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시마 (Sīma : 결계석) (20090813)

담마마-마까 2020. 11. 3. 13:02

* 시-마 (Sīma : 결계석) (20090813)

https://youtu.be/Q_f_MAs8OCg

https://youtu.be/o5eWCA3_gUg

 

저번 시간까지 한 게 뭐였습니까? 상기띠 했죠? 결집에 대한 것들을 아마 여러분들이 이해가 됐을 겁니다. 지금 배우고 있는 여러분들 빨리어 경전이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변형된 것도 아니고, 부처님 당시 때부터 해왔던 거, 그리고 1차 결집으로 시작된 것이 지금까지 쭉 이어진 것이다 하는 얘기를 해왔습니다. 그런 힘을 가지게끔 했던 것이 사실 출가한 스님들의 역할이 아주 지대했습니다. 그분들로 인해서 이어지는 것들이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인제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한 번 설명해 준 것에 대해서는 다시는 의문을 가진다든지 다른 견해를 가지면 안됩니다이. 만약에 의문이 있으면 그때 당시 탁탁 물어. 묻고, 만약에 그 뒤에라도 생각이 나면 또 물어라. 그래서 반드시 그것을 해소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시마(sīma)에 대한 것들을 하겠습니다. 시마가 뭐라고 돼있습니까?

'(금강)계단, 결계석' 이런 의미로 돼있죠?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들이, 금강계단이라는 단어는 많이 알고 있죠? 통도사에 있는 것, 그래서 앞에 내가 괄호해가지고 금강을 넣어놨습니다. 그냥 계단 그러면 여기 층계오르는 계단으로 오해할까 봐가지고.

 

시마(sīma)에 대한 용어풀이가 아직 한국에는 없습니다. 없는데 스님이 용어를 정리를 해봤으니까 인제는 그런 금강계단에 대한 용어를 혼동해서 쓸 필요도 없고, 또 거기에 대한 것들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정립을 해야 됩니다. 왜? 금강계단을 만들어야 되는 것은 여러분들 몫이지 스님들 몫이 아니거든.

 

그래서 계단을 어떻게 만들 것이냐, 또 절을 어떻게 불사를 할 것인가, 하는 것들은 스님이 불사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이해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용도에 맞게끔 각각의 건물을 짓고, 각각의 행사를 거행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야 됩니다.

 

태종사에 혹시 봤습니까? 법당 앞에 보면 이런 거 세워져있죠? 봤어요? 내가 있을 때 앞에 세워놓은 거 못 봤어요? 돌로 봤어요? 그게 뭔지 몰랐죠?

그게 시마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된 걸 처음 봤으니까 이게 다들 뭔가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 조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것입습니다. 오늘 설명하는 것들을 잘 듣고 거기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시마(sīma) 라고 되어있는 부분입니다.

'결계, 계단, 경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통도사에는 금강계단에서 뭐합니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뭐 할 때 그 금강계단을 이용합니까? 계를 설하고 계를 받을 때 그것을 이용하죠? 그 외에는 다른 용도로 무엇에 쓰고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일반인 아무나 출입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반인은 아무도 못 들어갑니까?

(수행자 대답 : 마루 밑에...)

뭔 마루 밑이 있어요? (수행자 대답)

글쎄 마루 밑에 묻어놨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드러나지 않는 것은 소용이 없으니까 일단 드러났다 치고, 지금 현재 있는 금강계단이라 치고,

 

어쨌든 거기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스님들 출가하는 의식이라든지 아니면 포살들 계를 주고 할 때도 거기서 하죠. 그렇게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금강계단에서는 그런 용도로 쓸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금강계단이라고 하는 시마는 출가자들만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그런 용도로 써서는 안 됩니다! 어디를 떠나가지고! 그리고 거기는 일반 재가인들에게는 허락이 되지 않는 영역입니다. 전혀 일반 재가인들이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게 허락을 해주지도 않는 장소가 이 금강계단입니다.

 

태국이나 다른 동남아시아 불교국가에 가보면 다른 데는 다 개방하는데 딱 한 군데만큼은 아예 사립문을 딱 걸어 잠가 놓고 안 열어 놓는 데가 있습니다. 거기가 뭐냐면 이 시마가 설치된 금강계단이라. 그래서 거기에 보면 그 양쪽에 네 귀퉁이에 보면 반드시 이런 시마석이 서 있게끔 돼있습니다. 이게 없으면 그 시마 포살당이라는 걸 구분하지 못합니다. 형태는 어떤 형태로 짓더라도 반드시 이것이 있어야 되는 형태를 띠게끔 돼있습니다.

 

어쨌든 거기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 스님들 출가하는 의식들, 계를 설하는 것들이 제일 많습니다. 그리고 스님들이 보름마다 한 번씩 우뽀삿타(Uposattha)라 해서 포살을 합니다. 그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뽀삿타가 이루어지는 시마석이 있는 곳이다 하기 때문에 '우뽀삿타 시마(Uposattha sīma)'라고 그렇게 얘기하게 되고.

만약에 비구를 새로 만들어내는 계를 설하는 곳이라 할 거 같으면 '위나야 시마(vinaya sīma)'라고 얘기하는 거죠. 이렇게 명칭이 달라지기도 하고, 만약에 부처님이 머물러 있었던 곳일 거 같으면 뭐라고 불러야 되겠어요? '붓다 시마(Buddha sīma)'라고 그렇게 얘기했겠죠.

 

그래서 인도 성지에 가보면 '붓다 시마'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보통 칠엽굴이든지 아니면 기원정사에 가보면, 여러분들은 자세히 안 봤는지 몰라도 거기 보면 한쪽에 영어로써 만약에 부처님이 계셨던 응향각이다 그러면 응향각 쓰고 거기에 괄호 해서 '붓다 시마'라고 적어놓은 게 있습니다. 부처님이 머물고 있는 성스러운 장소다 하는 그런 뜻으로써 그렇게 씁니다.

