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상기띠 (Saṅgīti : 결집) (20090806)

담마마-마까 2020. 11. 3. 13:02

* 상기띠 (Saṅgīti : 결집) (20090806)

https://youtu.be/PYhcBtOG424

https://youtu.be/lK2GDw8EcgM

 

인제 보니까 스님 오타들이 꽤 있네요. 스님이 컴퓨터 하는 법 알아요? 독수리. 그것도 일반적인 독수리가 아니고 위에 화면은 절대 안 보입니다. 밑에 손만 보여. 그것도 하나씩 밖에는 안 보여. 그러니까 내가 사용하는 손가락은 요거 하나뿐이라.

(수행자 : 그러면 이거 하는데 며칠 걸릴낀데요?)

며칠까지는 안 걸리고 이때까지 나눠주는 게 다 그런 겁니다. 내가 컴퓨터를 잘 해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배울 생각 없습니다. 중요한 거는 그렇게 해도 아직 불편함을 못 느끼니까, 불편하면 나중에 더 공부를 하겠지. 어쨌든 오자가 있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거라. 그리고 스님이 워낙 문장을 쓰는 재주가 없으니까 문장들이 딱딱해요. 그거는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주시고, 그것은 내 몫이 아니고 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 몫입니다.

 

오늘 할 것은 상기띠(saṅgīti)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결집이 몇 번 일어났는지 아세요? 프린트에 볼 거 같으면 6차 결집, 마하 상기띠까지 합하면 그거는 7차에는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6차 결집을 완전하게 정립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갖다가 삿따(satta, 7), 에까(eka, 1) 번호를 붙이지 않고 '마하 상기띠(Mahā saṅgīti)' 그렇게 부릅니다.

 

결집을 왜 했을까? 부처님 입멸 이후에 왜 결집을 하게 됐을까?

경에서는 어느 바라문이 부처님이 열반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아, 인제는 잔소리꾼 없어서 좋다 하고 기뻐하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마음을 먹고 삼 개월 후에 마하깟사빠 존자가 상수제자가 돼서 오백 명의 아라한 스님들을 모아서 결집을 했다고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꼭 그와 같은 이유 때문에 결집을 했을까요? 결집했을 때의 언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일반적으로 빨리어는 뭡니까? 글이 아니죠? 말이죠!

근데 결집 땐 빨리어 말,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말을 얘기합니다. 이 말은 1차 결집 때 말하고 마지막 6차 결집 때 말은 똑같은 것일까? 글도 아니고 말인데. 그리고 제3차 결집 때까지는 말이 합송돼가지고 경전이 전해졌단 말이라요. 몇백년을.

그러니까 합송돼서 전해진 것들이 글자화되고 나서는, 그게 제4차 결집 때니까 4차 결집 이후에는 당연히 똑같은 글자로 써졌겠지 하고 판단들을 합니다.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스님 입장은 또 다르지만은.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그런 것들에 대한 의문은 접어두고 상기띠라고 하는 것은 결집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붓다사사나라고 하는 불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일언일구도 변경할 수도 없고, 더할 수도 없고 뺄 수도 없고 그대로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다 하는 걸 배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이 상기띠 입니다. 사실은.

 

내 혼자서는 부처님 말씀 잘 따른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자기 혼자서 부처님 말씀을 잘 따른다고 판단을 하지만 누가 그것을 옆에서 이것은 잘됐고 이것은 잘못됐다 하고 얘기해주기 전에는 자기 자신은 평생 그게 맞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뭔가 이게 부처님 말씀에서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라는 걸 증명해줄 필요성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뭡니까? 여러분들 같이 모여가지고 "지금 나는 부처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또 수행법은 이런 것이다" 하고 얘기하면 또 다른 사람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면서 서로 얘기해가지고 어떤 결론이 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게 상기띠라는 근본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맨 먼저 알아야 될 게 뭐냐 하면, 결집 때 했던 언어가 무슨 언어냐 하는 겁니다.

제1차 결집 때 했던 언어가 어떤 겁니까? 당연히 빨리어죠. 근데 빨리어라는 단어 자체는 빨리어 경전을, 여러분 말마따나 팔만사천경을 다 뒤져보아도 빨리어라는 단어 자체가 없습니다. (대답)

마가다의 민중언어다? 또 다른 사람은? (대답)

그게 부처님 당시 때 마가다가 중심이니까 마가다어의 민중언어다 그런 얘기죠? 과연 그럴까요? 곳곳에서는 그때 당시 마가다어의 언어가 아닌 부분이 빨리어에 나옵니다. 그럼 그런 것들은 어떻게 해명할 건데? (대답)

그럼 빨리어가 어디 말이라? (대답)

그래도 빨리어가 마가다 언어라고는 얘기를 못할 거 아니라? 부처님이 마가다에만 있은 건 아니니까. 그렇지 않아요? 왜 그 마가다언어라고, 중기 마가다언어니 뭐 어쩌니 그걸 규정을 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렇지는 않잖아. (대답)

