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게송으로 배우는 부처님이야기(구두쇠 이야기) (20071018)

담마마-마까 2020. 10. 25. 00:29

* 게송으로 배우는 부처님이야기(구두쇠 이야기) (20071018)

https://youtu.be/YPGcxiKI5bc

https://youtu.be/k3qW0ZK7Zp8

 

자, 시작합시다. 이번 시간에는, 「스스로 확인하라」 하는 부분까지는 다 끝났습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스스로 확인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부처님 말씀이 어떤 건가 하는 것을 가지고 해나갈 겁니다. 이 게송이 끝나고 나면 근본불교의 단락 단락 하나씩 들어가지게 됩니다.

 

여러분들 경전들 많이 읽어봤죠? 경전들을 많이는 읽어봤는데 ‘아, 이게 부처님이 말한 진짜 경전이구나’ 하고 느낀 부분이 있습니까?

스님은 한국에서 출가를 해도 한국에서 얼마 못 있고 동남아 쪽으로 나갔던 이유가 경을 아무리 읽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를 않았어요. 뜬구름 잡는다고 그러죠? 외우기는 달달달달 외우고 할 수는 있는데, 그게 진짜 부처님이 말했다는 확신도 가지지 못할 뿐아니라, 이게 부처님이 말한 것인가 하는 것들에 대한 것들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경을 읽어도 그냥 경을 읽는 것이지 부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들 여기 뭐하러 왔습니까? 경전 독송하러 왔습니까? 경전 독송하러 온 사람들도 있겠지. 근데 근본적으로 여기 와서 담마스쿨을 배우는 이유가 뭡니까? 부처님 말씀을 듣는 겁니다. 부처님 말씀을 가슴 깊이 ‘아, 이게 부처님이 말한 진리구나’ 하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아, 그래 저게 바른길이면 나도 그리 가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그렇게 따라가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돼야 되는 것인데 아무리 경전을 소리내서 읽든 달달달 외우든 하더라도 그게 안 와 닿는 거라. 그래서 ‘아, 이건 아니다’ 싶어가지고 밖으로 나가게 된 계기가 된 겁니다.

 

과연 여러분들도 그럴까 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부처님 말씀을, 지금 이렇게 많은 책이 있지만 책을 저렇게 읽고, 또 스님 법문을 들어도 ‘아, 참 소중한 말씀이구나’ 하면서 그걸 따라가고 실천하는 표본으로 삼을 수 있느냐는 거라. 그것이 안 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지금 이 자리에서 담마스쿨을 배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이냐 하는 걸 단편적으로 스님이 그 교제에다가 나타내었습니다. 원래 시간이 허락되면 두 개를 할라고 했는데 분량이 너무 많아져버려서 한 개만 해버렸어요. 하나는 생략을 해버렸는데, 한번 쭉 보십시오. "이게 부처님 말씀이구나. 여기서 우리가 배울 것이 뭔가" 하는 것들만 알면 됩니다.

 

구두쇠가 구두쇠 짓을 하다가 결국은 자기 아들을 죽여버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인도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처음에 애가 태어나면 인도는 더운 나라이기 때문에 어릴 때에는, 물론 어른이 돼서도 그러지만 어릴 때는 눈 밑에다 새까만 걸 칠을 해줍니다. 먹을 발라줍니다.

그래서 TV나 이런 데 보면 가난한 집 애들은 요걸 별로 못 봐요. 칠하는 게 워낙 비싸니까. 근데 부잣집 애들은 보면 요즘 투수들 눈 밑에 시커먼 거 칠해놓은 것처럼 칠해놓은 것들을 TV에서 많이 봅니다.

기본적으로 하는 것들이 두껍게 칠하기도 하고 얇게 칠하기도 하는데 어쨌든 칠을 합니다. 더위를 피해주는 부분이고 또 병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그런 어떤 신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칠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일정한 나이가 될 것 같으면 귀걸이를 해주게 돼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습니다. 근데 이게 쉽게 볼 거 같은데도 사실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그럽니다. 귀 뚫는 게. 우리나라에서도 요즘 남자들 귀 뚫죠? 왜 뚫는다고 그럽니까? 잘난체 하려고? 건강 때문에 하는 경우들이 많다고 그럽니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혈액을 원활하게 순환시켜주고, 예를 들면 나쁜 생각들이나 나쁜 기운들이 있으면 빠져나가게 해주는 역할도 해주고 그렇다고 그럽니다.

