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시간에 속박되지 마라. (20201010)

담마마-마까 2022. 5. 31. 09:00

https://youtu.be/gje6PMNoD8w

* 시간에 속박되지 마라. (20201010)

 

요즘은 코로나 시대입니다. 금방 그렇게 끝날 것 같지는 않는데,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원에 자주 올 수 있을 때 자주 와서 법문도 듣고 수행도 했으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은 조심스러워서 잘 오질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벌 수 있을 때 좀 더 열심히 벌어놓을 걸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고 .

 

지금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게 딱 하나가 있다면 뭘까? 뭐가 필요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재산'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또 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또 경전에 보면 하나가 뭐냐 하고 물으니까 "영양소" 라고 얘기해서 '영양소'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각각이 있습니다. 뭘까, 여러분은? 하나가 꼭 필요한 게?

 

경전에 소빠까 라고 하는 스님이 있습니다. 일곱살 때 아라한에 들었던 분인데 이분에 대한 주석은 조금 다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임신해가지고 출산할려고 하다가 거의 죽음에 이르는 상태가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은 줄 알고 바로 화장을 할려고 하니까. 천신들이 그 뱃속에 있는 아기가 아라한이 될 아이이기 때문에 화장을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지속적으로 화장을 할려고 하니까 결국은 비를 뿌려가지고 화장을 못하게 해서 나중에는 그 아이를 꺼내서 그 화장장에서 키우도록 그렇게 해서 그래서 이름이 소빠까다 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주석서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작은 아버지가 자신의 어머니하고 같이 살게 되면서, 그러니까 의붓아버지가 되는 거죠. 의붓아버지하고 살면서 여러 가지 핍박도 받고 이러다가 결국 부처님한테 찾아가게 됐어요. 거기서 수다원에 이르렀다가 어머니가 아이를 찾아서 부처님에게 왔을 때 부처님이 하시는 설법을 들으면서 아라한이 됐다는 그런 구절도 있고 그렇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것은 거기서 일(1)이라는 게, 하나가 필요한 게 뭐냐고 물어보는 게 이 소빠까는 '영양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게 주석서에서나 다른 경전에서도 쭉 정형화되다시피 해가지고 영양소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서 필요한 것, 여러분이 몸에서 필요한 것은 어쨌든 음식을 취해야 되니까 그게 몸에서는 필요한 거고, 마음에서는 느낌을 어떻게 관찰할 것이냐?, 그다음에 뭔가 충동질하는 것, 뭔가 사고하는 것들은 어떻게 관찰할 것이냐? 인식하는 것들을 어떻게 관찰할 것이냐? 그래서 마음의 작용에 대한 것들을 하나의 영양소로써 잡고 그렇게 해놓았습니다.

 

그걸 다 뭉뚱그리면 뭐가 될까요? 자비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에 대한 자비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가장 자애롭게 하는 방법, 그리고 지금의 시대에서 또 가장 필요한 것이 이 자애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의 시대에 '과거에 내가 좀 더 뭘 할 걸' 하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 수행하러 온 사람들도 그런 고충들을 많이 얘기합니다.

수행하다가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그 경험을 다시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삼매에 들었으면 다시 한번 더 삼매를 체험하고 싶어하고, 뭔가 좀 이상한 체험들을 했다, 신비한 체험들을 했다, 그러면 그걸 다시 또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경전 구절에 보면 "낫티 까라낭"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한순간도 머무는 것이 없이 변해가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두 번 다시 똑같은 경험을 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본인은 그것에 집착을 하는 거라. 쉽게 말하면 과거라고 하는 시간에 딱 집착이 돼있습니다.

 

그렇게 경험한 사람들은 그게 자기의 사고에 딱 박혀가지고 자기의 견해가 돼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선정삼매를 경험했다, 본인이 경험한 건 주관적인 것인데, 그것이 사실은 진리는 아닌데, 그런데 본인은 그것만이 진짜라고 생각을 하는 거라. 다른 사람은 다른 견해라고 할 것 같으면 틀렸다고 반박을 하게 되는 거라. 경험한 것은 맞는데 진리는 아니라는 뜻이라.

 

그러면 본인이 경험한 것 똑같은 경험을 반복할 수도 없을 뿐아니라, 그것이 진리이지도 않는데 왜 그 경험을 다시 하려고 하지? 속박돼있으니까.

 

수행에서도 이렇게 시간이라는 것에 속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여러분의 일상생활에서 과거의 시간들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 굉장히 많이 있을 겁니다.

왜 속박되어 있지? 그것이 지금 현재의 본인이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기억을 통해서나 여러 가지 상황들을 통해가지고 다시 끄집어내는 것밖에 없는데, 왜 그것에 속박되어 있을까?

