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라와다 불자가 갖추어야 할・테라 담마 10가지 (20150709)
오늘은 테라와다 불자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될(Theradhamma) 열 가지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르를 수가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진리를 체험하고 그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방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 10가지가 있다 하는 이야깁니다.
첫 번째가 '테로 랏딴뉴(Thero rattaññu)'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승 밑에서 오래도록 머물면서 적절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익히는 것들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수행대상이 나타나면 어떻게 수행하는 것이 적절한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가? 하는 거라. 예를 들어서 호흡을 관찰하고 있다. 그런데 소리가 들린다. 이때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라? 소리가 들리면 '소리가 들림' 하고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 게 사라지면은 다시 또 호흡으로 돌아가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소리가 들리는 것이 그냥 소리가 들린다고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슨 소리다' 하고 아는 경우들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 소리가 '싫은 소리'로 들리는 경우가 있고 아니면 '좋은 소리'로 들리는 경우가 있고, 이렇게 돼버리면 이미 적절한 방법을 선택하는 기회들을 1차적으로 놓쳐버리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이 수행을 하고 이것을 배우는 것들이 참 소중하다고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은 동료들과 같이 수행하는 것, 도반들과 같이 수행하는 것, 같이 배우는 것이 참 무엇보다 소중하구나 하는 것들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도반들끼리는 수행에 되도록이면 방해가 되지 않도록 또는 공부를 해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얘기들을 자꾸 하게끔 됩니다. 그것은 사실은 도반들 간에도 어떤 것이 적절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빨리어 경전에 '아따삐 삼빠자나(ātāpī sampajāna)'라고 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부지런히 노력해서 분명한 알아차림을 유지해나가라 하고 얘기합니다. 근데 그걸 잘못 이해하면 무조건 자기 혼자만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닙니다.
적절할 때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고 적절하게 대상들을 알아차려나가는 걸 얘기합니다. 집에 불이 났다. 그러면 어떤 것이 적절한 방법입니까? 불구경하고 있는 게 적절한 방법이 아니죠? 불을 꺼야됩니다. 불을 끄는데, 끄러 들어갔다가 내가 죽을 염려가 있을 거 같으면 나는 방어를 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뭔가 물을 뒤집어쓰든지 아니면 젖은 모포를 가지고 가든지, 이렇게 해서 불을 끄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해 나올 때 나도 다치지 않게끔 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내가 죽음을 당한다든지 아니면 불을 끌 생각을 하지 않는다든지 그럴 것 같으면 그건 적절한 방법이 아닙니다.
적절하다고 하는 것은 나에게도 도움이 될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나에게도 이익이 있어야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또한 나도 그로 인해서 마음이 깨끗해지는 방향으로 나가야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로 인해서 깨끗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이걸 적절한 방법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빨리어로 '우빠야 꾸살라(upāya kusal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따삐 삼빠자나(ātāpī sampajāna)'의 세 번째 방법 중에 하나고 '우빠야 꾸살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가끔은 스님들이 탁발을 하면서 스님들의 모습을 볼 때도 있습니다. 어떤 스님들은 탁발하면서 가려가면서 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스님들은 탁발하면서 그냥 주는 대로 받아가지고 가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또는 탁발해온 음식들을 먹을 때 어떤 스님들은 가리고, 어떤 스님들은 가리지 않고 그냥 먹습니다. 또한 탁발해온 음식을 혼자 먹는 스님들도 있고 또 다른 스님들하고 같이 먹는 스님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옛날에 태국에 있을 때 스승님에게 들은 얘긴데, 옛날에 스승님이 거지들하고 같이 살았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라. 왜 같이 살았냐면 이 사람들이 마음이 어떤가 하고 알기 위해서 같이 산 적이 있는데, 거지들은 스님들하고 똑 마찬가지로 탁발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남의 집에 가서 구걸해가지고 밥을 빌어옵니다. 구걸해가지고 밥을 빌어오는데, 가만히 그 속에서 살다 보니까 거지들이 결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라는 거라. 구걸 해왔는데 뭐 음식물만 들어가는 게 아니고 여러 가지 경제적인 지원들도 있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얻은 재화들 그 돈들은 집착을 하게 되는 거라. 근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고 필요할 경우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그 돈 중에 일부를 떼 가지고 뭔가를 사와서 다른 사람을 주고 하더라는 거라.
그 모습을 보고 와서 우리 다른 스님들한테 한 얘기가 있습니다.
