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해탈의 길 2) (20071101)

담마마-마까 2020. 10. 25. 00:34

*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해탈의 길 2) (20071101)

https://youtu.be/QXni7fYhETc

https://youtu.be/NlQ88HvQBHM

 

자, 한번 보십시오. 저번 시간까지 세 가지 게송에 대한 것들을 했습니다.

 

첫 번째, 해탈에 이르는 길이 보통 악을 짓지 말고 좋은 일을 행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는 부분인데, 그 근본적인 의미는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지 말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라. 능숙하게 삶을 살아가도록 하고 이미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는 잘 설해져 있는 것이다. 시스템은 이미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이니까 그 시스템에 따라서 그냥 실천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것이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것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고, 그러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행하는 길은 뭔가, 수행이 뭔가 하는 것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한 마음을 가지는 것과, 괴로운 것들에 대해서 인내해서 그것을 잘 관찰해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것 그것이 수행하는 길이다 하는 두 가지 길에 대한 얘기를 했고,

 

그다음에 세 번째 출가자, 수행자라는 건 또 어떤 걸 얘기하는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은 밑에 보면 쭉 나와 있습니다. 남을 죽여서도 안 될 뿐 아니라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은 출가수행자가 아니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또한 남을 비난하지 않고 피해를 주지도 않고 출가자의 계율을 지키고 음식을 절제하고 고요한 곳에 머무는 것, 그리고 초월한 마음을 목표로 하여 노력하는 것 이것이 출가자가 나아갈 길이라고 부처님이 가르쳤다 하는 얘깁니다.

 

거기에 대한 것, 빨리어 부분을 한글로 조목 조목 적어놨습니다. 보면 크게 무리되지는 않을 겁니다.

남을 죽이지 말고 폐를 끼치지 마라 하는 얘기는 출가자의 계율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227계 비구계가 있습니다. 그 많은 계율을 다 외우고 하지는 잘 못하거든요. 근데 갓 출가한 스님이라 할 것 같으면 그걸 외울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분들은 뭐를 가지고 '계율을 지키고, 안 지키고' 판단하는가 하면, 사무량심! 자·비·희·사라고 하는 네 가지를 '실천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을 가지고 '계율을 지켜나간다, 아니다' 하고 판단 내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기 적어놨지만 생명에 대해서 한없는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항상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 그리고 기쁨을 항상 같이 할 수 있는 마음, 그래서 고통 없고 괴로움이 없기를 하고 바라는 것. 그거는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내 스스로도 폐가 되지 않는 행위들을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기쁨을 함께 한다는 것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하고 바라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평등한 마음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런 평등하고 온유한 마음을 항상 가질 수 있도록 '그런 깨달음에 이르기를' 모든 이들이 깨달음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 이 네 가지를 잘 지켜나가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판단들을 합니다. 부처님은 그걸 한마디로 딱 얘기를 해놨습니다. "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지만 출가자의 계율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스님들이 “요거 좀 해주시오” 할 것 같으면 대부분 거절 못 하거든. 왜? 출가자니까! 성직자니까! 스님뿐 아니라 목사님도 꼭 마찬가질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사람에게는 부담이 되는 수가 있을 겁니다.

부처님 당시 때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목련 존자하고 사리불 존자는 둘이가 친구라서 굉장히 친했습니다. 하루는 사리불 존자가 병이 걸렸어요. 속병이 걸렸는데 목련 존자하고 얘기를 하다가 목련 존자한테 “목련 존자도 옛날에 속이 안 좋아가지고 고생했는데 거 어떻게 병을 고쳤느냐” 하니까, “나는 마침 탁발해왔는데 우유를 가지고 밥을 한 뜨물 같은 거기에 꿀이 좀 들어간 게 있었는데 그거 먹고 나서 내가 속이 나았다” 하고 얘길 하거든. “아, 그래요?” 목련 존자가 그럽니다. “만약에 사리불 존자님도 공덕이 있을 거 같으면 그런 인연으로 인해서 그 탁발공양을 받을 수 있게 될 겁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근데 이 얘기를 다른 이가 들었어. 다른 이가 들어가지고 자기 아는 사람에게 내일 그 사리불 존자는 아파서 못나오는데 목련 존자가 올 것 같으면 요렇게 요렇게 해서 공양을 좀 지어주시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목련존자가 탁발가서 보니까 아, 어제 얘기했던 우유를 가지고 밥을 지어가지고 거기다 꿀을 넣은 멀건 죽 같은 것을 주거든. 그러면서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면 목련 존자님 이거 한 그릇 잡숫고 하십시오. 갈 때 내가 한 그릇 싸드리겠습니다. 그걸 사리불 존자에게 드리십시오. 하는 거라.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걸 한 그릇 받아가지고 와서 사리불 존자에게 줍니다.

