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해탈의 길 1) (20071025)

담마마-마까 2020. 10. 25. 00:32

*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해탈의 길 1) (20071025)

https://youtu.be/tvWdh6fUs3M

https://youtu.be/N7HFQB2cjc8

 

자, 펴보십시오. 프린트물 저번 시간에 한 페이지는 나갔습니다이.

오늘은 여섯 번째 나라고 하는 것이 뭔가 하는 인간의 실체입니다. 아마 이거는 여러분들이 구구절절이 저한테 들어가지고 인제는 외우고 있다시피 할 겁니다.

 

인간의 실체는 뭡니까? 나마와 루빠(nāma-rūpa) 잖아!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죠. 그래서 그것에 대한 설명을 쭉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왜 수행을 해야 되는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쭉 해놨습니다. 이 부분은 여러분들이 하도 많이 듣고 해가지고 이해하기가 좀 수월할 겁니다.

 

그런데 책을 만들려다 보니까 앞에 부분하고 연결부분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이 부분을 첨가해놨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행복하기를 바라고 또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자연적인 법칙인데, 그 행복하게 되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 내 몸과 마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 집착하는 것들을 벗어나는 것, 그렇게 자기 자신을 이해할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수행을 통해서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하는 것이 기본적인 흐름으로 그렇게 돼있습니다. 그거는 뭐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겁니다.

 

그 밑에 일곱 번째, 현재까지가 기본적인 흐름에 들어가 있습니다.

처음에 1차 결집부터 시작해서 쭉 흘러온 것이 근본불교를 공부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상황으로 그렇게 쭉 적어놓은 겁니다. 그런 흐름으로 돼있습니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런 공부하는 부분에 해당이 되는 것으로 들어가질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트라인(outline) 식으로 대충 얘기를 하고 나서, 그다음에는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어가지는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도 적어놨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갖다가 빨리 경전을 통해서 조금 배우고 나서, 그다음 찹터(chapter)로 담마라는 것이 뭔가 하는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정립이 되고 나서, 그 담마를 세분화시켜서 하나씩 하나씩 짚어나가는 방식으로 취해나갈 겁니다.

 

【 교재 부분 】

【 1. 해탈에 이르는 길

 

Sabba pāpassa akaranaṃ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 pariyodapanaṃ etaṃ buddhānu sāsanaṃ 

삽바 빠-빳사 아까라낭 꾸살랏사 우빠삼빠다-

사찟따 빠리요-다빠낭 에-땅 붓다-누 사-사낭.

 

Sabba(삽바) 모든

pāpassa(빠-빳사) 나쁜 일을 

akaranaṃ(아까라낭) 하지 말고

kusalassa(꾸살랏사) 좋은 것에(을) 

upasampadā(우빠삼빠다-) 도달하라. 행하라.

Sacitta(사찟따) 자신의 마음을 

pariyodapanaṃ(빠리요-다빠낭) 씻어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

etaṃ(에-땅) 이것이

buddhānu(붓다-누) 모든 부처님의 

sāsanaṃ(사-사낭) 가르침입니다.

 

「나쁜 일을 그만두는 것. 좋은 것에 도달하는 것.

자신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제불의 가르침입니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

 

아침 저녁으로 예불해보고 하니까 빨리어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을 겁니다. 그래서 여기 이렇게 빨리어로 적어놔도 그렇게 낯설지는 않죠? 그렇죠?

"삽바 빠빳사 아까라랑 꾸살랏사 우빠삼빠다-" 이렇게 적어놓으니까 모르는 사람 같으면 이게 뭔 소리 이런 소리가 있나 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 부분으로 스님이 구분을 해놔 놨습니다.

해탈에 이르는 길, 그다음에 수행이란 것이 뭔가? 하는 것하고, 그다음에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수행자, 출가자라는 것이 뭔가? 그 수행자나 출가자가 걸어가야 될 길이 뭔가 하는 부분 그렇게 세 부분으로써 구분을 해놨습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고, 해탈에 이르는 길도 이것이 해탈에 이르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또 수행 부분도 이것이 모든 부처님이 가르치는 수행의 길이다. 또 수행자나 출가자의 길도 이것이 수행자나 출가자가 걸어가야 할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는 세 부분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것들입니다.

 

맨 처음 해탈에 이르는 길 한번 보십시오.

아마 여러분들 가장 많이 들었는 단어 중에서 꾸살라(kusala), 아꾸살라(akusala)라고 하는 것들이 많이 들었을 겁니다. 선업, 불선업 할 때 그런 얘기들 하죠?

