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테라와다 불교사-1 (불교개론) (20160319.서울)

담마마-마까 2022. 5. 26. 09:00

https://youtu.be/1OPDwK4y-js?si=czV5YyTW0PHtkrjv

 

* 테라와다 불교사-1 (불교개론) (20160319)

테라와다 불교사 교재

1. 불교 개론

2. BC 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

3. 부처님의 탄생·출가·성도·입멸 시기

4. 부처님 시대의 왕들

5. 제1차 결집

6. 제2차 불교 결집

7. 제3차 불교 결집

10. 제4차 결집 - 불교 경전의 문자화

16. 현재의 테라와다 불교(테라와다 불교의 원칙과 특징들)

 

【 테라와다 불교사 법문 필사】

 

오전 시간에는 테라와다 불교사하고, 오후에는 수행에 관한 것들을 하고,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테라와다 불교사 꼭 배울 필요가 있어요? 이렇게 보면 됩니다.

 

깨달음에, 성자에 이르르는 사람들은 택법각지가 뭔지 그거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칠각지라고 하는 거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징검다리와 같습니다. 꼭 비유해서 얘기하면 우주에 궤도를 그리는 우주선 같은 경우에는 지구에서 쏘면 1단 로켓 분리되고 2단 로켓 분리되고 그렇게 쭉 분리되고 마지막에는 자체적인 동력으로 인해서 우주 궤도를 선회하게끔 돼있습니다. 그 우주를 선회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1단 로켓, 2단 로켓, 3단 로켓이 있어야 그걸 돌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거 궤도를 돌 때는 그 1단 2단 3단 분리된 로켓은 전혀 거기에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볼 것 같으면, 깨달음의 단계에서 볼 것 같으면 칠각지는 갖추어야 될 필요성이 전혀 없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이미 소용이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런 궤도를 돌려고 할 것 같으면 지맘대로 거기 가서 지혼자서 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칠각지가 하나씩 하나씩 개발되어져서 그것들이 다 갖추어지게 됐을 때 그 궤도를 도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봤을 때는 배움의 단계에서는 칠각지가 필요한데 배우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칠각지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교학을 배운다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의미들을 가지게 됩니다. 실제적으로는 나중에는 그것이 있든 없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의미가 없는 것들이 돼버린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그것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만약에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지혜가 개발되는 것들이 있다, 그러면 지혜도 열여섯 단계가 쭉 있습니다. 근데 해탈한 사람들은 그게 필요할까?

 

예를 들면 누가 나를 욕을 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요? 그 욕한 것을 듣고 ‘어, 소리가 들렸다’ 하고 알아차림으로 인해가지고 그 소리들리는 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거는 어떻게 해서 그러는 거라? 욕하는 대상이 있고, 물질적인 현상이 있고, 그 소리라고 하는 물질적인 현상이 있지만, 내가 알아차리는 것은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알아차렸죠? 그러면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겁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분리를 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정신적인 현상으로서 소리가 들리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니까, 물질적인 게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라지는 것을 볼 거 같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왜 나에게 욕을 했느냐고 할 이유가 전혀 없어져 버립니다. 오히려 평온한 상태에서 대응을 하게끔 됩니다.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분리를 할 수 있는 지혜만 있으면, 적어도 그렇게 되면 다툼은 없어지겠지.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사람이 아직은 깨달음의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잖아. 쉽게 말하면 저 사람이라는 게 존재를 하는 거고, 나라는 것이 존재를 하는 거고, 아직 그런 상태에는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의 단계에 도달했다 그러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써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냥 ‘소리들림’ 이라고만 알아차립니다. 그러니까 그 대상이 무엇이든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그렇게 칠 거 같으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을 내가 지금 알았다 해가지고 그것이 깨달음 하고는 관계없는 건데, 단지 단계인데, 내가 그거 알았다고 해가지고 좋아가지고 날뛸 이유들도 사실은 별로 없는 거라. 깨달음의 단계에 들어가서 성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테라와다 불교사를 알고 있다, 그게 여러분들한테 나중에 무슨 의미들을 가지겠느냐 하는 거라. 의미 별로 없죠?

테라와다 불교사를 익혔다고 해서 내가 좀 더 ‘아, 인제 내가 테라와다 불교에 대해서 좀 더 이해를 하는 폭은 좀 넓어지고, 이렇게 불교를 유지하기 위해서 참 어렵게 어렵게 그걸 지켜왔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으로 인해서 환희심은 일어나겠지.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근데 왜 출가한 스님들은 교학을 반드시 배워라 해서 배우게 될까?

