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사성제로의 초대 1. (20071115)

담마마-마까 2020. 10. 25. 00:39

* 사성제로의 초대 1. (20071115)

https://youtu.be/AJUuNUFzZZw

https://youtu.be/7Np-9SvKIEk

 

프린트물 내준 거 한 사람이라도 읽어 본 사람 있어요? 사성제 페이지가 한 25페이지 가까이 될 겁니다. 지금 한 3분의 1을 여러분들에게 내줬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자, 시작을 해봅시다. 저번에 이어서 사성제 부분 해나가겠습니다.

교재에는 사성제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에 대한 얘기를 간단하게 해놓았습니다. 마음이 뭔지는 여러분들도 모르고 저도 완전하게 모릅니다. 근데 하나 분명한 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여러분들도 이해할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들은 키는 계속 커나가고 성장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그 훈련을 하지 않으면 절대 성장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어린애와 똑같은 상태입니다. 단지 우리는 습관적으로 사람들이 이것은 해서는 안된다, 저것은 좋은 것이다 하니까 그걸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뿐이라서 그런 부분을 할려고 할 때 내가 참고 이런 부분은 있죠. 도둑질하면 사회에서 욕한다 아니면 사회에서 수갑채워가지고 감옥에 보낸다 하니까 그것이 두렵고 또 그런 것들이 관습화돼있는 것들로 인해서 도둑질을 안 하는 것뿐인 것이지 자기 마음은 도둑질을 틀림없이 할 거란 말이라.

 

그마만큼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것들 하고는 다르다는 겁니다.

육체는 밥만 먹고 잘 건강하게만 할 것 같으면 성장해나가는데 마음은 절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길들여지지 않으면 성장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먼저 받아들여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뜻으로써 스님이 시작하는 부분을 했습니다. 왜 사성제 부분을 하기 전에 그런 얘기를 하느냐 하면, 이제부터는 진리를 이해해나가는 것인데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들하고는 어떤 면에서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집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기 꺼렸던 이유들이 뭡니까? 사람들은 A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부처님이 깨닫고 나니까 B거든. B라고 아무리 얘기해줘 봐야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야. 예를 들어보자. "이 세상 모든 조건지워진 것들은 다 괴로움이다" “스님 나는 즐거울 때도 있는데요?” 그렇죠? 여러분들 즐거울 때 있죠? 기쁠 때도 있고, 좋아가지고 어쩌지 못할 때도 있다는 거라. 아, 스님 있는데 왜 자꾸 없다고 그러냐고 내보고 얘길 하는 거라. 틀림없이 이거 있지 않느냐? 그런 거거든.

근데 부처님은 뭐라고 했어요? 니가 즐겁다고 생각하든 기쁘다고 생각하든 어쨌든 그건 다 괴로움이라는 거라. 모든 것이라고 했으니까, 그건 다 괴로움이라는 거라. 사람들이 못 받아들인다는 거라.

 

마음이라는 것도 꼭 마찬가집니다. 세월이 지나면 몸과 같이 지가 다 성장하겠지 하고 생각을 하고 등한시해버린다는 거라. 당연히 키가 크니까, 그리고 습관적으로 해나가다 보니까, 할 거 하지 말아야 될 거 이런 것들을 구별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내가 그래도 쪼맨 꼬맹이 보다는 훨씬 마음이 크다, 마음이 넓다 이렇게 오해를 한다는 거라. 오해를!

실제 그렇습니까? 여러분들 마음이 그렇게 큽니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이. 마음은 절대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모든 것들을 하는 것들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다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이 마음에 대한 것들을 모르고 있으니까 어떻게 하느냐는 거라. 그 부분을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절대 마음은 스스로 확인해서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스스로 그 마음의 상태, 마음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 같으면, 성장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꾸자꾸 수행하라, 수행하라 그러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밑에 「사성제를 생각해 봅시다」 하는 것을 봅시다.

사성제가 뭡니까? 예? (대답) 말은 잘한다. 내가 뭐 고집멸도 모를까 봐서 고·집·멸·도 그거 설명할라고 내가 이거 적어놓은 줄 알아요? 그러면 이렇게 내가 설명하면 여러분들이 잘 알 겁니다.