"낫티 까라낭" 입니다. 어떤 것도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똑같이 반복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보통 수행 경험에 대해서 문답하러 가면 대부분 스승들이 "그냥 수행해. 숨을 들이쉬는 걸 관찰하면 그냥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관찰해. 그거 그냥 지나가는 거야."

왜 특별한 경험들을 높이 사지 않고 그럴까? 실제 수행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실제 진실한 수행은 그런 특별한 경험들을 하는 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것, 그냥 지금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으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잘한다고 할 것 같으면 가장 좋은 것은 그냥 무덤덤하게 아무런 현상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지금 현재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고 놓아버리는 상태가 되는 것, 그게 가장 수행을 잘하는 것입니다.

“스님 나는 한시간 동안 수행했는데 아무 경험도 못했습니다.”

“현재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 내 형편에 맞게끔 그거 분명히 관찰하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수행 잘한 겁니다. 수행을 아주 잘한 겁니다.

번뇌도 없었고 특별한 경험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내가 사띠의 수준에서는 단지 숨을 들이쉬면 숨을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내쉬면 내쉰다고 알아차리고 그걸 계속 관찰하고 살았습니다. 잘한 겁니다. 숨을 들이쉬는데 '아, 숨을 들이쉬는 게 뭔가 조금 일정하지 않고 변하고 있더라. 아니면 좀 더 길더라, 아니면 미세하더라,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호흡이 없다시피 하더라' 지금 사띠의 수준에서 그게 맞을 거 같으면 그렇게 알아차리면 그게 맞는 겁니다.

특별한 경험이 없어도 그것이 오히려 수행을 잘하는 겁니다.

 

수행에서도 과거의 특별한 경험들에 집착하면 '과거의 시간이라는데 딱 속박'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이 지금 옛날에 어떤 상황이었고 그래서 내가 지금 후회해가지고 '내가 과거에 조금 더 잘했으면 좋았을걸' 왜 거기에 속박됩니까? 속박되지 말아라는 거라. 시간이라는 것에 속박되는 순간 그 사람의 삶은 수행도 제대로 안 되게 되고, 일상생활도 제대로 못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현재 존재하는 것은, 머무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을 하라는 거라.

 

지금 나한테 필요한 것은 소빠까가 얘기했듯이 여러분들에게는 지금은 자애라는 거라. 자애의 마음을 지닌 채 사띠를 하는 거고, 자애의 마음을 지닌 채 말을 하는 거고, 자애의 마음을 지닌 채 행동들을 하는 것들, 그것이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필요한 부분이라는 거라.

 

여러분들 오온에서 일어나는 것, 수행은 오온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든, 아니면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든, 무엇이든 그것들은 흘러가는 것들입니다. 변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에 속박되지 않도록만 하면 가장 좋습니다.

 

그럴 경우들이 있을 겁니다. 옛날에 본인이 살았던 환경들이나 지나온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평온한 법은 없을 겁니다. 그게 기쁘든지 슬프든지 그런 상태가 되지, 평온한 상태에서 옛날의 일들 옛날의 경험들을 떠올리는 경우는 없다는 거라.

마음은 흔들리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를 해서 지금 현재 수행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 마음을 고요하게 해서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충실하게 해내는 것, 그 방법은 자애를 지닌 채 행하는 것들이다 하는 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지금이라는 것들입니다.

 

지금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있다, 그러면은 보통 사람들은 앞으로의 일들을 걱정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 같은 시대 때 가정에서는 가정폭력이 많이 늘어나고 있고, 또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생기면 큰 문제들이 자꾸 발생을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으로의 일들이. 내일 일을 여러분들이 알 수 있습니까? 인과법칙을 분명하게 이해해서 그 인과법칙에 따라서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훤하게 알 거 같으면 좋겠는데 그러기에는 여러분들 힘이 너무 부족하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도 "4가지를 할려고 하지 말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 4가지 중에 하나가 업의 법칙이라는 거라. 세상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도 그중에 하나에 들어가는 거고, 또 부처님의 깨달음이 뭔가 하고 알려고 하는 것도 필요 없는 짓이다 하는 거라. 부처님은 뭐로 가지고 깨달았을까? 삼명일까? 아니면 연기일까? 자기가 그 깨달음에 이르고 보면 알게 되는 겁니다. 그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그냥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 거라. 그리고 삼매에 대한 것 그것도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건 논쟁거리일 수밖에 없는 거라. 꼭 마찬가지로 업의 법칙도 논쟁거리에 지나지 않는 거라.

