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라와다 불교도의 서원 (20110315)
여러분들은 지금 테라와다 불교를 하고 있는데, 테라와다 불교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 보통 공통되는 특색이 있습니다. “어렵다!” 하는 거라. 어렵다 하는 겁니다.
그냥 간단하게 백일기도면 백일기도, 아니면 삼칠일기도면 삼칠일기도, 아니면 정초기도면 정초기도 이렇게 해서 딱 날짜 정해서 그것만 딱 하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보통 테라와다 불교도들의 생각하고 지금 대승불교도들의 생각은 조금 차이가 납니다.
테라와다 불교도들 같은 경우에는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만 합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한 일들을 힘써 행하는 것, 공덕을 쌓는 것, 수행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장차 깨달음에 이르는 것들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 이런 것들을 목표로 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보통 하고 있는 것 한번 볼까요? 오늘은 우뽀삿타 날이죠? 불재일이죠? 그래서 조금 전에 스님한테 팔계를 받아 지녔습니다. 불재일을 지키죠! 그다음에 또 뭐합니까? 오늘 또 뭐했어요? 스님한테 탁발했죠? 탁발 올리는 것! 뭐 그다음에 계율을 받아지녀서 그것따라 실천하는 것! 또 수행하는 것! 이런 여러 가지들을 합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도들이 이런 것들을 하면서 하는 서원들이 있습니다.
그 내용들을 한번 스님이 간추려 보니까 그 내용이 뭐냐 하면, 그런 선한 일들을 하고 나서 반드시 하는 것들이 이 "공덕회향 게송" 입니다.
이 공덕에 의해 우리가 다음 세상에서 천상에 태어나기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라고 하는 네 가지 악도에 결코 빠지지 않기를!
만약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부족함이 없이 풍요롭기를!
그러나 그 풍요한 재물에 대해서 집착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 재물로 삼보와 궁핍한 사람들에게 한량없는 보시를 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를!
이와 같은 공덕을 쌓고 바라밀을 완성해서 탐·진·치를 끊어버리고 모든 부처님이 최고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해탈에 이르러서 윤회의 괴로움을 넘어서기를!
하는 그런 서원들을 합니다.
어찌 보면 참 현실적이죠? 현실적인데 그 서원들은 보면 이생에서 끝나는 서원이 아닙니다. 두고두고 계속 윤회하는 동안에 이러한 서원들에 따라서 살아가고 또 그렇게 하다 보니까 결국 마지막에는 해탈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그런 서원으로 끝이 납니다. 이게 보통 테라와다 불교도들이 하나의 공덕을 쌓고 나면 하는 공덕서원 회향게송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거 하죠?
"이당 메 다낭 닙바낫사 빳짜요 호뚜. 이당 메 실랑..." 여러 가지로 게송들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이 서원들을 보통 세웁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탁발 올릴 때 탁발올리고 나서 게송이 뭐였어요? 틀림없이 했을 겁니다. 단체적으로 같이하는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하는 것도 있고 한데, 그런데 조금 전에 스님이 한 이 서원의 범주를 벗어나지지를 않습니다.
여기에는 특정하게 날짜를 정해놓은 건 없죠? 이 날짜 동안에 공덕을 쌓겠다. 이 날짜 동안에 뭐를 하겠다는 그런 것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해탈할 때까지 끊임없이 해나가겠다 하는 그런 서원입니다.
왜 이런 서원들을 세우게 될까?
죽고 나서 다음에 사악도에 빠지지 않기를, 사람으로 태어나도 좀 더 부유하게 태어나기를, 그래서 그 재물에 대해서 집착을 가지지 않아서 여러 사람들 그리고 삼보에게 보시할 수 있기를, 그건 어떻게 보면 참 현실적인 부분들이라.
지금 여러분들은 수행자니까 열심히 수행을 합니다.
수행을 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다른 공덕을 쌓지 않았다. 어떻게 될 거 같애?