 

실제 그런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반드시 인도에는 그 두 가지를 합니다. 애가 태어나면 가난한 집이든 부자든 어쨌든 이 두 가지는 해야 되는 거라. 근데 눈 밑에 칠하는 거는 매일 매일 칠해야 하니까 돈 없으면 못한다고. 근데 귀걸이 이거는 어떻게 돼? 한번 달고 나면 뭐 계속, 요즘 같은 경우는 자꾸 바꿔주겠지만 그리 안 하고 한번 달아놓으면 그냥 합니다. 근데 이 한번 달아주는 걸 보통 금을 가지고 해줍니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는 애들이 태어나면 금으로 돌반지 하잖아요? 요즘은 많이 바뀌어가지고 돈을 주기도 하고 그렇다고 하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전부 그냥 금으로 다 해줬습니다. 꼭 그와 마찬가지로 금이 많이 들고 적게 들고 하는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다 그렇게 해주게됩니다.

 

근데 이 구두쇠 아버지는 그것이 아까워가지고, 이 구두쇠는 어떤 구두쇠냐면 한번 들어왔다 그러면 일절 나가는 법이 없어. 한푼이라도 나가는 법이 없어. 그냥 차곡차곡 쌓아두는 스타일이라. 이렇게 나가는 법이 없으니까 이거 할려면 어디 가서 사와야 될 거 아니라. 돈이 나가야 되는데 돈이 나가는 것이 아까우니까 어떻게 하겠어요? 양철을 가지고 두드려가지고 귀걸이를 맞춰놓았어. 양철이야 뭐 어디에든 있을 거 아니라. 그래가지고 귀걸이를 만들어주었는데, 아주 조잡하게 만들어지겠죠?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한테 놀림감이 되는 거라. 그래서 이름이, 거기 뭐라고 돼있어요? '양철조각을 쇠망치로 두들겨서 단지 만든 것뿐이다' 해가지고 '맛타꾼달리'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거죠.

 

어쨌든 그렇게 해서라도 달아줬으니까 그렇게만 하면 되는데, 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 가지들이 생겨나거든. 돈 없으면 교육 안시켜도 누가 뭐라 하지 않습니다. 근데 병이 들어놓으면 일단은 치료를 해줘야 된단 말이라. 근데 이 구두쇠는 그것도 아깝거든. 그러니까 각 의사별로 찾아가서 사람이 이렇게 아플 때는 어떻게 처방합니까? 물어봐서 귀동냥하고, 저기 가서 또 귀동냥하고 해가지고, 자기가 약재를 사면 그것도 또 돈 드니까 대충 맞는 것,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 풀이나 이런 것 뽑아와가지고 자기가 직접 다려가지고 주는 거라.

그게 듣습니까? 당연히 애가 죽게 돼있는 거죠. 그래서 죽음에 이르러가지고는 아이고 이러다가 우리 애를 죽이겠다 싶어가지고 그때사 병원에 데리고 가니까 어떻게 돼요? 병원에서는 요즘도 그럽니다. 병원에서 자기가 고칠 수 있을 것 같으면 고쳐주는데 고치기 힘들면 다른데 가보라고 그럽니다. 큰 병원에 가보라고 그럽니다. 안 그러면 큰 병원에 가더라도 내가 이거 죽여도 내 책임 없다면서 서약서 써라 그럽니다. 다 책임회피하게 돼있다는 거라.

 

인도에서도 병원에 가니까 이미 악화되어갖고 살릴 수 있는 희망이 없다 싶으니까 “난 치료 못한다.” 아무데도 안 받아 주니까 어떻게 돼요? 애는 결국 죽어야되는 거지. 그래가지고 집에 애를 데려왔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놈을 집에 놔두었다가는, 애가 죽고나면 어떻게 해요? 사람들이 애 죽었다 해가지고 문상 올 거 아니라. 문상 오면 사람들한테 밥도 해줘야 되고 돈도 써야 되는 거고, 그리고 내가 재산이 얼마 있는 것도 들킬 것 같고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애를 밖에다가 내놔버리는 거라.

