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 불교사

테라와다 불교사 개론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913-3

담마마-마까 2025. 1. 10. 17:52

https://youtu.be/4SJyvm6qKpU?si=xcUg-oIj-qu90ju_

 

* 테라와다 불교사 개론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913-3

 

저번에 총론으로 전체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불교 개론부분입니다. 부처님은 기원전 6세기에 태어나셔가지고, 그때부터 시작을 해서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오게 된 거죠?

그래서 대충 불교는 이 지구상에 두 가지 흐름이 있다는 것은 알 겁니다.

테라와다 불교하고 마하야나 대승불교, 그래서 그 두 가지가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를 일부에서는 초기불교, 근본불교, 남방불교, 상좌부불교, 뭐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다 괜찮은 용어입니다.

단지 상좌불교는 괜찮은데 상좌부는 안 됩니다. 부는 부파를 얘기하기 때문에.

테라와다 불교는 어떠한 경우든지 부파불교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상좌불교는 괜찮은데, 아니면 장로불교는 괜찮은데, 부라고 쓰면 안 되죠. 그래서 그 나머지는 뭐 근본불교라고 부르든 초기불교라고 부르든 그거는 뭐 자기 입맛대로 써도 됩니다.

단지 우리 여기 교단에서는 공식적인 명칭이 있습니다. 뭐라고 불러요? 그냥 테라와다라고 부릅니다. 테라와다 불교라고 그렇게 부릅니다.

 

그게 우리만 쓰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에 있는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는 자기 나라 말이 다 있습니다. 거기에 맞게끔 우리같이 초기, 근본, 이런 자기들 나름대로 용어가 있는데도 그 용어를 안 쓰고 다 테라와다라고 그렇게 씁니다. 그래서 서양도 마찬가지고 유럽이나 미국도 마찬가지로 다 테라와다라는 명칭을 그대로 쓰기 때문에, 굳이 우리나라에서 지금 우리 불교 형태를 '초기불교다, 근본불교다' 이렇게 규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래서 그냥 용어 그대로 '테라와다 불교'라고 쓰도록 그렇게 돼있습니다.

 

이렇게 대승불교하고 테라와다 불교의 큰 두 가지 줄기가 있는데, 두 가지 줄기의 차이점이 뭘까?

저번에 불교개론 읽어봤죠?

(수행자 대답: 북방으로 퍼진 거 하고 남방으로 퍼진 거 두 갈래 길)

그거는 북방으로는 뭐 테라와다 불교가 아예 안 갔어? 남방으로는 또 대승불교가 아예 안 왔나?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아니고 차이점이 뭐냐면, 승가의 존재 유무입니다.

테라보다 불교 같은 경우에는 제1차 결집으로부터 해서 뭐 제3차 결집, 4차 결집 이렇게 진행돼 오면서 율사가 누구누구누구로 맥이 정해졌고, 그다음에 누가 누가 바나카(bhāṇaka) 그러니까 암송자가 돼서 이렇게 전했고, 하는 그 근거가 쫙 그대로 있습니다.

 

근데 대승불교는 그게 없다는 거라. 대승 불교에서는 승단이, 대승 불교는 존재를 해서 스님들이 있는데, 이 스님들이 어디서 근원이 돼서 이렇게 존재를 했는가 하는 게 없다는 거라. 그게 없어. 이게 복장부 스님들인지 아니면 뭐 대중부 스님인지 설일체유부 스님들인지 맥이 없는 거라. 맥이 딱 한 번 나타난 게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교단이 중국의 삼백몇십 명인가 그때 두 차례에 걸쳐서 비구니 교단을 갖다가 이어준 게 있습니다. 그게 인제 법장부 계통이거든요. 그 기록만 존재를 해요.

 

나머지는 이 승단이 어디서부터 유래가 됐는지가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대승불교 기원설에 대해서 얘기를 할 경우에는 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게 뭐 탑에서 모여있던 재가자들이 기원이 돼 가지고 이게 승단이 됐다. 어떤 사람들은 부파 불교에서 존재를 해갖고 이렇게 됐다. 또 어떤 사람들은 어떤 파에서 했다. 말은 많은데 이걸 증명할 방법이 없는 거라.

이게 사실은 그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도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는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대승불교는 인정을 하는데 대승불교가 지금 현존하고 있는 것은 인정을 하고 있는데, 대승불교 스님들은 스님으로서 인정을 하지를 않고 있다는 거라.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갖다가 빼버리고 대승 비불설이 어떻고 저쩌고 합니다. 대승불교의 경전이 불설이냐 아니냐?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그걸 가지고 얘기를 하고 있느냐는 거라. 대승불설비불설은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그 교의, 따르는 것들이 부처님 말씀에 합당할 것 같으면 받아들여서 공부하면 되는 거고, 합당하지 않다고 할 것 같으면 자기가 공부 안 하면 돼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설비불설의 문제는 크게 문제가 아니라.

그런데 승단의 맥을 이어오고 안 이어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불교사에서 보면 처음에 부처님이 출가자를 줄 때 에히 빅쿠(Ehi bhikkhū)라고 그럽니다.

"이리 오너라 비구들이여" 이러면은 경전에는 머리가 싹 다 깍이고, 바리때를 들고 가사를 입고 이렇게 됐다고 해요. 그래서 그때는 에히 빅쿠 체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초창기 때 부처님 제자들은 “에히 빅쿠”만 하면 이제 그뒤부터는 정식 비구가 돼 가지고 부처님 따라 졸졸졸졸 따라다닐 수가 있었다는 거라.

 

그러다가 띠사라나 빅쿠(Tisaraṇa bhikkhū)가 생겨납니다. 여러분들 삼귀의 했죠?

