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테라와다는 소승불교가 아니다. (20100125)

담마마-마까 2020. 11. 3. 13:04

* 테라와다는 소승불교가 아니다. (20100125)

https://youtu.be/hgi6xaXerAU

 

저번 우리 창립법회(2009. 10. 31) 때 기자간담회 할 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르지 말아라" 하고 기자들한테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인제 기사 제목으로 나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한번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될 부분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프린트물을 내줬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대승불교에서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를 때 세 가지 이유로 해서 소승불교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가 대승불교가 태동하기 전까지의 모든 부파불교,

그다음에 두 번째가 특히 법수 문제로써 대중부하고 많이 논쟁을 가졌던 부파불교 중에서도 설일체유부, 설일체유부는 상좌부 부파 쪽에서 떨어져 나온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상좌부불교를 많이 대변했던 그런 하나의 부파입니다.

그 설일체유부를 들어서 얘기를 하기도 하고,

그다음에 지금 현재의 동남아시아 상좌불교를 얘기합니다.

보통 이 세 가지를 들어서 소승불교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소승이라고 할 때는 그 용어 자체에서 풍기는 것이 개인의 수행 위주, 개인의 해탈을 위주로 해서 나아간다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 지금 현재의 동남아시아 그리고 서남시아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데는 상당히 모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 현재의 동남아시아, 태국, 버마, 스리랑카, 캄보디아 이런 나라들에서 하는 법회 형태는 오히려 대승불교의 포교형태를 훨씬 뛰어넘고 있습니다. 거의 일주일에 법회가 두세 번씩 이루어지고 있지, 그리고 각 사회조직하고 긴밀하게 연관이 되어있고. 그래서 모든 사회조직에 스님들이 관여해서 불교적으로 해석하고, 또 사찰의 용도 자체가 전법의 장소로써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용도로써 쓰여집니다. 결혼식이라든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큰 행사가 있을 때라든지, 또 사회참여를 위한 대중 집회 장소로 쓰여지든지, 여러 가지 사회적인 목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 현재의 대승불교에서 하고 있는 사회 대중포교보다도 훨씬 더 많은 부분을 동남아시아 불교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맞을 수가 있습니다. 물론 스님들의 대부분이 대중포교보다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위해서 출가를 했고, 그것을 위해서 수행을 해나갑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거기에는 분명하게 한계가 지어집니다.

절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을 뿐 아니라 또 각각의 포교를 담당하는 스님들도 존재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수행하는 스님들도 나중에 일정한 부분이 지나고 나면 '상카루뻭카냐나'라든지 '테라 담마' 열 가지 조건을 갖추든지 이렇게 조건이 갖추어지면, 대중포교를 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갈 것인지 스스로 판단해서 대중포교를 하는 스님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불교 형태에서 동남아시아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것은 모를 때 얘기지, 지금 현재 세계적으로 드러난 불교에서는 절대 그렇게 부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바뀌어져야 만이, 대승 소승이라는 용어를 바꿔불러야 만이 맞을 정도가 됩니다. 이 부분을 아직도 쓰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진짜 그거는 무지한 경우가 되는 것이고, 앞에 1번 2번 항목 대승불교의 발원까지 모든 부파불교 특히 그 부파불교 중에서 설일체유부를 소승불교라고 부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게 맞습니다.

 

근데 이 부파불교라고 하는 것은 이미 부파시대 때 다 없어졌던 불교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불교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파불교 때 각각의 부파에서 쓰여졌던 경전들을 인도로 갔던 중국의 구법 스님들이 가지고 와서 번역을 해놨던 것들, 이것들을 전부 취합해가지고 중국에서 나름대로의 형식을 가지고 경전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 모든 것들을 소승불교라는 카테고리에다가 집어넣게끔 됩니다. 불교역사에서 보면.

 

그렇지만 현재 남아있는 부파불교는 없다는 거라. 그럼 지금 동남아시아에서 하고 있는 불교는 그럼 어떤 불교라는 거라? 이미 부파불교는 다 소멸했다고 대승에서도 얘기하는데, 이것도 일견 맞는 부분이 아니다 하는 뜻이 기본 토대입니다.

소승불교와 테라와다 불교는 엄밀하게 구분이 된다는 얘깁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바로 삼 개월 뒤에 제1차 결집이 진행이 됩니다.