 

기가 찹니까? 그건 아직 인도를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인도라는 데는 사람이 죽는다 해가지고 부조금 내는 법이 없습니다. 외국 애들도 우리나라를 보고 가장 놀라는 부분이 뭐냐 하면, 우리 같으면 큰 게 뭡니까? 사람이 죽었을 때, 또 태어났을 때, 그다음에 결혼식 할 때, 보통 보면 태어났을 때는 돈 얼마 안 든다 하겠지만, 결혼할 때나 사람 죽고 나면 돈 엄청 들어가는 거라. 이해를 못 한다고 그럽니다. 뭐에 돈이 그렇게 드느냐는 거라. 외국에도 사람이 죽고 나면 우리같이 그렇게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바로 화장을 해버리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묘지에다가 묻어버린단 말이라. 인도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그 화장하는 데는 돈이 들지만은 그 사람들 와가지고 우리 같이 “아이고” 하면서 돈 내놔놓고 이러는 법이 없거든.

 

당연히 죽은 사람들한테 예를 표해야 된다는 생각들은 가지고 있기때문에, 사람이 올 거 같으면 주인 입장에서는 돈이 들어가게 돼있다는 거라. 돈을 받는 게 아니고, 거두는 게 아니고. 외국도 꼭 마찬가지 형태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들어오는 돈이 없기 때문에 최대한으로 간소하게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사람이 죽고 나도 돈이 얼마 안 들어요. 결혼식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근데 우리나라는 어떻게 보면 참 잘못된 것들 중에 하난데 너무 과다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돈이 나갈 거 같으니까, 애를 집에서 죽도록 놔두지 못하고 밖에다 놔두게 되는 거라. 만약에 그렇게 해가지고 애가 죽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애가 죽을 때 지 엄마 아빠에게 원망 안 하고 죽겠습니까? 여러분들 같으면 원망 안 하고 죽을 거 같애요?

 

부처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야, 저놈이 저래 죽어가지고는 틀림없이 좋은데 못 태어난다. 저놈을 인제 좀 더 좋은데 태어나도록 해야 되겠다 싶어가지고 애 있는 데 앞으로 갑니다. 사위성인데 아침에 새벽에 탁발하러 갈 때 일부러 애 있는 쪽으로 걸어갑니다. 다른 대중스님들을 데리고. 애는 길가에 누워있었는데 부처님이 쭉 지나가니까 새벽에 광명이 훤하게 비치거든. 근데 돌아서 누워있으니까 부처님을 보지는 못하는 거지. 요쪽에 빛이 훤하게 있으니까, 애가 빛이 날 거라고는 전혀 없는데 빛이 나니까 이상하다 해가지고 부처님 있는 쪽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돌아보니까 부처님이 온화하게 거기 서가지고 계시거든.

 

자,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 '당장 오늘 아침에 내가 죽는다. 그래가지고 마음에 원한심이 가득 쌓여있는 상태에서 그런 아주 위대한 성인이 나타났다.' 그렇게 가정을 해봅시다. 그럼 여러분들은 그 성인을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얘기해 봐요. 솔직히. (대답) 예? 원망심이 가득 찬 상태에서 성인을 볼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조금 전까지는 원망심을 일으켰는지는 몰라도 원망심이 어디 갔는지도 모르고 그냥 그 성인의 진짜 온화한 모습에 그냥 ‘아, 참 좋구나’ 하고 볼 수 있겠느냐는 말이라.

후자라는 거라.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마음이라는 거는 그렇게 바뀌는 겁니다. 아무리 원한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원한심이 끝까지 가버릴 것 같으면 뭐 끝까지 갈 수도 있겠지. 그것도 변해나가면서 나가겠지만, 어쨌든 다른 조건이 생겨났으니까 어떻게 돼요?