혹시 그런 생각해본 적 있어요?
열심히 스님 법문을 듣고 열심히 수행을 했다. 그런데 누구든지 다 이생에서 깨달아라 하는 법은 없습니다. 못 깨닫는 사람들도 더 많죠?
그럼 그분들은 어떻게 되는 거라? 쌓은 공덕이 없는데.
한 번도 오계를 지킨 적이 없고, 오계를 받아본 적도 없고, 또 이렇게 스님들한테 탁발 올린 적도 없어. 우리 선원만 지금 이렇게 하고 있지 다른 데 가면 보통 그렇습니다. 그냥 수행만 합니다. 삼귀의·오계 받는 것도 없고 탁발 올리는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기브앤테이크(give and take) 같은 형식입니다.
내가 만 원을 냈으니까 만 원어치 여기 와서 수행하고 갑니다. 그래서 금액을 딱 정해놓고 이렇게들 합니다. 우리같이 자율적으로 하는 법도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테라와다 불교도들은 이런 불안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생에서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그럼 공덕을 쌓지 못했으니까, 좋은 업을 짓지 못했으니까,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없다는 생각들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죠? 수행하는 것도 공덕 쌓는 거죠? 그걸 하나를 빼먹기도 합니다.
근데 수행하는 것보다 공덕 쌓기 좋은 것들이 틀림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국가의 사람들은 그 공덕 쌓는 일도 등한시하지 않게 됩니다. 얼마나 하기 쉬워? 하루종일 와서 수행하는 것보다, 잠깐이라도 와서 스님한테 공양물 올리고 탁발올리고 공덕 쌓기 훨씬 쉽습니다. 그리고 오계 받아서 오계 지키는 것, 일상생활하면서 하는 것 얼마든지 하기 쉽습니다.
그거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들이 있습니다. 아, 오늘은 불재일이니까 마음을 좀 깨끗하게 먹고 화를 안 내야 되겠다. 또 오늘 만큼은 욕심부리지 않아야 되겠다. 오늘 만큼은 게으르지 않아야 되겠다. 다 공덕 쌓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수행을 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근데 한국은 가끔씩 이 부분을 잊어버린다는 거라.
공덕 쌓기 좋은 일들은 놔두고 그거는 회피해버리고, 오로지 수행만 하면 된다는 생각들을 가지게끔 된다는 거라. 그게 지금 남방불교 여러 나라에서 테라와다 재가신자들이 가지는 생각하고, 한국의 테라와다 신자들이 가지는 생각하고의 차이점이라.
여러분들은 적어도 여기 우리 붓다의 길따라 선원에 다니는 사람들은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공덕 쌓는 일에 어떤 것들을 구분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지금 내가 공덕 쌓는 일이 수월한 것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 공덕 반드시 쌓아야 된다는 거라. 물론 수행하는 것도 덜해지면 안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테라와다 불교도들은 수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멀고 험하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이생에서 끝내지 못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의 다음 생에서 좀 더 좋은 조건으로 태어나고 그런 조건들로 인해서 계속 공덕을 쌓는 일들을 행하기 위해서, 지금 공덕을 쌓는 일들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거라. 이것은 해탈에 이를 때까지 줄기차게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 한 번하고 말아야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일정하게 계획을 세웁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먼저 하는 것이 스님들에게 공양물 올릴 걸 먼저 만드는 거고, 또 오늘은 불재일이다 할 거 같으면 만사 제쳐놔 놓고 회사 끝나고 나면 선원에 가서 스님한테 삼귀의·오계를 받고 수행을 하고 또 설법을 듣고 하는 것들이 아예 딱 못이 박혀져 있습니다.
우리들은 보통 보면 계획을 잘 세우는 것들을 등한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해탈에 이를 때까지 어떤 계획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선등님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누구는 열심히 수행하면 된다고 생각합니까? 당연히 그건 없겠죠. 그런데 그거 말고 다른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습니까? 극히 한국적이네.
