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부처님 가르침의 목적 (삼귀의) (20071108)

담마마-마까 2020. 10. 25. 00:37

* 부처님 가르침의 목적 (삼귀의) (20071108)

https://youtu.be/YE0sOjrpCek

https://youtu.be/HTja453bKmA

 

자, 교재 한번 펴보십시오. 「삼귀의」라고 돼있는 거 있죠? 다른 거는 다 빼먹어도 대문에 해당되는 부분은 해야 될 것 같아서 「사성제」 앞에 넣어 놨습니다. 여러분들 맨 처음 법회 할 때 뭐부터 합니까? 어떤 법회를 하든지 법회 할 때 삼귀의 오계부터 먼저 하죠? 거기에 나와 있듯이 맨 처음에 법회 할 때

 

붓당 사라낭 갓차미. Buddhaṁ saraṇaṁ gacchāmi.

담망 사라낭 갓차미. Dhammaṁ saraṇaṁ gacchāmi.

상강 사라낭 갓차미. Saṅghaṁ saraṇaṁ gacchāmi.

뚜띠얌삐 ... Dutiyampi ...

따띠얌삐 ... Tatiyampi ...

그렇게 이렇게 삼귀(三歸依)의 삼창(三唱)을 먼저 항상 합니다.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를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하는 것을 하는데 '사라낭 갓차미' 라고 하는 것은 '귀의하는 대상으로 나아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귀의 대상에 간다. 귀의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걸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귀의한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원래 '믿는다' '버팀목으로 한다'는 그런 이유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사라낭 갓차미'라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귀의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피난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귀의(歸依)라고 하는 집의 입구로부터 들어가는 것에 인해서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집에 들어갈 때는 집의 입구를 통해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다른 것들 통해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또 증득하고 하는 것은 이 입구, 집의 입구에 해당하는 삼귀의로부터 출발한다 하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는 사람도 그렇게 시작할 뿐 아니라, 이미 부처님 가르침을 스스로 이해하고 불교에 귀의한 사람들도 똑같이 이 삼귀의를 통해서 스스로가 가지는 믿음들이나 스스로가 형성한 확신들을 갖다가, 이 길을 내가 바르게 들어왔다는 것을 갖다가 재확인하는 것들이 바로 이 삼귀의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불교도라고 할 것 같으면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라는 것을 독송하게 돼있습니다. 의지하여 나아간다 할 때의 사라낭 갓차미 라는 것은 의지하는 대상으로써 붓다·담마·상가입니다. 왜 그 대상들을 의지합니까? 왜 그걸 의지해서 나아갑니까? 뭔가 여러분들이 곤란을 당했든지 위험에 처해졌을 때 보호해줄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의지해서 나아가는 겁니다.

자, 그 대상이 붓다·담마·상가인데 여러분들 통상적으로 하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이렇게 할 겁니다. 그렇죠? 별로 의미 없이 합니다. 근데 이것은 누가 강요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삼귀의가 생긴 배경에 대해서 밑에 스님이 쭉 적어놨습니다.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칠차선정이라 해서 일곱 군데에서 일주일씩 선정삼매에 들어서 깨달음에 대한 기쁨을 스스로 즐길 때, 그 네 번째 주에 일어났던 게 뭡니까?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28일 이후부터 일어났던 그 부분을 얘기하는데, 그때 따풋사(Taphussa)와 발리까(Ballika)라고 하는 두 명의 상인이 장사를 하러 가다가 부처님 모습을 보고 그 모습에 환희심이 나서 부처님한테 꿀전병을 공양을 올립니다.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한테 가르침을 받습니다.

태국에서도 스님들이 공양청을 받으러 갔을 때라든지 아니면 아침에 탁발나갔을 때는 법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탁발주면 탁발을 그대로 받고 바로 돌아서옵니다. 통상적으로 보면 그런 것들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인도나 동남아시아 같은 경우에는.

내가 이 공양물 올린다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스님들이 나한테 뭐 좋은 법문을 해줄 것이다, 아니면 나를 보호해줄 것이다, 아니면 나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이런 개념들을 가지지를 않습니다.