 

어쨌든 위냐야 시마든 우뽀삿타 시마든 이 시마가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각각 다양하게끔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수계식은 정기적이지 않죠? 부정기적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출가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야지만 거기서 계를 설하게끔 되어있는 것이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뽀삿타라는 것은 부처님 당시 때부터 지금까지 동일합니다. 딱 정확하게 보름에 한 번씩은 반드시 포살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포살을 해야 되는데 포살할 장소가 있어야 될 거 아니라? 아무데서나 포살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여기 선원이다. 이런 데서 포살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못합니다. 이중에 어느 특정한 장소를 딱 정해놓고, 요 구역에 네 면으로 해놓고 "이 구역이 시마가 있는 결계당이다" 하고 우리끼리 정해야 됩니다. 정해야만이 그 안에는 일반인들도 못 오고 이 행사가 다 끝날 때까지 아무런 방해도 받을 수가 없고, 설혹 화재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나올 수가 없어. 그렇게 정해놔야 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아무데나에서 포살을 할 수가 있는 게 아닌 거라.

 

그러니까 반드시 사원을 세울 거 같으면 최고 먼저 세워야 되는 게 뭐겠어요?

스님이 있는 곳이면 법당 먼저 지어야 되는 게 아니고, 이 결계당부터 먼저 지어야 됩니다. 그거는 변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결계당을 지어서 스님들이 신도들이 있든 없든 간에 먼저 보름에 한 번씩은 반드시 이 우뽀삿타를 해야 되는 거라.

그 결계당을 만들 수 있는 조건들하고 규격이 다 정해져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반드시 숙지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어쨌든 부처님 당시 때부터 다른 외도들도 마찬가지로 한 달 네 번 불재일이라 해서 절에 와서 행사를 했죠? 음력으로 치면 초하루, 8, 보름, 24일 그다음에 그믐 이렇게 해가지고 한 달에 4번 오게끔 그러니까 거의 일주일 간격이죠? 일주일 간격으로 와서 절에서 포살을 합니다.

그런데 일반 재가인들은 보통으로는 오계를 지니고 있다가 이날은 몇 계를 지닙니까? 팔계를 지닙니다. 우뽀삿타 실라(Uposattha sīla)라 해가지고 오늘도 여러분들 팔계 했죠? 그게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하는 팔계인 거라.

팔계를 그렇게 지키는데, 스님들 같은 경우에는 그럴 필요성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면 일반인들은 만날 농땡이치고 노는 날이 대부분이거든. 그러니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여기 와가지고 부처님 법 듣고 수행하라는 것으로 그렇게 하는데, 출가한 스님들은 만날 공부하는 날이고 만날 수행하는 날이라. 그러니까 따로 날을 정할 필요가 없다는 거라.

 

그 대신에 정해진 것은 뭐냐 하면 한 달에 두 번씩 참회하는 시간입니다!

계율에 대해서 참회하고 다시 재정립하는 시간을 가져라 하고 부처님이 말해놓은 게 뭐냐 하면 일반인은 한 달에 네 번씩 와서 자기가 원하는 시간 동안 수행하고 법을 배우는 시간을 만들고, 출가자들은 한 달에, 두 번씩 보름에 한 번씩 반드시 우뽀삿타를 행하라 하고 정해진 겁니다. 그래서 우뽀삿타를 행할려면 그 행해지는 장소가 반드시 있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를 가지게끔 됩니다.

 

그런데 우뽀삿타, 포살을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여러 스님이 모여야만이 포살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안 모일 거 같으면 포살이 안 되겠죠. 그래서 여러 스님들이 모이는 걸 뭐라고 그러냐면 상가(Saṅgh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럼 네 명이 안 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세 명일 때는? 세 명일 때는 상가라고 안합니다. '가나'라고 그럽니다. 그럼 세 명이 안 되고 두 명이나 한 명일 때는 뭐라 그럴까? 그거는 각각 '개인'이라. 근데 각각 개인이나 세 명이나 네 명이라도 어쨌든 포살을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거기에 맞게끔 한사람 아니면 두 사람 또 세 사람 또 네 사람 이상일 때 포살하는 의식에 대해서 각각 다 다릅니다.

이걸 착각을 할 경우들이 있는거라. 여러 사람이 있는데도 혼자 하는 포살형식을 띠기도 하고, 아니면 세 명이 있는데도 여러 대중들이 하는 포살 형식을 띠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부처님 법에 맞지 않는다는 거라.

우리나라 각 사찰에서 하는 포살의식들은 전부 천편일률적인 것이거든. 이게 잘못된 거라. 용어도 다를 뿐 아니라 포살하는 의식도 다 다르게 됩니다. 어쨌든 그게 이루어지는 장소가 어디냐면 이 시마석이 있는 결계당이다 하는 겁니다.

어쨌든 이렇게 두 명, 세 명, 네 명 이상이 모였을 때가 다르고, 네 명 이상이 모였을 때 상가(Saṅgha)라고 그렇게 합니다.

 

상가의 의미를 처음에는 어떻게 두었을까?

처음에는 상가라는 의미가 뭐라 했습니까? 아리야 상가를 의미한다고 얘기했죠? 그래서 성인의 경지에 이른 분들, 도의 흐름에 든 자 이상의 성인들을 갖다가 상가로서 구분을 했습니다.

