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성자의 마음 (20080110)

담마마-마까 2020. 10. 25. 00:47

* 성자의 마음 (20080110)

https://youtu.be/kmpe3YxEB_8

https://youtu.be/QRlA8Qa8Q10

 

저번 시간에 하던 것 이어나가 보겠습니다.

일단락을 저번 시간에 했죠? 바르게 살아가기 위해, 진실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했죠!

자애의 마음을 기르도록 하라. 자애의 마음을 가져서 모든 것을 평등하게 대하라. 그것이 첫 번째 조건이고, 그리고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압빠마다(appamāda) 노력하라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바르고 진실되게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문제는 다 해결이 될 거 같아도 그렇게 안 되는 경우들이 많죠?

그래서 우리 일반적인 마음들하고 또 깨달은 분들의 마음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 것들을 가지고 비교를 해보고 우리는 그런 분들, 성자들을 닮아가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 성자에 부처님이 포함되죠? 그런 과정들을 겪고 나서, 그러면 그런 분들이 걸어갔던 바른길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37조도품으로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37조도품을 하나하나 비교를 해가면서 그렇게 실천해나가는 길을 모색해 나가자 하는 것이 이번 [2기 담마스쿨]의 주 포인트입니다.

 

오늘 두 번째 시간 '성자의 마음' 부분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일으킵니까? 아, 내가 불교 공부를 좀 해봐야지. 아니면 위빳사나 수행을 좀 해봐야지. 아니면 대승불교 쪽에서 하면 내가 기도 좀 해봐야지. 아니면 절이라도 좀 해봐야지. 이런 마음을 가질 때 언제 그랬어요? (대답)

음, 복잡하고 괴로움을 느끼고, 통상적으로 그렇죠? 행복하고 좋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생각 잘 안 일으키죠? (대답)

그렇게 하는 게 좋긴 좋은데, 그건 어떤 면에서는 좋으면 좋은 대로 하고, 싫으면 싫은 대로 하고, 어떤 경우엔 또 습관적입니다. 습관이 되어있으면 어떤 부분은 좋은데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해로운 걸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이 든 노보살님 같은 경우에는 그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답)

예. 그리해도 조금 더 보태도록 한번 해보십시오이.

 

그래서 행복하거나 불행할 때 그런 마음을 내는 것보다 이왕 마음을 내는 거 내가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겠다. 해탈하기 위해서 하겠다 하는 마음을 내도록 한번 해봐야 됩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런 마음 안 내죠? 마음 잘 안 냅니다. 물론 내가 깨달음에 이르러보겠다 하는 마음을 낼 때도 보면 뭔가 감정의 기복이 있을 때들 내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조금 공부된다 싶으면 지 혼자서 하려고 그러고, 스승의 말도 안 들으려 그러고, 안 그러면 또 이곳저곳 기웃기웃 합니다. 뭐 좀 다른 게 있는가 없는가 해가지고 쭉 돌아보기도 하고. 그게 틀렸다는 것은 아니고, 그렇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또 방향을 잃어버려서 요것도 했다가 저것도 했다가 막 번잡하게 됩니다. 그게 일반적인 사람의 마음입니다.

 

왜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는가? 거기에 첫 번째, 스님이 적어놓은 방법입니다.

대부분 그런 방식으로 수행을 하고 아니면 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이 쉽게 말하면 위빳사나 수행한다는 방법이, 아니면 근본불교 공부한다는 방법이, 하나의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로써만 알고 있게 된다는 겁니다. 요가도 있고, 참선수행법도 있고, 묵조선도 있고 뭐 이런 것 중에 하나의 방법으로 알고 있다는 거라.

또 위빳사나 수행법 중에서도 느낌에 대한 수행법들이나 아니면 마음에 대한 것이나 이런 것들도 처음에는 그게 최고다 하고 하지만, 나중에는 되돌아보면 그게 또 하나의 방법으로만 정착을 해버리는 거라.