 

분명히 업의 법칙을 이해하는 상태에 이르르게 될 것 같으면 미래를 걱정할 이유는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이르지 않으니까 자꾸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하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미래를 아는 것, 장래를 아는 것은 단언을 하십시요. 불가능하다! 불가능하다. 여러분도 알 재주가 없고, 스님도 알 재주가 없고, 이 세상에 있는 누구도 알 재주가 없습니다. 점쟁이든 아니면 어느 도사든, 알 방법이 없습니다. 다 유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업의 법칙을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걸 명확하게 경험을 하지 않고 이해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추측은 해내겠죠.

요즘 같은 기후변화를 보면 과거를 보고 쭉 데이터들을 보고 '아, 몇년 후에 지구 온도가 얼마가 올라갈 것이다' 다 예측해내는 것들입니다. 딱 그대로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측은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지은 것들 좋은 일을 행했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었구나, 나쁜 일을 행했으니까 나쁜 결과가 있었구나, 나는 좋은 일을 하면서 행하겠다, 그럼 나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고 예측을 하는 것들입니다. 업에 대해서 이해를 하더라도 그건 충분히 가능합니다.

 

단, 하나가 여러분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미래에 내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죽고 나서 나쁜 데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하는 것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수행을 열심히 해서 수다원에 이르르면 적어도 사악처에는 빠지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됩니다. 내가 얼마만큼 더 윤회를 할 것인지 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 것인지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악처에 빠지지 않는다는 걸 분명하게 안다는 거라. 지금 모습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잘살지 못살지 어떻게 비참할지 부유할지는 모르지만, 죽을 때까지는 적어도 평온하게 살게 되고 죽음 이후에는 사악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만 하더라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없어져버린다는 거라.

 

장래를 걱정해야 될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 추측하고 그걸 준비하는 것에 치중해야 될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해야 되는 것은 내가 아라한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다원에 이르도록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거라. 아직 나타나지 않는 미래 그것은 여러분들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관할 밖의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면 됩니다.

 

단지 나쁜 결과가 올 줄 뻔히 알면서 그걸 행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나쁜 결과는 피하도록 하라." 부처님도 예언을 한 것이 그런 수준입니다.

데와닷따가 부처님을 찾아오니까 부처님이 그렇게 예언을 합니다. "데와닷따는 나를 만날 인연이 되지 못한다." 하고. 왜 그랬을까? 데와닷따가 오는 도중에 부처님 만나고 싶다고 말을 전했는데, 데와닷따는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중병이 걸려서 들것에 실려가지고, 그래도 마지막 가기 전에 부처님이라도 보고 죽으려고 들것에 실려가지고 오는 상태라.

쉽게 말하면 한 두세 시간 전에 전언이 전해져왔는데 부처님이 생각하니까 이 날씨에 그 길을 걸어서 올 거 같으면 저 사람은 틀림없이 나에게 오기 전에 죽음에 이를 것이다고 아는 거라. "나를 만날 인연이 되지 못한다"는 거라. 부처님도 그런 예언을 합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아라한에 이를 것이다? 아니면 이 세상 전부 다 평화롭게 바뀔 것이다?' 이런 예언을 한 적이 없다는 거라. 여러분이 내 말을 따르면 부자가 될 것이다? 허무맹랑한 예언들은 하지를 못한다는 거라. 미래는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나라고 하는 것으로 인해서 장래를 걱정하고 하는 것은 그건 불안감입니다. 불안감으로 인해서 미래라고 하는 시간에 속박되지 않도록 하십시요.

살아있을 동안에 미래가 걱정되고, 죽고 나서의 일이 걱정된다고 할 것 같으면 지금 그런 불안감을 가지는 것보다 오히려 해야 될 것은 지금 현재를 열심히 알아차리는 것, 사띠하는 것, 그것 이상 가는 장래의 약속은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점점 더 내가 언제 죽을 것이다 하는 것들도 알게 되는 것이고, 또 내가 장래에 나의 모습이 어떻게 바뀔 것이다 하는 것들도 알게 되는 것들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좀 더 충실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것에 속박될려고 하지 말고, 지금 현재 해야 되는 것은 지금 반드시 하는 습관들을 가지도록 하십시요.

듣고 있을 때는 듣는 것에 마음을 기울여야 되는 거고, 먹고 있을 때는 먹는 것에 마음을 기울여야 됩니다. 지금 하는 것들을 벗어난 상태에서는 미래든 과거든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속박된 삶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접착제와 같습니다. 시간에 속박되는 것은 여러분들을 잘못된 곳으로 이끌어주는 접착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접착제는 그것이 아니라 무상·고·무아 인과를 분명하게 알도록 해주는 사띠 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항상 살아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