어찌보면 테라와다 불교도들의 계획은 굉장히 스케일이 크죠? 이생에서 끝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해탈에 이를 때까지 긴 윤회하는 세월 동안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거니까 굉장히 스케일이 큽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이런 태국이나 버마나 스리랑카 가서 사람들을 보고 그 사람들 마음은 참 편안해 보이고 얼굴이 항상 미소를 짓고 있다 하는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합니다. 물론 불교적인 영향들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렇겠죠.
왜 그렇게 될까? 얼마 전에 스리랑카에 쓰나미 있었죠? 아마 우리 같으면 쓰나미가 그렇게 올 거 같으면 두고두고 아마 마음고생을 할 겁니다. 내 집이 다 떠내려 가버렸고, 재산을 다 잃어버렸다고, 아니면 가족을 잃어버렸다고, 두고두고 가슴에 멍이 듭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서 내 가족 중에 누구 하나 돌아가셨다. 가장 친한 내 가족 부모님이든 아니면 내 자식이든 누가 돌아가셨다 그럴 거 같으면 그거 두고두고 가슴에 못이 박혀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일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리랑카 사람들도 틀림없이 쓰나미 때 그렇게 됐을 거란 말이라. 그럼 그 사람들도 그렇게 가지고 있을까? 그렇게 가슴에 꽉 담아두고 있을까? 우리하고 차이가 나는 거라. 그 사람들은 보통 일주일 이주일 지나고나면 그부분은 싸그리 잊어버립니다.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또 여러 가지 재난을 당했을 때 내가 계획된 삶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을 뛰어넘게 됩니다. 지금 내가 계획된 삶에 의해서 내가 지금 해야 될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미쳐 생각하고 거기에 안주해가지고 아, 내가 힘들다 불행하다 하고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거라.
계획대로 그대로 따라가는 거라. 왜? 불재일은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거고, 매일같이 스님들한테 탁발을 해야 되는 거고, 계속적으로 내가 계획된 일들이 일어나게 돼있다는 거라. 그럼 거기 안주해 있어가지고는 그 일들을 못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좋은 일이 일어나든 불행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선한 행위 선한 공덕을 쌓는 것들을 등한시할 수 없기 때문에, 설혹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얼마 안 있으면 그걸 다 잊어버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거라. 금방 밝아지고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띠게끔 이렇게 돼나갑니다.
여러분들 계획이 쭉 잡혀있다고 할 거 같으면 다른 것에 그렇게 마음을 뺏기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완전히 없을 수는 없겠죠. 그리하더라도 그것에 전적으로 마음이 뺏겨서 하는 일을 못할 정도가 되지는 않는다는 거라. 숨을 들이쉬고 나면 내쉬어야 되기 때문에 들이쉬고 나서 멈추고 있을 수 없다는 거라. 반드시 내쉬게 돼있다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색은 '산딧티까(sandiṭṭhik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내가 여기서 즉시 증명할 수 있는 것. 지금 내가 그 가르침 따라 실천하다 보니까 그것을 내가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만약에 내가 죽고 나서 아무리 공덕을 쌓아도 천상에 태어난다든지 아니면 좀 더 좋은 인간의 몸으로 받는다고 보장할 수 없을 거 같으면 어떻게 될까? 이런 계획들을 세울 수 있을까? 이러한 공덕으로 인해서 내가 다음 세상에 천상에 태어나기를, 좀 더 좋은 인간의 조간으로 태어나기를, 그래서 더욱더 보시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이런 마음들을 가질 수 있을까?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만약에 그런 영원한 천국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만약에 그러한 영원한 천국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으로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죽고 나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되는 거죠. 다른 것들은 그렇게 증명될 수 없는 건데 부처님의 말씀은 '산딧티까(sandiṭṭhika)'라고 그랬거든.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인 것을 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사가라와'라고 하는 바라문이 어느 날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부처님은 능력이 굉장히 뛰어난 분이고 그렇게 깨달음을 이루신 분인데, 한사람이라도 부처님과 같은 그런 능력과 그런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부처님께 물어봅니다.