그 속에는 테라와다 불교사도 있고, 경전들도 있고, 뭐도 있고, 기초적인 습의들도 있고 다 익혀야 됩니다. 그러니까 횟수에 따라서 1년 지나면, 2년 지나면 배워야 되는 것들이 다 정해져 있다는 거라. 그거 왜 그렇게 다 만들어 놨을까? 그건 내 깨달음하고 전혀 관계가 없는데.

 

이렇게 보면 됩니다. 여러분이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러면 걸어올 때는 걸어온다고 알고, 소리가 들리면 소리가 들린다고 알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사띠다, 사띠는 맞긴 맞습니다. 근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태어날 때부터 아는 것들입니다. 걸어갈 때 자기가 걸어간다고 모르고 걸어가는 사람은 없을 거고, 소리 들리는 것을 모르고 소리 듣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

 

그냥 조금 더 외부적인 대상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을 고요하게 할 수는 있고, 또 분명하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들은 훈련은 되어나갈 겁니다. 그런데 꼭 불교수행이 아니라도 그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잘못 착각을 할 것 같으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써 끝나버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 거라?

 

그것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법을 정확하게 공부를 안 하면 그렇게 됩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법을 정확하게 공부를 했다, 예를 들면 사띠를 할 동안에는 마음은 대상 하나만 알게 된다, 그럴 것 같으면 소리가 들린다 그럼 소리가 들릴 때는 내가 보이지도 않아야 되는 거고, 저쪽 상대방에 대해서 인식하는 것들도 없어야 되는 거고, 단지 소리 들리는 것만 알아차리면 되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안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어, 내가 지금 사띠하고 있는 것은 전부 가짜다’ 하고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또 하나를 더 얘기하면, 대상은 어떤 경우든지 변화하게 돼 있다, 무상한 것이다고 배웠다 할 거 같으면, 소리 들리는 것도 대상이기 때문에 소리 들리는 것이 변해가야 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들이 보여야 되는데, 나는 그렇게 지금 소리 들리는 것은 알지 못 한다 할 것 같으면, ‘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가짜배기를 하고 있다’ 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겁니다.

 

배운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배움을 통해가지고 내가 수행을 할 거 같으면 좀 더 깊이 있게 진짜 그것만 팍 파고들어서 할 수 있는 역할들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근데 그렇지 않고 그냥 배우는 것하고 수행하고 분리가 돼버린다, 그럼 어디다 쓸 거라? 그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작년에 칠청정 했죠? 아무리 칠청정 다 외우고 있다 한들 그게 수행하고 연관이 되지 못하면 그건 의미가 없어져 버립니다.

 

사실은 지금 또 하나를 만드는 게 칠각지 부분을 여러분들한테 줄려고 자료를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사실은 시간이 며칠 더 뒤로 미루어졌을 거 같으면 칠각지를 가지고 했을 건데, 아직 그게 완성이 안 돼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다음 달에 칠각지 부분을 할 겁니다.

 

칠각지는 어떤 겁니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끔 만들어주는 요인입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그럼 칠각지를 배울 이유가 있는 거라.

그런데 자신의 능력을 자꾸 저하시키는 것들에는 뭐가 있어요? 다섯 가지 장애들입니다. 장애가 일어나면 깨달음하고는 관계가 없이 자꾸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다섯 가지 장애와 칠각지는 항상 반대 방향에 있게 됩니다. 요 연관 관계를 잘 설명을 해줘야만이 이게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거고, 그래서 요게 일어났을 때는 이것은 제거를 하고 요쪽 방향으로 가도록 그렇게, 그런 역할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다음 달에는 그걸 하고, 오후에는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팔정도 부분에 대한 것들, 수행에서 요런 요런 부분들이다 하는 것들을 수행하고 연관시켜 가지고 하는 것들을 하게 될 거고,

 

그래서 오전에 배우는 것은 테라와다 불교사라고 하더라도 그냥 그 내용을 숙지할려고 할 것 같으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테라와다 불교사는 수행하고는 실질적으로 관계가 없는 겁니다. 단지 그것이 여러분들하고 관계가 있을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에서 그걸 배우면서 이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갖다가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역사에서, 쉽게 말하면 "얼마나 부처님 가르침이 소중하면 이랬을까" 하는 것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들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나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 환희심을 더 일으킬 수 있는 그런 요인"들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테라와다 불교사를 접할려고 해야 되지, 그렇지 않고 그냥 교리적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해서는, 그거는 어찌보면 남하고 싸우기 딱 좋은 상태가 돼버립니다.