그 삼귀의를 세 번 함으로 인해가지고 비구가 되는 의식을 치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출가를 할려고 하는데 부처님 앞에 자꾸 데려와서 출가를 시키기에는 거리상 멀게 됩니다. 그래서 단안을 내린 게 “부처님, 그러지 말고 부처님이 안 계시더라도 10년 이상 된 스님들이 세 분 이상 존재를 한 곳에서는 비구계를 주도록 허락합시다.” 이렇게 해가지고 그곳들에서도 비구계를 줄 수 있게끔 부처님이 허락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의식을 진행합니까?” 하니까, 부처님이 그때 얘기한 게 “삼귀의를 삼창하라.” 그러면은 비구로서 인정되는 것으로 하겠다. 그래서 각 지역에서 띠사라나 빅쿠들이 막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이제 전개돼 오다가, 이게 막 그렇게 생겨나니까 어떻게 돼요?

누가 어디서 계를 받았는지 사실을 잘 알지를 못하게 돼버립니다. 누가 예를 들어가지고 저쪽에서 계를 안 받아도 “나 거기서 계 받았다.” 삼귀의 삼창하고 계 받았다고 이 옷 걸치고 다녀버리면 할 말이 없어져 버리는 거라. 한국에도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를 받은 적이 전혀 없는데도, 나 어디 가서 어디 스님 은사 스님에게 계 받았다고, 그런 형태와 꼭 같이 돼버리는 거라. 근데 이게 인제 문제가 있거든.

 

그래서 나중에는 생겨난 게 우빠삼빠다 빅쿠(Upasampadā bhikkhū)라 해가지고 사미계를 받고 비구계를 받는 형식을 취하게끔 됩니다.

사미들은 10계, 비구계는 227계, 어쨌든 이런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정확하게 "나의 스승이 누구였고, 갈마사가 누구였고, 교수사가 누구고, 그다음에 전계사가 누구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그걸 갖다가 알 수 있게끔 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갖다가 "이 사람은 이제는 누구 스님을 은사로 해가지고 비구계를 받았습니다." 하는 걸 증명하는 갈마를 행하게 됩니다. 그 승단에서. 그래서 "이 스님은 인제는 비구 스님이다." 하고 증명을 하고 도장을 3번 꽝꽝꽝 찍습니다. 그걸 백사갈마(白四羯磨)라고 그럽니다. 그걸 의식을 해야만이 인제 계를 받는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 당시 때 이미 출가하는 조건이 이렇게 딱 바뀌어 고정해가지고 못으로 박혀버리게 됩니다. 그 뒤부터는 항상 이 방식으로 진행을 해야 돼. 그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출가를 용인을 하지 않는 거라.

 

그러니까 갑자기 열반하신 부처님이 천상에서 뚝딱 내려와가지고 ‘나에게 비구계를 줬다’ 이거는 있을 수가 없는 거고, ‘어느 스님을 스승으로 해서 비구계를 받았다.’ 그럼 거기에 삼사칠증(三師七證)이 모여있었는가? 안 모였다고 그랬다면 그건 비구계가 성립이 안 되는 거라. 또는 그 비구계를 받는 장소가 시마(sīmā)로서 형성돼 있는 곳인가? 비구계를 줄 수 있는 장소인가? 비구계를 줄 수 없는 장소일 것 같으면 그것도 성립이 안 돼. 이런 여러 조건들이 다 인제 맞아야만이 비구가 될 수가 있는 거라.

 

대승불교는 아무리 문헌을 다 뒤져보더라도 이게 없는 거라.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냐면 대승불교의 현존하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래서 오면 그냥 스님 오면 “아이고, 스님 오셨습니까?” 하면서 예를 차려주고 다 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스님들 간에 회의를 한다, 대승불교 스님은 들어오지 마라, 못 들어오게 합니다.

또는 순차적으로 탁발을 이렇게 나간다, 그럼 비구 스님들 다 나가고 인제 꼬르방디 인제 비구계 받은 스님들까지 다 나가고 나야, 대승불교 스님들이 그 뒤를 따라가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대승불교 승가는 인정을 아직까지는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거라. "붓다와 담마는 존재를 하는데 상가는 존재를 하지 않는다" 하고 여겨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상가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쉽게 말해 승단이 존재를 하지 않으니까 그걸 청정하게 자시고 우시고 할 필요도 없는 거고, 그로 인해가지고 삼귀의 대상인 상가가 될 수도 없는 거라.

이게 사실은 우리 그 한국에 삼귀의 할 때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그러고 나면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하는데, 그건 사실 스님들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가는 성스러운 상가를 얘기합니다.

아리야 상가(ariya saṅgha)죠. 일개 스님이 아니고 승단입니다. 승단에 귀의한다고 해야 되는데 승가에 귀의한다고 얘기해야 되는데, '스님들께는' 이게 조금 잘못된 거라. 그러니까 개인의 스님하고, 상가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 상가도 성스러운 상가가 있고, 그냥 평범한 모든 출가 상가가 존재를 하는 것인데, 그걸 개념을 잡지 못하면 안 된다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대승불교에서 상가가 역사적으로 존재한 걸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상가가 항상 지금 현존하고 있어도 쉽게 말해서 스님들의 집단이 존재하고 있어도 이게 외부적인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 거라. 상가는 어떠한 경우든지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상가의 일을 세속의 법정에 간다? 생각조차도 못하는 일입니다. 쉽게 말하면 상가에서 누가 절을 팔아먹었다. 그럼 상가에서 그걸 해결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게 세속 법정에 가서 시시비비를 가린다? 상가가 뭐 하러 있어? 그러면.