그 하나가 해탈에 이르기 위한 길이다 하는 생각을 안 낸다는 거라.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언급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기 때문에 언급은 안 하겠지만, 적어도 이 위빳사나 수행은 해탈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그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로써 위빳사나가 자리매김 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 공부도 마찬가집니다. 지금 이 담마스쿨을 하고 있는 것도 바르게 알고 정립을 시키기 위한 것이지, '여기서는 이렇게도 얘기했고, 저기서는 저렇게도 얘기하고, 또 여기서는 이렇게도 얘기하네' 하고 그걸 정립시켜주기 위해서 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거라. "이것이 바른 길이다" 하고 제시해주는 것뿐입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비교하는 경우들도 있지만, 되도록이면 그런 것들을 피할려고 하는 것들이 비교하기 싫어서 그런 것보다 남을 비방하는 것들은 그렇게 좋은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안 하는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지금 배우고 있는 이 담마(dhamma)라고 하는 것은 진실한 길이고 또 위빳사나 수행은 실천하는 바른 길이다 하는 것이지 그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라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럴 거 같으면 위빳사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돼요?

해탈하기 위해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겁니다.

아, 내가 고민이 있어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힘들기 때문에 힘든 걸 갖다가 좀 배제하기 위해서, 몸에 병이 들어가지고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수행한다. 이럴 것 같으면 그것은 그 방법이 조금 해소되고 나면 그것은 수행 안 하더라도 자연적인 오르내림인 롤러코스터에 의해서 해결이 되어지는 부분들입니다. 그럼 그거 끝나고 나면 또 이거 안 한다는 거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해탈을 위해서 수행하고 실천을 하다가 보니까 덤으로 괴로움들이나 아니면 괴로움 이런 것들이 없어진다 하는 사실을 알고 접근을 하는 것이 바른 방법이다 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이 담마스쿨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거 일체 생각하지 말고 이 길만이 유일한 길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듣도록 해야 됩니다. 이 길에서 제시하는 방법으로 실천하는 것만이 내가 오로지 할 수 있는 길이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실천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들은 끊임없이 생사윤회를 거듭해왔습니다. 그 생사윤회의 고리를 끊는 방법이고 설혹 그 생사윤회가 지금 내 눈앞에서 보이지 않고 없다고 한다 하더라도, 지금 살아가는 것들 살아가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그런 방법이다 하는 그런 마음으로 접근을 하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밑에 부분을 한번 보십시오. 인간은 여러 가지로 속박되어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일이나 아니면 가족, 사회 뭐 그런 관계들로부터 자유로울수는 없습니다. 내 가족 팽개쳐놔 놓고 여기 와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내가 자유롭기 위해서 수행할 수 있느냐는 거라. 안 된다는 거라. 그 여러 가지 조건들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겁니다. 근데 성자들은 그런 속박, 마음의 자유는 빼앗기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 성자들이라 해서 만약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걸 팽개쳐놔 놓고 여기 와서 수행하는가?

부처님 제자들이 자기의 자유를 위해서, 자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래가지고 숲에 가서 수행하고 하는 것은 자유롭게 했습니다. 그런데 일정한 틀들은 있었죠? 결제 때가 되면 대중들이 같이 모여가지고 수행을 하게끔 되고, 또 일정한 시간이 되면 탁발을 나가고, 또 일정한 시간이 되면 공양을 하고, 또 일정한 시간이 되면 법문할 때가 되면 법문하게 되고, 이런 것들을 가졌습니다. 사회적으로 봤을 때는 그것도 하나의 속박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라한들은 그것을 속박이라고 여겼느냐 하는 거라. 그것을 속박으로 여기지는 않았다는 거라. 속박은 몸을 묶어두는 것을 속박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부담 마음의 스트레스 마음의 자유를 뺏느냐 묶어두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속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누룻다는 눈이 멀고 나서 깨달음을 이르렀던 성자입니다. 하루는 아누룻다가 가사를 만들어 입을 때가 되어가지고 인제 가사를 만들기 위해서 죽은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에 가서 옷들을 주워가지고 옵니다. 당연히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손에 만져지는 대로 가지고 왔단 말이라. 근데 그 옷감은 기워야 만이 가사가 됩니다. 기울려니까 생긴 게 어떻게 생긴지도 잘 모르고 어떻게 기워야 되는지 잘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부처님이 사리불 존자하고 몇 사람을 데리고 살며시 와서 아누룻다 스님 저쪽 옆에서 그걸 기워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들이 보고 아, 아누룻다 스님이 참 유명한 분인 모양이다. 부처님과 사리불 존자를 비롯한 여러 장로 스님들이 와서 저 가사 만드는 걸 다 도와주고 있구나.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날 공양을 잔뜩 해 와가지고 아누룻다 스님한테 갖다 주는 거라.

