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진실하게 살아가는 방법 (20071220) [담마스쿨 2기]

담마마-마까 2020. 10. 25. 00:45

https://youtu.be/evQkaYe-JQs

* 진실하게 살아가는 방법 (20071220)

 

이번에는 근본불교 기초교양강좌 중에서 두 번째에 해당되는 겁니다.

37조도품을 중심으로 해서 하는데 쉽게 접근을 할 겁니다. 하나하나 차트마다 한 시간씩 할애를 해서 하는데 그 방법은 경전에서 나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해나갈 겁니다. 그래서 김보살님도 듣기는 좀 괜찮을 겁니다. 빼먹을 생각하지 말고.

 

그래서 지금 6장에 들어가집니다.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라' 하는 것, '진실하게 살아가는 방법', 그다음에 일반적인 현자, 성자의 삶의 방법이 어떤 것인가 중심으로 살펴보고, 지금 내 현재의 삶의 방법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비교해보고 나서, 그런 성자의 삶을 살아가려면 따라가야 될 게 서른일곱 가지 방법들이 있다 하는 걸 가지고 설명해나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6장 중에 첫 번째,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봅시다. 진실하게 진실되게 살아갈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모르겠어요? 프린트물 읽어온 사람? 그럼 거기는 뭐라고 적어놨어요? 이 강의가 다 끝나도 모른다 할 거 같으면 다음부터는 오지 마. 알았지?

자, 한번 봅시다. 여기에 예로 들어놓은 땀바다티까 라고 하는 사형집행관의 예를 들어놓았습니다. 젊었을 때 범죄를 저질러서 죽음, 사형을 당하게 된 사람인데, 사형을 당하는 대신에 다른 사형당하는 사람의 목을 치는 일을 평생 해왔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기가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다른 사람의 목을 쳐야되는 거라. 그런 일을 갖다가 50년간 해온 사람입니다.

 

근데 아무리 50년을 해도 나이는 먹게 돼있는 거니까, 나이를 먹고 나면 힘이 딸려가지고 사람 목을 칠 수가 없습니다. 고통 없이 보낼려면 한 번에 사람 목을 쳐야 되는데, 나이가 드니까 힘이 들어서 한 번에 치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이 사람은 그 무서운 형벌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일평생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사람인데 그런 50년 기간이 지나고 나서는 이제 그 그림자가 사라지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인제 편안하게 집에 와서 내가 밥을 끓여 먹고 편안하게 밥 한 숟가락 먹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이때까지 무수한 사람들을 죽여왔기 때문에 그 꺼림칙한 마음들은 벗어나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인도 같은 경우는 죄를 지은 사람들은 강에 가서 목욕을 하면 죄를 사한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깨끗한 옷을 준비해가지고 강에 가서 특히 아침 해가 떠오를 때 기도를 하면서 목욕을 합니다. 목욕을 하면서 깨끗하게 된 마음으로 돌아오게 될 것 같으면 내가 지은 죄들을 사했다 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땀바다티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목욕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인제 유미죽 입니다. 우유죽을 갖다가 먹을려고 합니다.

 

근데 마침 그때 사리불 존자가 이 땀바다티까의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일평생 자기는 착한 일이라고는 안 해봤거든. 전부 나쁜 일만 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도둑질 해가지고 죄인이 돼가지고 나쁜 형벌을 받게 됐고, 그 뒤로도 50년간 남의 목을 치면서 좋은 일이라고는 안 해봤단 말이라. 그 감방 안에 있으면서 죄수와 마찬가지였다는 거라.

그러니까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조차도 모르고, 부처님 법이 뭔지도 모르고, 그리고 자기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황들이 못 됐어. 여러분들 같이 자유롭게 여기 와서 스님께 공양을 올릴 수가 있나, 법을 들을 수가 있나, 아니면 수행을 할 수가 있나, 전혀 없었거든.

 

그런데 마침 이 사리뿟따 존자가 마을로 탁발을 나가다가 이 집을 지나게 됩니다. 이때 불현듯 이 땀바다티까가 생각을 하기를 ‘아, 내가 그래도 저분에게 좋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으로 이 유미죽을 사리불 존자에게 탁발을 올립니다.

근데 통상적으로 보면 탁발을 받으면 스님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공양을 잘 하진 않습니다. 탁발 받은 것들을 가지고 선원에 들어오든지 아니면 정사에 들어와가지고 수행처 근처나 아니면 여러 스님들 모여 있는 곳에서 공양을 하는 게 통상적인 예입니다.