 

마찬가지로 테라와다 불교사는 내가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배우는 것들을 가지고 하는 건데, 이걸 그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그걸 듣고 환희심을 일으키는데, 한국에서는 하면 아마 욕을 할 거라.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적어도 이것 가지고 사량분별을 일으키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단지 테라와다 불교적인 입장에서 그 불교사를 배우는 것이고, 또 내가 만약에 한국 스님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한국 스님의 입장에서 한국 불교사를 한다든지, 그냥 불교사를 한다든지, 불교사의 항목 중에서 테라와다 불교를 끼워넣어가지고, 또는 한국 불교 대승불교적인 입장에서 테라와다 불교를 바라볼 수는 있겠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테라와다 불교사라고 하는 것은 아마 대승불교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는 불교일 거라. 그러니까 본래 불교에서 대승불교.. 대중부와 상좌부 불교 두 개로써 나눠지고, 거기에서 다시 또 부파불교로써 분리되가는 견지를 가지는 것이, 그게 실제적으로는 대승불교적인 입장에서 그걸 바라보는 것들입니다.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그런 입장에서 불교를 배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자꾸 한국에서 하는 것하고 틀리느냐 하지 말고, 테라와다 불교도의 입장에서 불교를 바라보는 입장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들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거는 뭐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런 것이 있었구나 하고 아는 것 정도이기 때문에 이걸 세세하게 할 이유도 없습니다. 여기 보면 여섯 개 항목으로 분류를 해놓았는데 이걸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에 프린트물로 나가는 부분들은 프린트물로 나가겠지만, 그냥 개략적으로 이런 상태가 있었구나 하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1차결집 앞에 부분까지, 이것은 테라와다 불교사 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 프린트물 나가는 것은 테라와다 불교의 결집 부분인데, 테라와다 적인 입장에서 결집은 여섯 번이 이루어졌는데 그 대략적인 것들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그거는 여러분들이 참고로 ‘아, 이런 결집이 이루어졌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불교 개론,

BC 6세기 부처님 당시 때 불교의 문화적 배경은 어떤 것인가?

그다음에 여러분들이 잘 오해하고 있는 부처님 탄생·출가·성도·입멸 시기가 언제인가?

그다음에 네 번째 부처님 시대의 왕들은 큰 의미는 없습니다.

오늘은 1차 결집 앞에 부분까지, 그것까지만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1. 불교 개론

 

불교 개론에서는 뭘 다루어 놓았느냐면, 과연 여러분들이 불교를 배울 때 뭘 배워야 될까?

예를 들면,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다른 스님들하고 조금 의견들이 안 맞았던 것이 뭐냐면, 나는 태국 방식으로 삼귀의 오계를 주고 하거든. 다른 스님들은 버마에서 계를 받고 거기서 수행을 하고 왔으면 버마 방식으로 계를 줍니다. 그런데 어떨 때는 나도 버마 방식으로 주기도 하고 아니면 오늘 같이 약식으로 해가지고 계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왜 똑같이 안 하고 자꾸 이랬다 저랬다 합니까?”

자꾸 헷갈린다는 거라. 아까도 했지만 오계 끝나고 나면, "이마니 빤짜 식카빠다니 사마디야미" 그걸 만날 세 번 하라고 해가지고 세 번 했는데, 이번에는 "이마니 빤짜 식카빠다니" 까지만 하고 "사마디야미"는 빼먹어버리고 나서 바로 "실레나 수가띵 얀띠"로 바로 연결해버리거든. 왜 그렇게 하느냐는 거라.

사실은 그게 내가 틀리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하는 방식이 있어.

그러니까 “이와 같이 오계를 잘 받아지니겠습니다.” 하고 할 때는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건데, “이와 같이 오계를 잘 받아지니면” 할 거 같으면 "사마디야미"가 빠져버리는 거라. “잘 지니면 이런 이익들이 있다” 하고 할 때, 그걸 스님이 할 때는 "사마디야미" 빼버리고 연결해버리고 하는 수가 있거든. 그거는 빨리어를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걸 아는데,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버마 방식일 거 같으면 "오까사 오까사" 부터 해가지고 시작을 합니다. "오까사"는 쉽게 말하면 찬탄하는 "사두"와 비슷한 역할들을 합니다. 그 방식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 방식도 안 맞으니까 좀 이상하다 이렇게 하고, 독송하는 음성도 조금 차이가 나는 거고 이렇게 됩니다. 근데 왜 이럴까?

왜 이런 걸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릴까? 중요한 것은 안에 내용물인데.

 

삼귀의 오계를 주면서 "나모 땃사" 안 하는 경우 없고, "붓당 사라낭" 안 하는 경우가 없고, "빠나띠빠따" 안 하는 경우는 없는데, 그러니까 삼귀의와 오계는 반드시 하게끔 되어 있는 건데, 중요한 것은 그건데, 삼귀의 오계를 받는 것 그게 중요한 건데, 곁다리 붙은 것들 계를 청하는 문장이라든지 뒤에 "이와 같이 계를 지키면 어떻게 된다" 든지 하는 그런 부분에 차이가 나는 것을 가지고, 왜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하느냐는 거라.