 

애 마음은 조금 전에 원망을 가지고 하는 마음은 언제 사라져버리고, 그냥 부처님에 대해서, 원만한 부처님에 대해서 참 깨끗한 마음으로 ‘아, 부처님 참 훌륭하신 분이구나’ 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뵙는다는 거라. 아주 욕심 없고, 애가 죽음 직전에 무슨 욕심을 가질게 있어요? 그러고 나서 부처님 모습을 탁 보니까 참 환희심이 나거든. 그러니까 ‘아, 참 저런 부처님한테 내가 살아있을 때 좀 잘해줄걸. 공양이라도 한 끼 올리고 이랬으면 얼마나 좋겠나? 아, 내가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해서 참 미안하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런 부처님을 지극정성으로 공경을 하게 됩니다. 물론 잘 움직이지도 못하니까 그런 예를 표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에서는 그런 공경하는 마음들이 무럭무럭 차게 된다는 겁니다. 마음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으면 입으로 그런 것들이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입으로 “부처님, 내가 부처님한테 귀의하겠습니다. 담마에 귀의하겠습니다. 상가에 귀의하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런 말을 하면서 진짜 내가 삼보에 의지한다는 생각 때문에 몸과 마음에서 기쁨이 가득 차오르게 됩니다.

부처님은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가서 모습만 드러낸 것뿐입니다. 그러고 나서 부처님은 뭐라 하고 갔습니까? “그래 그 기쁜 마음으로 충분하다. 인제 니는 니가 해야 할 일을 충분히 다 했다.” 하면서 가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애는 죽었거든. 죽고 나서 33천에 두 번째 천(天), 이 두 번째 천은 삭까천이라고 해서 보통 여러분들이 제석천이라고 알고 있는 겁니다. 제석천은 33천을 다 통솔하는 그런 곳입니다. 어쨌든 거기에 제석천의 아들로 태어나게 됩니다.

 

왜 그럼 이게 가능해지는가? 죽음 직전에 일으키는 생각이 다음 식을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원인·결과, 원인·결과로 이어집니다. 삶과 죽음이 여기 경계선에 있습니다. 여기서 원인이 지어진 건 어떻게 됩니까? 결과물을 분명히 받게 됩니다. 지은 행위에 대한 결과는 반드시 받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순간에 일으키는 생각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받게 된다는 거라.

죽음 직전에 일으키는 생각이 그래서 그만큼 소중하다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70%가 다음생을 좌지우지 한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그걸 단언을 해놨습니다. 왜 애가 죽게 됐을 때 부처님이 그 앞에 갔겠습니까? 요 생각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죽음 직전에 원망하는 마음이 잔뜩 들을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게 원인이 돼서 다음 결과 받을 때는 그런 몸을 받게 돼있다는 거라. 그럼 죽음 직전에, 전에야 어떻게 살았든지 간에 일단은 그건 나중에 일로 두고, 죽음 직전에 일으키는 생각이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로서 죽음을 맞았다. 그럼 그게 원인이 돼서 그다음 결과 받는 거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받게 돼있다는 거라.

 

아주 간단한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적으로 봤을 때는 33천 천상계에 태어났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문제가 아니라. 천상계가 어떤 겁니까? 기쁨으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기쁨을 일으켜서 죽었으니까 기쁨을 일으키는 세상에 태어나게 돼있다는 겁니다.

우리 노보살님도 있지만 노보살님도 꼭 마찬가집니다이. 마지막 순간에 일으키는 생각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되도록 사람들이 죽고 나서 스님 초청하지 말고, 그건 별로 소용도 없습니다. 죽기 직전에 스님들을 반드시 초청을 해야 됩니다.

 

스님들이 가서 뭐합니까? 마하 사띠빳타나 사념처에 대한 경전을 독송해주고, 안 그러면 누구든지 죽음을 맞게 돼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 태어나고 죽는 것이 사라졌을 때 그게 진짜 고요한 즐거움이다. 하는 그런 경전들을 독송 해준다는 거라. '부디 잘 살아나시오. 건강하게 태어나시오. 건강하게 일어나시오.' 이런 법문 하러 가는 게 아닙니다. 순리를 거스르려고 가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거기에 또 그런 법을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어쨌든 그래서 부처님도 마지막 말이 “그 기쁨의 마음만으로 충분하다. 니가 할 일은 충분히 다하였다”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애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 아버지는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화장하고 나서 ‘내가 참 진짜 나쁜 놈이다’하는 생각이 들 거 아니라. 애가 있을 때는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애가 죽고 나선 그 마음이 전에 마음같이 그대로 있겠어요? 그러니까 매일 같이 죽은 아이 무덤에 가가지고 “아이고, 내 아들아. 내가 잘못했다. 아이고, 돌아와 돌아와도.” 울고불고 합니다. 천상에 있는 아들이 가만히 보니까 자기 아버지가 불쌍해 죽겠거든. 그래서 그 앞에 내려갑니다. 그래서 울고 있는 아버지 옆에서 같이 우는 거라. 아버지가 울다 울다 옆에 보니까, 젊은이가 자기 아들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참 잘 차려입은 젊은이가 울고 있거든. “젊은이는 왜 울고 있소?”

