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사성제로의 초대 2. (20071122)

담마마-마까 2020. 10. 25. 00:41

* 사성제로의 초대 2. (20071122)

https://youtu.be/OhRXscxRXBI

https://youtu.be/SY0Yu4gHgMU

 

지금 법회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안 들어올라고 그래. 뭐 와서 간단하게 인사하고 가면 되지 뭘 그러냐고 하니까 죽어도 안 들어오겠다고 그러는 거라. 여기까지 와놓고. 다음에 오겠다 하고 갔는데 그것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여기까지 오더라도 자기가 안 들어가면 그만인 거야.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 행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법을 의지하고 스스로를 의지하라" 해서 부처님이 "법등명 자등명" 그렇게 얘기를 했죠. 수행에 뒷받침이 되는 것은 경전과 또 스스로 수행하는 것, 이 두 가지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람들이 밖에 것을 찾는 것에 더 급해하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번다든지, 아니면 조금 더 명예롭다든지 조금 더 높은 지위에 오른다든지 밖에 것들을 찾는 것들이라는 거라. 근데 정작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찾는 건데, 자기 자신을 찾는 것들을 등한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아주 자연스러운 것들인데도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어느 귀족 자제들이 야유회를 갔다고. 야유회를 남자끼리 갈 수 없으니까 여자들을 데리고 갔어.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술집 아가씨들을 데리고 갔겠지. 데리고 가서 열심히 놀다 보니까 술집 아가씨들은 이 돈 많은 사람들의 돈이 탐나서 거기 간 거거든. 뭐 그사람들이 좋아서 갔겠어?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얼마씩 줄게 했는데 그거가지고는 양이 안 차는 거라. 그러니까 요놈의 청년들 호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몽땅 가지고 도망가버렸어. 그러니까 나중에 한참 놀다가 보니까 지갑들이 다 없어졌거든. 그래서 난리가 나가지고 막 여자들을 찾아 난리를 치는 거라.

 

거기 부처님이 마침 있으니까 부처님한테 혹시 그 여자들 봤느냐고, 그 여자들 찾고 있다고. 그때 부처님이

"그 여자를 찾는 것이 중요하냐, 너 자신을 찾는 것이 중요하냐?" 하고 얘기합니다.

뭔 말인지 알겠어요?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것들입니다. 만약에 그 여자를 찾아가지고 문제가 다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노. 근데 이미 그 여자를 찾을려고 화를 내고 또 여러 가지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한 것은 어떡할 건데? 이미 그것은 자기가 저질러버린 건데. 저질러버린 것은 결과를 받게 돼있다는 거잖아.

그래서  "밖에 외부적인 것들을 찾으려고 하고, 밖에 외부적인 것을 받아들일려고 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들 잘 알고 있는 영혼, 영혼이 있다. 나라고 하는 것, 특별한 진아(眞我)라는 것이 있다. 있다고 칩시다. 스님은 없다고 얘기를 하지만은 있다고 치자. 있다고 친다고 해도 여러분들 슬프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고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그렇지는 않죠?

부처님이 만약에 그런 외부적인 것으로 인해서 슬픔이 없는 저 언덕이라든지, 고통스럽지 않고 흔들림이 없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간단하지. 부처님이 그거 하나 찾으라고 하면 되지 뭐. 니 영혼 찾아라 하면 되지. 부처님도 가만히 뜯어보고 살펴보고 해도 그런 영혼이라든지 나라고 하는 것이 없거든.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할 것 같으면 아주 간단한 문젠데 그런 것들이 없단 말이라.

 

그러한 밖의 것들을 받아들여서 스스로가 슬픔이나 괴로움이나 비애나 고통이나 이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받아들여야 되겠지. 근데 있다고 해도, 여러분들이 있다고 믿으니까, 있다고 해도 그런 것들은 일어나잖아. 그런 것들을 받아들였는데도 이런 현상들이 일어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뭐 어디다 쓸 건데 그거? 그래서 그런 것에는 의지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런 것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내가 슬픔이 일어날 때 내 자신을 믿고 내자신이 슬픔이 일어나지 않게끔 내가 단도리를 잘하고 할 것 같으면 슬픔이 잘 안 일어날 거 아니라? 영혼이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거 아니라? 안 그래요?

알라까 뚜빠마 라고 하는 경전에서 부처님이 한 얘깁니다.

