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에히빳시꼬 (Ehipassiko) 2. (20091117)

담마마-마까 2020. 11. 3. 13:04

* 에히빳시꼬(Ehipassiko) 2. (20091117)

https://youtu.be/p0UYE_dV8eU

https://youtu.be/8U7DE5ieTjI

 

오늘은 "에히빳시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하는 얘기를 저번 시간에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해하니까 누구든지 실천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는 가르침이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부처님은 당당하게 "와서 보라!" 하고 "에히빳시꼬(Ehipassiko)" 초청했다는 거라.

 

왜? 부처님이 가르치는 것은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아깔리꼬(akāliko)" 누구든지 지금 즉시 확인할 수 있는 것! 옛날에도 바로 확인할 수 있었고 2,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지금 즉시 확인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시대에 의해서 바뀌어지는 가르침이 아니다. 시대가 지났다 해서 유물관 같이 박물관 같은 데서 가만히 전시용으로 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고, 시대에 의해서 낡아지지 않는 가르침, 항상 새로운 가르침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게 "아깔리꼬(akāliko)" 라는 겁니다. 그런 가르침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당당하게 "에히빳시꼬!" "와서 보라!" 하고 초청을 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뭘 와서 보라고 부처님이 얘기했을까? 그리고 무슨 가르침이기 때문에 과거에도 똑같이 적용이 되고 현재에도 똑같이 적용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지금 이해해서 실천하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인가? 뭘 가르치기 때문에? 다른 걸 가르친 게 아니죠?

괴로움! 인간의 불만족, 괴로움에 대해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또 앞으로 미래에도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 문제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것이 정신적인 괴로움이든 육체적인 괴로움이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썼던 설법 방법이 대기설법(對機說法)이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죠?

 

그래서 각각의 사람에게 맞게끔 법을 설했다 하는 것이고, 상대가 직접적으로 접하고 있는 괴로움, 누가 돌아가신 것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접하고 있으면 거기에 맞는 법을 설하는 것이고, 누가 육체적으로 아파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기에 맞는 괴로움에 대한 것들을 설하는 것이고, 그것이 각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들에 맞게끔 법을 설했다 해서 그걸 대기설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 각각의 사람들에게는 최상의 가르침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래서 실천하기 위한 것은 대기설법 이상 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기설법이라는 것은 그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봤을 때는 최상의 가르침이고 완전한 가르침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걸 비유로써 몇 가지 예를 들었죠?

 

사리불과 목련 존자 같이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따로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조건지워진 것은 일어난다." 하고 한마디만 가르쳐주어도 그렇게 머리가 뛰어난 사람들은 '아, 그러면 조건지워진 것이 일어났으면 당연히 조건지워진 것은 소멸할 것이다.' 하고 알게끔 된다는 겁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경전을 못 외우는 분들에게는 경전을 외우라고 굳이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청소할 때 봉걸레 가지고 밀고 닦고 하면서 “마음을 닦자” “마음을 닦자” 이 두 가지만 하라고 그럽니다.

그럼 눈이 있는 사람이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깨끗한 헝겊이 점점 더러워져 가는 모습을 보는 거고, 그래서 이렇게 변하는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마음도 이렇게 더러움에 물들어지고 또 깨끗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고, 그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거고. 이런 방법이 바로 대기설법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많은 방법을 동원해서 부처님이 법을 설합니다. 그것이 뭡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고 있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뜻입니다.

 

대표적인 거 몇 가지를 더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깔라마인들에게 한 법문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누구 스승은 와서 이렇게 얘기하면서 “이것만이 진리다.” 하고, 또 다른 스승은 와서 저렇게 설명하면서 “저것만이 진리다.” 하고 얘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 많은 스승의 말을 듣다 보면 어떤 것이 진리인지 헷갈릴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그럽니다. “아, 이거 어떤 것을 기준으로 잡아야 됩니까?”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때 인제 부처님이 그 깔라마 인들에게 한 얘기들이 있습니다.

 

"너가 귀로 들은 것 그런 것들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하는 거라. 내가 직접 들었다 해가지고 그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얘기라.

그리고 "과거 세대부터 쭉 전해왔던 전통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꼭 바른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진리라고 하는 것하고 전통적인 것으로 내려온 것하고는 다르다는 얘기라.