 

근데 부처님 제자 입장에서 볼 거 같으면 뭔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정리해가지고, 요즘 같으면 머릿속에다 레코딩을 해야 되는데 이걸 어떤 방식으로 레코딩을 해야, 물론 부처님이 말하는 것들을 빨리 기억하기 쉽게끔 분류는 할 수는 있습니다. 분류는 할 수가 있는데 부처님이 '아'라고 말한 것을 '어'라고 정리해서 할 수는 없는 거 아니라. 부처님이 만약에 어떤 지방의 방언을 썼을 거 같으면 그걸 그대로 머릿속에다 기록을 해야지, 그걸 갖다가 내가 현대적으로 바꿔가지고 머릿속에 넣지는 않았을 거 아니라? 적어도 부처님 제자이고 아라한들인데. 일언일구도 바꾸지 못하도록 1차 결집 때 만들어졌으니까. (문답)

 

기억하기 쉽도록 한다는 것은 부처님이 말한 법문의 앞뒤 부분을 갖다가 쉽게 말하면 이게 전에 한 부분이 있고, 이게 또 후에 한 부분이 있는데, 이게 같은 동질성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요걸 갖다가 한곳으로 모은다는 얘기지, 하나의 내용을 앞뒤로 바꿔가지고 지멋대로 조정을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건 착각하지 마세요. 부처님 말씀은 일언일구도 바꾼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여기서 만약에 딴 얘기 안 하고 그냥 '공부 열심히 해라' 이렇게만 얘기했다고 할 것 같으면 경전에 그대로 기록을 해야 되는 거라. 이걸 '공부 열심히 해라' 하는 걸 자기가 부풀려가지고 '무엇 때문에 공부 열심히 해라' 했다 뭐 이렇게 덧붙일 수 없는 부분 아니라. 단지 여기서 공부 열심히 해라 하는 거하고, 또 저 후에 어디 또 다른 지방에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 이렇게 했다 할 것 같으면, 요 두 개는 같은 공부 열심히 해라 하는 계통이니까, 요 두 개는 한 경전에다가 한 곳에다가 외우기 쉽게끔 배열을 시킬 수 있다는 것이지, 그거는 법의 체계를 요렇게 맞출 수 있다는 것이지 그걸 갖다가 맘대로 내용 자체를 변경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부처님이 말한 것들을 그냥 그대로 기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빨리어(Pāli)라는 의미자체가 어떤 뜻이냐면 성전언어(聖典語)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는. 성전언어는 뭡니까? 성전은 뭘 뜻합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을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처음에 기록을 전에 하기 전에 언어 그 자체가 빨리어인데 그러면 그 빨리어를 뭐라고 해석을 해야 되느냐는 거라. 그냥 부처님 말씀이라! 부처님 말이라. 마가다 말이 아니고. 어디 또 다른 지방에 있는 꼬살라국 언어가 아니고 부처님 말이라.

빨리어라는 것은 그런 의미인 거라.

단지 부처님이 마가다 지방 쪽에 20년 이상 머물렀기 때문에 그쪽 말이 많다는 것인 뿐인 것이지 그 말이 전체는 아니라는 뜻이라. 어떨 때는 인도 방언이 섞이기도 하는 거고 또 다른 지방의 말들도 섞이기도 하는 거고, 그런 것이지 그래서 빨리어라고 하는 것은 특정 지방어로써 규정을 지을 수가 없는 말이라. 빨리어라는 게 인제 이해하겠습니까?

(질문)

어쨌든 지금부터는 그렇게 들으십시오. 왜 그러냐 하면 자꾸 사람들이 이걸 시시비비를 가릴려고 하거든. 처음부터 핀트를 잘못 맞추는 거라. 빨리어 자체를 갖다가 지금 언어상의 계통에서 글자로써 존재하고 있는 그 글자들로써의 계통으로서 하나로 집어넣을려고 자꾸 맞추다보니까 마가다어에도 집어넣어 보고, 어디에도 집어넣어 보고 했는데, 근데 빨리어로 기록된 걸 보니까 요거하고도 많이 맞기는 하더라도 일정 부분은 다르고, 저거하고도 많이 맞기도 하지만 일정 부분은 다르고 그러니까, 남부지방의 방언언어다 했다가 마가다어라고 했다가 이렇게 자꾸 바뀐다는 거라.

근데 실제적으로는 그 개념을 그렇게 정리해서는 안된다는 거라.

 

원래 빨리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제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일언일구도 바꾸지 않기 위해서 내가 처음에 머릿속에 레코딩 했던 것들이라. 그 레코딩했던 것들을 갖다가 나중에는 글자로써 적었다고. 그러면 만약에 글자로써 적을 때나 아니면 처음부터 레코딩할 때 부처님 말씀을 바꿔가지고 자기가 쓰고 있는 말로써 기록을 했다고 할 거 같으면 기록에서도 그렇게 돼야 될 거 아니라. 스리랑카에서도 빨리어를 갖다가 기록을 할 때 싱할라어로 기록을 해야지 왜 빨리어로 그냥 기록이 되어있느냐는 거라.

