스님들은 탈 것을 타지 마라.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자가용이죠? 자가용을 끌고 다니지 마라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옛날에 그 규정대로 할 것 같으면 스님들은 자가용 타고 다니면 안 돼. 대중교통 다 이용해야 되지. 근데 그거는 계율 항목에 딱 매여 있는 경우고. 그 계율이 왜 제정됐느냐면 옛날에는 그게 우마차거든. 우마차를 타고 했는데, 옛날에는 우마차라는 게 귀족이나 왕족들이 타고 다녔던 것이지 일반인들이 타고 다녔던 것이 아니었거든. 근데 스님들이 거기 앉아가지고 막 두리번거려 가면서 다니는 꼴을 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저 스님이 어디를 가는데 꼭 놀러 가는 것처럼 보여지거든.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이 그래서 되느냐 해가지고, 그래서 우마차 탈 것들을 이용하지 말아라 하는 계율이 생겨났는데, 그 계율 항목에 딱 매이다 보면 자가용을 이용하면 안 되게 돼 있는데, 그런데 그 계율을 만든 정신을 생각을 해보면 분명하게 정할 필요성은 있다는 거라. 2000cc 이상은 안 된다든지 이런 식으로 정할 필요성은 틀림없이 있다는 거라. 그런 것들도 어떻게 보면 소소한 계율에 속할 수가 있다는 거라.

 

중학법에 속하지 않더라도 그런 것들은 틀림없이 있는데, 어떤 것들을 과연 소소한 계율로 잡아가지고 그것을 없앨 수가 있느냐 해가지고, 「어떠한 경우든지 이것은 변경불가다」 해가지고 딱 못을 박아둡니다. 1차 결집 때. 그래서 어떤 경우도 이것은 변경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이후에 사회적인 변화가 있다가 보니까 틀림없이 변경할 필요성은 있는데 변경하지 못하니까 답답한 거야. 특히 도시화되어 있는 곳에서 머무는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문제들이 많이 생겨난다는 거라.

그래서 대표적인 것이 지금 적어놓은 10가지 입니다.

실제적으로 뜯어보면 10가지는 크게 문제 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을 그대로 한다 해가지고 계율에 위반되지 않는다고도 얘기를 못하는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이게 문제가 됐던 것들은 서쪽 지방으로 가서 포교를 전담했던 분들은 대부분은 보면 아라한들이나 아니면 어느 정도의 성자의 지위에 있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지금도 출가한 스님들은 5년 이내에 스승의 밑을 떠나지 못하고 적어도 10년간은 그 계, 그 지역 내에 머물도록 규정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10년 정도 지나고 나면 어느 정도 법을 설할 자격들도 얻게 되고, 또 수행들도 무르익고 해가지고 나가서 법을 설하더라도 크게 문제는 없습니다.

 

근데 만약에 여기 서울 도심에 그런 10년 이상 된 스님이 없다? 그럼 누가 법을 설해야 돼? 10년이 안 된 스님이라도 법을 설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라고 하는 것은 법을 들을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마만큼 많습니다. 그러니까 스님들의 생활도 풍부해질 뿐아니라 법을 들을려고 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그 법을 자칫 잘못하면 오해해서 설할 수도 있다는 거라.

"죽이지 마라" 했는데 “괜찮아 그거 죽여도 괜찮아” 이렇게 설해버리면 이건 낭패가 돼버리는 거라. 그 현상이 웨살리라고 하는 지역에서 똑같이 진행되었던 겁니다. 한 10년 정도 지나고 나서.

대표적인 것이 어떤 것이 있냐면, 부처님 당시 때는 출가한 스님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돈을 안 받았었습니다. 뱃삯도 안 받고 그렇게 했는데, 부처님이 입멸하고 나서는 돈을 받거든. 그러니 어디 가더라도 요즘말로 할 것 같으면 시내버스비가 있어야 되는 거라.

 

그런데 출가한 스님들은 돈을 소지를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돼? 나이 많이 든 장로급 스님들은 시자를 데리고 가면 그만이라 하지만 어린 스님들은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그럼 차 못타고 내내 걸어다녀야 되는 거라? 도시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일을 못 봅니다. 어쩔 수 없이 돈이 필요하단 말이라. 그런데 계율에는 돈을 가지지 마라 그랬으니까 그럼 어떻게 편법을 쓸 거라? 어떻게 쓰면 될까?

 

그게 만들어진 게 뭐냐면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경전에는 큰 물이 담긴 항아리에 다가 동전-금전을 놓도록 합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물에 돈이 씻겨져 내려가서 정화됐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들이 그걸 나누어서 가져가 가지고 필요할 때 교통비로 쓴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 계율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 거라.

