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2020년 안거해제_수계명 설명 (20201031)

담마마-마까 2022. 6. 4. 12:04

https://youtu.be/se4-5yAYs1g

* 2020년 안거해제_수계명 설명 (20201031)

(7:36 부터 녹취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다 수계사 이름이 뭔지 압니까? 빤냐와로 입니다.

그리고 본인 이름은 수간디, 아마따, 도와나 그렇습니다.

자신의 법명과 수계사, 스승의 이름은 반드시 외우고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수간디'는 원래 한국에서는 그걸 '백수련'이라고 그렇게 얘기들을 하거든요.

수련 중에서 흰 수련을 얘기하는데, 테라와다의 원래 의미 자체 수간디는 백수련만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원래 의미는 "좋은 향기"라는 그런 뜻입니다.

 

좋은 향기가 나는 데는 뭐 전단향도 있을 거고, 뭐 말리화도 있을 거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단지 한국에서는 백수련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면, 아무래도 수련이나 연꽃은 더러운 것이 안 묻죠. 더러운 것이 안 묻고 깨끗한 것들이 묻는다는 뜻으로 좋은 일들을 많이 하면은 좋은 향기가 난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 백수련에다 비유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꼭 백수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간디라는 것에는 그냥 의미 그대로 빨리어 그대로 좋은 향기가 난다, 이런 뜻이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어떤 것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고유의 향기나 냄새가 있습니다. 뭔 일을 도모를 하면 보통 우리는 뭐라 그래요? “야, 저기 냄새난다” 그렇게 얘기를 하죠. 어떻게 알까? 느낌으로, 그리고 코로 냄새를 맡게 됩니다. 그래서 동식물들 사람을 비롯한 동식물들 중에서 가장 예민한 게 이 코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코로서 향기를 맡는 것.

 

스님이 출가하기 전에 어릴 때 할머니 영향을 참 많이 받았는데, 고성에 가면 옥천사라고 하는 데가 있습니다.

옥천사 거기 산내 암자에 항상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할머니가 꼭 가가지고 법당 청소를 했어요. 법당 청소하고 나오면서 항상 하는 얘기가 "참 좋은 향내가 난다" 합니다. 향기와 냄새가 난다는 뜻입니다.

그냥 향만 피우는 냄새에다가 사람이 드나들면서 묻은 냄새까지 어울려져가지고 그걸 '향내 난다'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절이, 사람이 가지 않는 곳에서만 향기가 나면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사람이 드나들면서 거기서 자연스럽게 향내가 풍기게끔 되는 거라.

 

예를 들어 볼게요. 여러분들이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을 하면 사람들이, 다른 상대방이 그걸 받아들이면서 아, 참 기분이 좋은 사람도 있고, 기분이 나쁘게 받는 사람도 있고 그렇습니다. 내가 선한 의도로써 말을 하면은 대부분은 기분 좋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쁜 말을 한다든지 악한 의도를 가지고 말을 하면은 상대방은 당연히 기분 나쁘게 받아들입니다.

그게 향기라는 겁니다. 가장 손쉽게 밖으로 표출되는 게 말입니다.

언젠가 대구에서 법문을 하면서 "말은 방사능과 같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진짜 조심하지 않으면 남에게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부처님 당시 때 아난다가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바람이 요~렇게 이 방향으로 불면은 꽃향기가 요쪽에 있는 게 요쪽으로 갑니다.

이쪽으로 거슬러 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난다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바람을 거스르거나 바람하고 관계없이 온 사방에 퍼지는 향기가 뭘까?

뭐일 거 같애요? 어떤 향기든지 바람을 거스르는 것은 없습니다. 그게 쟈스민 향이든, 아니면 연꽃 향이든, 무슨 향이든, 아니면 여기 일반적으로 절에서 피우는 뭐 전단향이든 무슨 향이든 바람을 거스르는 재주는 없다는 거라.

그럼 바람 부는 반대편에 내가 있으면 그 향은 못 맡는다는 거라. 반대편뿐 아니라 온 사방에 있는 사람들이 그 향을 맡을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부처님이 뭐라 했느냐면, "사람에게서 풍기는 향은 바람을 거슬러서 온 사방에 두루두루 퍼진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 좋은 마음을 받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그 사람을 보고 부정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통 스님은 다른 사람들하고 접촉을 잘 안 하기 때문에, 접촉하는 게 대부분 전화로 접촉을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뭘 부탁을 해도 전화 상으로 들리는 향기가 안 좋으면은 그게 아무리 좋은 거라고 하더라도 스님은 응하지 않습니다. 바람을 거스를 뿐 아니라 그 사람이 풍기는 향내는 계속 축적되고 쌓여오는 것들입니다.