그리고 "경전에 그렇게 써져있다 해가지고 그것도 바른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또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다 해가지고 그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거라. 그것을 자기가 직접 체험해보고 나서 확인됐을 때 “아, 이것이 바른 것이구나. 이것이 진리구나” 하고 확신을 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게 글 써져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다 하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A는 A다시가 되고 A다시가 뭐 A2가 되고 이런 논리적인 사변이 정확하게 맞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거라. 그거는 논리적인 사변인 것뿐인 것이지 그거하고 진리하고 같은 거는 아니라는 거라. 그렇게 따져나가다 보면 A는 B다 하고 얘기하더라도 그걸 진리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하는 거라.

 

또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옳다 이것이 진리다 하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는 거라.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라고 해서 그 견해가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안 변한다고 얘기는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법들도 그 시대상에 맞게끔 바뀌어져 나가고 변해나가고 있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진리라고 하는 것은 아깔리꼬라! 시대가 변해도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지금 즉시 확인할 수 있는 것, 똑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는 거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라 해서 그것이 진리라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거라.

 

또 "자신의 의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같다 해서 그것이 맞다고 판단하지 말아라" 하는 거라. 그건 내 생각이 그때 일어난 생각일 뿐인 것이지 그게 십 년 후에도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느냐는 거라. 내 생각과 맞으면 내하고 같은 편이고, 내 생각과 틀리면 다른 편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것은 진리의 기준, 잣대가 될 수는 없다는 거라.

 

그리고 "아무리 뛰어난 사람, 높은 사람, 직위가 높은 사람이 얘기한다 해서 그것이 바른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리고 "그 사람이 잘생겼다. 외형적인 모습이 호감이 간다 해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진리는 아니다" 하는 거라.

 

진리라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든 그 속에서 나에게 이익을 가져와야 되는 거고 행복을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가져와야 되고 행복을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현명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을 수 없는, 과거에도 비난받을 수 없었고 현재에도 비난받을 수 없고 미래에도 비난받을 수 없는 그런 것들, 그래서 이익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그 가르침은 받아들이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스님 법문을 듣는 동안에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있고 행복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받아들이라는 거라. 그거는 진리라는 거라. 근데 스님 법문을 듣는데 사량분별심이 자꾸 일어나고 그 소리로 인해서 불편한 마음이 든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진리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다는 거라.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때 상황이 진리를 설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됐는데 진리를 설했다고 봐야 된다는 거라. 근데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부처님이 뭐라 그랬어요?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서 법을 설하라."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그걸 받아들일 상황이 아닐 경우 그런 사람들이 아닐 경우에 법을 설하면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돼? 싫은 마음을 일으킵니다. 이익된 마음 그리고 행복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의 성향을 가진다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그것은 설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된다는 거라.

 

내가 지금 일어난 선한 마음들을 더욱더 증장시켜줘야 되는 것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는 선한 마음들은 일으키게끔 해야 되는 것이 바른 진리라는 거라.

요즘은 신도들이 절에 가서 스님 법문을 일부러 안 들을려고 한대. 법문 들으면 만날 돈 내라는 소리만 하니까 싫은 생각을 일으킨다는 거라. 차라리 싫은 생각을 일으키는 거보다는 안 듣는 게 낫다는 거라. 그런 것들이 진리는 아니라는 거라. 어떤 경우든 진리는 이익이 있고 행복이 있는 그리고 현자들로부터 비난받지 않는 것들이라는 거라.

 

깔라마인들에게 가서 '똑같이 내가 말하는 이것만이 진리다. 다른 거는 다 틀렸다. 그러니까 따라오시오' 할 것 같으면 그 깔라마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또 하나의 성자가 와서 하는 얘기로 밖에는 못 받아들인다는 거라.

딱 거기에 맞게끔 법을 설하는 것, 그것이 부처님이 법을 설하는 방식입니다.

 

연예인의 기질을 타고 난 사람들, 인도 같은 경우에는 재주를 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성전에 의할 것 같으면 그렇게 남들에게 웃음을 주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 그런 것들로 인해서 그 재주를 넘는 사람은 죽고 나서 천국에 간다, 천상에 태어난다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처님한테 와서 물어봅니다.

“부처님, 우리는 그렇게 배워 알고 있는데 그것이 진실입니까?”

부처님이 그럽니다.