 

(수행자 : 전통...)

물론 그렇게 전통적으로 해왔던 겁니다. 그런데 전통은 견해가 아닙니까? 견해잖아. 전통이다 하는 것은 하나의 견해입니다. 견해로써 형성되어온 것들입니다. 견해의 다섯 가지 분류 중에는 내가 형성된 견해도 있고,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것들도 있고 하는 것들이 포함됩니다. 그러니 견해는 어쨌든 제거를 해야 되는데 그걸 제거를 안 하고 자꾸 그걸 가지고 시비를 붙느냐는 거라.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불교를 배우려면 그걸 배워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알맹이를, 중요한 알맹이를 배워야 되는 것이지, 밖에 것 가지고 자꾸 시비를 붙지 말라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을 해줘버리면 돼! 그래서 버마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버마 현지인들이 있는 곳에 가서는 버마식으로 하면 되는 거라. 스리랑카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가서는 스리랑카 식으로 하면 돼.

그걸 못할 경우에는 “나는 버마식 모르니까 나는 태국식으로 하겠습니다.” 하고 태국식으로 하면 돼. 그러면 일반인들은 태국 방식으로 따라하면 되는 거라.

 

그게 이 불교 개론에서 얘기하는 부분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스리랑카에서는 스리랑카 방식 스리랑카 불교가 있고, 한국에는 한국 불교가 있고, 버마는 버마 불교가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버마 불교라고 하는 것은 버마식 불교인 것이고 그것은 하나의 형식인 것이지, 그리고 스리랑카 불교라는 것은 스리랑카식 불교라는 거라. 그런 형식인 것이지 그 형식이 맞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렇지만 그걸 애써 무시할 필요도 없다는 거라. 그냥 그것대로 인정을 해주고 그 속에서 중요한 것은, 알맹이는 똑같기 때문에 알맹이들만 추리면 되는 거라.

 

한국에서 있다 해가지고 그러면 나는 한국방식으로 해야 되느냐? 스님들이 가끔씩 그럽니다. “너는 한국 살면서 왜 한국 승복 안 입어? 이상한 그 옷 입고 있느냐?”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럼 내가 그렇게 따라야 됩니까? 그렇게 따라야 될 때 잘못되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봐야 됩니다.

 

전통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런 것들입니다. 알맹이에 비춰봤을 때 형식을 규정하고 있는 것들이 이 알맹이의 내용하고 부합되는지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가는지를 살펴봐야 됩니다.

아마 내가 한국 승복을 입고 있을 거 같으면 당연히 저녁도 먹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제사나 여러 가지 의식들도 하고, 이렇게 해야 될 겁니다.

그런데 불교 사분율이든 오분율이든 어디를 보더라도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없어. 테라와다 불교하고 대동소이해. 비슷비슷해. 그러면 적어도 내가 기본적인 출가한 스님들은 요렇게 요렇게 살아야 된다 하는 것들을 그대로 견지해 나가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한국에서라고 해가지고 한국식으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가 과연 출가한 사람으로서 나에게 이 길을 계속 가게끔 하고 법에 눈을 뜨게끔 해주는 곳이 어딘가?

나는 한국이 아니고 저쪽 테라와다 불교에서 그랬거든. 그러니까 그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그 전통을 지키는 것이고, 그리고 그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불교에 대해서 눈을 탁 뜬 것이 어느 스님으로 인해서다, 그럴 것 같으면 항상 죽을 때까지 아마 고마움을 가지고 지니고 있을 거라. 또는 어느 사찰에서 내가 마음의 평온을 찾아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동력들을 쭉 했다 할 것 같으면 그 사찰에는 자주자주 가게 되는 거라. 그와 같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꼭 한국이라고 해서 한국식 불교를 해야 되는 이유는 없습니다. 나는 태국에서 거의 자라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스리랑카 갔으면 태국식으로 해? 그렇지는 않거든.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리랑카에서는 스리랑카 방식으로 합니다. 버마에 가면 버마 방식대로 하고. 그런데 그쪽에서는 크게 문제가 안 됩니다. 본질을 훼손하지 않기 때문에! 근데 본질을 훼손하는 영역에 올 것 같으면 문제가 달라져 버립니다.

 

불교를 바라볼 때 여러분들이 항상 그 점을 잘 살펴봐야 됩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재가자로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것들을 쭉 공부를 했다. 그럴 것 같으면 재가자로서 살아가는 방식은 저쪽 테라와다 불교국가나 한국이나 대동소이합니다. 근데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잘못된 것들이라는 거라. 그건 바꾸어야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 의미에서 불교 개론은 어떤 경우든지 그 전통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하나의 견해인 것이고, 그리고 그 견해라고 하더라도 그걸 무시할 이유는 없는 거고, 그냥 인정해주면 되는 것이고, 그 대신에 그 속에 있는 알맹이들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들을 취할 수 있도록 그렇게 자꾸 해야 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2. BC 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

 

그다음에 "BC 6세기 불교의 문화적 배경" 하겠습니다.