「사성제」 조금 어렵게 말하면 '짯따로 아리야 삿짜' 그러면 '짯따로' 풀이해주고 '아리야' 풀이해주고 '삿짜' 풀이해주고 하면 열심히 받아적습니다. 그렇죠? '짯따로' 하니까 네 개, 4라는 뜻이다. '아리야' 하니까 성스러운, '삿짜' 여기는 삿짜니라고 돼있죠. 삿짜의 복수형이 '삿짜니'다. 진리 뭐 이렇게 막 적습니다.

그래놓고 짯따로 네 개라는 게 뭐냐? 고 집 멸 도 둑카 사무다야 어쩌고 이렇게 얘기하면 그건 잘 받아 적습니다.

여러분들 시험치게 하기 위해서 이거 하는 거 아니거든. 그렇죠?

여러분들이 얘기하듯 고·집·멸·도 그거 알아서 뭐 할 건데? 고·집·멸·도가 아니고, 네 개가 뭐 다른 용어로써 쓴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라. 부처님이 이 법을 설했던 근본적인 이유하고는 백팔십도 틀려져버립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공부를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 그러면 왜 부처님이 이 사성제를 얘기하면서 성스럽다고 얘기했을까? 성스럽다고 하는 단어들을 많이 쓰죠? 언제 씁니까? '사와까 상고(sāvaka-saṅgho)' '상가-'부분 할 때 그거 하죠. 사와까라는 용어 많이 쓰죠. 아리야 사와까(Ariya-sāvaka), 아리야 상가(Ariya-saṅgha), 뭐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스럽다는 개념을 쓸 때는 인도 고대 때부터 가져왔던 개념하고는 틀립니다.

처음에 성스럽다는 단어가 아리야 라고 쓴 것은 인도에 아리얀 종족이라고 있었습니다. 아리얀 종족이 자기들 신분이 고귀하다, 고결하다는 그런 뜻으로써 아리야 종족인데, 아리야란 의미가 고결하다 고귀하다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다른 것하고 구분하기 위해서 이렇게 써왔습니다.

이 아리얀 종족들 중에 지배계층들 중 바라문계급들이나 아니면 왕족 계급들 이런 계급들을 보통 아리야 라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성스러운 계급이다 해서 다른 계급들하고 대치되는 요소로써 이렇게 썼었는데 어쨌든 지배계급이다 보니까 베다(Veda)를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베다를 공부할 수 있는 특권들을 가지고 있는 부류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아리야 라는 의미 자체는 베다에 정통한 그런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 합니다.

 

근데 이게 불교용어로써 들어와지게 되면서 의미가 굉장히 많이 바뀌어버립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재가신자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입니다. 그래서 남자재가신자, 여자재가신자, 아니면 출가자 중에서 남자출가자, 여자출가자 해서 이름을 다 따로 붙인단 말입니다. 비구, 비구니 한글로 하면 우바새, 우바이 그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는 이런 용어들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전부 아리야 라고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은 신분이 왕족이나 바라문도 있겠지만 바이샤, 크샤트리야 같은 다른 종족, 계급들도 있단 말입니다. 근데 아리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또 출가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출가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아리야라고 그랬단 말입니다.

 

그래서 '아리야'라고 하는 것은 무슨 뭐냐 하면 '진리에 눈뜬 자'들을 통칭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진리에 눈뜬 자들. 이런 의미에서는 여러분들이 과연 아리야 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는데, 진리에 눈을 뜰려고 할 것 같으면 성스러운 생활들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스러운 생활을 해나가는 그런 근거가 뭐냐 하면 바로 이 네 가지 진리를 확연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서 확신을 가지게 되는 상태!

사성제는 언제 설해졌습니까? 부처님이 처음부터 설했습니다. 맨 처음 제자들에게, 다섯 명의 비구 출가자에게 법을 설한 것이 이 사성제입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 열반할 때까지 이걸 얘기합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형태입니다. 그거를 빼고 불교를 얘기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런 것이 사성제라는 건데, 사성제를 적어도 이해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아리야가 됩니다.