쉽게 말하면 요즘 같으면 여기도 아마 그게 있을 걸. 불전함이라고 있을 겁니다. 불전함이라고 저렇게 놔놓고 저기에 돈이 들어왔단 말이라. 들어왔으면 그걸 스님들한테 각자 나누어 주는 거라. 만약에 10원이 들어왔으면 10명의 스님들이면 1원씩 나눠줘가지고 그 1원 가지고 교통비로 쓴다든지 이렇게 하도록 한 거라.

 

근데 서역 쪽에 도시화가 안 된 곳에서 포교하고 있는 스님들이 그걸 봤을 때는 아, 이건 문제가 있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은 금전을 소지하지 마라 했는데 이거는 지금 소지하고 있는데, 문제가 뭐냐면 유행을 다니다가 그 지역에 탁 갔는데 그 스님한테도 그걸 나누어주거든. 그러면 이 스님은 이걸 받아야 돼, 말아야 돼? 그 스님은 당장 필요하지 않아. 유행다니기 때문에 어디 정해진 데가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걸어다니면 되는데, 근데 그걸 안 받을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규정상, 상가의 규정상.

 

만약에 예를 들어서 어떤 신도가 “스님, 오늘 우리가 무슨 축하할 일이 있어서 스님 다섯 분 초청해가지고 공양 올리겠습니다. 스님 다섯 분 보내주십시요.” 이렇게 요청했다, 그럼 절에는 스님들 순번을 정해놓습니다. 그럼 저번까지 5번까지 나갔다 할 것 같으면 이번엔 6번부터 10번까지 든 스님들은 나가야 돼. 그런데 만약에 내가 7번인데 나는 나가기 싫단 말이라. 그러면 내가 안 나가면 11번 스님이 나가면 그만이겠지 생각하기 쉬운데 절대 안 그렇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이 항목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아파가지고 못 나갈 상황이다 할 것 같으면 그 스님을 빼고 4분 스님이 가는 한이 있더라도 11번이 끼워질 수는 없는 거라. 그게 불교의 규정이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 대신에 아파 있는 스님이 그 아픈 것으로 인해서 못 나왔다는 것을 분명하게 얘기하고 그러면 우리는 다섯 분 스님이 온 거 하고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상가의 규정입니다.

 

상가 스님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여기에 무슨 회의가 있다 그러면 여기 절에 머무는 스님들은 전부 다 나와야 돼. 아프다 해가지고 못 나오는 경우는 없어. 아플 경우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가띠(saṅghāti 대가사)라도 줘가지고 대신하게끔 하게 됩니다. 그게 상가의 모든 일들은 전원일치제 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돈을 나눠주는데 이 돈을 안 받을 수도 없다고.

그런데 이 야사 스님은 “나 안 받아. 스님들은 돈을 못 만지게 돼 있는데 왜 주느냐?” 하면서 탁 가니까, 그 상가에서는 그 스님더러 뭐라 하겠어? 상가의 규정을 어긴 것이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뭘 명하느냐면 하의갈마(下意羯磨)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스님들 갈마법도 굉장히 다양하게 많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공양을 올리는 것이 만약에 도둑질해가지고 공양을 올린 것이다, 내가 그것을 모를 경우에는 문제가 없는데, 내가 그걸 알았다고 할 것 같으면 도둑질한 것을 내가 받을 수는 없거든. 그럴 때는 바리때를 탁 엎어버립니다.

“나는 니 공양 안 받아” 바리때를 엎어버린다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공양 공덕을 짓고 싶어도 공덕을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되도록 만들어버린다는 거라.

 

그 대표적인 것이 미얀마 같은 경우에는 군정이 한참 지배해가지고 막 스님들 죽이고 이렇게 할 때 그때 상가에서 결의한 게 "복발갈마를 행하라. 군인들이 주는 것은 어떠한 것도 받지 마라." 해가지고 한동안 한 적이 있어요. 그러고 나서는 나중에 무마된 적이 있는데 그게 복발갈마 입니다.

출가한 스님이 재가자에게 내리는 가장 가혹한 벌은 복발갈마라고 합니다. 공덕이 아예 생기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거라.