“적절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조건에 놓여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을 때 그 사람은 적절한 방법을 알게 된다.” 하고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첫 번째 얘기할 때 '테로 랏딴뉴' 라고 몸에 익어져야 된다는 거라. 몸에 익어져가지고 어떤 것이 적절한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 대상이 나타면 대상이 나타나는 것을 알아야 되는데, 어떤 대상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할 것이냐? 그리고 그 대상이 나타난 것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해야 될 것인지 아니면 버릴 대상으로 해야 될 것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버릴 대상을 알아차릴 거 같으면 그것은 안된다는 거라. 이미 자기 자신이 그것을 알아차릴 대상이 되지 못할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그것은 버려버려야 할 대상이지 알아차려야 될 대상은 아닙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에서 소리가 들릴 때, 소리가 들린다고 알아차릴 때는 그것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적절한 대상입니다. 그런데 누구 소리라고 들린다든지 아니면 그 소리가 싫다고 들릴 것 같으면 그것은 적절한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누구 소리라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 아니고, 또는 그것으로 인해서 성이 난다고 알 거 같으면 밖의 대상에 대해서 성이 난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 아니고 성이 나는 마음이 적절한 대상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적절한 대상을 알게 될 때 아, 인제 내가 테라와다의 첫 번째 관문은 통과했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그것을 '테라 랏딴뉴'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적절한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수행의 대상은 앉아서 좌선하는 것만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걸어갈 때든 밥을 먹을 때든 일상생활을 할 때든, 아니면 소리가 들리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냄새 맡는 것들이든 모든 것들은 대상들입니다. 수행의 대상입니다. 그 수행의 대상을 분명하게 적절하게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대상들을 적절하게 알 때는 나는 분명하게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들로 인해서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에 의해서 오는 이익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릴 때의 나의 마음은 항상 고요하고 깨끗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게 첫 번째 부분입니다.
두 번째, 여러분들이 갖추어야 되는 것이 '실라와(sīlava)' 그렇게 얘기합니다.
계행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선정을 이룰 수도 없고 지혜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이 꼭 지켜야 되는 것, 오계는 반드시 지키도록 하고 특별한 날에는 팔계를 지키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인제 다음 달 되면 결재 들어가니까 팔계들 지키도록 해야지.
계가 나에게 압박하는 도구가 아니고, 자연스럽게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내가 계를 지키고 있다, 안 지키고 있다 하는 그런 생각 없이 행하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게 계가 지켜지도록 하는 그걸 '실라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세 번째, '바훗수또(bahussuto)' 많이 듣는 것, 붓다의 가르침을 어떠한 경우든지 많이 들어라는 겁니다.
아마 우리 붓다의 길따라 선원 식구들 많이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많이 듣는다고 하는 것은 그 속에서 실천할려는 마음이 자꾸 일어나야 되는 것이고, 마음이 향상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 듣기만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훗수또 라고 하는 것은 많이 듣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들은 것을 그대로 이해해서 그대로 실천하게 되는 걸 갖다가 바훗수또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스님들도 교육을 할 때 처음에는 정규프로그램대로 그냥 수업을 무조건 가서 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빨리어 시험 아홉 개 단계를 거쳐나가고 기본적인 거를 다 배우고 이렇게 쭉 해나갑니다. 그거 할 동안에는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냥 해야 됩니다. 그걸 하다 보면 나중에 가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왜 그렇게 해야 됐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아, 이게 이렇게 중요한 의미들을 가졌구나 하는 걸 나중에 알게 되는 거라. 아는 것 또 다시 설명하고, 어떤 건 재미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거는 의무적으로 스님들이면 가서 들어야 되는 거라. 듣고 익히는 것만 있을 거 같으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아는 것 하고 그리고 내가 그것을 배워야 될 이유도 모르겠다 할 거 같으면 그건 안 들어도 되는 겁니다.
근데 '바훗수또' 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많이 듣고 아는 것이 아니고 그 들은 것들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들을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실천하게 되는 사람들을 얘기할 때 '바훗수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를 때는 무조건 많이 익히도록 해야 됩니다. 많이 듣고.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사량분별을 할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 이것은 들어야 되고 이것은 듣지 말아야 되고 하는 것들은 지금 해야 될 단계는 아닙니다. 처음에는 무조건 들어야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가 알고 이해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또 다른 방법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걸 들으면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들을 때는 듣기만 하게 되는 법을 알게 되고, 그 어떤 조건하에서도 사마디가 깨지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네 번째, '스왁카따 빠띠목코(Svākkhāta pāṭimokkho)' 그렇게 얘기합니다.
세존께서, 부처님께서 얘기한 '빠띠목카'라고 하는 것, 각자의 위치에 맞는 역할들을 분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출가한 스님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따라서 자기 역할을 다해나가는 것, 재가자들은 재가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따라서 또 재가자들이 해야 될 일을 분명하게 하는 것들.