“내한테 그런 얘기하지 말아라.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물어보거든. 그걸 세 번이나 또 물어봐.

그때사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왜 이렇게 세 번이나 그 부분을 말하지 말아라 했느냐 하면 부처님이 생각하는 방식하고 그 재주를 넘는 사람, 요즘 같으면 연예인이 생각하는 방식하고는 다르기 때문에 연예인 너는 틀렸다고 얘기할 것 같으면, 연예인이 어떻게 되겠어요? 앙심을 품을 수가 있다는 거라. 행복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보다 나쁜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에 거절을 한 거라.

 

그러면서 거기에 그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드라마에서도 그런 것들 있죠? 막 뭘 죽이는 것들을 드라마에서 연기하면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죽이는 것들을 몸에 익히게 돼버리는 거라. 그거 보고 배우니까. 불륜 드라마를 한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그런 불륜관계들을 자꾸 하게끔 된다는 거라. 욕심부리고 도둑질하는 것들을 연기한다? 그럼 그걸 보고 듣고 하기 때문에 그걸 또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그럽니다. 다른 사람에게 탐·진·치를 일으켜주는 것들이 뭐가 이익이 있을 것이냐? 그리고 너도 탐·진·치를 연기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일으켜야 만이 그걸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인데, 너에게도 탐진치가 자꾸 습관화되는데 너에게 또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이냐? 현재도 너에게 이익이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이 없는데, 하물며 죽음 이후의 세상에 무슨 이익을 짓고 잘한 일을 했다고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느냐? 그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냐? 하고 얘기를 합니다.

 

철석같이 자기는 그렇게 재주만 넘고 남을 행복하게 해주고 남을 기쁘게 즐겁게만 해줄 것 같으면 자기는 천상에 태어난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 이거는 반대로 탐·진·치만 자기가 갖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탐·진·치를 일으키게 했으니까 사후 지옥행이라는 얘기거든 부처님 말로 하면.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자꾸 그런 얘기하지 말아라 하는 거라. 그리해도 세 번이나 자꾸 물어봤던 거는, 그리해도 이 재주넘는 사람이 그래도 자기 의문을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는 지금 따끔하게 잘못됐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로잡을 필요성이 있으니까 얘기를 한 거라.

 

"사람의 길은 그런 쪽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탐·진·치를 일으키는 것이 절대 너에게도 이익이 없고 너에게 행복을 가져오지도 않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어떤 것이 바른 사람의 길이냐?

몸으로는 좋은 일들을 행해야 되는 거고, 말로는 좋은 말을 해야 되는 거고, 마음으로는 좋은 것들을 생각해야 되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그거는 재주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길을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라. 재주를 넘더라도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것들이 좋은 것들이 되어야 된다는 거라. 좋은 것들을 일으키는 것이 돼야하는 것이지 반대로 탐·진·치를 일으킨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바른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인간들에게만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상층의 계급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얼마나 뛰어났고 당당했느냐 하면, 허름한 곳간에서 한 삼일간을 농부와 같이 지냅니다. 농부하고 지내면서도 절대 진리에 대해서 얘기를 안 합니다. 그냥 친구, 친구로서 지내주는 거라. 세간 일들 얘기하면 그걸 “허” 하면서 받아주고, 그러니까 그 농부 입장에서는 너무나 고맙거든. 아는 지식도 없는데 어려운 얘기해봐야 무슨 얘기하는지 하나도 모를 거고. 근데 그냥 친구삼아 밥 같이 먹고, 때 되면 같이 자고, 그러니까 너무나 고마우니까 ‘아, 이번에는 내가 추수를 하고 나면 부처님께 햅쌀을 갖다 드려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 이 농부는 실제로는 갖다 주지 못했어.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를 모른다는 거라. 홍수가 일어나기도 하고, 비바람으로 인해가지고 그냥 벼가 싹 씻겨내려 가버리기도 하고 그러니까 얼마나 속이 상할 거라? 자기가 추수 못 한 것은 둘째 치고 내가 부처님한테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을 못 지켰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마음이 상해있는 거라.

부처님한테 가서 아이고, 부처님 내가 이리 했는데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할까, 거기다 대놓고.