 

그러니까 많은 공양물들이 쌓였어. 같은 스님들이 그걸 보고 시샘을 하는 거라. 먹는 건 다들 요거만큼 밖에 안 먹는데 그거 많이 쌓아가지고 어떡하겠다는 거라. 그러니까 아누룻다 스님 틀렸다는 거라. 이리 가져오면 그만 가져오라 하고 얘길 해야 되는데, 자기 명예 높아지기 위해가지고 그 가져오는 걸 마다하지 않고 그냥 있었다는 거라. 그래서 많은 음식을 쌓아놓고 음식에 집착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보기에는 참 황당한 얘기거든. 언제 아누룻다가 음식물 가져오라 한 적이 있어? 근데 결과적으로는 음식이 그렇게 쌓였거든. 아라한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의 속박은 없지만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은 있다 하는 거라. 음식이나 가족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성자들은.

 

그렇지만 그 집착이 없다 해서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구분함이 없이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여러분들이 이 법문을 듣고 또 수행하기 위해서 내가 그러고 싶다 해서 여기서 무한정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일정하게 시간이 되면 또 집에 들어가서 일을 해야 되고, 또 아라한들도 일정한 시간이 되면 탁발을 나가야되고 하는 것은 똑 마찬가지다 하는 거라.

그런데 일반인들의 마음하고 아라한들의 마음하고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또 일반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속박되는 것이 그거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재물에도 속박될 뿐 아니라 칭찬하고 명예 이런 것들에도 속박이 되고 그리합니다. 그렇지만 성자들의 마음에는 그런 것에는 속박되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사리불 존자가 있습니다. 누가 사리불 존자를 비난을 하거든. 하도 존경을 받고 하니까 비난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사리불 존자를 불러가지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그렇게 너를 비난하느냐? 아니면 어떤 사람은 너를 칭찬하는데 왜 그렇게 칭찬하느냐?"

"비난하고 칭찬하는 것은 그 사람 몫이지 내가 그로 인해서 마음이 동요되는 법은 없습니다. 내가 만약에 비난받을 짓을 했다고 할 것 같으면 비난받을 것이고, 칭찬받을 짓을 했으면 칭찬받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신구의(身口意)로 인해서 비난받을 만한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럼 당연히 비난받을 짓은 없다는 거라. 그럼 누가 비난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사리불 존자가 잘못해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시샘해서 비난하는 경우가 돼버리는 거라. 누가 나를 칭찬한다 할 것 같으면 나는 누구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일을 하고 행위를 하는 것은 없다 하는 거라.