자기 할 일들을 하지 않을 거 같으면 남의 일들에 대해서 비난하게 되고 남의 일들에 대해서 신경을 쓰게 됩니다. 재가자들은 출가자들을 비난하는 일은 재가자들이 할 일이 아닙니다. 또는 출가한 스님들은 재가자들이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그것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각자의 몫이 있고, 각자가 지켜야 될 것들이 있고, 각자가 해야 될 일들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나의 위치에서 할 것이 아니다 할 거 같으면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가끔씩 그 구분을 못하게 될 때 항상 문제들이 일어난다는 생각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쉬울 것 같죠? 각자 자신의 몫을 해야 된다는 것이 쉬울 거 같죠? 그런데 결코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느 정도 수행이 되고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자신의 위치를 망각을 해버리게 됩니다.
처음에 스님도 그랬어요. 처음 법문을 시작한 게 출가한지 한 칠 년 정도 됐을 때 처음 법문을 시작했어요. 처음 법문은 굉장히 떨리고 어려웠는데 그다음부터는 좀 쉬워져요. 스님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순서가 있습니다. 그 순서에 따라서 법문을 하는 날짜가 정해져 있는데, 그다음 법문할 날짜가 자꾸 기다려지는 거라. 다른 스님이 법문을 하기 힘들었다 할 거 같으면 “그거 내가 할게” 하고 내가 또 하게 되는 거라. 내가 할 날짜가 아닌데. 근데 그때는 그걸 모르는 거라.
만약에 한 달에 한 번을 법문을 하게끔 했으면, 그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법문을 하게끔 한건데, 그걸 망각을 해버리는 거라. 나는 잘할 수 있기 때문에 하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그냥 한 달에 두 번 세 번 계속하게 되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반드시 그 규정을 넘어서면 안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딱 그 다음날 됐는데 스님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그대로 큰스님이 지적을 하는 거라. 너는 왜 너 할 타임이 아닌데 법문을 했느냐?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 스님이 법문을 안 하겠다 했기 때문에 내가 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봐가지고 내가 한 것이기 때문에, 내 타임이 아닌데, 틀린 것은 아닌데도 스님들이 그렇게 룰을 정해 놨을 때는 그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이상 하지 말아라는 뜻이라.
반드시 통과해야 되는 것이 경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알고 있다 해가지고 법문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수행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수행에 어느 정도 진척이 돼서 법문을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어우러지고 그리고 법문할 만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게 될 때 법문 횟수를 점차 늘려주게 되는 겁니다. 지 자랑할라고 자꾸 법문할 거 같으면 그 법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라.
남에 대한 자애의 마음들, 그리고 이 법문을 하는 것으로 인해서 저 사람이 반드시 그것을 따르고 실천할 수 있는 상태가 됐을 때, 이런 여러 가지 조건들을 갖췄을 때 법문하는 횟수를 늘려주게 되는 건데, 나는 그것을 몰랐던 거라.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니까, 더 많은 수행의 체험을 했으니까,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거라. 알고 보니까 나중에 지나고 보니까 그냥 내 법문하기 바빴는 거라.
그게 '스왁카또 빠띠목카' 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할 일들을 하라는 거라. 남의 일들을 자꾸 내다보고 그것에 대해서 시시비비 할려고 하지 말고, 내가 이 정도 위치면 이 정도 위치에서 내가 될 일만 분명하게 하라.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자신이 해야 될 일들도 많아지게 되는 거고.
다섯 번째, '아디까라나 사뭅빠다 아꾸살루' 그렇게 얘기합니다.
행하는 것들이, 의도하는 것들이 꾸살라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선한 마음이 일어나서 선한 의도를 지니고, 그 선한 의도에 의해서 말을 하고 행하도록 하는 것들을 ---- 해라. 어떠한 경우든지 선하지 않은 의도들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하는 뜻입니다. 마음이 항상 선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어야 됩니다. 조그만한 것도 악한 마음이 그런 의도들이 일어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잠깐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으로 그쳐버릴 거 같으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조그만한 마음이 큰 문제들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는 악한 마음을 의도만 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계속적으로 그런 의도들이 일어나면은 그 의도들은 굳어져버립니다. 그러면 성향 자체가 항상 나쁜 방향으로 자꾸 생각하고 나쁜 마음을 먹기가 쉬워져 버립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의도라고 하는 것은 선한 쪽으로 자꾸 기울어지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수행을 해나갈 때,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분명하게 알고 일어나는 현상들이 물질적인 것들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적인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하게 될 때,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을 분명하게 쫓아가게 될 때, 그 현상들을 분명하게 다 알게 될 때, 그다음에 일어나는 것이 일어나는 현상들은 그 이전에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의도가 있어야 만이 그 현상들이 일어나게 되고 그 현상을 알아차리는 마음들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의도가 바르지 못하면 대상을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의도는 어떤 경우든지 선한 것들이 일어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여섯 번째, '담마까모(Dhammakamo)'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담마에 대해서 기뻐할 줄 알아라' 하는 것들입니다.