 

근데 이 따풋사와 발리까에게는 부처님이 공양을 받고 나서 법문을 해줍니다.

장사를 나가는 분들이기 때문에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된다. 이런 얘기를 쭉 해주는데 거기에 감명을 받은 두 상인이 “아, 지금부터 이제부터는 죽을 때까지 당신을 나의 스승으로 해서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가르침을 내가 살아가는 지침으로 여겨서 받아들여서 살아가겠습니다”. 하는 것을 얘기한 것이 뭐냐 하면 이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입니다. 처음으로 이 말이 불교 역사에서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때만 해도 '상강 사라낭 갓차미' 하는 승려 집단이 생기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것은 성립이 안 됐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더 흐르고 나서 다시 야사의 아버지에 의해 '상강 사라낭 갓차미' 하게 되는데 어쨌든 이때도 부처님은 누가 부처님한테 귀의해라든지 내 가르침을 믿어라 든지 한 적이 없습니다. 이 두 상인들도 똑같이 자기가 마음이 우러나서 ‘아, 참 이분이 내 스승이 될 자격이 있구나. 그리고 이분의 가르침이 참으로 살아가는데 좋은 방편이 되고 좋은 지침서 길잡이가 되겠구’나 해서 "아, 그러면 나는 당신을 스승으로 선생님으로 하겠다. 그리고 당신이 말한 가르침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겠다" 하고 스스로 다짐을 하고 그걸 갖다가 말을 한 경우가 됩니다.

 

그 밑에는 여담같이 써놨는데 지금의 버마 양곤에 있는 쉐다곤 사원이 그때 두 명의 상인이 가져온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봉안했던 탑입니다. 그 속에는 과거불의 유물들도 있고 하다고 그러는데 실재하는 것은 어쨌든 부처님의 머리카락, 일곱 가닥이라고 그러는데 정확히는 저도 모르겠고 어쨌든 그런 머리카락을 봉안해둔 장소입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부처님이 고행을 육 년간 너머 했기 때문에 머리가 많이 버석버석합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도 머리카락을 살짝만 쓰다듬어도 머리카락이 쑥쑥 빠지는 실정입니다. 아무리 수자타의 유미죽을 받아 잡숫고 원기를 회복했다고 하더라도 한 끼의 식사가지고 완전하게 몸을 회복하지는 못했을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거라. 수행자가 가진 게 그것밖에 더 있겠어요? 그래서 그것을 증표로 달라 하고 얘기하니까 그것을 준 것뿐입니다.

 

어쨌든 그것이 지금 버마에 있습니다. 지금 버마의 쉐다곤 사원 주변 5km 이내에는 5층 이상 높이의 건물을 짓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쉐다곤 사원이 안 보이도록 시야를 가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 수 km 변방 주위로는. 영국에도 에펠탑 주변에 에펠탑 높이 이상을 못 짓게 되어있죠? 그와 마찬가질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해마다 왕이든지 아니면 여러 사람들이 자꾸 황금을 붙이고 하니까 황금판이 만들어지고 그렇게 해서 지금도 가보면 아주 휘황찬란합니다. 여기 있는 부처님 머리에 있는 보석들 있죠? 저런 보석들이 탑의 곳곳에 붙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햇볕만 받으면 반짝반짝반짝합니다. 어떨 때는 그런 데에 가면 스스로 경건하게 아, 참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진리에 대한 것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울컥하고 할 때도 있습니다.

버마인들은 이렇게 직접적인 그리고 간접적인 부처님하고 연관을 맺는 일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근데 사실은 '수완부나쓰' 라고 하는 '황금의 땅'은 실제적으로는 정확하게 어딘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태국말로 하면 '수완부나쓰'라고 하는데, '수완나부미' 라고 하는 건데, 태국에서는 이 수완나부미를 지금의 방콕 서쪽에 있는 지역을 수완나부미 라고 해서 '초전법륜지'라고 해서 지금도 굉장히 큰 대탑을 세워놔 놓고 신앙하는 스타일로써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버마에서는 회부 쪽 그쪽에 있던 상인들이 그쪽 지역을 수완나부미라고 했다 해서 그쪽을 상인들이 갔다고 해서 양곤에다가 대탑을 모셔놓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스리랑카 같은 경우는 왜 그러면 그렇게 부처님하고 직접 연관을 시키느냐 하면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각각의 천신들이 왔다가 갑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그러는데, 제석천이 왔을 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했다고 그럽니다.