꾸살라 깜마(kusala kamma), 아꾸살라 깜마(akusala kamma) 할 때 깜마(kamma, 業)가 붙으면 선업(善業), 불선업(不善業) 이렇게 됩니다. 근데 꾸살라, 아꾸살라 할 때는 좋은 것, 나쁜 것 뭐 이렇게 되겠죠?

거기에 대한 해석을 우리나라에서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이렇게 얘기를 해놔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명령형으로 풀어가지고 [일체 악한 일을 하지 말아라. 모든 착한 일들을 행하여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라.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이렇게 적어 놓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근데 부처님은 언제 "하라" "하지 마라" 한 적이 있습니까? '하라, 하지 마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해놓는 거는 계율을 제정할 때 외에는 하질 않습니다. 법을 가르칠 때는 그렇게 얘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꾸살라라고 하는 것들, 아꾸살라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가 잘못돼가지고 그렇게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거에 중점해서 스님이 적어놨습니다.

그리고 여기 한문으로 표기해 놓은 악() () 제악막작 중선봉행 이렇게 한 것도 굉장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참고적으로는 스님이 적어놨지만 부처님이 말한 원래의 뜻하고는 상당히 어긋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것들입니다. 특히나 이것이 어떤 거냐 하면 해탈에 이르는 길입니다. 해탈! 열반에 도달하는 그런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해서 풀어 써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선악을 나타내는 불교용어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꾸살라・뿐냐, 아꾸살라・빠빠 라고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착하다, 바르다 하고 쓸 때는 이 꾸살라(kusala) 하고 뿐냐(puññā)라는 용어를 많이 쓰고,

그다음에 나쁜 것, 바르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쓸 때는 아꾸살라(akusala)와 빠빠(pāpa)라고 하는 용어를 많이 씁니다. 대조적인 게 이 문장에서는 분명히 뿐냐나 빠빠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꾸살라, 아꾸살라 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뿐냐(puññā)는 여러분들이 잘 알듯이 공덕, 덕행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행위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결과물이라는 뜻입니다. 공덕은 어떤 겁니까? 쌓이는 거죠? 축적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행위들은 모여서 그로 인해서 좋은 결과들이 있게 될 때 쓰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좋은 일들 선한 일들을 많이 했을 때 그것들을 여러분들은 공덕이 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일반적인 예를 들어봅시다. 탁발을 올리는 것, 뿐냐(puññā)라고 용어를 씁니다. 그렇죠? 사원을 짓는데 보시를 하는 것, 공덕을 짓는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근데 숨 쉬는 것, 잘 숨 쉬는 것, 그걸 공덕이라고는 얘기 안 하죠? 그리고 공부 잘하는 것 그건 당연히 으레 학생이면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지 그걸 공덕이라고는 얘길 안 합니다. 근데 공부 잘하는 건 대부분 뭐라 그럽니까? 어쨌든 잘했다고 그러죠? 잘한다고 그러지, 잘산다고 그러지, 잘 공덕지었다고는 얘기 안 합니다.

그 차이가 뭐냐 하면 뿐냐와 꾸살라와의 차이입니다.

공부 잘한다고 해가지고 좋은 결과 꼭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숨 잘 쉰다고 해가지고 오래 사는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오래 살 수도 있고 오래 살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부처님이 여기서 뿐냐라는 용어를 쓰지 않은 것은 그마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또한 아꾸살라라는 용어를 썼지 빠빠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은 또 그마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마!” 하고 탁, 부처님이 도저히 이거는 하면 안되겠다 싶을 경우에 하지마! 하고 해야 할 경우에는 빠빠(pāpa)라는 용어를 씁니다. 도둑질 하지마 할 때는 빠빠라는 용어를 씁니다. 도둑질 하지마! 그러지 도둑질하면 나쁜 결과가 있다 하고 얘기를 하지, 도둑질한 부분에 대해서 흐리멍텅하게 부처님이 금지하고 한 것은 아닙니다. 남을 죽이지 마! 남의 생명을 죽이지 마라! 이렇게 얘기하지 남의 생명에 대해서 권유하는 식으로 “죽이면 안 됩 니 다 이”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왜? 그 나쁜 행위에 대해서는 나쁜 결과가 있기 때문에, 그때는 부처님이 분명하게 아꾸살라라는 용어를 안 쓰고 빠빠라는 용어를 씁니다.

 

어떤 면에서는 뿐냐하고 빠빠라는 용어는 굉장히 강한 개념이 됩니다. 선업이 되고 불선업이 되는 행위일 때는 이 뿐냐하고 빠빠라는 용어를 씁니다.

 

근데 꾸살라, 아꾸살라 일 때는 그런 개념하고 조금 틀려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당연히 해야 될 일들 또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설명할 때는 꾸살라, 아꾸살라라는 용어를 씁니다.