 

보통 열 가지가 있죠. 자아에 대한 견해-유신견이라 그러죠. 그다음에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 또 의심하는 것, 감각적인 욕망이 있는 것, 악의를 가지는 것, 그다음에 색계에 대한 집착, 무색계에 대한 집착, 그다음에 자만을 가지는 것, 그다음에 들뜸이 있는 것, 그다음에 어리석은 것, 이런 열 가지가 보통 타파해야 될 번뇌이고 무명이다 하고 얘길 합니다.

 

이 중에서 세 가지가 떨어진 자만이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도의 경지에 들어가는 문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세 가지가 뭡니까?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견해, 자아가 있다는 견해. 두 번째는 니 것이 옳다, 내 것이 옳다하는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 그다음에 부처님 법, 이 법으로 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없을까 하고 회의하고 의심하는 것. 적어도 이 세 개가 떨어진 자야만이 처음에는 상가로서 인정을 해줬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출가자라 해서 상가로서 인정을 해준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랬던 것이 이게 의미변화를 하게끔 됩니다.

 

그렇게 한정지을 거 같으면 실제적으로는 상가 일원이 될 스님들이 얼마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스님들에게 의지하지 못한다. 스님들에게 배울 것이 없다 해가지고 어떤 현상까지 생기느냐 하면 이귀의(二歸依)만 할려고 그래. 부처님과 담마에 대해서만 귀의하겠다. 상가에 귀의하지 않겠다 하는 거라. 절을 해도 두 번만 하는 거라. 아이러니 한 현상이지. 그것뿐 아니라 지금은 오히려 재가인들이 상가형태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원래 상가는 출가자들만, 또 출가자들 중에서 성인의 경지에 든 자만 해당이 되었는데 지금은 재가인들이 상가를 구성하고 있는 거라. 이거는 엄밀하게 얘기하면 상가에는 포함이 안 되는 거거든.

특히 유럽이나 미국 같은 경우에는 문화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거기는 출가자가 거의 없습니다. 불교가 있어도. 불교가 없는 것은 아닌데 재가자들이 스님을 대신해가지고 이렇게 운영들을 합니다. 그런 형태들이 많은 거라. 난감한 거라.

상가의 규정을 어디까지로 허용을 해야 될 것이냐.

 

부처님 당시 때는 그런 게 없었을 거 같애요? 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쉽게 말하면 상가라는 개념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시마석이 있어서 수계를 할 수가 있고 포살을 할 수가 있는 출가자들의 집단을 통칭해서 얘기를 할 수가 있는 건데, 그런 기능을 할 수 있게 돼야 되는데 그렇게 되지를 않는 거라.

 

부처님 당시 때 부처님을 스승으로 하는 비구 집단들은 분명히 존재를 했습니다. 그렇죠? 부처님을 스승으로 해서 출가하는 스님들은 분명히 있었다는 거라. 그걸 갖다가 보통 뭐라 하느냐면 '붓다빠목카 빅쿠상가' 그렇게 얘기합니다.

근데 부처님 열반하고 나선 어떻게 돼요? 부처님이 없습니다. 그럼 '붓다빠목카'가 될 수가 없는 거라. 부처님이 존재했을 때는 부처님을 따르는 자, 부처님을 직접 보면서 부처님 아래에서 회상에서 모여가지고 모든 일들을 다 했단 말이라.

수계식도 하고 참회도 하고, 포살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를 했었는데 부처님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돼? 부처님 제자들이 그 일을 대신해야 되는 거라. 근데 차이가 뭐가 있겠어요? 부처님 제자들은 절대 부처님을 대신할 수는 없죠?

근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거라. 대신할 수는 없는데 부처님과 같은 역할들을 해와야 되거든. 해와야 될 거 아니라? 어쨌든 출가자도 계속 받아야 되고 모든 행사들을 갖다가 계율적인 행사들이나 이런 거를 거행을 해야 된다고. 이걸 어떻게 할 거라?

 

부처님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데와닷따가 인제 부처님도 나이 드셨으니까 물러나시오. 내가 하겠소. 그때 부처님은 뭐라고 그랬어요? 내가 상가를 이끈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다. 그런데 감히 누가 누구에게 그다음 상가는 니가 해라 하고 얘기할 수 있느냐 하면서 거절하셨죠.

그리고 아난다도 마찬가지로 아난다가 부처님 열반하고 나서 누가 이 상가를 이끌어야 됩니까? 내가 상가를 이끈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데 누가 누구를 이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서 그걸 거부했거든.

 

부처님의 상가는 그런 개념입니다. 부처님 당시 때 상가들이 존재를 했지만은 각각의 야합단체가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한국테라와다 불교라는 법인이 있습니다. 법인 아래는 어떻습니까? 각각의 사원이 존재를 하죠.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있고, 부처님 밑에 제자들이 있습니다. 사리불 존자도 있고 목련 존자도 있고 또 다른 제자들도 있고, 그럼 그 제자들에 따르는 무리들이 구성이 돼있단 말이라. 그러면은 포살을 하고 수계식을 하고 이런 것은 어디서 이루어지겠어요? 여기서 이루어지는 거라.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렇게 됐다는 거라. 부처님이라고 하는 상가, 부처님을 따르는 무리로서의 상가, 이거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리는 없어져 버리는 거라.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시중에 세븐일레븐(편의점) 굉장히 많이 있죠. 그게 뭡니까? 명의만 세븐일레븐이라는 걸 쓰고 있는 것이지, 그래서 세븐일레븐이 다 똑같은 것처럼 보이지만은 실제적으로 오너는 다 각각입니다. 그래서 자율적으로 운영하게끔 돼있다는 거라. 부처님의 제자들에 의한 상가라는 것은 그 세븐일레븐의 하나의 점포와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근데 세븐일레븐이라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만 가질 수 있는 그런 상가 개념이라는 거라. 그렇게 정립을 하면 여러분들이 이해하기가 좀 수월할 겁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상가 개념이 변해오게끔 됩니다.

