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2020년 까티나 축제_꾸시따와 빠맛따의 차이(20201101.담마와나선원)

담마마-마까 2022. 6. 7. 09:00

https://youtu.be/Vzkj_9SqEeM

* 2020년 까티나 축제_꾸시따와 빠맛따의 차이(20201101.담마와나선원)

 

가사를 받은 스님들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되고, 가사를 올린 재가자 분들도 가사의 소중함을 알아야 되는 날입니다.

아난다 존자한테 일러서 가사를 만들었죠? 논과 논두렁을 본떠서 가사를 만들어봐라 해서 지금의 '조의'가 생겨났습니다. 그전에는 '빵수꿀라(paṁsukūla)' 라고 해가지고 버려진 헝겊 주워가지고 꼬매가지고 가사로 썼었습니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에 가면 논두렁을 지나갈 때에는, 거기에 벼가 심어져 있으면 우산을 접어버립니다. 우산을 안 쓰고 갑니다. 소중함을 알아라는 뜻으로써 지금도 그렇게 많이 합니다. 대도시에는 그런 게 없는데, 시골로 내려가면 지금도 벼를 밟지도 않을 뿐 아니라 벼가 자라고 있는 논두렁, 논에서는 우산조차도 쓰지 않습니다.

 

오늘 법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꾸시따(kusita)' 하고 '빠맛따(pamatta)'의 차이입니다.

보통 이걸 '게으름 부린다, 방일한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런데 빨리어 용어에는 분명히 두 개를 구분해서 씁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아, 뭐하기 싫어” 뭘 하기는 해야 되는데 할 일은 틀림없이 있는데 하기 싫어할 때, 그럴 때는 '꾸시따'라는 용어를 씁니다. 보통 그걸 한국말로 번역을 하면 '게으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뭔가를 하긴 해야 되는데 하기 싫은 마음이 앞서가지고, 뭔가를 하고 있는데 실수를 자꾸 하고 있거든. 그럴 때는 '빠맛따'라고 합니다.

실수를 안 해야 되는데 실수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정신차려 가지고 그 일을 했으면 실수를 할 일이 없을 건데 정신을 안 차렸다는 거라.

그래서 빠맛따를 쓸 때는 보통 지금 현재에 마음이 가 있지 않고 과거에 가 있든지 미래에 가 있는 경우에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자, 여러분들 수행자니까, 코로나 핑계 대고 수행하기 싫죠? 그럴 때는 뭐 써야 돼요? '꾸시따' 써야 됩니다.

수행하고 있는데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계속 관찰되고 그게 변하는 게 안 보인다, 그럴 때는 왜 그런 거예요? 현재에 마음이 가 있지 못하니까, 변하는 걸 못 보고 있으니까 그건 방일에 해당이 됩니다. 그때는 '빠맛따'입니다.

 

방일이 되었든 게으름이 되었든 부정적인 것은 꼭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일상에서 게으름 부리는 거랑 수행하면서 수행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자신은 알아차리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도 방일의 영역에는 들기 때문에, 결코 선한 마음의 영역에는 속하지 못한다 하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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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맛따를 보면 "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 할 때의 '압빠마다'는 알죠? 빠맛따의 반대말이 압빠마다 입니다. 불방일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불방일은 뭘 얘기합니까? 열심히 현재의 대상에 마음이 가서 그것을 알아차리는 걸 불방일이라고 합니다.

 

자! 그러면 물어볼게요.

지금 현재의 대상에 빠맛따를 안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방일하지 않고 나는 수행 대상을 잘 알아차리고 있다고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뭔가 새로운 게 확 나타났을 때? 아니면 니미따가 확 나타났을 때? 아니면 선정에 든 것처럼 해서 몇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확 지나가 버렸을 때? 언제일까?

대답을 해 봐요, 대답을. (수행자 : 사띠를 하고 있을 때)

예, 당연히 사띠할 때지. 사띠를 제대로 하고 있으면 어떤 현상들이 일어나요? (수행자 : 현재만 압니다)

그러니까 현재에 머무니까 사띠를 하고 있는 거지.

현재에 머물고 있는데, (수행자 : 사띠가 끊어지지 않을 때)

사띠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건 삼빠자나하고 같이 연결된다는 얘기고,

 

그럴 때는 어떤 현상들이 있어요? 변하는 것이 보여? 대상이 변하는 게 보여야 뭐가 될 거 아니라. 숨이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다르다는 걸 알아요?