 

사리불 존자에게 아, 이거 내가 탁발 받은 거니까 잡수시오. 하고 내놓으니까, 사리불 존자가 그걸 보더니, “내가 먹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음식입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미리 누구한테 얘기해가지고 생긴 거라 이거라 판단하기를! 사실은 목련 존자가 그렇게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사실은 누가 들어서 안거라. 들어서 알든 어쨌든 간에 그렇게 판단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목련 존자도 두말 안 하고 자기가 애써 가져온 걸 먹지도 안 한다 이런 생각조차도 안 하고 그냥 그대로 땅에다가 부어버립니다.

그러면서 미리 말해서 생긴 음식으로는 그것이 내 창자 안을 돌아다니면서 내 병을 고쳐주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용하기에는 적당치 않은 것이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나는 오히려 그게 더 기쁩니다 하는 말을 함과 동시에 속에 있는 병이 확 나았다고 그럽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사실은 그런 계율들을 잘 모르잖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 탁발할 때 보면 “스님 뭐 좋아하십니까?” 가끔씩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근데 얘기를 할 수 없는 부분이거든. 스님이 지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서 신도들한테 얘기를 해서 가져오게끔 만들 수가 없습니다.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계율에 어긋나지 않은 상태 내에서 가져오는 음식들은 어느 것이나 관계없습니다.” 하고 얘길 해도 “아, 그래도 얘기해 보십시오.” 얘기할 수 없는 걸 자꾸 얘기하라 그러면 우째라는 얘기야. 다음에 여러분들 “스님, 뭐 잡숫고 싶으세요? 뭐 좋아하십니까?” 이런 건 물어보면 안됩니다이. 알겠습니까?

안 먹는 거는 계율에 나와 있습니다. "열 가지 음식하고 세 가지 조건"일 때는 안 먹습니다. 그거는 크게 여러분들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닌 것 같고.

 

어쨌든 이런 것인데 "생명에 대해서 폐를 끼치지 않아야 된다" 하는 한마디로써 출가자의 계율을 부처님이 일목요연하게 딱 정리를 해버립니다. 얼마나 간단한 얘깁니까? 나도 이 게송을 보면서 참 부처님 진짜 예리하다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다음에 밑에 보면 "고요한 곳에 자리를 펴고 앉고 적당한 식사를 하라."

식사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여러분들도 출가자와 마찬가집니다. 수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음식은 수행의 도구인 것이지 배불리 먹고 몸을 살찌우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게송에는 분명하게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배불리 먹는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라. 단지 내가 배고파가지고 몸을 보존하기 힘들다. 아니면 배고픈 느낌이 강해서 그 느낌으로 인해서 수행하기 힘들다 하기 때문에 그 느낌을 제거하기 위해서만 밥을 먹지 배불리 먹지 말아라. 수행을 위해서 이 몸을 유지하는 도구로써 써라." 그게 밥을 먹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먹으라고 했느냐면 일반적으로 먹는 음식에서 다섯 숟가락을 빼라 그럽니다. 다섯 숟가락이면 여러분들 식사양의 반입니다. 반을 없애라고 그럽니다. 그게 적당한 식사라는 겁니다.

그리고 고요한 곳에 자리를 펴서 머문다고 하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겁니다.

 

그다음 밑에 "초월한 마음으로 정진하는 것" 아디찟따(adhicitta) 부분입니다.

아디찟따는 초월한 마음인데 집중된 마음을 뜻합니다. 집중된 마음은 뭡니까? 선정입니다. 선정은 일반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경험하는 것은 뭡니까? 안이비설신 이라고 하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마음으로 헤아려서 아는 것뿐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는 거라. 아주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낮은 경지입니다. 근데 집중된 마음, 초월한 마음이라 하는 것은 그런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더 높은 경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높은 경지를 목표로 해서 수행하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선정을 계발해라 하는 그런 말이 아니고!

