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에히빳시꼬 (Ehipassiko) 1. (20091105)

담마마-마까 2020. 11. 3. 13:04

* 에히빳시꼬 (Ehipassiko) 1. (20091105)

https://youtu.be/N_iE23rN5Zw

https://youtu.be/9Fb7W2wHUSU

 

오늘 이 시간에는 에히빳시꼬(Ehipassiko) 라고 하는 빨리어 구절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에히빳시꼬가(Ehipassiko) 뭡니까?

아마 불교 용어 중에서 가장 유명한 단어일거라. 영어로 컴앤시(come and see!) 그러거든. 와서 보라! 이게 에히빳시까 라고 하는 건데, 불교의 가르침이 거기에 다 녹아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 부처님은 와서 보라고 초청했을까? 자신이 있으니까 그랬겠지. 자신이 있다는 얘기는 초청하는 대상이 한정돼있지 않다는 거거든. 나이 드신 분이든, 아니면 젊은 분이든, 아니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지, 돈이 많든지, 뭐하든지 그것에 전혀 관계하지 않고 초청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계층 구분 없이 와서 보면 깨달을 수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열려있는 그런 가르침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부터 해서 나이 드신 분까지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가르침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보통 그렇게 얘기하죠. 어디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해당이 된다 라고 얘기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했을까 하면 불교가 처음에 생겨났을 때 그때 인도 당시에는 굉장히 차별이 심했습니다. 바라문은 자기들의 특권이 있어서 신의 가르침을 일반인이 알 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다(Veda) 성전을 읽을 자격조차도 없이 이렇게 심하게 차별을 했습니다. 심지어 그런 신에게 공양 올리는 것도 일반인들은 할 수 없었습니다. 바라문이 되지 않으면. 혹시라도 지금이라도 인도에 갈 기회가 있으면 힌두 사원에 가서 신에게 공양올리고 싶다고 얘기 한번 해보십시오. 일반인은 못 올리게 합니다. 바라문이라는 사제가 그 공양물을 대신 가져가서 신에게 바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일반인이 올리면 신이 안 받는데 바라문이 줘야만이 그걸 받는다 하고 차별을 하고 있습니다. 그거 말고도 다른 종교들도 굉장한 차별들을 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 말고도 인도 당시에는 각각의 신흥종교들이 있었습니다. 윤회한다는 개념, 그다음에 영혼이 있다는 개념 이런 개념들도 보면 차별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이런 몸으로 태어났으니까 그렇게 살아야 된다 하는 이런 윤회의 개념들이 거의 지배적이었고, 또는 특별한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해가지고 그 영혼이 사람 몸에 붙으면 사람으로 태어나는 거고, 나무에 붙으면 나무로 태어나는 것이고 이런 식으로 차별을 항상 두어왔습니다. 그게 지금의 자이나교로 발전을 하죠.

 

그래서 종교가 실제로 해야 될 역할을 사실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고많은 시간들을 가지고 토론에 시간을 다 보냅니다.

세상에 끝이 있는가, 없는가? 깨달은 자는 죽고 나서 존재하는가, 안 하는가? 시간이 한량없는가, 아니면 유한한가? 이런 것들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종교의 본래 목적의 역할을 못하게 했습니다.

종교는 무엇을 위해서 있을까 하는 그런 의문들이 많이 들 정도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시간이 한량이 있든 유한하든, 세상이 끝이 있든 없든 간에 지금 내가 생활하고 있는 거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지금 현재 나는 집에서 요리하고 사회활동하고 바쁘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청소도 해야 되고, 근데 그런 것에 신경쓰다 보면 어떻게 되겠어요? 가정이 엉망진창이 돼버립니다. 외부적인 것에 신경을 쓰면 진짜 지금 내가 해야 되는 것들은 못하게 돼버린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그건 아니라는 거라. 부처님이 포인트를 맞춘 것들이 뭐냐 하면 이런 형이상학적인 관념들은 의미가 없다 라고 포인트를 맞춥니다. 왜? 살아있는 생명들은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경험을 하고 새로운 고민들과 새로운 불만들과 불만족들 그런 공포들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거라. 그래서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뭔가 하는 것들을 항상 염두에 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가?

 

근데 우리는 살아가는데 옛날 사람들은 괴로움이 있고, 지금 사람들은 괴로움이 없습니까? 그건 아니죠?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누구든지 다 고민들 괴로움들은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아깔리꼬(akāliko)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시대에 의해서 변하는 게 아니고, 낡았다고 해가지고 그걸 박물관에 넣어두고 못쓰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언제 어느 때든지 새로운 것, 언제 어느 때든지 해당이 되는 것, 그래서 시간적인 제약이 없는 것이다 해가지고 아깔리꼬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들 인류에게는 괴로움이 그대로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자급자족 생활하고 하니까 마음 편하게 괴로움이 없을 것 같이 한가롭게 지낼 것 같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 않거든. 비가 안 오면 걱정이고 비가 많아도 걱정이고, 또 살아있는 짐승들이 와서 농작물을 해치는 것도 걱정이고, 또 수확해놔도 도둑이 와서 그걸 훔쳐갈까봐 걱정이고 계속 그런 괴로움을 받았다는 거라.