“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많이 있다. 수백 명 수천 명이 나하고 똑같은 그런 깨달음에 이르렀다.” 그럽니다. 직접 증명했다는 거라. 그 진리들을.
여러분들도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면 부처님과 같은 경지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깨달음을 향해서 열심히들 나아가고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런 거라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증명되지 않을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 이 길로 가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확신이 들고 아, 이렇게 부처님 말씀대로 하니까 내가 탐·진·치가 점점 더 떨어져나간다는 사실을 내가 증명할 수 없을 거 같으면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그럽니다. "나는 정자각자다! 바르게 깨달은 자이고 또한 나는 의사다." 바르게 깨달아서 그 길을 가르쳐줬을 뿐 아니라 병이 들었을 때 그 병을 치유해주는 의사라는 거라.
어떤 의사가 이 약을 먹으면 당신의 병이 20년 후에 치료될 것이다 할 거 같으면 누가 그 약 먹겠어요? 이 약 먹고 나면 다음 생에서 당신의 병이 치유될 것이다. 누가 그 약 먹겠어요? 안 먹는다는 거라. 이 약 먹으면 즉시 효과가 나타나야 된다는 거라. 의사는 그래서 의사라. 몇십 년 후에 치유되고 다음 생에서 치유될 것 같으면 그게 무슨 의사가 되느냐는 거라? 그런 의사에게는 안 간다는 거라.
지금 즉시 가르침을 실천하면 현실적으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불가결한 것들이 바로 불교라는 것입니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서 실천한다 해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다 해탈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중 일부분만 그렇게 됐죠. 지금도 마찬가지고. 해탈에 이르는 사람이 적은 것은 사실이라. 그것은 사람들의 이해능력의 문제인 것이지 그 가르침의 잘못은 아니라는 거라. 가르침은 분명하게 설해져 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그렇게 이르지 못한다는 거라.
그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어떻게 바뀌어나가느냐 하는 거라.
부처님한테 그런 얘기를 물어봅니다.
“사마디(samādhi)를 실천하면 어떤 이익들이 있습니까? 또 위빳사나(vipassanā) 수행을 실천하면 어떤 이익들이 있습니까? 또 사마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위빳사나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마디를 성취하면 마음의 안정과 몸의 건강함이 따라와지고, 여러 가지 신통능력들이 생겨난다. 위빳사나를 잘 닦고 성취를 하면 해탈에 이르게 된다. 마음의 지혜가 있어서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사마디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욕락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위빳사나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즐거운 것은 즐거운 것이라고 인식들을 합니다. 맛있는 것은 맛있는 거라고 인식들을 하게 됩니다. 오욕락을 버리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갖고 맛있는 것에 대해서 더욱더 먹을려고 하게 되고 좋은 것에 대해서 집착하게 된다는 거라.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는 거라. 오욕락을 버려버리고 사물에 대한 집착을 없애버려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집착하면 괴로움이 따라옵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더 잘 알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공덕 쌓는 일들에 등한시해서는 안됩니다.
마음으로 망상하거나 생각하는 것들을 반드시 제어를 해야 됩니다.
만약에 어떤 생각을 할려고 할 거 같으면 밝은 것을 생각해야 된다는 겁니다. 뭔가 도움이 되는 것들을 생각을 해야 됩니다. 어두운 마음, 그리고 화내는 마음, 집착하는 마음, 즐길려고 하는 마음 이런 것들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러한 것들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리고 그 자리에서 멈추어버려야 됩니다. 그리해야 만이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게 유지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말을 할 때도 감정을 섞어서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이것을 말을 해가지고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잘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 되는 것이지, 생각나는 대로 마음의 번뇌에 의해서 말을 그대로 다 해버릴 거 같으면 그것은 안 된다는 겁니다.