 

수계증 맨 앞에 한 번 보실래요? 수간디 님이 한 번 맨 앞에 부분을 읽어보세요.

 

「세 가지 의지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붓다, 담마, 상가는 그 비할 수 없는 청정함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고 공경받을 만한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 삶의 안내자로서 삼보에 귀의하며 이로 인해 불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계의 이익을 누가 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중생의 번뇌의 때는 어떤 강물로도 씻어낼 수 없고, 욕망의 불길은 어떤 빗줄기나 바람으로서도 잠재울 수 없으니, 먼저 깨끗한 지계의 시원한 공덕수로 씻어내고 잠재워야 합니다.

이러한 지계의 향기는 바람까지도 거슬러서 온 세상에 퍼져나가고, 계를 잘 지킨 이는 자기 몸을 스스로 보호하며 관찰하여 편안한 기쁨을 가져오고 항상 맑은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예. 잘 했습니다. 바람을 거스르는 게 뭐라고요?

착한 이, 그러니까 선한 일들을 자꾸 하는 사람들은 바람을 거슬러서 향내가 자꾸 두루두루 퍼지고, 계를 잘 지키는 사람은 어떤 향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계의 향만 못하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지켜야 하는 오계, 또 때로는 팔계, 그걸 잘 지키는 것이 몸에 향기가 나도록 하는 겁니다. 좋은 향기가 나도록.그 향기는 말을 통해서 밖으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마음이 담긴 따뜻한 말, 자애가 가득 담긴 언어들, 그런 향기는 멀리멀리 가고 오래도록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를 담은 게 이 '수간디'입니다.

'수'라고 하는 것은 '좋다'는 의미이고, '순리대로 잘 풀려나간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간디'는 '간다'라고 하는 '향기'라는 뜻입니다. 좋은 향기 나는 사람이 되도록 더욱더 열심히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두 번째, '아마따'

아마따님은 '불사'라는 뜻입니다. '죽음이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죽음이 없는 거는 뭘까? 안 죽을 수 있습니까? 반드시 죽죠. '열반'을 보통 다른 말로 지칭할 때 '죽음이 없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보통 이런 그냥 노지 같은 데다 이렇게 버려뒀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썩어갑니다. 누군가가 사람들이 다니면서 그 모습을 보면 되게 기분 나빠합니다. 요즘은 그렇게 안 하죠. 사람이 돌아가시면 먼저 더러운 것부터 먼저 씻깁니다. 그리고 몸도 이렇게 화장을 하고, 깨끗한 옷을 입히고, 그리고 냄새가 안 나도록 뭔가 조치를 취하고, 인위적으로 불쾌한 것들을 멀리하려고 자꾸 조작을 합니다.

 

어떤 것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고, 이래하든 저래하든 죽음을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걸 거스를 수 있을 것 같으면 참 좋겠지마는 어느 누구도 죽음을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열반에 들기 전에는 어떠한 경우든 원인을 지었으니깐 또 윤회를 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쳇바퀴를 돌듯이 윤회를 하게끔 됩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럼 죽음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기피하고 멀리해야 할까? 아니면 받아들여야 할까? 어떤 게 맞을까? 받아들여야 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죽음은 받아들여야 됩니다.

 

며칠 전에 스님이, 여러분들 여기 많은 사람들이 대구에서 왔는데, 대구에 수성구 쪽에 무슨 그 병원인지 모르겠는데, 거기 누가 아는 분이 돌아가셔가지고 갔다 왔어요. 요즘은 오래도록 다들 머물지를 않습니다. 병원에. 다들 마스크 쓰고 그래하는데도.

스님이 아침에 갔는데 사람들이 없어가지고 거기서 조금 머무르고 있다가 왔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그걸 두려워합니다. 돌아가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렇게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더욱더 그걸 자꾸 회피하려고 합니다. 나도 죽는다는 사실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거기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죽음은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지, 남의 죽음만 받아들이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은 그건 참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본인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 때 지금 살아가는 것이 보여진다는 겁니다.

 

하나 더 얘기를 할까요? 자식들 장성하면 어떻게 돼요? 떠나가죠. 떠나가야 되는 운명입니다. 그거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으면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고부간의 갈등이든 뭔 갈등이든. 떠난 자식은 떠난 자식으로 대해야 되는데 '내 자식'으로 대하는 거라.

여러분들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가지고, 경제적인 피해를 입었을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집니다. 변해가고 떠나가야 되는 것들인데 받아들이지 않으면은 힘들어. 정신적으로도 힘들고, 그게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죽음은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지 부정하려고 하고 회피하려고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따님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열반을 증득하고 싶다. 빨리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죽음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면 죽음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아주 가까이에, 바로 내 옆에, 내 숨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그 찰나 간에 죽음이 있다는 생각을 경각심을 자꾸 가져야만이 내가 좀 더 분발해서 열심히 살 수가 있게 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아주 평온하고 고요해집니다.