어떠한 경우도 외부적인 것으로 인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이 상가는 아닙니다. 국왕이 불교 신자든 아니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좀 궁핍해지고 하는 것은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좌우되지는 않습니다. 그게 상가입니다. 그래서 상가는 항상 어떤 경우든지 상가 고유의 의결기관입니다. 의결할 수 있는 형태들을 취하게끔 돼 있다는 거라.

 

불교 사회에서 파승의 개념이 바뀌는 계기가 생겨납니다.
그전에는 파승(破僧)이라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교리를 설하고 그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파승이라 해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요 근래에도 그런 게 있었는데, 태국에 산띠아속이라고 하는 단체가 있었어요. 산띠아속. 처음에는 스님들은 똑같이 마하니까야에서 계를 받았어. 스님도 마하니까야(Mahānikāya) 소속이거든요. 거기서 인제 계를 받았는데, 여기서 부르짖는 게 뭐냐면 부처님의 가르침하고는 약간 동떨어집니다.

쉽게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면 육식 안 된다. 고기 먹지 마라. 오전이라 해도 채식만 해라. 그다음에 지금 동남아시아에서는,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전을 소유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진 않지만 어쨌든 다닐 차비들이 있어야 되니까 차비를 가지고 다닙니다. 그래서 편법으로 동전은 금전에 해당이 되니까 동전은 가지지 않고 지폐 종이는 괜찮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이렇게들 합니다. 물론 뭐 따라다니는 시봉이 있을 것 같으면 문제가 없지만은 없을 경우는 그렇게 하고 하는데, 그거 틀렸다는 거라.

그래서 일절 그런 것조차도 못 가지게 하고, 그다음에 자는 숙소도 건물이 있는데서 자지 마. 저기 나무 밑에서 자. 이러면서.

 

쉽게 말하면 옛날에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한테 대항했던 데와닷따 하고 비슷한 성향을 가진, 똑같은 건 아니지만 비슷한 성향을 가진 그런 집단이었어요. 그래서 이걸 갖다가 태국 승단에서 제재를 하게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하고는 틀리다. 부처님 당시 때도 데와닷따가 그렇게 해가지고 승단에서 축출되거든. 부처님 가르침하고는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불교 승려로서 인정하지 못한다. 해가지고 그 노란 가사를 입고 있는 스님들을 전부 다 환속을 시켜버렸습니다. 전부 흰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산티아속은 승단의 승복색을 입고 있는 게 아니고 흰색을 입고 있습니다.

어쨌든 처음에는 불교의 파승의 개념이 이 개념이었거든. 부처님이 가르침하고 이질적인 것 같으면 쫓아내버렸어. 쉽게 말하면 저기 있는 해피 스님이 윤회를 부정했다. 그러면 부처님 당시 때 같으면 쫓겨나. 저 흰옷 입어야 돼. 근데 해피스님이 윤회부정 하는 거 아닙니다. 내가 저번에 물어봤어. 니 윤회부정한다고 했는데 진짜냐? 하니까 아니래. 그럼 됐다. 농담으로 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게 제3차 결집에 오면서 파승의 개념이 바뀌는 게, 이질적인 것은 얘기할 수 있다. 크게 부처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같으면.

쉽게 말하면 뭐 자는 거 사치스럽지 않게끔 나무 밑에서 자자 하는 그게 뭐 그렇게 부처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나냐? 그리고 스님들이 무슨 노동하는 것도 아니고 채식만 먹자는 게 뭐 그렇게 나쁜 거라고 그걸 갖다가 쫓아내고 치탈도첩시킬 이유가 뭐 있느냐? 이제 그런 분위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크게 부처님 가르침, 쉽게 말하면 윤회를 부정했다 이런 것 같으면 큰 문제가 돼버리고 이런 것은 그냥 이제 벌떼같이 달려들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소소한 것들은 오후에 우리는 저기 꿀을 먹어도 된다 안 된다. 이런 걸 가지고 싸우고 하는 건 크게 문제는 없는데, 너는 그리 하고 나는 이리 안 하고 그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도록 돼요. 이질적인 교리의 차이는 서로가 인정을 하자.

 

그 대신에 그 대신에 딱 하나하나 있습니다. 그 대신에 파승의 조건으로서 스님들 간에 모여 있는데, 갈마를 하지 않을 경우에는 쫓아내버립니다. 우리 테라와다 불교에도 쉽게 말하면 한 달에 한 번씩 스님들이 모여서 상가 회의를 합니다. 스님들 간에 갈마를 하고.

갈마를 안 하는 거야. 나는 내 혼자 뭐 그냥 하면 되지. 가도 재미도 없고 따분하기만 하고 만날 뭐라 말해쌌고, 나 거기 안 간다. 자기 혼자 독야 청정하고 있는 거라, 나는 청정하다 하면서. 개인적인 성향을 가지고 오로지 수행하고 청정하게 지내면 되지 하고 마음을 먹어버렸다, 승단의 공통된 일들 행사에는 참여를 안 한다, 이럴 것 같으면 옷을 벗겨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승단이 우선인 것이지 개인이 우선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승단의 일은 따로 떨어져서, 그럼 난 독립해가지고 우리끼리 그러면 상가회의 하겠다, 이것도 파승으로서 얘기합니다.

상가는 하나. 그 상가에 공통된 것들은 참여들을 할 수 있도록 돼야 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걸 안 할 것 같으면 흰옷 입혀가지고 쫓아내버립니다.

저기 제3차 결집 때 그게 그렇게 바뀌게 됩니다.

 

제3차 결집 때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이렇게 쭉 정리를 하면서,

아, 그 전에 3차 결집이 있기 전에, 불교 승단 내에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굉장히 많았었어요. 쉽게 말하면 정확하게 그 계를 받아가지고, 우빠삼빠다의 형식을 취해가지고 계를 받아가지고 온 사람들이 이 승단에 존재를 해야 되는데, 아이 그게 아니거든. 이거는 뭐 그냥 어디서 받았는지도 모르고 온 사람들, 그리고 이게 미심쩍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같이 섞여 있게 되는 거라. 이걸 보고 “이게 뭐가 잘못됐다.”