조금 전에 누가 이메일로 깨달음을 받는다 하기에 그래서 얘기하는 겁니다. 물론 농담으로 한 얘기겠지만 그런 거는 생각조차도 하면 안됩니다이.

 

자, 그건 그렇고 교재를 들어가 봅시다.

지금 사성제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번 시간에는 어쨌든 모든 것은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변화하는 현상을 싫어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항상 문제가 된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변화하는 것들은 스스로 하는 것들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우리는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 하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둑카라는 의미가 불만족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둑카(dukkha)는 여러 가지 의미들로 많이 쓰여집니다.

그중에 가장 보편적으로 쓰여지는 게 이런 '불만족' 입니다. 사물의 현상을 보면 간단합니다. 누구든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죠? 그런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변하는 성질은 어쨌든 둑카의 성질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하는 것들에 대해서 만족할 수 없다는 것 불만족도 둑카의 성질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모든 것은 운동하고 있죠? 운동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게 돼있습니다.

런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도 둑카의 성질입니다.

크게 보면 이렇게 세 가지들이 됩니다. 그중에 하나 불만족이란 것들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진리를 깨달으려고 할 것 같으면 가장 먼저 우선이 돼야 하는 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걸 받아들이는 게 우선입니다. 그게 받아들여야만 그걸 조사해보고 확인해보고 하는 것이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으면 아무런 이익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둑카라고 하는 것, 그런 불만족이 항상 내 곁에 상존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됩니다. 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되는 거고,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되는 거고, 인식하고 나서 그다음에 다음 문제를 풀어나가야 되는 것이지, 다른 방법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교재 읽어봤습니까? 오늘 부분도 읽어보니까 이해를 못 할 부분은 없죠? 되도록 스님도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식적으로만 자꾸 받아들이지 마라는 거라. 고의 세 가지 고고성, 행고성, 무슨성 이렇게 해가지고 이렇게 하고, 그다음에 드러난 곳 드러나지 않는 곳, 나타난 곳 나타나지 않는 곳, 이런 식으로 암기식으로 해가지고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뜻입니다.

 

단지 아, 이런 것이 부처님이 말한 '둑카'구나. 이런 것이 부처님이 말한 '집착'이구나 하는 사실을 갖다가 먼저 인식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서술형식으로 쓰여지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사성제에 대해서 남방불교권에서는 거의 세 달 가까이 강의를 합니다. 매일 똑같은 소리만 합니다. 매일 똑같은 소리만. 거의 비슷한 패턴으로 얘기를 합니다. 거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아주 간단한 건데 고(苦)하면 뭐 사고팔고 이렇게 탁 해버리면 간단한 걸 갖다가 왜 그렇게 고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거의 비슷한 패턴들로 얘기하게 되느냐는 거라. 그걸 스스로 가슴에서 인식시켜주기 위한 방법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는 내가 조사 확인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입니다. 내가 그걸 받아들여야 될 거 아니라? 받아들여지지 않는 거는 오히려 안 배운 것만 못하게 되는 상황이 된다는 거라.

 

부처님은 굉장히 영리하신 분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래서 육 년 고행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체험하지 못했던 것까지 다 체험해보고, 그래서 이마만큼 고행한 사람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선언을 할 정도로 그렇게 열심히 했지만 그것이 아니다 싶을 때는 어떻게 했어요? 과감하게 버려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들 알라마 하고 웃따까 뭐 두 분만 만났겠습니까?

다른 여러 스승들 새로운 사상들을 접했지만 그 사상으로 인해서 그 스승보다도 더 뛰어난 경지에, 아니면 그 스승과 동일한 경지에 이르러서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서 거느릴 수 있는 지위에까지 올라도, 스스로 생각해가지고 그것으로 내가 완전히 번뇌를 소멸할 수 없고, 고라고 하는 것들은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다. 고가 뭔가? 이 고통스러운 원인이 뭔가? 하는 것들을 내가 알지 못할 거 같으면 과감하게 버려버렸다는 거라. 그렇게 해야 만이 다른 것들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처음 법을 설하게 될 때 다섯 명의 수행자들에게 확신해서 얘기하셨습니다. 당연히 그 사람들이 부처님을 받아들일려고 하지 않죠. 그러니까 부처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내가 이마만큼 확신에 차가지고 "나는 깨달았다" 하고 얘기한 적이 있었느냐?” 스스로가 알았기 때문에 확신에 차가지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확신에 차서 얘기하는 것들은 내가 너희들도 나와 똑같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얘기하겠다는 거라. 거짓말로써, 아니면 내가 이만큼밖에 모르니까 요까지만 가르쳐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을 내가 발견했고, 내가 체득했다는 거라. 그래서 확신할 수 있다는 거라. 나도 갔듯이 너희들도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이렇게 확신에 차서 얘기한 적이 있었더냐 하는 거라. 그때사 이 제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처음 부처님이 설하게 된 것이 이 초전법륜입니다. 처음 법을 설했다 해서.