 

그다음에 출가한 스님이 가장 안 좋게 생각하는 것이 뭐냐면 지금 얘기한 하의갈마. 재가자들은 공덕을 지으려고 막 하는데도 이 스님이 그걸 공덕이 생기지 않도록 안 받아버릴 경우에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돼? 누구한테 잘못이 있어요? 출가한 스님한테 잘못이 있거든. 그러면 출가한 스님은 반드시 재가자한테 가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빌어야 되는 거라. 그걸 하의갈마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스님들은 그게 문제가 없는 경우에는 공덕을 짓겠다고 하는데 그 공덕을 짓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데, 결과적으로 이 야사 스님은 그 돈을 안 받은 거니까 공덕 짓는 것을 막아버리는 형태가 되니까, 상가에서 야사 스님한테 “너 가서 하의갈마 해” 그럽니다.

그러니까 명령은 아무리 야사 스님이 거기서 최고 법납이 높은 스님이었는데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상가에서 결정되면 그건 따라야 됩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가서 하의갈마 해야지” 하면서 하의갈마 하러 가는데, 누구 하나 대동시켜 달라 해가지고 하나를 대동하고 나와서 하의갈마를 하러 갑니다.

 

하의갈마 할 때는 내가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알 거라? “잘못했습니다” 하는 걸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하는 스님이 반드시 하나 따라가야 돼. 하나 따라갔거든. 그래서 인제는 야사 스님이 가가지고 “여러분들이 돈을 내가지고 공덕 쌓을려고 하는 걸 내가 안 받았으니 공덕을 짓지 못하게 한 걸 잘못했습니다” 하고 용서를 빌 줄 알았는데,

야사 스님이 가서 한 말은 뭐냐면 "나는 비법을 비법이라고 말하고, 정법을 정법이라고 말한다. 비법을 정법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법을 비법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고 탁 얘기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재가자들이 이상한 거야. 잘못을 빌러 온 스님이 “나는 바른 것만 행하지 바르지 않는 것은 안 따른다” 하고 얘기를 하니까, 재가자들이 좀 이상하게 생각한 거라.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이 있는가 해가지고 다른 스님들한테 물어보니까, 왜 많은 스님들 중에 돈을 받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스님이 없겠어? 그런 스님들이 “이건 사실은 율에 어긋나는 건데 우리가 지금 돈이 필요하니까 편법으로 이렇게 한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재가자들이 그 뒤부터는 돈을 줄라고 안 하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이 승가 집단에서는 난리가 난 거라. 야사 스님으로 인해서 자기들 경제적인 부분이 끊어지게 되는 상황이 되는 거라. 그래서 문제가 된 것이 "그러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게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한번 판결을 해보자. 스님들 모아 놔놓고" 이렇게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래가지고 스님들을 모으게 됩니다.

 

스님들이 뭔가를 판결하는 방법은 참 많습니다.

그걸 딱 나눠가지고 얘기를 하자면 어떤 거냐면,

잘못했으면 잘못을 인정해버리는 경우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방법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뭐냐면 이건 괜히 긁어가지고 부스럼된다 할 거 같으면 그냥 우리 그냥 이거 덮어버리자 해가지고 덮어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뭐가 있느냐면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그러니까 분쟁이 붙으면 결론이 안 납니다. 결론이 안 나면 어떻게 해야 되요? 다수결로써 그걸 결정을 하게 됩니다. 결정을 하고 나면 어떤 경우든지 그 결정을 따라야 되는데, 다수결의 원칙이 일반재가자들의 다수결의 원칙하고는 다릅니다.

불교에서 다수결의 원칙은 뭐냐면 만약에 요쪽에서 A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쪽에서는 B라고 주장하고 있다, 요거 다 사람들이 토론이 붙으면 아마 난장판이 될 거라.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면 요쪽에 A라고 주장하는 쪽에서 그럼 우리는 똑똑한 사람 4명을 지명할게, 너희도 4명을 지명해라. 그러면 A하고 B에서 4명씩 지명해가지고 그럼 8명이잖아. 그럼 사회자 하나 정해가지고 9명이 토론을 하게 됩니다. 결론이 날 때까지. 그게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그렇게 해도 결론이 안 날 것 같으면 이건 덮어버려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보면 그렇게 해가지고 결론이 납니다.

 

보통 어느 나라든지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상가회의가 존재하는 이유가 뭐냐면 그런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들을 관장하고 조정하는 역할이 태국 같은 경우에는 "마하테라사마콤" 이라 해가지고 "대장로회의"가 있습니다.