살아가면서는 여러 가지 움직임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행위들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 행위를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이러한 것들이 도움이 되는지를 반드시 생각을 해야 됩니다. 또 이러한 행위들이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닌지,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반드시 판단해야 됩니다. 그래서 도움이 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행위는 해야 됩니다.
내가 걷고 있는데 걸으면서 마음이 고요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거는 걸어야 됩니다. 그래서 걸어갈 때도 왼발 오른발 하면서 알아차리면서 걸어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걸어가면서도 왼발 오른발인지도 모르고 걸어가다 보면 실수를 하고 웅덩이에 빠지게끔 됩니다. 그런 걸음은 걷지 말아라는 거라.
모든 선한 사람들이 이 길을 칭찬했고 이 길을 따라갈 것 같으면 해탈에 이른다 하고 얘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테라와다 불교도들은 반드시 계획을 세워야 됩니다. 장기적인 계획!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실천해나가는 사람은 내가 이생에서 지금 현재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선한 공덕을 쌓았고, 나는 신구의를 그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갔기 때문에 지금 내가 행복합니다. 오욕락을 즐기지도 않고 집착하는 것들도 없기 때문에 지금 현재 행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는 곧바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담마빠다에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말을 '와짜 누라키' 그렇게 얘기합니다.
"말을 잘 지켜라" 말을 할 때 말하는 것을 잘 지켜라는 거라.
그래서 말을 할 때 뭘 알아차리라고 그랬어요? 초보자들은 말을 할 때 내 귀에다가 마음을 두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하라는 거라. 조금 그것이 되고 나면, 내가 말을 할 때 내 입술이 달싹달싹하면서 입술이 움직이는 것, 입술에서 느껴지는 느낌들을 알아차려라!
아, 이것이 부드럽게 말을 하고 있는가, 바른말을 하고 있는가? 이렇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물론 그전에 말을 하기 전에, 이 말을 한 거 가지고 내가 어떤 이익이 있고 어떤 행복들을 가져오는가 하는 것들도 생각을 해야 되는 거고, 말을 하고 나서도 말한 것에 대해서 아, 내가 바른말을 했나 안했나 하는 것들을 다시 숙고하고 고찰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을 "말을 지킨다"라고 그럽니다. 말을 할 때는 반드시 말을 지키도록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마음을 잘 다스려라" 했습니다.
탐·진·치가 있는 마음인가, 여러 가지 망상들로 인해서 더러워진 마음인가 하는 것들을 잘 판단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몸으로는 악행을 하지 말아라"
이 세 가지 행위를 청정히 하면 현명한 사람들이 반드시 이 길을 따라서 도에 이르른다 하고 얘기를 한 것이다.
몸으로 생명들을 자꾸 사랑하는 마음들을 가지는 것, 그리고 합법적으로 정직하게 일을 해서 수입을 얻도록 하는 것, 부정한 방법으로 얻을려고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살아가면서 오욕락을 즐기지 않을 수는 없다는 거라. 근데 오욕락을 즐기더라도 반드시 적당함을 알아라. 분수에 넘치지 않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서 그런 절제함을 알기 위해서 평상시 때는 항상 오계를 받아 지니려고 하고, 일주일에 한번 씩은 우뽀삿타 날에는 팔계를 받아 지닐려고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걸 계속 지켜나가도록 해야 되는 거라. 그래야 절제함을 안다는 거라. 적당함을 안다는 거라. 몸으로 이렇게 해나가라는 거라.
말로써는 항상 진실을 말하라 하는 거라.
