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붓다 사사나(Buddhasāsana) (20090805)

담마마-마까 2020. 11. 3. 13:01

* 붓다 사사나(Buddhasāsana) (20090805)

https://youtu.be/Ll6THzGtnwM

https://youtu.be/NEIH2Anq0ms

 

불교의 세계라고 하는 부분에서 그렇게 들어가 있는 겁니다.

거기에 인제 두 번째에 보면 「불교」라고 되어있는 항목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글을 시작하는 글은 읽어보면 대부분 이해가 되는 거고, 나머지 부분들도 쉽게 써놓았기 때문에 크게 어려울 것은 없습니다. 어려울 거는 없는데 좀 더 부연설명을 붙이는 거니까 교재를 중점적으로 해서 그 부분을 완전하게 숙독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이.

 

붓다 사사나(Buddhasāsana) 그렇게 돼있습니다. 우리 법인 이름도 뭡니까?

「테라와다 붓다 사사나 인 코리아(Theravāda Buddhasāsana in Korea)」 이렇게 돼있습니다. 「한국 테라와다 불교」라는 게. 만약에 미국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미국 테라와다 불교라고 할 것 같으면 「테라와다 붓다 사사나 인 USA」 그렇게 되겠지. 그러니까 나라가 다른 것뿐이지 테라와다가 바뀔 수 없고 붓다사사나라고 하는 불교가 바뀔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붓다사사나라고 하는, 불교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불교라고 할 경우에 보통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종교라든지 신앙이라든지 하는 이런 것들이 포함이 안 됩니다.

원래 불교의 의미는 종교적인 의미도 없고 신앙적인 의미도 없습니다.

원래 기독교 유럽쪽에서 릴리젼(religion) 이란 것들을 쓰기 시작했는데, 원래 라틴어에서 리고(ligo)에서 유래가 됐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리고(ligo) 라고 하는 것은 '묶는다, 속박하다' 라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너무나 미약하고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걸 강제로라도 신에게 다가가서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종교, 신앙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에게 연결하는 도구역할을 한다하는 의미로써 '릴리젼'이라는 '리고'라는 단어를 썼다고 그럽니다.

불교는 신이라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을 얘기할 건데, 부처님에게 갖다 묶는다는 얘기는 잘 안하죠?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일견 맞기는 맞습니다. 어쨌든 불교는 종교나 신앙이라고 하는 의미보다는 그냥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여러분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부터 해서 병원 의사도 여러분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가르침을 주는 사람은 다양합니다. 그 가르침을 주는 여러분들 중에 한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붓다라는 것뿐입니다. 그 여러 가르침 중에 하나라고 이해를 먼저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고 실천해서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게 되고, 또 우리가 행복하게 되고, 그리고 우리의 습관들, 지내왔던 행위들을 갖다가 바꾸어나가는 그런 것으로 인해서 이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하나의 가르침을 붓다에게서 찾는 겁니다.

그걸 부처님의 방법론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만 해서도 안 되고, 듣기만 해서도 안 되고 실천해야 되는 것이 요건입니다.

 

어쨌든 이것을 불교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 빨리어 용어에 붓다사사나(Buddhasāsana)라고 하는 용어를 살펴보면 붓다(Buddha) 라고 하는 것과 사사나(sāsana) 라고 하는 것 두 개로 나눠집니다.

붓다라고 하는 것은 붓디(Buddhi) 라고 하는 말, '지혜'를 뜻합니다. 지혜에서 파생된 말이죠. 그래서 붓디라고 하는 '지혜를 완성한 사람', '지혜의 완성자', 또는 '지혜를 성취한 자'라는 의미로써 붓다라는 개념이 등장을 한겁니다. 똑같은 인간으로서 지혜를 완성한 자라는 그런 뜻입니다. 붓다라는 의미가.

우리와 똑같은 대등한 인간인 것이지 신의 위치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붓다사사나라는 것은 단지 인간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지혜를 완전하게 성취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자의 가르침이다 하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이제 불교라는 의미입니다.

 

불교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있는 불교와 근본적인 부처님의 가르침 이렇게 두 가지로 대별을 해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있는 불교는 각자 각자가 다 다릅니다. 근데 인제 근본적으로 부처님이 가르친 가르침으로써의 불교는 진리이기 때문에 변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근본적인 변하지 않는 진리로써의 가르침은 누구라도 공부할 수 있고 누구라도 비판할 수 있고 누구든지 비교 분석할 수 있는 것이 기본 전제조건으로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부처님은 감히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얘기하는 것은 어느 시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가르침이다. 옛날에도 그 가르침이 진리였고, 지금도 그것이 진리이고, 앞으로 미래에도 진리인 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만약에 상황 따라 달라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보기가 힘들다 하는 그런 겁니다. 단지 부처님은 그 진리를 설하신 것뿐이라는 거라.

 

불교의 유명한 말들 중에 '에히 빳시까(Ehipassika)'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와서 보라. 와서 봐주라. 자유롭게 보라'라고 하는 의미로써 속박하지 않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니 마음대로 보고 싶으면 와서 보라는 거라. 와서 보고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해가지고 그 판단한 능력으로 인해서 니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돼라 하는 그런 의미로써 에히 빳시까(Ehipassika) 라고 얘기합니다.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간혹 불교라는 이름으로 각각 하는 것들은 어찌 보면 지금 현재 알고 있는 불교가 해당이 될 수 있는데,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그건 조계종이고 천태종이고 아니면 또 다른 종이고 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조계종에서 하는 것들하고 천태종에서 하는 것들하고 다르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불교라고 보기가 힘드는 거죠.