1차 결집을 하면서 정해진 것이 부처님 말씀을 일언일구도 바꿀 수가 없고, 변경할 수가 없고, 더할 수도 없다 하는 것이 확정되게끔 됩니다. 그 1차 결집에서 이루어졌던 것이 2차 결집에서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불교가 분열됐던 것은 부처님 당시 때도 꼬삼비 비구들의 분열로부터 해서 데와닷따가 새로운 불교를 만들고 이렇게 분열이 있었지만 크게 분열이 일어난 것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과 율을 달리 한 것은 없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스님들은 하나의 장소에서 모여서 같이 포살을 해야 된다는 것은 동일했다는 얘기라. 그런데 1차 결집을 하고 나서까지도 똑같이 포살을 같이 했었습니다.

 

근데 2차 결집할 때가 되면 상좌부 쪽 하고 대중부 쪽 하고 분열이 되게 됩니다. 계율 상의 문제죠! 계율 상의 문제로 대중부가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실제적으로는 교단 분열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래서 계율을 달리하는 대중부 쪽에서는 따로 포살을 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맥을 이어왔던 테라와다 불교 쪽에서는 테라와다불교 따로 포살을 행해옵니다. 그리고 승려를 배출해내는 것도 따로 해나가게 되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겪게 되는데 또 하나의 문제가 뭐가 있었느냐 하면 계율적인 부분 말고 출가한 스님들이든지 재가인들이든지 수행을 했을 때 목표를 어디로 잡을 것이냐?

테라와다 불교 쪽에서는 아라한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부처님을 따라서 깨달음을 이룬 자 '붓다노붓다'가 목표가 되는 것인데, 대중부 쪽에서는 '삼마삼붓다' 부처님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어떻게 잡을 것이냐에 따라서 이렇게 차이가 나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은 오직 유일한 분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그래서 부처님을 경지로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붓다노붓다' 부처님을 따라서 깨달음을 이룬 자 라는 개념을 쓰게끔 되는데, 대중부 쪽에서는 '삼마삼붓다' 부처님에게 적용했던 열 가지 명호 칭호를 그대로 본인도 쓸 수 있게끔 허용을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서 다불신앙으로 연결되게 됩니다. 나중에 후대로 가면서.

 

그래서 이 세상에 부처님이 오직 한 분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부처님들, 지금 현재 한국에서 여러 부처님들이 있죠? 석가모니 부처님 말고도 아미타불, 무슨불 하면서 다불신앙이 있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사상으로 가게 됐고, 특히 인간뿐 아니라 미물에게까지 개나 축생들도 다 그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근데 부처님의 말씀에 비춰봤을 때는 굉장히 많이 벗어나버리게 됩니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은 인간 외에는 분명히 없다고 얘기를 한 부분인데 그 부분하고도 배치가 되게끔 되고, 이런 여러 가지 형태들을 띠는 것이 2차 결집 때 교단이 분열을 하게끔 됩니다.

 

그러고 나서 수백 년간을 지내오면서 어떤 과정을 겪게 되느냐 하면 테라와다 불교는 하나의 맥으로써 쭉 이어집니다.

물론 거기에서 또 문제가 생겨서 '설일체유부'라든지 아니면 '설산부'라든지 이런 것들이 계속 떨어져나갑니다. 떨어져나가더라도 교단에서는 그것이 법(Dhamma)과 위나야(vinaya, 律)에 위반된다 했을 경우에는 상가(Saṅgha)로써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떨어져나간 사람은 자기들은 상가로써 인정을 안 받은 상태에서 따로 상가를 구성하게끔 되는 거라. 그때 대중부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출가자들이 없게 됩니다. 출가자들이 없을 땐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재가인들이 출가자들을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출가의 조건을 변경을 하게끔 이르게 되는 겁니다.

 

'에히 빅쿠(Ehi bhikkhū)'라고 해서 '이리오너라 비구'로부터 해가지고, '띠사라나 빅쿠(Tisaraṇa bhikkhū)' 라고 해서 '삼귀의 삼창하는 비구'로 해서

그다음 '우빠삼빠다 빅쿠(Upasampadā bhikkhū)'로 해서 분명하게 계를 받는 조건을 가지고 출가자가 만들어진 게 부처님 이후에 역사적으로 그렇게 지내왔던, 그거는 부처님 당시 때 확정됐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변경하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는 거라. 그러니까 스스로 출가자가 되고, 또 부처님의 수기로 인해서 출가자가 되고 이런 형태들을 자꾸 띠게끔 됩니다. 이게 나중에 논란이 돼가지고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대승불교를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기까지도 나오게끔 됩니다.