“나의 가르침이 빛나는 곳은 스리랑카 섬, 그때는 땀바빠니라고 그럽니다. 땀바빠니 라고 하는 섬이다. 그러니까 제석천 당신이 그 조그마한 섬을 잘 지켜주시오 하고 부탁했다고 그럽니다. 그런 것이 인연이 돼서 "스리랑카는 찬란하게 빛나는 섬이다" 하는 얘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어쨌든 그런 민족적인 감정들을 내세워가지고 부처님하고 연관을 맺고는 있습니다.

 

어쨌든 두 명의 상인이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하고 스스로 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역사서에서도 얘기를 하고, 빨리 경전에서도 분명하게 그 얘기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러고 나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야사'가 출가를 하게 됩니다.

삶이 가치가 없다 하고, 의미가 없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옥에 갇힌 자와 같다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리 내가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또 가진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풍요라든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변화되는 속성을 가진 것들이기 때문에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정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 불안정한 것들에 대해서 의미를 크게 두지 못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내가 악다구니 쓰고 살아가는 모습들이 꼭 감옥에 갇힌 꼴과 같다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그래도 불안정한 것들을 찾아가지고 온통 노력들을 하고 있는 것이, 꼭 불타고 있는 것처럼 사람도 불타고 집도 불타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곳으로부터 빠져나와야 되겠다, 도망쳐야 되겠다 하는 생각 때문에 집을 나오게 돼서 부처님 있는 곳으로 가서 출가를 하게 되는데, 부처님이 “이리 오너라” 하고 나서 “이곳에 오면 평온함이 있을 것이다” 하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안정되어지고 안정되어지는 것에 따라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예류과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들 마음 상태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불안정하고 하더라도 안정되는 마음의 상태의 조건만 될 것 같으면 금방 안정돼버립니다. 찰나 간에 바뀌어버립니다. 야사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마음이 안정돼야지만이 법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때 인제 부처님이 사성제에 대한 진리를 얘기하게 됩니다. 사성제의 진리를 듣고 ‘아, 이것이 진짜 나아가야 될 길이고 이것이 진리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서 진리의 문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당연히 마음속에 있는 불길은 꺼져버리는 상태가 됩니다.

 

어쨌든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서 왔을 때 아버지는 단지 아들을 찾는 것들로 인해서 마음의 번뇌가 불타오르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한 사람은 이미 번뇌의 불길이 꺼져버린 상태이고, 한 사람은 아직도 타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부처님이 대기설법으로 "애정을 가지는 그것도 참 고통스러운 것이다. 만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것도 고통이고, 보기 싫은 사람 보는 것도 고통이고, 보고 싶은 사람 못 보는 것도 고통이다. 참 지옥이다. 그런 것은 다 물질적인 것을 쫓아가고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물질적인 쾌락을 쫓는 것도 고통일 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아버지도 마음의 안정을 가져왔을 때 똑같이 사성제에 대한 법문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류과에 이르는데, 똑같은 법문인데, 사성제에 대한 법문인데 이미 예류과에 들어있던 야사라고 하는 아들은 그 법문을 듣고 이미 아라한이 돼버리고 아버지는 예류과에 들게 돼버리면서, 아라한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세속적인 것에 대해서 전혀 욕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세속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일부러 세속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 생활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출가를 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하고 나서 ‘아, 이것이 참 더없는 행복이구나’ 하는 걸 이 야사의 아버지가 이해하고 나서, 그때 한 말이 “나는 오늘부터 죽을 때까지 부처님을 나의 지도자로써 받들면서 나아가겠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야사도 어쨌든 출가한 성자니까 부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아리야 상가 성스러운 제자들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 하는 걸 얘기를 한 것이 "붓당 사라낭 갓차미.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 이런 삼귀의에 귀의하는 말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시발점이 돼서 모든 불교도들은 이 게송을 독송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처음에 초기 때는 이것이 출가의 형식이 되기도 했습니다.