BC 6세기에는 어떤 게 있었습니까? 부처님이 태어난 시기를 얘기합니다. 아마 이거는 여러분들이 대부분 알고 있을 겁니다. 바라문이라는 인도의 거대종교에 대한 반기로써 사문집단이 생겨나게 되고, 그 사문집단 중에 하나가 부처님입니다. 근데 그 사문집단들은 바라문에 대해서 반기를 들다 보니까, 각각의 주장들을 하게 됩니다. 그걸 보통 부처님이 "62가지 다른 견해들이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됩니다.

 

근데 왜 불교가 태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을까? 왜 그럴까?

부처님 당시 때 6세기에 어떤 일들이 있어서 그럴까?

이렇게 한번 봐 보십시요. 지금 한국 분들한테 "경을 배우지 마라. 경은 스님들만 배우는 것이지, 재가자들은 교리를 공부하고 경전 보는 거 아니다" 할 것 같으면 아마 그 사람한테 증오심이 들 거라.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재가자들을 그냥 봉사 만들려고 저러느냐 하고 아마 생각할 거라. 그런데 불과 한 오십 년 전만 해도 다 그렇게 인식했다는 거라. 재가자들은 경 배우면 안 되고, 그냥 기도하고 막 이렇게만 해야 되는 것이지 경전 배우고 하는 것은 생각조차 잘 못했다는 거라. 근데 지금은 완전히 바뀌어버렸잖아.

 

인도 당시 때 인도 사회에는 그전에는 바라문들이 거의 인도 사회를 이끌고 가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바라문이 아니라 쉽게 말하면 인제는 일반인 중에서 좀 똑똑한 사람이 나와가지고 그 똑똑한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익을 취하고 또 왕이 되고 이런 사회로써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무조건 일반인들은 우매하게 그냥 “내 말을 따라라!” 하고 하던 말이 안 통해. 안 통하게 되는 거라. 바라문들이 모든 것들을 통제해가지고 끌고 가는 시대에서 인제는 바뀌어버리게 되는 거라.

 

경제적으로도 바라문보다도 더 부유해지게 되고, 정치적으로도 사회를 이끌어 나가게 되고, 이런 여러 가지 변화들을 겪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인제 바라문들이 얘기하는 가르침을 그대로 듣지를 않는 거라. 지금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왜 우리가 못배워야 되는데?” 하고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거라.

근데 배울려고 하더라도 이때까지 못 배웠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의 체계들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각각 다른 견해들을 주장을 하게 됩니다. 이쪽에서는 이 주장, 저쪽에서는 저 주장, 각각 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출난 것이 그래도 불교이고 또 자이나교 들이 특출난 것이었습니다. 그 두 개가 보통 특출난데, 왜 이 두 개가 특출나게 됐을까? 쉽게 말하면 모든 것들은 바라문들이 다 좌지우지 한다는 사상을 가지는 것이 이미 틀렸다는 것은 입증이 됐습니다. 꼭 출가한 스님들만이 경을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사회에는 통용이 안 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불교가 어떤 점이 뛰어나서 불교가 그 바라문들이 얘기하던 것을 완전 뒤집어버리고 그 종교들을 없애버리는 결과들을 낳게 됐을까?

 

부처님 이후부터 인도에는 바라문교가 없어져 버리고 바라문교가 바뀌어버리게 됩니다. 아,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해가지고 바뀐 것이 뭐냐면 힌두교로 바뀌어버립니다.

그전에는 바라문이라고 하는 브라흐마 라고 하는 창조신이 모든 걸 창조도 하고, 주물럭거리기도 하고, 파괴도 하고 자기가 혼자 다 했는데, 인제는 하나의 신 가지고는 안 되겠다 싶어가지고 여러 신을 만들어 냅니다. 이 신은 창조하게끔 하고, 요 신은 파괴하게끔 하고, 요 신은 유지하게끔 하고, 이런 여러 가지들을 만들어 놓아서 하는 것으로 바뀌어버리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불교에서는 어떤 뛰어난 점이 있어서 그럴까? 왜 사람들이 불교에 혹하게 됐을까? 신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거는 새로운 종교가 태어나게 한 분들이 주장하는 것들도 전부 한 신이 모든 것들을 좌지우지 한다는 사상에서 또 다른 것으로써 바뀌어져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고 얘기를 할 때도 있고,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뭐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사후 죽고 나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맘대로 살아라."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까 신에 대해서 부정하고 긍정하고 하는 차이로 인해가지고 하나의 사상들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불교 하나만이 독특하게 신하고는 전혀 별개로 "네가 잘하면 요렇게 될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불교가 태동되자마자 급속도로 불이 번지듯이 확 퍼졌던 이유가 그런 것들입니다.