감각적인 것들로 인해서 기쁨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담마에 대해서 기쁨을 누리라는 거라. 가끔씩 스님도 힘이 들 때 마음에서 읽는 게송들이 있습니다. 근데 그 게송 한번 읽고 나면 마음이 굉장히 기뻐져. 활기가 차져. 그러면 육체적으로 굉장히 피곤하고 지금도 사실 굉장히 피곤하거든. 힘이 좀 들어. 그런데도 내 할 일들을 해나갈 수가 있는 거라. 그것이 담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담마의 소중함을 알고 그 담마의 기쁨을 누릴 줄 알게 되는 자들은 그 담마 따라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담마에 대해서 기쁨을 얻도록, 기쁨을 누리도록 하라는 겁니다.
부처님이 설한 법은 굉장히 소중합니다.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이 해야 되는 역할, 해야 되는 일들 중에 하나가 뭐냐면 그 법을 변경 없이 오염시키지 말고 그냥 그대로 유지해가지고 보존하는 거라.
다음 대로 넘길 수 있는 것들이 스님들의 역할 해야 될 의무 중에 하나입니다. 얼마나 소중하고 그게 좋은 건 줄 알면 그것을 바꿀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낍니다. 자기 의견을 거기 덧붙일 생각을 못하는 거라. 그리고 그것들을 전하고 하는 일들이 소중한 줄을 알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도 법의 기쁨을 누리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일곱 번째, '산뚯토(santuṭṭho)'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만족할 줄 아는 것. 어떠한 조건에서도 그것에 대해서 만족할 줄 알아라 하는 겁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지금 이 몸 받고 여기 와서 법문 듣고 수행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 그거 못하는 사람들 쎄빘어. 또는 인간의 조건으로 태어나지 못한 부류들도 많아. 여러분들은 그래도 축복받은 대상들이라는 거라. 자기 자신의 지금 현재 위치가 얼마만큼 소중한지, 얼마만큼 좋은 위치에 있는지를 모르면은 항상 불만족스럽습니다.
제 모친이 돌아가시고 나서 들은 생각이 뭐냐 하면 ‘아이고, 일 년만 더 살았으면은 내가 좀 더 잘 해줬을 건데’ 그래도 나는 아플 때 매일같이 가서 밤에 그 병간호 했거든. 몇 개월을, 매일같이 그렇게 병간호하고, 그래도 내 딴에는 잘해준다고 하고 오만 거 좋은 거 다 사 먹일려고 그러고, 그래서 미련 없이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이고, 일 년만 더 살았으면은 내가 좀 더 잘 해줬을 건데’ 하면서 만족할 줄 모른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그 대상이 없어지고 나면은 ‘아, 내가 참 그 대상이 있을 때가 그래도 행복했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 거라.
지금 현재 이렇게 법문 들을 수 있고, 수행을 할 수 있을 때 여러분들이 해야 될 일들이 있습니다. 그걸 하지 못하면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들을 하게 됩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내가 해야 될 일을 분명하게 하고, 집착해야 될 대상들을 집착하지 않고, 그런 상태들을 '산뚯티'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집착하는 대상들을 모두 버려버리고 마땅히 해야 될 일을 분명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만족감은 일어나게 됩니다.
여덟 번째, '빳삿디꼬(passaddhiko)'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가고, 앉고, 서고, 눕고, 하는 모든 동작에 알아차림을 유지하라. 사념처 수행이 항상 여일하도록 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아홉 번째, '자나랏다(jhāna laddha)' 선정을 닦는데 힘쓰라.
'사선정 또는 선정의 상태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알아차림을 유지하라' 그런 뜻입니다.
그다음에 열 번째, '위뭇또(vimutto)' 해탈에 이르도록 하라.
이게 인제 여러분들이 테라와다 불교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점차적으로 익히고 갖춰야 되는 것들입니다.
처음에는 적절한 대상에 대한 이해들을 분명하게 해서, 적절한 대상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대상 자체를 모를 것 같으면 첫 단추부터도 끼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해탈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들이 갖추어야 될 것들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가 갖추어졌다고 해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열 번째 해탈에 이르게 됐을 때 자기 스스로는 ‘아, 이제 해야 할 일들을 다했다’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면 그때 만족을 하라는 거라. 그러기 전에는 조그마한 거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나갈 때는 아직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더욱더 노력을 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이게 테라담마 열 가지, 테라와다 불교에서 담마- 진리 따라 살아가고 진리를 지닌 자(테라담모)가 갖추어야 될 열 가지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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