"에히 빅쿠(Ehi bhikkhū)" "이리오너라. 빅쿠들이여" 이렇게 하면 출가가 됐다가, 나중에는 이 삼귀의를 세 번 삼창함으로 인해서 출가가 되게 됩니다.(Tisaraṇa bhikkhū) 그러다가 그런 과정이 지나고 나서는 "우빠삼빠다 빅쿠(Upasampadā bhikkhū)"라고 해서 정식으로 계를 주고 하는 그런 형식을 취하게 되는데, 어쨌든 출가자도 이것으로 인해서 출가의식이 되게 되고, 재가인들도 이것으로 인해서 불교도가 되는 형식을 갖추게 됩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체험하고 확신해서 깨달음에 나아가는 주춧돌 역할, 집으로 칠 거 같으면 문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이 삼귀의라고 하는 겁니다.

 

자, 그럼 불교에서는 그렇게 얘기하는데 기독교나 다른 종교들은 뭐라고 얘기하는가? 1873년 스리랑카에서 목사 네 분하고 한 분의 스님과의 교리논쟁이 있게 됐습니다. 그중에 한 목사가 세 번째 대담자로 나오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분이 불교를 비판하면서 이 삼귀의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의지처로 하는 불·법·승 삼보라고 하는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부처님한테 귀의한다. 부처님은 어떤 분입니까? 이미 2,550년 전에 열반해서 세속적으로 얘기하면 죽은 분이다. 죽은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다음에 담마, 법이라고 하는 것은 나뭇잎에 기록되어진 한갓 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 책을 보호하고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한갓 책이 당신을 보호해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담마에게 귀의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다음에 세 번째 승려들에 대해서 귀의한다는 것은 더욱더 놀라울 따름이다. 승려라고 하는 것은 목사 입장에서 말하면 순 무정뱅이라는 거라.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거라. 아만심만 가득하고, 그런 사회인들보다도 못한 그런 인간들에게 귀의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오직 만물의 창조주인 세상의 수호자 하느님께 귀의하라. 그것이 구원을 받는 길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당연히 다른 종교인들은 그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 앞에 있는 부처님이 뚝딱 여러분들에게 복을 내려주고 기도를 들어주기 위해서 귀의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일부는 그렇게 절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을 겁니다. 근데 그건 잘못된 관행이죠. 조금 전에 목사가 얘기한 것과 똑 마찬가집니다. 2,55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 뭘 해주겠냐는 거라.

부처님은 앞서가신 스승으로서 우리가 존경하는 것뿐입니다. 나도 똑같은 인간으로 부처님과 같은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그 태어난 것에 의해서 내가 이렇게 인간인 것이 고맙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게 해준 분이 누구냐면 부처님이라는 거라.

 

왜? 부처님이 그렇게 길을 가셨다가 잘 살다가 가신 분이기 때문에!

그 길이 진리의 길을 가신 분이기 때문에!

또 스스로 깨달음을 이룬 분이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그와 같은 가야 될 똑같은 몸을 지닌 인간이라는 거라. 그러니까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 그러니까 그런 길을 먼저 가신 스승으로서 존경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고,

 

담마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지침입니다.

무슨 스님이 여러분들 가르치는 여기 있는 교재, 그리고 저기 있는 책들 이것을 담마라고 하는 것이 않습니다. 살아가는 지침입니다.

그 속에 있는 글자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이 얼마만큼 내가 살아가는 데 유익하게 작용을 하고 바른 나침반 역할을 해서 이끌어주느냐는 거라. 그렇게 이끌어주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존중하고 의지한다는 거라.