 

인도에는 반드시 불교가 그렇게 꽃피울 수 있는 상황 자체가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럴 때 불교가 탁 튀어나오니까 사람들이 ‘어,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나도 신이 될 수 있네!’ 또는 ‘내가 열심히 노력할 거 같으면 적어도 다음 세상에는 좀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게 되네’ 그전에는 무조건 정해져 있었는데, 그렇게 바뀌게 되는 거라.

그게 BC 6세기 때 인도의 상황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얘기한 것이 과연 뭘까? 뭘 얘기했을까?

뭘 얘기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 이 가르침대로 따라가봐야 되겠다" 하고 얘기하게 되는 걸까? 뭘 얘기했을 거 같아요?

한국적인 상황으로 한번 봅시다. 스님이 보는 관점에서는 "아직은 한국에 테라와다 불교가 뿌리내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하고 보는 입장입니다. 부처님 당시 때 인도의 상황이 되어야만이 불교가 퍼져나가듯이 되는데, 한국적인 상황은 아직 그런 상황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한국 불교적인 상황에서 불교에 대해서 이게 완전히 틀렸다고 얘기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맞다고 얘기하기도 애매하고 그런 것이 지금의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아닌데" 하는 것이 강하게 뭔가 일어나가지고 이걸 바꾸어야 된다는 마음이 일어나져 있는 상황이 돼야만이, 반대적으로 "아, 그러면 진짜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을 배워보자" 하는 것들이 나오는데, 지금은 다들 그런 상황은 아니라고 스님은 판단을 하게 됩니다. 아마 한참 더 시간이 걸리겠지.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역할을 분명하게 압니다.

 

부처님이 가르친 것은 이런 것들입니다.

여러분도 열심히 노력을 할 거 같으면 적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거라. 지금 현재 적어도 행복해지게, 또는 지금 현재 다른 사람들하고 조화롭게, 다른 어떤 사람하고 구별 없이 동등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이 더욱더 열심히 노력할 거 같으면 이 세상을 뛰어넘어 버린다. 내가 곧 신과 마찬가지의 입장에 도달할 수 있다. 그전에는 신은 아주 높은데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렇지 않거든. 그래서 천상세계를 꿈꾸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 죽고 나서 극락에 갈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것은 지금 자연스러워져 있잖아. 근데 예전에는 그걸 못했다는 거라. 인제는 극락에 가서 내가 신들하고 같이 놀 수 있는 걸 꿈꿀 수 있는 상황들이 되는 거라.

그리고 더 나아가 가지고 내가 이 지긋지긋하게 살아가는 것들, 힘든 것들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들을 인지를 하게 되는 거라. 사람들이 다 아는 거라.

 

근데 왜 한국에서는 테라와다 불교가 뿌리내리기가 참 힘들다 하고 얘기하느냐면, 이 세 가지 조건들을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없다는 거라. 한국에는 아직.

 

그리고 꼭 불교가 아니더라도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리고 여러 다른 스님들, 다른 한국 스님들로 인해서도 "아, 그것들이 참 좋다, 그 길대로 따라가도 무리가 없다" 하는 것들을 얼마든지 충족시켜 줍니다. 그리고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신과 같은 경지에 도달한다 하는 거, 그거는 여러 가지 의식을 통해가지고 이미 그렇게 한국에서는 만들어놨습니다. 죽고 나서 극락 보내주는데 얼마나 좋아, 그렇잖아?

 

그 두 가지는 이미 한국에서 틀리든 맞든 간에 이미 여러분들한테 충족시켜 주고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굳이 완전하게 해탈에 이르는 것들은 충족을 못 시켜주고 있지만 다른 것들은 충족을 시켜주고 있기 때문에, 반사 이익적으로 그냥 ‘아, 이거는 틀린 것 같은데’ 하면서도 그걸 바꿀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처음에 스님도 그랬어요. 한국에 와가지고 그런 상황을 인지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틀린 부분만 자꾸 개선할려고 했었어요. 그러니까 죽고 나서 천국에 보내주는, 극락에 보내주는 것들은 이게 교리적으로 안 맞기 때문에, 극락에 보내주는 방법을 갖다가 다른 방법으로 다른 의식을 통해가지고 극락에 보내주는 것들을 채용을 했어요. 그래서 빨리어로 게송하는 것들을 가지고 대처를 했습니다.