태국에서 태국말로 기록이 될 때, 그건 옛날엔 란나타이어죠? 그 란나타이어로 해가지고 의미를 적지 않고, 의미를 모르는데도 란나타이어로 적긴 적어도 빨리어로 적거든.

 

우리말로 쉽게 말하면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 상기띠라고 되어있다, 이걸 한글로 적을 때 '상 기 띠' 이렇게 적는 거라. 뭔 말인지도 몰라. 근데 이걸 갖다가 내가 이해를 할라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결집'이라고 적어야 내가 이해하고 후대사람들도 이해를 해. 근데 언어로써 기록을 할 때는 처음부터 아예 '상기띠'로 적는 거라. 부처님이 상기띠라고 말한 거니까. 스리랑카에서는 태국에서든 캄보디아에서든 버마에서든 나중에 빨리어가 글자로 기록된 나라가 네 나라입니다. 네 나라가 똑같이 그렇게 적었다는 거라. (질문)

의미로 적은 거는 전혀 없습니다. 말소리 그 자체로 적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그 네 나라 말을 통합해가지고 보면 태국 란나타이어로 적어놓은 빨리어나 스리랑카에서 싱할라어로 기록한 빨리어-싱할라 빨리어나, 그리고 린나타이어 빨리, 버마 빨리-깜부자 빨리 그럽니다. 그 4 나라 경전들을 가져와서 누구 한 사람보고 읽으라고 그러면 똑같습니다. 왜 똑같은지 아십니까? 그냥 그대로 적었기 때문이라는 거라.

 

의미로 적었을 거 같으면, 만약에 '나는 학교에 간다' 이럴 거 같으면 영어로 적을 거 같으면 '아이 고 투 스쿨(I go to school)' 적어야 되는데, 한국어로 적으니까 '나는 학교에 간다' 적는 거고, 태국어로 적을 때는 '홈 짜 빠이' 이렇게 적어야 되는 거고.

근데 그렇게 적었다고 했을 때, 그걸 읽어봐라 했을 경우엔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근데 그렇게 안 적었으니까, 그냥 부처님 말 그걸 그냥 그대로 적어버렸으니까, 음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적어버렸으니까 지금도 빨리어를 비교해보면 전혀 문제가 없는 거라.

 

단지 그걸 인제 각 나라에서 뒤늦게 의미 파악들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상기띠라고 할 것 같으면 요거는 '결집'이라는 의미다" 뒤늦게 의미를 파악해가지고 그걸 갖다가 자기들 말로 적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불문을 빨리어를 한글로 먼저 적고 나서 그 밑에 의미를 적고, 의미는 그 뒤의 일인 거라. 처음에 기록을 할 때는 어떤 경우든지 일언일구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에 음사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렇게 봤을 때 과연 그러면 빨리어가 마가다어나 남부 인도언어나 이런 것들이었겠냐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핀트를 잘못 잡는다는 말이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그냥 부처님 말씀이라는 거라. 그랬기 때문에 빨리어의 의미를 성전어(聖典語)라고 그럽니다. 성전어라는 건 바로 부처님 말씀입니다. 성전어로써 기록된 언어인 거고 그 기록되기 이전에 이미 그 장로 스님들에 의해서 머릿속에 레코딩 된 언어라는 거라. 빨리어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먼저 받아들이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야 빨리어에 대한 의문들이 없어집니다.

 

자, 제1차 결집부터 한번 봅시다.

(질문 : 붓다고사 스님, 논사 ...)

빨리어를 싱할라 언어로 적었다는 얘기죠. 잘못 이해하고 있구만. 그러니까 그렇게 음사되어 있는 걸 갖다가 다른 스님들은 그걸 갖다가 의미파악을 해가지고 경전으로 또 만들고 또 여기서도 경전으로 만들고 이렇게 그 뒤로 많이 일들이 일어났거든요. 그렇게 했는데 이걸 의미파악을 그렇게 하다 보니까 여기에서 번역한게 틀리고 저기에서 번역한 게 틀린단 말이라. 그러니까 붓다고사 스님이 아, 이건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해가지고 원래 처음에 만들어진 빨리어 언어 그걸 가지고 자기가 새로 정립을 하게 된 거라.

 

쉽게 말하면 그 빨리 언어를 갖다가 다시 풀어가지고 쓰는데, 그 고유로 쓰고 있던 싱할라 언어로써 써지는 게 아니고 물론 글자는 싱할라 언어 글자죠. 글자를 싱할라 글자로 쓰더라도 빨리어로써 풀이를 해가지고 한다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논사 부분에 들어가지는 거라. 그렇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만 된 게 아니고 경전들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그렇게 기록을 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상기띠가 부처님 입멸 이후에 결집할 때 이루어진 것들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는 그럼 이런 게 없었느냐는 거라.