근데 이 사리불 존자는 이 땀바다티까가 수명이 얼마 안 남은 것을 아시고, 이 사람에게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법으로 인도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공양받은 그 집에서 그대로 공양을 잡수십니다.

 

더운 인도에서 일평생 처음 자기가 자기 손으로 공양을 만들어서 한번 먹어볼라고 했는데 그 공양을 몽땅 사리불 존자에게 드리고 나서, 그 존자가 더울까봐서 부채질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보면, 그 사리불 존자가 먹고 있는 것을 보는 게 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거라. 사리불 존자가 안 왔으면 저렇게 맛있게 만든 유미죽이 내 것이 될 것인데 하는 생각을 가지게도 됩니다. 그런데다가 더운데 공양 잡수시는 사리불 존자에게 부채질을 해줄라다 보니까 배도 고플 뿐 아니라 그 더위에 지치기도 하거든.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내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나 하는 마음의 갈등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음식이 육체에게 미치는 영향이 굉장히 큽니다. 그래서 매일 영양분을 골고루 먹지 않으면 배고프다고 우리는 느낍니다. 그래서 그 배고픔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고통들이나 질병을 얻게 되고, 또 부족한 영양분으로 인해서 위장기능들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위염에 걸리기도 하고 아니면 많이 먹어서도 마찬가집니다. 적게 먹든 많이 먹든 정상적인 것을 벗어난 상태일 때는 그렇게 됩니다. 그런 것이 심해지면 죽음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모든 질병과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음식으로 인해서 일어난다고 해서 "가장 큰 고통은 먹지 못하는 고통이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할 정도였습니다.

 

이걸 인제 '깜마자떼조'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열이 나죠? 음식이 익어진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익어 나오는 것에서 그것이 사실은 불에 타듯이 타버린다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중에서 영양분은 영양분대로 각 몸으로 분배가 되고, 찌꺼기는 분비물로 해서 대장으로 넘겨져서 항문으로 빠져나오게 되는 거죠. 이런 걸 부처님이 비유를 한 건데, 어쨌든 음식이 몸에 굉장한 영향을 미치게끔 되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걸 갖다가 음식을 많이 먹든 적게 먹든 어쨌든 그런 음식이 몸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 해서 '아하라자루빠' 라고 부처님이 그런 말을 써놓기도 했는데, 몸에 영향을 주는 것은 음식뿐 아니라 기후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몸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음식입니다. 당연히 공복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먹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내가 배고프다는 느낌을 가지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사리불 존자가 그분이 배고픈 걸 눈치채고 같이 먹읍시다 하고 그분에게도 음식을 같이 먹도록 그렇게 하니까, 부채질하고 있다가 이때까지 망나니로만 살아왔는데 동등한 한 사람으로서 대접받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참 간사한 거라. 조금 전에는 배고파가지고 꼬로꼬록 하던 것이 그 한소리에 그냥 그 배고픈 것도 잊고 고마운 마음이 들어서 눈물을 주르륵 흐를 정도가 돼버립니다.

 

이렇게 "마음이라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다" 하고 얘기합니다. 물길이 어느 쪽으로 나느냐에 따라서 그 물은 이익이 되기도 하고 손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강둑이 터져가지고 그 물길이 논이나 집을 덮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는 거고, 제재를 잘 타가지고 강둑을 따라서 고랑으로 통해서 논으로 집으로 들어온다고 할 것 같으면 작물들이나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게 됩니다. 마음은 이와 같이 흐르는 물과 같다 하는 겁니다.

 

조금 전까지 싫은 마음들, 배고픈 마음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악한 감정들이 일어나고, 근데 그 뒤에 이 사리불 존자의 말을 듣고 친근한 인간미를 느끼면서 고마움을 느껴서 또 마음이 그쪽으로 흐르게 되고, 이렇게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 마음입니다. 여러분들 마음도 꼭 그와 마찬가지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한 마음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변해나가는구나 하는 것을 가지고 집착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어쨌든 공양을 잡숫고 나서 이 땀바다티까에게 설법을 해줍니다.

스님들의 공통적인 부분입니다. 부처님뿐 아니라 부처님 제자들이나 출가자들은 공양을 하고 나면 공양 후에는 반드시 법을 설하게끔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리불 존자가 법을 설하게 됩니다. 근데 이 땀바다티까는 그 법문을 들을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경전에는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나타나있지 않기 때문에 밥을 먹었다고 치더라도, 법이라는 것을 생전에 들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법을 설할 때 뭘 하겠습니까? 지난 일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리 많이 하죠? 스님 말이 귀에 안 들어올 땐 어떻게 합니까? 집에 뭐 어찌 됐을까, 뭐 여러 가지 잡스런 생각들을 합니다. 과거에 대한 것들, 아니면 미래에 대한 것들, 이런 것들을 막 하게 돼있지 이 법을 들을려고 하질 않습니다.