 

"예측할 수 없는 것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언제든지 일어난다"는 거라. 죽는 것도 어떨 때는 예측하지 못하고 죽는 것도 있습니다. 기대하지 못했던 것들이 갑작스럽게 일어나기도 하고, 인생은 예측불가능하다 하는 거라. 아무리 내가 약속을 지킬 것이다 하더라도 그 약속을 못 지킬 수가 있다는 거라.

비바람으로 인해서 벼가 싸그리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는 거라. 예측 가능한 것들이 있고 예측 불가능한 것들이 있는데 그냥 그걸 받아들이라는 거라.

벼가 없어진 것 그리고 약속을 못 지켰던 거하고 니가 슬픈 거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고 부처님이 물어봅니다.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거라. 내가 지금 슬픈 거하고 관계없다는 거라.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기대를 버려버릴 거 같으면 내가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거라. 기대가 없어졌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예를 들어서 수능 시험이다.

우리 애는 서울대 들어가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서울대 안 들어갔다 그러면 디게 슬프겠지. 근대 기대를 안 하고 있으면 서울대 안 들어갔다고 해서 뭐가 슬플 거라? 기대조차도 안 하고 있었는데. 슬프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측 가능할 때 기대를 해야 만이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슬픔이 일어난다는 거라. 기대하지 않을 거 같으면 슬픔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한테 약속을 못 지켰다 그런 생각을 가지지 말아라는 거라. 그 약속을 못 지킨 건 둘째 치고 그것으로 인해서 니가 슬퍼해야 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거라. 인생은 항상 내가 원하는 대로, 또 진행되는 방향이 똑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는 거라. 언제든지 가변적인 것들이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리고 그런 것들이 없을 거 같으면 생로병사가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자기 아들 딸 남편까지 잃은 빠따짜라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그 상황에 맞는 설법은 소빠까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소빠까는 일곱 살짜리였거든. 일곱살짜리가 부모님 중에 한 분이 재가를 하면서 버려지게 되었어.

재가를 하니까 당연히 전 자식이 귀찮게 되니까 내버리게 되는 거라 무덤가에.

근데 부처님이 그걸 보고 손을 잡고 들어가서 출가를 시킵니다. 일곱 살짜리 애인데. 근데 워낙 똑똑하고 부처님 옆에 있다 보니까 완전하게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부처님하고 만날 같이 앉아서 똑 공기하듯이 노는 거라.

부처님이 물어봅니다. 1은 뭐냐? 하고 물어보면 음식입니다.

2는 뭐냐? 하고 물어보면 나마와 루빠입니다.

3은 뭐냐? 하고 물어보면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무덤덤한 느낌입니다.

이렇게 다 얘기를 하는 거라.

 

다른 스님들이 보기에 그냥 부처님이 애하고 놀겠지 이렇게 생각했는데 사실을 그렇지 않았거든.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렀는지 안 이르렀는지 확인하는 작업인 거라. 그러면서 소빠까를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비구로서 인정을 해줍니다. 공포를 합니다. 원래는 비구가 될려면 스무 살이 돼야 만이 비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아라한이 됐다고 하더라도 스무살이 안되면 비구로서 인정이 안 됐는데, 이 이후에 소빠까 이후에는 정확하게 그게 지켜집니다. 근데 인제 특별하게 아라한이 됐다 해서 비구로서 인정해줍니다.

 

비구가 된다는 의미는 뭐냐 하면 만약에 사십살 오십살 된 스님이 인제 막 출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루라도 먼저 비구가 되면 40살 50살 된 스님이 일곱 살짜리한테 와서 절을 해야 되는 실정이라. 정확하게 법랍은 지키기 때문에!

왜 이렇게 해야 했느냐면 소빠까가 버려진 아이였기 때문에 그 아이를 다른 사람들이 무시를 할려고 하는 경향들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것들도 미연에 방지를 해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육체적인 연령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연령이 중요한 것이다. 얼마만큼 내가 깨달음에 다가가고 있는가? 부처님 말씀대로 실천해서 수행의 도와 과에 이르렀는가? 그리고 마음이 얼마만큼 더 청정하고 깨끗하게 유지를 해나가느냐? 하는 것으로서 표본을 삼을라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후로는 항상 도와 과에 이른 사람들은 법랍이 낮더라도 무시를 하지 말아라. 항상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라. 하는 얘기를 합니다. 물론 법랍이 우선입니다. 우선이더라도 그런 것들을 서로 예의로써 지키도록 하라 하는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물음에 대해서 바르게 이끌어 주는 경우도 있고, 또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는 바르게 잡아줍니다.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바로 잡아줍니다.