그래서 버마 같은 경우에도 지금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리 오디네이션'이라고 해요. '재수계'를 합니다. 그런 것들이 의심되고, 저 스님이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있겠다 싶고 뭐 이럴 것 같으면 그 스님 보고 다시 수계받으라고 그럽니다. 은사를 바꾸는 것이 아니지만은, 그렇게 재수계를 받도록 해가지고 청정하게 수계받은 걸 우리가 눈으로 증명할 수 있게끔 합니다.

 

근데 이게 지금 3차 결집들은 보니까 너무 그런 인원이 너무 많다는 거라. 그 아소카 왕이 대신을 시켜가지고, “스님들 전부 모여가지고 갈마 같이 하라.” 그러니 그 스님들도 다 포함해 가지고, 테라와다 불교에서 보니까는 기가 찬 거야 이거는. 말이 안 되는 얘기거든.

어떻게, 나는 쉽게 말하면 쌔가 빠지게 고생해가지고 서울대 가가지고 공부 열심히 하고 왔는데 서울대 간 족보도 없는 사람 저 사람 보고 서울대 졸업생이라고 인정해라는 거하고 마찬가지거든. 그러면 서울대에 입학 멤버가 있든지 뭐가 있어야 될 거 아니라. 근데 저 사람도 서울대생이니까 같이 서울대 동문회 같이 하시오. 이래 할 것 같으면 누가 그걸 받아줄 수 있느냐는 거라. 못 받아주는 거라. 그러니까 테라와다 스님들이 거부합니다.

그러니까 아소카 왕의 대신들이 그럼 당신들 죽여버리겠다. 죽여라. 그래 가지고 많은 테라와다 장로스님들이 죽었어요. 그때.

이 테라와다의 정신이 바로 그겁니다. '지켜야 될 거는 반드시 지킨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더러운 거 하고 같이 섞여 있어버리면 나도 더러워진다는 걸 아는 거라. 그러니까 절대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그거 못한다는 거라.

 

그러고 나서 이제 아소카왕이 참회를 하고 결집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다른 굉장히 이단되는 설들은 배척을 해서 옷을 다 벗겨서 백의를 입혀 보내버립니다. 그리고 계 받은 게 의심되는 사람들도 꼭 마찬가지고, 전부 다 그렇게 해가지고 거의 6만 명이 쫓겨났다고 그럽니다. 승단 내. 우리나라도 빨리 그렇게 한번 돼. 뭔가 조치가 있어야지.

그러고 나서 이 사실을 갖다가 결집을 통해서 이렇게 딱 증명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파승가의 개념이 바뀌게 됩니다.

그전엔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모순된 것들 이질적인 것 같으면 쫓아냈는데, 인제는 그게 아니고 모순된 거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은 서로 용인들을 하고, 그 대신에 갈마를 갈마를 같이 해야 된다.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도 각 종파에 따라서 테라와다 불교에도 이 부분이 약간 차이가 납니다.

똑같은 종파라고 하더라도 부파불교 시대 때로 넘어오면 설일체유부라고 하는 부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파 같은 경우에는 이 승가의 개념이 바뀌는 걸 용인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결국 쇠퇴기를 맞게 되고 나중에 가서 망할 때 정도 돼가지고 이제 파승가 개념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미 그때는 뭐 늦어버린 상태가 돼서 나중에 자연적으로 소멸되는 단계를 겪게 되는데.

 

태국의 예를 들면 태국에는 두 개 종파가 있습니다. 마하니까야하고 담마윳띠까 하고 두 개가 있는데, 이 담마윳띠까 같은 경우에는 공통된 행사를 같이 합니다. 스님들이 같이 탁발 나가고 밥 먹고 승납 인정하고 하는 건 다 해줍니다. 대승불교 스님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테라와다 안에서도.

그런데 스님들의 고유 행사 쉽게 말하면 계목을 설하는 거, 그다음 비구계를 설하는 거, 스님들 잘잘못을 가리는 거, 이런 그 스님들 간에 고유하게 해야 되는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안거하고, 그다음에 까티나 가사 하고 하는 그런 것들, 그거 할 때는 담마윳띠까 파 외에는 안 봐. 그 결계당 안에 못 들어오게 합니다. 똑같은 스님들인데, 그전까지는 같이 내내 잘 놀다가도 “너 마하니까야지? 너희쪽에 가서 해.” 그러면서 거기 못 들어오게 합니다.

 

근데 마하니까야 파는 담마윳띠까 파와 관계없이 그냥 결계당 같이 들어가서 하도록 합니다.

지금도 종파에 따라서 이 파승의 개념을 약간 다르게 적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 하더라도 서로 간에 테라와다 스님들은 인정할 거는 다 인정해 줍니다. 그러니까 스리랑카에서 계 받았다 해가지고 태국 와서도 그 법랍이 인정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무슨 행사 있으면 다 참여를 합니다. 뭐 버마에서 계를 받았다 해가지고 스리랑카 가서 그 인정 못 받고 하는 건 전혀 없거든.

단, 그건 테라와다 안에서, 테라와다 안에서 일 때. 테라와다를 벗어나 버리면 다른 대승불교는 승단으로서는 인정을 못 받고 있다. 그 부분이 참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빨리 이 부분에 대해서 학자들도 정립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뭔가 발견해내가지고 대승불교도 승단이 존재를 했다는 걸 증명을 해내라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이 평행선은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지금 세계가 어떤 세계인데 이 글로벌한 세계에서 계속 이 평행선을 달려가 되겠느냐는 거라.