각각의 의식들은 다릅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건 불교라고 보기는 힘든 거죠? 거기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봐야 됩니다. 물론 파생된 것이라 해서 꼭 틀렸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얘기할 것 같으면 불교는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각각의 종파에 교주의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르침은 그 교주의 가르침일 뿐인 것이지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 이외에는 일언일구도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없는 것이 불교라는 사실을 명심을 해야 됩니다.

왜?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자체를 가르친 것이고 진리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진리를 알고 싶다고 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말한 것 외에는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그것을 스스로 실천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붓다사사나라고 하는 것이 존속된다"고 하는 의미는 뭐냐 하면 거기에 적어놨듯이 "애매하게 되거나 소실, 변경되거나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설하지 않는 것을 다시 만들어 넣거나, 또 부처님이 설한 것에다가 살짝 덧붙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대승경전들은 부처님이 설한 것이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그거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봐야 되는 거고, 여러분들 알고 있는 아함경 거기에는 원래 부처님이 설한 것 외에 다른 것들을 첨가를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아함경이 원래의 빨리어 경전에 아함경 하고는 차이가 좀 많이 납니다. 분량도 많고. 그러면 그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받아들여야 되느냐 하는 거라. 그렇지는 않습니다.

 

분명하게 얘기해서 붓다사사나 불교가 존속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변경하거나 덧붙일 수도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면은 그것을 다시 만든 것들이나 아니면 첨가한 것들은 반드시 불교를 이해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일단 제외를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이 원래의 순서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부처님이 설한 것 그 어느 것 하나 빼지 말아라." 부처님이 설한 것은 어느 것이 소홀하고 어느 것이 중요한 것은 없다는 거라. 그 어느 것 하나는 지금 현재 안 맞는다 해가지고 뺄 수도 없는 거고 그러니까 지금 현재 맞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만 강조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거라. 소홀히 할 수도 없고 어떤 것 하나도 중요할 수도 없고 그래서 어떤 것 하나 뺄 수도 없다는 거라.

 

예를 들어서 지금 현재하는 것이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 삼법인이다. 무상·고·무아를 삼법인이라고 부처님이 설하셨습니다. 그럼 현재는 고는 어렵고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니까 고를 빼버리고, 무상 무아 열반 이걸 또 삼법인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그걸 빼기 힘드니까 그걸 집어넣고 해가지고 사법인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뺄 수도 없고 변형시킬 수도 없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거라. 만약에 누군가가 그렇게 변형된 것으로써 그것을 뺀 것으로써 이렇게 설한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이든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그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지 새로운 것을 만들어서 그것이 우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스님들 가사를 이렇게 입으라고 했습니다. 그럼 그거를 그대로 따라야 되는 것이지, 지금 우리 종파에서는 이런이런 가사를 입어야 된다. 그래서 그 가사를 따르라 할 것 같으면 그것은 틀렸다는 거라. 부처님이 가르친 것만을 따라라 하는 거라. 지금 현재 것들이 안 맞는다 해가지고 내가 변형시켜 가지고 그것이 우선이 될 수가 없다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각각의 종파에는 종언 종법들이 있게 돼있습니다. 그 종언 종법이 우선이 될 수가 없다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과 율이 우선이 돼야 되는 것이지 종언 종법이 우선이 될 수는 없다 하는 거라. 그게 불교의 원래의 의미라는 거라.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것들을 어떤 것도 새롭게 만들거나 그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덧붙일려고 하지 말아라. 그리고 부처님이 설한 것 어느 것 하나도 빼지 말아라. 또 어떤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아라.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갖다가 있는 그대로 따라라. 그게 우선이 돼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전제가 됐을 때 그것을 우리는 붓다사사나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불교를 바르게 믿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이 불교를 그대로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무던하게 노력을 했습니다. 경전 곳곳에서도 그렇게 얘기를 했고, 부처님께서도 누누이 내가 죽고 나서 사후에는 내가 말한 법(法)과 율(律) 담마위나야(Dhammavinaya)가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너희들의 스승이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 담마위나야를 지키고 실천할 때만이 그것이 나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것처럼 그렇게 느껴진다는 거라.

 

태국에서 스님이 공부를 할 때 가끔씩 그런 경험들이 있습니다. 가끔씩 경전을 암송을 하다가 강하게 환희심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아, 저게 불교다.' 그게 바로 부처님의 현현이라는 거라. 부처님이 직접 설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라.

'아, 저게 불교구나.'

 

붓다사사나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직접 부처님이 설하는 것처럼 돼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의지처가 되어야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의지처가 돼서는 안 되고, 내가 마음에서 일으켜서 어떤 부처님을 만들어서도 안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이 불교를 존속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부단하게 노력을 해왔습니다.

 

가끔씩 사람들은 테라와다 불교를 공부하면 참 재미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또 너무 딱딱하다, 아니면 너무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을려고 한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근데 불교라고 하는 것이 그런 걸 어떡하라고? 부처님 자신이 처음부터 그렇게 규정을 했었고 또 역대 이후에 결집을 통해서도 그것을 더욱더 확립하고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대못을 박아버린걸 그걸 어떡하라는 거라? 그것이 불교라는 거라.

 

부처님이 말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자꾸 받아들이려고 노력을 해야 되고, 그것을 자꾸 실천할려고 할 때, 그것이 여러분들에게는 붓다사사나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역대 어떤 과정을 겪어서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존할려고 노력해왔는가 하는 것이 그 밑에 쓰여진 결집이라는 상기띠(saṅgīti) 라고 하는 겁니다.

그 의미를 담마스쿨 시간에 다시 한번 더 공부를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