 

과거를 아무리 생각하고 기억하고 또 그거를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신적으로 오히려 산란해지고 혼돈만 가져와지고, 또 망상만 자꾸 키워지고, 아니면 분노와 탐심 같은 것들만 침입해 들어오는 것이지, 지금 현재의 상태를 개선시켜주고 아니면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합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오히려 더 잘 경험해봤을 겁니다. 아무리 그렇게 한다 해가지고 문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금 집에 쫓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자기가 지어왔던 망나니짓에 대해서 후회하고 괴로워한다고 해가지고 그게 문제해결을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상태를 보고 이 사리불 존자가 물어봅니다. 그런 망나니짓을 당신 스스로 한 것이냐? 스스로 한 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해서 한 게 아니니까. 그럼 니가 좋아서 한 것이냐? 내가 좋아서 한 게 아니다. 왕의 명령으로 한 것이고 그 명령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싫더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려고.

그럼 그렇게 한 행위들에 대해서 지금 후회한다고 해서 그 행위들이 바뀌어지느냐는 거라. 지은 행위들은 내가 아무리 되돌리려 해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지은 행위는 과거의 일입니다. 과거는 생각으로는 되돌릴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행위 자체를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과거를 또한 지금 현재 다시 재현할려고 하더라도 안됩니다.

수행할 때, 어제 내가 수행할 때 한참 하다보니까 환희심도 나고 고요한 상태가 있었다. 참 좋았다. 오늘 내가 그 상태를 만들어보겠다고 한다고 해서 그게 되어집니까? 설혹 되어지더라도 그거는 어제의 것이 아니고 오늘의 것이죠. 불가능한 겁니다. 과거에 지은 행위가 어떤 행위이든 행위 자체를 되돌릴 수 없는 것을 알면서, 수행할 때는 과거의 기억들 좋은 기억들 좋은 상태들 지금 현재 또다시 체험해 볼려고 한다. 그건 바보겠죠? 맞습니까? 혹시 여러분들 중에 그런 사람 있으면 그런 생각조차도 버려버리십시오.

 

삼매 체험했다, 한 번 더 해보고 싶다. 그런 생각조차도 일으키지 말아라는 거라. ‘옛날에는 내가 참 잘했는데’ 그건 옛날일 뿐입니다. 과거는 지금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불가능한 것이라고 마음먹고 날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포기해버리게 됩니다.

포기해버리고 나니까 어떻게 돼요? 마음이 산란스럽고 힘들고 후회하고 하는 것들을 버려버릴 수 있게 되니까, 사리불 존자의 법문을 귀 기울여서 들을 수가 있는 겁니다.

 

마음을 침착하게 하지 않으면 법문을 들을 수가 없고,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혀야 됩니다. 요즘은 겨울이니까 음식이 잘 안 상합니다. 그리해도 음식물들을 냉장고에다 안 넣어놓고 밖에다 놔놓으면 어쨌든 냉장고보다 뜨겁기 때문에 더운 기운에 의해서 금방 곰팡이가 핍니다. 바이러스가 생겨가지고. 그 음식이 상해서 못 먹게 됩니다.

냉장고에 넣어두면 그런 박테리아가 생길 요소들을 제거해 버리기 때문에 음식물이 썩지 않고 오래도록 보관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건 왜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습니까? 열을 식혀버렸기 때문에, 더운 기운을 제거해버렸기 때문에. 마음을 고요하게 식히지 않을 거 같으면 법문을 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수행을 올바르게 해나갈 수 없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열반을 뭐라 그럽니까? 번뇌의 불길을 꺼버리는 것이다! 불길을, 불꽃을 꺼버리고 마음을 고요하고 차분하게 가라앉히라. 그렇게 해야만이 방황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하는 것들이 없어진다는 거라. 모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맑고 차가워져야 됩니다. 몸도 서늘해질 뿐 아니라. 그리해야 만이 탐·진·치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법문을 듣다 보니까 금방 예류과에 도달하고 금방 도와 과에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일순간입니다. 어느 유명한 분들도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이렇게 찰나 간에 일어나집니다. 그러니까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단순하게 여러분들이 지금 듣는 과정, 이것도 한 찰나 간에 스님 소리를 듣는 거지만 이 찰나 간에 열네 가지 바왕가, 열네 가지 인식작용이 일어나는 것, 아비담마 할 때 여러분들이 배워서 알고 있을 겁니다.