들이쉬는 숨에는 들이쉬는 숨만 있는 것이 아니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들이쉬는 호흡하고 그걸 관찰하는 마음하고 다르다는 것들도 알고,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될 거 아니라. 똑같은 것이 아니고.

 

그래서 지금 자신이 빠맛따에 빠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 기준을 딱 잡아야 됩니다. 세 가지로 얘기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예를 든 거, 몇 시간 동안 시간이 훅 지나간 것처럼 사마디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탐심입니다.

대상이 변하는 것 없이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만 알아차리고 있다, 마음을 관찰하고 있는데, 성냄이 일어났는데, 성냄이 그렇게 크게 확장도 안 되면서 쭉 지속하고 있는 걸 관찰하고 있다. 그것도 탐심입니다. 아니, 진심의 영역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면은 그 성냄은 사라지든지, 아니면 다른 진심이 일어나든지. 뭔가가 바뀌어야 됩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탐··치로 대상을 왜곡하지 않는다.

탐·진·치가 일어나면은 그 탐·진·치는 어떠한 경우이든지 스스로 독립해 있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자아(自我)라고 하는 것이 딱 결합되어 있습니다.

'난 수행 잘하고 있어' '두 시간 동안 고요하게 있으니까 나는 행복해'

탐심만 있을 거 같으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자아가 딱 결합을 해 버리니까 이게 그냥 접착제의 역할을 해가지고 탐·진·치로써 수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본인은 수행을 잘했다고 착각을 합니다.

 

빠맛따에 빠지지 않는 법 첫 번째, 항상 수행할 때 먼저 여러분들이 체크를 해야 될 포인트가, ··치 없이 대상을 왜곡하지 않는 것.

대상이 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는, 삼매의 영역으로 들어갔을 때, 상수멸정의 영역으로 들어갔을 때 오로지 하나의 대상만 있게 됩니다.

그때 외에는 그게 뭐 삐띠가 일어났든 아니면 여러 가지 대상들이 일어났든 간에 다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띠가 강하냐 약하냐에 따라서 빠르게 변하는 걸 알아차리든 천천히 변하는 걸 알아차리는 것뿐이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래서 빨리 스스로가 알아차려야 됩니다.

아, 내가 지금 탐심으로 수행하고 있구나, 진심으로 수행하고 있구나, 아니면 수행하기 싫은 마음들, 아니면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들만 찾고 있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 가지고 그것을 놓아버리고 나서 대상을 알아차리도록 해야 합니다.

대상이 왜곡되어 버리면 안 됩니다, 수행에서는.

어떤 대상이든 무상한 성품을 벗어나는 대상은 없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잘 빠지는 것 중에 하나가, 앉아 있으면 자신이 스스로 판단합니다.

‘아, 이거는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 ñāṇa) 구나. 아니면 이거는 나마루빠의 영역에 속하는구나’

왜 그러고 있는데? 수행할 때 사띠를 놓치지 않으면 그걸 할 수가 없습니다.

사띠를 놓치니까 지금 쓸데없이 그걸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와가지고 스님들한테 “스님, 나 뭘 경험했습니다” 하고 얘길 합니다. 그 사람이 그걸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경험했을 경우에 그 지혜의 영역을 경험했을 때는, 절대로 그 지혜의 영역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빠지기 쉬운 게 두 번째가 뭐냐면 쓸데없는 판단을 한다는 거라.

수행할 때 어떠한 경우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전부 망상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냥 머릿속에서 망상을 피우는 것하고 수행 대상에서 내가 지금 '이게 뭐다' 하는 걸 알아차리는 것하고 망상의 영역에는 똑같습니다. 어떠한 경우이든지 '지금 현재 어떤 상태라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은 수행하는 도중에 하지 말아라는 거라.

 

본인이 안 해도 수행 스승들이 점검을 해줍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수행이 끝나고 나서 좀 한갓질 때 본인 스스로 아, 추리를 해 봅니다.

'아, 이건 이랬구나, 내가 이것을 분명하게 경험했구나' 하는 것을 그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수행하면서 그걸 하면 안 된다는 거라.

마찬가지로 두 번째가 쓸데없이 판단하지 않는 것.

그러면 (판단해버리면) 이 사람은 빠맛따에 해당이 된다는 거라. 게으름 부리는 거하고 방일하는 거하고 똑같은 상태가 돼버립니다.

 

다음에 세 번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 어떻게 될까?

무상··무아의 성품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알아차리는데 무상하든지 고든지 무아든지 이 세 개의 특성으로 알아차리지 않으면은 일단은 지금 현재는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거라.