그래서 여기 「상기띠 숫따」라고 하는 장부경전 33번째 경전을 예로 들어놓았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 이 합송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거라. 만약에 부처님 당시 때 합송이 없었으면 부처님 입멸 후에 오래되지도 않았고 삼 개월 후에 이런 과정으로써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록을 하도록 했겠어요?

무슨 마하깟사빠 존자가 얼마나 뛰어난 인물이기에 그럴 수 있겠어. 그건 아니라는 거라. 이미 부처님 당시 때부터 각각의 스님들이 부처님 말씀을 외우기 위해서 이런 합송 과정들이 있어왔다는 거라. 그 하나의 예가 이 장부경전에 나와 있는 거라.

 

그러니까 이 사리불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가 일(1) 이라고 하는 에까(eka), 하나에 해당되는 것은 어디 어디에 부처님이 말한 게 있고, 두 개에 해당이 되는 거는 뭐가 뭐가 있고, 세 개에 해당이 되는 거는 뭐가 뭐가 있고, 네 개에 해당이 되는 거는 뭐가 뭐가 있고 하는 것들을 이렇게 다 분류를 하는 거라.

삼이면 삼법인, 세 가지 고통, 뭐 어쩌고, 이런 것들로 분류를 해가지고 합송을 해가지고 얘기를 하거든.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래 니가 참 잘했다 칭찬하면서 합송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하면서 합송을 해야 된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외우기 편하다는 거라.

 

1차 결집 때 그 마하깟사빠 존자가 그 경과 율을 체계에 맞게끔 분류할 수 있는 것도 이미 계통적으로 그렇게 부처님 당시 때 만들어져 왔다는 거라. 이런 예들이 비일비재하게 나옵니다. 왕기사 라고 하는 분이 게송으로써 이렇게 하면 부처님이 아, 그거 참 합송 잘했다. 그러고 나서 대중들이 다같이 합송하도록 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 예를 지금도 듭니다.

 

스님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게 뭐냐 하면 우뽀삿타(Uposattha)라고 하는 포살입니다. 보름에 한 번씩은 꼭 합니다. 보름에 한번 모이면 합송을 합니다. 합송을 어떻게 하느냐면 여기 합송할 사람들이 쭉 다 모였습니다. 그러면 대표되는 스님이 여기 상위에 올라가 앉아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장 장로 스님이 뒤쪽에 앉든지 아니면 옆에 앉든지 이렇게 합니다. 근데 이 스님은 합송을 안해. 합송 안 하고 뭐 하느냐 하면 어느 놈이 틀리는지 이것만 보는 거라.

 

부처님 말씀은 어떤 경우에는 높낮이가 있었을 것이고 그리고 장단(長短)도 있었을 거 아니라. 이게 똑같은 말이라도 여기에도 보면 '상기-띠(saṅgīti)' 그렇게 됩니다. '기-' 가 길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상기띠' 똑같은 단음으로 읽었다, 그러면 딱 지적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될 거 아니라.

왜 그러냐면 읽는 사람은 합송하다 보면 지가 틀린지 안 틀리는지 잘 모릅니다. 근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들리거든. 그러니까 최고 장로스님은 가만히 있으면서 그 소리를 듣기만 하는 거라.

 

요즘은 글자로 돼있으니까 책을 딱 펴놔놓고 보면서 합니다. 물론 다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혹 틀리는가 아닌가 확인을 하는 거라.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 선창하는 스님 따라서 전부다가 선창을 해야 되는 거라. 계율에 대한 것들. 만약에 20분 해야 되는 건데도 대부분 보면 한 시간 반이 돼버립니다.

왜 그러느냐면 반드시 틀리는 사람들이 있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틀리면 아무리 3분의 2까지 갔다고 하더라도 다시 처음부터 또 돌아가야 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포살 들어가면 스님들 마다 그럽니다. “틀리지 마” 틀리는 사람들이 꼭 틀리거든. 요것만 틀리면 다시 몇십 분을 또 늘어나는 거라. “똑바로 정신차려” 이렇게 서로들 다짐들을 하고 합니다. 어쨌든 그 부분에 대한 것들이 완전하게 합치가 되기 전까지는 다시 또 합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거라.

 

스님들끼리 이런 얘기를 해야 되는데, 여러분들한테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되는데, 최고하기 싫은 게 뭐냐 하면 우뽀삿타 하는 거라. 죽겠어. 나는 다 외우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틀리더라도 우짜든지 거기에는 동참해가 있어야 되는 거라. 거기에는 일반인들도 못 들어가고 한번 문이 닫히고 나면 이거 끝나기 전까진 문을 열 수도 없어. 칠엽굴 상황이면 내가 이해가 돼. 이게 다 끝나기 전엔 절대 열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결집 다음에 내가 설명할려고 했던 부분이 뭐냐 하면 뭐였어요? 결집 다음에 뭐 한다고 해놨어요? 계단-시마라고 하는 그걸 설명을 할려고 하는 거라. 어쨌든 그런 과정들을 겪거든.