물론 인정할 부분은 인정합니다. 한국에도 불교가 있다고 인정하고 거기에 있는 스님들을 존경하고 아주 참 수행 잘하시는 스님이지 하고 인정을 하긴 하는데, 결정적인 부분에 들어가면 그 승가의 고유한 행사 부분에서는 아예 노터치가 돼버리는 거라.

 

그게 이제 불교 내에 서로 두 개의 흐름이 있는데,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입니다.

다른 것은 크게 차이나는 것 없습니다. 뭐 부처님을 본존으로 하고, 물론 대승불교에서는 각각의 불보살들이 있지만 부처님이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변함이 없거든.
부차적인 그런 것들을 가지고 문제 삼지 말고, 부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고, 어떤 경우도 부처님 가르침이 우선이 돼서 다른 것들이 엮여지는 것이지, 그것을 배척한 상태에서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조사 스님이라도 부처님 말씀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어떤 형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가의 정립이 급선무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게 이제 2개의 흐름인데, 또 각각의 나라에 각각의 식의 불교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다른 나라에 없는 게 뭐가 있는지 알아요? 삼성각 산신각 칠성각 하는 거 다른 나라에는 없습니다. 이거는 어떻게 봐야 될까? 어떻게 봐야 돼?

이건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하고 틀린 거니까 이건 뭐 다 때려 뿌사버려야 돼? 현세지향적인 불교를 찾다가 보면 그 나라의 고유한 문화들에서 차용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우선이 돼버리면 문제가 돼버리는데,

현세지향적인 것, 쉽게 얘기하면 누가 나에게 조금 전에 사사나 스님이 나한테 용돈을 줬단 말이라. 인제 추석이라고. 그러면 주고 나면 사사나 스님한테 당장 복이 돌아가야 돼. 천 원을 줬으니깐 천 원어치 만큼 복을 탁 받아야 되는 거라. 그게 현세지향적이라고 보면 됩니다. 당장 내가 뭔가 이익을 바랄 것 같으면 그런 형태들의 신앙들을 가지게끔 되는 거라. 이거 뭐 두려움이 있다 그럴 것 같으면 부처님한테 찾아가는 게 아니고 산신각에 가서 막 합니다. 애 낳고 싶다 하면 칠성각 가서 막 이렇게 하고. 이 현세지향적이라는 거라. 근데 그거는 그 나름대로의 의미들은 가집니다. 근데 이게 주객이 전도돼 버리면 곤란해버리는 거라.

 

그것뿐 아니라 전통적인 불교가 가지고 있는 그 불교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 쉽게 말하면 내가 악한 일을 했으면 악한 결과가 있게 되는 거고, 그리고 내가 항상 좋은 일을 자꾸 많이 하도록 해야 되고, 선한 마음을 가져야 되는 거고, 그 수행하고 보시하고 계를 지켜야 된다는 기본적인 밑바탕이 있습니다. 이걸 침범하지 않는 정도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거라. 그럴 경우에는 그걸 받아들이고 단지 이게 주객만 전도되지 않게끔만 해버리면 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굳이 불교 외적인 요소라 해서 터부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국만 그렇게 있는 게 아니고, 예를 들어 볼까요?

 

태국 같은 경우에는 각 절에 보면 뭐 브라흐만들이 막 있습니다. 힌두교 신이라. 네 팔 달린브라흐만 신도 있고 막 이래. 그러니까 사람들은 가서 거기 막 이렇게 합니다. ‘우리 아들내미 잘 되게 해주소’ 하면서. 근데 태국 불교에서는 그게 불교 외적인 요소인지 몰라서 그걸 갖다가 치질 않을까?

또는 버마 같은 경우에는 까티나 행사한다고 하면서 막 사람들에게 가사를 이렇게 그 돈을 일정 얼마씩 받고 이렇게 막 보시를 하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가사는 실제로 스님들한테 막 수십 개를 줍니다. 그걸 다 스님들이 가질 수 없다는 걸 뻔히 알아. 스님은 어떤 경우든지 가사 한 벌 외에는 못 가지게 돼 있거든. 그럼 나머지 가사는 줘야 되는 거라. 다시 다 돌려줘야 돼. 그렇잖아. 그럼 다시 그 사무실에 다 들어갑니다. 어떤 때는 한 벌조차도 안 주는 경우도 있어. 넌 이미 한 벌 있는데 뭐 또 필요하냐 해갖고 그것조차도 안 줍니다.

그러면 그거는 그 사람들의 복덕을 쌓기 위해서 하는 어떤 형식들인데, 그것도 그러면 뭐 상업적이라 해서 다 배척해야 되는 건가? 그건 아니라는 거라.

 

예를 들어보자. 내가 까티나 가서 하는데 5만원 보시했다.

그랬는데 가사 하나도 들고 그 스님한테 가서 올리지 못한다 할 것 같으면 마음으로는 좀 섭섭해.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이렇게 하면. 그게 현세이익적이라. 내가 5만 원 냈으니까 그것 가지고 이제 가사를 들고 내가 가서 스님한테 가서 직접 줘야만이 뭔가 내가 준 것 같이 느껴져. 근데 사실은 그렇지는 않은데,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라.

이걸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의 생각은 바꿔줄 필요는 없다는 거라. 그리 안 해도 스님들이 축복할 것 같으면 축복할 때 여기 있는 이정희 보살님 당신 건강하고 행복하시오. 이렇게 축복하는 스님이 있든가? 없어!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하시오. 이 가사 불사한 까티나 보시한 모든 분들이 다 건강하고 행복하시오.” 합니다.