이렇게 찰나 간에 바왕가, 재생연결식, 자와나, 이런 것들이 쭉 연결돼가지고 일어나게끔 아주 순간 찰나 간에도 열넷, 열둘 이런 순간순간의 마음이 연결될 수밖에 없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뭐라 그러느냐면 "현재에 대해서 알아차리라" 하고 얘기합니다. 현재에 대해서 알아차릴 것 같으면 반드시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고 대상에 밀착할 수 있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도와 과를 얻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설혹 죽음을 맞았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나쁜 일을 이생에서 지었지만, 남의 목을 치고, 자기가 도둑질을 해서 살인자가 되고 이런 일을 했지만 도솔천에 태어났다 하는 겁니다. 아주 짧은 찰나에! 많은 사람들이 놀랩니다. 어떻게 해서 저 사람은 저렇게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일순간의 집중력으로 그 사리불 존자의 법문을 듣고 마음이 순일해져서 천상에 태어나게 되었는가?

 

그 얘기는 스님이 많이 했죠?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일으키는 생각이 다음 생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70% 이상을 좌우한다" 하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꼭 그와 마찬가집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불교의 기본은 지혜와 자비죠! 지혜와 자비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까?

모든 생명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평등하다 하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평등하다고 보지 않을 거 같으면, 암바빨리는 창녀입니다. 부처님이 창녀를 일반인과 동등하게 대해서 그분을 깨달음에 이르도록 해서 창녀가 성녀가 되도록 그렇게 만들지도 않고, 살인마 앙굴리말라 그 무서운 공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앙굴리말라를 설득해가지고 성자에 이르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건 뭡니까? 평등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불교에서 이걸 빼버리면 안된다는 겁니다. 약한 자에게는 더 용기를 불어넣고, 강한 자에게는 겸손하고 자애를 가지도록 그렇게 가르치는 거고, 그리고 싸움박질하는 거는 화합하도록 만드는 거고,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불교의 지혜와 자비사상인 이 평등사상입니다.

 

이 얘기는 뭐냐 하면 이런 나쁜 사람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평등하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조건은 누구든지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조건이 되는 사람이면 그걸 거절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리불 존자가 그 자리에서 그 공양을 잡숫고 그 자리에서 법에 의해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만들어줍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 주위에 그런 조건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조건들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자신도 물론 그렇게 해야 되는 거고.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끝까지 포기하는 것은 안 된다.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목표가 정해지면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야 되는 것이지, 목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발걸음 발걸음이 중요하다 하는 겁니다.

목표는 사실은 어부지리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얻어지고 안 얻어지고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내가 포기를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 가장 나쁜 사람은 부처님이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자살하는 사람이라고 그랬습니다! 생명을 포기해버리는 겁니다. 오죽 못난이가 그런 짓을 할까 하고 얘기를 합니다.

 

마음은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나쁜 방향으로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걸 알 거 같으면 포기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죠. 만약에 부부간에 싸웠다. 한참 관계가 안 좋을 때 에이, 니하고는 다시 못살겠다. 하고 나서 탁 끊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럼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그거는 포기와 마찬가집니다. 근데 항상 롤러코스터죠? 나쁜 게 있으면 좋은 게 있고,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게 있습니다. 생활 자체가 다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항상 굴곡이 파도를 타게 돼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 파도타기를 그만둔다는 것은 포기하는 게 돼버립니다.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겁니다. 나쁜 조건 나쁜 상황이라 해서 깨닫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는 거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면 이루어진다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처님 말씀을 자주자주 듣고 또 그러한 수행들을 쭉 줄기차게 해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부처님이 남긴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들입니다. 라훌라가 그토록 받고 싶어 했던 유산, 그거는 라훌라에게만 물려준 게 아니죠? 모든 이들에게, 부처님 법을 듣고 실천해 나가는 사람들에게, 모두에게 다 물려준 것들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에 대해서 믿고 그와 같이 나아갈려고 하는 마음가짐, 그런 확신을 가지는 것, 그리고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잘 살아가고 어떤 것이 남에게 칭찬을 받으며 살아가는가 하는 실라(sīla, 戒),

그리고 내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 할 줄 알고, 부끄러운 짓을 했으면 부끄럽다고 할 줄 알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히리(hiri), 또 그런 부끄러운 짓에 대해서 내가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뉘우치는 옷땁빠(ottappa),

그다음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 경전들 숫따(Sutta), 그다음에 내가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대하듯이 내가 가진 것들을 그게 정신적인 것이든 아니면 물질적인 것이든 같이 나누고자 하는 것, 베풀고 나누고자 하는 것, 아 참 부처님 법 좋다. 너도 같이 듣자. 내가 지금 연필 두 개 있으니까 나는 지금 급한 게 아니니까 너 하나 써라. 짜가(cāga)라고 하는 것, 나눌려고 하는 것.