 

나는 내가 마차를 타고 다니는데 마차의 바퀴가 빠져버렸다. 그래서 그 마차바퀴에 끼울 둥근 것을 구하는데 나는 그것을 못 구해가지고 나는 울고 있다.

아버지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 아들하고도 비슷하게 생겼고 평생 내가 아들한테 해준 것이 없으니까 저 아이한테나 내가 소원을 들어주어야 되겠다. “그래 니가 원하는 둥근 것이 얼마만한 크기면 되냐? 이마만한 크기면 되느냐? 아니면 요마만한 크기면 되느냐?

그 젊은이가 그럽니다. 내가 원하는 둥근 구슬이라는 것은 그런 작은 구슬이 아닙니다. 저기 보이는 저 해와 달이라고 하는 둥근 것들입니다. 저 해와 달을 따다 주시오. 그러면 나는 그걸 내 마차에 달고 맘대로 다닐 겁니다.

아버지가 생각하니까 미친놈이거든. 어떻게 태양과 달을 따가지고 바퀴구슬로 만들어 동그랗게 되어가지고 마차에 끼워지느냐는 거라. 당연히 생각하기를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을려고 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그래서 참 너 어리석구나. 그럼 아저씨는 와 울고 있는데요? 아들이 죽어서 슬퍼서 울고 있다.

 

그 밑에 한번 보십시오. “아저씨가 훨씬 바보다.”

태양과 달이라고 하는 것은 내 눈에 보입니다. 내가 이쪽으로 움직이든 저쪽으로 움직이든, 이쪽으로 가면 이쪽에서 보이고 저쪽으로 가면 저쪽에서 보인다는 거라. 있는 것이라는 거라 눈에 보인다는 것은. 있는 것을 구할려고 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거냐? 아니면 죽은 아들이 이쪽 간다고 보여? 아니면 저쪽 간다고 보여? 없는 것을 구할려고 하는 당신이 더 어리석은 거냐? 어떤 것이 더 어리석은 겁니까? 그때사 아버지가 퍼뜩 정신이 듭니다. 왜 이 사실을 몰랐느냐는 거라. 그때사 이 아버지가 아들이 죽었다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부처님도 그런 일화가 많죠? 죽은 아들 살려내라고 울며불며 반미치광이가 돼있는 여인한테 사람이 죽지 않는 집에 가서 겨자씨를 구해오너라. 그러면 너 아들 살려내 줄게. 죽지 않는 집이 어딨어요? 그런 땅이 어딨어요? 이 세상에. 언젠가는 사람이 죽게 돼있고,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죽게 돼있는 거지.

큰 항아리를 탁 쳐가지고 항아리 속에 있던 돌이 물속으로 쏙 들어갔다. 돌아 떠올라라. 돌아 떠올라라 한다고 그게 떠올라져요? 부처님이 그런 상태에 이르렀던 사람들에게 했던 방법도 꼭 마찬가집니다. 안 되는 걸 왜 구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 사실을 탁 깨우쳐줘야 만이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거라. 그래요. 내가 니 아들 살려줄게요. 하면서 아들을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진리라는 것도 그런 것도 아닌 거고. 사실을 사실대로 일러주는 거라. 그걸 사람들이 아니라고 자꾸 부정하다 보니까 그게 고통스러운 거라. 난 안 죽을 것이라고 하다 보니까 어떻게 돼? 어쩔 수 없이 죽게 돼있는 건데 안 죽을라고 발버둥 치니까 힘드는 거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거라. 그걸 놓아버리고 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버린다는 거라. 그래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나서는, 그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은 경전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불길에 싸여있는 짚단더미가 확 타오르고 있는데, 누군가가 짚단더미에 물을 확 끼얹어버릴 것 같으면 그 활활 타고 있던 짚단이 일순간에 착 꺼져버린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짚단일 거 같으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는 거라. 아주 시원한 기분이 든다는 거라.