 

내가 하는 행위 자체는 선하고 악하고 하는 것을 떠나서 행해야 될 것은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 될 것은 행하지 않는 것뿐이다. 그럼 나는 칭찬받을 일을 행하고 안 하고 하는 것은 전혀 무관하게 하고 있다. 그럼 누가 나를 칭찬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의 마음이 우쭐한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칭찬하는 것일 뿐인 것이지 내가 한 행위에 대해서 내 행위 자체가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칭찬받고 비난받고 하는 것으로부터 나의 마음은 그런 속박으로부터 이미 벗어나 버렸다 하는 거라. 성자의 마음들은 그렇다는 거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칭찬과 비난을 수없이 받게 돼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렇게 하더라도 설혹 내가 잘못된 행위를 행해가지고 비난받을 만한 짓을 해서 비난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받는 것에 대해서 내가 아, 잘못했구나 하고 생각을 하고 다시는 비난받지 않을 행동들을 하고 생각들을 하고 행위들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럴 것 같으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버리게 되는 거라. 근데 거기에 자꾸 매이면 비난받을 그 행위들에 매여버리는 게 아니고, 그 생각에 매여버리게 된다는 거라. 마음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그런 속박입니다.

 

아누룻다가 음식이나 가족들에 집착하지 않고, 사리불 존자가 칭찬과 비난에 마음에 동요함이 없게 되는 것, 이런 것들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의 행위들이 정해진 일들에 대해서 제약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같은 입장이라고 봐야 됩니다. 근데 얼마만큼 그런 마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느냐 하는 것들만 차이가 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밑에다 해놨습니다. 우리 안에서 길러지는 새와 야생으로 살아가는 새 정도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여러분과 성자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간단한 것 같아도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죠? 만약에 여기서 집에 가야 될 일이 생긴다 할 것 같으면 판단하지 말고 그걸 가지고 생각을 굴려가지고 ‘나는 공부하고 싶은데 왜 오라고 그러느냐’ 아니면 남편이 가지마라 하는데 나는 가고 싶은데 왜 가지마라 하느냐 하는 이런 생각으로 자꾸 굴리고 스스로의 마음을 속박할 것 같으면 그럼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거라.

가야 될 상황이면 그냥 판단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행하라 하는 거라. 행하는 거 자체를 오히려 알아차려 나가면서 그 행위를 할 것 같으면 분란도 없고 또 마음에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들입니다.

 

성자들의 마음도 꼭 마찬가집니다. 삼매에 들고 있는 걸 깨어나고 싶은 사람은 좀처럼 잘 없을 겁니다. 근데 삼매에 들기 전에 성자들은 어떤 마음을 들고 삼매에 듭니까? 부처님이 나를 부르시면 나는 일어나서 부처님한테 달려간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삼매에 듭니다. 일주일 동안 삼매에 들 수 있는데 일주일 전에 부처님이 부르셨다. 그럼 내가 깨어나서 가는 거라. 그 고요한 삼매를 깨트리고. 그렇다고 해서 알아차림 없이 깨어나고 알아차림 없이 행해나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밑으로 한번 봅시다. "그래서 위빳사나를 통해 진리를 체험한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속박, 정신적인 괴로움이 없게 된다."

몸이 설혹 아프고 부자유스러울지는 몰라도 마음의 괴로움은 없다 하는 겁니다. 모든 속박을 파괴한 자는 더 이상 마음의 괴로움을 받지 않는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를 해놓았습니다.

 

부처님 자신도 데와닷따가 돌을 굴리면서 돌 파편이 발가락에 맞아가지고 상처가 난 적이 있습니다. 그건 여러분들 잘 알죠? 그래서 의사 지와까가 와서 약으로 치료를 하고 붕대로 발을 감싸줍니다. 근데 인도는 굉장히 덥기 때문에 내내 싸매어놓기만 할 것 같으면 오히려 상처가 더 덧납니다. 곪아버린다는 거라. 적당하게 풀어줘야 될 때는 풀어줘야 되는데, 지와까가 다른 일이 있어 갔다가 오늘 부처님한테 와서 붕대를 풀어줘야 되는 날인데 올 상황이 못 되는 거라. 그렇다고 부처님한테 오늘 붕대 풀어야 됩니다 하고 얘기한 적도 없거든. 그러니까 의사 지와까는 애가 끓는 거라. 오늘 내가 부처님한테 가서 붕대를 풀어줘야 되는데 못 풀어주니까 어떻게 돼요? 마음의 번뇌가 잔뜩 끼여가지고 있는 거라.