 

처음에 부처님이 뭐라고 설명했느냐 하면 한번 했는데 부처님이 실패를 했거든.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다섯 명의 제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하다가 우빠까 라고 하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 사람한테 대답한 것이 뭐냐 하면 “나는 깨달은 사람이다. 나는 최고다” 하고 얘기했거든. 그 부처님 일대기 할 때도 얘기했죠? 그래 그 사람이 뭐라고 그랬어요? “음, 그럴 수도 있겠지. 니 잘난 맛에 살아라.” 하면서 가버렸단 말이라. 내가 깨달은 사람이다. 내가 최고다 할 것 같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니가 진짜 깨달았냐?” 니가 최고인 걸 걸 증명해라. 아니면 최고냐, 아니냐? 기냐 아니냐? 이렇게 판단들은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처님이 한 번 실패를 했으니까, 두 번째 이 다섯 명의 제자들을 만났을 때 첫마디가 뭐냐 하면 "둑카가 있다. 둑카의 원인이 있다. 둑카의 사라짐이 있다. 그 둑카가 사라지는 길이 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대부분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둑카가 있다! 그 둑카가 뭐지? 하고 생각을 하지 둑카가 있냐, 없냐 하고 생각을 안 한다는 거라. 두 번째 방법에서 부처님이 이 다섯 명을 계속적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끔 만들었던 근거도 어떤 면에서는 이런 화술적인 면들이 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도 물어봅니다. 둑카(dukkha )가 뭡니까? 응? 일체개고? 그래 그 고(苦)가 뭐냐는 거라. 보통 둑카를 우리 한글로 표현을 하면 고(苦)라고 표현을 하죠. 고통, 괴로움 이렇게. 고통 괴로움뿐 아니라 여러 가지 많죠? 아픔도 있고 정신적인 번뇌도 있고, 쉽게 얘기하면 육체적인 괴로움도 있고 정신적인 괴로움도 있고 그렇다는 겁니다. 그것만 뜻합니까? 그건 아니죠? 둑카라는 자체는 그것보다도 더 넓은 의미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한 근본적인 의미는 '불만족'입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둑카라고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상한 것, 변해나가는 것 이것은 어떤 것이든 둑카다 괴로움이다' 하는 그런 의미에서, 변해나가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거라. 왜? 사람은 지금 내가 좋은 걸 가지고 있으면 좋은 걸 계속 가지고 있고 싶고, 괴로운 게 있으면 그걸 빨리 벗어나버리고 싶거든. 그게 사람 마음이라는 거라.

사람뿐 아니라 생명을 가진 존재는 다 똑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런데 세상 존재는 그런 게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세상 존재는 무상한 것입니다. 항상하는 것이 없거든. 천년만년 살 것 같아도 살지도 못하고, 생각을 한 곳에 묶고 싶어도 묶여있지 못하고, 변해나가는 것이고 무상한 것이라. 그렇게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지가 원하는 대로 그대로 되지는 못한다는 거라.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거라.

 

그것이 뭐냐 하면 그것을 갖다가 부처님이 불만족이라고 그럽니다. 그걸 갖다가 개념으로 써놓은 뜻이 둑카라는 뜻입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변하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변한다. 무상하다. 불만족스럽다. 고' 무상(無常) 고(苦)는 이렇게 한 조건으로써 이렇게 나타나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는 어디서 와집니까? 변하는데 변하지 않을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기서 쭉 뭐가 가고 있다. 그럼 못 가게 할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잡아야 못 가게 하는 거라. 변해나가는데 어쨌든 요놈을 변하지 못하게 딱 잡을라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요? 붙잡는 수밖에 없는 거라.