 

그것이 육방예경(六方禮經)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여섯 방위에 대해서 그냥 막 절을 하고 있으니까 부처님이 그걸 분명하게 얘기해줍니다. 여섯 방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여섯 방위라는 것은 인간의 관계에 대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 여섯 방위에 절할 때는 분명하게 그 의미를 알고 절을 하라.

동쪽 같은 경우에는 그냥 함부로 동쪽에다 대놓고 절을 하려고 하지 말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회상하면서 내가 부모일 것 같으면 이런 것들을 해야 된다, 자식일 것 같으면 이런 것들을 해야 된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절을 하라.

남쪽에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 서쪽 같은 경우에는 부부간의 관계, 북쪽 같은 경우에는 친구 친지들 관계, 그리고 위쪽 같은 경우에는 출가자와 재가자와의 관계, 아래쪽에 있을 때는 회사 같으면 고용관계, 사장과 종업원의 관계 이런 관계들을 항상 생각하면서 절을 하도록 하라.

절을 하더라도 함부로 아무 데나 아무 의미 없이 하지 말고, 항상 의미를 가지고 생각을 하면서 절을 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것들 들어보면 별거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부모와 자식 간에 부모가 해야 될 건 뭡니까? 또 자식이 해야 될 게 뭡니까? 여러분들은 자식의 입장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해줘야 될 게 뭡니까?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부모님이 잘 부양해야 되는 것이 자식이 당연히 가져야 될 의무라. 그걸 해야 되는 거고, 그다음에 집에서 가져왔던 전통들이나 이런 것들을 함부로 없앨려고 하지 말고 그걸 갖다가 잘 유지를 하면서 집안을 다스려 나가는 것 이런 것들이 자식이 해야 될 일들이라는 거라. 그러면서 그런 것들을 아주 쉽게 가르쳐주는 거라.

 

그리고 부모 같으면 자식에게 해야 되는 게 뭡니까? 다 클 때까지 공부시켜줘야 되는 거고, 그리고 시집장가 보내줘야 되는 거고, 그런 것들이라. 그래서 나쁜 일을 못하게끔 하고, 좋은 일들 자꾸 하는 것들을 길러주는 거고, 그런 것들이 부모가 자식에게 해줘야 될 일이지, 내 것 내 자식이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지 말아라는 거라. 이런 것들을 쉽게 설명해주고 가르쳐주는 거라.

그렇다고 해서 육방예경을 가르쳐주고 나서 그 사람이 깨달음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부모가 됐을 때는 부모의 도리를 하는 거고, 또 내가 출가자가 됐으면 출가자의 도리를 하는 거고, 내가 회사의 종업원이 됐으면 회사의 종업원의 도리를 하도록 만들어준다는 거라.

 

인간에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미물들에게도 그런 것들을 했습니다.

뱀이 있었거든. 이 뱀이 부처님 법을 듣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거라. 뱀은 부처님 법을 어떻게 들을 거 같애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 같애요? 소리를 못 듣습니다. ‘의지’ ‘생각’ 부처님이 내는 ‘마음의 파장’, 파장이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롭거든. 그러니까 부처님이 말하면 뱀은 지가 스스로 자꾸 고요하고 평화로워지는 거라. 그러니까 그 소리를 자꾸 더 들을려고 하는 거라.

근데 절에 뱀이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 다른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그럴 거라. 물론 뱀은 그런 마을을 지녔기 때문에 사람을 물지는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칫 잘못하면 뱀을 죽일 수도 있고 그러거든. 그런데도 이 뱀은 부처님 그 소리 들을려고 절을 안 나가거든.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내보내도 안 나가.

부처님 같으면 그거 어떻게 하겠어요? 가만 내버려둬야 돼?

 

부처님이 그 뱀에게 그럽니다. “니 세계로 돌아가라” 뱀이 사는 세계로 돌아가라. 니가 아무리 그렇게 해도 뱀이라는 거라. 출가수행자가 될 수도 없고, 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음에 이를 수도 없다는 거라. 그럴 수 있는 것은 인간뿐이라는 거라. 그러면 뱀인 니가 할 수 있는 것은 딱 정해졌다는 거라. 나쁜 것 하지 말고, 남에게 해로운 것도 하지 말고, 그렇게 해서 죽고 나서 다음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는 조건밖에 없다는 거라. 안 그러면 천상에 태어나든지.