 

부처님의 상가라는 개념은 카톨릭과 같은 일률적인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위에서 다 컨트롤 해가지고 다 집행해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게 일례로 비교되는게 게 꼬삼비에 분쟁이 있어 났을 때 부처님이 가서 중재를 할라 했거든. 그 꼬삼비에 스님들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부처님이 여기에 관여를 못합니다.” 부처님 말을 안 들을 수는 없지만 여기는 우리의 상가라는 거라. 부처님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거라. 그러니까 우리가 분쟁을 해결하겠다는 거라. 부처님 말도 물론 안 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부처님이 하지 마라 한다고 해서 안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거라. 우리의 상가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내겠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 말을 결국 안 듣게 되는 거라. 안 들으니까 나중에는 싸움이 번져가지고 결국은 부처님이 거길 떠나야 되는 상황이 되버리는 거라.

 

그래서 각각의 상가라고 하는, 단위 사찰들은, 단위의 상가들은 그 누구도 부처님만이 아니라 부처님 이상 가는 분이 있더라도 그것의 운영에 대해서는 훼손할 수 없는 것이 불교만의 독특한 상가 개념이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 열반 후에 각각의 상가가 존재를 해왔는데 이 상가를 하나로 묶어줄 필요성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각 나름대로 해석을 할 수가 있으니까. 그 묶어줄 수 있는 것들이 뭐냐 하면 이 시마라고 하는 것!

예를 들면 어디 상가, 어디 사원에 가더라도 동일하게 그날 그 시간에는 어느 장소에 모여서 반드시 우뽀삿타를 해야 돼. 그리고 어느 사찰에 가더라도 반드시 이 결계당을 만들어 놔야 되는 거라.

 

그러면 다른 데서 오는 스님들도 이 결계당에 참여할 수 있는 거고, 또 여기 있는 스님들도 누구든지 한사람 예외도 없이 이 결계당에 모여서 참회하고 하는 계율의식을 거행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거기서 비구들을 만들어 내야 된다는 거라. 흩어져 있는 상가를 묶어 줄 수 있는 기구가 뭐냐 하면 바로 이 시마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게 없었으면 아마 불교가 많이 바뀌었을 거라. 각각 나름대로 행사를 하다 보면 후대로 내려오면 바뀌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 열반 이후에는 뭘 의지해야 돼? 법과 율이라는 것! 그 법과 율을 시스템화 해가지고 하는 것들이 뭡니까? 우뽀삿타고, 출가의식이고, 그다음에 각각의 참회의식들이고, 이런 것들이라는 거라. 그게 어디서 이루어지느냐는 거라. 바로 이 시마가 있는 결계당에서 이루어지게끔 돼있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큰 행사라고 할 것 같으면 통상적으로 출가한 스님들은 왓사(vassa)라고 그럽니다. 결제! 그다음에 결제 끝나고 나서 하는 게 뭡니까? 빠와라나(Pavāraṇā 自恣)! 그다음에 또 하는 게 뭡니까? 빠와라나 끝나고 나서 유행(遊行)을 나가죠? 만행(萬行)을 나갑니다. 만행을 나가서 자기가 거기 지역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 듣고 또 법을 설하고 하면서 또 내가 참회하는 의식들 짜리까(cārika)라고 그럽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 하면 포살이라고 하는 우뽀삿타(Uposattha)!

이 네 가지는 출가한 스님들이면 어느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것들이라.

 

우뽀삿타, 왓사, 빠와라나, 짜리까 이 네 가지가 출가자들의 큰 의무라.

이 네 가지를 행하는 곳이 어디냐는 거라. 시마석 있는 곳, 결계당 밖엔 없다는 거라. 그런데 이것은 재가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결계당은 반드시 출가자들만 들어가는 곳이고 일반인들은 절대 출입을 못하는 곳이라.

그런데 거기서 만약에 일반인들한테 계를 줬다. 부처님이 봤으면 뭐라 하겠어요? 또 일반인들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놨다. 만약에 결계당에다가 부처님 사리를 모셔놓고 참배하게끔 한다. 부처님이 보면 통곡해서 아마 눈물 흘릴 겁니다.

결계당은 그런 곳이 아니라는 거라. 금강계단이라는 곳은 그마만큼 출가자들이 이 법을 유지를 해왔고 이 법을 존속해 온 것에 대한 전유물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이 결계당 입니다. 이해하겠습니까?

 

밑에 보면 「계단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계단을 만들 때 처음에는 불교가 미약했을 때는 승가에 귀속된 토지에 계단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누구든지 머무는 곳에 가서 계단을 만들었어요. 내 소유가 아니라도. 그러니까 좀 조용하고 스님들끼리 모여서 할 수 있는 공간에다가 요런 것들을 세우는 거라. 꼭 돌이 아니더라도, 종이라도 해가지고 만들어서 요 네 구역에다가, 쉽게 말하면 여기다가 스티커로 만들었다, 여기에 저기에 저기에 저기에 네 귀퉁이라 할 것 같으면 이 안에 포함이 되겠지. 이 네 귀퉁이에 종이딱지를 갖다가 "이건 내꺼" 하면서 탁탁탁탁 붙였다.

 

그럴 것 같으면 다른 사람들이 보고 ‘아, 여기에서 무슨 행사가 있는 모양이지’ 하면서 자기가 거기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기에 안 들어가는 거라.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 행사를 하는 거고. 그러니까 자기 땅이 아니라도 충분히 가능했다는 거라.