 

그래서 아, 말로써 전해진다는 것은 그마만큼 정확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인 의견, 생각들이 전혀 반영될 수가 없는 거라. 그리고 그게 완전하지 않으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어. 그리고 이건 안 외울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일단 출가한 스님이면 무조건 계본부는 다 외우는 거라. 외울 수밖에 없어. 그리고 또 다른 경전들, 이번에는 만약에 어느 것을 하겠다 그럴 거 같으면 그걸 또 쎄가 빠지게 해야 되는 거라. 안 할 수가 없는데 뭐.

 

지금도 그래요. 책으로 다 나와 있지만 책 보고 하는 법이 없습니다. 들어갈 때는 아예 아무것도 지참을 못합니다. 딱 나무꼬쟁이 하나를 들어갈 때 들고 들어가 가지고 꼽는 자리가 있습니다. 거기다가 탁 꽂아놓습니다. 그럼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나무꼬쟁이만 가지고 이번에 출석인원이 몇 명이다 하고 확인을 하고 안 왔으면, 누가 빈다 할 것 같으면 “잡아 온나” 합니다. 안 갈 수가 없는 상황이라. 대리로 내가 없는 상황에서는 상가띠, 상가띠라도 다른 사람한테 줘가지고 그걸 집어넣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상가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외우게 되는 거라.

 

근데 인간의 한계라는 것은 정해져 있습니다.

참 경전들이 많은데 이걸 다 외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어떻게 그럼 다 외워야 되겠어요? 니는 경장만 외우고, 여기는 경장 중에서 장부경전만 외우고, 여기는 중부경전만 외우고, 여기는 다른 상응부 경전 외우고 해라 그러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이거, 이거, 이거 취합을 하면 전체가 다 되는 거라. 옛날에는 이런 과정도 안 겪었어. 그런데 지금 워낙 부처님 당시 때보다도 머리가 다 떨어져 있어. 그러니까 안되니까 나중에는 이렇게 바뀌어나간다고. 처음에는 이런 구분이 없이 누구든지 그 전체를 다 외워야 돼. 경율 자체를. 그러다가 이걸 하나씩 찹터를 나누거든.

 

지금도 시험을 치면 일장법사, 이장법사, 삼장법사 하는 게 뭐냐 하면 한 장을 다 외우느냐, 그다음에 두 개장을 외우느냐, 세 개장을 외우느냐 그 차이입니다. 경전만 알고 있는가, 경전하고 율장하고 다 외우고 있는가, 아니면 경전하고 율장하고 논장하고를 다 이해하고 외우고 있는가, 그것 가지고 일장, 이장, 삼장법사 이렇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한 장도 다 못 외우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거든. 그중에는 디가 니까야만 장부경전만 외우겠다고 하면 그거는 일장도 안 되지. 장부를 외우는 거기 때문에 디가 니까야, 우리말로 할 것 같으면 '장부법사' 라고 하든지, 그다음에 상윳따 라고 할 것 같으면 '상윳따 제일스님' 그렇게 칭호를 정해주게 돼있는 거라.

그런 형태들을 띠어도 그렇게 되니까 문제가 뭐가 있느냐면, 어느 것들을 외우라고 했는데 요 그룹들 중에 농땡이들이 많아 갖고 못 외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거라. 이걸 우째야 돼요? 방법이 없겠죠!

 

경을 글자로 쓰게 된 게 그런 이유들입니다.

합송으로만 쭉 전해지며 몇백 년을 전해오다가 마지막에 가서 결국은 글자로 쓸 수밖에 없었던 게 그런 이유들입니다. 스리랑카에서 실제로 일어났거든. 이 스님이 하나 돌아가시고 나면 이걸 알고 있는 사람, 이걸 외우고 있고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져버리는 거라. 큰일 난거라.

부처님 말씀을 일획도 바꿀 수 없고 없앨 수도 없는데 없어지게 생겼는 거라. 어떡해야 돼? 그러니까 기록을 해야 되는 거라. 기록을 하는데 그럼 어떻게 기록을 해야 돼? 내 나라말로 기록을 할 거냐는 거라. 그렇게는 못한다는 거라. 그렇게 바꿀 수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기록은 하는데 부득불 그냥 빨리어, 부처님 말씀 그대로를 갖다가 기록을 하게 되는 거라. 그게 스리랑카에서도 그랬고, 태국에서도 그랬고,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경전들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리한데 제1차 결집이 왜 중요하냐? 왜 중요하겠어요?