스님들이 출가할 때 청계송이 있습니다. 청계송에 뭐라고 하느냐면 "존경하는 스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나에게 가사를 입도록 허락하시고, 그렇게 해서 내가 삼계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 높은 해탈의 길에 이르도록 이끌어주십시오." 하고 게송을 외웁니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인식하는 것으로는 절대 삼계윤회의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는 거라. 그 고통을 벗어날려고 할 거 같으면 부처님이 말한 수행을 통해서 그 경지를 뛰어넘어야 된다는 거라. 윤회로부터 벗어나야 된다 하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출가를 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육십 넘은 나이 드신 스님 한 분이 있었는데 참 행실이 똑발라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왔습니다. 이 스님이 열반할 때가 다 됐거든. 상좌스님이 이 스님한테 갔습니다. “큰스님! 인제 열반할 때가 됐는데 스님께서는 출세간-세간을 뛰어넘는 그런 법을 얻었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큰스님은 정직하게 얘기합니다. “나는 그런 법 못 얻었다.” 그럽니다.

상좌가 “스님, 스님이 열반에 든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고 또 앞으로 더 사람들이 올 겁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출세간을 얻지 못한 뿌툿자나-범부로써 임종한다 할 거 같으면, 일반 세간인으로써 임종한다고 할 거 같으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질책을 합니다.

큰스님이 그럽니다. “나는 미래부처님을 친견해서 미래부처님 때 내가 열반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위빳사나 수행을 안 했다. 그러니 당연히 내가 출세간의 법을 얻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래. 그것도 그렇다. 그럴 것 같으면 나에게 시간을 다오.” 그럽니다. 시자스님이 나감과 동시에 이 스님이 수행을 통해서 그 출세간의 법을 얻습니다. 아주 손가락 하나 탕 튕기는 순간에!

 

다른 사람들이 왔는데 “아, 나 이제 출세간의 법을 얻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스님 어떻게 그렇게 금방 법을 얻었습니까? 참 기이한 일입니다. 진짜 어려운 일을 하셨습니다.”

이 큰스님이 뭐라 하느냐 하면 “진짜 어려운 일은 그게 아니다. 내가 그래도 출가하고나서 살아오면서 사띠-알아차림을 놓치고 살아온 적이 없다. 그 사띠를 놓치는 것이 나에겐 더 어려운 것이다. 알아차림 없이 살아가질 않았는데 알아차림 없이 사는 것이 나에게는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러느냐?” 하고 얘기합니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것은 사띠 없이 살아가는 것이고, 그래서 거기에 얽매여서 살아간다 해가지고 그걸 '오취온'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근데 오온으로 살아가는 분들은 뭡니까? 그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뛰어넘어 버립니다. 사띠로써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러분들은 사띠로써 살아갑니까, 아니면 사띠 없이 살아가느냐 하는 겁니다.

이런 초월한 마음, 뛰어난 집중된 선정, 알아차림으로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럴러면 사띠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부처님이 얘기한 건, 그게 수행자고 출가자다 라는 거라. 출가자나 수행자라는 것이 다른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법랍 많다고 해가지고 큰스님 되는 게 아니고, 가사 입고 머리 깍았다고 해서 출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만큼 내가 잘 몸과 마음을 조절을 하고 또한 세간에서 하지 못하는, 세간을 뛰어넘는 출세간의 법을 목표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 이런 자들이 출가자고 수행자다 하는 겁니다.

 

이 앞의 부분부터 해서 세 가지 게송을 쭉 얘기했는데,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만 얘기하는 게 아니고 과거의 여섯 부처님들이 다 공통적으로 얘기했던 부분입니다. 아주 진리에 눈뜬 분만이 얘기할 수 있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여러분들도 가끔씩 삶의 경책이 되도록 그렇게 하라는 의미로써 이렇게 적어놨습니다.

인제는 4장까지가 다 끝났습니다.

 

[5장.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여러분들이 어떤 면에서는 많이 듣고 싶어 하는 부분입니다. 사성제, 팔정도, 칠각지, 하는 그런 부분들로 쭉 연결이 되는 부분입니다.

삼법인이 뭐냐? 그럴 것 같으면 “무상·고·무아다” 이렇게 탁 얘기합니다. 사성제가 뭐냐? “고·집·멸·도!” 스님이 그거 가르쳐줄라고 이거 하는 거 아니거든. 문답식이든 단답식이든 그거 할려고 할 거 같으면 이거 하지도 않습니다. 부처님이 그거 외우라고 한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목적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목적은 분명하게 있습니다. 부처님을 알면 담마를 이해하게 되고, 담마를 알면 괴로움으로부터 풀려난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테마입니다. 단순하게 지식욕구로 인해서 공부할려고 할 거 같으면 여기 안 와도 됩니다. 그거는 시중에 나와 있는 책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또 그 수준 이상을 벗어나서 내가 삼법인이 뭐냐 하면 다른 걸 얘기하는 부분이 아닙니다. 똑같이 삼법인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그것이 수행하고 연관돼서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삼법인을 말하는 것이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이거 외우라고 가르쳐주는 법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러분들과 똑같은 부처님도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거라. 인간으로써 태어나서 잘 살다가 가신 부처님이지 그분을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먼저 가신 스승으로서 선배로서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것뿐입니다.