 

근데 부처님은 오늘 보니까 이 상처를 풀어줘도 되겠다 싶으니까 어떻게 해요? 그냥 의사 지와까가 없어도 그냥 붕대를 풀어버리는 거라. 풀어버리고 나니까 조금 있으니까 바람도 통하고 하니까 발가락 상처는 깨끗하게 나아버리거든.

지와까는 애를 끓이고 있다가 오늘 못 오고 내일 갑니다. 그다음날 부처님한테 가서 발을 살펴보면서 아이고 부처님 죄송합니다. 의사 지와까는 그 생각을 어떻게 했느냐면 만약에 그걸 안 풀었으면 더 도져가지고 병이 더 와전되었을 것이다 하고 판단을 하고. 그래서 큰일났다 생각을 하는 거라. 와서 탁 보니까 깨끗하게 나아있거든. 부처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보니까 풀 때가 된 것 같아서 풀어버렸다. 풀어버리니까 이리 나았다. 그때사 의사 지와까는 마음의 번뇌를 탁 내려놓습니다. 하루 동안 지혼자 오만 생각을 다 굴린 거라.

 

부처님과 지와까의 차이가 바로 그 차이라는 거라. 의사 지와까가 만약에 성자였다 할 것 같으면 그날 가지 못하는 상황이다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 되는 거라. 부처님 저 상처를 풀어줘야 저게 덧 안 나고 잘 치료가 될 것인데 어쩌니, 그것으로 인해서 덧나면 몸에 열이 나고 어찌되고 더 악화되고 이런 생각조차도 할 필요가 없는 거라. 왜 그렇게 생각을 굴리고 있느냐는 거라. 못갈 상황이면 못갈 상황만큼 그대로 그 부분에 대해서 내가 몸이 거기에 갈 수가 없으니까 마음도 거기 가면 안 되는 거라. 그럼 그건 그냥 깨끗이 그만둬버려야 되는 거라. 지금 내가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라. 설혹 그다음날 와서 설혹 부처님이 그걸 풀지 못해서 덧났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 그냥 치료하면 돼. 그래서 진리를 체험한 사람은 몸의 아픔이나 부자유는 있을지라도 마음의 괴로움은 없다 하는 거라.

 

여러분들도 그렇게 마음의 괴로움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되는데,

마음의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들이 보통 통상적으로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불필요한 욕구입니다. 요만큼 욕심내도 되는데 더 크게 탐욕을 낸다는 거라. 까마찬다(kāma-chanda)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이 탐욕심이 번뇌를 일으키고 생사윤회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겁니다. 그 욕심내는 것들은 무엇에다 욕심냅니까? 물질에 대해서 아니면 비물질에 대해서 욕심냅니다.

 

여기서 물질이라는 것은 무얼 얘기합니까?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이런 것들이죠? 그게 뭡니까? 재산, 장신구, 금은보화들, 이런 재물들입니다. 그다음에 요즘은 집, 땅 이런 것들.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럼 비물질에 대한 것들은 명예욕, 색욕, 그다음에 오래 살고 싶은 장수욕, 좀 편안하고 잠을 좀 많이 잤으면 좋겠다고 하는 수면욕, 그다음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하는 소유욕, 이런 것들은 비물질이지만 이것도 욕구란 말입니다.

 

이게 필요한 만큼만 하면 되는데 불필요한 만큼 욕구를 부린다는 거라. 돈도 요만큼만 있으면 먹고 사는데 별 지장이 없는데 더 벌려고 아웅다웅 하게 되고. 그거 벌고 나면 또 더 할라고 그러고, 집도 요거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내가 조금 여유가 있을 때 하나 더 사자 무리해갖고 막 하고. 내가 요만큼만 사람들한테 인정받으면 되는데 조금 더 높아질려고 그러고, 뭐 적당하게 살고 죽었으면 좋겠는데 조금 더 오래 살려고 그러고, 조금 더 소유할려고 그러고,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 것들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슬픔이 일어나고 두려움이 일어나는 거라. 왜? 더 가지고 싶은데 가질 수 없으니까 힘들고 슬픈 거라.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하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나는 거고. 구할려고 하고 즐길려고 하는 마음 그런 욕구가 우리를 슬픔과 두려움으로 몰게 돼 있다 하는 겁니다.