대장로회의에서 그렇게 결정을 하게 됩니다. 문제가 있는 부분, 그리고 어떤 사회적인 큰 문제가 있을 때, 방향을 결정해야 될 때는 상가에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다른 스님들이 다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는 방법이 그게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결론이 났다, 그러면 A하고 B하고 주장한 것 중에서 만약에 여기가 B가 사람이 적은데도 B가 옳다고 정해질 것 같으면 이게 다수결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그렇게 결론이 난 것은 A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무조건 그 B를 다 따라야되는 거라. 다수결로써 결정이 된 거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을 하도록 한 겁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하니까 조금 율을 완화할려고 하는 쪽에서 4명을 정하고, 또 율을 완고하게 지키려고 하는 쪽에서 4명을 정하고, 사회자까지 해서 9명이 결론을 냈는데, 10가지 문제에 대해서 전부 다 비법이다 하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걸 십사비법(十事非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지금 꼬삼비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이 10가지는 전부 법에 어긋난다」 하고 결론을 탁 내리게 됩니다.

 

근데 그럼 그걸 다 따라야 되잖아. 근데 만약에 난 안 따르겠다 그럴 것 같으면 어떻게 할 거라? 어떻게 할 거 같아요?

만약에 이쪽으로 결정이 났다, 그럼 이쪽 사람들은 우리는 수도 많은데 나는 그거 못따르겠다, 그럴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 그럼 이 그룹들은 상가라고 할 것 같으면 상가의 일원이 아니게 되는 거라? 그렇지는 않습니다.

 

빨리어 율장에서는 그것에 대해서 결론을 안 내놨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분율이나 북전에서 열린 것들은 이러한 경우는 이것은 승잔죄에 해당이 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승잔죄에 해당이 될 거 같으면 승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그 무리들은 반드시 마낫따하고 압바나를 행해야 된다 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승잔죄를 저지른 일수만큼 별중 생활을 하면서 참회하는 기간들을 가집니다.

그걸 압바나(Abbhān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참회하는 것.

그다음에 마낫따(Manatta)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무조건 승잔죄를 저질렀으면 일주일간 근신 생활을 해야 돼. 그러니까 일주일에다가 그 죄를 저지른 일수만큼을 더한 것을 참회하는 별중 생활을 해야 된다는 얘기라.

 

그럼 그 별중 생활을 할 때는 뭐가 되느냐면 승려는 승려인데 승려의 권한을 전부 박탈해버립니다. 법을 설할 수도 없고, 누가 자기 밑에 제자가 될려해도 제자를 받을 수도 없고, 하여튼 승려의 직분은 유지를 하고 있는데, 모든 권한을 전부 박탈을 해버립니다. 그러니까 포살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러면 쉽게 말하면 그 승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무리는 실제로는 빈 껍데기인 승가의 무리가 돼버립니다.

그러면 이 무리가 계속돼서 만약에 제자를 거두고 해가지고 하나의 파로서 형성됐다고 할 것 같으면 이걸 인정해야 돼, 말아야 돼? 승려의 직분이 정지된 상태에서는 그것들을 하는 것은 당연히 부정돼버리게 됩니다.

 

사실은 참 미묘한 부분이기는 한데, 그래서 나중에 2차 결집이 있고나서 분파가 되게 됩니다. 당장 십사논쟁이 있고 나서 십사비법(十事非法)이다 하고 결론되고 나서, 바로 분파가 있은 것은 아닙니다.

그로부터 50년 아니면 60년 후에 됩니다. 분파가 있는 거는 뭐냐면 결정된 건 따르긴 따랐는데 따르다 보니까 계속 불편하거든. 그게 걸리는 거라.

 

예를 들어서 이 십사논쟁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만약에 「오후에 우유 마시지 마라」 이렇게 됐는데, 요즘 여러분들도 아마 출가한 스님한테 오후에 우유 갖다 주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마시는 거니까 그거는 당연히 괜찮겠다 하는 거라. 근데 율장의 규정에는 뭐라고 돼있느냐면 우유는 마시는 종류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종류에 속하거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유제품들 우유, 치즈, 버터 이런 종류들은 전부 음식의 종류에 속하기 때문에,

 

그거는 만약에 내가 몸이 많이 아파가지고 그럴 때는 약으로써 진형수약이라고 해서 7일간은 약으로써 그거는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근데 아프지 않을 경우에는 그거는 먹으면 계율위반이 되거든. 그런데 만날 먹는 것들이 우유 이런 것들이 들어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안 먹을 수가 없어.

또 어떤 경우에는 큰 절 같은 경우에는 공양을 올리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근데 대부분 출가한 스님들이 밥 먹는 게 동일합니다.