축복받는 건 똑같는데 가사를 내가 직접 올렸든 아니면 안 올리고 뒤에서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든 똑같은데, 뭐 하러 그렇게 마음을 그렇게 먹느냐? 그렇게 스님들이 얘기를 하는 거라. 그게 사실은 맞는 거라. 그런데도 마음 한 켠에는 ‘아이, 그래도 내가 올려야 되는데’ 이걸 빨리 절충을 잘 잡아줘야 된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 이걸 현세의 이익적인 불교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은 그게 중심이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게 중심이 돼버리면 자꾸 불교가 기복적으로 바뀌어버리는 거라. 제사, 기도, 무슨 제, 이게 중심이 돼버리는 거라. 가만히 한번 봐봐. 한국 불교 그거 빼고 나면 뭐가 있는가? 왜 부차적인 게 중심을 잡고 있느냐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중심이, 그러니까 중심이 아닌 것이 바뀌어 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그걸 잡아줘야 되는 것이 바로 승단이 해야 될 몫이라.

어떠한 경우든지 계를 지키고 여러분들은 보시를 하고 또 수행을 하고 그래서 내가 조금 더 부처님 같이 살아가려는 노력들을 하게 되고, 그래서 조금 더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지 행복해지고, 또 수행의 진척이 있게 되고, 더욱더 공덕 많이 쌓게 되고, 이 중심이 되는 것들이 다른 것들로 인해서 바뀌어버리면 안된다는 거라. 그 부분을 항상 명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어떤 나라든지 스리랑카식 불교가 있고, 태국식 불교가 있고, 한국식 불교가 있습니다. 이 테라와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테라와다가 있고, 일본 테라와다가 있고, 스리랑카 테라와다가 있고, 미국 테라와다가 있습니다. 그 각각의 나라에서 하는 방식은 조금 조금씩 틀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심이 되는 것은 항상 동일하다는 거라. 한국 테라와다라 해서 태국 테라와다와 틀리질 않다는 거라. 미국 테라와다라 해서 테라와다의 기본적인 것들을 완전히 바꿔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부분을 항상 여러분들은 명심해야 됩니다.

 

그게 불교 개론 부분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아마 있을 거라고 봅니다.

설일체유부가 결국 교리적인 문제로 이 테라와다 불교와 많이 차이점을 나타내게 됩니다. 똑같은 테라와다 불교를 하다가, 왜 그랬을까? "삽베 담마 아낫따띠" 해피스님 무슨 뜻입니까? (해피스님: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아다. 이런 뜻입니다.)

삽베 모든, 담마 모든 것들이라고 해야 돼. 그게 내 생각이든 내 이 몸이든 아니면 이 세상이든 어쨌든 "모든 것들 모든 현상들은 아낫따, 실체가 없다. 고정되어 있는 것이 없다" 하는 게 이제 테라와다의 기본적인 것인데,

설일체유부는 "삼세에 존재하는 뭔가가 있다." 삼세(三世) 과거·현재·미래라고 하는 것이 존재를 하고, 그리고 자성이라고 그럽니다. "그 자성(自性)이 존재한다."

 

쉽게 말하면 우유가 있다. 우유에는 고유한 성질이 있습니다.

근데 우유를 갖다가 농축을 시키면 치즈가 됩니다. 그럼 치즈의 고유한 성질이 있습니다. 우유의 고유한 성질과 치즈의 고유한 성질은 틀립니다. 쉽게 예를 들면 영양성분 자체가 틀려. 그리고 이 우유의 고유한 성질과 치즈의 고유한 성질은 틀리다는 거라. 이게 존재를 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그래서 이 고유한 성질은 불변하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 설일체유부입니다. 그래서 "이 법이라고 하는 것 모든, 삽베 담마 할 때 제법(諸法) 그러니까 법이라고 하는 것은 상주하는 것이다." 하고 이 설일체유뷰에서는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 테라와다 불교 보고, 너희들은 현상에 대해서는 뭐 알고 있어도 조건 지워진 것 따라서 일어났다가 조건 지워진 것 따라서 사라진다. 그거는 너희가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너희들은 법에 대해서는 모른다. 테라와다 보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법의 고유한 성질, 자성이 있는데, 너는 그걸 모르지 않느냐?

굉장히 차이점이 나죠. 지금 테라와다 적인 거하고. 그래 가지고 결국은 이제 갈리게 돼버리게 됩니다.

 

그게 이제 그 부파 불교들이 생겨나는 계기들이 된다는 거라.

그런 식으로 해서 생겨나게 됩니다. 근데 이 생겨나도 그냥 생겨나겠어요?

예를 들어 봅시다. 영 딴 얘기를 한다, 그럴 것 같으면 여기 승단에서 이 딴 얘기 하는 사람에게 그냥 니는 씨부려라 하고 놔둘 것 같아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승단에서는 여기에 대해 제재를 가하게 됩니다. “너 왜 이 얘기하느냐?” 해가지고 그걸 갖다 논점으로 해서 논파를 해버립니다. 니 틀렸지 않느냐? 그럼 틀림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이 승단을 떠나게 됩니다. 떠나야 됩니다. 떠나지 않을 수가 없으니까.

뭐 떠날 때 그냥 떠나게 합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럼 니 우리 집 나갈 것 같으면 여기서 쓰던 거 다 놔두고 가. 승복을 반납하고 나가게끔 합니다.

 

쉽게 말하면 부파가 되게 되면 그 부파 돼나가는 쪽들은 쉽게 말하면 상가를 초기에는 형성을 못 하게끔 됩니다. 일반 재가인으로서 나가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테라와다에서는 뭐라고 하느냐면, 여러분들은 부파의 계통도를 보면 상좌부 대중부 그다음에 상좌부에서 요렇게 또 대중부에서 요렇게 요렇게 이렇게 계층을 줍니다.