 

아니띠칸다 라고 하는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신부가 결혼을 하고 나서 신랑 있는 쪽으로 가다가 험한 길에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신랑 아니띠칸다가 그냥 슬퍼서 울거든. 부처님이 왜 그리 울고 있느냐 하니까, 신부가 죽어가지고 그래서 슬픕니다. 왜 니가 슬픈데? 있어야 될 신부가 없으니까 슬프다는 거라. 신부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인데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슬프게 돼있다는 거라. 없는 걸 구할려고 하는 거라. 없는 걸 욕심내는 거라.

 

재산도 마찬가집니다. 재산이 이만큼 있다가 요만큼 없어져 버렸다. 이미 없어진 그것에 대해서 안타까워가지고 잡으려고 하고 불필요하게 아, 그거 없어지면 안 되는데 하고 욕심부리니까 어떻게 돼요? 슬퍼지고 괴로워지고 두려워지는 거라. 이거 없으면 나 어찌 사노 하는 두려움이 생기는 거라. 물건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든 불필요하게 욕구를 내는 것,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더 많아질 것에 대해서 불필요하게 욕심내기 때문에 그런 탐욕으로 인해서 슬픔과 두려움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의 괴로움이 일어난다 하는 거라.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분노, 불필요한 분노입니다. 보통 도사(dosa) 아니면 브야빠다(byāpāda) 그렇게 얘기하죠? 증오와 분노라 해가지고 불필요한 분노입니다.

자기 자신, 그다음에 상대방, 사회에 대해서 뱉어내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는 건 뭡니까? 욕구불만이죠! 뭔가 성취할려고 했던 것에 대해서 성취하지 못했을 때 욕구불만이 되는 겁니다. 그런 것이 상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사회에 대해서도, 전체에 대해서도 욕구불만이 원인이 돼서 생기는 것이 분노입니다. 증오하고 화를 내고, 시기 질투하고, 그런 것들이 바탕이 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보통 보면 도덕적인 것들만 잘 지켜나가면 크게 나타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근데 이게 잘 다스리지 못하면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큰 불행을 가져오는 원인이 됩니다. 수행에도 큰 장애가 되기 때문에 잘 다스려야 됩니다.

이 욕구와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관찰해나가는 방법이 가장 정확한 방법입니다.

물질적인 것이든 비물질적인 것이든 그것이 욕구를 일으키고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으로 일으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의 현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림으로써 그것을 관찰해나감으로써 적어도 욕구와 분노라고 하는 것의 불필요한 것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야만이 적어도 죽음 이후에라도 행복하게 된다 하는 얘깁니다.

 

어느 하인이 이 주인이 만날 자기를 뭐라 하고 때리고 욕을 하고 화를 내고, 니 이거 잘했느니 못했느니, 그래도 이 하인은 그래 니는 씨부리라 나는 내 할 일 한다. 내가 잘못한 게 없다고 할 거 같으면 누가 뭐라 하든 간에 나는 못들은 체하고 적어도 거기에 대해서 슬퍼하지도 않고 분노를 일으키지도 않고 거기에 대해서 더 바랄려고, 주인이 내줬으면 하는 생각조차도 욕구도 가지지 않고 그냥 나는 해나가거든. 그러다가 천상에 툭 태어났어.

목련 존자가 어느 날 가보니까 그분이 있어서 당신이 어떻게 왔소? 나는 계를 잘 지킨 적도 없고 부처님한테 가서 공양 한번 올린 적도 없고, 아무것도 한적이 없습니다. 근데 딱 하나 한 거는 뭐냐 하면 화내지 않았다는 거라.