어떤 것이든 처음에 토대 세우는 게 참 힘드는 겁니다. 토대 새우고 나면 그다음 하는 건 수월해요. 뭐 축제한다? 처음엔 축제 안 해본 사람들이 고생고생 해가면서 축제 기안하고 뼈대 만들어 놔놓으면, 그다음에 2회 3회 할 때는 쉬워. 그냥 따라하면 되니까. 그래서 제1차 결집이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근데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1차 결집을 하면서 아예 정해놔 버립니다. 부처님 말씀을 어느 누구도 변경 못 하고, 어느 누구도 첨가를 못 하고, 어느 누구도 이걸 훼손시킬 수 없다는 것으로 탁 못박아버립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까 만약에 여러분들 중에 한 사람이 나쁜 사람이 있다. 나중에 나쁜 짓을 해야 되는데 이걸 변경을 못한다면 굉장히 갑갑할 거라. 그래서 나중에 결집 자체를 부정하는 사태까지도 일어납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제1차 결집은 부정할 수가 없는 거라. 1차 결집은! 그거는 부처님 열반하고 나서 바로 일어난 거기 때문에 그걸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라. 그런데 거기에서 탁 못박아 놓으니까 더더구나 이걸 할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대승경전 같은 경우에는 제1차 결집은 테라와다 불교권하고 똑같습니다.

그런데 제3차 결집은 대승계통에서는 없습니다. 대승계통에서는 제2차 결집은 했는데 제3차 결집은 안 했다고 합니다. 제3차 결집 아소카 왕 때의 결집은 아예 없습니다.

 

근데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1차, 2차, 3차부터 해서 6차까지 쭉 이어나가는데, 아예 대승계통에서는 3차 결집 자체가 없습니다.

그거는 나중에 전문적인 것으로 들어가는데, 아소카 왕의 탄생 연대를 갖다가 불멸 후 100년으로 보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불멸 후 100년에는 제2차 결집이 있었거든. 열 가지 논쟁 부분에 대해서 있었는데, 그럼 2차 결집하고 3차 결집하고 동일한 때 행해졌다는 얘기가 돼버리는거라. 그러니까 뭐 하나를 빼지도 못하고 건들지도 못하고 하는 이런 부분도 있고.

그리고 제3차 결집 때 결정적인 문제가 뭐냐 하면 제3차 결집 때 축출되게 됩니다. 많은 스님들이, 거의 대부분의 스님들이 옷을 다 벗고 나갔습니다.

거기서 이미 1차 결집 때의 상황들을 갖다가 2차 결집 때 다시 확인하고, 제3차 결집 때 확인하고, 4차 결집 때 확인하고 이렇게 6차 결집까지 확인하게 되는 단계들을 넘어가게 되는데, 경과 율을 바꾸기 위해서 2차 3차 이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이!

 

그 과정들을 자꾸 확인하는 과정이었는데, 가장 강했던 확인이 뭐냐 하면 제3차 결집 아소카왕 때! 그때는 스님들이 부처님 말씀을 잘 따를려고도 하지 않고 게을러지고 이렇게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거의 대부분의 스님들이 옷을 벗고 나갔습니다. 그런 연유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승불교가 흥기하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간에 1차 결집하고 2, 3차 결집하고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경과 율의 부처님 말씀 자체를 변경하는 것이 아니고, 그다음에 문제가 생기면 확인하는 단계를 계속 거쳐왔다는 거라 결집을 하면서.

그랬기 때문에 1차 결집이 그마만큼 중요하다는 거라. 만약에 이 1차 결집이 없었을 거 같으면 끝끝내 나중에 다들 부정할려고 했을 거라.

 

그 대신에 그 부분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1차 결집 때는 당연히 글자가 써지기 전이니까 합송하는 방식으로 전체가 다 외우는 방식으로 했습니다. 오백명의 아라한, 완전히 깨달음을 이룬 분들이기 때문에 이분들이 거짓말할 리가 없는 거고, 완전하게 부처님 말씀이신 것만 조사 확인하고 나서 확인된 것들만 전부 합송을 해서 다 머릿속에 기억을 했던 상황들로써 확정을 딱 지어버렸습니다. 쉽게 말하면 대못을 탁 박아버린 상태가 됩니다. 변경도 못하게끔.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있는 거고, 이때는 경과 율만 있었습니다.

논장 부분이 없었죠? 물론 부처님 당시 때도 논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합송하는 형식으로 정리를 한 것은 아닙니다. 그건 그 뒤에 3차 결집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200년 뒤에.

어쨌든 그러고 나서 쭉 세월이 지나면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또 다른 결집의 형태를 띠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봤을 때 부처님의 원음을 손상하지 않고 쭉 지금까지 이어왔던 것이 바로 이런 결집의 효과들 때문입니다.

또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뭐냐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뭐냐 하면 '처음에 부처님 당시 때 불교가 있고 나서 그게 나중에 부파불교가 생겨서 부파불교에서 다시 또 대중부하고 상좌부하고 갈린다' 이렇게 이해를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중부하고 상좌부하고 나중에 부파불교 때 갈린다고 할 거 같으면 결집이 무슨 의미가 있어? 결집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결집을 하면, 만약에 상좌부에서 결집을 했다, 그럼 그걸 반대하기 위해서 대중부에서는 결집을 안 하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이거는 사리적으로도 안 맞는 거라.