왜? 옛날에는 출가한 스님들이 모이는 곳들이 전부 그런 곳이었거든. 공원 같은데, 숲 같은데, 누구든지 이용하는 곳이었단 말이라. 그리하더라도 그 구역은 분명하게 했다는 거라. 그래서 다른 출가자들도 여기 들어가지 못하고, 일반 재가인들도 그 행사가 있을 동안에는 여기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거라. 그런 조치들을 불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풍습이 지금도 남아있는 게 뭐냐 하면, 지금은 사원 아래에 토지들도 있고 결계석이 다 있는데, 옛날 풍습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게 스리랑카 같은 경우에는 켈리네의 강에 가보면, 강이 흘러가는 가운데 둑 같은 것이 볼록 솟아 있습니다. 거기는 평상시 때는 아무나 들어가.

그런데 그 장소를 수계하는 장소로 정하는 거라. 이게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 그래요. 스리랑카 역사에서 부처님이 거기에 와가지고 법을 설했다는 전설도 있고 해서 그것을 살려가지고. 그런데 지금도 거기 강은 일반 스님들 소유가 아니라.

 

그런데도 계를 설할 때는 '씨암니까야' 같은 경우에는 일 년에 두 차례 계를 설하게 되는데 반드시 거기에 가서 하는 거라. 거기에 가서 하더라도 그전에 스님들끼리 모여서 이번에는 우리가 저기에 결계석을 설치하겠다 하고 동의를 하고, 그러고 나면 스님들이 가서 당일날 결계석을 네 군데다 설치를 합니다. 그걸 딱 보면 다른 사람들은 인제 못 들어가. 결계하는 당사자들만 거기 딱 들어가는 거라.

 

그게 옛날부터 그런 풍습들이 있었기 때문에, 옛날에는 자기 소유가 아닌 땅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결계석을 표시를 해가지고 계가 형성되도록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래서 의식들을 거행하게끔 됐는데, 그래서 그걸 비유를 해서 공원에 놀러가서 야외용 돗자리 깔아놔 놓고 그 안에서 가족들이 즐겁게 노는 것과 마찬가지다. 돗자리를 깔아놨을 때는 다른 사람들은 그 돗자리에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거라. 자기들 놀고 나서 돗자리를 싹 걷어가지고 가버리면 그 땅은 또 누구든지 이용하게끔 되는 거라. 그런 형태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불교가 점점 더 자리를 잡아가면서 상가에다가 기증하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아나따삔디까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승단에다가 기증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스님들이 정주하는 습관들이 생겨나는 거고, 정주를 하든 정주를 하지 않든 한 달에 두 번은 우뽀삿타, 포살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포살당을 따로 만드는 거라. 그 땅에다가.

 

그런데 그 장소는 사람들이 오기가 쉬워야 되고, 시끄러운 곳이 아닌 그런 곳으로부터 좀 피해지는 장소, 그러니까 한 중앙에는 절대 포살당을 안 만듭니다. 한쪽 구역에다가, 좀 한적한 곳이다 싶은 곳에다가, 그리고 숲이 좀 있고 어느 정도 가려지는 곳이다 싶은 곳에다가 보통 만듭니다.

대부분 보면 방위는 가리지 않는데, 만약에 이것이 사원이라 칩시다, 여기가 사방이다, 그러면은 보통 통상적으로 보면 들어오는 문이 여기다, 여기일 것 같으면 여기에서 가장 먼 곳, 저 구석 쪽에, 저 저쪽 정도에다가 포살당을 보통 만듭니다.

그리고 법당 같은 경우에는 이 들어오는 문에서 끄트머리 요정도 되겠죠? 여기에다가 법당을 만듭니다. 그다음에 수행처소는 요쪽 양쪽에다가 만들고 이런 식으로 대부분 자리배치가 그렇게 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대부분 보면 입구에서는 먼 곳, 그리고 어느 정도 은폐가 되는 곳, 조용한 곳 이런 곳들이 포살당을 만들 장소로써 보통 정해집니다.

 

보통 신도들이 “스님, 우리가 포살당을 만들려고 하는데 어디가 적당하겠습니까?” 하면 스님이 지정을 해줍니다. 저기에다 해라.

“그러면 그 규모는 어떻게 할까요?” 규모를 갖다가 정해줍니다.

“만들 때 앞에 시마석은 어떻게 만들까요?” 그러면 요런 식으로 해라. 저런 식으로 해라. 모양도 여러 가지니까 그렇게 정해주고, 출가자는 그런 역할들을 하고.

그리하더라도 실제적으로 이 포살당을 만들고 시마석을 세우고 하는 것은 누가 하느냐면 일반인들이 한다는 거라. 그렇게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은 분명하게 하면서도,

 

재가인들이 이 부분을 몰랐을 경우엔 어떻게 되겠어요? 내가 돈 내가지고 내가 마음대로 짓는 거라. 그러면 계율에도 안 맞게 되는 거고, 스님들이 계율에 안 맞을 거 같으면 거기에 가서 포살을 할 수도 없는 거고, 이렇게 이중 일이 되게 되어버리는 거라. 그래서 일반인들도 반드시 알아야 되는 게 이 시마라는 개념입니다.

 

이 계단이 설치가 되고 나면 그 안에서 하는 것들이 뭐냐 하면 참 많은 일을 합니다. 여기에 적혀져 있죠? 상가가 하는 일입니다.

출가한 스님들의 생활습관의 관리, 절 재산의 관리, 그다음에 사람 간에 문제 조정하는 것, 비구들끼리나 비구와 재가자들 간의 문제를 조정하는 것, 그다음에 비구들 계율에 의심이 되는 것에 대한 해결, 일반계율을 참회하도록 하는 것, 그다음에 일반 재가인들을 출가시키는 것, 그다음에 적절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출가자들을 그 상가에서 추방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상가가 하는 일들입니다.