꾸살라(kusala)라는 것은 '선'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선한 행위'입니다.

선한 행위는 어떤 걸 얘기합니까? '능숙함'을 뜻합니다. 능숙함! 잘해온 것. 집에서 요리를 열심히 하다 보면 요리를 남들보다 더 잘하게 되는 것, 능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 남편들이 밖에 가서 밥 안 먹고 줄기차게 집에 와서 밥을 먹으려고 할 때 그런 걸 꾸살라라고 얘기합니다. 능숙하게 한다. 그런 의미인 거지 크게 문제되는 부분은 아닙니다.

요리 잘하면 뭐하고 요리 못하면 뭐 할 거라? 조금 못한다. 남편이 밥 안 먹고 나가서 먹을라고 그러고 외식하자고 그럽니다. 이럴 때 아꾸살라(akusala) 라는 용어를 씁니다. 거칠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이 게송을 얘기했을 때는 꾸살라가 될 거 같으면 하는 행위로 인해서 행복이 와지고, 아꾸살라가 될 경우에는 하는 행위로 인해서 불행하게 된다 하는 그런 의미로써 쓰여진 겁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보면 꾸살라, 아꾸살라 라는 용어가 많지 이 뿐냐, 빠빠라는 용어가 많이 나오질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해당이 되는 게 아닙니다. 또 어느 불교인들을 위해서만 해당이 되는 게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그런 것들입니다.

 

왜? 그럼 공덕이라는 용어를 써버릴 것 같으면 그럼 공덕을 못 짓는 사람들은 어떡할 건데? 마음에 부담을 가지게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럴 겁니다. 여기서 목요일 날 탁발이 있다. 탁발 안 가져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있을 거 같으면 탁발시간에 못 오는 거라. 꾸살라라고 생각을 해버려야 되는 건데, 자기 공덕을 쌓는 거라고 생각할 거 같으면 공덕을 쌓을 사람만 여기 와지게 되는 거라.

 

너무나 종교적인 것으로 치우쳐 버립니다. 각국에 이슬람 원리주의나 기독교 원리주의나 이런 것들도 자꾸 종교가 빠져버리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이 강합니다. 불교에서, 부처님은 특히나 이런 부분을 굉장히 많이 경계를 했던 부분입니다. 그래서 되도록 그런 것들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부분입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부처님도 아꾸살라, 꾸살라 라고 하는 용어들을 많이 썼습니다. 여러분들도 그걸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능숙하게 하느냐 아니면 조금 거칠게 하느냐' 어떤 형태든 크게 마음에 두지 않고, 크게 그 부분에 대해서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하는 것들이 적은 부분들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꾸살라를 해서 우빠삼빠다(upasampadā)에 들어라.

우빠삼빠다가 뭡니까? 스님들 출가하는 걸 우빠삼빠다 한다고 그럽니다. 출가자의 흐름에 들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꾸살랏사 우빠삼빠다" 라고 그랬거든.

이걸 왜 '모든 착한 일들 힘써 행하라' 라고 풀이를 하느냐는 거라. '악한 일 하지 말고 착한 일 하라.' 왜 이렇게 풀이를 하느냐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꾸살랏사 우빠삼빠다' 라고 그럽니다. 우빠삼빠다는 '흐름'입니다. 출가하는 사람은 출가자의 흐름에 들어버립니다. 출가자의 흐름에 든다고 해서 처음에 출가한 사람이 뭘 압니까?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냥 앞에 가는 스님들, 앞선 선배들 따라서 졸졸졸졸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 흐름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걸 우빠삼빠다 라고 그럽니다.

내가 좋은 길로 갈 거 같으면 좋은 방향으로 쭉 나아가지는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쁜 쪽으로 나아가지 말고 좋은 방향 좋은 쪽으로 향해서 나아가라. 여러 번 하다 보면 능숙하게 그 일 하도록 하라는 거라.

공덕을 쌓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법에서 어떤 것이 여러분들에게 좋은 방향이고 어떤 것이 나쁜 방향이냐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판단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얘기하는 건 뭡니까? 에까야노 담모 에까야노 막고(Ekāyano dhammo, Ekāyano maggo)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의 길이고 하나의 진리다.