그 초전법륜의 주 내용이 뭐냐 하면 사성제입니다. 이 "사성제"를 불교에서는 뭐라고 그러냐면 "불교의 기초다" 하고 얘기합니다. 기단 부분에 해당합니다.

집에 들어갈려고 할 것 같으면 대문을 열고 들어가야 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방 안에 들어갈려면 방문을 열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것이 어디에 해당이 된다고 그랬습니까? 삼귀의에 해당이 된다고 그랬죠? 저번 시간에.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뭐 할 거라? 그 집 안으로 들어가야만 됩니다. 집을 지어놓은 기초를 다져놓은 것들이 뭐냐 하면 이 사성제입니다. 기초가 없을 거 같으면 위에 아무리 멋들어지게 하더라도 그거는 무너져버린다는 거라. 허공 속에 세운 거하고 마찬가지기 때문에. 그래서 이 기초만 잘 다져놓을 거 같으면 위에 뼈대를 세우고 지붕을 입히고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처음 법을 설할 때 이 부분만 집중적으로 얘기합니다.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이 사성제에 대한 진리를 이해해서 거기에 대한 확신이 있을 거 같으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라. 그마만큼 사성제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자, 인제 괴로움, 고(苦)라고 하는 것에 대한 것들을 얘기했습니다. 고에 대한 것들 다른 관점으로 얘기하는 것들도 뒤에 마지막 부분에 적어놨습니다.

 

왜 그러면 괴로움이 있는가? 여러분들 왜 괴로움이 있습니까?

괴로움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습니까? 몸이 아픈 괴로움도 있고, 정신적인 괴로움도 있고 그렇죠? 어느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죠? 근데 그 괴로움은 왜 있는 겁니까?

괴로움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 몸과 마음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몸과 마음이 없으면 괴로울 일도 없습니다. 그렇죠? 근데 이 몸과 마음은 어쨌든 내가 지금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건 실재하는 거라. 몸과 마음은.

 

몸과 마음이 실재한다 그럴 것 같으면 대부분 여러분들 어떻게 합니까? 아침에 세수하고 이빨 닦고 화장품 바르고, 뭐 때문에 그렇게 합니까 몸에? 몸을 건강하게 또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살찐 사람은 살 뺄라고 그러는 거고. 그런 거 아닙니까?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밥도 먹고 그러는 겁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몸과 마음이 없을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얼굴도 씻지 말고 살도 빼지 말고 지 생긴대로 냅둬버려야 됩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마음은 또 어떻습니까? 마음은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죠? 그럼 하고 싶은 거 하지 말고 마음 지 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둬버려야 됩니까? 그렇지는 않죠? 마음이 뭘 하는 가만 알아차릴 것 같으면 적어도 나쁜 방향으로 빠지지는 않겠지. 욕심부리는 것들도 억제를 하고 할 수는 있겠죠. 간단한 겁니다.

 

괴로움이 생기는 것은 몸과 마음으로 인해서 생긴다고 할 거 같으면, 그 몸과 마음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를 할려면 유지를 해나갈려고 그럽니다.

어떤 경우든지! 없어질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유지해 나갈려고 하는 거기 때문에 몸도 유지해나가고 마음도 유지해나갈려고 할 거 같으면 뭔가를 갖다가 집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라.

왜? 변하는 어떤 것들이든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들인데 그 변하는 것들을 조금 더 늦출려고 그러고, 그리고 변하지 않게끔 만들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가는 놈을 붙잡을 수밖에 없는 거라. 그걸 이름해서 "욕망"이라고 그럽니다.