상가가 하는 일들은 거의 보면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가가 결정한 것은 무조건 따라야 돼! 그런데 그 상가의 일원은 각각의 스님들이라는 거라. 각각의 스님들이 모여서 하다 보니까 그것이 상가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상가는 기본 원칙이 반드시 만장일치를 합니다. 만장일치를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안 돼!

 

예를 들어봅시다. 제1차 결집 때 아난다 존자에게 참회를 하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소소한 계율들은 없애도 된다 했다고 아난다 존자가 얘기했단 말이라. 그래서 물어봅니다. 그 소소한 계율이 뭐냐? 뭐라고 부처님이 얘기했냐? 안 물어봤다는 거라. 그럼 니 잘못이다. 참회해라. 아난다 존자 입장에서는 난처하거든. 그게 내 잘못이 될 수가 없는 거라. 부처님이 얘기 안 한 것인데.

그런데도 아난다 존자는 믿고 따른 거라. 참회를 한 거라. 어째서 참회를 하게 되겠어요? 출가한 자, 상가라고 하는 것은 화합이 우선입니다. 화합이 우선이 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 화합을 깨뜨리는 형태에서 참회는 안 됩니다.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용인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모든 사람이 다 동의할 때까지 끊임없이 토론을 해야 돼. 그래가지고 다 동의를 한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되는 거라.

 

제1차 결집 때도 꼭 마찬가지 형태였다는 거라. 그러니까 아난다 존자가 다른 장로스님들의 판단을 믿고 참회를 하는 거라. 자기 의견도 있지만 다른 스님들의 의견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거라. 내가 뚜렷하게 잘못한 게 아니라도 그거로 인해가지고 화합된 상가가 만들어진다고 할 거 같으면 그렇게 한다는 거라. 그게 상가 정신이라. 그러다 보니까 만장일치가 우선이 돼야하는 거고,

만약에 만장일치가 안 될 때는 그럼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럴 때는 반드시 청정하게 살아가시는 스님 중에서, 그 계율과 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고, 그것을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을 지목을 합니다. 그게 제2차 결집 때 이루어집니다.

2차 결집 때 여덟 명의 청정한 스님들을 구성했다고 그렇게 나와 있거든. 그 스님들이 판단을 하는 거라. 쉽게 말하면 둘이가 싸워가지고 2차 결집 때 한쪽은 "계율위반이다" 그러고 한쪽은 "계율위반이 아니다" 하고 싸워가지고 결론이 안 나는 거라. 도저히 안 되니까 어떻게 해야 돼? 그 여덟 명을 구성하는 거라. 그 여덟 명으로 구성된 사람이 판단한 것에 따라야 돼. 그건 다수결 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거라. 이 스님들이 너희들은 틀렸다 할 것 같으면 이게 비법이 돼버리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한쪽은 테라와다의 맥을 유지했던 아라한들이 칠백 명이 모였고, 요쪽은 만 명이 모였어. 숫자로 칠 것 같으면 칠백 명이 게임이 안 돼. 그런데도 이 여덟 명의 스님들이 칠백 명이 맞다는 거라. 이게 원래 1차 결집 때 형성된 것, 한자라도 바꾸지 않아야 되는 정신에 맞는 거고, 너희들이 틀렸다는 거라.

그러니까 만 명이 틀린 게 돼버리는 거라. 그렇게해서 불만을 가져가지고 여기서 다른 결집을 하게 되는 거라. 대승불교가 만들어진 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거라. 테라와다가 형성된 것도 그렇게 해가지고 형성이 되는 거고.

 

그게 뭐냐면 만장일치지만, 만장일치가 안 될 때는 반드시 다수결인데, 다수결은 지금의 형태의 다수결 하고는 완전하게 다릅니다. 이렇게 2차 결집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분들을 내세워서 그분들의 판단에 따라서 가부(可否)가 결정되는 것, 찬반(贊反)이 결정되는 것이 그게 다수결이라는 거라. 그런 형태들을 띠게끔 돼 있다는 거라.

 

그래서 상가는 출가자들만의 고유한 행사이고, 의무입니다. 다른 종교인 아니면 재가인들은 이 고유한 행사에는 참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부러 배척하기 위해서, 배타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것이 상가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가지고 스님들끼리 잘잘못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스님들끼리 그런 얘기하면 안 되지만 어떻게 하면 신도들 한테 돈 많이 거둘 것인가 하는 이런 얘기하고 있는데 신도들이 이걸 듣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스님들에 대한 신임이 확 떨어지겠지. 그와 마찬가집니다. 스님들끼리 해야 될 거는 일반인들이 참여를 못하게 하는 거라. 그런 얘기가 잘됐다는 게 아닙니다이. 그거는 아주 나쁜 겁니다. 나쁜 거지만 어쨌든 그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잘잘못에 대한 것들은 스님들 간에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참여를 못하게끔 하는 것이다 하는 거라. 그럼 그런 계단을 만들어 놨으면 그런 행사가 없다고 하더라도 일반인들이 참가를 해도 되지 않느냐? 그건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 장소 자체는, 고유한 행사를 하는 장소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거 많은데 꼭 거기 가서 해야 될 이유는 없다는 거라. 다른데 가서 하라는 거라. 그렇게 규정이 돼있습니다. 그마만큼 계단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 밑에 「계단의 중요성」 보면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인데 유일무이한 세계적인 종교이다 하는 얘기를 스님이 적어놨습니다.

쉽게 말하면 폭력에 의하지 않고, 강제적이지 않고, 남을 위협하지도 않고, 철저하게 자비를 바탕으로 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은 오로지 불교가 유일하다.