 

처음에 스님이 한국에 와서 실수를 한 것이 그 부분인 거라.

근데 실제적으로는 죽고 나서 극락에 보내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그걸 제도권에 있는 걸 그대로 도용해가지고, 요 방법이 죽은 이들을 위해서, 죽은 이들에게 아무리 얘기를 해봐야 극락에 갈 수가 없으니까 죽은 이들을 위해서 의식하는 것들을 살아있는 사람들한테 의식을 하면 되지 않느냐, 그래서 자기가 극락에 갈 수 있는 조건들을 짓도록 만들어주면 되지 않느냐, 하고 그렇게 채용을 했어요.

 

의식도 "너도 저 사람과 같이 죽는다. 그러니까 잘 살아라." 하는 것들을 일깨워주는 게송들을 했거든. 일견 맞아. 근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이 사람들이 거기에 딱 안주를 해버리는 거라. 의식이라는 범주 내에 한 고리로써 들어가버리게 되는 거라. 스님이 실수했던 것이 그 부분인 거라.

그 부분은 의식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는데 굳이 왜 그 의식에다가 그걸 집어넣어가지고 만들었느냐는 거라. 의식은 그게 필요가 없는 것일 거 같으면 과감하게 잘라버려야 되는 것이라. 잘라버리지 못하고 그 방식을 형식만 바꾼 것밖에 안 되는 거라.

의식으로 인해서 여러분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의식은 없애버려야 되는 거라.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걸 왜 형식을 바꾸어가지고 했느냐는 거라.

 

그렇게 실패하고 나서는 그 뒤로는 '아, 이게 아니다. 한국에 와가지고 내가 한국적인 상황들을 완전하게 인지하기 전까지는 꼼짝 말고 움직이지 말아야 되겠다!' 해가지고 그 뒤부터는 아예 안 움직였어요. 완전하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될 때까지.

지금도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방향은 정해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은 한국에 그래도 부처님이 온전하게 얘기한 가르침을 갖다가 퍼질 수 있게끔 하는가 하는 것. 그렇지만 내가 죽을 때까지는 아마 안 된다는 걸 나는 압니다. 너무 희망가지지 마. 그러니까 ‘스님이 어떻게 해주겠지’ 그거는 안 되는 거라.

 

어쨌든 이런 것들이 불교가 태동되게끔 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적어도 한국에 있으면서 불교가 태동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불교를 배울 때 무엇에 중점둬야 되는가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걸 모를 것 같으면 아까 스님이 실패하듯이 딱 그런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쉽게 예를 들면 아, 테라와다 불교를 배우고 수행을 열심히 하면서도, 한국에서 무슨 정초기도 한다, 뭐 한다 할 것 같으면 거기 가서 정초기도도 하고, 이렇게 되게 됩니다. 지금 그런 사람들 좀 있죠? 잘못됐다고 알 것 같으면 탁 끊을 수 있어야 되는데, 끊지를 못하는 거라. 그게 뭐 때문에 그러냐면 그 상황 자체를 인식을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라.

 

불교가 뭔지, 부처님 가르침이 왜 필요한지 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주변적인 것들을 가지려고 하고, 그 속에 함몰돼버리는 결과들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교리적으로만 자꾸 배울려고도 하지 말고, 그렇다고 수행만 한다고 뭔가를 다 놓쳐버려서도 안 되는 거고.

그런 의미에서 불교사를 배울 때는 중점둬야 되는 것이 "내가 뭘 중점적으로 해서 배워야 되겠다" 하는 것들을 잘 생각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3. 부처님의 탄생·출가·성도·입멸 시기

 

그다음에 부처님의 탄생·출가·성도·입멸 시기. 이 부분은 짧게 합니다. 이건 별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딱 정해져 있습니다.

 

입태는 음력 6월 보름, 부처님이 마야 부인의 태에 든 것이.

그리고 탄생은 음력 4월 보름.

출가는 음력 6월 보름.

깨달음에 이른 날은 음력 4월 보름.

열반에 든 날도 음력 4월 보름. 그렇습니다.

 

「탄생을 기준으로 하여 나이를 계산해보고」 하는 것들을 쭉 적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돼요?

부처님 태어나고 성도하고 입멸하신 날은 동일한 날입니다.

부처님이 입태에 들은 날은 음력 6월 보름인데, 6월 보름날은 무슨 날이에요?

부처님이 처음 법을 설한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님들도 입태에 드는 날에 안거에 들어갑니다.

참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죠?

그리고 자료들을 설명하면서 쭉 해놓았습니다.