 

근데 그 욕망은 어떻게 됩니까? 절대 다 하는 법이 없죠? 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끝이라는 게 없을 수밖에 없는 것이, 역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사물이 존재하는 위치하고 역행하는 것들이거든. 붙잡을려고 그러고 유지할려고 하고 그러는 것들은 역행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걸 놓아버릴 거 같으면 그냥 그대로 흘러가버리게 되는 것들인데, 그러면 욕망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건데, 그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뭡니까? 붙잡고 있을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쭉 그렇게 붙잡고 있어야 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욕망이라는 것은 다 하는 법이 없는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돈 십 원 벌면 백 원 벌고 싶고, 백 원 벌면 집에 있는 인테리어 확 바꾸고 싶고, 또 돈이 더 필요하니까 더 만들려고 그러고, 그런 겁니다.

 

그런 것들은 동시 발생적으로 작용을 할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내가 뭔가를 갖다가 이상을 만들고 그걸 또 관념화시키고 이렇게 목표를 정해 놨다, 그럼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게 되고 그것이 맞다 하는 견해를 가지게 되고, 이런 것들은 동시 발생적으로 작용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거기에는 "욕망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집착하게 됩니다" 하는 얘기를 적어놓았습니다.

그 욕망도 「나」라고 하는 것이 전제가 돼있지 않으면, 나라고 하는 것은 이 몸과 마음이니까, 나라고 하는 것이 전제되어있지 않으면 욕망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애가 시험을 잘 못쳤다. 그럼 이놈의 자식 죽일놈 살릴놈 합니다. 남의 애가 시험 잘 못쳤다 해서 죽일놈 살릴놈 합니까? 그리 안 하죠? 나의 아이이기 때문에 신경질을 내게 돼있다는 겁니다. 나의 아이에 대해서 욕심이 있기 때문에 신경질을 내게 돼있다는 거라. 나라고 하는 것, 나의 것, 나의 가족, 나의 영혼,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거 같으면 욕망부리지도 않고 또 그로 인해서 불만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욕망과 불만이 더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나」라고 하는 관념들은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그 나라고 하는 것, 몸과 마음을 이해해서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지 안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절대 욕심 가지지 않게 되겠죠? 그것을 뭐라고 그럽니까? 멸이라고 합니다. 멸(滅)!

몸과 마음은 우리말로 할 것 같으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색수상행식(五蘊)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데 집착하기 때문에 그걸 갖다가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오취온(五取蘊)이라고 합니다. 다섯 가지에 집착해서 살아간다 하는 거라.

 

그래서 아라한들은 뭐라고 그럽니까? 오취온이라고 안 하죠? 그냥 오온(五蘊)이라고 합니다. 그분들도 몸과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오온으로써만 살아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온으로 살아가지는 사람들을 멸(滅)에 이른 사람들이라고 그러고, 오온이 아니라 오취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멸(滅)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소멸에 이르는 길을 우리는 도(道)라고 해서 여덟 가지로써 그렇게 얘기해놨습니다. 정견부터 해가지고 쭉 다 적어놨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 여덟 가지에 대한 것을 자세하게 얘기할 겁니다. 여기는 사성제에 대한 얘기만 적어놨기 때문에 자세하게 적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이 정도로만 이해를 하면 될 겁니다.

 

뒤에 부분에 보면 '반복해서 설명하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둑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사성제에서는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고에 대한, 괴로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단추 조차도 끼우지 못한다는 거라. 생로병사를 비롯해가지고 여덟 가지, 이 모든 여덟 가지를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뭣 때문에 그럽니까? 변해나가는 걸 변하지 않게끔 붙잡기 때문에 그럽니다. 그 집착이 대상이 되는 거라. 그래서 그걸 갖다가 몸과 마음의 괴로움이다. 집착하지 않을 거 같으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라.

 

이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그리고 이 괴로움을 갖다가 반드시 내가 체험하고 넘어야 될 것으로 이해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내가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고, 그것을 극복했다고 하는 것, 이 세 단계로써 고를 바라봐야 됩니다.