그렇다고 현대에 과학이 발달했다고 해가지고 괴로움이 없습니까? 아무리 집에 감시카메라를 달아두고 모든 걸 다 갖춰둔다고 해서 괴로움이 없어요? 그건 아닙니다. 괴로움은 똑같다는 거라. 2,500년 전에 부부싸움 한 사람들이 받는 괴로움들이나 지금 이 시대에 부부가 싸우면서 받는 괴로움은 똑같다는 거라. 그래서 인간의 괴로움은 보편적인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근데 우리는 보통 이 괴로움을 당했을 때 "아, 내가 괴롭다" 하고 애길한다는 거라. 그래서 내가 괴로우니까 내가 불행하다 하고 더 괴로워하게끔 된다는 거라. 근데 원래의 괴로움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있는 것이고 그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바뀌지 않는 것이라는 거라. 괴로움은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은 누구에게라도 있는데 그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고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차이가 있는 것뿐입니다.

 

괴로움을 해결할려고 하는 사람은 그 괴로움을 자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예를 들면 괴로움을 내가 당해 봤거든. 만약에 자식 때문에 심하게 괴로움을 당해봤다, 그러면 보통 그 괴로움이 있다는 걸 알고 그 괴로운 걸 자각합니다. ‘아, 괴로움이 있구나’ 그러고 나서 똑같은 문제에 부딪치면 인제는 덜 괴로워하는 거라.

그러면 괴로움을 아예 자각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가?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뭐든지 행복하게 지낼려고 하고 괴로운 것이 있으면 아예 피해 버릴려고 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데 그걸 부처님은 '중증환자'라고 그럽니다. 그 괴로움을 알아차릴 여유도 없는 상태에 있다 하는 겁니다. 그것은 또 다른 괴로움을 불러온다는 거라. 뭔 괴로움이 있겠어요? 그 사람은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가? 그건 아니라는 거라. 그건 어쩔 수 없이 받아야 되는 괴로움인데 그것까지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사소한 괴로움들을 내가 애써 피한다 해가지고 그것이 피해질 거 같으면 좋은데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신 것이 보통 우리가 얘기하기를 "대기설법(對機說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보통 대기설법이라고 할 거 같으면 그걸 착각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냥 적당하게 그 사람의 근기에 맞춰가지고 법을 설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거라.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만약에 이 사람이 마음이 궁핍해 있다 그러면 '"아, 널리 베풀어라' 하는 이런 얘기만 자꾸 하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대기설법이 아닌가 하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거는 아닙니다.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는 의미는 그 사람에게 가장 적당한, 가장 적합한 것들을 법을 설해서 그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대기설법입니다. 그래서 그 법문 속에는 어떤 경우든 깨달음으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대기설법이 아니라는 거라.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그 사람의 마음을 다독거려 주기 위한 것, 아니면 그 사람에게 하는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기설법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성격이나 능력, 소질, 그리고 이해능력 이러한 것들을 정확하게 알아서 꼭 의사가 감기 걸렸으면 감기 걸렸다고 해가지고 감기약을 지어주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위장병이 걸렸으면 위장병이 걸렸다고 알려주고 위장약을 지어주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물론 감기약하고 위장약하고는 다릅니다. 그렇지만 병을 낫게 하는 것은 똑같다는 겁니다.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똑같아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대기설법이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맞는 걸 딱 집어주니까 그 부처님 말씀을 듣는 사람도 자신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 거니까, 자동적으로 눈이 열리고 귀도 열리고 한눈팔지 않고 부처님 말씀을 한마디 한마디 귀를 열어서 들을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기설법이라는 것은 "괴로움을 해결하는 특효약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상대방이 직면해 있는 괴로움 고민들 이런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이 대기설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대기설법은 절대 불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와서 보라!" 했을 때 사람들이 왔을 때 거기에 맞는 것들을 설법해줘야 된다는 거라.

 

예를 들어서 끼사 고따미가 죽은 아이 때문에 고민하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어요? “그 아이 못살려낸다. 죽은 아이를 어떻게 살려내느냐” 하면서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근데 부처님은 “그래 니 아이 살려줄게. 겨자씨를 구해오너라. 그럼 니 딸 살려주겠다.”

겨자라는 것은 인도에서는 카레를 먹는 습성들이 있기 때문에 카레에 반드시 들어가야 되는 게 겨자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집에 가든지 겨자씨는 다 있습니다. 가장 구하기 쉬운 거라. 그거 하나 못 구하겠어?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겨자씨를 구해오면 자기 딸을 살려준다는데 어느 어미가 그걸 구하려고 안 가겠어요?