 

수행을 하다가 어느 정도 돼서 그 사실을, 무상의 진리만 탁 깨닫고 나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아십니까? 그냥 뒤통수 여기 있죠? 구멍이 뚫려가지고 바람이 확 앞으로 통하듯이 아주 시원한 느낌이 듭니다. 진리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그와 마찬가집니다.

 

조금 전에 고통스러운 것들은 어느 사이에 다 날아가 버리고 아주 시원한 그런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때야 비로소 이 천인에게 “아, 천상세계에 있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자기 아들이 부탁하는 거 인제부터라도 "좋은 일 하고 사시오. 좋은 일 할려면 계도 지키고, 도덕적인 행위도 하고, 구두쇠같이 그리 살지 말고 남한테 베풀기도 하고, 또 부처님한테 공양도 올리고, 또 부처님한테 가서 법도 물어서 듣고, 의문나는 것들도 질문도 하고 이렇게 사시오" 하고 얘길 하니까 “예! 내가 그리해야 되는데 참 잘못했다.” 그래서 아딘나뿝바까라고 하는 자기 아버지가 그때사 부처님한테 귀의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공양청을 해가지고, 부처님이 자기 아버지 아딘나뿝바까한테 공양을 받으러 갑니다. 부처님은 공양청을 가면 공양을 다 잡숫고 나면 반드시 법을 설합니다. 공양청을 받으러 갔을 때 거기에 모여든 사람들은 꼭 두 부류가 있습니다. 어떤 부류인지 아십니까? 참 부처님 법이 소중해가지고 부처님 법을 들을려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고,

또 한 부류는 저게 진짜 좋은 사람인가 아닌가, 쉽게 말하면 의심이 나가지고 그걸 확인하러 오는 부류들, 조금이라도 험이 보인다고 그러면 벌떼같이 달려들어가지고 이거 아니다, 틀렸다 하면서 따질려고 오는 사람, 그래서 항상 공양청엔 그런 두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다고 그럽니다.

 

지금도 꼭 마찬가집니다. 공양청만이 아니고, 어떤 경우도 그렇다고 그럽니다. 예를 들면 보스리랑카에서 보통 경전을 많이 배웁니다. 거기에도 꼭 그렇다고 그럽니다. 불교도만 올 거 같죠? 불교 경전 배우는 데니까. 절대 안 그렇다고 그럽니다. 불교외 종교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고 그럽니다. 그 사람들이 뭣 때문에 오는지 아십니까? 부처님 말씀을 배워야 이게 흠이 있는지 없는지 알 거 아니라. 그거 잡을라고 온다는 거라. 그래가지고 그중에서 필요한 것만, 쉽게 말하면 일정 부분 마음의 문을 요마만큼 닫아놓은 상태에서 자기의 종교적인 신념은 절대 바꾸지 않는 상태에서 그걸 받아들이니까 이건 항상 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피상적으로 받아들이더라도 어쨌든 좋은 부분은 자기가 취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아예 배척해버리고, 그래서 그런 학문적인 부분만 쭉 따지다 보니까 어떻게 돼요? 가슴 깊이 와 닿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또 하나의 부분은 뭐냐면 그렇게 알아놔 놓으니까 그걸 가지고 대조를 하는 거라. 부처님은 요렇게 요렇게 살고 이렇게 했는데 스님들은 왜 이거하고 다른 것이냐? 그럼 니는 틀렸다 하고 얘기해버리고, 이렇게 돼버리는 현상들을 가져와지는 거라. 그러니까 지금 스리랑카에는 그게 굉장히 문제가 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스리랑카에서는 이걸 전도사라고 그럽니다. 이 전도사를 공부를 시켜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한참 논쟁이 붙고 그렇다고 그럽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목구멍이 포도청이니까 어쩔 수 없이 받아주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 그것도 곧 정리가 된다고 하는 얘기들이 있는데.