진리로 나아가는 길을 갖다가 잘 설해놨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잘 설해놓은 길을 따라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이미 그러한 길은 잘 만들어 놨다는 거라. 그 길은 따라가고 안 따라가고는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몫이지 부처님이 해야 될 몫은 아니라는 거라. 그러한 시스템은 2,550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쭉 그 길을 사람들이 따라갔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그 길을 따라가라는 뜻입니다. 공덕을 쌓고,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이렇게 '금지하고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좋은 방향들이 이미 만들어져 있다는 거라. 그 길을 여러분들이 따라가라 하는 거라. 그래서 능숙하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를 해놓은 것이지 '하지마라, 하라' 하고 얘기를 해놓은 것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왜? 가고 안 가고는 여러분들 몫이지 부처님 몫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단지 그 길만 제시하는 것뿐입니다.

 

이게 뭐냐면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하는 겁니다.

해탈에 이를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구요? 그냥 부처님이 말한 팔정성도 그길 따라서 가면 되는 겁니다.

그게 해탈에 이르는 길이라는 거라. '금하고, 하고' 이렇게 해서 강하게 만들어 놓는 것이 해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물론 꾸살라도 뿐냐에 포함돼있기 때문에 공덕을 쌓는 것도 해탈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근데 꼭 공덕을 쌓는 자체가 해탈에 이르는 길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스님이 얘기하는 뜻을 알겠습니까? 불교를 너무 어렵게 만들지 마라라는 겁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내가 숨 쉬는 거 알고, 숨 잘 쉬면 해탈에 이르른다!

그게 해탈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게 악한 일을 짓지 않고 선한 일을 행하는 길이라는 거라. 나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바른 방향, 인간으로 태어나서 해야 될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도 깨끗해지고 맑아져서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거라. 그게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거라. 모든 부처님이 그와 같이 가르쳤고, 그와 같은 길을 제시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 교재 부분 】

【 2. 수행이란 무엇인가?

 

Khantī paramaṃ tapo titikkhā  Nibbānaṃ paramaṃ vadanti Buddhā

칸띠- 빠라망 따뽀- 띠띡카- 닙바-낭 빠라망 와단띠 붓다-

 

Khantī (칸띠-) 침착과 

titikkhā(띠띡카-) 인내는

paramaṃ(빠라망) 최고의  

tapo(따뽀-) 수행이다.

Nibbānaṃ(닙바-낭) 열반(도 또한) 

paramaṃ(빠라망) 최고라고

Buddhā(붓다-) 부처님들이

vadanti(와단띠) 말씀하다.

 

「침착한 마음과 인내는 최고의 수행입니다.

열반이야말로 최고라고 여러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 】

 

두 번째, 수행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참 오역을 많이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칸띠빠라망 따뽀 띠띡카(Khantī paramaṁ tapo titikkhā) 이렇게 되어있는데, 이 부분을 참 많이 오역들을 합니다.

'침착한 마음과 인내, 이 두 가지가 수행하는 으뜸가는 방법' 이라는 뜻입니다.

 

근데 보통 어떻게 번역하느냐 하면 '고통을 참는 데는 인내가 최고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경전에 보면 그런 부분이 많이 나옵니다.

그걸 뭐라 그럽니까? 다리에 통증이 있다 그러면 뭐라고 그러냐면 인내가 열반으로 이끈다, 그러니까 참아라, 인내하라 그럽니다.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는 말은 있습니다. 왜? 인내가 최고의 수행이라 했으니까! 최고의 수행의 마지막 경지는 열반입니다.

근데 이 게송에서는 침착한 마음도 최고의 수행이고, 인내도 최고의 수행입니다. 근데 고통을 참는 것은 인내가 최고다 하고 이렇게 오역을 할 수는 없다는 거라.

 

칸띠(Khantī) 라고 하는 것이 '인내'라는 의미도 있지만 '침착하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보통 좋고 나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이 쉽게 휘둘려버립니다. '좋은 것에 들뜨고, 나쁜 일에 낙담해 버리고 그러한 것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 이것이 칸띠입니다. 칸띠! 그걸 '침착한 마음'이라고 얘기합니다. 침착한 마음이 수행해나가는 으뜸가는 방법이라는 거라.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고!

 

그다음에 밑에 있는 것이 띠띡카(titikkhā) 라고 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는 슬프고 좋고 괴로운 것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묵묵하게 견디어 나가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걸 갖다가 띠띡카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것도, 인내도 수행의 으뜸가는 방법이라는 거라.

 

그래서 "수행이란 무엇인가" 하고 부처님이 얘기해놓은 것은 뭐냐 하면 "침착한 마음과 인내로써 수행해나가라" 하는 뜻입니다.

 

그 밑에 '열반이야 말로 으뜸가는 것, 최고‘ 그래서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이 열반의 최고의 경지다. 이것을 모든 부처님,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모든 부처님이 수행하는 방법을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침착한 마음과 인내로서 하라. 이 두 가지가 수행하는 방법에 대한, 수행이 뭔가에 대한 불교적인 답이 됩니다.