 

근데 너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다고 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출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네가 이래가지고 어떻게 할 것이냐? 단, 마음을 악한 마음을 내지 말아라. 이생에서 살면서. 뱀에게. 그것이 지금 니가 할 일이라는 거라. 할 수 없는 부류에게도 그렇게 해서 인도를 해나간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만약에 지금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가 도저히 안 되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천상에 태어나는 걸 목표로 잡아야 되는 거라.

 

그럼 천상에 태어날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나쁜 짓 하지 말고, 좋은 일 많이 하는 거고, 그리고 자꾸 공덕을 쌓는 것 그길 밖에 없다는 거라.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해가지고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그 깨달음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에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런 여러 가지 공덕의 차이 때문에 방향은 또 많이 틀려진다는 거라. 근데 왜 지금 할 일들을 자꾸 놓치느냐는 거라.

뱀에게 그러는 거라. 니가 할 일은 니가 해라. 니 세계에서 니가 할 일을 해야지, 니가 여기 와서 있는다 해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거 아니다.

인간뿐 아니라 이런 미물들에게도 그와 같이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는데 거의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왜 실패하지 않았을까? 왜 말할 때마다 그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고 그 길을 따라갈려고 했을까? 설혹 깨달음의 길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길은 따라간다는 거라.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 이해심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깍아내릴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서 지적할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팔만사천경을 한번 다 뒤져보십시오. 그런 부분이 있는가?

“니, 이것이 틀렸다” 하고 얘기를 하면서 “이것이 맞는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부분이 있던가? 없다는 거라. 안 그러면 “니가 이걸 하면, 내 방식대로 따라 할 것 같으면 깨달음에 이를 것이고, 내 방식대로 안 따르면 지옥에 간다” 하고 얘기하는 것이 있었는가?

 

절대 그런 방식을 쓰지 않는다는 거라. 모든 것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중생들에게도 항상 평등한 마음을 내고,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서 깍아내릴려고 하는 것들이 없었다는 거라. 항상 배려하는 마음들을 가졌다는 거라.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평등한 마음을 내고 똑같은 인간으로서 대하고 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한 법에서 실패라고는 없었다는 거라.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누구에게도 통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가르침이! 누구에게든 그런 괴로움이나 불만족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을 해주는 것이 불교의 역할이라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거라. 부처님이 해낸 몫이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에히빳시꼬(Ehipassiko) 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깔리꼬(akāliko)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늙고 병들고 죽고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오온을 가지고 있는 이런 것들 여덟 가지들 전체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앞으로의 미래나 다 똑같은 괴로움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 괴로움을 해결해주는 방법을 찾는 거라. 그 괴로움이 아무리 사회가 바뀌고 현대화됐다 해서 그 괴로움 중 하나가 인제는 안 일어난다고, 없다고 누가 얘기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런 것은 없다는 거라.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실천하는 자들은 그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해결하지 못하고 생사윤회를 맴돌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렇게 맴도는 것이 너무나 보기 안타깝고 또 가엾으니까 부처님 할 일이 뭐겠어요? 그 길을 벗어나도록 해주는 거라. 자신에게 맞는 방법들을 가르쳐줘 가지고, 그 방법에 따라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해주는 거고.

 

그래서 누구에게든지 똑같은 길이고 똑같은 결과가 나오게끔 한다는 거라. 나는 특별하니까 이 방법을 쓸 수 있고, 또 나는 다른 부류니까 저 방법을 쓴다, 이런 것은 없다는 거라. 똑같은 것들이라는 거라. 똑같은 길이고. 괴로움을 없앤다고 하는 그 목표 결과를 향해서는 그 방법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특별한 어떤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불교의 실천방법은 똑같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문제가 괴로움이면 그것에 대한 실천도 똑같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대기설법이 여러 가지 형태로써 법을 설해놨지만은 그것이 다른 것들이 아니라는 거라. 괴로움을 넘는 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것은 방법이 각각 있지만은 그 방법들은 똑같은 방법들이라는 거라.

누구는 보시만 할 것 같으면 깨달음에 이른다, 누구는 계만 지키면 깨달음에 이른다 이렇게 될 수는 없다는 거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은 어느 누구든지 똑같은 방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하는 거라.