 

어쨌든 대중부 쪽에서도 많은 부파가 생겨나옵니다. 모든 부파들이 보면 변경을 하게끔 됩니다. 그런데 테라와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일체 변경 없이 내려오고 있는데, 거기서 떨어져나간 모든 것들, 상좌부 쪽에서 떨어져나갔든, 대중부 쪽에서 떨어져나갔든 자기 나름대로의 법과 율을 확립을 할려다보니까, 모태는 테라와다의 법과 율인데 그것을 자꾸 변경을 하게끔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더욱더 난해하게 되고 더욱더 형이상학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수행은 뒷전이 돼버리는 거라. 계속 토론을 하고 그리고 그것이 정반합, 그것이 맞느냐 틀리느냐 이런 걸 가지고 싸움하게끔 되는 거라. 일반인들의 깨달음이라든지 일반인들에게 법을 접하게 하는 이런 것은 거의 안 보이게끔 됩니다. 부파불교 자체는. 그래서 스스로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고, 스스로 수행한다고 하지만 수행도 실제적으로는 안 하게끔 되고, 모든 것은 교리적으로만 계속 다툼을 일으키게끔 됩니다.

 

그게 인도에서 새롭게 바라문교가 쇠퇴하면서 힌두교라는 새로운 사상이 발생하는 그런 시점도 되기 때문에, 그런 부분하고 대응을 하기 위해서도 그런 부분들이 발생하게끔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모든 제부파불교에서는 실제로는 불교라는 이름만 띠었었지 불교하고는 거리가 멀어져버리는 거라.

자기 스스로의 구제도 안 되고, 중생들의 구제도 안 되고, 이것을 보다보다 못한 것이 뭐냐 하면 대승불교가 대중부 쪽에서 흥기를 하게끔 됩니다. "모든 부파들은 다 틀렸다" 부정하면서 대승불교가 새롭게 태어나게끔 됩니다.

 

어쨌든 이런 부파불교들은 오래도록 유지가 되지 못합니다. 왜? 한계가 지어집니다. 모든 부파불교는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른 자가 나와야 만이 유지가 돼나갑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과 율이 계속해서 존속되고 지켜져야 만이 그것이 변함없이 이어질 것인데 이미 변형을 가져왔고, 수행자들도 없어지고, 이러다 보니까 그 불교들이 어떤 부파불교라도 오래도록 가지 못한다는 거라. 겨우 오래 가봐야 삼백 년에서 오백 년, 부파불교가 생긴 것이. 그래서 모든 부파불교는 이렇게 해서 소멸이 되게끔 됩니다. 그게 기원 전후로 해서 이 부파불교는 거의 사라지게끔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더라도 각 부파에서 남긴 문헌들이 있습니다. 그 토대는 테라와다의 법과 율이 기본이 됐지만 자기 나름대로 창작해서 만든 그런 경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역경사들이 이런 것들을 가져와가지고 중국에서 번역을 하게끔 됩니다.

그렇지만 각각의 제부파 불교는 완전하게 법과 율을 갖다가 삼장을 정립해놓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쪽 부파에서는 만약에 장부경전 중에서 일부를 가져왔다, 또 저쪽에서는 또 어떤 다른 것에서 취합을 하게 되는 거라. 이것을 전체를 모아가지고 중국에서 나름대로의 법수,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워서 이 경전을 만들게 됩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소승불교의 경전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지금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소승불교의 경전이다 하고 얘기가 되는 부분들이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까 이게 어느 부파의 경전인가 하는 것은 밝혀졌지만 그것이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게끔 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전체의 경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맥을 이어왔고 그것을 변함없이 유지해오고 보존해왔던 테라와다 불교 밖에 없다는 거라.

그게 이미 기원전 1세기 때 경전으로 편찬이 됐어요. 스리랑카에서. 그게 인제 제4차 결집의 형태를 띠게끔 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게끔 됩니다.

 

원래부터 테라와다 불교와 소승불교는 계통 자체를 달리하고 있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소승불교라고 불리던 그 부파 어디를 봐가지고 테라와다 불교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거라. 소승불교라고 불리던 그 제부파불교 시대 때의 제부파들은 나름대로의 독립된 경전도 존재하지 않았고, 또 교단도 지금까지 유지해오지 못하고 있다는 거라.