 

근데 테라와다에서는 그렇게 얘기 안 합니다. 테라와다는 이렇게 쭉 맥이 내려옵니다. 부처님 때부터 한 맥을 타고 여기서 뭐가 생겨나고 뭐가 생겨나고 합니다. 생겨나는 것은 부차적인 거라. 쉽게 말하면 이 승단에서 떨어져 나간 거라. 나중에 그게 승단을 형성할지라도 떨어져 나갈 때는 일단은 승단으로서는 존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가게 되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전통 맥으로 봤을 때는 여기서 일단은 떨어져 나갈 것 같으면 그 부파를 형성할 경우에는 사상적인 부분이든 어떤 부분이든 그것은 승단으로서의 인정을 못 받게 되는 것들이라.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때부터 해서 승단의 맥을 쭉 끊어지지 않고 내려오는 것은 오로지 테라와다뿐이다." 하고 이제 얘기를 하게 되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잘 이해가 안 갑니까? ‘테라와다 스님이니까 그런 얘기 하겠지’ 인제 그러겠죠?

나중에 그걸 쭉 진행을 하면서 증명을 해나가겠습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그게 불교 개론입니다.

「BC 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 그냥 읽어보십시오. 모를 것이 아마 별로 없을 거라고 봅니다. 이거 이런 식으로 하다가는 여기 적어 놓은 열몇 가지도 다 못하게 되니까, 읽어보고 의문나는 것만 질문을 다음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수행자: 50분까집니다. 10분 남았습니다.) 10분 남았어요? (예)

 

스님, 질문하고 싶은데요.

Q수행자 질문: 테라와다 승단에 비구니가 없었잖아요. 없는 걸로 돼있잖아요.

그런데 그냥 제가 일반 재가자로서 이해가 안 되는 게 부처님이 계실 때 부처님이 계를 주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비구니가 없는 상태에서 비구니가 비구들에게 계를 받아서 계가 형성이 된 거잖아요. 그러면 그냥 저는 그냥 일반 상식으로 했을 때 비구 계단이 남아 있으니까 비구니가 없어지셨어도 비구니님에게 비구님이 다시 이렇게 계를 주시면 될 것 같은데, 왜 그게 안 되는 건지 이해가 안 되거든요.

 

A스님 답변: 1187년도 86년도인가 하여튼 비구니 계단이 맥이 끊어진 게 그때였거든. 그러니까 거의 천 년 전에 테라와다 상가에서는 비구니가 사라져 버리게 됐는데, 아까도 얘기했지만은 출가 비구 비구니가 받는 수계 방법은 딱 부처님 당시 때부터 정해져 버립니다. 우빠삼빠다로.

비구니는 이 두 군데에서 출가를 해야 돼. 비구 스님들이 있는 곳에서 한번 우빠삼빠다 출가 의식을 해야 되고, 그다음에 비구니가 있는 데서 한 번 해야 되고, 두 번 해야 됩니다. 그게 이제 부처님 당시 때 딱 정해져 버리게 됩니다.

 

이런 형태들을 띠고 있는 상태인데, 물론 비구니가 없어지고 나서 지금 아마 전 세계에서 테라와다 비구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알고 있기로는 한 5번 정도 그런 행사가 있었어요. 한국 스님들이 1번 한 적이 있고 인도 가서, 또 스리랑카에서 한 2번 한 적이 있고, 그다음에 저 호주에서 한두 번 한 적이 있고, 비구, 계를 준 스님들은 그 비구 승단에서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징계 내용이 뭐냐면

지금 현재 비구니 상가가 존재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구니가 되려면 비구상가에서 한번 출가해야 되고 비구니 상가에서 한번 출가를 해야 되는데, 비구상가에서 니가 스님들을 10명을 만들어가지고 비구니계를 준다 해가지고 비구니가 형성이 되는 게 아니다.

비구니 상가가 없기 때문에 이거는 비구니가 될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 왜 너는 비구상가에서만 계를 주고 비구니라고 부르느냐? 하고 상가에서 질책을 하게 됩니다.

비구 스님도 여기에 대해서는 답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비구니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도 그 욕을 들어먹으면서 자기의 불이익을 감수해 가면서도 그렇게 계를 준 스님들이 있어요. 그건 왜 그럴까? 비구니 상가가 형성될 때까지를 기다리는 거라. 쉽게 말하면.

비구 상가에서는 계를 받아가지고 존재를 한다고 하더라도 비구니 상가가 존재를 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비구니 상가가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상가가 만들어지려면 적어도 기본 단위가 10년 이상이 돼야 돼요. 비구니 계를 줄려면 3사(三師)는 어떤 경우엔 10년 이상이 돼야 되거든. 그러니까 계를 주고나서 10년 이상이 지나야만이 비구니 상가에서 다시 계를 줄 수가 있는 거라. 아마 10년이 지나고 나면 비구니 상가가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단 문제가 되는 게 뭐냐 하면, 그러면 그 전에 준 계는 성립이 되는가? 2군데 비구 비구니 승단에서 계를 받아야 되는데, 1군데 밖에 받지 못했지 않느냐? 그럼 이 비구니가 10년이 지난다고 하더라도 비구니로서 승인되지 않는 상태에서 10년이 지난 것들도 승인을 못 받는 거라.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이제는 어떤 개혁적인 것이 나오기 전에는 비구니 승단을 살릴 방법은 없다. 하고 단언을 딱 내려버립니다. 진짜 없을까요?

 

Q수행자 질문: 최초에 한 번은 만들어야지, 최초에 한 번은 만들어 놓아야 되지.