12시에는 끝내야 되기 때문에 그거는 거의 동일하단 말이라. 대부분 12시 전에 끝났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로 내가 공양을 받았단 말이라. 그럼 공양받은 것은 어떤 경우든지 한 조각이라도 그걸 스님이 먹어줘야 돼. 그래야 공덕이 되는데, 만약에 안 먹어버릴 것 같으면 그것은 공덕이 발생을 안 하게 되거든.

 

출가한 스님들은 밥을 다 먹고 나서 일어나버릴 것 같으면 그 공양이 끝난 것으로 인정이 돼버립니다. 내가 밥을 다 먹고 나서 일어나고 나서는 그 이후에는 공양을 못해.

근데 12시 전이라고 하더라도 다 먹었다 하고 일어났는데, 누군가가 후다닥 와가지고 “스님, 늦게 왔습니다. 공양 올립니다” 할 것 같으면 안 받을 수는 없거든. 받기는 받았는데 이거는 출가한 스님이 누군가가 먹어줘야 되는 거라. 어떻게 해야 돼?

 

도시에 있으면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생깁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허용하게 해달라고 하는 거라. 그럴 경우에는 다른 스님이 누군가가 먹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12시가 다 되어가는데 그럼 열두 시 시간을 맞출 수가 없으니까 조금만 더 시간을 여유를 달라 이거라. 경전에는 "손가락 두 마디"라고 그렇게 나와 있는데,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조금 더 여유를 달라"

 

태국 같은 경우에는 어떤 일까지 생겼느냐면 자기 사원 내에서 먹을 때는 12시 전에 끝내라. 그런데 사원 밖에 나가서 만행을 다니고 할 때, 아니면 어디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할 때는 12시 전에 시작을 하면 된다. 이렇게까지 생겨났었어요. 그러니까 12시 전에 시작을 해가지고 12시 조금 넘어도 그것은 허용을 한다는 건데, 사실은 그건 허용을 하면 안 되는 거죠.

 

예를 들어서 내가 여기서 태국으로 간다, 그럼 여기 점심 때 비행기를 탔는데, 그래서 내가 한국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을 했단 말이라. 그래서 태국을 갔는데 예를 들면은 시차 때문에 태국에 도착한 시간이 12시가 되기 전이다, 그럼 거기서 공양을 다시 할 수 있는 거라? 12시 전이니까? 그런데 태국에서 생활해야 되는데, 그러면은 예를 들면 거기서 그 공양을 안 먹을 거 같으면 그날 하루는 태국에서는 굶어야 되는 실정이라.

쉽게 말하면 그런 것들을 편의를 봐달라는 거라.

그런데 규정상 안 되는 거라. 여기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버릴 것 같으면 그날은 시차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그날은 이미 자신이 먹은 것들을 "나는 이제 다 먹었습니다" 하고 결정한 것이 돼버리기 때문에, 그 뒤에는 다시 먹을 수가 없게 돼버린다는 겁니다. 참 사소한 것들입니다. 도시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근데 결정된 걸 따르기는 따라야 되는데, 사실은 못 따라 할 것들이 참 많이 생겨나 버리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나중에는 하다하다 안 되면 나는 인제 도저히 못 하겠다, 나는 그거 못 따르겠다, 하고 생각하고 자신의 그룹들이 따로 결집을 해가지고, 요거는 허용하자 하고 결집을 하는 수밖에는 없어. 다른 도리가 없는데.

 

왜 그러냐면 어떠한 경우든지 그걸 변경하고자 할 때는 상가의 결정이 되지 않으면 그걸 변경할 방법이 없습니다. 후대에도 꼭 마찬가집니다.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는 부처님이 다 알아서 해줬지만, 그리고 부처님을 따르는 상가들이 있어가지고 거기서 다 결정이 됐지만, 그 이후에는 그럼 어떻게 할 거라? 이런 소소한 것들을 변경을 해야 될 때는?

 

예를 들어서 부처님 이후에 경전들이 막 생겨났단 말이라. 그럼 이걸 경전의 무리에다가 넣어야 되는 거야, 넣지 말아야 되는 거야? 쉽게 말하면 불설이냐, 비불설이냐? 어떻게 결정할 거라? 그거는 결집을 통해서만 가능한 거라.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여섯 번의 결집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가 모든 스님들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스님들이 동의를 해야만이 그게 가능한 것이지, 한 무리가 "요거는 부처님 말씀이다" 한다 해가지고 그것이 부처님 말씀으로 될 방법은 없는 거라.