 

그리고 상가라고 하는 것은 이 목사님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상가에는 삼무띠 상가(Sammuti-saṅgha)가 있고 아리야 상가(Ariya-saṅgha)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가를 얘기할 때는 삼무띠 상가, 사방상가라는 개념을 씁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상가라는 것은 아리야 상가입니다. 성인, 깨달음에 이르신 부처님의 제자들입니다. 깨달음에 이르신 분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지혜롭고 한 점 흐트러짐이 없고 잘못된 행위들을 하지 않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똑같은 인간으로서 부처님 말씀을 듣고 또 부처님을 존경했고 그런 분들이 그런 성인이 됐으니까, 나는 아직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까 그런 분들을 존경하고 나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삼귀의라고 하는 세 가지 귀의할 대상이 있다는 것들입니다.

 

어쨌든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이 신의 명령에 의해서 행해집니다. 그래서 유일신 개념이죠.

근데 조금 전에 이귀의(二歸依)와 삼귀의(三歸依)를 얘기한 것들을 보더라도 부처님이 내한테 귀의해라. 내말을 믿어라 한 적이 없다는 거라. 본인 스스로 이해하고 확신해가지고 우러나서 나온 말이 이 "붓당, 담망, 상강 사라낭 갓차미" 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길을 걸어가신 분이고, 이것이 바르게 살아가는 가르침이고, 이 진리를 체험하신 분이 이런 사람들이다 하는 것들을 이해해서 그 세 가지 대상에게 귀의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귀의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아파라 빳체이야' 라고 하는 빨리어가 있습니다.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강제당하지 않는다' 하는 뜻입니다. 불교는 어떤 경우에서도 외부적인 강요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강제 당해가지고는 불교가 성립이 안됩니다.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면 안된다는 겁니다. 아, 내가 이것이 해탈에 이르는 길이구나. 해탈을 바라는 열의가 실제적으로 현실화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때 내가 하는 행위가 이 삼귀의, 그런 행위의 초입이 삼귀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확신과 존경과 친애라고 하는 세 가지 마음들이 생겨날 때 삼귀의는 성립됩니다.

빠사다(pasāda) 확신이라는 하는 것. 이 삼보에 대한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이 삼보로 인해서 내 마음이 깨끗해진다는 그런 명확한 이해가 있게 될 때 빠사다 확신이 생겨나가게 됩니다.

이 확신으로 인해서 '꼬라바(가라와 gārava)' 라고 그럽니다. 존경이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런 확신에 의해서 아, 당신이 참 내가 존경할 사람이구나. 이 담마도 내가 참 존경할 대상이다. 그리고 상가도 존경할 대상이구나 하는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존경은 절대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존경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확신이 먼저 서고 나면 존경하는 것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대상에 대해서 인식이 더욱더 깊어지면서, 스스로 마음에서 외경스럽고 존중하게 되고 숭배할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이 존경입니다.

 

이 존경으로 인해서 내 스스로 살아가는 패턴이 바뀌게 될 때, 전에는 이렇게 이렇게 살아가다가, 내가 삼보에 대한 확신이 서고 그로 인해서 행동이나 실천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존경심이 일어나게 되고, 생활패턴이 또 바뀌어나가고 그런 것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이 뭐냐 하면 '뻬마(pema)' 라고 하는 것으로 친애의 마음이 일어나집니다. 인제는 참 친근한 느낌이 들어가게 됩니다. 친근한 느낌이 들면 마음은 활기를 띱니다. 열의를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더욱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 내가 더욱더 잘살아야 되겠다. 내가 더욱더 삼보에 대해서 삼보를 따르고 나아가야 되겠다 하는 것이 더욱더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삼보의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그래서 삼귀의, 삼보에 의지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끊임없이 실천하는 수행을 해나간다는 의미와 마찬가집니다.

살아가다 보면 장애를 만나게 됩니다. 장애를 만나도 내가 끊임없는 부단한 노력으로써 그것을 탈피해나가는 것들, 그런 것들이 곧 이 삼귀의로부터 출발하는 형태들을 띠게 돼있습니다.