어느 종교든지 기독교든지 카톨릭이든 이슬람이든 어느 종교든지 자연스럽게 퍼져나간 종교가 어딨느냐는 거라. 강제적으로 남의 나라 정복해가지고 자기 종교를 퍼뜨리는 거고, 이런 형태들을 띠었지 자연스럽게 퍼져나간 데가 없었다는 거라. 지금 불교가 유럽이나 미국에 많이 퍼지고 있는데 누기 믿으라 해서, 누가 강제로 해서 안 믿으면 죽인다 해가지고 그렇게 퍼지는 거라? 자기들이 와서 배우는 거라.

지금도 끊임없이 동남아시아에 가면 서양인들 넘치고 넘쳐납니다. 배워가는 거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퍼져나간다는 거라. 전 세계에 유일한 세계적인 종교인 것이지, 물론 인구수로 비례해가지고는 불교 인구가 적을지 몰라도 실제적으로 사상적인 면에서는 불교를 따라올 수 있는 종교는 없다는 거라. 어떤 종교이든지 간에. 그래서 유일무이한 세계적인 종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불교가 퍼져나가게 된 것은 출가자의 역할이 지대합니다. 지금도 불교를 퍼뜨리는 건 재가인들이 얘기해가지고 불교가 퍼지는 게 아닙니다. 스님들이 다 얘기 해가지고 불교가 퍼져나가고 있는 형태들을 띱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마찬가지로 출가자들에게 포교를 하라, 전도를 하라 했지 일반인들에게 그렇게 얘기한 적이 없거든. 아소카 왕에 의해서 전도사가 파견된 것도 출가자들이 파견된 거지 재가인들이 같이 파견된 것은 없다는 거라.

 

전도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출가자의 역할이 그마만큼 중요하다는 거라. 그 출가자의 생명은 어떻게 유지돼나가야 돼? 상가의 모임에서 유지돼나가고 지켜나가지고, 거기서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건 상가의 고유 행사이기 때문에 출가자 이외에는 못한다는 거라.

 

지금도 가끔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가의식을 하면요 사미계를 할 때는 법당에서 합니다. 법당 아니라 그냥 노지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저기 인도 같은 경우에는 붓다가야 대탑 앞에서도 합니다. 사미계는 아무데서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비구계를 딱 줄려고 하면 이동합니다. 이 포살당으로, 결계당으로 딱 이동합니다. 이동을 하면서 딱 문 걸어 잠가버립니다. 누구도 못 들어와!

들어가는 스님들 들어갈 때 표시를 합니다. 자기가 들어갈 때 막대가지고 들어가서 안에다 탁 꽂고, 그럼 안에 있는 스님은 그 막대만 탁 세는 거라. 우리 사원에 있는 전체 대중 인원이 만약에 스무 명이다. 그럼 스무 개가 되어야 되는 거라. 스무 개가 안 되고 열아홉개다. 그럼 누구 하나 빠졌다. 찾아라! 사미계는 참석 안 해도 비구계는 참석해야 되는 거라. 데려와야 되는 거라. 만약에 죽을병이 걸려가지고 못 데려올 것 같으면 입구에라도 가서, 상가띠라도 벗어서 거기다 걸어놔야 되는 거라. 그래가지고 모든 인원들이 참석한 상태에서 그걸 집행하는 거라.

 

그러니까 일반인들은 지금도 그래. 아, 이 중요한 행사, 비구가 되는 행사에 사진을 찍어야 되는데 문을 걸어 잠가버리니까 할 수가 없잖아. 요즘은 어떤 경우에는 어쨌든 그걸 남겨야 되니까 자기는 못 들어가니까, 스님한테 가만히 카메라를 갖다 줘. 안에 있는 스님들이 찍는거야 으짤끼고. 그렇게도 합니다.

 

어쨌든 상가라는 개념이 그마만큼 단단하면서도 중요한 의미들을 가집니다. 그래서 상가가 무너져버리면 출가자들이 다 무너져버립니다. 새로운 출가자를 만들어내는 것도 상가에서 해야 되는 거고, 모든 일을 해야 되는 것도 상가에서 하는 거라. 지금 한국테라와다 불교라는 걸 만들어 놓은게 그마만큼 의미가 있다는 거라.

그거는 뭐냐 하면 상가의 개념이거든. 그런 개념이 없을 거 같으면 그냥 일개 여기 붓다의 길따라 선원, 아니면 보리수 선원, 아니면 마하보디 선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일개 단위 집단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그런 상가가 구성되어 있으면 상가에서는 모든 일을 집행할 수가 있는 거라. 그래서 우리도 지금 어떻게 해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스님들 간에 계율조항에 대한 것, 뭐에 대한 것, 뭐에 대한 것, 계속적으로 하는 거라. 그게 상가의 의미라는 거라.

 

상가는 그래서 여기 보면 「병원과 같다」 하고 적어놓았습니다. 아프면 아픈걸 치료해 준다는 거라. 잘못되면 잘못된 걸 참회 받아가지고 그걸 없애주는 거라. 그런데 이 국회의사당과도 같다는 거는 국회의사당 보면 국회의원이 의결을 하지 다른 사람이 하지는 못한다는 거라. 출가자 외에는 못하기 때문에!

 

한국에 불교가 전해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많은 시간들을 거쳐오면서 변화들을 가져왔는데, 가장 안 좋은 변화가 뭐냐 하면 이 시마(sīma) 결계당에 대한 개념정리를 못했다는 겁니다. 못하니까 어떻게 돼요? 당연히 상가라는 것들도 개념정리를 못하게 되는 거라. 여러분들은 앞으로 이 부분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시마(sīma) 라고 하는 것은 출가자들이 하는, 상가에서 하는 고유권한이고 고유행사인 것이지 재가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반드시 테라와다불교 승단, 그리고 테라와다불교의 사원이 만들어진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l 해야 되는 것이 결계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결계당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는 거라.