아기부처님이라는 소리 들어봤습니까? 요즘은 아기부처님이라는 소리를 많이 하대. 부처님은 아기 때 부처님이 안 됐습니다. 서른다섯 살 때 부처님이 됐습니다. 무슨 아기예수에서 따가지고 아기부처님 하는 거라. 예수는 자기가 신이라고 했으니까 아기 때도 신이라.

 

근데 부처님은 아기 때는 부처님이 아니였어요. 근데 왜 아기부처님이라고 해서 꼭 부처님을 그렇게 신격화시켜야 속이 편한가? 힌두교에서 말하는 신들이 타고 다니는 황소나 무슨 코끼리나 이런 것들이 신을 대신 하는 것으로써 태어나지도 않았고, 어떤 예언자로써 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나는 신이다 하고 부처님이 스스로 얘기한 적도 없다는 거라. 나는 깨달음을 이룬 인간으로서의 아라한일 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부처님이라는 의미가 신격화시키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붓다’라고 해야 된다 하고 얘기도 합니다.

 

우리 선원 이름도 뭡니까? 「붓다의 길따라」 이렇게 해놓았습니다. 그런 의도로 스님이 지은 것은 아니지만은 어쨌든 부처님이라고 부를 때 절대 한 분의 스승으로서 인식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이나 이하로 봐서는 안됩니다.

그런 분이 뛰어넘은 해탈의 길을 제시해놨기 때문에 그 길을 우리가 가기 위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지 단순히 지식욕으로써 남에게 내보이기 위해서, 아니면 스스로의 충족을 위해서 공부를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여기 올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가르침은 쓸데없는 것밖에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자, 그렇게 부처님이 가르친 것들을 우리는 보통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담마(Dhamma)라고 얘기합니다. 담마라 하면 여러분들은 뭐라 그럽니까? 보통 '법(法)·진리' 그렇게 얘기하죠? 근데 우리도 태국에 있으면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뭐 이렇게 하다 보면 아무데서나 “야, 그게 담마야 이놈아” 하고 스님들끼리 얘기를 합니다. 아주 편안하게 씁니다.

그 담마라는 의미가 과연 어떤 의미이고 또 불교에서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편안하게 쓸 수 있는가? 통상적으로 한번 봅시다이.

 

불교에서는 담마(Dhamma)라는 의미는 기본 의미로는 '이끌어준다'는 의미로써 담마로 해석을 합니다. 도움을 받도록 이끌어주는 것, 나를 남을 지켜주도록 이끌어주는 것, 또 밖으로의 적이나 안으로의 적, 탐·진·치라고 하는 안으로의 적, 밖으로의 여러 가지 환란들 이런 것들로부터 지켜주도록 이끌어주는 것, 그다음에 보호막을 씌우듯이 나쁜 것으로부터 보호되도록 보호해주는 것으로써 이끌어준다는 의미로 쓰일 때 담마라고 얘길 합니다. 불교적인 의미입니다이.

 

도움으로부터 이끌어준다는 의미는 뭡니까?

보통 우리는 잘못을 하고 잘하고 하는 것을 뭐로 가지고 합니까? 말과 행동과 마음으로 합니다. 그래서 내가 잘못했을 때는 그런 것으로 인해서 잘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신구의(身口意)로 인해가지고. 그러니까 잘못하면 어떻게 돼? 남들에게 비난을 받고 떨어지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 신구의의 잘못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 그거는 뭐로 가지고 막아줍니까? ‘아, 내가 이거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잘못 행동하고 있구나. 잘못 말하고 있구나’ 하고 내가 알아차릴 때 그것으로부터 막아줍니다.

 

알아차림이 있은 후에야만이 그렇게 떨어지는 것을 막아줄 수 있어서 이끌어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 그때 담마가 자기 자신을 도와주게 됩니다. 그래서 담마가 자신을 보호하고 내가 담마를 보호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건 담마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얘깁니다. 도움을 받는 것으로부터 이끌어주는 것이 뭡니까? 그것을 담마라고 얘길 합니다.