이게 원인이라는 거라. 부처님이 말하는 게. 요거만 탁 놔버리면 아이고, 저거는 어쩔 수 없이 변해나가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 같으면 문제는 간단해져 버린다는 거라. 붙잡기 때문에 사람들은 고(苦)를 하고 고(苦)를 받는다, 고통스러워한다, 불만족스러워한다는 거라. 불만족스럽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잡지만 않으면 돼. 안 잡으면 불만족스럽지 않다는 거라. 그냥 흘러오면 흘러오는 대로 왔다가 가도록 냅둬버릴 거 같으면 전혀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들 뭐 강물이 흘러간다. 강을 보면서 흘러가는 거를 보고 불만족스럽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왜? 관계없는 것이니까, 나하고! 그런데 내 새끼가 아니면 내가 어떤 일에 대해서 그냥 강물같이 흘러가는 것이다, 변해가는 것이다 하면 대부분은 어떻게 해요? 못견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라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생겨납니다. 집착하는 것은 무엇이 집착이 되는 겁니까? 나가 우선이 되어서 집착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이 사성제에서 고(苦)·집(集)의 기본적인 형태들입니다.

 

아라한은 둑카가 있었을까 없었을까? 여러분들 하기 쉽게 괴로움이라고 합시다이. 괴로움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수행자 대답)

깨달은 분인데 어째서 있는데? 스님 얘기하는 거 보면 분명히 있는 것 같이 얘기하지? 그러니까 겐또(눈치로) 때린 거지? (수행자 대답)

아라한은 깨달은 상태에 있는 분들을 얘기합니다. 그전에 깨닫기 전에 상태를 얘기하는 게 아니고. (수행자 대답)

있습니다. 육체적인 괴로움은 있습니다. 부처님도 “내 등이 아프다”고 했거든. 내가 아프다고 얘기하는 거라. 그건 부처님뿐 아니라 부처님 할아버지가 오더라도 아픈 건 아픈 겁니다. 그 대신에 정신적인 괴로움은 맞지 않는다는 거라. 육체적인 괴로움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괴로움은 받지 않는다는 거라.

 

"몸은 아프되 마음은 아프지 마라" 하는 얘기를 스님이 가끔씩 합니다. 그게 뭐냐면 정신적인 괴로움까지는 받지 말dk라는 거라. 정신적인 괴로움은 뭡니까? 붙잡는 거는 육체적으로 잡는 게 아닙니다. 정신적인 것으로 잡는 거지, 무슨 손으로 잡는다 해가지고 붙잡아지는 건가? 그건 아니거든. 아라한들은 정신적으로 붙잡는 것들이 없다는 거라.

육체적으로 화살을 한 번 맞을지는 몰라도 두 번째 화살, 세 번째 화살, 정신적인 번뇌 고통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또 다른 파장들 두 번째, 세 번째는 절대 받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둑카를 이해하는 것은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둑카'라는 용어보다 여러분들 알기 쉽게 '괴로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괴로움이 있다하고 얘기했을 때 뭐 때문에 그러면 괴로움이 있다고 얘기했겠습니까? 다른 종교에서는 환상적으로 얘기합니다. '저세상, 더 좋은 세상이 있다. 열반의 세계가 있다.' 불교에서 그러죠. '가세. 가세. 저 좋은 열반의 세계로 가세.' 열반을 자꾸 얘기하는데,

부처님은 "괴로움이 있다. 이 세상은 괴로움이다." 돌 맞아 죽을라고 그러는 건가? 그건 아니죠? 그런 뜻으로써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 밑에 부분은 여러분들이 쭉 읽어보시면 됩니다이.

허무주의를 부르짖기 위해서 부처님이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우리 살아가는 삶 자체가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거라.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하자.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인정하지 않는데 뭐 붙잡는 걸 갖다가 놓을 이유도 없는 거라. 먼저 인정하자는 거라. 자기 자신을! 그걸 인정하고 나서 왜 이렇게 괴로운 건가 하고 니가 꿰뚫듯이 한번 살펴봐라. 살펴보니까 아, 이것으로 인해서 괴롭구나. 아, 그러면 그 괴로운 것을 제거를 해버리자. 이게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는 거라. 부처님이 이 세상을 본 근거에 인해서.