 

「부처님의 일대기를 정리해보면」

지금 이것은 세계적으로 다 공통된 겁니다. 불기 몇 년이라고 써진 것들은 이미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부처님이 탄생하신 연도가 다 틀렸습니다. 여기서는 이 연도, 어떤 데는 BC 5세기, 4세기 각각 다 틀렸는데, 지금은 전 세계가 동일한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테라와다 방식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그게 1956년도에 이미 정해졌습니다. 여러분들도 인제는 이미 정해져 있는 상태인데 굳이 그걸 옛날 방식을 따라가지고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보면 됩니다.

BC 624- 부처님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때,

BC 595- 출가한 때.

BC 589- 깨달음을 이룰 때

BC 589- 최초의 설법

BC 589- 두 번째의 설법

 

첫 설법은 음력 4월 보름에 깨달음을 성취하고 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7*7 49일을 지내죠? 그러고 나서 바라나시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딱 두 달 후에 첫 설법을 하게 됩니다.

그게 문헌상으로 나와 있는 것이 그냥 가짜가 아닌 게, 인간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 그걸 계산을 해보면 딱 맞습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성도 하는 날이 4월 보름이 되지 않고, 여러분 말대로 한국식으로 2월 보름이 됐다, 그럼 처음 법을 설한 날은 6월 보름인데, 그럼 6월 보름까지는 몇 개월이야? 4개월입니다.

 

49일을 뺀다고 하더라도 두 달 반 넘어를 갖다가 그 거리를 걸었다? 그거는 굼뱅이가 걷는 걸음이라는 거라. 그거는 안 맞는 거라. 4월 보름에 깨달음을 이루어야 만이 49일이 지나고 나서 바라나시까지 가는 걸음을 계산했을 때, 하루 1유순 씩 계산해가지고 해보면 바라나시까지 갈 수 있는 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6월 보름이 되게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설법.

이 두 번째 설법이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첫 번째 설법을 하고 나서는 꼰단냐가 예류과에 이르고, 나머지 사람들도 점차적으로 예류과에 이르렀는데, 아라한이 된 것은 아닙니다. 아라한이 돼야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증명이 되는 건데, 아라한이 될 때가 언제냐면 두 번째 설법을 듣고 됩니다. 그때 「아낫따락카나 숫따(Anattalakkhana Sutta)」라고 해가지고 「무아상응경」을 설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무아상응경을 설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깨달음의 단계들이 보통 어떻게 진행이 되느냐면, 나중에 오후에 팔정도 하면서 설명을 하겠지만, 마음이 평온해지고 고요해지고 나서, 그러고 나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항상 선한 것들을 행하게 되고, 그러면서 수행을 하게 되는 거고,

그렇게 하다 보면 유신견이 떨어져나가고, 의심까지 떨어져 나가고 하는 상태에서, 그리하더라도 자아의식은 끝까지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탁 떨어져버리고 나면 그때야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마 모르긴 하더라도 처음에 부처님을 따르는 다섯 제자들도 처음에는 마음으로 거부를 했잖아. 그러다가 ‘받아들여 보자’ 하는 것으로 마음이 바뀌고 나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깨끗해지고 나서, 그러고 나서 그걸 받아들이게 되는 거고. 받아들여서 듣게 되니까 듣게 되는 것이 있는 그대로 듣게 되는 거라. 그래서 유신견이라고 하는 내가 이때까지 가지고 있던 견해들이나 이런 것들은 사라져 버리고, 그래서 저분이 얘기하는 것들은 틀린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들이 증명이 되는 거라.

그래서 첫 설법했을 때 예류과에 이르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다가 계속적으로 수행들을 삼개월 동안 하고 나서 마지막에는 무아가 탁 드러나게 될 때 그때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순차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설법이 똑같이 BC 589년 아살라하달 음력 6월 20일 목요일.

 

그다음에 그러고 나서, 나중에 다시 55명의 제자들이 생기고 나서는 전도 선언을 하게 됩니다. BC 589년에.

 

그러니까 바로 제자가 생기자마자, 55명이 그런 식으로 아라한이 되고 나서는 바로 "가라! 가서 이 가르침을 널리 전하라."

 

왜 그렇게 됐을까? 아라한이 되고 나면 인제는 부처님 옆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 혼자서 이 몸을 유지한 상태에서 이 몸을 완전히 버리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자기 혼자서 쭉 살아가게 된다는 거라.

혼자 살아갈 것 같으면 괜히 쓸데없이 모여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 그러면 각자가 흩어져가지고 각각의 지역에서 살아가면 되는데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그걸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게 사실은 어떻게 보면 전도 선언이 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BC 544년(불기 원년)에 부처님이 입멸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탄생·출가·성도·입멸 시기입니다.

 

그 시기는 여러분들이 더 이상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시기는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라고 해가지고 예외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전 세계가 공용화되어 있습니다. 그 부분을 여러분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다음 시간에는 1차 결집부터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전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