가는 끼사 고따미를 붙잡고 “그렇지만 그 겨자씨는 그 집에 사람이 한 번도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구해 와야 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겨자씨만 구할 수 있으면 내 딸을 살릴 수 있는데 그런 집 못 구하겠어? 집집마다 다녀 봐도 사람이 죽지 않은 곳이 없어. 그때 이 끼사 고따미가 알아차립니다. 진리에 눈을 뜹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죽게 돼있다는 거라. 죽지 않은 사람, 죽지 않는 가족을 지닌 데는 없다는 거라. 그런 집은 없다는 거라. 그런 진리에 눈을 뜨니까 당연히 내 아이도 그런 때가 되어서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슬픔도 괴로움도 모두 소멸돼버립니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침착해지니까 그래서 수행을 열심히 하게 되고,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것이 바로 대기설법이라는 겁니다. 진짜 설법이고 완전한 가르침이라는 겁니다.

 

사리불 존자나 목련 존자도 마찬가집니다. 아주 뛰어난 분들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를 들으면 바로 깨달음에 이르렀던 분들입니다. 이미 앗사지 존자에게 법이라는 한마디를 듣고 나서, 일어난 것은 조건따라 일어난다고 들을 것 같으면, '아, 그것은 조건따라서 사라지는구나'하는 것을 아는 그런 능력을 갖춘 그런 뛰어나신 분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또 쭐라빤다까 라고 하는 아무리 들어도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삼개월 동안 열심히 경전공부를 했는데 두 마디 이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 다른 사람들은 자꾸 쭐라 빤다까에게 경전을 가르쳐줍니다. 근데 잊어버리는 사람한테 그 경전을 가르쳐준다고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안되는 거라.

 

근데 부처님은 거기 가서 걸레를 쥐어주면서 더러운 걸 닦아야 되니까, 마룻바닥을 닦으면서 “더러움을 닦자” “더러움을 닦자” 이것만 하라고 그럽니다. 아무리 기억을 못 하는 사람도 그거는 할 수가 있단 말이라. 그러니까 그 깨끗한 옷감이 마루를 닦으면서 점점 더 더러워져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 모든 것들이 변해가는구나. 옷감도 이렇게 더러워져 가면서 변해가듯이, 마루도 이렇게 더러운 것에서 깨끗한 것으로 변해가고,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 무상의 진리에 눈을 뜨게 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지식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관계하지 않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법을 설하는 것!

얼마나 부처님이 당당했으면 "에히 빳시까" 모든 이들이, 모든 이들이 이 법을 듣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초청했을까? 출가한 사람들에게만 그랬습니까? 재가자에게도 그랬다는 거라.

 

아나따삔디까 라는 분에게는 거기에 맞게끔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고 또 욕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위험하다는 사실, 또 번뇌를 여의는 것이 얼마만큼 좋은가 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므로 인해서 법의 눈을 뜨게끔 만들고, 아주 불가촉천민 돈 없는 사람 수니따 라고 하는 분, 왓삿까 라고 하는 그런 분들에게도, 그 청소하는 사람들에게도 법의 눈을 뜨게 해서, 부처님에게는 팔십 명의 성스러운 제자들이 있습니다. 그 팔십 명의 제자들에게 들어오게끔 만드는 거라.

 

빔비사라 왕이라고 하는 아주 낙천적이고 평화를 좋아하는 침착한 그런 왕도 불교를 믿게끔 하고, 또 꼬살라 왕국의 왕도 그냥 남 공격하기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아주 폭력적이고 그냥 영토를 넓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더라도 불교를 믿게끔 하고, 이렇게 성향이 다른 왕들도 똑같이 불교를 믿게끔 한다는 거라.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던 왓지족들이나 말라 왕국도 스스로 확인하라 하면서 불교를 믿게끔 만들고, 그렇게 누구든지 이 법을 들어서 깨달음에 이르게 했던 것입니다.

 

내가 부리는 재주로 인해서 천국에 간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하고 바르게 얘기해줄 수 있는 것, 재주부리는 것으로 인해가지고, 요즘 같으면 무대에 서는 연예인 같은 겁니다. 연예인들이 웃길 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니까 당연히 내가 천국간다고 믿고 있는 거라.

근데 부처님이 아니라고 그러거든. 다른 사람들은 “아, 참 좋은 일한다. 장한 일한다” 그러는데 부처님은 아니라는 거라.

“아니다. 니가 그렇게 하므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은 더욱더 욕심을 가지게 되고, 더욱더 화를 내게 되고, 욕심부리는 장면을 내가 연기할 거 같으면 다른 사람이 욕심부리게 돼있는 거고, 내가 화내는 걸 자꾸 보여주면 그거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은 또 화를 내게끔 되는 거고. 그런데 어떻게 욕심부리고 화내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느냐? 너는 지옥에 가는 거다.” 하고 일러주는 거라.

그게 부처님이 말한 "에히빳시까" 라고 하는 겁니다.

 

누구에게든지 해당이 되고 또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해당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에히빳시꼬"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관념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 누구에게든지 괴로움은 있기 때문에 그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일러주기 위해서 그것이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서 설한 것들이 바로 이 "에히빳시까" 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다음 시간에 "에히빳시까"”에 대한 것들을 조금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