 

원래 부처님이 말한 테라와다 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당시 때부터 해가지고 쭉 그대로 연결이 됩니다. 그러니까 1차 결집으로 인해서 그다음 2차 결집으로 되고, 3차 결집으로 되고 이렇게 계속 연결선상에서 지금까지 6차 결집까지 넘어와지게 되는 것이지, 그게 나중에 부파불교로 넘어와가지고 상좌부하고 대중부로 갈린다 할 거 같으면 또 문제가 틀려져버립니다.

그건 아니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이해하는 방식은 그게 아니라는 거라.

만약에 그렇게 됐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이 지구상에는 부처님 말씀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 부파불교의 각 부파들은 이미 다 없어졌습니다. 몇백 년 안 가서 다 없어졌습니다. 세월이 짧고 차이만 있다는 것뿐이지.

 

근데 왜 테라와다는 계속 유지가 돼나갔을까? 똑같은 부파라고 할 것 같으면. 거기에 무슨 세력이 많아서 그랬겠어요? 그거는 아니라는 거라. 그 부파하고는 별개로 이미 테라와다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를 해왔고, 그것을 면면히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를 해나가는 거라.

단지 이게 문제가 될 거 같으면 결집을 통해서 다른 것들을 전부 쳤어요. 쳐도 이미 부파에서 대중부의 세력이 커져 있는 것 같은 경우에는 용인을 안 하겠지. 안 하는 건 할 수가 없는 거라. 안 하는 것은 안 하는 것으로 놔두고, 놔두고 나는 그냥 내 길만 간다 하는 식으로 쭉 내려오게 되는 거라. 그게 테라와다 라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테라와다나 대승불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당시 때 이후에 부파불교 시대 때 생겨난 종파로써 이해를 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반드시 관점을 바꾸어야 됩니다.

(수행자 질문)

예. 그 부분은 내가 얘기할 부분은 못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런 것이 빨리어 경전 내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이 뭐냐 하면, 그걸 또 뒷받침해주는 것들이 뭐냐 하면 빨리어 경전은 삼장의 형태로 완전하게 지금까지도 보존이 돼 옵니다.

부파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1차 결집 때 만들어진 것들이, 그리고 제3차 결집 때까지 글로 써진 게 아닙니다. 이미 3차 결집 때 칠사, 일곱 가지 논사 부분까지 다 확립이 돼서 그때 정립이 다 됩니다.

 

그게 증명이 되는 것들이 각각의 인도의 역사라든지 스리랑카 역사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고 그 내용까지도 합치가 되게 됩니다. 그럼 이미 글로써 만들기 전부터 경율론장이 이미 3차 결집 때까지는 완전히 완성이 됩니다, 200년 이후까지는. 근데 이 부분이 쭉 지금까지도 완전하게 유지가 돼 나갑니다. 스리랑카만 그런 게 아니고 태국 버마 캄보디아 이런데도 꼭 마찬가지로! 테라와다 불교의 빨리어 경전은! 글로 써지고 나서도!

 

그런데 부파불교 시대부터 만들어져왔던 각각의 파들, 대승불교의 파든 아니면 상좌부 불교 중에서 빠져나간 그러니까 테라와다에서도 또 반기를 드는 무리들 그 무리들이 또 하나의 파를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꼭 대승불교의 본체가 되는 대중부만 그리된 게 아니고, 그런 파들은 경전들이 나중에 다 없어져버립니다. 있더라도 완전하게 갖춰진 것은 어느 군데도 없다는 거라. 하나라도 경전, 경장이라도 완전하게 갖춰있는 것이 없다는 거라. 부파불교라는 게 원래 그럽니다. 왜? 세력이 오래가지 못했으니까. 기껏 오래 가봐야 삼백 년 사백 년 갔으니까. 그러면서 각각의 기록들을 해놓은 것은 다 소실되었을 뿐 아니라, 소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완전하게 체제를 갖출 수 있는 상황들이 못 됐어요. 테라와다와는 다르게.

 

그러니까 원래의 토대를 어디로 잡아야 되겠어요? 만약에 부파불교에서 각각의 경전들을 완전히 만들지 못했을 거 같으면 부처님 말씀을 어디다가 잡았겠어요? 테라와다에 잡을 수밖에 없는 거라. 그게 토대가 되어야만이 거기에서 자기가 변형을 가져오고 다시 덧붙이고 할 수 있을 거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만. 그러니까 부파불교 때 만들어지는 경전들은 일부들 밖에 못 남는 거라. 전체를 만들 수가 없는 거라. 왜? 이런 과정들을, 합송이라는 과정들을 겪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 테라와다는 부처님 당시 때부터 해가지고 계속적으로 이렇게 해왔거든.