 

그래서 2차 결집은 테라와다에서 말하는 2차 결집이 있고, 대승불교권에서 말하는 2차 결집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대승불교권에서 말하는 2차 결집의 조항을 만들려다 보니까 10가지 비법 가지고 해가지고는 욕먹겠거든. 그러니까 10가지 비법은 쏙 빼버리고 다른 걸 가지고 핑계삼아가지고, 우리는 여기 성문에서 떨어져나온 것은 정당하다 하는 걸 구실을 삼게 됩니다.

그게 아라한의 다섯 가지 행위에 대한 가부를 결정하는 이런 것으로 합니다. 언제 시간이 되면 그 부분은 얘기하겠지만 사실은 말이 안 되는 얘기들이 됐는데.

 

그런데 상가에서 파상가가 된다는 것은 뭐냐면,

상가의 의미는 뭐냐면 두 가지가 동시에 행해져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의 의견으로 통일돼야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디든지 동일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태국에서 배우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버마에서 배우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동일하죠?

그것은 경·율·론 삼장이 다른 데 가서는 다 틀리게 되는 거고.

지금 가르침이 동일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이견이 없어야 되는 거라. 어떤 스님은 윤회는 있다 그러고 어떤 스님은 윤회는 없다 할 것 같으면 이것은 문제가 생겨버리게 됩니다. 그런 법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가르침은 동일한 것이 상가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똑같은 포살을 행해야 됩니다. 여기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한 곳에 모여가지고 포살을 해야 되지, “나는 거기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가지고 나는 따로 할란다” 이렇게 해가지고 따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안 그러면 “나는 안 해” 하고 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는 거라.

이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것을 갖다가 상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10가지가 비법이다 하고 나서, 나중에 50년 60년이 흐르고 나서, 그러니까 불멸 후 입멸 후 160년이 흐르고 나서 다시 상가를 구성하게 될 때, 그전까지는 사실은 상가의 무리에 속하게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같은 법으로 살았고, 그렇다고 해가지고 포살을 같이 안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죠?

그런데 하나의 파로써 탁 분파됐을 경우에는 어떻게 돼요? 포살을 따로 하게 되는 거라.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도 조금씩 틀릴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근데 이 두 가지가 다르게 돼버릴 것 같으면 이것을 얘기할 때 원줄기에서 떨어져 나간 것을 '파상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그것이 대승불교에서 얘기하듯이 승잔죄를 저질렀든 어쨌든 간에 승려의 무리에는 틀림없어. 근데 인제는 파상가 돼버릴 것 같으면 상가의 무리에 포함이 안 되게 돼버립니다.

 

테라와다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대승불교에서는 여기 2차 결집을 '근본분열'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두 가지 부파로써 나뉘어졌다고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상좌부 불교하고 대중부하고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테라와다 경전이나 주석서나 아니면 역사서 어디를 보더라도 '근본분열'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게 "한 줄기에서 갈라져나왔다"고 얘기를 합니다.

 

"하나의 줄기와 17개의 파들로써 분파되었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 "하나의 줄기는 그대로 유지를 하고 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사실은 여러분들도 그런 개념은 바꾸어야 됩니다. 대승불교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런 거라 해도 문제가 없지만, 테라와다 불교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근본분열'이라는 용어를 써서는 안 됩니다.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하나의 상가, 다른 상가로써 떨어져 나가버렸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부처님의 법과 율을 변형한 상태, 따로 교단을 형성해서 따로 자기들끼리 포살을 하고 자기들끼리 행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가의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지금 이쪽에서 봤을 때는 상가가 아닌 무리가 돼버리는 거라. 그렇게 보는 것이 오히려 정당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게 2차 분열입니다.

 

여기 10가지 부분을 쭉 예를 들어놨는데, 사실은 소소한 것들입니다.

사실은 소소한 것들입니다. 어찌보면 긁어 부스럼 만든 형태입니다.

근데 왜 야사 스님이 그렇게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었을까?

 

답을 알고 있는 사람? 괜히 왜 그걸 나중에 하나의 분파로써 떨어져나가는 형태가 돼가지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또 분파가 막 퍼져나갑니다. 각각의 분파로 퍼져나가는 결과를 만들게 됐을까? 왜 그랬을까? 그마만큼 부처님 가르침은 어떠한 경우든지 변형해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예외 규정을 둘 수가 없다 하는 겁니다.