뭔 일이 있든지 간에 화내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화를 내든 뭘 하든 간에 나는 그것에 반응하지 않고 내 자신이 화내지 않고 그냥 해왔다는 거라. 그렇다고 뭐 알아차리면서 수행한 것도 아니고 마음을 다스렸다고 하는 거라. 분노로부터 오는 위험을 알기 때문에!

 

내가 분노하면 당장 몸이 뜨끈뜨끈하고 몸이 아픕니다. 내 몸을 보호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 분노를 일으키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분노로부터 몸을 보호하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분노로부터 마음을 다스려라." 분노하는 것을 마음으로 알아차릴 것 같으면 다스려나간다는 거라. 근데 이게 습관이 되면 안 되거든. 그래서 성내는 습관을 갖다가 바꿔라. 우리는 조금만 하면 탁 걸려가지고 성낸다는 거라. 습관적으로 돼있다는 거라. 그 습관을 바꿔라는 거라.

 

왜? 이 세상 사람은 비방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라. 부처님도 비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어요. 아라한들도 비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하물며 범부 중생들이 그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거라.

그 비방에 반응을 할려다 보니까 그게 화내는 습관으로 자꾸 바뀌어버린다는 거라. 누구든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왜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화내는 습관들, 분노하는 습관들을 가지게 되느냐는 거라. 그건 불필요한 것이다는 거라. 그래서 불필요한 욕구와 불필요한 분노 두 개만 다스리더라도 마음의 괴로움은 사라져버릴 수 있다 하는 거라.

 

그다음에 밑에 거는 뭐냐 하면 습관, 고행, 그다음에 신통 이런 것에 매달리는 것.

그것이 깨달음에 이른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것이 또 좋은 것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는 거고, 절대 아니죠? 부처님 육 년 고행해도 깨달음을 못 이루었고, 히말라야 성자들은 그렇게 고행들을 하고 해도 그분들이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소식은 없다는 거라. 신통 아무리 부리는 사람, 남의 운명에 대해서 손가락 끝까지 다 알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도 죽을 때 자기 죽는 줄 모르고 죽는다는 거라.

 

내가 알고 있는 사람도 그래. 박도사라고 하는 분 그렇게 점 잘 봐줬거든. 그런데 어느 날 꼬드락 해버렸어. 지 죽는 줄도 모르고. 넘의 거는 그렇게 잘 보는데 지것도 하나 못 보는 사람이 뭘 그리 잘 본다고, 그거 좋다고 그런 신통 얻는 게 뭐가 좋다고 그렇게 하느냐는 거라. 넘의 일만 쎄가 빠지게 해주고 간 거라. 자기거 하나 못 챙기고. 그거 무슨 좋은 생을 살 거라 다음 생에서. 신통력 초자연적인 것들에 대해서 동경하면 그렇게 된다는 거라. 그거 좋은 거 하나도 없습니다.

 

예전에도 스님은 그랬거든. 저 멀리 있는 사람 소리 다 들었어. 몇십키로에 있는 소리. 거 한참 되고 할 때는 내가 최곤 줄 알았어. 근데 개뿔도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그거 계속했을 거 같으면 아마 나도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넘의 일만 실컷 해주다가 죽었을 거라. 근데 그건 아니라는 거라. 그것에 대해서 동경하는 것들, 좋은 것에 집착하는 것들, 나쁜 것, 싫은 것에 대해서 자꾸 배척할려고 하는 것들, 이런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자신의 견해에 단단하게 매달리는 것, 참 바꾸기 힘드는 것들입니다.

왜 잠이 와요? 어쨌든 이런 것은 해탈을 목적으로 위빳사나 실천을 계속해나가야 만이 마음이 맑고 깨끗한 방향으로 바뀐다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해탈을 목적으로 담마를 배우고 담마따라 실천한다 하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그것이 우선이 돼야 만이 성자의 마음으로 돌이킬 수가 있습니다.

졸린다 해싸니까 다음 시간에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