 

사람들은 보통 얘기합니다. 아, 나는 괴롭다. 나는 괴로움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수행도 하고 그 괴로움을 제거하기 위해서 이 선원에 와서 수행을 한다. 이렇게 보통 얘기합니다. 그건 아니죠? 그건 잘못된 겁니다. '괴롭다' 하는 걸 인정해라 하는 것은 '나는 괴롭다' 하고 인정하라는 게 아닙니다. '괴로움이 있다'는 걸 인정해라는 겁니다.

 

'나는 괴롭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럼 남의 괴로운 것은 인정 안 한다는 거라. 내 괴로운 것만 인정하게 된다는 거라. '어떤 것에든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 '괴로움이 있다'하고 받아들이라는 거라.

'나의 견지'라는 것들이 아니라, 내가 느끼고 있는 아픔이나 번민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 있구나' 실제로 보니까 실상은 괴로움이 있다는 거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라는 거라.

 

실재를 보고 '아, 괴로움이 있다'하고 인정을 하라는 거라. 그것이 괴로움을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래서 그 괴로움만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지, 괴로움에 대해서 반응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어떻게 해요? 괴로움이 있으니까 벗어나기 위해서 반응을 합니다. 다리 구부러져 있으니까 괴롭단 말이라.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제깍 다리를 펴버린다는 거라. 반응하기 위해서 괴로움이 있다 하고 인정을 하고 먼저 알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괴로움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삼단계로 보통 얘기합니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을 한 번 보면 고(苦)에 대해서도 삼단계로 부처님이 얘기를 해놓고, 집(集)에 대해서도 삼단계로 얘기해놓고, 멸(滅)도 마찬가지고 도(道)도 마찬가지고 삼단계로 얘기했습니다.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그것을 이해하고, 그다음 이해하고 나서 그다음에는 그 부분에 대해서 완전하게 확신을 가져라!

뭔가 확신을 가질려고 할 것 같으면, 완전하게 이해를 해버리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뭔가를 알아야 이해를 하고 확신을 합니다. 그래서 뭔가를 알아라는 거라.

알아라는 건 뭐냐면 '고가 있다, 집이 있다, 멸이 있다, 도가 있다'는 걸 먼저 알아라는 거라. 그걸 먼저 알아라는 것이지, 안 것에 대해서 반응을 하라는 게 아니라는 거라. 고가 있다고 알 것 같으면 고에 대해서 반응을 하라는 게 아니고! 괴롭기 때문에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반응하라는 것이 아니고!

수행은 그렇게 반응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맨 처음엔. 그래서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려라 했지 화가 일어난다고 해서 고함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세상 진리라고 하는 먼저 그 사물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아야 됩니다.

'있구나' '없구나' 그것이 고에 대해서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아까 조금 전에 얘기했던 그것을

'이해하여야 할 대상'으로 봐야 됩니다.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 고라고 하는 것은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제거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보면 그럽니다. 즐거운 것은 취할려고 그러고, 괴로운 것은 벗어나려고 하고 제거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건 이해해야 될 부분인 것이지 제거해야 될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부처님이. 진실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껴안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왜? 부처님의 진리대로 할 것 같으면 괴로움도 무상입니다. 변해가는 겁니다. 즐거운 것도 변해가듯이, 뭐 내가 껴안는다고 해가지고 불길을 껴안듯이 한창 뜨거운 것을 껴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무상인데, 변해가는 건데. 이해한다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내 속으로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배척할려고 하지 말고.

내가 화가 일어났다. ‘아, 화가 있구나’ 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지 ‘아, 이러면 안 돼! 일어남 사라짐 해야지’ 배척해버리고 일어남 사라짐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대상이 나타나면 대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스님이 뭐라고 그럽니까? "대상이 있으면 대상이 있음을 알고 나면, 그것이 완전하게 사라질 때까지 관찰하라." 관찰하지 않고 ‘안 돼! 왜 그것은 나쁜 거니까!’ 안 그러면 이것은 ‘집착하는 부분이니까!’ 그래서 배척해버리고 얼른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버리면 그것은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완전하게 보도록, 그 속에 들어가서 껴안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거라.