경전에는 '산체따'라고 하는 사미의 예를 들어서 설명을 아주 잘 해놨습니다.

경전에 그 사미를 검색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함을 가짐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이익이 있게끔 만들고, 본인도 그 죽음으로부터 피하게 되는 상황을 잘 설명해 놨으니까 경전을 좀 참고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도와나'

깨끗하게 잘 씻습니까? '깨끗하게 씻는다'는 의미가 이 도와나의 의미입니다. 경전 그대로 문구 그대로 해석을 하면. 보통 그걸 부처님 당시 때 자이나교나 뭐 힌두교, 바라문교 쪽에서는 '세정의식'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람이 죽고 나서 하는 의식들. 우리 지금 의식하고 별반 차이나는 것이 없습니다. 몸을 깨끗하게 씻기고, 잘 입혀가지고 그리고 땅 같은데 매장을 합니다. 매장할 때 물 같은, 수맥 같은 걸 잘 살피죠. 잘 살펴가지고 시신이 잘 썩을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듭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뼈만 남도록 잘 썩기를 바라고 그렇게 합니다. 우리 매장 의식하고 별반 차이 나는 게 없습니다. 바라문의 세정 의식은.

다만 차이 난다고 할 거 같으면, 바라문에서는 거기서 더 나아가가지고 나중에 그 뼈를 꺼내가지고 그 뼈에다가 술을 뿌리면서 슬피 우는 것, 그거 하나가 더 첨가돼요.

달리 얘기하면 기일 때 되면 술잔 붓고 “어머니, 아버지”하면서 통곡하는 거하고 똑 마찬가집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의식이 불교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이나교나 바라문교의 세정 의식과 같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도와나 의식'하고 똑같다는 거라.

 

부처님이 그 모습을 보고 '도와나'라는 의미를 불교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거라. 뼈를 씻고 술잔 붓고 슬피 운다 해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그런 모습이 되지 않을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의미 없는 건데도 그러고 있다는 거라. 꼭 여러분들 얼마 전에 백중 때 절에 가서 기도 올리고, 기일 되면은 또 기일 제사하고.

 

부처님이 봤을 때는 아무 의미 없다는 거라.

본인만 또 그러면 괜찮은데, 따라 하지 않으면 막 분란을 일으킵니다. 그게 며느리든 뭐든 간에. 부처님이 봤을 때 그거는 잘못된 견해라는 거라. 참 잘못된 견해.

그럼 부처님이 말한 그 잘못된 견해는 뭐로 인도할까?

부처님이 봤을 때는 그거는 어떤 경우든 열반으로 인도하지도 않고, 오히려 선한 결과를 낳지도 않는 거고, 오히려 사람들 간에 좋은 관계를 만들어 주지도 않는다는 거라.

여러분들 하는 거 보면 딱 그대로 입니다.

그거는 견해가 잘못됐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낳는다는 거라. 저속하고 비열하고 좋은 결과를 낳지도 못하고, 서로 간에 좋은 마음들을 가지게 하지도 못하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본인이 뭐 선업을 짓는다든지 그런 것도 아닌 거고. 왜 그러냐는 거라. 그건 나쁜 견해라고 딱 못 박아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하는 도와나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견해로 인도하는 것을 도와나'라고 그렇게 얘길 합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견해가 생겨날까? 부처님이 얘길 합니다.

"여러 가지 유익한 법, 선법들을 닦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팔정도의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사마디,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바른 지혜.

그걸 닦으면 바른 견해가 생긴다는 얘깁니다.

삿된 견해가 도와나가 아니라, 바른 견해로 인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청정하게 되는 것, 그게 불교식 도와나 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가 있다는 거라.

남한테 좋은 말 할 것 같으면 좋은 결과 있게 되는 거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잘 살아가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한테 누가 과연 손가락질할 수 있느냐는 거라. 여기서 말하는 사띠, 사마디, 빤야-지혜라고 하는 것들은 수행을 통해서 하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수행을 통해서 할 거 같으면, 수행을 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탐··치라고 하는 것들을 씻쳐버리게 되는 거고, 없애버리고 소멸시켜버리게 되는 거고, 그게 도와나 이다"라고 부처님은 결론을 내립니다.

 

쓸데없는 의식으로 인해가지고 시간 낭비할라고 하지 말고, 쓸데없는 선하지 않고 불선한 업을 자꾸 짓는 것들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선한 업 선한 것들을 자꾸 행함으로 인해가지고 유익한 선법들을 자꾸 증장시켜 나갈 때, 그것은 불교적인 도와나를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오늘 세분은 수간디, 아마따, 도와나라는 그런 법명을 받았습니다.

잘 받아 지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