 

물론 초창기 때는 각각의 선원에서는 각각의 방법으로 대상에 몰입하는 방법들을 가르쳐 줍니다. 그때는 어쩔 수가 없어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수행이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될 거 같으면 어떠한 경우든지 대상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집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지 못하면 다시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고 나서 대상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이지,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띠는 왜곡되어 있다는 거라. 그래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빠맛따의 영역에 속한다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기억을 하고 있다가 방일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됩니다.

 

스님은 그냥 그걸 그냥 일상적으로 얘길 합니다. “또 게으름 부렸지, 너?”

게으름 부리는 일이 없도록. 이왕 수행을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수행을 제대로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일어나는 대상, 그게 몸이든 마음이든 있는 그대로 명확하게 알아차리면 참 좋은데, 애초부터 그러면은 그런 마음이 안 생기는 사람은 어떡할 거라?

수행할려는 마음이 안 생기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돼요? 포기해버려요?

 

“그냥 너는 뭐 선업 공덕이나 지어라.”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냥 편하게 좀 살다가 악행이나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얘기해야 돼?

어떻게 해 줘야 돼요? (수행자 : 올바른 원인을 지어야 되지 않을까요?)

원인이 뭔데요? 왜 하기 싫은데요? 수행을 몰라서 하기 싫은 거라요?

수행하는 방법은 알 거 아니에요?

아예 수행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방법부터 가르쳐주어야 되는데, 수행하는 방법은 아는데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지금 해야 될 일들에 바빠가지고 수행할 시간이 없다든지, 뭔 어떤 핑계를 대든지 수행하고는 자꾸 멀어지려고 그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돼요? 그대로 괜찮아요? (수행자 : 끝까지 스님들이...)

그런 사람들은, 여기는 없겠지마는, 없죠? (수행자 : 예) 없을 거라고 봅니다.

 

항상 명심해야 되는 게

첫 번째, 나 이대로 괜찮아?

이대로 괜찮느냐는 거라. 이 몸 받고 태어나가지고 그래도 밥이라도 먹고 살고 있는데, 다시 이 몸 받아 태어나서 수행해가지고 해탈할 자신이 있느냐는 거라.

이대로 괜찮다면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이대로 괜찮지 않으면 수행을 하라는 거라.

마음을 빨리 일으켜야 됩니다. 내가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건지.

 

그다음에 두 번째,

수행하고 자꾸 멀어지면 뭐가 자꾸 일어날 것 같아요? (수행자 : 번뇌가 자꾸 많아집니다)

번뇌가 자꾸 일어납니다. 그냥 번뇌 그대로 다 받고 살아도 괜찮아요? (수행자 : 아니요)

거 왜 그래, 그럼? 그래서 두 번째가, 번뇌를 받는다는 건 쉬운 말로 할 것 같으면 감정의 노예가 된다는 거라.

내가 그 감정의 노예로 살아도 좋은가?

 

이대로 살아도 좋은 건지를 물어보고 나서, 두 번째로 택해야 되는 게 감정의 노예로 살아도 괜찮느냐고 물어보는 겁니다.

본인에게 물어봐요. 감정의 노예로 살아가지고 좋은 게 뭐가 있는지. 하고 싶은 거 막 하지? 그거 계속할 수 있으면 그냥 해도 되는데 그렇게 될 방법이 없다는 거라.

싫은 것들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왜 그 노예로 살려고 자꾸 하느냐는 거라.

왜 그대로 따라가느냐는 거라.

 

그다음 세 번째,

수행 안 하고 살면 행복하고 좋을 것 같죠?

수행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계속 이생 뿐 아니라 다음 생에까지 어떤 상태로 바뀔지도 모르는데 그 고통을 계속 받고 싶어요?

고통받고 싶은가? 하는 것들을 체크 하고.

 

이 세 가지를 자꾸 자기 스스로 체크를 해가지고, 수행하고 자꾸 뒤떨어지면 스스로 자꾸 분발하도록 만들어야됩니다.

 

처음에 세 가지는 수행하다가 수행이 잘 안 될 때 스스로 체크하도록 하고.

그래서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자꾸 만드는 것이 여러분들이 해야 될 몫입니다. 특히, 대승 불자일 거 같으면 그냥 기도하라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테라와다, 부처님의 직계가족이라고 하는 테라와다를 믿고 있는 재가자들이고 수행자들입니다. 어떠한 경우이든지 테라와다는 실천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은 사실 축제의 날인데, 그런데도 여러분들한테 마음을 좀 되새겨주고자 해서 그런 얘기를 하게 됐으니까 잘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 열심히 공부할 거죠? (수행자 : 예)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