A스님 답변: 한 번도 만들 수가 없는데 어떡할 거라? 단 조건이 여성이 출가를 하지 않고 아니면 뭐 승인되지 않는 비구니로서 출가를 한다고 하더라도 아라한이 되어버릴 경우, 아라한으로 존재를 하는 여성이, 쉽게 말하면 아라한이 되면 어차피 출가를 해야 됩니다. 세속에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러면 그 아라한이 적어도 4명 이상이 존재를 해버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비구니 승단은 만들어져 버리게 됩니다. 승단이 아니면 아라한이 살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아니면 이 세상에 몸을 버려야 됩니다. 테라와다 불교에 의하면.

그럼 어떻게 할 거야? 4명이 이 세상에 만약에 존재를 한다. 승단을 승인을 안 해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구니 승단 왜 인정 안 해주느냐고 성질내지 말고 빨리 아라한이 돼. 그 길 밖에는 다른 답이 없어.

 

Q수행자 질문: 아라한이 4명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걸 누가 인정을 해줘요?

A스님 답변: 아라한은 아라한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아직 그렇게 인정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스리랑카에서 나오는 디빠왕사 같은 경우에 보면 부처님의 정법이 5천 년을 간다 하는 게 있습니다. 그거에 의할 것 같으면 지금 현재 세상은 아라한이 존재할 수 없는 시대다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극단적인 얘기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존재를 못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지런히 노력해서 아라한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그러는데 내보고 자꾸 보수적이다고 그러는데, 그건 보수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부처님 당시 때 만들어 놓은 출가 형식들을 지금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어떡할 거라?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나도 답답해. 그런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그걸 바꿀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우도 없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그런 비구니가 존재를 하지 않는 대신에, 비구니와 버금가는 쉽게 말하면 청정녀들을 각각의 나라에서는 존재를 합니다.

'매치' 그다음에 '딸라신' 하는 그런 형태들. 단지 뭐 탁발도 하고 수행 지도도 하고 다 하는데, 쉽게 말하면 버마 같은 경우 '샤알레이' 같은 경우에 문제는 뭐냐 하면 상가가 안 됩니다. 그래서 상가의 고유한 행사를 할 수가 없게 되는 거라. 갈마를 할 수도 없고 비구니를 다시 만들 수도 없고, 그러니까 상가 행사를 못하기 때문에 지금은 출가자는 아니게 되는 거라.

 

Q수행자 질문: 그런 걸 보면 우리나라의 대승의 비구니 스님들이 참 ... 있는데, 참 좋은 점이 있는데...

A스님 답변: 그런데 대승은 아예 뭐 비구고 비구니이고 인정을 못 받고 있는데.

(수행자: 비구니 스님들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데요)

A스님: 그래서 그거는 그걸 차별하기 위해서 테라와다에서 그리 하는 건 아닙니다.

그 형식이 이미 부처님 당시 때 정해져가지고 확정돼 버렸기 때문에 바꿀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타까운 걸 왜 모르겠어? 그러니까 빨리 아라한이 돼. 아라한.

 

Q수행자 질문: 아까 해피스님께서 삼세를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전생 현생 내생이라는 표현을 해주셨는데요. 이러한 태어남을 테라와다 식으로 정확하게 표현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태어남이라는 거 그러니까 길라잡이에서는 재생연결식이 되어서 이렇게 태어난다고 그렇게 하잖아요.

A스님 답변: 아, 12연기에서 과거 현재 미래 어디어디에 해당이 되느냐?

Q수행자: 그래서 죽을 때 태어날 때를 경전에 입각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되는지?

A스님: 그거는 그걸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서 각각 틀립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써 연결해서 설명하는 방식이 있고, 현재에서 다 연결해서 설명하는 방식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걸 단정 지어서 요것이 맞다 하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Q수행자: 저희가 이제 그 대승이라든지 뭐 이렇게 얘기를 하거나 아니면 아트만이라는 그런 부분들을 얘기를 할 때 저는 지금 이제 길라잡이식으로만 설명을 드렸는데 혹시 다른 설명법이 있는지 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면 받아지닐려고 하거든요.

A스님: 지닐 필요도 없고 그거는 이미 시중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 두 가지 방식으로 지금 설명들을 하고 있습니다.

Q수행자: 한 가지만이라도 설명해 주세요.

A스님: 근데 과거 현재 미래를 12연기에 대입을 시켜가지고 하는 방식이 있고, 또 12연기를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니고 현재에서 다 대입을 시켜가지고 하는 방식이 있고, 그 2가지 방식이 다 지금 통용되고 있는 겁니다.

 

Q수행자: 그 제 질문은 길라잡이에서는 죽음의 마음 다음에 재생연결식이라는 표현을 하잖아요. 그러면 경에서는 그걸 어떻게 표현을 하는 건지요?

A스님: 당연히 그렇죠. 죽음 이후에는 재생연결식이죠. 재생연결식인데, 그걸 현세에서 보는 재생 연결식으로 할 것이냐? 쉽게 말하면 한 찰나가 지나고 나서 한 다음 찰나가 일어나는 것도 죽음과 재생연결식으로서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현세에서 그게 다 형성이 되는 거고,

그렇지 않고 몸을 버리는 상태 의식이 완전히 끊겨지고 다음 쉽게 말하면 죽음의식 다음에 재생연결식이 될 것 같으면 과거와 현재가 되는 형태가 될 것이고.

그거는 그러니까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서 다 차이가 난다는 거라.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Q수행자: 그럼 경전에서 죽음의 마음도 나오고 지금 생명의식도 나오나요?

A스님: 예. 그러한데 스님의 입장에서는 굳이 과거 현재 미래는 존재하지만, 의식의 부분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할 필요성은 없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스님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정답이라고 얘기는 할 수는 없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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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

【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1. 불교 개론 2. BC 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3. 부처님의 탄생·출가·성도·입멸 시기  1. 불교 개론  BC 6세기에 인도에서 태동한 불교는 아소까 왕 시대인 BC 3세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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