 

도움받기 위해서는 어떤 게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고요? 내가 잘하고 있다,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으면 그 도움받을 수가 없어.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화가 나면 막 그냥 혼자서 하다가 지 혼자서 폭 그냥 떨어집니다. 화병에 걸리고 어쩌고 하면서. 욕심이 생길 때는 막 또 정신없이 합니다. 거기에 무슨 담마가 있을 거라? 그거는 도와줄 수가 없는 거라. 기본 전제조건이 내가 알아차림이 있은 후에 그런 도움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도움을 받도록 이끌어준다는 의미는 그런 의미입니다.

 

적으로부터 지켜주도록 이끌어준다는 것.

적은 다른 것이 적이 아닙니다. 밖으로의 적이 있지만 안으로의 적도 있습니다. 탐·진·치라고 하는 안으로의 적, 그 적은 자신이 요거는 지키고 요거는 지키지 말아야 되겠다 하는 그런 도덕적인 개념들 그런 것들이 없을 때, 화내고 욕심내고 하게 돼있다는 거라. 적으로부터 지켜주도록 이끌어 준다고 하는 것도 쉽게 말하면 잘하고 잘못하고 하는 것들을 내가 분명하게 알 때 가능해집니다. ‘아, 이게 나에게는 적이 된다. 아니면 친구가 된다’ 하는 것을 갖다가 알 수 있는 스스로의 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 기준, 계율이 형성될 때만이 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거라. 그렇게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담마를 배우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의 질을 높여주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얘기하면 됩니다. 내가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남들에게 “아, 참 잘 살아간다” 하고 칭찬 들으니까 받들어지는 겁니다. 실천되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으면 “에이 저놈의 자식” 하면서 떨어뜨리게 됩니다. 실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지위가 높아지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한다는 거라. 그것을 이끌어주는 것이,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담마라는 거라.

 

보호해주도록 이끌어준다 하는 의미도 꼭 마찬가집니다.

보통 이것을 사마디 담마(samādhi dhamma)라고 얘길 하는데 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바르게 겨냥해가지고 마음이 잘 집중되고 알아차리고 하는 것이 이어졌을 때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바른 알아차림과 겨냥과 집중으로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하지 않고, 좋은 것들을 보고 싶고 듣고 싶고 하는 욕심도 생기지 않고 또 마음이 상하는 일도 없이 화내고 욕심내고 하는 그런 더러운 것으로부터 벗어나서 깨끗해져 있을 때, 이런 깨끗해져 있는 것은 한 번의 알아차림으로 한 번의 깨끗해짐이 생겨납니다.

분명한 알아차림으로 자기 자신이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주고 보호해주고 방어해주는 것이 뭐냐 하면 담마의 역할이라는 거라. 담마가 그런 보호해주고 이끌어주는 역할들을 한다는 거라. 이게 통상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담마의 의미들입니다.

 

그럼 이 의미는 어떻게 해서 왔느냐 하는 것이 스님이 일곱 가지로써 "담마의 기본적인 의미"로써 이렇게 쭉 적어놓았습니다. 이것도 똑같은 담마라는 거라.

 

첫 번째, '당연한 사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간단합니다.

당연하게 일어나는 겁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누구 노래에도 있죠? 여름에는 어쩐다, 겨울에는 춥다 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거 내가 바꿀라 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라. 그러한 것들은 그것이 담마인데, 그걸 거역할려고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흐름을 거역할려고 할 거 같으면 이미 담마를 거스르게 된다는 거라. 그러니까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거라. 겨울은 추우니까 지가 추위를 탈 것 같으면 어떻게 해요? 춥지 않도록 보호해주면 되는 거라. 그게 담마를 아는 거고. 왜 춥나 하고 추위에 대해서 어겨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 그것이 담마인데.

 

두 번째 '본연의 모습' 이라 하는 것은 도덕적인 가치관을 얘기합니다.

거짓말하면 나쁜 놈이고 잘살아 갈 것 같으면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그럽니다. 그것이 담마라는 거라. 담마가 있는 사람하고 없는 사람하고 그런 차이라. 도덕적인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느냐, 없느냐. 그래서 '아담마(Adhamma)' 도덕적인 가치관이 없는 담마가 없는 사람, 그리고 담마를 부수어버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담마라고 그럽니다. “저놈은 아담마야” 나쁜 놈이라는 거라. 범죄자라는 거라.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담마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가치관을 잘 형성해서 살아가라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지켜야 할 신념'은 여러분들은 분명히 압니다.