그것이 보통은 잘 안되죠?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이런 괴로움에 대해서는 즉각적으로 반응들을 합니다. 그런데 반응들을 할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이해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리해야 만이 실제 이 괴로움을 여러분들이 볼 수가 있습니다. 실제 괴로움은 어떤 겁니까? 변해나가는 겁니다. 변해나가는 걸 이해하지 못하면 괴로움, 이 둑카라는 것을 완전하게 이해를 못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있다 하는 것을 먼저 알고 나면 그다음엔 그것을 이해하라는 거라. 아, 괴로움은 이런 속성을 지녔구나. 이것도 변해나가는 속성이구나 하고 이해를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그렇게 하고 나면 괴로움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나서 확신을 가지라고 합니다.

완전하게 확신을 가지라는 건 뭡니까? 자기대로 나오도록 냅둬버린다는 거라 쉽게 얘기하면. 괴로움도 변해가는 속성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내가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라. 냅둬버릴 것 같으면 지 혼자서 놀다가 가는 거라.

아기가 아무리 울어봐야 울라면 울어라. 냅둬버릴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지 혼자서 한참 울다가 보면 자든지 안 그러면 뚝 울음을 그치든지 지가 한다는 거라. 그렇게 될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되요? 애가 지금 위험에 빠지지 않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거든. 그러고 저놈도 울어봐야 울다가 나중에 뚝 그칠끼다 하고 내가 이해를 했기 때문에, 그걸 내버려둘 수가 있는 거라. 우는 대로 그냥 내버려둘 수 있는 거라.

 

이것이 괴로움을 이해하는 세 가지 --입니다. 그래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를 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나면 확신을 가지게 돼서 성품을 있는 대로 놓아버리게 되는 것, 그것이 세 가지 --이라는 겁니다.

보통 이것을 빨리어로는 빠리얏띠(pariyatti), 빠띠빳띠(paṭipatti), 빠띠웨다(paṭivedha) 그렇게 얘기합니다. 많이 들어봤죠?

 

빠리얏띠(pariyatti)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나는 대통령이다 하고 선언하는 것을 얘기합니다. 이것이 고통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하고 선언하는 겁니다. 그걸 갖다가 보통 우리는 '경전을 배운다' 하고 얘기합니다. 경전 배우면 어떻게 돼요? 그대로 그냥 아는 거라.

 

그다음에 빠띠빳띠(paṭipatti)는 뭐라고 얘기합니까? '수행한다'고 그럽니다.

나는 대통령이다. 아니면 이것이 괴로움이다. 선언하고 나면 어떻게 돼요? 그 괴로움이 진짜 괴로움인지, 내가 대통령인지를 갖다가 조사를 해봐야 될 거 아니라. 수행에서 조사하는 게 뭡니까? 우리 불교에서 말할 때. 경전에서 부처님은 이런 분이다. 부처님의 수행법은 이런 것이다 하고 배웠다. 어떻게 압니까? 그렇게 수행해보는 거라. 그렇게 수행해보고 나서 아, 진짜 이게 맞구나. 내가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거라.

 

안 그러면 수행해보니까 아, 이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이해해서 그것을 괴로움을 뛰어넘어 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걸 갖다가 뭐라고 그럽니까? 그걸 보통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갖다가 빠띠웨다(paṭivedh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세 부분을 명제를 제시를 하고, 명제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그 명제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것. 경전에도 대부분 그렇게 돼있죠? 세 번으로 반복되어 있죠? 다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뭐 하러 이렇게 복잡하게 세 번이나 자꾸 반복하느냐고 그럽니다. 스님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똑같은 건데 뭐 하러 이렇게 반복하느냐고. 근데 이게 부처님의 진리라. 이게 기본적인 구조라는 거라.

스스로 조사확인 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쉽게 말하면 명제를 툭 던져준 것뿐입니다. 수행은 이런 것이다. 괴로움은 이런 것이다. 이렇게 명제를 툭 던져주면 어떻게 돼? 그것을 따라가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는 개개인의 몫이라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법을 설할 때 똑같은 것을 세 번을 얘기한다는 거라.

 

예. 처음 "고집멸도 네 가지 올바른 진리입니다." 하는 부분은 얘기된 겁니다이. 그러면 그 밑에 인제 한번 봅시다.