스님들의 네 가지 의무! 아까도 얘기했지만 포살을 하고, 안거를 하고, 해제를 하고, 그다음에 만행을 해나가고 이런 모든 결정을 하고, 참회를 하고 하는 이런 것들은 어디서 이루어지는데? 새로운 비구를 만들어 내고 하는 것도 전부다 포살당에서 하는 거라. 이 계단에서 하는 것이지 다른 데서 할 수가 없는 거라. 그거는 아예 규정되어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마만큼 중요한 것이 이 시마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마 우리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도 이 시마에 대한 것들을 지금 추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선포식을 내년에 예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땅이 없어가지고 문제입니다. 지금 겨우 경주에 있는데 너무 외져가지고, 거기 아니면 지금 다른 장소가 없습니다. 다들 더부살이를 하고 있어가지고, 더부살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은 부동하지 않기 때문에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지금 경주에서 해야 되나 어찌해야 되나 하고 있는 중이라.

어쨌든 그리하더라도 이 시마라는 개념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시마를 하더라도 아까도 얘기했지만 스물다섯명 이상의 스님들이 모이는 장소가 돼야 만이 결계당이 될 수가 있습니다.

 

왜? 아까 뭐한다고 그랬어요? 해제가 끝나고 나면 스님들 만행나간다고 그랬죠? 지금도 해제 딱 하고 나면 각각의 장소에 보면 스님들 바리때에다가 위에 구슬을 얹어놓은 형태들을 해가지고 플래카드들을 길 가다 보면 많이 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열세 가지 승잔죄라든지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죄에 대해서 참회하는 장소를 표시해놓은 것들입니다.

근데 그 참회하는 방법도 한사람에게 참회하는 방법, 다섯 사람에게 참회하는 방법, 스무 명에게 참회하는 방법, 참회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거든. 그러니까 최소인원이 스무 명이라. 13승잔법은 스무 명의 스님이 모인 장소에서만 참회가 가능한 거라. 그거 할 수 있는 곳이 어디냐면 이 결계당이라는 거라.

 

그러니까 적어도 결계당의 최소단위는 그 스무 명이 모여야 되죠. 참회할 사람 몇 명 모여야 되죠. 그럼 적어도 스물다섯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만이 가능하다는 거라.

그 장소는 한사람이 여기 앉아있다. 그다음에 옆에 사람이 앉아있다. 손을 이렇게 뻗었을 때 손에 닿을 정도로, 그러니까 이렇게 일반적으로 앉아있을 때 스물다섯 명이 모일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만이 되는 거라. 너무 작아도 안 되는 거라.

스님들이 거주하는 공간하고, 개인이 거주하는 공간하고, 이렇게 상가가 운집해서 모이는 장소하고 그래서 차이가 나는 거라. 그렇다고 해가지고 다른 장소보다도 크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법당 같은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니까 크게 짓죠.

 

그런데 이 결계당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 크게 안 짓습니다. 대부분 여기로 치면 요거 한 삼분의 일 정도, 그 정도 되는 공간이라는 거라. 그 정도 되는 공간만 거의 대부분 짓습니다. 삼분의 일보단, 어쨌든 요 문 저쪽부터 요 끝까지 정도, 요 정도 되는 공간이라는 거라. 그렇게 하는데 딱 중요한 거는 뭐냐 하면 거기서도 계를 설해야 된다고 했잖습니까? 그래서 계단이 반드시 형성이 돼야 됩니다.

 

여기 스님들이 앉아있으면 밖에 나가서 불러들이고, 그리고 이 스님에게 니가 지금 출가할려고 입고 있는 옷이 니 옷 맞느냐? 이 바리때 니가 구족한 것 맞느냐? 이런 것들 물어보고, 그다음에 니가 사회에서 뭐 죄를 지은 것이 있느냐 없느냐 이런 거 물어보고 할 때는 밖에서 해야 되는 거라.

밖에서 해야 되는데 그 경계를 벗어나선 안되니까 어떻게 돼요? 이 계단보다 한 단계 낮게끔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래서 계단을 만들 때 설계단을 만들 때는 반드시 이중문입니다. 요기에 모인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면 딱 문 닫을 곳이 한 곳에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밖에 문, 쉽게 말하면 대문 형태들로써 만들어진 게 하나 있게 되고, 그 대문과 이 안에 문하고 사이에 계단을 반드시 만들어야 되는 거라.

 

그래야만이 모든 행사가 여법하게 치러지는 거라. 그래서 올라올 때는 저쪽 대문을 열고 들어와가지고 계단을 밟아가지고 몇 계단이라는 규정은 없지만, 계단을 밟아서 올라와서 어느 정도 평평한 공간이 되고, 다시 한 단계 높아서 큰 홀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거라. 그런 형태로 어디든지 짓게끔 됩니다. 그게 모든 행사가 여법하게 진행되기 위한 단계라는 거라.

 

그런 조건이 구비가 안 되면 안 되고, 마찬가지로 이 울타리, 그러니까 밖의 울타리 그 네 귀퉁이에는 반드시 시마석을 세워야 됩니다. 시마석을 세우게 되고, 여력이 되면 돈이 여분이 있는 사람들은 들어오는 입구에다가, 이 안에 있는 게 시마석입니다. 그 시마석을 감싸고 있는 보호각이죠. 보호각을 양쪽 문 옆에다 이렇게 세웁니다. 태종사에 보면 그렇게 돼있죠? 앞에 큰 거 두 개 있고 양쪽 귀퉁이에 보면 네 개 있습니다. 그런 형태로 짓게끔 됩니다. 대부분 그런 형태들로 짓게끔 됩니다.

자, 그게 시마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다른 걸 가지고 얘기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