뭘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살아야 된다? 또 어떻게 수행해야 된다? 그것에 따라서 자기가 이것은 해나가야 되는 부분이다 할 것 같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그걸 해나가야 되는 거라. 다른 걸 다 잃어버리더라도 내가 수행을 하겠다 하면 다른 거 잃어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것만은 지킨다는 거라.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수행하는 걸 내가 약속을 했다, 상황 따라서 못하거든. 그럼 지켜야 할 신념을 갖다가 버려버리는 거라. 담마가 없는 거라.

 

네 번째 '삶의 방법의 가르침'도 담마라고 그렇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부처님이 담마를 설했다 할 때의 그 담마를 얘기하는 겁니다.

 

지금 다 할 수는 없으니까, '법칙'도 담마고, 그리고 그 밑에 '법률·법률의 이념'을 집행하는 그런 것도 담마라고 얘기하고, 그다음에 '현상, 온갖 현상들'을 담마라고 그럽니다.

 

앞에 거는 읽어보면 알 거고, 온갖 현상이 왜 담마인가?

온갖 현상은 뭡니까? '몸, 느낌, 마음, 마음 안팎의 현상' 이것을 우리는 온갖 현상이라고 그럽니다. 그거 말고 있습니까?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거 말고는. 그래서 수행도 어떻게 합니까? 몸에 대해서 관찰하고, 느낌에 대해서 관찰하고, 마음에 대해서 관찰하고, 현상에 대해서 관찰하고 그 네 가지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이라는 것이.

 

몸에 대해서 관찰하고 담마에 대해서 관찰하는 겁니다.

루빠담마(rūpa dhamma) 육체라고 하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껴지는 모든 것을 깨닫는 겁니다. 사실은 이렇게 아는 것,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80% 가까이가 몸을 통해서 깨닫는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그것 중에 하나가 호흡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걸 루빠담마라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웨다나담마(vedanā dhamma)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느낌이나 진동, 그로 인해서 육체에서 오는 좋고 싫은 느낌이나 중립적인 느낌이나 근질근질한 불편함이나, 누가 나를 욕했다 했을 때 기분 나쁜 것들이나 그리고 남한테 아부할 때 그때의 느낌들이나, 아니면 옛날 일 생각했을 때 좋고 불쾌하고 하는 그런 정신적인 느낌들이나 이런 것을 선명하게 깨닫는 것들이 바로 웨다나담마입니다.

 

찟따담마(citta dhamma) 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지금 현재의 마음 상태를 갖다가 알아차리고 깨닫는 것. 여러 가지로 인해서 생겨납니다.

이런저런 일로 해서 생겨나는 것들, 그런 생겨났을 때의 마음들을 깨닫는 것, 어떻게 생겨났던지 그 생겨난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은 마음이 일어난 겁니다. 그 마음이 일어난 마음,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일어난 마음입니다.

그런 것들 내 마음 상태를 깨닫는 것들을 말합니다. 슬픔이나 좌절감들이나 아니면 여러 가지 느낌이나 그런 마음의 상태들, 그리고 탐·진·치가 있는 그런 것과 그런 것이 없는 상태, 그런 마음의 상태들에 내가 포로가 돼 있느냐 아니면 그로부터 벗어나 있느냐 하는 것을 정면으로 그 마음을 보고 깨달아라 하는 것 이것이 찟따담마입니다.

 

나머지 담마(Dhamma)는 뭡니까? 그거 말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소리, 코를 통해 들어오는 냄새, 그다음에 빛이나 대상, 맛, 생각, 욕구, 결심들 이런 것들, 또 상상하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담마라고 그럽니다.

 

이런 것들이 온갖 의미의 담마 입니다. 온갖 것들. 여러분들도 담마라는 의미는 굉장히 많이 있는데 결론은 뭡니까?

담마라는 것은? 내가 알아차릴 때 그 담마는 내 것이 되는 것이지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에서의 그 담마는 내하고는 아무런 연관이 있지 않는 법들이 돼버립니다.

 

자, 그러면 인제 그 담마들을 하나씩 하나씩 알아보도록 합시다이.

그다음에 세 번째 사성제로의 초대라고 돼있는데 다음 시간에는 이것부터 하는데 이 부분은 조금 어려우니까 삼귀의, 여러분들 하고 있는 삼귀의에 대한 것들을 먼저 하고, 조금 쉽게 접근을 해보도록 하고, 아마 사성제 가지고 한 세 시간을 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들 사성제 하나만 똑바르게 알아도 사실은 이 담마스쿨의 의미는 다 하는 겁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