자기가 직접 실천해서 그것을 맛보는 것! 그 길은 팔정도 이외에는 어떤 길도 있을 수 없다 하는 거라. 한번 보십시오. 팔정도의 실천을 얘기하지 않는 대기설법이 있는가?

사람들은 각각의 것들을 가지고 요리를 하면 맛들이 각각 다 다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하면 똑같은 맛이 나게끔 돼있다는 거라. 요리자에 따라서 그것이 달라지는 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이 사람의 상태를 점검할 때 이런 것들을 가지고, 또 저 사람의 상태를 점검할 때 저런 것들을 가지고 똑같이 적용이 가능하다는 거라.

왜? 길은 한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을 벗어나는 다른 길이 있을 수가 있으면 다른 방법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것이 없는 걸 어떡하나. 근데 개인의 이해의 정도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국제적인 학교가 있다. 그것을 사람들에게 이 대학에 대해서 설명할 때 오리엔테이션 할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한국 사람한텐 한국말로 해야 되는 거고, 미국 사람한텐 영어로 설명해야 되는 거고, 일본 사람한텐 일본말을 해야 됩니다. 개인의 이해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방법으로 설명을 해주는 것 뿐입니다.

그렇지만 한국말로 했을 때 하고 영어로 했을 때 그 대학에 대해서 오리엔테이션 하는 내용이 다를 수가 있느냐는 거라. 다를 수는 없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개개인은 다 다르기 때문에 깨달음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길은 똑같지만은 선택하는 것은 다를 수가 있다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나는 위빳사나 수행법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르겠다. 어떤 사람은 사마타 수행법으로 하겠다. 어떤 사람은 사마타와 위빳사나 수행을 같이 겸해가지고 하겠다. 또 어떤 사람은 사무량심으로 하겠다. 어떤 사람은 부정관으로 하겠다. 그것은 다를 수가 있다는 거라.

그것은 다를 수가 있지만 그것을 일정하게 하고 나면 어떻게 돼요? 나중에 결국은 똑같은 길을 걸어가게끔 돼있다는 거라.

 

그뿐 아니라 배움의 길도 나는 아함경을 보고 하겠다. 나는 어떤 경우엔 법화경을 보고 하겠다. 만약에 그 법화경이 부처님의 진리와 똑같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게 전제조건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될 경우를 얘기합니다. 틀린 길을 가르치는 경우는 일단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그 법화경을 통해서도 진리의 길로 나아가야 되는 거고, 아함경을 통해서도 진리의 길로 나아가야 된다는 거라. 그렇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법화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아함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각자 텍스트는 다를지 몰라도 똑같은 길을 가게끔 된다는 거라. 만약에 그렇지 않은 경전이라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니라고 봐야 되는 거라. 이게 나아가는 길들입니다.

 

그래서 나아가는 길과 방법과 결과는 똑같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왜?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괴로움은 스스로 해결해야 되는 것이지 남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라.

또 사회의 괴로움, 사회의 불만족들은 모두가 다 실천하는 것으로 인해서 해결해야 되는 것이지 모른 체하고 있는다 해가지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언제 시간되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더 얘기를 할게요.

 

괴로움을 사회적인 괴로움과 개인적인 괴로움에 대해서 부처님은 분명히 다르게 얘기했습니다. 어쨌든 최종적인 해결방법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거라. 그래야만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에히빳시꼬(Ehipassiko) 라고 당당하게 선언한 목적입니다. 와서 보라는 거라. 와서 보면 니가 그 길을 따라가게끔 되고, 똑같은 길을 가게끔 되고, 누구든지, 과거든지 현재든지 미래든지 현명한 자들은 그 길을 따라가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진리를 실현한다는 거라.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띠l(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i ti.)

그렇게 마지막에 적어놓았습니다. 지혜 있는 자들은 스스로 진리를 이해한다는 거라. 왜? 그 길을 따라가면 에히빳시꼬(Ehipassiko) 해가면, 스스로 진리를 실현하고 이해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거라.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거라. 그것이 부처님이 당당하게 선언하신 에히빳시꼬(Ehipassiko) 라고 하는 겁니다.

괴로움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는 길 외에는 없다. 그 길은 다른 두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의 길”, 하나의 방법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 하는 겁니다.

자,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