그다음에 이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다시는 생사윤회에 떨어지지 않겠구나 하고 아는 것 빤냐(paññā), 이런 것들이 부처님이 남긴 유산이라는 거라.

그 유산을 여러분들이 가졌으니까 그 얼마나 행복한 것이라!

 

이런 진리의 말은 우리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내혼자, 나뿐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생각들을 벗어나게 해서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이 진리의 말입니다. 그래서 의미 없는 것을 일평생 듣고 안다고 하더라도, 의미 있는 것들 하나를 듣는 것만 못하다 하는 거라. 백년을 살아도 하루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보다도 못하다 하는 거하고 마찬가집니다.

 

대부분 시간 보내는 것들 어떻게 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살아갑니다. 근데 그런 것들은 어떤 면에서는 참 쓸데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자리에서도 아까 점심공양 하고 나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나니까 앉아서 막 얘기들을 했습니다. 집에 가면 다 까먹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일주일 뒤, 아니면 한 달 뒤에 보면 뭔 얘기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 한 시간 동안 의미 없는 시간을 그냥 보내버리는 거라. 진짜 해야 되고 노력해야 될 것이 뭔가 하는 것들을 잊어먹고 살아간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중요한 것들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뭡니까? 지금 현재에 대해서 줄기차게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 지금 현재 지금 순간보다도 진실되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지금 현재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가장 진실되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런 방법을 알기 위해서 서른일곱 가지 도움 되는 방법들을 갖다가 이 시간을 통해서 공부를 해나가는 겁니다. 그 서른일곱 가지는 간단합니다. 크게 보면 몇 가지에 들어가지지를 않습니다.

 

담마딘나 비구니한테 위사카가 물어봅니다.

사람들이 앉아서 좌선하고 수행하고 있으니까, 저렇게 좌선하는 것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현상관찰을 하는 건데,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모아가지고 좌선을 하고 있는 거다 하고 담마딘나가 얘기합니다.

그러면 하나의 대상에 마음집중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네 가지에 대해서 집중하면 됩니다.

뭐에 대해 집중하면 됩니까?

몸에 대해서 집중하고, 느낌에 대해서 집중하고, 마음에 대해서 집중하고, 그다음에 담마-현상에 대해서 집중하고 사띠빳타나 그거 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집중할려면 뭐가 또 필요합니까? 집중할 때 필요한 게 뭡니까? 네 가지 노력이 있어야 됩니다. 일어나 있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그런 것들은 없애버려야 되고, 아직 일어나지 않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는 것들은 막아버려라. 차단해버려라. 만약에 일어난 좋은 공덕 좋은 업을 짓는 것들은 더욱더 계발시키고, 아직 일어나지 않아도 좋은 일을 만들어 낼 거는 자꾸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된다.

이런 노력의 힘 네 가지만 있으면, 몸과 느낌과 마음과 현상 네 가지에 대해서 집중을 해서 나아갈 수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럼 우째 닦아나가면 됩니까?

다른 거 없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딱 일치시켜가지고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개발해나가면 된다.

 

대부분 이 속에 지금 다 있습니다. 37조도품이라고 하는 것이!

서른일곱 가지 바르게 살아가고 깨달음에 이르는 요소는 이와 같은 겁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 탐욕심이나 진심이나 망상하는 것들이나 불안하고 근심에 빠지는 것들이나 아니면 무엇에 대해서 자꾸 의심하고 하는 이런 것들도 없어져 나가고 또 완전히 뿌리뽑혀져 나가고 이렇게 해서 점진적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들을 이해하게 되고, 더불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그런 것들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성자의 마음에 대한 것들을 가지고 얘기를 해나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오늘 배운 거 한번 확인해봅시다. 맨 처음에 물어봤던 것, 어떻게 진실되게 살아가는 방법은 뭡니까? 현재를 살아가는 겁니다. 과거를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미래를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 적어도 알아차리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현재를 살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현재를 살게 되면 미래도 살게 되는 것이고, 과거도 살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자꾸 현재를 살고 현재를 자꾸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이 가장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현자의 삶이라는 것은, 성자의 삶이라는 것은 그와 같은 겁니다. 우리하고 다른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37조도품도 꼭 마찬가집니다. 이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를 않습니다. 자, 다음 시간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