 

근데 후대에 오면서 이 부분이 조금 완화가 됩니다.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아까 정시, 정법이라는 얘기를 했죠? 그 정법이라는 의미는 뭐냐면 쉽게 말하면 그 계율조항은 변경하지 않는데 허용할 수 있는 데까지는 허용하도록 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아까 예를 들 때 스님들이 차를 타는 것을 예를 들었습니다. 그걸 쉽게 말하면 테라와다 불교 국가 중에서 각각의 나라에는 율장 외에 상가법이라고 존재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승가법이라고 합니다. 그 승가법에 규정을 딱 둡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당연히 개인 소유물은 허용할 수 없으니까 개인 소유의 승용차는 허용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와서 모시고 갈 때는 그것은 차종이 어떤 것이든 관계없는데, 자기가 어디로 가고자 할 때 이용하는 차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중형차 이상은 안 된다, 이런 승가법 규정을 다 해놨거든. 그런 규정이 만약에 없다고 할 거 같으면 이 법을 잘못 왜곡할 수가 있습니다.

 

그걸 쉽게 말하면 법과 율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할 수 있는 데까지를 허용하도록 하는 걸 정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거는 지금 현대사회에서도 그리고 그전에 불교가 쭉 흘러오면서 그 부분은 각각의 상가에서 다 틀리게 적용을 해서 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미얀마에서는 오후에 우유를 안 먹습니다. 그것은 음식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에. 태국의 담마윳띠까 파에서는 안 먹는데, 마하니까야 파에서는 오후에 우유를 먹는 걸 허용을 합니다. 마하니까야 파의 상가법에는 우유가 허용이 됩니다. 우유가 설혹 음식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마시는 거하고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할 거 같으면 안 먹는 게 좋지만 줬을 경우에는 먹어도 무방하다 하고 적어놨습니다. 그래서 지금 마하니까야에서는 우유는 마음대로 마실 수가 있습니다. 바닐라 우유를 마시든, 바나나 우유를 마시든 뭐든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버마에는 안 돼.

 

그런데 미얀마에서는 사탕수수를 달여가지고 동그란 약 같이 만들은 것이 있습니다. 그걸 오후에 먹습니다. 그런데 태국 마하니까야에서는 반대로 그거는 안 돼. 사탕수수는 아픈 환자들이 먹는 7일간의 약에 속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설탕 꿀 이런 것들은 진형수약이라고 해서 아플 때만 먹을 수 있는 것이지 평상시에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가지고 아플 때 외에는 그거는 못 먹게 딱 해놨어요.

정시가 쉽게 말하면 각각의 파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나죠? 그래도 지금 전혀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죠? 그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이걸 정시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면 수결(手決)이라는 방법을 택합니다.

수결이라는 것은 뭐냐면 계율 항목은 바꿀 수가 없는데, 그대신에 괄호 사항을 둡니다. 괄호 사항을. 쉽게 말하면 아까 중학법이 75개인데, "75가지"의 중학법이라는 그 숫자가 없다고 그랬죠? 그래서 그것들이 각각의 다른 데서 율장을 만들 때 중학법이 증편을 거듭하게 됩니다. 많이 변형이 됩니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의범에 보면 75가지를 괄호( ) 딱 해가지고 "(75개의 중학법을 설하겠다.)" 또 마지막에 다 하고 나서는 "(75개의 중학법을 설해서 마쳤다.)" 이렇게 해놓습니다. 쉽게 말하면 없는 건데 끼워 넣는 거라. 끼워 넣어도 크게 문제가 없는 거거든. 그럴 때는 그 문구를 삽입을 해도 되는 거라.

 

경전에서도 그런 게 종종 등장할 겁니다. 어떨 때는 명확하게 그걸 알지 못할 경우에는 거기에다 삽입을 합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봅시다. 만약에 부처님이 "나는 간다" 이렇게 얘기했다. 그럴 것 같으면 일반 사람들은 어디를 얘기하는지 모릅니다. 근데 부처님이 만약에 가는 곳이 웨살리로 갔다, 그럴 것 같으면 이걸 괄호 해가지고 "(나는 웨살리로 간다.)" 이렇게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렇게 끼워넣는 걸 수결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 규정을 명확하게 아는 경우들은 그런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방법을 택해서 지금도 율장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그대로 쭉 이어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봤을 때 어떤 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현대의 율장에 안 맞기 때문에 확 뜯어고쳐야 된다, 실제적으로는 뜯어고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변형시킬 부분은 없습니다.