사실만을 말할려고 하고 거짓말하지 말고, 마음은 항상 온화하게, 항상 평온한 상태로써 말을 하라는 거라. 또 말을 하더라도 그 사람과 좀 더 바람직한 관계가 되도록 말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 사람을 이간질하고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을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어떤 말을 하든지 도움이 되는 말을 하라. 쓸데없는 말, 잡담 같은 건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 사람이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고 그 사람이 공부를 해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얘기들을 하라는 거라. 말로써는 이렇게 하라는 거라.
마음으로써는 항상 욕구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적당함을 알아서 그 욕구를 지나치게 가지지 말도록 하라. 욕구는 생겨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근데 그 적당함을 모르면 그 욕구를 더욱더 충족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나친 욕구를 가질려고 하지 말아라. 지나치게 욕심부리지 말아라는 거라. 그리고 지나치게 화를 낼려고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자꾸 마음속에서 자애로운 마음들을 길러서 지나치게 화를 내는 것들을 자꾸 방지해나가라는 거라.
그리고 어떤 것들을 판단할 때라도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하라는 거라.
자기 주관에 의해서 판단하고 그것에 따라서 마음을 먹고 행동하지 말아라는 거라.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나서, 조사한 것이 확인되고 나서, 판단을 해도 늦지 않다는 거라.
나쁜 견해들은 자꾸 수행을 통해서 나에게 바른 견해가 생기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무상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수행을 통해서 자꾸 증명하도록 하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바른 견해들이 서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나의 주관에 의해서 판단할려고 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자꾸 판단할려고 하게 된다는 겁니다.
지혜를 기를려면 우선 갖추어야 되는 것이 보통 세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참 많이 들었을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데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만 알아들을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나의 삶의 방법"이라고 알아야 된다는 거라. 부처님이 “거짓말하지 마라” 할 거 같으면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거라. 나는 살아갈 때 절대 거짓말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해야 된다는 거라. “욕심부리지 마라” 할 거 같으면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나의 삶의 방법이라고 자꾸 알아차리고, 그것 따라서 자꾸 살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지혜가 길러집니다.
지혜로운 자! 정자각자가 말을 한 것이고 그 방법따라 살아가신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당연히 그 방법 따라서 살아가야 됩니다. 부처님은 그 방법따라 살아가지 않으면서 말로만 그렇게 했을 수는 없을 거 아니라? 그러면 우리는 그분을 정자각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완전한 분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곧 나의 삶의 방법이라고 판단하고 그 방법 따라 자꾸 따라가라는 거라.
두 번째 지혜를 더욱더 기를려고 할 거 같으면 "정견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라"는 거라.
바른 견해를 실천할려고 할 거 같으면 지금 현재 일어나는 악한 마음 악한 감정들을 줄일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생각이 일어나고 악한 마음이 자꾸 들어서 남을, 또 자기 자신을 해꼬지하려는 마음이 들고, 이런 것들을 줄여나가라는 거라.
정견은 평온한 마음에서 이성적이 될 때 정견이 성립됩니다. 자기는 바른 견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는 악한 감정이 있을 것 같으면 그거는 절대 바른 견해가 될 수가 없습니다.
가끔씩 얘기를 하다 보면 자기의 잘못을 꼬집을 거 같으면 그 사람은 그럽니다. “정신 차려라” 할 거 같으면, 그 사람은 “나 지금 정신 차리고 있다” 정신차리고 있다고 하면서도 말하는 건 보면 화를 내고 있다는 거라. 그거는 정신을 차린 상태가 아니라. 화를 낸 상태인 것이지.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악한 감정 없이 생각하고 판단하게 될 때 그것이 바른 견해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정견을 자꾸 실천하도록 해야 됩니다. 악한 감정 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는 인과! 원인·결과를 분명하게 알도록 할 것.
원인 결과를 이해하도록 하라는 거라. 무상을 알면 원인·결과를 압니다. 고를 알면 원인·결과를 압니다. 무아인 줄을 알면 원인·결과를 알게 됩니다.