 

수행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돼? 침착한 마음을 자꾸 만들어 가고, 그리고 괴로움이 닥치는 것에 대해서 인내하는 것을 만들어 가는 것, 이 두 가지라는 거라. 이 두 가지는 꼭 수행이 아니라도 사람 간의 관계, 사람 간에 살아가는데도 바른길이 됩니다. 침착하고 인내하는 사람에게 손가락질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거라. 종교하고도 관계없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잘 살아간다고 그러지 참 잘못 살아간다고 얘기하진 않는다는 거라.

 

부처님의 진리는 이와 같이 어느 시대, 어떤 경우에도, 어떤 사람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들어맞는 것입니다. 이것을 담마, 진리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무엇인가, 수행할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침착한 마음과 인내를 기르도록 자꾸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저절로 수행은 무르익게 됩니다. 설혹 내가 열반에까지, 최고라고 하는 열반에까지는 이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세상 살아가는 데는 참 잘살아간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하는 겁니다.

 

【 교재 부분 】

【 3. 출가자, 수행자란?

 

Na hi pabbajito parūpaghāti samano hoti paraṃ vihethayanto.

Anūpavādo anūpaghāto Pātimokkhe ca saṃvaro,

Mattannutā ca bhattasmiṃ pantan ca sayanāsanaṃ,

Adhicitte ca āyogo etaṃ Buddhānu sāsanaṃ.

나 히 빱바지또- 빠루-빠가-띠 사마노- 호-띠 빠랑 위헤-타얀또-.

아누-빠와-도- 아누-빠가-또- 빠-띠목케- 짜 상와로,

맛딴뉴따- 짜 밧따스밍 빤딴 짜 사야나-사낭,

아디찟떼- 짜 아-요-고- 에-땅 붓다-누 사-사낭.

 

pabbajito(빱바지또-) 수행자, 출가자는 

parūpaghāti(빠루-빠가-띠) 다른 이를 죽이는 것은

Na hi(나 히) 결코 없다. 

samano(사마노-) 사문은 

paraṃ(빠랑) 남을

vihethayanto(위헤-타얀또-) 해치는 사람, 곤란하게 하는 사람  

hoti(호-띠) + Na(나) 안 된다.

Anūpavādo(아누-빠와-도-) 비난하지 않는다. 

anūpaghāto(아누-빠가-또-) 해를 주지 않는다.

Pātimokkhe(빠-띠목케) 출가자의 계율을 

saṃvaro(상와로-) 지킨다.

Mattaññutā ca bhattasmiṃ(맛딴뉴따- 짜 밧따스밍) 적당한 식사로,

pantañ ca(빤딴 짜) 고요한 곳에 

sayanāsanaṃ(사야나-사낭) 자리를 펴서 머문다.

Adhicitte(아디찟떼-) 초월한 마음으로 

āyogo (아-요-고-) 정진하는 것.

etaṃ(에-땅) 이것이  

Buddhānu(붓다-누) 모든 부처님의

sāsanaṃ(사-사낭) 가르침입니다.

 

「수행자는 결코 타인을 죽일 수 없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은 사문이 아니다.

비난하지 않고 피해주지 않으며

출가자의 계율을 지키고, 음식을 절제하고, 고요한 곳에 머문다.

초월한 마음을 목표로 하여 노력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

 

밑에 출가자, 수행자란 무엇인가?

빱바지또(pabbajito) 수행자 보통 출가자를 얘기합니다. 출가자인데 수행자가 해당이 됩니다이.

밑에 사마노(samaṇo) 라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사마노라는 개념은 조금 더 출가자에 가깝고, 빱바지따라고 할 것 같으면 수행자에 가까운 용어입니다.

그래서 스님은 되도록 빱바지따라고 쓸 때는 수행자라고 많이 풀어쓰고, 특히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법을 설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그러기도 하지만,

사마나라고 할 때는 출가자라는 명칭을 많이 쓰기도 합니다.

사마나하고 빱바지따는 틀립니다. 빱바지따 같은 경우에 수행자 같은 경우에 다른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사마나 같은 경우에는 곤란하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다른 존재들을 죽이는 것만 포함하는 게 아니고 해치려는 마음, 해치는 말, 곤란하게 하는 행위들 이런 것까지 다 포함되는 겁니다.

 

이거 복사해줬습니까? 뒤에는 안 했죠? 그거는 다음 시간에 합시다.

빨리어 그리 어렵지 않죠? 빨리어가 오히려 쉽습니다. 쉬운 건데 자꾸 너무나 거창하게들 얘기를 해버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