문제는 뭐냐면 현대에 맞게끔 변형하는 것은 좋은데, 변형해 놓으면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만약에 율장에서 출가한 스님들은 2000cc 이상 타지마! 하고 정해놨다, 그럼 나중에 갈 거 같으면 2000cc가 굉장히 부유한 자동차면 어떡할 거야? 또 바꾸어야 될 거 아니라. 그래서 그런 것은 승가법으로써 규정을 규율집을 만드는 것이지 율 자체를 변경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거라. 왜 자꾸 율을 변경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이것은 근본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변경할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스님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것보다는 승가법을 갖다가 좀 더 만들어서 변경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승잔법을 저질렀는데도 승잔법 저지른 걸 갖다가 쉬쉬한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율에 규정되기는 명확히 규정이 안 되어서 그렇지, 저지른 것에 대해서 옷을 벗기고 쫓아낸다든지 뭘 한다든지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럼 그런 것은 규정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거라.

참회해버리면 승잔법은 사라져버리는데, 쉽게 말하면 별중갈마 해가지고 별중생활 하면서 참회해가지고 돌아와서 20명의 스님들한테 "내가 그런 잘못 저질렀는데 용서해 주십시요" 할 것 같으면 스님들이 용서해버리면 끝나버리는 거라.

그 부분은 없어져 버리는데, 그리 안 할 경우에는 승려 아닌 것도 아니고, 승려인 것도 아니고 이게 문제가 돼버리는 거라.

 

그럴 때는 그런 것은 승가법으로 규정을 할 필요가 있다는 거라. 그런 스님들은 어떤 어떤 조치를 취하도록 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쉽게 말하면 바라이죄부터 해가지고 모든 계율들은 그렇게 승가법으로 규정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만약에 예를 들면은 "굳이 율장 자체를 변형할 필요성은 실제적으로는 없다" 하는 것이 스님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그런데도 어쨌든 이 2차 결집이 있고 나서 조금 뒤에 이런 분열이 있었다고 하는 부분에서는 참 슬픈 일입니다. 그렇지만 어떡할 거라. 그리해도 변형을 안 하고 지키는 사람이 쭉 존재해왔으니까 그래도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어야 되는 것이지. 여러분들은 그런 종갓집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으니까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는 그런 뜻입니다.

 

2차 결집은 대충 그렇습니다. 프린트물 보면 다 압니다. 그걸 보고 할 수 있도록 하고, 질문 있는 사람 질문 하십시요. 없어요?

 

아까 계율 부분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지금도 당장 나타나잖아.

돈을 스님한테 공양물 올릴 때 봉투에 넣는 것, 이건 아까 물속에 떨어뜨린 것과 꼭 마찬가집니다. 사실은 스님들도 이거 받으면서 꺼림칙해. 시자가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이걸 어쨌든 쓰기는 써야 되는데 이걸 자기가 꺼내가지고 써야 될 때는 참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스님은 봉투채로 놔줍니다. 거기다 놔놓고 어디 가서 필요할 때 그거 그냥 보여줍니다. “필요한 만큼 꺼내가시오” 그렇게 합니다. 조금 덜 양심에 가책을 받을라고 그렇게까지 합니다. 그마만큼 율은 중요한 거라는 거라.

 

그걸 여러분들도 어기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여기 보면 출가한 스님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된다는 것도 이 열 가지 십사비법에 나와 있습니다. 사실은 재가자들이 잘못해가지고 이런 것들이 생겨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스님들이 되도록이면 그런 올가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자, 축복게송 하겠습니다.

 

"Sabbītiyo vivajjantu, sabbarogo vinassatu,

삽비-띠요 위왓잔뚜 삽바로-고- 위낫사뚜

 

mā te bhavatvantarāyo, sukhī dīghāyuko bhava.

마-떼- 바와뜨완따라-요- 수키- 디-가 유꼬 바와

 

Abhivādanasīlissa, niccaṁ vuḍḍhāpacāyino,

아비와-다나실-릿사, 닛짱 웃다-빠짜-이노-,

 

cattāro dhammā vaḍḍhanti, āyu vaṇṇo sukhaṁ balaṁ.

짯따-로- 담마- 왓단띠, 아-유 완노- 수캉 발랑.

 

Bhavatu sabbamaṅgalaṃ, rakkhantu sabbadevatā ​

바와뚜 삽바망갈랑 락칸뚜 삽바데-와따-

 

Sabbabuddhānubhāvena, Sabbadhammānubhāvena,

삽바붓다-누바-웨-나, 삽바담마-누바-웨-나,

 

Sabbasaṃghānubhāvena, sadā sukhī bhavantu te.

삽바상가-누바-웨-나, 사다- 수키- 바완뚜 떼-.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흘러가듯이

이러한 공덕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부처님의 위신력과 담마의 위신력과 상가의 위신력 입어

살아있는 분들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고

몸도 마음도 부유로워지며

이러한 공덕들이 바르게 회향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이와 같은 공덕으로 닙바나에 이를 조건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