원인을 지었으면 결과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자꾸 착각을 하는 거라. 원인을 지어놔 놓고 결과는 안 받을려고 하는 거라. 또 원인을 지어놓으면 더 큰 결과를 받을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는 법은 없습니다.
좋은 것을 했을 거 같으면 더 좋은 결과를 받을려고 더 많은 결과를 받을려고 그러고, 나쁜 원인을 지었으면 그것을 안 받을려고 그럽니다. 근데 그렇게 되는 법이 없다는 거라. 원인·결과를 반드시 이해할려고 해야 됩니다.
지혜를 기를려고 할 것 같으면 이 세 가지를 먼저 자꾸 실천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고 행하는 것들이 바로 성립되게 됩니다. 설립되게 됩니다. 바로 세우게 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등한히 하면 안 됩니다. 설혹 누가 이간질하는 것으로 인해서 서로 싸워가지고 두 사람이 등을 돌리게 됐다. 그러면 이간질 한 사람은 이 두 사람이 다신 안 보면 결과는 안 나타날 것 같죠? 반드시 나타납니다.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구절들이 나옵니다.
세 스님이 있다가 두 스님이 너무 친한 모습을 보고 이 두 스님을 이간질시킵니다. 이 사람에게는 저 사람이 나쁘다고 하더라. 저 사람에게 가서는 또 이 사람이 나쁘다고 하더라 하고 서로 이간질시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생각할 때는 왜 저 사람이 나를 보고 나쁘다고 했을까 하고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또 저 사람이 생각했을 때는 왜 이 사람이 나를 나쁘다고 생각하게 될까. 실제로는 이 두 사람은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그래서 결국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됩니다.
긴 세월 후에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는 그런 악한 감정들만 있겠어요? 좋은 감정들도 있게 됩니다. 그러면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면 반갑게 됩니다. 악한 마음들을 가지게 됐을 때는 돌아서게 됐지만 그런 마음이 희석되고 나면 두 사람이 만나면 “아이고, 참 반갑다”. 인사하기도 하면서 옛날얘기들도 자연스럽게 합니다. “왜 너는 옛날에 그렇게 나에게 나쁜 마음을 가졌느냐?” “나는 그런 적 없었다.” 오해가 풀리는 거라. 돌아와서 저 사람에게 그럽니다. 몇십 년이 흘렀지만 “왜 우리에게 그렇게 이간질시키는 말을 했느냐?”는 거라. 큰 결과를 받게 되는 거라.
일어난 행위들이 결과를 만들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자꾸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들은 원인을 지었으면 결과를 받게 돼있으면 좋은 원인을 지으라는 거라. 좋은 공덕들을 쌓아라는 거라. 지금 할 수 있는 좋은 공덕들을 쌓을 수 있고 좋은 원인을 지을 수 있는 것들을 더욱더 자꾸 하라는 거라.
지금 현재 어리석음으로, 또 악한 감정으로 인해서, 그리고 그런 나쁜 판단으로써 행위를 하면, 말을 하든 생각을 하든 행동을 하든 행위를 하면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자꾸 줄여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든지 자꾸 크게 보고 서원을 세워야 됩니다. 이생에서만 끝날 거로 생각하고 서원을 세워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지금 부지런히 노력하면 이생에서 해탈할 수 있다. 그것은 맞습니다. 그렇지만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 오로지 수행만 해야 된다고는 얘기를 안 합니다. 공덕을 쌓는 일들에 등한시하지 말아라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이렇게 좋은 판단 그리고 바른 지혜로 판단하는 것이, 가장 바르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길 따라 나아가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반드시 하시기 바랍니다.
서원은 여러분들이 해탈에 이를 때까지 나아가야 되는 것들이라는 생각을 반드시 하시기 바랍니다. 이생에서만 서원으로써 생각을 하지 말고, 두고두고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그 서원 따라서 행동하고 나아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테라와다불교의 진심 : 담마스쿨'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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