 

부처님은 왜 그러면 영혼불멸이라든지 아니면 좋은 것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을 안 했을까? 두려움 괴로움 이런 걸 얘기해 놓았을까?

보통 다른 종교에는 그런 게 없죠?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요소가 거의 없습니다. "뭐 어찌하면 어찌될 것이다" 하고 좋은 부분만 얘기합니다. 네가 수행을 열심히 하면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런 부정적인 것들을 얘길 안 한다는 거라. 그러니까 내한테 열심히 기도하면 천국행 티켓을 보장해주마. 이렇게 얘길 하는 거라. 우리도 그러잖습니까? 뭐 뭐 어찌하면 극락으로 갈 것이다. 근데 사실은 다 불교적인 의미는 아니죠?

불교적인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앞에 있는 현실을 봐라는 거라. 그걸 괜히 곡해 해가지고 아닌 것처럼 하지 말아라는 거라. 괴로운 건 괴로운 거지 뭐 변해나가는 걸 변하지 않는다고 얘기하지 말아라는 거라. 무상하면 무상하다고 해라. 그걸 먼저 그렇구나 하고 이해를 하라는 거라. 그걸 먼저 자꾸 부처님이 강조하는 거라.

 

지금 내가 놓여져있는 현실이 어떤 것인가? 여러분들 말마따나 즐거움이 있다, 그럼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는 거라. 괴로움이 있으면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는 거라. 알고 나면 어떻게 돼요? 그 즐거움이 그냥 그대로 즐거움으로 계속 있는 것이냐? 괴로움이 그냥 괴로움으로 있는 것이냐? 그걸 갖다가 조사해보라는 거라. 조사해보니까 즐거움이 즐거움만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요것도 롤러코스터를 탄다. 괴로움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 롤러코스터를 타는 걸 조사해보라는 거라. 조사해보니까 어떻게 돼요? '변해버리는구나. '항상 있는 게 아니구나. 아, 참 난 좀 그대로 있고 싶은데 안 되는구나'

그게 불만족이라는 거라. 그걸 부처님이 둑카(dukkha)라고 하는 거라.

 

수행은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에 대한 거를 밑에다 적어놓았습니다. 자신의 현실을 거울에 찍은 것처럼 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라는 거라. 현실을 바르게 내가 응시를 해서 그것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는 방법이라는 거라.

위빳사나가 뭡니까?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겁니다. 변해나가면 변해나가는 대로 관찰하고, 만약에 관찰 안 되면 어떻게 할 거라? 관찰 안 되는 대로 그거는 그렇게 알아차리고. 근데 보통 그렇게 안 하죠? 부처님 방법으로 안 합니다.

 

얼마 전에 PD수첩인가를 보니까 아마 여주 성모동산 인가 뭔가 하는 부분이 나오더라고. 우연히, 앞에 부분을 내가 못봤어. 뒤에 부분만 봤는데 참 어찌보면 황당하대. 황당해. 피눈물은 뭐 둘째치고 하느님의 성현이 떨어지고 어쩌고 하는 얘기들을 하는데, 그래서 그거는 지금 공개를 하지 않는다고 그러대. 공개를 하면 자기를 우상화시킨다는 거라.

 

이 글(교재)을 쓴 거는 그 훨씬 전에 내가 쓴 건데 똑 맞는 얘깁니다.

불가사의한 세계가 정말로 있다면 당당히 그것을 나타내면 되는데, 대부분 어떻게 합니까? 교조의 특이한 체험으로써만 끝내버립니다. 그렇게 설명으로써. 그래놓고 막 호들갑을 떨어쌌는 거라. 개인적인 일을 가지고. 그 성모님이 어떻는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사람은 그런 체험한 적이 전혀 없거든.

그러면 그런 것이면 과학적으로 될 것 같으면 그걸 밝혀야 된다고. 이게 진짜인가 아닌가 밝혀놓으면 아니다 과학하고는 이건 관계없는 것이다. 종교는 뭐 과학하고 어쩐다 하면서 또 뭐라쌌고. 그래놓고 밝히라 그러면 이거 밝히면 내가 사이비 교주가 된다고 해서 안 밝힌다고 그러고. 우째라는 얘기라, 그러면.