 

어쨌든 부처님 공양청에 가면 항상 그렇게 두 부류가 온다고 그럽니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가 물어봅니다. “부처님! 부처님! 우리 애는 평생 부처님한테 한 번도 공양을 올리지도 않았고, 부처님한테 존경을 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계를 지킨 적도 없었고, 더더구나 부처님 법을 들은 것도 없었고, 수행한 것도 없었고, 그런데 어떻게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부처님한테 귀의했다 해가지고 천상에 태어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부처님이 그럽니다. 니가 다 안 봤냐? 니가 봤지 않느냐? 그걸 왜 내한테 물어보느냐? 하고 얘기합니다. 그때사 그 아버지가 깜짝 놀랍니다. 부처님이 자기 아들이 죽고 나서 자기 아들이 천상세계에서 내려와서 했던 상황들을 훤히 알고 있으니까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그걸 잘 아십니까?

그래서 부처님이 그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서 그 천인을 다시 내려오게 해서 정확하게 얘기를 하게 합니다. 그때사 사람들이 어째서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일으키는 생각으로 인해서 천상세계에 태어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왜? 마음이 주인이기 때문에! 사람이 일으키는 생각은 행동을 일으키게 합니다. 모든 행동의 원인은 마음에 있습니다. 내가 착한 일을 하든지 나쁜 일을 하든지 그 행동에 앞서는 것은 마음이라는 거라. 근데 그 마음하고 행동은 결코 분리되질 않는다는 거라.

저기 햇볕 내리쬐고 있는데 여러분들 걸어가 보십시오. 걸어가면 그림자가 딱 비칩니다. 해 구속에 따라서. 여러분들 그림자하고 여러분들 몸하고 아무리 분리를 시키려 해도 분리를 못 시켜. 해가 있는 상태내에서는.

그림자가 사람 몸을 따르듯이 마음에 인해서 일으키는 행위들은 분리시킬 수가 없다는 거라. 내가 좋은 마음을 가진 것으로 인해서 좋은 결과가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분리시킬 수 없다는 거라. 이거 자체를. 그 사실을 알아라는 거라. 그 얘기를 듣고 이 아딘나뿝바까는 수다원의 성자에 이르게 됩니다.

 

부처님의 이 말을 뭡니까? 내가 좋은 일이 일어났든 아니면 나쁜 일이 일어났든 그 모든 배후에는 뭐가 있다는 겁니까? 나라고 하는 내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내가 일으키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일으킨 게 아니다.

연극을 할 때 배우가 있고, 연출가가 있고, 극작가가 있고 이렇게 하지만 우리네 인생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는 거라. 배우도 나고, 극작가도 나고, 연출도 내가 하고 내가 다 한다는 거라. 내 마음이!

그로 인해서 내가 행위를 짓게 되고, 말도 하게 되고, 어떤 것이든 마음이 주인이라는 거라.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거라. 그 마음을 어떤 마음을 내느냐에 따라서 좋은 행위 좋은 결과들을 받기도 하고, 나쁜 결과들을 받기도 한다는 거라.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거라. 아주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불교는 알기 쉽고 밝은 것이다 하는 거라. 다른 어떤 것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그 밑에 부분이,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갖다가 담마(Dhamma)라고 그럽니다. 담마라는 것이 뭐냐 하면 자연적인 법칙이라는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한 얘기를 스님이 쭉 적어놓았습니다.

이 경전을 통해가지고 여러분들은 어떤 걸 느낍니까? 함부로 마음 써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들을, 내가 마음 쓰는 것에 따라서 결과가 이렇게 차이가 나고 다르게 나버릴 거 같으면, 어떻게 볼 거 같으면 굉장히 조심스럽게 마음을 일으켜서 행위들이 일어나게끔 해야 되겠다 하는 것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거라. 내가 그 사실을 알려고 밖에 나간 것이고. 여러분들도 이런 담마스쿨을 통해가지고 그런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자리가 잡혀나가길 바라겠습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게 「나라고 하는 인간의 실체」 부분으로 이어질 겁니다.

인제부터는 그런 수행 부분이 조금씩 들어가집니다이. 들어가지면서 교리하고 연관을 시켜가지고 진행할 겁니다. 그다음에는 빨리 경전에서 가르치는 「제불의 가르침」 이런 것들로 들어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