 

하나의 불교, 하나의 교단으로 불릴려고 할 거 같으면 경전이 존재를 해야 되고, 그것을 경전을 따라서 출가한 집단이 존재를 해야 되는데, 지금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거라. 지금 현재 동남아시아에 존재를 하는 것들은 이미 계통 자체가 소승불교라고 불리던 부파불교 하고는 맥을 달리하고 있다는 거라.

대승불교가 흥기되기 전까지 모든 부파불교를 소승불교라 부르는 것은 그것은 맞지만, 그것은 테라와다 불교는 아니라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하고는 분명하게 맥을 달리하고 있다고 봐야됩니다. 특히 그중에서 설일체유부를 든다는 것도 꼭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테라와다 불교와 소승불교와는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상좌부불교'’라고 사람들이 얘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맞지 않습니다. 상좌부라고 얘기할 때는 부파를 얘기합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상좌부'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테라와다' 입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쉽게 말하면 대중부가 떨어져나간 것이고, 또 테라와다 불교에서 각각의 부파들이 생겨나는 것인데, 왜 테라와다 불교를 하나의 상좌부 중의 하나로써 규정을 하느냐는 거라?

그것은 대승불교적인 입장인 것이지 지금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일컫는 테라와다 불교하고는 맥을 달리하고 있다는 거라. 그 부분은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1번의 경우 [대승불교가 발원하기까지 제부파를 소승불교라고 부른다. 이미 그런 소승불교는 다 없어졌다.] 그래서 소승불교라고 부를 수 있는 조건이 안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특히 그중에서 설일체유부. 대중부하고 가장 많이 첨예하게 대립을 했던 것이 설일체유부였습니다.] 그래서 설일체유부도 꼭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교단으로 형성되지 않았고 또 그러한 경전이 완벽하게 존재를 하지 않는다는 거라. 이것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면 마지막 세 번째, [지금 현재의 동남아시아 불교를 소승불교라 부를 수 있느냐?] 처음에 얘기했지만 오히려 대승불교보다도 더 대승적으로 활동들을 하고 있다는 거라. 모든 사회적인 활동이라든지 또 개인의 수행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대승불교를 능가했으면 능가했지 결코 모자람이 없다는 거라.

 

그럼 그것을 가지고 작은 수레(Hinayana)라는 소승불교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거라. 그것도 맞지 않는다는 거라. 그럼 뭐를 가지고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를 것이냐는 거라.

이런 것 때문에 1956년도에 세계불교도회의가 거행되면서 용어 자체를 ‘소승불교’라고 하는 ‘히나야나(Hinayana)’라고 하는 용어는 쓰지 말자하고 전세계 불교도가 결의를 했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그 이후에 대승불교권에 있던 싱가폴이든지 대만이든지 이런 데서는 그 용어를 쓰지 않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일본, 한국 두 나라가 현재까지도 쓰고 있습니다. 근데 이미 일본은 이 소승불교라는 용어를 안 씁니다. 아직까지도 쓰고 있는 곳은 지금 현재는 유일하게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무지한 것들이고, 또 현재 자기의 불교를 높일려고 하는 그런 아만심으로 인한 것이지, 결코 불교의 역사를 바르게 보는 것이라고 보지를 못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앞으로의 불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근본불교 자체를 갖다가 앞으로는 테라와다 불교라고 불러야 됩니다.

앞으로 용어를 쓰지 말아야 되는 것은 '소승불교'도 쓰지 말아야 되는 거고, '상좌부불교'라고 하는 것도 쓰지 말아야 되는 것이고 그런 뜻입니다.

쓸려고 할 것 같으면 '상좌불교'라든지 '근본불교'라든지 '초기불교'라든지 이렇게 쓰는 것이, 그런데 그 초기불교라는 용어도 좀 말이 안 맞는 게 초기불교가 있으면 후기불교가 있어야 되는데 테라와다 불교는 초기라든지 후기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초기불교라는 용어도 사실은 안 맞는 거고, 근본이라는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물론 근본이라는 개념은 근본이라는 개념이 지금까지도 계속 써온다고 할 거 같으면 이게 맞긴 맞습니다.

 

그래서 꼭 한국어로 용어를 바꾸어야 된다고 할 거 같으면 근본불교라고 용어를 쓰는 것이 오히려 합당한 것이고, 차라리 그것보다는 테라와다 불교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것이 오히려 맞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여러분들에게 프린트물로 내줬던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불교라 부르지 말아라"라고 하는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