그래서 결집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오히려 테라와다는 더욱더 변형 불가하는 것으로 바뀌어져 나가게 됩니다. 어떻게 되냐면 글자로 썼으니까, 4차 결집은 글자로 썼으니까. 글자 이거는,

 

종이는 빨라나무라 해가지고 야자나무 비슷하게 생겼는데, 안에 보면 그물망 형태로 줄이 있습니다. 나뭇잎살이라 해야 되나? 그 나뭇잎살이 그물망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 그물망 형태 앞뒤로는 꼭 종이를 붙여놓은 것처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나뭇잎의 형태를 쪼개보면. 그러니까 거기다가 글씨를 쓰고 하는 거라.

 

글씨를 쓰니까 어떻게 돼요? 그물망 형태로 되어있으니까 각이 지면 어떻게 되겠어? 각이 져버리면 요부분은 잘려져 나가버려. 그러니까 각이 지지 않는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쓰는 거라. 그러니까 빨리어 네 나라에 써진 것들이 전부 보면 글씨들이 그 나라에 맞게끔 다 동글동글동글 합니다.

 

그런 과정을 겪어왔는데도 어쨌든 나뭇잎은 나뭇잎이라. 그게 얼마나 오래 가겠어요? 천년을 가겠어요, 이천년을 가겠어요? 뭐 천년을 갈 수도 있어. 그렇지만 그건 어쨌든 없어지니까. 이거 없어지면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이미 합송하는 체제는 없어졌는데.

그러니까 5차 결집이나 6차 결집 땐 더 강한 걸로, 돌에다가 새겨넣고, 그다음에 요즘은 돌 말고 금속이 나오잖아. 청동이라고 해야 되나? 그거에다가 새겨넣고. 5차 결집, 6차 결집이 그런 과정이라. 그 1차 결집 때 했던 내용들을 변경하는 게 아니고, 이걸 더 변경 못하게끔 아예 돌판에 만들어갖고,

 

지금도 태국에 붓다몬톤에 가면 대리석에다가 경전을 전부 새겨가지고 한 사원이 있습니다. 붓다몬톤이라고 해가지고 '부처님 공원'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테라와다의 불교국가 그리고 각각의 파들에서 다 돈을 기부해갖고 만든 곳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여의도 만한 곳입니다. 스님들만 가는 것이 아니고, 모든 국제행사는 거의 대부분 거기서 해요.

지금도 모든 국제행사나 이런 것들을 태국에서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런 이유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 사원에다가 그러니까 한 사원인데 그중에 하나의 건물에다가 전부 대리석으로 전부다 해놓았습니다.

그런 과정이 상기띠 라는 의미입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됐는데, 어쨌든 지금은 마하 상기띠 라고 하는 것은,

그전에는 각 나라에서 조그마한 것들은 차이가 났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데는 '상기띠(saṅgīti)'를 상기 'gī'를 갖다가 'ghi'로 쓴 데도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gī'로 쓰는 경우도 있을 거고, 그다음에 'ī'를 갖다가 어떤 데는 '단음(i)'으로 쓰는 경우도 있었고 이랬거든. 이걸 갖다가 전체를 다 취합을 했어요.

취합해가지고 다른 나라 스님들 각 나라 스님들한테 다 물어보고 나서 완전하게 정리한 게 뭐냐 하면 지금 「마하 상기띠(mahā saṅgīti) 입니다! 이게 지금 만들어진 지가 한 10년 정도, 십 년이 채 못 되는 과정입니다. 지금은 모든 빨리어는 이게 주안입니다. 이게 6차 결집 때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전에 이것이 있기 전에 뭐가 있었냐면 '빨리어 텍스트 소사이어티'라 해가지고 'PTS' 라는 서양에서 만든 것이 있습니다. 그 그룹들이 각 나라에 있는 PTS 본들 모아가지고 로마나로 썼습니다. 저기에도 보면 그 책이 있는데, 하나의 로마나를 쭉 한 나라 걸 썼습니다. 그 밑에는 보면 's' 라고 해갖고 만약에 '소니'라고 돼있다. 거기다가 '일본' 표시를 해놓으면 그 밑에 '주)'에다가 's'는 'sony'를 'ny'가 아니고 'i'로 했다 하고 'soni' 이렇게 적어놓고, 그다음에 'b'는 버마에서 'so'가 아니고 'se' 뭐 'ny'로 되어있다. 'b'는 뭐 이렇게 적어놓고, 이렇게 '주)'를 적어놓는 거라.

 

근데 그게 각 페이지 당 하나 아니면 두 개밖에는 없다는 거라. 음으로써 합송해 놓은 게 그마만큼 정확하다는 거라. 이천년이 넘어도 전혀 그게 안 바꼈다는 거라. 근데 글자는 많이 바뀝니다. 글자로 기록해 놓은 거는 그게 안 바뀔 거 같죠? 근데 그거는 이 글자를 자기가 변경해가지고 이걸 없애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합송이라는 것은 대중들이 전체가 모여가지고 다 기억하고 그걸 다 외우는 형태이기 때문에 절대 바뀔 수가 없다는 거라.

여기까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