고(苦)를 알려고 하는 것은 이 세 가지를 명확하게 이해했을 때 "아, 내가 고에 대해서 알았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집(集)도 마찬가집니다. 괴로움의 원인도. 괴로움의 원인도 이 세 가지로써 확인하고 이해해야 되는 겁니다. 원하는 것, 갈망·갈애로부터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걸 알아야 하고, 그 갈망과 갈애는, 그 집착하는 것들은 사물의 본래 현상하고 반대방향이기 때문에 그러지 말아야 된다, 없애야 된다는 것으로 알아야 되고, 그러고 나서 그 집착하지 않고 갈애와 갈망을 가지지 않음으로 해서 '아, 이것이 집착이었구나' 하고 내가 확연하게 이해하는 것, 이 세 단계를 거쳐야 만이 괴로움의 원인, 집착의 원인이 뭔가 하는 것들을 이해하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멸(滅)도 마찬가집니다. 고통스러운 세계가 있으면 반대로 열반의 세계가 있습니다. 깨끗하고 맑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 이러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되고, 그리고 그러한 상태를 내가 체험할려고 노력한다는 그런 이해가 있어야 되고, 그러고 나서 그것을 체험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확인해보는 것, 이것이 멸의 삼명입니다. 명제와 그것을 실행하고 확인하고 하는 것은 항상 세 단계로 작용을 하게끔 된다는 것입니다.

 

도(道)도 마찬가집니다. 아, 이것이 부처님이 말한 여덟 가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구나.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해 나가고, 이로 인해서 내가 완전히 고를 벗어났다 하고 세 단계로 확인하게 되고.

 

그래서 사성제는 세 가지를 이해하는 것으로 해서 사성제를 바라봐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열두 개로 구분을 쭉 해놓은 상태가 됩니다.

 

사성제의 가장 기초는 뭡니까? 고(苦)입니다. 고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사성제의 포인트입니다. 그것만 받아들이고 나면 문제는 간단해져버립니다. 아, 이것이 고라는 것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집착할 것들도 엷어지게 돼있고, 당연히 집착이 엷어지니까 어떻게 돼요? 소멸하게 되는 길로 다가가게 되는 거고, 또 그렇게 집착이 엷어지고 없애는 길로 자꾸 더 밟아나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다가 궁극적으로는 고라고 하는 것들을 완전히 넘어버리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이 고라고 하는 것, 둑카라고 하는 것은 맨 처음에 얘기했듯이 불만입니다. 존재할려고 하고, 붙잡을려고 하기 때문에, 유지할려고 하는 것 때문에 변화되지 않았으면 싶은데, 우쨌든 사물의 실상은 그렇게 변화되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 ‘아, 이런 것들을 갖다가 불만이라고, 고라고 하는구나’ 하는 것들을 저번 시간에 얘기를 했습니다.

 

한 가지 더 밑에다가 얘기를 해놨습니다. '불안정한 상태 이것도 고(苦)다.'

바람이 지금 많이 불고 있습니다. 바다에 보면. 파도가 울렁울렁울렁하죠? 그럼 저 파도가 울렁울렁하는 걸 갖다가 멈추고 고요하고 안정되게 할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바람이 안 불어버리면 되죠? 바람이 안 불어버리면, 만약에 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 같으면 그대로 고요하게 안정이 돼버립니다. 맞습니까?

안정되면 저 물은 멈추어 버립니다. 움직이면 저거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근데 저 물이 안 움직일 수 있습니까? 안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위에 바람이 안 분다 해가지고 저게 그대로 있습니까? 그대로 가만히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 여기 접시에 놓여있는 물은 썩지 말아야 됩니다. 근데 왜 썩습니까? 다 썩습니다. 아무리 순수한 물을 놔놓는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나중에 이게 조금 조금씩 변하면서 썩습니다.

 

사물이라는 것 자체는 안정되지 않는 겁니다. 항상 불안정한 겁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만 불안정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게 불안정합니다.

왜 불안정하냐?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으니까. 운동 작용이 있으니까!

들어오는 것이 있으면 나가게 돼있고 나가는 것이 있으면 들어오게 돼있는데, 운동 작용이기 때문에 이거는 불안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걸 안정되게끔 자꾸 만들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라. 모든 이치는 이렇게 불안정한 거라.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되는데 그걸 안 받아들이니까 문제가 된다는 거라. 변화하고 있는데, 불안정한 것들인데. 안정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불안정한 것을 안정된 것으로 만들려다 보니까 어떻게 돼요?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거라.