수행을 해나갈 때 대상을 만났을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보통 뭐라고 그러느냐면 “나는 이 몸과 마음을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게 맡겨버립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항 앗따낭 아 붓닷사-미 앗따미 담맛사"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신체와 마음과 생명을 삼보에 맡겨버린다는 겁니다. 이기적인 집착이나 「나」라고 하는 개념을 다 버려버리고, 그래서 수행에 장애가 제거되고, 해탈에 이르는 것에 목표에 바르게 나아가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그냥 이 삼보에게 맡겨버린다는 거라. 삼보의 뜻대로 해나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마음까지 들게 되는 것이 이 삼귀의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의미들을 여러분들이 잘 알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왜 우리가 귀의할려고 하는가? 그리고 그런 귀의할려고 하는 것은 마음에 동요가 있기 때문에 귀의하는 겁니다. 마음에 동요를 없애주는 것들이 이 삼보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의 보호수단입니다. 마음의 평정을 얻기 위한 인도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들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은 그 어느 누가 부처님이 뚝딱 해주는 것도 아니고, 담마나 상가가 뚝딱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의 살아가는 행동패턴들을 바꾸어 주는 것으로써 만들어나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미묘한 기능들을 잘 이해를 하고 해서 나쁜 방향으로 이끄는 자기의 행동들을 갖다가 바꾸어나가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을 찾아나가는 것, 그것이 부처님이 걸어나가는 길이고, 담마가 가르치는 것이고, 그 길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른 분들이 상가라는 거라. 그래서 나도 그와 같이 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삼귀의라고 하는 것은 삼보라고 하는 세 가지 대상 중에서 실제적인 것은 담마죠! 담마가 출발점입니다.

담마를 잘 파악한다고 할 것 같으면 틀림없이 자기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납니다. 안전한 상태가 됩니다. 그것을 잘 파악한다고 할 것 같으면 목표에 반드시 도달합니다. 그 담마는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실천의 방법을 체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 방법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달린 것뿐입니다.

 

그렇게 효과적으로 실천하신 분이 부처님이고 상가라는 뜻입니다. 그 수행의 길을 잘 이해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분도, 이미 부처님은 돌아가신지 오래되었으니까 도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상가일 뿐이라는 거라. 상가라는 거라. 그 정통한 사람들이 상가라는 거라. 그래서 우리는 붓다・담마・상가가 나의 친구와 같은 일단으로써 수행의 길을 이끌어주는 대상이다 하는 거라.

 

삼보를 그렇게 이해를 해서 다음에 삼귀의 할 때는 그런 해탈을 바라는 열의가 가득한 방향으로 삼귀의 행위를 스스로가 이끌어나가야 됩니다.

어떤 면에서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소극적으로 매달리고 소극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가 변화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보통 삼귀의 방법은 동남아시아 같은 경우에는 매일 합니다. 매일!

오늘 만약에 절에 갔다. 일단 스님을 만나면 맨 먼저 하는 것이 뭐냐면 삼귀의입니다. 삼귀의 삼창! 아침에 했다 그리고 오후에 만약에 다른 법회에 갔다. 그러면 오후에 또 해. 저녁에 다른 법회가 또 있다 그러면 저녁에 또 하는 거라. 집에서도 꼭 마찬가집니다. 집에서도 삼귀의 오계는 항상 자기가 스스로 독송하면서 그걸 갖다가 가슴속에 자꾸 넣도록 해야 됩니다.

 

그럴려면 붓다와 담마와 상가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가 잘 정립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들 머릿속에 착 떠오릅니까? 담마가 어떤 것입니까? 떠올라집니까? 상가? 상가하면 너무 포괄적이다 그러면 사리불과 목련 존자 어떤 분이라? 이렇게 뚜렷하게 이미지가 떠올라져야만이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할 때 그러한 감정들과 확신들을 담아서 얘기할 수가 있다는 거라. 담망 사라낭 갓차미도 마찬가지고, 상강 사라낭 갓차미도 마찬가지고, 실천적인 것들이 될 수 있도록 자꾸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사성제 부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