 

여러분들도 마찬집니다. 그래서 그밑에 관세음보살 얘기를 들어놓았는데, 관세음보살 봤다고 난리법석을 쳐쌌지. 지혼자 본 걸 가지고 어쩌라는 얘기라?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 거기에 적어놓았는데, 지극정성으로 남자를 좋아하면 자나깨나 생각하게 돼있습니다. 깨놓고 그남자가 어찌돼었든 간에 지는 그 남자에 대해서는 다 아는 거라. 지가 다 만들어나가니까.

자기가 어떤 면에서는 초능력자가 되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건 망상입니다. 망상! 그건 자기 혼자 초능력이 있는 것처럼 또 맞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망상이 만들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 나주 성모님과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하는 형태가 그렇다는 겁니다.

 

위빳사나 수행실천에서는 그래서 먼저 뭐라고 그럽니까? 몸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마음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그것이 건강하고 건전하게 유지해야 된다는 거라. 수행할 때 어떻게 하라고 그럽니까? 몸이 경직되어 있는지 몸이 편안한지 먼저 보고, 마음도 들떠있는지 아니면 우울해있는지 경직되어 있는지 한번 보고, 그렇게 몸과 마음이 조화스럽게 되고 나서 수행이 시작된다고 분명히 얘기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런 방법들을 동원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현상들은 앞으로는 인제 고스트 바스터는 하지 않도록 그렇게 좀 해야 됩니다. 당장은 안 되겠지. 당장은 잘 안 되더라도 아, 그것은 내가 지어낸 망상이구나 하는 생각을 항상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진짜 그게 성모님이나 아니면 관세음보살이 그랬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얼마나 좋겠어? 그러면 항상 그렇게 돼야 될 거 아니라? 그건 그런 게 아니거든. 설혹 그런 성모님이나 관세음보살이 있다고 하더라도,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얼마나 한심하게 볼 거라? 그런 모습들을 보고. 참 어리석다고 그러지. 그렇게 이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는 아니라는 거라. 만약에 그분들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진짜 좋은 일들을 위해서 쓰임새 있기 위해서 필요한 분들인데 고작 그런 것들 할라고 그분들이 존재하겠어요? 존재 이유가? 그건 아니잖아. 오늘 또 모르지. 관세음보살 영험을 봐가지고 400점 수능고득점 했다고 할지도 모르지 또.

그것은 서론이고.

 

인생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복서로써 얘기를 해놨습니다. 열심히 해가지고 누구 때려눕히고 해가지고 세계챔피언이 됐다. 그거로 끝나는 게 아니죠? 세계챔피언 벨트를 내려놓기 전에는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야 된다는 거라. 뭐 어떡해? 그 도전 물리치려면 끊임없이 또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그 자리를 물러날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 된다는 거라. 인생이라는 거는 그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끊임없이 힘들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라.

 

여러분도 한번 보십시오. 그리 안 하고 밥 먹고 살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어요? 여자분들은 잘 모르지. 남자분들이 퍼뜩퍼뜩 벌어다 주니까 쉽게 생기는 것처럼 생각할지도 모르지. 근데 그건 아니거든. 그런 피나는 노력과 고생이 없이는 안 된다는 거라. 그게 인생이라는 거라. 그런 건데, 자기 하나 살아오는 것만 봐도 그런 건데, 어떻게 인생을 장밋빛으로만 얘기할 수 있느냐는 거라. 부처님이 보기에도 그건 아니라는 거라. 그거는 희망적인 것은 그냥 희망적인 것이지 전체의 희망이라고만 얘기해선 안 된다는 거라.

 

이러한 현실을 이해해서, 이렇게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이해해서, 자신 속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면, 그걸 해결할 거 같으면 적어도 이 세상은 자기 자신에게는 행복한 곳이다 하는 거라. 그게 부처님의 진리라는 거라.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가 사성제의 진리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인간의 괴로움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하는 부분은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