 

불안정한 그대로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은 무너져버린다는 거라. 그거 안 무너질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계속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거라. 지구가 태양주위를 자전한다. 왜 자전합니까? 불안정하기 때문에 자전하는 겁니다. 공전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모든 게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그걸 갖다가 받아들이지 않을려고 할 거 같으면 이 고라고 하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다리를 들었다가 내려놓고 할 때, 들었다 놓을 때 불안정해서 뒤뚱뒤뚱합니다. 움직일려고 하는데 그때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들은? 불안정한 것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한쪽 다리에 힘을 꽉 주는 겁니다. 그렇죠? 불안정한 걸 그대로 놔두면 어떻게 됩니까? 자빠져버립니다. 무너져버린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물의 속성이라는 거라. 그래서 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그리 안 하죠? 불안정한 것을 안정되게 하기 위해서, 또 변화되는 것을 변화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괴로움을 즐거운 것으로 변화시킬려고 그럽니다. 안 그럽니까? 괴롭다 그러면 괴로움을 탈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실컷 친구들하고 수다 떤다든지, 안 그러면 술을 먹어가지고 기분 좋게 만든다든지, 혹은 영화 보러 간다든지 대부분 그러지 않습니까? 그렇게들 합니다. 근데 그 방법은 부처님의 방법이라 할 것 같으면 잘못된 방법이라는 거라. 그 즐거움은 또 안 변합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즐거움이 계속 있을 거 같으면 참 좋은데 변화되는 속성입니다.

 

그걸 갖다가 부처님이 뭐라 그러느냐면 '소금물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합니다. 목이 마른 사람은 무엇이든지 먹을려고 그럽니다. 왜? 갈증이 나는 것들을 해소해야 되기 때문에! 근데 이 갈증이라고 하는 것은 물을 먹어야 해소되는 것이지, 소금물을 먹어가지고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으로는 갈증이 해소될 것 같지만 더 큰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즐거움을 찾는다고 하는 거는 더 큰 고통을 따라오게 한다는 거라. 남편 바람폈다, 미워죽겠다, 그럼 나도 팍 바람피워가 즐거움을 찾아버렸다, 더 큰 고통을 당한다는 거라. 스님 보기 싫어 죽겠다, 그래서 스님 피할라고 저 싱가폴로 간다, 더 큰 고통이 따라오고 있다는 거라. 그래서 찰나적으로 불끈하는 것으로써 해결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인정하라, 받아들이라는 거라.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거라. 왜? 왜 괴로우느냐는 거라. 안정돼있지 않고 변화되고 움직이는 건데 그게 안 괴로울 수가 있나? 어쩔 수 없는 거라 그거는.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안 괴로울 거라. 그럼 그렇게 받아들여야 만이 문제해결을 해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럼 받아들이고 나서 괴로운 걸 해결할려면 어떻게 해야 돼? 아, 이거는 내가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착하기 때문에 이러는 거구나. 내가 뭔가를 갖다가 만족스럽게 할려고 하고 또 안정되기를 원하고 이러기 때문에 내가 집착하는구나. 사실을 알 것 같으면, 있는 그대로만 바라볼 거 같으면 괴로울 것이 없다 하는 거라.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들을 알아차려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순간순간! 왜? 변화는 순간순간이기 때문에! 순간순간은 어떤 경우든지 안정돼있으니까! 그건 누가 할 수 있는 겁니까? 자기 자신이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는 겁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한 사성제라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도 그렇게 해서 깨달음을 이뤘다는 거라. 무던하게 자기 몸을 고통스럽게도 해봤고, 또 출가하기 전에는 어느 누가 누려보지 못한 사치스러움도 누려봤고, 그리해도 즐거움도 취해봤고 괴로움도 취해봤지만 그거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거라.

그래서 인제 내가 깨닫고 나서 보니까 아, 이걸 받아들였어야 되는데 받아들이지 못한 것 때문에 이렇게 됐구나 하고 판단해서, 그래서 내가 인제는 받아들였으니까 이렇게만 받아들이고 나니까, 절대 내가 즐거움이나 괴로운 것에 대해서 휩쓸리지 않는구나. 그 길을 갖다가 내가 너희들한테 얘기를 해주겠다 하면서 여덟 가지로 얘기를 해놓은 겁니다.

 

그중에 하나가 위빳사나 수행의 길이고, 하나가 아니고 세 개죠? 나머지는 말을 가지고 하는 것, 행동을 가지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그걸 여덟 가지로써 설해놨다는 얘기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자, 다음 시간에는 팔정도 부분에 들어가서 자세하게 하겠습니다. 사성제 이 부분에 대한 거는 팔정도를 할 때도 마찬가지고 또 칠각지를 할 때도 마찬가지고, 오온에 대해서 아니면 업에 대해서 얘기하고, 이런 거 할 때도 계속 반복돼서 나오는 겁니다이. 계속 반복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